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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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2 고난주간 넷째날]
죄의 늪에서 벗어났는가?
본문: 마태복음 26:69-75
1.심문 받으시는 예수님
예수님이 붙잡히셨습니다. 그리고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 끌려가셨습니다. 가야바의 집에는 서기관과 백성의 장로들도 모여 있습니다. 이들이 모인 이유는 분명합니다. 예수를 죽이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있었던 유대인들은 직접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법적인 권한이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18장 31절이 그 사실을 증언합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끌고 온 유대인들에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그러자 유대인들이 무엇이라 말합니까?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그런데 또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곧 있을 유월절을 앞두고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빌라도의 손을 빌려 예수를 죽이려면 무엇이 필요합니까?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당시 로마법에 의해 사형에 해당하는 죄로는 황제나 국가에 대한 반란을 가장 중한 죄로 보았습니다. 이런 죄를 지은 사람은 십자가형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또 탈영이나, 방화, 노예 반란에 가담하거나 강도 살인 등 역시 사형에 해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예수님에게는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막상 예수님을 끌고 왔지만 예수님을 죽일만한 죄목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거짓 증거를 만들어냅니다.
첫 번째로 ‘거짓 증인들’이 많이 찾아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심문하며 자신들이 펼치는 거짓 논리에 예수님이 걸려들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 것도 얻지 못합니다.
두 번째로 어떤 ‘두 사람’이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이 사람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 지을 수 있다 하더이다’ 하지만 이 말에도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세 번째로 참다 못 한 ‘대제사장’이 예수님에게 질문합니다. 6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침묵하시거늘 대제사장이 이르되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가야바는 예수님에게 맹세를 하게 합니다. 유대 법정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는 반드시 진실을 말해야 하는 구속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침묵하시던 예수님께서 가야바의 질문에 답하십니다. 64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이후에 있을 ‘부활과 승천을 통해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또 이 땅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 역시 말씀하십니다. 궁극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선언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진실을 말했을 뿐이지만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예수님에게 신성모독이라는 죄를 덮어씌워 빌라도에게 넘길 것입니다. 그리고 너나할 것 없이 예수님을 죽이라고 소리 지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야바의 질문에 우회적으로 피하거나 부인하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기 원하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가야바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대답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에 유대인들은 신성모독이라며 분개합니다. 대제사장은 옷을 찢으며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예수의 이 발언은 사형에 해당한다고 앞 다투어 이야기 합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주먹으로 치고, 손바닥으로 때립니다. 그리고 조롱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빌라도의 최종 선고와 십자가 사형뿐입니다. 사람들은 이제 예수의 때가 끝이 났다고 생각하며 흥분해 있는 상태입니다.
2.가야바의 집에 들어온 베드로
그런데 그 자리에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붙잡히셨을 때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갔습니다. 그 자리에 계속 있다가는 자신들도 어떤 고초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흩어진 줄 알았던 제자들 중에 베드로만이 지금 예수님이 계신 가야바의 집에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결말이 궁금했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실까? 아니면 극적인 반전을 이루어 내실까?
그런데 그곳에서 뜻하지 않은 일을 겪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뛴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의 부인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습니다. 불과 하루도 지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 밤 너희가 나를 버리고 흩어질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합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그러나 이윽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불붙은 마음에 찬물을 끼얹어 버리십니다. 마태복음 26장 3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베드로는 자신의 말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씩이나 말입니다.
