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This automated analysis scores the text on the likely presence of emotional, language, and social tones. There are no right or wrong scores; this is just an indication of tones readers or listeners may pick up from the text.
A score of 0.5 or higher indicates the tone is likely present.
Emotion Ton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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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g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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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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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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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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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guage Tone
Analy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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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fid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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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nt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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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Tone
Open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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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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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xtra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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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eeable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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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otional 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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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Language
Social Tendencies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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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부활신앙
: 19절
오늘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부활절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이 나와 상관이 없다면 그 부활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나의 부활이 되기 때문에 부활절이 의미가 있고 소중한 것입니다.
<<곧 나의부활이기에>>
또 그리스도의 부활은 나에게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계속해서 의미있는 전달로 이어져 가야 합니다.
그것도 다른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나를 통해서 이어져야 합니다.
<<<전달은 나를 통해서===>>다른사람에게로>>>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나의 부활신앙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고린도전서 15장은 우리에게 부활신앙을 확고하게 해주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은 설교를 해야 하기 때문에 15장 중에서 19절 한 구절만 읽었습니다.
만약에 인간이 사는 데 있어 이 세상이 전부라면 성도는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19절은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역설적으로 이해해야겠죠.
성도가 누리는 세상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성도의 삶은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부활신앙’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부활신앙을 갖고 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떤 자세를 갖는 것이 부활신앙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 첫째, 부활신앙은 우리의 삶이 영원에 연결되어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부활은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인데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종종 미디어를 통해서 분명히 죽은 사람이 장례를 치르는 도중에 관을 두드리고 다시 나온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도 분명 의학적으로 죽었었습니다.
그 기간이 며칠이긴 하지만 분명히 의학적 소견으로는 죽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시 살아나 관으로부터 나왔지만 그의 삶이 달라졌습니까?
여전히 그의 삶은 그냥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갈 뿐입니다.
변한 것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갖고 있는 부활신앙이 이렇게 단순히 죽었던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만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그리 반가운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여전히 문제 많은 세상에서 힘들고 버거운 삶을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몇 년 혹은 몇 십년 더 산다면 하고 싶은 일을 조금 더 하는 의미 정도는 있겠지요.
오늘 본문에서 부활신앙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합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바라는 다른 세상의 삶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과 대비되는 다른 세상이 있고, 부활은 바로 그런 세상과 연결되는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생명이 다시 살 수 있는 모습으로 연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삶으로 연결되어진다는 의미입니다.
즉,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이 아니라 이후로도 영원한 세상으로 연결된다는 의미입니다.
이 영원한 삶은 성도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적용됩니다.
그들도 부활을 합니다.
성도만 부활하고 성도가 아닌 사람들은 사라지는 게 아닙니다.
성도도 부활을 하지만 그 부활의 성격은 전혀 다릅니다.
둘 다 영원으로 연결되어진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질적인 차이가 납니다.
이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
선한 일을 행한 자라는 것은 성도를 의미합니다.
악한 일을 행한 자라는 말은 성도가 아닌 자들을 의미합니다.
성도는 생명의 부활로 부활합니다만 성도가 아닌 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부활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지막 때에 부활을 하는 것은 모두가 다 합니다.
하지만 그 질적인 차이는 ‘생명’과 ‘심판’으로 나누어집니다.
영벌은 영원한 형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성도가 아닌 자들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도 부활하지만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형벌로 부활을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삶은 부활을 통하여 영원으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고작해야 100년을 삽니다.
그런데 영원은 100년 200년이 아닙니다.
말 그대로 ‘영원’입니다.
시간으로 계산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인생살이를 ‘나그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영원에 비하면 인생은 지나가는 한 시점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영원을 보는 시각을 가지면 지금 살아가는 삶의 자세가 달라집니다.
이 세상의 삶이 끝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살 수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삶은 이 세상의 삶의 결과에 따라 주어지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의 삶을 가치 있게 여기고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이 목표가 아니라 짧은 이 세상에서 갖는 조급함을 버리고 영원한 세상을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도가 갖는 부활신앙은 삶의 자세를 바꾸게 되어 있습니다.
그저 짧게 살다가 마칠 것같이 사는 게 아니라, 영원히 이어져 가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지금 여기에서 나에게 주어진 삶을 충실하게 감당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따라 우리도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 둘째, 십자가와 부활은 함께 가는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9절 말씀은 지금까지 살핀 것과 같이 이 세상이 끝이 아닌 것을 보여줍니다.
즉, 우리에게 영원이 있음을 보여주고, 그리고 그 영원은 영광과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이 말씀이 보여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성도의 삶은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불쌍한 사람으로 여겨질 정도로 힘들고 고난스런 삶을 사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의 삶이 세상 사람들 말대로 정말 끝이라면 우리는 제일 불쌍한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끝이라면, 그래서 부활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 자체가 전부 물거품이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믿음 하나만 가지고 이 세상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버려진 자처럼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삶을 사는 이들에게 이 세상이 전부라면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대로 가장 불쌍한 자들입니다.
차라리 누릴 것 못 누릴 것 가리지 않고 전부 끌어 모으며 사는 게 더 바람직할 것입니다.
세
그러나 이 말씀은 부활이 없다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부활이 있으니까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삶이라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우리가 지금 당하는 고통의 길은 의미가 없는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장차 받을 영광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받는 고난이 없다면 장차 받을 영광 또한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땅에서 무엇을 받으려고 할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는 버림받는 자와 같은 모습으로 나갈지라도 영원한 영광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삶을 ‘십자가’의 삶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삶 없이 부활의 영광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된 제자는 이 세상에서 십자가의 삶을 성실함으로 살아갑니다.
삶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나는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싫어버린 바 되는 모습이 되더라도 결코 주님을 나타내고 따르는 삶을 왜곡시키지 않습니다.
크리스천이라는 말은 작은 그리스도라는 의미입니다.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서 이 땅에서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부인하지 않고 나가야 합니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 그렇게 살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감당해 나갈 뿐입니다.
주님께서도 기도하시면서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것처럼 우리도 이 땅에서 기도하면서 주님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런 십자가의 길이 바로 부활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이 땅에서 그 영광을 맛보며 나가는 자들입니다.
부활은 단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만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영원한 부활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갈 때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은 공상이나 관념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부활의 기쁨을 누리면서 나가세요.
십자가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주님을 따라서 나가면 지금 여기에서부터 부활의 영광을 확신하며 그 기쁨 속에서 흔들리지 않고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은 영원으로 연결됩니다.
부활은 영광으로 연결됩니다.
그런데 부활은 이 땅에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어집니다.
오늘 부활절 이후로 우리는 관념적인 부활신앙이 아니라 삶에서 보여지는 부활신앙으로 바뀌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지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오늘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온전히 집시다.
그러면서 영원한 영광을 이미 이 땅에서부터 누리며 확신 있게 나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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