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날마다 죽는 것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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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 해설
I. 본문 해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내가 날마다 죽는다는 것은 한번의 육체적인 죽음을 포함해서 육신적인 자아의 영적인 죽음을 말한다.
바울은 감옥에서 죽음을 앞두고 있다. 죽으면 예수님께 가니 좋고 살면 복음을 전하고 교회에 유익을 주니 좋다.
나의 영적인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
나의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하고 교회에 유익을 줌으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
나의 육적인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된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로마에서 재판을 기다리며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것은 주후 60년에서 62년 경으로 추정된다.
비교적 자유로운 가택연금 상태였지만 사슬에 묶인채 감시를 받고 있었다.
또한 재판의 결과에 따라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처지였다.
바울 자신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라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사형의 가능성을 방증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서신서의 핵심 주제는 “기쁨”이다.
자신이 기뻐할 뿐만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한다.
II. 내가 날마다 죽는 이유
II. 내가 날마다 죽는 이유
사도 바울은 암흑 속에서도 불변하는 자신의 삶의 목표에 대해 말한다.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니라”
A. 죽는 것이 유익함이라.
A. 죽는 것이 유익함이라.
첫째로, 바울은 자신이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한다.
그러면 여기서 죽는 주체는 누구고 또 죽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도대체 무엇에 대하여 죽는다는 뜻인가?
첫째로, 죽는 주체는 누구인가?
여기는 죽는 주체는 신자인 우리 안에 있는 두 성품과 관련이 있다.
거듭난 신자 안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태어난 거룩한 새 본성과 죄악된 옛 본성이 함께 있게 마련이다.
전자, 곧 그리스도를 새 사람의 본성이라고 한다면 후자, 곧 옛 사람의 죄악된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죽는다고 한 것은 바로 옛 본성, 거듭나기 전의 본성으로서 오직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살려는 죄악된 본성을 가리킨다.
둘째로,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그 영혼의 기능을 혼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마음의 기능에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물질적 생명인 육체가 죽는다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육체가 죽는다는 것은 생명이 끊어지는 것, 또는 그것을 살게 하는 육체의 기능이 멸절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옛 본성의 죽음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것은 의미가 매우 달라진다.
왜냐하면 옛 본성이라는 기능은 육체라는 존재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른 바 옛 사람이라 불리우는 나 혹은 옛 성품이 죽는다는 것은 그 기능이 작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거나 활력과 기능이 매우 쇠약해져서 활동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내가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옛 본성이 현저히 활력을 잃어버려서 그것이 하고자 하는 소욕대로 활동을 잘 못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로, 무엇에 대한 죽음인가?
그것은 옛 본성 안에서 역사하는 죄의 활동에 대한 죽음이다.
죄는 하나님을 향한 적의다. 그리고 그 적의는 반감과 대적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간의 마음 안에서 죄가 융성할 때 그는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 반감을 품고 대적하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에 대하여 죽는다고 말한다.
넷째로,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죽는다는 것인가?
그것은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이 생길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함으로써이다.
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써 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이 지금 내가 지으려고 하는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때, 예수 죽음의 기운이 우리의 마음에 밀려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신 것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죄를 짓고자 하는 욕심이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렇게 됨으로써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속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옛 본성이 죽는 것을 경험한다.
우리가 육신의 정욕을 죽이지 못해 신앙생활에서 실패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만약 그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예수가 죽으신 그 십자가에 우리의 옛 사람도 못 박았다면, 우리는 결코 죄에 넘어지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가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죄를 죽이므로써 옛 성품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날마다 반복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거룩한 삶을 살았던 사람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던 것이다.
B.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B.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둘째로 바울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 안에서 존귀하게 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 자신에 대하여 살아 있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말한다.(21절)
첫째, 그러면 여기서 사는 주체는 누구인가?
이것도 신자인 우리 안에 있는 두 성품과 관련이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란, 이천년 전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짜로 살아서 우리 몸 속에 들어오신다는 뜻이 아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예수를 믿음으로 다시 태어난 거룩한 새 본성을 비유로 말하는 것이다.
처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를 생각해 보라.
눈물흘리며 회개할 때 오직 한 가지 소원밖에 없었다.
그것은 오직 자신이 예수께서 원하는대로 사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자신도 사랑하고 예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자신도 미워하며 사는 것 밖에는 더 큰 소원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본성이다.
그러므로 살아나는 주체는 예수 안에서 거듭나 신자의 새 본성이다.
