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412 주일 저녁예배

저녁예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3 views
Notes
Transcript
Psalm 91:1–16 NKRV
1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자여, 2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3 이는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5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6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7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 8 오직 너는 똑똑히 보리니 악인들의 보응을 네가 보리로다 9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10 화가 네게 미치지 못하며 재앙이 네 장막에 가까이 오지 못하리니 11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12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13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 14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15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6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께 기도할 때, 가장 많이 드리는 기도가 아마 문제 해결을 구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 문제를 해결해 주세요”, “이 어려움을 없애 주세요”, “이 상황을 바꿔 주세요”라고 기도하며, 내 삶에 있는 환란과 같은 어려운 상황과 환경을 없애 달라고 하나님께 요청합니다.
이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힘들기 때문에, 그 힘든 것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시편 91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방식은 우리의 기대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알아가는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I. 환란은 허락된 것입니다
이 시편은 하나님의 보호를 노래하는 시편입니다. 그런데 보호를 말하려면, 그 보호가 필요한 상황이 있어야 합니다. 위험이 없다면 보호도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3절부터 나오는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시 91:3)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시 91:5)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 91:6)
또 7절에서는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시 91:7)
그리고 13절에서는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시 91:13)
이렇게까지 표현합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시편 기자는 인생에 환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환란을 예외적인 상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 당연히 포함된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올무가 있고, 전염병이 있고, 밤의 공포가 있고, 낮의 화살이 있습니다. 밤에도 오고, 낮에도 옵니다.
다시말해, 우리의 삶에서는 어려움을 피할 수 있는 시간도, 완전히 안전한 순간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환란의 성격을 보면, 그 의미가 더 분명해집니다. “새 사냥꾼의 올무”라는 표현은 새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걸려드는 덫을 말합니다. 즉, 미리 준비할 틈도 없이, 예고 없이 갑자기 찾아오는 위기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어려움도 이와 비슷합니다. 오래 다니던 직장에서 갑작스럽게 정리해고를 당하기도 하고, 건강하다고 생각했는데 검진 결과에서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견되기도 합니다. 또 자녀가 잘 자라고 있다고 믿고 있었는데, 어느 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생기기도 합니다.
또 7절의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진다”는 말씀은 고난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모두에게 동시에 닥칠 수 있는 현실임을 보여줍니다.
나만 힘든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함께 무너질 만큼 감당하기 어려운 때가 실제로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받아들여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서 환란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 주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어려움을 전혀 만나지 않게 하시거나, 모든 문제를 미리 막아 주시는 방식으로 일하시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3절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예수님은 환난이 “올 수도 있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당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환난은 가능성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며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환란이 찾아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마음속에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시는 건 아닐까’ ‘내가 무엇을 잘못해서 이런 일을 겪는 걸까’ ‘혹시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건 아닐까’
환란 자체보다 더 우리를 흔드는 것은,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그런데 14~15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직접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Psalm 91:14–15 NKRV
14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15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여기서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건지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대상은, 환란이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환란 한가운데 있는 사람입니다.
“환난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겠다”는 이 말씀 자체가 이미 환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삶에 어려움이 찾아온다고 해서, 그것을 하나님이 나를 미워하신다는 신호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나를 버리셨다는 증거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더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저질러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아무 반응도 없자는 것, 그것이야말로 관계가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Hebrews 12:6 NKRV
6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하나님께서 내 삶에 개입하시고, 때로는 어려운 상황을 통해서라도 나를 붙들고 이끌어 가신다는 것은, 그분이 나를 외면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전히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증거입니다.
