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좋은 길 2026 0413 고전12: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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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송가 263장 이 세상 험하고 / 259장 예수 십자가에 흘린 피로써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가장 좋은 길은 사랑의 길입니다.
서론 (2분)
서론 (2분)
오늘 이 새벽에 이 자리에 나오신 분들, 아마 교회를 꽤 오래 다니신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구역도 있고, 맡은 자리도 있고, 수십 년을 이 공동체와 함께 걸어오신 분들도 계실 텐데요.
그런데 신앙 연수와는 상관없이, 어느 순간 이런 감각이 찾아올 때가 있습니다. 오늘도 설교는 아마 사랑하라는 말로 끝나겠지 하는 그 익숙함 말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이 틀린 말은 아닌데, 어딘가 그 말의 무게가 예전만큼 느껴지지 않는 겁니다. 너무 많이 들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그 말과 실제 삶 사이에 거리가 너무 벌어진 건지.
또 다른 감각도 있습니다. 교회에 오래 나오고 있는데, 내가 이 공동체에서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는 감각입니다. 저 집사님처럼 눈에 띄게 일을 잘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안 나오는 것도 아닌데, 나는 여기서 어떤 자리에 있는 사람인가 싶은 그 막막함 말입니다.
오늘 바울이 그 두 감각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딱 그 자리에서 시작하는 말씀을 전합니다. 그리고 31절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고린도전서 12장 27절부터 31절 말씀입니다.
대지 1 — 당신은 이미 그 몸의 일부입니다 (5분)
대지 1 — 당신은 이미 그 몸의 일부입니다 (5분)
바울은 27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여기서 바울이 교회를 설명하는 단어가 흥미롭습니다. '단체'가 아닙니다. '모임'도 아닙니다. '몸'입니다. 헬라어로 소마(σῶμα).
몸이 어떤 것인지, 우리는 살면서 한 번쯤 아주 구체적으로 느끼게 됩니다. 발목을 삐어본 분들은 아실 겁니다. 그 작은 발목 하나가 제 역할을 못하게 됐을 때, 갑자기 걷는 것 전체가 달라집니다. 계단을 오를 때도, 버스를 탈 때도, 잠자리에 누울 때도 그 한 부분이 계속 느껴집니다. 온몸이 그 한 부분을 중심으로 다시 조정됩니다. 몸은 그런 겁니다. 어느 한 부분도 혼자 존재하지 않습니다. 연결됨 자체가 생명입니다.
그리고 반대로, 그 발목이 나아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 그것도 온몸이 압니다. 발걸음이 다시 자연스러워지고, 걷는 것이 수고가 아니라 그냥 됩니다. 한 지체가 회복되면 몸 전체가 편안해지는 겁니다.
바울이 교회를 몸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각 지체가 연결되어 있고, 한 사람이 제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할 때 공동체 전체가 건강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말이 있습니다. 고전12:28 을 보시면,
28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을 행하는 자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라고 합니다.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열심히 해서 자리를 얻은 것이 아닙니다. 자격을 증명해서 몸의 일부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세우셨습니다.
27절의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 이것은 현재형 선언입니다. "열심히 하면 언젠가 몸의 일부가 될 수 있다"가 아닙니다. 지금 이미 그 몸이라는 말입니다.
혹시 교회에 오래 나오면서도, 내가 이 공동체에서 어떤 자리에 있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는 감각이 드신 분이 계신가요. 오늘 이 말씀이 그 감각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당신의 자리는 당신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두셨습니다. 당신은 이미 그 몸의 일부입니다.
대지 2 — 은사는 경쟁이 아니라 흐름입니다 (7분)
대지 2 — 은사는 경쟁이 아니라 흐름입니다 (7분)
바울이 28절에서 교회 안의 다양한 역할을 나열합니다. 사도, 선지자, 교사, 능력을 행하는 자, 병 고치는 자, 서로 돕는 것, 다스리는 것, 방언. 그리고 29-30절에서 연달아 묻습니다. 고전12:29-30
29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능력을 행하는 자이겠느냐
30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다 사도이겠느냐? 다 선지자이겠느냐? 다 교사이겠느냐? 다 방언하는 자이겠느냐?"
이 질문들의 답은 모두 '아니오'입니다. 바울이 질문하는 것처럼 썼지만, 사실은 선언입니다. 다 같을 수 없다. 다 같을 필요도 없다.
이 말씀이 왜 필요했는지를 이해하려면, 고린도 교회의 분위기를 알아야 합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서는 방언을 하는 사람이 가장 영적이고, 방언이 없는 사람은 어딘가 부족한 성도라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은사가 서열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그 구조를 직접 겨냥하며 뒤집습니다.
