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11
골로새서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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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들과 라오디케아에 있는 사람들과 그 밖에 나를 실제로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내가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 지를 알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는 여러분들과 라오디케아에 있는 사람들과 그 밖에 나를 실제로 보지 못했던 사람들이 내가 어떤 싸움을 하고 있는 지를 알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부활에 관한 설교를 기대하셨을텐데, 오늘 제가 준비한 설교는 골로새서 2장입니다. 하지만 2장을 들어가기 앞서 부활이 무엇인지에 대해 간략하게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원래 절기 설교 담당을 했었기 때문에 제 기억으로는 부활절 설교를 세번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지금쯤이면 아무도 기억을 하지 못할거라 생각하지만 마지막 부활 설교가 사실상 핵심이었는데 그 설교를 간단히 정리해서 말씀드리고 골로새서를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활을 이해하려면 생명이라는 단어를 이해해야 하고 죽음이라는 단어를 이해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 드리면 모든 사람이 다 생명과 죽음에 대해 알고 있다고 하실겁니다. 만일 그렇다면 제가 왜 잔소리처럼 알고 있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까? 기독교가 이야기하는 생명과 죽음은 세상이 이해하는 것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성경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우리 육신과 사람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손으로 우리 육체를 지으시고 거기에 생령을 불어 넣으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은 애시당초 우리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고 그 원천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는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바로 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분리됨으로 하나님께서 정의하신 생명은 끊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끊어진 상태가 성경이 말하는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이후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되어 죽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은 육신의 죽음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하실수 있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선악과 사건 이후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과 분리가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것 뿐 아니라 인간의 육체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죽음을 맞습니다. 사람의 영은 육체의 죽음 이후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되던지 아니면 분리되는 지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애시당초 하나님의 생명과 분리된 인간은 스스로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하나님의 생명과 연결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이고 그분 역시 인간처럼 육신에 모든 죄와 저주를 쓰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예수님이나 인간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죽음을 이기시고 생명으로 오신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부활로 다시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에 연결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서만 다시 하나님과 연결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부활이 중요합니다. 부활이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과 다시 연결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영생, 즉 영원히 산다는 말은 영원히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합하여 함께 산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음은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 상관 없는 분리된 삶을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정확히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제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골로새서 1장에서 바울은 시대와 세대를 거쳐 그동안 감춰져 있었던 비밀이 하나님의 의지에 의해 세상에 들어났고, 골로새 교회가 받은 복음은 그 비밀을 알게 되는 것인데 그 비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장에 들어와 그동안 1장에서 설명했던 복음을 자신이 어떻게 전하고 있는지를 말합니다. 그래서 왜냐하면 이라는 접속사를 사용한 것인데 초신자였던 골로새서 교인들에게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일이 바울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말해주는 것이고, 실제로 자신과 얼굴을 대면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도 자신이 하고 있는 이 싸움의 의미를 알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이 앞으로 골로새서 2장에서 계속 나오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께서 이해하셔야 하는 것은, 바울은 육신적으로는 예수님과 상관 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인데, 다메섹을 가는 길에서 극적인 체험을 하고 이후 성령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된 최초의 사람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 육체로는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했지만, 바울처럼 성령님과의 교제를 통해 예수님을 알아가는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골로새 교인들 역시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 길이 없지만, 교회를 통해 그리고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 예수님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울은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위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로 엮여지며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의 지식, 즉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위로를 받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로 엮여지며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의 모든 풍성함과 하나님의 비밀의 지식, 즉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2절은 1절의 내용입니다. 사실 5절까지가 연결되어 있어서 5절까지 한번에 보면 좋겠지만, 오늘 시간상 한번에 가기는 어렵기 때문에 오늘은 2절까지만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의 싸움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 그냥 구원 받았다는 사실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엄청난 풍성함 속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데에 있었습니다. 