II. 하나님은 환란을 제거하시지 않고, 환란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15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Psalm 91:15 NKRV
15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이 구절을 천천히 읽어 보면, 하나님의 응답 방식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님은 “내가 환란을 없애 주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환란이 너에게 오지 못하게 하겠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은 이것입니다. “그의 환난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환란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환란이 있는 그 자리에서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환란을 제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환란 가운데 함께하심으로 우리가 그 환란에 삼켜지지 않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43장 2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Isaiah 43:2 NKRV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사야를 통해서도 하나님은 “물 가운데로 지나가지 않게 하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불 가운데로 들어가지 않게 하겠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물 가운데를 지나가고, 불 가운데를 지나갑니다. 환란은 실제로 찾아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물이 우리를 삼키지 못하고, 불꽃이 우리를 사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환란은 있지만, 그 환란에 무너져 버리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시편 91편 15절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환란은 있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환란에 삼켜지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III. 풀무불 속의 네 번째 사람: 다니엘의 세 친구
다니엘서 3장을 보면 다니엘의 세친구의 이야기 인데, 당시 느부갓네살 왕이 높이 27m, 너비 2.7m 의 금 신상을 세우고 모든 사람에게 절하라고 명령합니다. 절하지 않으면 풀무불에 던지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 이 세 사람은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니엘 3:17-18을 보면 왕 앞에 끌려와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Daniel 3:17–18 NKRV
17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18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여기서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라는 이 고백이 중요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건져 주실 것을 믿었지만, 동시에 건져 주시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거두지 않겠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다시말해, 환란이 해결되는 것을 기준으로 믿음을 세운 것이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풀무불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들이 실제로 풀무불 속으로 들어 갔을 때 하나님이 하신 것은 무엇이고 하나님이 하지 않으신 것이 무엇이신지 아십니까?
먼저 하나님이 하지 않으신 일이 있습니다. 불을 꺼 주지 않으셨습니다. 다니엘 3:19을 보면 오히려 풀무불의 온도는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거워졌습니다. 환란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환란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심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신 일이 있습니다. 그 불 가운데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다니엘 3:25을 보면 느부갓네살이 그것을 보고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Daniel 3:25 NKRV
25 왕이 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 하고
풀무불은 여전히 타고 있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뜨거워 졌습니다. 그런데 그 불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함께 계셨습니다. 하나님은 환란을 없애시지 않으셨지만, 그 한가운데 함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머리카락도 그슬리지 않았고 옷도 변하지 아니하였으며 불 탄 냄새도 그들에게서 나지 아니하였더라”(단 3:27)
그들은 분명히 불 속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불에 삼켜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시편 91편 15에서 알 수 있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환란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환란 가운데 함께하심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건지시는 것입니다.
IV. 감옥 안에서도 함께하신 하나님: 요셉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요셉도 마찬가지 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팔려 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환란입니다. 하나님은 이 환란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살았습니다.
이 상황만 보면 요셉은 하나님이 버린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9장 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요셉은종의 신분이었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에 보디발의 집에서 총무가 되었습니다. 환란이 제거된 것이 아닙니다. 환란 가운데서 하나님이 함께하셨기 때문에, 그 환란이 요셉을 삼키지 못한 것입니다.
두 번째 환란이 옵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했고, 요셉이 거절하자 누명을 씌웠습니다. 요셉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하나님은 이 환란도 막지 않으셨습니다. 바르게 살았는데 억울하게 감옥에 간 것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9장 21절을 보면 여전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말씀하십니다. 감옥 안에서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감옥에서도 간수장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환란은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환란이 요셉을 무너뜨리지 못했습니다.
세 번째 환란은 잊혀진 것입니다. 감옥에서 만난 술 맡은 관원장에게 "바로에게 제 이야기를 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지만, 그 사람은 요셉을 잊어버렸습니다(창 40:23). 그래서 요셉은 꼬박 2년을 더 감옥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2년도 막지 않으셨습니다.
종이 된 것, 감옥에 갇힌 것, 잊혀진 것. 이 모든 환란을 하나님은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환란 가운데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종의 자리에서도, 감옥 안에서도, 잊혀진 2년 동안에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요셉을 건져내셨습니다. 감옥에서 나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시편 91편 15절의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가 문자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나중에 요셉은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 50:20).