은사. 헬라어로 카리스마타(χαρίσματα)입니다. 이 단어 안에 카리스(χάρις), 은혜가 들어 있습니다. 어미 -마타(-ματα)는 받은 결과물이라는 뜻입니다. 즉, 은혜로 받은 것. 내가 만들거나 성취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선물입니다. 선물은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누는 것입니다.
강을 생각해보십시오. 산에서 내려온 물이 들판을 적시고 마을을 지나 흘러가는 강은 맑고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이 어딘가에 고이면 어떻게 됩니까. 썩기 시작합니다. 흐르지 않는 물은 살아 있는 물이 아닙니다.
은사도 그렇습니다. 받은 것이 공동체를 향해 흘러갈 때 살아 있는 은사가 됩니다.
어느 교회에든 이런 분이 계십니다. 이름이 크게 알려진 분이 아닌데, 그분이 몇 주 자리를 비우면 교회가 조금 달라지는 분. 예배 전에 늘 먼저 나와 조용히 의자를 정리하시는 분, 아픈 성도의 이름을 몇 달이 지나도 잊지 않고 기도하시는 분, 처음 나온 분이 어색하게 서 있을 때 제일 먼저 다가가 이름을 물어보시는 분. 그분이 하시는 일을 보면서 사람들은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없을 때, 공동체가 느낍니다. 뭔가 빠진 것 같다고. 바로 그것이 공동체를 향해 흐르는 은사입니다. 흐르기 때문에 맑고, 흐르기 때문에 공동체가 삽니다.
고린도의 문제는 은사가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방향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공동체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해 흘렀습니다. 은사가 섬김의 도구가 아니라 인정받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오늘 새벽, 내가 받은 것 중에 공동체를 향해 흘러가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크지 않아도 됩니다. 눈에 띄지 않아도 됩니다. 흐르고 있으면 됩니다.
혹시 예전에는 흘렀는데, 어느 순간부터 멈춰있다는 분이 계신가요. 상처 때문인지,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그냥 시간이 흘러서인지. 강이 다시 흐르기 시작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십니까. 처음엔 아주 작은 움직임입니다. 오늘 이름 하나 기도하는 것 — 그것이 멈춘 강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첫 움직임입니다.
대지 3 — 가장 좋은 길이 있습니다 (4분)
대지 3 — 가장 좋은 길이 있습니다 (4분)
31절로 가겠습니다. 고전12:31
31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바울이 두 가지를 말합니다. 더 큰 은사를 사모하라. 그리고,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겠다. "가장 좋은 길"이라는 표현, 이것은 방법이 아닙니다. 길입니다. 방향입니다. 바울이 기술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방향을 말합니다.
31절 뒤에 바로 13장이 이어집니다. 방언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요, 울리는 꽹과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예언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성도가 취해야 할, 은사를 사모하는 자가 취해야 할 가장 좋은 길, 그것은 사랑입니다.
그런데 왜 사랑이 새롭게 들려야 합니까.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어서, 그 길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쓴 단어의 무게를 되찾아야 합니다. 다른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하는 길.
그리고 이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은 내가 더 노력해서 만들어내는 감정이 아닙니다. 방향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공동체를 향해 흘러가는 방향. 성령께서 우리를 그 방향으로 이끄시는 길. 그래서 성령 충만의 아름다운 첫번째 열매가 “사랑”인 것입니다.
18세기 영국의 목사였던 웨슬리 선생은 이것을 "완전한 사랑"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성결교회 신앙의 뿌리를 놓은 분입니다. 완전하다는 것이 흠 없이 완벽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것을 지키려는 마음보다 옆 사람을 살리려는 마음이 점점 더 커지는 것. 그것이 완전한 사랑입니다. 우리 성결교회가 오래 붙잡아온 말입니다. 그 길이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이 열어 놓으셨습니다.
결론 (2분)
결론 (2분)
오늘 말씀을 한 줄로 하면 이렇습니다.
당신의 자리는 이미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가장 좋은 길로 가십시오. 그 길의 이름은 사랑입니다.
바울이 31절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여주리라."
보여준다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그 길에 서 계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 길을 찾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먼저 그 길 위에 서 계시고, 성령께서 오늘도 우리를 그 길로 이끄십니다.
우리들의 자리는 하나님이 두셨습니다. 우리들의 은사는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우리들이 걸어야 할 길은 하나님이 열어 놓으셨습니다.
오늘 새벽예배 시간, 가장 좋은 길을 선택하며, 사랑을 붙들고 함께 기도하길 원합니다. 특별히 우리 한빛 공동체를 위해서 우리의 사랑의 길이 성령이 예비하신 길이 되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합시다.
오늘 이 아침에도 성령께서 반드시 그 길로 이끄실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