벧전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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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의 소망: 우리의 산 소망

성경 구절: 벧전 1:3–12

여러분 부활하면 어떤 생각이 먼저 떠 오르나요? 두 말할 것도 없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는 의미이고, 성경에서 부활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건을 특정합니다. 그렇게 특정된 사건에 사용된 부활이라는 단어는 인류사에 유사하면서도 결이 다른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철학적으로 자신의 약점, 상처, 과거의 실패를 끌어안고 그것을 자양분 삼아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도약하는 '위대한 용기'로 표현되었고, 문학적으로는 우리가 잘 알긴 하지만 읽어본 적이 없는 톨스토이의 부활에서는 주인공이 도덕적 양심을 되찾는 영적 부활, 그리고 밑바닥 삶으로 추락했던 인간성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인격적 부활로 표현했습니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면 부활은 사실 삶에서 쉽게 사용하는 용어가 아닙니다. 그래서인지 기독교 장례식에 가면 ‘부활 소망’이라는 그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전부를 보는 것 같은 장례 전용 멘트가 되었습니다.
이제 성경의 시대에 그렇게 사용되었는지를 확인해겠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부활이 산 소망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부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베드로가 편지했던 이들의 상활을 알려면 베드로전서 5:13 “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는 말씀에 등장하는 ‘바벨론’이라는 단어인데 이는 당시 로마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시기적으로 60년대를 전후해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대체적으로 62년부터 네로의 박해가 시작되는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네로의 박해 시기에 박해를 피해 지금의 트르키예(터키) 지역으로 도망가서 숨어지내며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이 지배적일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오늘날 죽음은 우리 가까이 있지 않습니다. 보편적으로 늙어서 생을 다하는 죽음, 아니면 병드는 경우와 뜻하지 않는 사고가 대표적입니다. 그런데도 작은 우리 교회에 기도를 부탁하는 이들이 죽음과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합니다.
오늘은 잠시 그 때의 상황과 지금의 간격이 큼을 이해하면서도 그럼에도 베드로가 말하는 산 소망이 되는 부활이 우리 삶에 어떻게 좋음이 되는가를 살펴보려는 것입니다.

1. 생명의 소망 선물

1 Peter 1:3–5 먼저 3-5절은 예수의 부활 사건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신 것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풍성한 긍휼을 따라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를 믿게 된 이유가 하나님의 ‘풍성한 긍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흔히들 윗사람들에게 인사를 할 때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반면 이걸 모르면 ‘배은망덕’하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풍성한 긍휼’이 뭐예요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입니다. 부활의 대상이 예수이시고, 그렇게 하신 분이 3절에 ‘아버지 하나님’이시죠. 눈치를 채셨다면 ‘아버지’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아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직역을 하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이신 분’이 됩니다.
아들처럼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친구’냐, 아니면 친척이거나 가족이라면 그런 관계에 따라 누리는 것처럼 ‘우리 주’ 우리가 주님이라고 부르는 분 예수님이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에 있다는 고백을 의미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써 긍휼하심을 받아 부활하심이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 긍휼과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분명하게 ‘부활하심을 통하여’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산’이라는 단어인데 살아있는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를 이해하려면 다시 살아난 나사로를 생각해보세요. 분명 다시 살아났죠. 그러니 부활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부활’의 의미를 모두 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죽는다’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산’이라는 표현은 생명이 계속되는 의미를 특정하는 단어인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은 계속되는 생명이 있음을 누리는 상태를 부활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생명 있음을 4절에 ‘썩지 않고, 더립혀지지 않고 시들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유업이라는 표현은 앞서 관계로 연결되는 ‘너희를 위하여’ 이어서 영원성을 상징하는 ‘하늘에 간직한 것’ 입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영원성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연결되는 유업으로 영원한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 테테레메넨 / 지키다 보존하다는 완료 수동태로 이미 일어나 완벽하게 유지되고 있는 상태를 설명합니다. 예를 들어, 통장에 찍힌 숫자는 언제든지 맡겨진 은행에서 찾을 수 있는 것처럼, 통장이라는 종이의 숫자가 보존성, 지켜지고 있는 현재도 유효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좀 더 갖다 붙여 보겠습니다. ‘믿음을 통하여는 통장을 들여다 볼 때마다/ 현재도 유효한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보호하심을 받고 있다’/ 예금자 보호법에 의해 안전하다’ 라는 식이 되겠죠. 너무 깊이 빠지지 마시고 이해를 위한 것에 불과한 것이죠. 특히 ‘프루루메누스’가 바로 보호받는다. 요새화하여 지켜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때가 되어야 꺼내는 것이 아니고 언제든 우리는 ‘부활’이라는 통장을 열어 그곳에 있는 구원이라는 영원하며 확실하게 보호받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것은 어쩌면 손에 들고 있는 통장을 열어 보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자꾸 우리가 통장에 십원이라도 내가 쌓은 것처럼 말하는데 이건 아닙니다.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으로 ‘그래 구원은 네거야’라고 인정해주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구원을 즐기고 언제든 달라고 손을 뻗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먼저 시련 속에서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2. 시련 속의 소망