하나님은 요셉의 환란을 제거하신 것이 아닙니다. 환란 가운데 함께하시면서, 그 환란마저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환란에 속하지 않게 하셨을 뿐 아니라, 환란을 통해 더 큰 구원의 도구로 세우셨습니다.
V. 얍복 강가의 씨름: 야곱
그런데 하나님이 환란 가운데 함께하실 때, 때로는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 하실 대가 있습니다.
야곱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또 다른 방식을 보여 줍니다.
야곱은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형 에서가 400명을 이끌고 온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성경은 그때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였다”(창 32:7)고 말합니다. 이것이 야곱이 마주한 환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이 상황을 어떻게 다루셨습니까. 에서의 마음을 미리 바꿔 놓으시지도 않았고, 야곱의 두려움을 먼저 없애 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날 밤, 하나님은 야곱과 씨름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창 32:24)
야곱은 지금 에서가 두려운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문제를 바로 해결해 주시기보다, 야곱과 씨름을 시작하십니다.
밤새 씨름이 이어지고, 결국 하나님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십니다(창 32:25). 그 결과 야곱은 절뚝이게 됩니다.
겉으로 보면, 환란이 해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해진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이 문제를 없애 주신 것이 아니라, 평생 남을 상처까지 남기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씨름 가운데서 야곱에게 중요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야곱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창 32:26)
그리고 그의 이름이 바뀝니다. 야곱, 곧 ‘속이는 자’에서 이스라엘, 곧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자’로 바뀝니다(창 32:28)
하나님은 야곱의 환란을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환란 가운데 함께하시며 야곱 자체를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환란에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전혀 다른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에서를 만났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창세기 33:4을 보면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입을 맞추고 서로 우니라”(창 33:4)
야곱이 그렇게 두려워하던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에서를 먼저 바꾸신 것이 아니라, 야곱을 먼저 바꾸셨습니다.
환란을 먼저 없애신 것이 아니라, 환란 가운데서 사람을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실 때, 언제나 상황을 먼저 바꾸시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우리를 먼저 바꾸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변화되면, 같은 상황도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VI. 보이지 않는 보호: 엘리사와 게하시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환란 가운데 함께 계신다는 사실이, 때로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열왕기하 6장을 보면, 아람 왕이 군대를 보내 엘리사가 있는 도단 성을 포위합니다. 아침에 일어난 엘리사의 사환 게하시는 성을 둘러싼 군대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아, 내 주여 우리가 어찌하리이까?”(왕하 6:15)
게하시의 눈에 보이는 것은 환란뿐이었습니다. 사방이 적군으로 둘러싸여 있고, 빠져나갈 길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우리와 함께 한 자가 그들과 함께 한 자보다 많으니라”(왕하 6:16)
그리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대 그의 눈을 열어서 보게 하옵소서.”
그 순간, 게하시의 눈이 열립니다. “산에 가득한 불말과 불병거가 엘리사를 둘렀더라”(왕하 6:17)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불말과 불병거가 그때 새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만 게하시가 보지 못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보호는 게하시가 보기 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환란은 실제였습니다. 아람 군대는 실제로 도단 성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군대를 미리 없애지 않으셨습니다.
환란은 그대로 있었지만, 그 환란 한가운데 하나님이 이미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눈이 열렸을 때, 환란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보호가 이미 그 자리를 둘러싸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환란뿐일 수 있습니다. 사방이 막힌 것 같고, 길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지 못할 뿐, 하나님은 이미 그 자리에서 함께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도, 이미 우리를 둘러싸고 계십니다.
시편 91편 1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모든 길에서”입니다. 환란의 길에서도,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하나님의 보호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이 막아 주신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우연처럼 지나간 일들, 모르고 피한 위험들, 설명할 수 없이 지나간 순간들.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어려움에는 쉽게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하나님이 막아 주신 수많은 일들은 지나쳐 버리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순간에도, 우리가 자고 있는 시간에도, 우리의 모든 길에서 우리를 지키고 계십니다.