둘째,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육체처럼 물질을 소비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방식의 사는 것이 아니다.
즉, 자신 안에 그리스도 혹은 거듭난 새 본성이 산다고 하는 것은 영적 생명의 풍성함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로 표현되는 새 성품이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여 활력과 기운이 충만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옛 본성이 현저히 활기를 잃어버리고 그것이 하고자 하는 소욕대로 활동을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사랑하는 새 본성이 현저히 활력을 얻고 그것이 하고자 하는 대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셋째, 그러면 그것은 무엇에 대한 생명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의, 곧 의로운 삶에 대한 생명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너희의 몸을 불의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고 의의 도구로 사용하라고 말한다.
의는 곧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부합한 상태를 가리킨다.
우리 안에서 옛 성품이 죽고 새 성품이 활기차게 살아날 때, 그는 의의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된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불의에 대하여 참을 수가 없게 된다.
스스로 힘으로 떨쳐 버릴 수 있다면 불의에서 떠날 것이며 그럴 수 없을 경우에는 눈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게 된다.
곧 회개의 기도이다.
이를 통하여 그는 다시 한 번 이천년 전에 일어났던 십자가 사건을 현재적으로 소환한다.
그리하여 예수 죽음 안에서 불의를 따라 살려는 자신이 함께 못박혀 죽는 것을 경험한다.
그리하여 그는 신자 안에 있는 옛 성품을 이기고 새 성품을 따라 살아가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이때 그의 마음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는 그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사랑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충분한 만족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굳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지으면서까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하지 않게 된다.
신자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 옛 사람의 성품을 완전히 없애 버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완전하라고 당부하였겠는가?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이 세상에 살아 잇는 신자는 운명처럼 옛 사람의 본성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신자가 어떻게 신앙 생활 하느냐에 따라서 그 옛사람은 우리가 도저히 지고 갈 수 잇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넉넉히 지고 갈 수 있는 가벼운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매일매일 자신의 죄를 죽이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날마다 죄와 타협하고 성령을 근심시키며 사는 사람들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죄의 무게를 느끼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면서 곤고한 인생을 사는 것은 세상에서 어려움을 만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은혜 충만했던 옛날을 생각해 보라.
지금 보다 더 큰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넉넉히 이기며 감사하며 살아오지 아니하였던가?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신자가 곤고한 이유는 영적 생명이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화법대로 말한다면, 우리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은 결코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
꼬인 인생은 계속해서 꼬여갈 것이며, 지치고 힘든 상태는 계속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사는 길은 오직 하나다.
죄스런 옛 성품을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고 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이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충만히 살아계실 때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큰 유익을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바로 거기서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을 흘러넘치도록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자,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의 생명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고 죄의 사망으로 죽어갈 것인가?
빌1장20-21절 설교준비 260413_162353
2026.04.14 화 오후 6:39 ・ 46분 9초
곽기욱
00:00
카타 이건 무엇을 따라서 이렇게 되죠 텐 정관사 모형 아코카라 도키암 이거는 뭐냐 하면 간절한 바램 간절함 기대 뭐 그런 걸 뜻합니다.
그래서 열렬한 기대 거죠. 카이 LP다 엘피다는 소망입니다.
소망 그래서 나의 간절한 기대와 그리고 소망을 따라 ot 이거는 이제 대세의 뜻이고요.
n 우데이 아무 것에 있어서도 아무 것에 있어서도
01:12
이거는 아무 것에 있어서도 내가 부끄럽지 아니하며 알라 오히려 앤 파의 파레시아 그래서 모든 담대함 어떤 담대함이 있냐 하면 호스판토테 항상 그러한 것처럼 모든 담대함 담대함 항상 그러한 것처럼 그리고 지금도 지금도 그래서 말을 만들자면은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무엇에든지 내가 부끄럽지 아니하며 오히려 모든 담대함과 그다음에 카이 눈 눈 그러니까 호스판토테 언제나처럼 그리고 또한 지금처럼 지금도 지금도 메갈 룬데스의 타이 크리스토스 엔토 소마티무 그래서 지금도 메갈 논데사타 세타이 존귀하게 되다죠.
그리스도가 n 무엇무엇 안에 나의 이 그 몸 안에 존귀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이런 뜻이겠죠.
그래서 어떻게 at 디아 조회 at 디아 다나프 생명을 통해서든지 죽음을 통해서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그걸 이제 우리 말 성경에 살든지 죽든지라고 번역을 했죠.