사실 2절을 있는 대로 읽게되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반복해서 여러번 읽다 보면 어느정도 감이 오실 것입니다. 말씀을 일단 이해해야 그 안에 있는 내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러번 제가 말씀 드렸지만 골로새서를 많이 많이 반복하여 읽으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마음이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그당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떠한 일인지를 말해줍니다. 한마디로 쉽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늘날도 제대로 예수님을 믿으려고 하면 아주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게 정상인 것입니다. 그래서 위로를 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사정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한사람 한사람 다 각자의 고난과 역경을 가지고 있으며 특별히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오는 불편함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단 먼저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는 일이 우선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바울이 이야기하는 두번째 단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로 연결되는 일로 향하게 됩니다.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각자 개인들의 마음이 위로받지 못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 가운데 역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들 자신의 사정과 배고픔이 먼저여서 다른 사람의 배고픔을 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강력한 증거입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편지를 쓰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은 바울 당시의 교회들이 겪는 문제들을 바울이 알고 있으며 그 문제들을 풀어나가기 위해 애쓰는 바울의 싸움을 알아달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교회는 하나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이유는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절실하게 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하지만 절대적인 수준은 아닌 것입니다. 있고 풍성하면 좋지만 그렇다고 꼭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사랑이 아니어도 교회는 굴러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운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의 원동력임을 모르는 것입니다. 오늘 짧은 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을 길게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에 오늘의 핵심은 그 사실을 인지하고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사랑에 목마르지 않습니다. 이것이 우리 마음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있으면 내 마음은 자동적으로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이 보이고 느껴집니다. 다른 말로 내가 아픈 상태에 있으니 다른 사람의 고통은 두번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면 다른 사람의 문제가 내 문제로 보입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은 교회를 한몸으로 만드는 핵심인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랑이 중심이 되기를 기도하고 바라고 점검해야 합니다.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의 모든 풍성함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임하여 한몸이 된 교회는 비로서 말씀을 삶속에서 이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세상의 삶이 입체적으로 이해가 되기 시작합니다. 그전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던 일들이 하나 하나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내가 누구이고 나는 왜 이세상에 존재하며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전제 조건이 하나된 교회 한몸된 교회입니다. 즉 나 혼자의 개인 경건과 능력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이세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완전하거나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없으면 우리는 이러한 이해의 풍성함 속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바울은 엄청난 경험을 하였고 개인적인 경건과 능력으로는 압도적인 수준을 자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우리는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울이 부족해서 교회의 도움이 필요하고 교회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없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개인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교회의 한몸되는 것을 향해 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서 우리는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주신 이유는, 그리고 우리가 애쓰고 힘써서 그 교회 안에 거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교회가 타락하고 아무리 교회가 망가져도 교회가 없으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세상이 아무리 교회를 핍박하고 타락시키고 망가뜨리려고 해도, 하나님은 교회를 결코 포기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이 원리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이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의 모든 풍성함입니다.
마지막으로 2절의 하이라이트는 하나님의 비밀의 지식,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말씀드린 모든 것의 결론이자 목표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왜 골로새 교회가 존재해야 하는지 그리고 왜 바울이 그렇게 교회를 세우는 일에 목숨을 거는지 왜 골로새 교회에 편지를 써서 이러한 내용을 말하는지 그 이유가 단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종결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목표가 아닙니다. 교회가 하나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교회가 성장하고 확장되고 부흥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이러한 일들은 다 부수적이고 과정에서 나올 수 있는 현상입니다. 우리의 목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속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연결되어지고 확실하게 이해하는 것의 풍성함을 맛보고 그리스도를 알아 가는 것, 그것이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일에 목숨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골로새서 2장 1절과 2절은 바울이 그러한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골로새 교인들과 바울을 직접 보지 못한 사람들이 알기를 원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들 역시 알아야 하는 내용입니다. 달라스 태멘 교회에 하나님의 사랑이 중심이 되어 그리스도를 목표로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