베드로의 부인은 사복음서 모두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왜 이런 실패를 기록으로 남겨두었을까요?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베드로와 같은 저와 여러분들에게 이 실패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가르침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마태는 앞서 살펴보았던 예수님의 자기 시인 다음으로 베드로의 부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를 선명하게 대비시키는 겁니다. 그리고 마태는 베드로의 부인 과정을 점증적으로 심화시키고 있습니다. 단순한 반복이 아닌 것입니다. 또 마태는 닭 울음과 함께 밖에 나가서 통곡하는 베드로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와는 다른 결말을 짐작케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마태복음에 나타난 베드로의 부인, 베드로의 실패가 우리에게 주는 영적 교훈이 무엇인지 3가지 정도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나의 열심만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
먼저, 나의 열심만으로는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더 정확히는 끝까지 따를 수 없습니다. 따른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예수님이 보여 주신대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나의 열심만으로는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를 수 없습니다. 어느 지점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한계에 부딪혀 멈춰 서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나의 열심으로 예수님처럼 과부와 고아들에게 찾아가 봉사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열심만으로 원수를 사랑하기는 힘이 듭니다. 아무리 참고 참는다 하더라도 내 오른 뺨을 친 사람에게 왼쪽 뺨도 치라고 돌려 대는 것은 무리 일 것입니다. 그 열심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사실 그 당당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26장 35절입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 베드로는 죽으면 죽었지 내 입술로 예수님을 부인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 호언장담 했습니다. 그런데 방금 읽은 구절을 보면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주변에 있던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처럼 죽기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결단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 곁에 없습니다. 그나마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대제사장의 집에 있지만 그 역시 예수님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숨죽인 채 예수님의 결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의 열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다 고난 앞에 멈춰선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지난 3년 동안 고난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때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예수님 뒤에 숨을 수 있었습니다. 많은 대중 앞에서 대적들을 부끄럽게 만드시는 예수님이 앞에 계셨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없는 스승을 따라다니며 비록 풍족한 것은 누릴 수 없었어도 예수님은 제자들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대적들의 손에 붙잡히셨습니다. 예수님을 보기 위해 찾아오던 사람들도 등을 돌렸습니다. 아니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얼굴에 침을 뱉고, 주먹과 손바닥으로 때리고, 온갖 험한 말들로 예수님을 비난하고 조롱합니다. 예수님을 계속 따른다면 제자들 역시 같은 처지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수모를 제자들도 똑같이 당할 것입니다. 앞으로 예수님이 지게 될 십자가와 죽음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두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예수님 앞에서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선언했는데 의리가 있지. 남자가 한 입으로 어떻게 두 말을 할까. 무조건 예수님을 따른다. 그래도 예수님과 함께 한 시간이 있는데 정을 생각해서라도 이렇게 안면몰수 하는 건 도리가 아닌 것 같다. 붙잡힐지언정 조금 더 같이 가보자. 나의 열심으로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또 다른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면 무슨 소용이야. 나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는데. 부모님도 모셔야 하고, 처자식들도 먹여 살려야 하고.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으면 제자인 나도, 우리 가족도 낙인이 찍혀서 계속 숨어 살지도 몰라. 지금 도망치지 않으면 모두가 힘들어 질 거야. 빨리 도망쳐야 해.
제자들은 무엇을 선택했습니까?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토록 자신있어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왔지만 멀찍이 떨어져 결말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입술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디까지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계신 곳이라면 어디든지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제자들처럼 고난과 십자가와 죽음 앞에 예수님을 버려두고 도망치시겠습니까? 나의 확신과 결단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내게 있는 능력과 지혜로 세상이 주는 고난과 즐거움에 넘어지지 않을 거라 자신있어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겉으로는 강한 듯 보이나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우리가 겉으로는 지혜롭고 정직해보이나 얼마나 어리석고 간사한 존재인지, 우리가 겉으로는 선한 듯 보이나 얼마나 악한 존재인지 베드로의 부인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과 멀어질수록 죄의 늪에 빠진다.
우선 오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 구조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세기 예루살렘 상류층 집의 구조는 ㅁ자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중간에 뜰이 있고, 그 뜰을 중심으로 사방에 건물이 둘러싸고 형태입니다. 그러니까 뜰 위에는 천정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층이 아니라 2층 이상이었습니다. 가야바의 집 구조도 그와 유사했을 것입니다. 그곳에 예수님과 베드로가 함께 있습니다. 5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따라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말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인들과 함께 앉아 있더라”
무슨 용기였는지 베드로는 가야바의 집 안 뜰까지 들어갔습니다. 예수님은 어디 계실까요? 예수님은 당시 관례대로 2층에서 심문 받고 계십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것은 2층에 위치한 심문실이 아래층 뜰이 보일 정도로 개방되어 있었다는 것을 짐작케 합니다. 이런 배경을 갖고 마태복음에 기록된 베드로의 부인을 보면 그의 내적인 변화를 선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부터 베드로의 세 번 부인을 세 장면으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장면
먼저 첫 번째 장면입니다. 69절과 70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이르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았다고 하는 것은 집 밖으로 나갔다는 말이 아닙니다. 뜰이 있다면 한 가운데가 아닌 가장자리, 즉 뜰을 둘러싸고 있는 벽 근처에 앉아 있다는 말입니다. 마태는 앞서 58절에서 예수님과 베드로의 거리를 ‘멀찍이’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공간적으로 보자면 아직 그 집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깥뜰’이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님과 베드로가 더 멀어진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바깥뜰에 앉아있는 베드로를 한 여종이 발견합니다. 어떤 학자는 이 여종이 어린 소녀였을 거라고 보는데요. 어린 여종이 베드로를 향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했을 거라 방심하고 있을 때 갑자기 훅 들어온 것입니다. 그물을 끌어올리던 베드로와 어린 소녀가 마주하고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몸집으로 보나, 힘으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베드로가 웃어넘길 수 있는 상대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어린 여종의 말에 흔들립니다. 굳이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며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겠다’ 얼버무립니다. 우회적으로 돌려 부인한 것입니다.
