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412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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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3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4 땅의 깊은 곳이 그의 손 안에 있으며 산들의 높은 곳도 그의 것이로다
5 바다도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육지도 그의 손이 지으셨도다
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9 그 때에 너희 조상들이 내가 행한 일을 보고서도 나를 시험하고 조사하였도다
10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이르기를 그들은 마음이 미혹된 백성이라 내 길을 알지 못한다 하였도다
11 그러므로 내가 노하여 맹세하기를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도다
설교 제목: 예배
본문: 시편 95:1-11
우리는 매주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한 번쯤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정말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예배당에 와서 자리에 앉아 있는 것과,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은 같은 일인가.
시편 95편은 바로 이 질문에 답하는 시편입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성전 예배에서 사용된 노래입니다. 유대 전통에서는 안식일 저녁 예배가 시작될 때, 회중을 예배로 초대하는 시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지금도 유대 회당에서는 안식일마다 이 시편을 부릅니다. 시편 95-100편은 하나님의 왕 되심을 찬양하는 시편 모음인데, 95편은 그 서론에 해당합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 예배의 본질이 무엇인지, 세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겠습니다.
1. 예배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95:1-5)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2 우리가 감사함으로 그 앞에 나아가며 시를 지어 즐거이 그를 노래하자
3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오늘 본문은 '오라'라는 권면으로 시작합니다. 1절에서 '오라', 2절에서 '나아가며', 6절에서 다시 '오라'. 이 세 번의 부름은 단순한 반복이 아닙니다. 예배 장소를 향해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움직임을 반영합니다.
처음에는 성전을 향해 걸어가는 행렬이고,
다음에는 예배 장소 가까이에 접근하는 것이며,
마지막에는 거룩한 장소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움직임은 물리적 이동이 아닙니다. 예배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배는 어딘가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네 가지를 권면합니다. 노래하자, 즐거이 외치자, 감사함으로 나아가자, 시를 지어 노래하자.
여기서 '노래하다'라는 단어는 그냥 음을 맞춰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감정, 주체할 수 없는 감격을 뜻합니다. '즐거이 외치다'는 원래 군인들이 전쟁에서 돌격할 때 지르는 함성입니다. 조용한 탄식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로 기쁨의 함성을 지르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가. 3절이 그 이유를 밝힙니다.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신들보다 크신 왕이시기 때문이로다."
여기서 '크시다'는 키가 크다는 뜻이 아닙니다.
힘이 세고, 권능이 크시며, 어떤 존재와도 비교할 수 없이 위대하시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이 단어를 두 번 반복합니다. 한 번으로는 부족한 것입니다.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존재보다도 더 크신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그래서 4-5절에서 그 위대하심의 범위를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땅의 가장 깊은 곳부터 산들의 가장 높은 곳까지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바다도 하나님이 만드셨고, 육지도 하나님의 손이 빚으셨습니다. 당시 주변 민족들은 하늘, 땅, 바다를 각각 다른 신들이 지배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은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영역이 여호와 한 분의 것이며, 그분이 만드신 것이라고. 고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바다마저도 하나님의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면서 드리는 찬양은 소리일 뿐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진정으로 알 때, 찬양은 억지로 짜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은 곳에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옵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기쁨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대부분,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장 깊은 곳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 손 안에 두고 계신 분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내 삶의 불확실함이, 내가 직면한 문제가, 하나님의 손보다 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예배에서 침묵할 수 없습니다.
2. 예배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95:6-7상)
6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1-5절이 기쁨 넘치는 찬양이었다면, 6절에서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소리를 높이던 자세에서, 몸을 최대한 낮추는 자세로 전환됩니다.
기자는 세 가지 동작을 연속으로 말합니다.
굽히고, 경배하고, 무릎을 꿇으라.
세 표현 모두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가장 낮은 자세를 가리킵니다.
옛 이스라엘 사람들은 완전히 엎드린 상태에서 찬양하고 기도하곤 했습니다.