VII. 환란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의 의미
그러면 하나님이 환란 가운데 함께하심으로 우리가 “환란에 속하지 않게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 답이 시편 91편 본문 안에 분명하게 나와 있습니다.
첫째, 두려움에 속하지 않게 됩니다. 본문 5-6절을 보면
Psalm 91:5–6 NKRV
5 너는 밤에 찾아오는 공포와 낮에 날아드는 화살과 6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공포와 화살이 사라졌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밤의 공포도 있고, 낮의 화살도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라고 말합니다. 상황이 바뀌어서 두렵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같은 상황 속에서도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 무너짐에 속하지 않게 됩니다. 7절을 보면 “천 명이 네 왼쪽에서, 만 명이 네 오른쪽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하지 못하리로다”(시 91:7)
주변 사람들이 무너지는 상황은 그대로 있습니다. 환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 때문에, 같은 상황 가운데 있어도 우리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셋째, 위험에 속하지 않게 됩니다. 13절을 보면 “네가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리로다”(시 91:13)
사자와 독사가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런데 그 위에 서게 됩니다. 위험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위험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같은 원리가 반복해서 나타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불 속에 있었지만 불에 타지 않았고, 요셉은 감옥에 있었지만 감옥에 무너지지 않았으며, 야곱은 두려움 가운데 있었지만 두려움에 삼켜지지 않았고, 게하시는 적군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하나님의 군대가 더 크게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환란에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환란이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환란 가운데 있지만, 그 환란이 우리의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불 가운데 있어도 타지 않고, 물 가운데를 지나도 침몰하지 않으며, 위험 속에 있어도 그 아래가 아니라 그 위에 서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함께하실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환난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도 “담대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환난이 사라지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그 환난을 이기신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VIII. 하나님을 피난처로 선택한다는 것
그러기에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선택해야 하는것입니다.
Psalm 91:2 NKRV
2 나는 여호와를 향하여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피난처"는 위험이 닥쳤을 때 몸을 숨기는 곳입니다. "요새"는 적이 침투할 수 없는 견고한 성입니다.
그리고 "의뢰하는"이라는 말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안전한 곳을 향해 서둘러 달려가는 모습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아이가 무서우면 엄마에게 달려가듯이, 위험 앞에서 본능적으로 달려가는 곳이 피난처입니다.
시편 기자에게 그 달려가는 곳이 하나님이었습니다.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찾는 곳이 하나님이었습니다.
9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시라 하고 지존자를 너의 거처로 삼았으므로." 여기서 "삼았으므로"는 '정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결단의 문제입니다. 느낌이 좋아서가 아니라, 의지적으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다는 것이 환란의 제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환란은 여전히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환란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시고, 그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이기 때문에, 나는 환란에 속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Psalm 91:4 NKRV
4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시나니
날개 바깥에는 여전히 폭풍이 있습니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붑니다. 환란이 있습니다. 그러나 날개 아래에 있는 새끼는 그 환란에 젖지 않습니다. 상황이 바뀌어서 안전한 것이 아니라, 어미 새가 덮고 있기 때문에 안전한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피난처로 선택한다는 것은 환란이 없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란 가운데서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깥에는 여전히 폭풍이 있습니다. 그러나 날개 아래에 있으면, 그 폭풍이 나를 삼키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나름의 피난처들을 가지게 됩니다. 돈, 인맥, 경험, 자녀, 건강. 이것들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환란 가운데 함께할 수 없는 피난처입니다. 돈은 건강을 살 수 없고, 인맥은 죽음 앞에서 무력하고, 경험은 예상치 못한 일 앞에서 소용이 없습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았을 때 18만 대군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산헤립의 협박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기도했고, 하나님이 응답하셨습니다(왕하 19:14-35). 그러나 나중에 자기의 보물 창고를 바벨론 사신들에게 보여 주면서, 하나님 대신 자기의 부를 의지했을 때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왕하 20:13). 환란 가운데 함께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IX. 환란 너머의 약속: 건지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환란 가운데 함께하신 후에 우리를 건지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Psalm 91:15 NKRV
15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하나님은 환란 가운데 함께하시는 것에서 멈추시지 않습니다. 결국 건지시고, 영화롭게 하십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감옥에서 나온 요셉은 감옥에 들어가기 전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그랬습니다. 얍복 강가의 씨름 후에 야곱은 야곱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욥이 그랬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후에 하나님은 욥의 소유를 전보다 갑절이나 주셨습니다(욥 42:10). 그리고 욥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 42:5). 환란을 통과한 후에 욥이 얻은 것은 재산의 회복만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만난 것입니다.