#두 번째 장면
두 번째 장면은 어떨까요? 71절과 72절입니다.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그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첫 번째 장면은 베드로가 바깥뜰에 앉아있었다고 하면서 예수님과의 거리를 더 벌렸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장면은 그보다 더 멀어지는 것 같습니다. 어린 여종의 추궁에 우회적 부인을 한 베드로가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앞문으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앞문으로 나아간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서입니다. 그런데 그 앞문에서 또 누구를 만납니까? 다른 여종입니다. 이 여종은 마치 밖으로 나가려는 베드로를 가로막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어린 여종과는 다르게 베드로에게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나사렛 예수의 제자’라고 고발합니다. 베드로를 추궁하는 압박의 강도가 더 거세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압박이 강해진 만큼 베드로의 부인도 우회적이 아닌, 직접적으로 바뀝니다. 두 번째는 맹세를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만을 말하겠다는 맹세, 만약 이것이 거짓이라면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는 그런 맹세입니다. 맹세와 함께 직접으로 부인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
#세 번째 장면
마지막 세 번째 장면도 마저 봅시다. 73절과 74절입니다.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도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긴장감이 점점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제는 여종이 아닙니다. 베드로 곁에 섰던 사람들이 그를 추궁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더 치밀합니다.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베드로의 말소리, 즉 갈릴리 사람의 억양을 콕 집어서 누가 봐도 너는 예수를 따르는 무리 중에 하나라고 못을 박습니다. 압박의 강도가 절정에 이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는 어떻게 응수할까요? 베드로 역시 더 강력하게 부인합니다. 이번에는 ‘저주하며 맹세하여 그 사람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여기에서 ‘저주’라고 기록된 단어와 관련해서 학자들의 견해는 나누어집니다. 전통적인 견해는 베드로가 너무 괴로워서 자신을 저주했다고 봅니다. 그러나 최근에는 문법적인 근거와 문맥들을 고려해서 이 저주의 대상을 예수님으로 보는 것에 힘을 싣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베드로가 점점 더 거세지는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예수님을 저주했을 것이라 봅니다.
왜 마태는 베드로의 동선을 안에서 바깥으로, 바깥에서 앞문으로, 그리고 75절에 밖으로 나갔다고 설명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과 베드로 간의 거리를 물리적으로 표현함으로써 예수님에게서 멀어질수록 베드로의 신앙이 더 크게 흔들리고 있음을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실제 베드로는 장소 변화와 함께 우회적으로, 직접적으로, 강력하게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베드로의 실패 가운데, 이 세 번의 부인을 한 문장으로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예수님과 멀어질수록 죄의 늪에 빠진다”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서두에 우리는 예수님이 심문받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예수님 역시 거짓증인들. 두 사람. 대제사장으로부터 세 번의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인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내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시인하셨습니다. 완전한 순종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왜 베드로는 실패했을까요? 왜 베드로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것도 모자라 세 번씩이나 부인했을까요? 모든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는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도록 죄가 우리 안에서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속성을 알고 나면 누구도 베드로를 욕할 수 없습니다. 왜 입니까? 우리 역시도 베드로처럼 번번이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그의 책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에서 로마서 7장 21절을 언급하며 거듭난 성도라 할지라도, 죄의 잔존세력이 남아있다고 설명합니다. 로마서 7장 21절을 읽어봅시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누가 한 말입니까? 사도 바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180도 인생의 방향이 바뀐 사람, 복음을 위해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은 바울인데 여전히 그 속에 내재하고 있는 악과 싸우고 있다 말합니다. 선을 행하고 싶은데,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악은 자꾸만 반대합니다. 나 자신을 부인하고, 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성도의 본분임을 앎에도 불구하고 어느 지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도록 내 속에서 선과 악이 싸우는 것입니다. 왜 이런 갈등이 생깁니까?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 때문입니다. 존 오웬의 말을 들어봅시다.