03:45
에 21분 에모의 가로토 조앤 그리스토스 카이토 아포타네 인 케르도스 에모의 가르 그러므로 나에게는 나에게는 나에게 토젠 이거는 분사예요.
분사죠. 그래서 조의 살다의 분사예요. 그러므로 나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니 카이 그러므로 토 아포타네인 켈도스 죽는 것도 켈도스 유익함이라 이렇게 되고 제목은 내가 날마다 죽는 것을 오늘은 시간이 없어서 30분만 드릴게요.
30분 동안에 어제 설교하셨던 내용들을 회상하면서 한번 설교를 잡아보세요.
06:08
360
06:31
내가 날마다 죽는 이유 뭐 이렇게 될 수 있겠죠? 내가 날마다 죽는 이유?
1번 본문 해설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체포되어 로마에서 재판을 기다리며 감옥에 갇혀 있었다.
이것은 주후 60년에서 62년 경으로 추정이 된다.
비교적 자유로운 가택 연금 상태였지만 사슬에 묶인 채 감시를 받고 있었다.
또한 재판의 결과에 따라 사형을 당할 수도 있는 처지였다.
07:37
바울 자신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다 라고 표현한 것도 이러한 사용의 가능성을 방증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서신서의 핵심 주제는 기쁨이다.
자신이 기뻐할 뿐만 아니라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한다.
큰 2번 내가 날마다 죽는 이유 사도 바울은 감옥 속에서도 불변하는 자신의 삶의 목표에 대해 말한다.
08:47
따옴표 열고 땡땡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기하게 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하니라.
a 큰 a 죽는 것이 유익함이라. 첫째로 바울은 자신이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말한다.
09:40
그러면 여기서 죽는 주체는 누구고, 또 죽는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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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엇에 대하여 죽는다는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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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로 죽는 주체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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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죽는 주체는 신자인 우리 안에 있는 두 성품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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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듭난 신자 안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태어난 거룩한 새 본성과 죄악된 옛 본성이 함께 있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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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 곧 그리스도를 세 사람의 거룩한 본성이라고 한다면, 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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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는 옛 사람의 죄악된 본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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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여기서 죽는다고 한 것은 바로 옛 본성, 거듭나기 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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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성으로서 오직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살려는 죄악된 본성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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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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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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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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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혼의 기능을 혼이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마음의 기능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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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여기서 죽는다는 것은 물질적 생명인 육체가 죽는다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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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가 죽는다는 것은 생명이 끊어지는 것 또는 그것을 살게 하는 육체의 기능 및 멸절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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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본성의 죽음에 관하여 말하자면 그것은 의미가 매우 달라진다.
왜냐하면 옛 본성이라는 기능은 육체라는 존재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른바 옛 사람이라고 불리는 나 혹은 옛 성품을 읽는다는 것은 그 기능이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거나 활력과 기운이 매우 쇠약해져서 활동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내가 죽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옛 본성이 현저히 활력을 잃어버려서 그것이 하고자 하는 소욕대로 활동을 잘 못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15:09
셋째로 무엇에 대한 죽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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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옛 본성 안에서 역사하는 죄의 활동에 대한 추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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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하나님을 향한 적의다. 적의 적자에다가 의지할 때 의자에 적의다.
그리고 그 적의는 반감과 해적으로 이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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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인간의 마음 안에서 죄가 용서할 때 그는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하나님께 반감을 품고 대적하기를 반복한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자신이 이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한다.
죽는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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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로 그러면 어떤 방식으로 죽는다는 것인가? 그것은 죄를 짓고자 하는 욕망이 생길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함으로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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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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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사랑하시는 그분이 지금 내가 지으려고 하는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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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할 때 예수 죽음의 기운이 우리의 마음에 밀려 들어오게 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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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방식으로 대처하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처럼 똑같은 방식으로 죄를 짓고자 하는 욕심이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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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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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현재적인 체험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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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의 옛 본성이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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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육신의 정욕을 죽이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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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에서 실패한 적이 얼마나 많은가. 만약 그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고 예수가 죽으신 그 십자가에 우리의 옛 사람도 못 박았다면 우리는 결코 죄에 넘어지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20:56
그러므로 신자가 자신의 마음 안에 있는 죄를 죽임으로써 옛 성품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날마다 반복해야 할 일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처럼 거룩한 삶을 살았던 사람도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말했던 것이다.
21:46
큰 기은
21:52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22:05
둘째로 바울은
22:11
자신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그리스도가 자신의 몸 안에서 존귀하게 되기 위해서라고 하였다.