이것은 백성이 왕 앞에서 취하는 자세입니다.
시인이 같은 뜻의 말을 세 번이나 반복한 것은,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은 예배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몸을 숙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높으심을 인정하고, 내가 피조물임을 고백하는 신앙의 행동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낮추어야 합니까. 본문은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합니다.
첫째, 여호와는 '우리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지으신'은 단순히 생물학적 창조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신 것을 포함합니다. 만드신 분 앞에서, 만들어진 존재가 엎드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둘째, 여호와는 우리의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고대 세계에서는 왕을 흔히 목자로, 백성을 양으로 표현했습니다. 시편 23편을 떠올려 보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초장에는 잔잔한 물이 흐르고 풀이 무성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친히 목자가 되시므로, 양인 우리는 어떤 위협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왕이신 창조주는 우리를 만드시고 나서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도 돌보고 계십니다.
예배에 대해 우리가 가장 흔히 빠지는 오해가 있습니다. 예배를 내가 무언가를 받는 시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좋은 설교를 듣고, 좋은 찬양을 부르고, 좋은 감정을 느끼고 돌아가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예배에서 은혜를 받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이 보여주는 예배의 핵심은 다릅니다. 예배는 내가 무언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의 자존심, 나의 판단, 나의 계획, 나의 뜻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1-5절의 찬양이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인정하는 것이라면, 6-7절의 경배는 그 위대하신 분 앞에서 나 자신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 있을 때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이 크신 분이라고 노래하면서, 정작 내 삶에서는 내 뜻대로 살겠다면, 그것은 찬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왕이시라고 고백하면서, 정작 내 삶의 왕좌에는 내가 앉아 있다면, 그것은 경배가 아닙니다.
3. 예배는 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완성됩니다 (95:7하-11)
그리고
7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8 너희는 므리바에서와 같이 또 광야의 맛사에서 지냈던 날과 같이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찬양과 경배 직후에,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경고가 이어집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사람이 회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입니다. 찬양의 자리에서 이런 경고가 선포된다는 것 자체가 이 시편의 핵심입니다. 예배는 찬양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반응하는 것까지가 예배입니다.
'오늘'이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원문에서 이 단어는 '바로 오늘, 바로 이 순간'이라는 강조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신명기 5:2-3에서 "여호와는 호렙에서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다. 우리의 조상들과만 맺으신 것이 아니라, 오늘 여기서 살아 있는 우리 모두와 맺으셨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잠시도 지체하지 말고, 바로 당장 여호와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체적으로 두 장소를 회고하십니다. 므리바와 맛사입니다. '므리바'는 '다툼'이라는 뜻이고, '맛사'는 '시험'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탈출한 뒤 광야를 지나갈 때 있었던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17장을 보면, 백성들이 광야를 걷다가 마실 물이 없는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모세에게 달려들어 따지기 시작합니다. "우리에게 마실 물을 달라. 어찌하여 우리를 이집트에서 끌어냈는가. 우리와 우리 자녀와 가축을 목마름으로 죽이려 하는가." 그들은 모세를 원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그래서 그 장소의 이름이 맛사, 곧 '시험'이 되었고, 므리바, 곧 '다툼'이 되었습니다.
민수기 20장에도 비슷한 사건이 나옵니다. 광야 생활이 거의 끝나갈 무렵, 또다시 물이 없는 곳에 이르자 백성들은 똑같은 불평을 쏟아냅니다. 40년 전에도 그랬고, 40년이 지나서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두 사건을 함께 언급한 것은, 이스라엘이 한순간 실수한 것이 아니라 광야 생활 전체에 걸쳐 꾸준히 하나님을 시험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생각해 보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집트에서 열 가지 재앙을 직접 보았습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두 눈으로 목격했습니다.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는 것을 매일 경험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날마다 그들 곁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하나님이 정말 우리와 함께 계시는가?"라고 의심한 것입니다. 옥스퍼드 주석은 이것을 "가당치도 않은 배은망덕이며 패역"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9절에는 한글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심지어'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그들이 심지어 나의 행사를 보기까지 하였도다." 하나님의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보고도 하나님을 시험한 것입니다. 보고도 믿지 않은 것입니다.