6절부터 9절에 그 내용을 다룹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합니다. 첫 번째가 ‘여러가지 시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성경은 시험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원문에서는 ‘엔 호 아갈리아스테(크게 기뻐하다, 환호하다), 기뻐하라는 말이 먼저입니다. 앞에서의 구원과 소망안에서 ‘여러분은 크게 기뻐합니다’라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올리곤(잠시, 약간) 으로 이어지는 근심이(뤼페덴테스) 약간이라는 시간에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외부적인 환경에 의해서 그렇다는 형태로 표현했습니다. 마치 오늘 현실을 보면 명백하게 이스라엘과 미국이 벌인 전쟁으로 인해 전 세계를 혼동에 빠져 들게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필요한 중요한 말씀이 ‘에이 데온’입니다. 번역하면 ‘만일 필요하다면’인데요. 이 부분이 우리가 신자인지 아니면 세상에 속해서 살아가는 사람인지를 분별하는 중요한 문장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영적 영단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라는 인식입니다.
예를들어, 최근 전쟁으로 인한 위기를 대통령이 ‘소나기가 아닌 폭풍우’라고 인식하고 ‘선제 대응’을 해야 할 필요성을 말했습니다. 지금 상활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대응이 달라진다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세상의 사람들도 지혜롭게 하는 것을 당연하듯 ‘연단의 상황’으로 인식하고 하나님께서 만일 필요하다면 하는 신자다움의 사고가 따라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자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바라 보는 ‘또 하나의’ 시선이 부활에 담겨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죠. 어떻게 비신자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남을 믿겠습니까? 우리는 부활을 바라보는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베드로는 확실하게 ‘기뻐할 수 있다’, ‘기뻐해야 한다’라고 먼저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이 ‘만일 필요하다면’이라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뺀 상태로 세상을 보니 이 땅에 발 붙이고 영원토록 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오해가 자신들의 것이라고 착각하고 지키겠다고 이들이 선동하는 형태로 한국교회도 흘러 간 것을 저와 여러분이 목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연단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이 7절에 있습니다. ‘너희의 믿음의 확실함이 불을 통하여 연단된다’는 과정입니다. 그런 과정은 불멸할 것 같은 금도 없어집니다. 그렇지만 더 귀한 것인 믿음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칭찬과 영광, 존귀로 발견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그렇게 하게 하려 한다’는 ‘히나..휴레데’라는 표현이 마치 어려움 속에서도 성실하게 훈련하고 자신의 실력을 갈고 닦은 이들이 때가되면 드러나서 그 값진 것이 발견되는 것처럼 그렇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내가 잘나고 돋보이고 싶어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시대입니다. 나를 홍보하는 시대에 진짜는 흔히 말하는 ‘진정성’이 드러날 때 비로소 진가가 빛을 발한다는 표현이 그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8절에 예수를 보지 못했지만 사랑한다는 것은 팬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는 앞서 ‘또 하나의 시선’을 가진 이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교회 용어로 육신의 눈이 아니라 영적인 눈이 열렸다 하는 말이죠.
여러분에게 교훈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나 열리는 ‘시선’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설교를 열심히 듣는다가 아니라 이어 나올 표현처럼 부지런히 살펴 보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영광스럽게 된 기쁨으로 크게 기뻐한다’는 곳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말씀이 꿀송이보다 더 달다라는 표현 기억하십니까? 이 말이 9절입니다. ‘코미조메노이 토 텔로스 테스 피스테오스 [휘몬] 소테리안 프쉬콘’ 여러분이 믿음의 결과(목적), 곧 영혼의 구원을 (지금)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는 권면과 위로이기 때문입니다.
흔히들 구원을 죽으면 천국에 가는 이 땅이 아니라 저 세상의 이야기처럼 말합니다. 흔히 ‘지금’ 받았다 하면 눈에 보이는게 없는데 뭔소리냐 합니다. 그레서 여기에 얻다, 받다, 수확하다는 ‘코미조메노이’라는 단어가 수동, 능동도 아닌 중간 형태로서 현재 우리가 누리는 자는 알고, 들을 귀 있는 자는 듣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현재의 삶에 어긋남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잘 될거야, 이만하면 잘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너를 위하고 사랑하는 과정을 겪어갈까 하면서 방향을 잡고 나아가려고 하는 ‘살았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입니다. 왜내하면 ‘토 텔로스’라는 단어가 궁극적인 목적점, 완성되고 결승점이 있음을 알기 때문이죠.
이런 표현을 우리가 모른다고 말하면 안됩니다. 주변에 힘들고 낙심한 사람들에게 ‘거봐 니가 노력을 그것밖에 안해서 결과가 그런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글을 올리는 sns가 그걸 보여 주잔아요. 댓글로 팩폭하고 심하면 언폭이라고 바로 그거잖아요.
그런데 사실은 괜찮아라고 위로하고 인생에 그게 전부가 아니야, 또는 아직 인생 다 산거 아니고 다른 길도 있어라고 말해 줍니다. 왜죠, 못해서 그런 결과라는 팩트보다 그렇게 말함으로써 때론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는 이별 속에서도 소망을 바라고, 뼈아픈 탈락이나 실패에도 위로하면서 다시 용기를 얻는 과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현재의 누림’처럼 우리에게 ‘부활’의 의미가 늙음과 죽음 그리고 깨어진 관계를 붙잡고 여전히 시간이 있음을 감사하고 손잡아 주고 따뜻하게 말해주는 원동력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소망에 이야기를 베드로는 현재 고통받는 이들에게 부활은 그런거야 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3. 소망의 성취 이야기

