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422 수요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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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2 가서 예루살렘의 귀에 외칠지니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기억하노니 곧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나를 따랐음이니라
들어가며
들어가며
제가 이 교회에 부임한 첫 주일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그 전까지 저는 시골의 작은 미자립 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찬양대가 있는 예배라는 것은 상상도 못 해본 시절이었습니다. 피아노 반주 하나만 있어도 감사했던 자리였습니다. 그러다가 이 교회에 부임하게 되었고, 첫 주일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날 찬양대가 찬양을 부르기 시작했을 때, 저는 자리에 앉아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찬양 가사가 유난히 마음을 흔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그 화음이, 그 소리가, 그 예배의 자리가 저에게는 너무나 큰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자리까지 저를 데려오셨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지금은 어떻습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제 찬양대 찬양을 들으며 그렇게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찬양은 그대로입니다. 찬양대원들은 여전히 한 주 내내 연습합니다. 지휘자도, 반주도, 예배당 분위기도, 모든 것이 그대로입니다. 달라진 것은 단 하나입니다. 제 마음입니다.
저는 그 은혜에 익숙해졌습니다. 매 주일 듣다 보니 당연해졌습니다. 당연해지니 감격이 사라졌습니다. 감격이 사라지니 눈물도 말랐습니다. 익숙해진다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찬양대 찬양에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 처음 용서받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처음 말씀이 내 마음에 살아 움직이던 그때, 많은 분들이 뜨거운 은혜를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기도하면 눈물이 났고, 찬송가 가사 하나에도 가슴이 먹먹했고, 말씀 한 구절이 하루 종일 마음에 남아 있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신앙생활을 이어오면서 언제부터인가 그 뜨거움이 희미해진다는 것입니다. 예배도 드리고, 교회에서 이런 저런 봉사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을 처음 만났던 그 첫 마음은 점점 사라지고 없어집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외치게 하신 첫 마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내가 기억하노라."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주님을 향한 우리의 첫사랑이 어디로 갔는지 함께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본문의 배경을 먼저 살피겠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먼저 살피겠습니다
예레미야는 남유다의 마지막 시기에 활동한 예언자입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13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멸망할 때까지, 약 40년 넘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인 2장의 말씀은 예레미야가 사역을 시작한 초기에 선포한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당시 유다의 상황에 대해서 잠깐 말씀드리겠습니다.
요시야 왕 바로 전에 므낫세라는 왕이 55년동안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므낫세 왕은 구약에서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던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 긴 시간 동안 므낫세는 유다를 우상숭배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성전 안에 우상을 세웠고, 힌놈의 골짜기에서는 자기 자녀를 불태워 몰렉이라는 우상에게 바치는 끔찍한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열왕기하 21장은 므낫세의 죄악이 이전 가나안 족속들의 죄보다도 더 심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다가 요시야가 왕이 된 후에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성전을 수리하다가 율법책이 발견되었고, 그 율법책을 보고 왕이 그 앞에서 자기 옷을 찢으며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우상들을 부수고 산당들을 헐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놀라운 개혁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보고 계신 유다의 속사정은 달랐습니다.
제도는 바뀌었지만 마음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성전 제사는 회복되었지만 백성의 속마음은 여전히 우상을 향해 있었습니다.
나라 바깥 상황도 좋지는 않았습니다.
이 시기에 오랫동안 강했던 앗수르라는 나라가 점점 약해지고 있었고, 그 자리를 두고 애굽과 바벨론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유다가 끼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두 나라의 눈치를 보았습니다. 어떤 때는 애굽을 의지하고, 어떤 때는 앗수르를 의지하고, 결국에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습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옳지 못한 모습이었습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만 믿고 따라갔었습니다. 그때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하나님만 붙잡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이 계신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아닌 세상의 힘을 더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시기에 어떠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하시겠습니까?
바로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책망할 것이 얼마나 많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외치라고 하신 첫 마디가 놀랍습니다. 책망이 아니었습니다. 경고도 아니었습니다. 심판 선언도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꺼내신 첫 마디는 뜻밖에도 옛날 이야기였습니다.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 성도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성전에 출입하고 있었습니다. 제사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겉으로는 문제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7장 9-10절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도둑질하며 살인하며 간음하며 거짓 맹세하며 바알에게 분향하며 너희가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이 집에 들어와서 내 앞에 서서 말하기를 우리가 구원을 얻었나이다 하느냐 이는 이 모든 가증한 일을 행하려 함이로다"
겉은 종교적이었지만 속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본인들은 그것을 잘 몰랐다는 점입니다. 예레미야 2장 23절에서 하나님이 우상숭배를 지적하시자 백성이 하는 말이, "나는 더럽혀지지 아니하였다"고 항변합니다. 지금 자기의 신앙의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충분히 심판의 말씀을 쏟아부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은 먼저 신혼 시절의 사랑을 이야기하십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지를 알려면, 먼저 어디에서 출발했는지를 기억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억하노라
내가 기억하노라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말씀은 2절 끝에 있는 이 한 마디입니다. "기억하노라."