16절은 이 시편의 결론입니다.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하여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보이리라"는 단순히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히브리어로 '예슈아'인데, 이것은 예수님의 이름과 같은 뿌리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시편 91편의 마지막 약속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됩니다. 하나님은 구원을 약속으로만 남겨두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직접 체험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X. 오늘 우리에게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시편 91편을 통해 우리가 만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환란을 제거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환란 가운데 함께하심으로, 우리가 그 환란에 속하지 않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풀무불을 끄시지 않았지만, 불 가운데 함께 걸으셨습니다. 감옥 문을 당장 열어 주시지 않았지만, 감옥 안에서 함께 계셨습니다. 에서의 군대를 미리 물리쳐 주시지 않았지만, 야곱과 밤새 씨름하며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아람 군대를 미리 물리치시지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불말과 불병거로 이미 둘러싸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환란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환란 가운데 함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 속에 있어도 타지 않고, 물 가운데를 지나도 침몰하지 않고, 사자 앞에 서도 밟히는 것이 아니라 밟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환란을 없애 달라고만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환란이 없어지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기도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기도는 이것입니다. "하나님, 이 환란 가운데 함께해 주세요. 이 환란이 나를 삼키지 않게 해 주세요. 이 환란에 속하지 않게 해 주세요."
그리고 그 환란 가운데서 하나님을 피난처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상황을 바꾸려고 발버둥 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깥에는 여전히 폭풍이 있습니다. 그러나 날개 아래에 있으면, 그 폭풍이 나를 삼키지 못합니다.
"나는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오늘 이 자리에 앉아 계신 우리 각자의 삶에 환란이 있습니다. 살아온 세월만큼 짊어진 무게가 있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아픔이 있습니다. 기도했는데 응답이 없는 것 같은 시간이 길어져서 지치신 분도 있습니다. 환란이 언제 끝날지 보이지 않아서 막막하신 분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자리를 아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그와 함께 하여." 환란은 아직 끝나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 그 자리에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때가 되면 반드시 건지시고, 영화롭게 하시고, 그 구원을 우리에게 보여 주실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풀무불에서 나왔을 때, 머리카락 하나도 그슬리지 않았고 불 냄새도 나지 않았습니다. 마치 불 속에 들어간 적이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환란을 없애시지 않았지만, 환란의 흔적마저 없애 주셨습니다. 이것이 환란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고백이 오늘 우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환란이 있어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있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이 있어도,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선택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함께하시고, 반드시 건지시고, 반드시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 주님과 함께하는 남은 한 주가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삶에 올무가 있고 전염병이 있으며 밤의 공포와 낮의 화살이 있음을 주님은 아십니다. 그 환란을 허락하시지만, 동시에 그 한가운데 함께하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풀무불 속에서 함께하셨고, 감옥에서 요셉과 함께하셨으며, 얍복 강가에서 야곱을 붙드셨고, 도단 성에서 불말과 불병거로 둘러싸셨던 하나님이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심을 믿습니다.
우리가 환란의 제거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환란 가운데 임하시는 주님의 임재를 구하게 하옵소서. 불 가운데 있어도 타지 않게 하시고, 물 가운데를 지나도 침몰하지 않게 하시며, 이 환란에 삼켜지지 않게 하옵소서.
오늘도 주님을 나의 피난처와 요새로 고백합니다. 때가 되면 반드시 건지시고 주의 구원을 이루실 주님을 신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