벧전 1:10–12
그리고 베드로는 ‘예언했던 선지자들이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라고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찾다’ 제테오 동사가 우리도 그렇게 부지런히 찾고 찾아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나이가 들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증상, 태도가 있습니다. 남에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교회에 와도 여전히 옷만 갈아 입었지 시간이 지나면 쉽게 그런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심리학에서는 인지와 방어 기제라고 말하고 이유를 자아 통합이 살면서 붕괴된 절망이 그렇게 나타난다고 진단합니다. 철학에서는 자기 고독에 빠져 즉 누구도 날 이해하지 못해라고 하면서 ‘자기 기준’을 더 견고하게 세우는 자아 수호의 형태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어울리지 못하고, 조직 사회에서 성공이나 실패를 자신의 자아와 결합시켜 마치 요리에서 만능장처럼 쓰려고 하지만 오히려 주변서 단절되는 고독의 존재가 되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내 말이 맞잖아’, ‘거봐 내 말이 틀리지 않지’라는 식의 표현이라고 합니다.
베드로는 수제자임에도 내가 베드로야 하는 식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을 다시 돌아 보는 것입니다. 10절에 ‘철저하게 살펴온’ 것이 ‘여러분 안으로 향하는 그 은혜’라고 말합니다. 11절에 살펴본 내용이 ‘이미 그리스도의 영으로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해서 알려줬다’는 것입니다. 쉽게 풀어보면, 구약 약속의 말씀이 고난 가운데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 역시 지금의 고난 가운데 믿음으로 견딘다면 반드시 영광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예수의 부활은 결과의 증거이며 또 다른 성령의 시작과 연결됩니다. 부활절은 앞서 죽기 직전 예수님께서 내가 가면 더 좋은 나의 영을 보내겠다는 말씀과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려야 한다는 성령의 강림이라는 놀라운 성취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12절에 ‘그렇게 한것, 그들의 증언들이 여러분을 위한 것’으로 연결됩니다. 부활이라는 단회적 사건은 끝이 아닌 우리와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야 믿어지고 신자 각자의 삶에서 ‘부활의 산 소망’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예수의 단회적 사건이 아니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첫 열매’라고 말함으로 신자에게 이어지는 ‘부활 사건’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고백을 통해 부활을 믿음으로 고백하면서도 금고에 고이 넣어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목사나 교인들이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잘못된 신앙의 형태로 변질되는 이유가 부활이라는 소금을 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우리 눈 앞에서 보이게 할 뿐만 아니라 11절 ‘상고하고’, 12절 ‘너희를 위한 것’임을 믿고 ‘성령을 힘입어… 살펴 보아야’ 한다라고 오히려 현실의 고통을 당하는 이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베드로는 13절에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보라고 우리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이어서 권면합니다. 부활은 장식용이 아닙니다. 마치 오래 된 악기들을 유망주에게 빌려 줘 계속해서 사용되어야 가치가 녹슬지 않고 발휘 된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어떤 것들은 진열하고 보여 주기만 해야 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둘에 차이는 살아 있는 기준을 두고 가치가 결정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보존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어 좌우에 어떤 날 선 검보다 예리한 살아 숨쉬는 가치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에게 생명이라는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그때의 사건을 역사적으로 이해하고 발견하는 가치가 아니라 ‘산 소망’이기에 잘 살고 싶은 사람, 살아 움직이는 경험을 원하는 사람이야 말로 그 가치를 경험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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