22:37
그리고 그렇게 살아갈 때
22:48
자신에 대하여 살아있는 것은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가로 열고 21절.
23:03
첫째로 그러면 여기서 사는 주체는 누구인가?
23:18
이것도 신자인 우리 안에 있는 두 성분과 관련이 있다.
23:32
여기서 그리스도란 2천년 전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짜로 살아서 우리 몸속에 들어오신다는 뜻이 아니다.
영적인 의미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24:06
여기서 그리스도는 예수를 믿음으로 다시 태어난 거룩한 새 본성을 비유로 말하는 것이다.
처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을 때를 생각해 보라.
눈물 흘리며 회개할 때 오직 한 가지 소원밖에 없었다.
그것은 오직 자신이 예수께서 원하는 대로
25:02
사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것을 자신도 사랑하고, 예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자신도 미워하며 사는 것밖에는 더 큰 소원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새 본성이다.
25:41
그러므로 살아나는 주체는 예수 안에서 거듭난 심장의 새 본성이다.
둘째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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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처럼 물질을 소비하고 생명을 연장하는 방식의 사는 것이 아니다.
26:28
즉 자신 안에 그리스도 혹은 거듭난 새 본성이 산다고 하는 것은 영적 생명의 풍성함을 가리킨다.
26:56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로 표시되는 표현되는 그리스도라고 표현되는 새 성품이 자기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여 활력과 기운이 충만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신다는 것은
27:41
하나님을 대적하는 옛 본성이 현저히 활기를 잃어버리고, 그것이 하고자 하는 소욕대로 활동을 못하게 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 하나님을 사랑하는 새 본성이 현저히 활력을 얻고 그것이 하고자 하는 대로 활발하게 활동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28:33
셋째로 그러면 그것은 무엇에 대한 생명인가?
28:48
그것은 하나님의 의 구원, 의로운 삶에 대한 생명이다.
29:05
성경은 우리에게 말한다. 너희의 몸을
29:17
불의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고 의의 도구로 사용하라고 말한다.
29:32
의는 곧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이며,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한 상태를 가리킨다.
29:53
우리 안에서 옛 성품이 죽고 새 성품이 활기차게 살아날 때 그는 그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된다.
30:20
무엇보다도 자신의 불의에 대하여 참을 수가 없게 된다.
30:36
스스로 힘으로 떨쳐버릴 수 있다면 불의에서 떠날 것이며, 그럴 수 없을 경우에는 눈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게 된다.
곧 회개의 기도이다. 이를 통하여 그는 다시 한 번 2천년 전에 일어났던 십자가 사건을 현재적으로 소환한다.
그리하여 예수 죽음 안에서 부르르이를 따라 살려고 하는 자신이 함께 못 박혀 죽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31:54
그리하여 그는 신자 안에 있는 옛 성품을 이기고 새 성품을 따라 살아가는
32:14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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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그의 마음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는 그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사랑한다.
32:44
그리고 그리스도 때문에 충분한 만족을 얻게 된다.
32:56
그리하여 굳이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지으면서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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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려고 하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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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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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사람의 성품을 완전히 없애버릴 수는 없다.
33:51
그렇다면 사도 바울이 무엇 때문에 우리에게 완전하라고 당부하였겠는가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신자는 운명처럼 옛 사람의 본성을 짊어지고 살아야 한다.
34:35
그러나 신자가 어떻게 신앙생활하느냐에 따라서 그 옛 사람은 우리가 도저히 지고 갈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운 사람이 될 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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넉넉히 지고 갈 수 있는 가벼운 사람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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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매일 자신의 죄를 죽이고 성령 충만한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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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날마다 죄와 타협하고 성령을 근심시키며 사는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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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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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무게를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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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녀들이면서 권고한 인생을 사는 것은 세상에서 어려움을 만나기 때문만은 아니다.
36:32
은혜 충만했던 옛날을 생각해 보라. 지금보다 더 큰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넉넉히 이기며 감사하며 살아오지 아니하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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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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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서 신자가 공고한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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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생명이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화법대로 말한다면 우리 안에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은 결코 우리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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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인 인생은 계속해서 꼬여갈 것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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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치고 힘든 상태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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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 사는 길은 오직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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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스러운 옛 성품을 십자가의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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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함께 다시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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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충만히 살아계실 때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큰 유익을 가져다준다.