오늘 본문에서 '기억한다'로 번역된 원어는 '자카르'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는 그냥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떠올리는 것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보통 기억한다고 하면 옛 정보를 떠올리는 것만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히브리 사람들에게 기억한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그 대상을 다시 살려낸다는 의미입니다. 다시말해 과거의 일을 현재의 자리로 가져와서 다시 붙드는 행위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내가 기억한다"고 말씀하실 때는 거의 언제나 구원의 행동이 뒤따랐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노아와 방주 안의 모든 생물을 기억하셔서 세상을 덮고 있던 홍수의 물이 줄어들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기억하셔서 롯을 소돔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신음 소리를 들으시고 조상들과 맺은 약속을 기억하셔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서 "내가 기억하노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옛날을 그저 떠올리고 계신 분이 아닙니다. 지금 다시 시작하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떠나간 이스라엘을 그냥 두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마음이 이 한 마디에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모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들의 원망도, 넘어짐도 다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으시고, 처음 하나님을 따랐던 그 첫마음, 그 첫사랑의 자리로 다시 부르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맺으신 약속을 잊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에서 멈추지 않으시고, 우리를 처음 그 사랑의 자리로 다시 돌이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붙드는 것은 우리의 흔들리는 마음이 아니라,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 반대로 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 관계에서 우리는 상대방의 좋았던 때보다 서운했던 때를 더 오래 마음에 담아둡니다. 그 사람이 나에게 잘해준 열 번은 희미해집니다. 그러나 한 번 상처 준 일은 오래도록 선명하게 남습니다. 그래서 관계가 어긋나면 회복하기 어렵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억이 나쁜 쪽으로 편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억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의 가장 부끄러운 얼굴이 아니라, 가장 아름다웠던 얼굴을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잊어버렸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첫사랑을 기억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얼마나 멀리 왔는지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지 못할 때에도, 하나님은 내가 처음 주님 앞에 무릎 꿇던 그날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계십니다.
오늘 이 수요예배 자리에 앉아 계신 성도님 한 분 한 분에게, 하나님은 지금 같은 음성으로 "내가 기억하노라. 네가 나를 잊었을지 몰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청년 때의 인애, 신혼 때의 사랑
청년 때의 인애, 신혼 때의 사랑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토록 기억하고 계신 그 첫사랑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두 개의 표현으로 담겨 있는데, 바로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입니다.
먼저 "청년 때의 인애"에서, "인애"로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입니다.
이 단어는 잠깐의 친절이나 순간의 호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변하지 않고 지켜내는 사랑,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신실함이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 보면 '헤세드'라는 단어는 거의 대부분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가리킬 때 나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얼마나 신실하셨는가", "하나님이 얼마나 변함없이 사랑하셨는가", 이런 문맥에서 사용되는 단어가 '헤세드'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반대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렸던 사랑을 '헤세드'라고 하나님께서 부르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말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사랑을,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그 깊고 변함없는 사랑과 같은 단어로 불러주셨다는 것입니다. "네가 나에게 보였던 그 사랑, 내가 너에게 주었던 그 사랑만큼이나 귀했다. 내가 그 사랑을 기억한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표준새번역에서는 이 부분을 "네가 젊은 시절에 얼마나 나에게 진실하였는지"로 번역하였고, 현대인의성경은 "너희가 오래 전에 나에게 쏟은 헌신"으로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청년 시절, 그들은 하나님께 헌신적이었고 충성스러웠다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따라 걸었던 그 시절, 그들은 부족했지만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물론 실수도 많았지만, 그래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표현이 "신혼 때의 사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신혼 때의 사랑은, 막 결혼한 부부가 서로를 향해 품은 그 사랑입니다.
오래된 부부의 익숙한 사랑이 아닙니다. 서로를 향해 마음이 가장 뜨겁던 바로 그 시절의 사랑입니다. 아무 계산 없이, 아무 망설임 없이, 오직 한 사람만 바라보던 그 마음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종종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그려집니다.
시내산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은 결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9장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겠습니다." 이것은 결혼 서약과 같은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바로 그 순간을 기억하고 계신 것입니다.
시내산 아래에서 이스라엘이 "우리가 다 행하겠습니다"라고 외쳤던 순간, 백성의 마음이 온전히 주님을 향해 있었던 때, 아무런 계산 없이 주님께 속하고자 했던 때입니다. 하나님은 그때를 신혼의 순간으로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스라엘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처음 만나주셨을 때,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영접하고 눈물을 흘렸을 때, 그 순간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도 결혼과 같은 언약이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던 그날을 떠올려 보십시오. 처음 세례를 받던 그 순간. 처음 말씀이 내 마음에 깊이 와 닿아 회개의 눈물을 흘리던 그날. 그때 우리는 하나님과 결혼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면 안타깝게도 이 마음에도 변화가 찾아옵니다.