“인간의 마음 안에 있는 죄의 성향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적의다.” 적의가 무엇입니까? 원수로 여기는 마음. 단순한 미움보다 강하고 능동적입니다. 상대를 제거하려는 의지가 포함된 감정입니다. 오웬은 계속해서 이어갑니다. “그리고 이 적의는 다시 두 가지로 이루어지는데 하나는 ‘반감’이고 다른 하나는 ‘대적’이다. 그리고 이 죄는 인간의 영혼과 마음 안에 ‘속임’과 ‘강압’이라는 두 가지 수단으로 역사한다.” 그리고 더 구체화 시켜서 인간의 마음 안에 역사하는 세 가지 특성을 소개합니다. 첫째로 이성의 판단을 뿌리치고 역사하는 ‘광기.’ 둘째는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키는데 있어 드러나는 ‘맹렬함.’ 마지막 세 번째로 죄의 성향이 그의 마음을 지배하게 될 때 나타나는 ‘담대함’ 혹은 ‘무모함’입니다.
지난주에 처음으로 담임목사님과 남자교역자들이 체력단련으로 자전거를 탔습니다. 은하수 다리에서 출발해 선바위까지 다녀오는 코스였습니다. 열심히 달려 한 40분 만에 선바위에 도착했습니다. 잠시 앉아서 쉬는데 울산 토박이 현욱 목사님이 옛날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예전에는 선바위 일대가 물놀이 명소였다고요. 그런데 거기 어디쯤인가 소용돌이가 있어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도 더러 있었다는 이야기를 해줬습니다. 그 때 또 수영에 능통한 재림 목사님이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는 법도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생각이나 AI에게 물어보니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는 법이 실제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 딱 한 줄이 와 닿았습니다. “패닉 상태로 무작정 버둥거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체력이 소진되면 영영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앞서 존 오웬이 죄의 성향에 대하여 정리한 단어들을 되짚어 보십시오. 적의, 반감과 대적, 속임과 강압, 광기와 맹렬함. 담대함과 무모함. 이 죄의 성향이 꼭 소용돌이와 같지 않습니까? 소용돌이에서 절대하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반대로 생각해보면 패닉 상태로 무작정 버둥거리면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하지 않습니까? 빠져나오기 위해 힘을 쓸수록 더 빠져나오기 힘이 든다는 것 자체가 말입니다. 그런 면에서 많은 사람들은 죄를 늪이라고도 표현합니다. 늪 역시 죄의 성향과 많은 면에서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표면은 잔잔해 보이나 깊이를 알 수 없습니다. 밟으면 빠져드는 구조이고, 저항할수록 더 깊이 빠집니다. 탈출하려는 힘이 더 깊이 끌어당기는 작용을 합니다.
오늘 말씀으로 돌아와 베드로를 보십시오. 이미 그는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친 이력이 있습니다. 그 죄책감이 예수님으로부터 베드로를 멀찍이 떨어뜨려놨습니다. 그런데 그 죄가 예수님과 베드로 사이를 더 떨어뜨려 놓으려고 속임과 강압으로 역사합니다. 처음에는 어린 여종으로 찾아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문 앞을 가로막습니다. 그리고 꼼짝달싹 못하도록 주변 사람과 환경을 동원해 맹렬하게 압박합니다.
베드로는 점점 더 자신을 잠식해오는 죄의 짓눌림 속에 패닉 상태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살기 위해 무작정 버둥거렸을 것입니다. 짧은 순간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있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말입니다. 죄는 순간을 놓치지 않습니다. 한 번의 실수를 기가 막히게 두 번 세 번 도 허락하며 더 담대하게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리고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켜 그 죄에 빠져 돌이킬 수 없게 만들어버립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죄의 늪에 빠져 비참하게 무너졌습니다.