39:20
왜냐하면 바로 거기서 험악한 세상을 이길 힘이 흘러넘치도록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39:40
이제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39:54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예수의 생명으로 살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고
40:17
죄의 사망으로 죽어갈 것인가
40:29
그 정도까지만 할게요. 나머지는 이제 거기서 여러분들이 목회의 상황을 다 생각하면서 다 이렇게 연결해가지고 붙여서 문장 전체를 만드세요.
제가 이번에 미국 갔다 오느라고 너무 지쳐가지고, 사실은 설계를 준비를 했는데 원고 작성을 못 했어요.
다음 주부터는 제대로 될 것 같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생각하시면서 하세요.
오늘 설교의 요지가 무엇인 것 같아요 목사님
41:06
예수와 함께 죽어야 연합되어야 다시 부활할 수 있고 그 생명을 살아갈 수가 있다.
41:14
그러니까 인생을 살면서 한없이 권고하다. 나는 나는 정말 비참하다.
나는 너무 힘들다. 그러는 사람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어요 예수와 함께 살면 이런 죽고 싶은 마음이 살고 싶은 마음으로 바꿀 수 있다.
예수와 함께 죽으면 죽으면 죽으면 그런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충만한 힘이 주어진다.
그 힘이 뭐예요? 예수의 생명, 예수의 생명이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제 이런 거는 모든 사람들이 다 해당되는 거예요.
그래서 지금 힘들다고 막 얘기해도 지금보다 훨씬 힘든 때도 잘 이기던 때가 있었어요.
차이가 뭐냐 하면은 그때는 은혜 생활을 잘한 거예요.
성령 충만했던 거예요. 그리고 넉넉히 그런 것들을 이겨낸 거예요.
지금 어제 지난주에 설교했던 고린도전서 4장 7절에서 10절 사이에 나오는 것을 훨씬 더 구체화시키는 거죠.
연결이 되는 거죠.
42:34
그러니까 지난주 설교가 더 잘 이해가 되고
42:38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 지난주 설교가 이제 확 하고 다가오게 되고 그래서 마지막 결론은 뭐예요?
예수가 내 안에서 풍성하게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돼요?
날마다 날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그다음에 예수와 함께 다시 부활하는 경험을 해야 된다 이거죠.
근데 그렇게 해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길이 무엇이에요?
하나님의 말씀과 열렬한 기도 말씀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 열렬한 기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경험이 2천년의 간격을 뛰어넘어서 지금 우리에게 재현되는 겁니다.
43:31
이게 사실 기독교 신앙의 거의 정수거든요. 정수 그래서 모든 답이 여기에서 나와 왜냐하면은 예수를 잘 믿었는데 내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왜 내가 이렇게 살고 있지 그렇게 웃는 그리스도인들도 있잖아요.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거야. 너에게 날마다 예수와 함께 죽는 살림에 그쳤다.
그러니까 결국은 사는 것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너 자신이 되니까 이기적인 자신이 살아나니까 그리스도는 더 죽으셔야 되고 그리고 생명은 사라지게 되고 그러니까 죄를 이길 힘이 없고 세상의 무게는 점점 무겁게 느껴져서 결국은 패배를 운명처럼 받아들이면서 살아가는 삶이 질질 끌리면서 연속이 돼서 삶을 내가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이끌려서 그냥 질질 끌려다니는 포로 신세가 되는 것이다.
44:35
그런 것들을 여러분들이 다 경험이 있으니까 여러분들의 말로 정리를 막 영감을 받으면서 정리를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그냥 폭포수처럼 확 이렇게 쏟아놓아 버려 이거 이거를 한 두 번 정도 더 하고 나서 그다음에는 아주 쉬운 설교로 돌아가려고 해요.
아주 쉬운 설교 그래서 쉬우면서도 아주 실제적인 설교로 돌아와요.
그렇게 해서 다독다독 다독이면서 그러면서 이번에도 우리가 한 6월달쯤 작년에도 우리 6월달에 했잖아요.
그렇죠 6월달쯤 새 생명 축제를 한번 하는 그래서 그때를 6월 한 하순경을 놓고 쭉 달려가면서 그러면서 이제 성도들에게 이제 전도 훈련도 시키고 관계 전도도 시키고 회신자도 작정하고 해가지고 한 번 다 모아놓고 마지막에 그냥 복음 설교로서 한 번 쾅 해서 사람들 이제 회심하게 만드는 그런 일들을 6월 달에 하자고요.
어쨌든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정을 좀 불러드릴게요.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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