'마음을 완악하게 하다'는 마음이 돌처럼 굳어져서, 어떤 놀라운 은혜를 경험해도 감동받지 못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바로가 열 가지 재앙을 보면서도 마음이 강퍅해졌다고 할 때 사용된 것과 같은 표현입니다. 그리고 "말지어다"는 '한 번 하지 말라'가 아니라 '계속해서 하지 말라'는 지속적인 금지입니다. 마음이 굳어지는 것은 한 번의 결심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경계와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10절에서 하나님은 "내가 사십 년 동안 그 세대로 인하여 근심하였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근심하다'는 단순히 안타까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심장이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과 슬픔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고통이 40년 동안 반복되며 계속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온갖 은혜와 기적을 베푸셨지만, 그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기가 원하는 길만 고집했을 뿐, 하나님의 길은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알지 못한다'는 것은 몰라서 못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삶에서 실천하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맹세하십니다(11절). 이 맹세는 절대로 번복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안식'은 가나안 땅을 가리킵니다. 400년 동안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살았던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은 더 이상 떠돌지 않고 안식을 누릴 수 있는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불순종한 세대는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하고, 출애굽 1세대 전체가 광야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 안식의 궁극적 의미가 하나님 나라에 있다고 해석합니다(히 4:8-11).
WBC 주석은 이 시편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합니다. "환호가 예배의 한 축이며,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은 다른 한 축이다." 찬양만으로 예배가 완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삶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예배가 완성됩니다.
적용: 우리의 예배를 돌아봅니다
이 시편이 보여주는 예배의 본질은 세 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 그분 앞에서 자신을 내려놓는 것, 그리고 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
우리의 예배를 돌아봅니다. 우리는 찬양은 잘합니다. 좋은 찬양팀이 있고, 함께 노래합니다. 경배의 형식도 갖추어져 있습니다. 예배당에 앉아 있고, 기도 시간에 눈을 감습니다. 그런데 예배가 끝나고 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우리의 삶은 예배 시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까.
마음이 완악해진다는 것은 극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매주 예배에 오지만 마음은 다른 곳에 있는 것. 말씀을 듣지만 삶에 적용하지 않는 것.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도 당연하게 여기는 것. 상황이 조금만 어려워지면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계시는가?" 의심하는 것. 이런 것들이 쌓이면 마음이 서서히 굳어집니다. 어떤 은혜로도 감동받지 못하는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므리바입니다. 므리바는 3,500년 전에 끝난 사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의심하는 그 순간, 우리는 다시 므리바에 서 있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물이 없어서 하나님을 의심했습니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의심합니까. 기도가 응답되지 않아서, 취업이 안 되어서, 관계가 힘들어서, 미래가 보이지 않아서. 이유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계시는가?"
본문이 '계속해서 하지 말라'는 표현을 쓴 것은, 마음이 굳어지는 것을 한 번의 결심으로 막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매일의 경계, 매일의 성찰, 매일 말씀 앞에 서는 솔직함이 필요합니다. 예배는 일주일에 한 번 하는 행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순종하며 사는 매일의 삶이 예배입니다.
'오늘'이라는 단어를 다시 봅니다. 하나님은 과거의 이야기를 하시면서 '오늘'을 말씀하십니다. 내일이 아니라 오늘입니다. 다음 주가 아니라 지금입니다. 아직 순종할 기회가 열려 있는 바로 이 순간, 마음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장 깊은 곳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 손 안에 두고 계신 분, 우리를 만드시고 기르시는 목자이신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음성 앞에서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가장 진실한 예배는, 찬양하는 입술과 순종하는 삶을 함께 드리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