우리가 베드로를 욕할 자격이 있을까요?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이 심문받으시는 가야바의 집 2층에 주님과 함께 심문받고 있습니까? 그곳에서 내가 예수의 제자가 맞다고, 내 억양이 갈릴리 사람이 맞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냐고 당당하게 시인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베드로처럼 예수님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서 성도라는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바깥뜰에 앉아있습니까? 그래도 베드로는 예수님이 궁금해 거기까지 따라왔다가 발각되어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이 끌려가신 대제사장의 집 주변을 기웃거리기는커녕 도리어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것 마냥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숨어있지는 않습니까?
무엇 때문에 이렇게 예수님과 멀어졌습니까? 죄의 늪에 빠져버렸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벗어나려고 해봐도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이유는 차고 넘칩니다. ‘먹고 살아야하니까’. ‘남들도 다 하니까.’ ‘저 사람이 먼저 나한테 그랬으니까.’ ‘내 자식만큼은 고생시키고 싶지 않으니까.’ ‘나도 성공하고 싶으니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미루면서 자꾸만 타협하고, 죄가 주는 두려움과 달콤함에 게을러지더니 이제는 그냥 교회를 다니는 정도로만 만족하며 위안을 삼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가고 싶지 않으십니까? 예수님이면 충분했던 그 때.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예배당에서 기도하며 잠들었던 때로. 예수님을 알고 싶어서 성경에 파묻혀 살았던 때로. 예수님을 자랑하고 싶어서 물불가리지 않고 전도했던 때로. 예수님처럼 살고 싶어서 아낌없이 나누어 주던 때로 말입니다. 예수님은 변함없이 그곳에 계십니다. 여전히 낮은 곳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병들고 약한 자들, 죄인들의 곁에 서서 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신 그 예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우리의 열심만으로는 끝까지 따라갈 수 없습니다. 죄의 늪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의 실패가 우리에게 주는 세 번째 영적 교훈입니다.
셋째, 죄의 늪에서 벗어나 예수님께로 돌아오라
74절과 75절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이르되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곧 닭이 울더라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세 번째 부인하고 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닭이 울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저 날이 밝았다고 생각했겠지요.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닭 울음소리를 듣고서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셨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닭이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이어지는 베드로의 행동을 주목해보십시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말씀이 생각이 나자 방금 전 자신이 한 행동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천연덕스럽게 모른다고 했는지. 어떻게 그렇게 예수님을 ‘그 사람’이라 부르며 저주하고 맹세하여 모른다고 말할 수 있었는지. 내가 분명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예수님께 호언장담했는데,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이렇게 너무 쉽게 부인해버린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을 찢고 통곡한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한 영혼을 어떻게 회복시키고 이끄시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없었다면 닭이 운다고 한들 베드로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런 감화감동이 없었을 것입니다. 세 번의 추궁이 끝난 뒤 겨우 살았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닭의 울음소리는 패닉 상태에 빠져있는 베드로를 깨우기 시작합니다. 정확히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를 깨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겸손하게 낮추십니다. 그의 열심만으로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음을 인정하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은 베드로의 부인을 감추지 않고 들추시어 회개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내 안에 있는 옛사람은 돌이키지 않으려고, 자꾸만 죄를 숨기려 들지만 주의 말씀은 나를 그 죄에서 돌이켜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의지하도록 성령과 함께 일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은혜라 합니다.
비록 베드로는 실패했지만 예수님은 완전한 순종으로 승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찾아와 그의 부정한 입술을 사랑의 고백으로 바꾸시고는 그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명령하십니다. 내 열심은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실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걸어가신 그 십자가의 길로 따라갑시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실 것입니다.
3.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이 은혜가 필요합니다. 이 은혜가 우리를 주님께로 이끌어주셔야 합니다. 베드로의 실패는 우리에게 3가지 영적교훈을 들려주었습니다. 내 열심만으로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라갈 수 없다. 예수님과 멀어질수록 죄의 늪에 빠진다. 죄의 늪에서 벗어나 예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이다. 이 은혜를 사모하는 오늘 저녁이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성령이 임하는 곳에 회개가 시작될 것입니다. 속사람을 변화시키고, 우리의 겉사람 또한 고치실 것입니다. 그리고 주를 따르게 할 것입니다. 우리 태화교회 안에 이 은혜가 마르지 않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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