처음의 떨림은 익숙함이 되고, 그래서 처음의 감격은 일상이 됩니다. 결혼한 지 30년 된 부부가 신혼 때처럼 두근거리지 않는 것처럼, 우리도 신앙 안에서 점점 덤덤해집니다. 이것이 꼭 나쁜 일만은 아닙니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본래 그런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는데, 성숙해지는 것과 사랑이 식는 것은 다르다는 사실입니다.
성숙한 부부는 떨림은 줄었어도 사랑은 더 깊어집니다. 표현은 달라졌어도 믿음은 더 단단해집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은 부부는 함께 살고는 있지만 마음이 멀어져 있습니다. 한 집에 있지만 따로 삽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상태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이혼한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성전에 나와서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해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가장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함께 살고 있지만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해 있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것은 습관이 되어 잘 나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향한 마음은 언제 마지막으로 뜨거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찬양은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사가 마음에 닿지 않습니다. 기도는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응답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내가 기억하노라. 네 청년 때의 인애와 네 신혼 때의 사랑을 내가 기억한다"라고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따랐음을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따랐음을
본문은 이어서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따랐음을 내가 기억하노라" 하며 이 사랑이 피어났던 장소를 보여줍니다.
"씨 뿌리지 못하는 땅"은, 말 그대로 씨앗을 뿌릴 수 없는 땅입니다.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땅, 먹을 것이 나지 않는 땅, 사람이 살 수 없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바로 광야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보낸 시간이 40년입니다.
40년 동안 그들은 씨 뿌릴 수 없는 땅에서 살았습니다. 농사를 지을 수 없으니 매일 아침 만나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또, 물이 없으니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셔야 했습니다. 길이 없으니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따라가야 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삶을 산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광야 시절을 대체로 원망과 불평의 시간으로 기억했습니다.
애굽에서 먹던 고기와 오이와 수박과 부추가 그리워서 광야에서는 먹을 것이 없다고 소리쳤습니다. 모세에게 "우리를 이 광야에서 죽이려고 애굽에서 데리고 나왔냐"고 따지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기억하는 광야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다르게 기억하십니다. 하나님께 광야는 원망의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사랑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은 "씨 뿌리지 못하는 땅, 그 광야에서 어떻게 나를 따랐음을 내가 기억하노라"라고 하시며, 광야가 바로 이스라엘이 주님을 따랐던 장소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마실 것이 없었습니다. 길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좋으나 싫으나 매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주시지 않으면 굶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반석에서 물을 내주시지 않으면 목말라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구름기둥을 움직이지 않으시면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가난했습니다. 그러나 그래서 하나님과 가장 가까웠습니다.
성도님들 가운데는 신앙 여정에서 광야의 시절을 지나오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남들이 보기에 가장 힘들고 메말랐던 그 시절. 경제적으로 어려웠거나, 건강이 무너졌거나, 관계에서 상처받았거나, 직장에서 실패했거나, 그래서 하나님 외에는 붙들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그 시절을 보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신기한 것이, 가장 힘들었던 그때가 오히려 주님과 가장 가까웠던 시절이라고 여기는 성도님들이 계실 것입니다.
아침마다 무릎 꿇고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고 하루를 버티기도 하고, 주일예배가 그 한 주의 유일한 위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울면서 드렸던 기도가 응답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사소한 은혜 하나에도 눈물이 났습니다.
그때가 우리 삶 속의 광야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때를 여전히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광야에서 벗어나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보다 형편이 나아졌습니다. 먹을 것이 있고, 잘 곳이 있고, 일도 있습니다. 만나를 기다리지 않아도 내일이 걱정되지 않습니다. 반석에서 나오는 물이 아니어도 수도꼭지만 틀면 물이 나옵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이 없어도 당장 하루를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광야를 떠나는 순간, 사람은 하나님을 잊기 시작합니다. 모세는 신명기 8장에서 이것을 미리 경고했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그리고 모세의 이 경고는 실제가 되었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풍요가 그들의 첫사랑을 무디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예레미야 시대 유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시는 장소는 우리가 화려하게 성공한 자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만을 붙들고 울었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우리가 씨 뿌릴 수 없는 광야에서 오직 주님만 따랐던 그 시절입니다. 하나님은 그 시절을 잊지 않고 계신다고 오늘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첫사랑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첫사랑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오늘 예배를 드리시는 성도님들의 첫사랑, 첫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님을 처음 만났던 그날을 떠올려보십시오. 사람마다 그 순간은 다 다를 것입니다. 누군가는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처음 예수님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누군가는 청년 시절 수련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을 것입니다. 또 누군가는 인생의 큰 어려움을 지나면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시다가 평범한 어느 시점에, 예수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달으셨을 것입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이 따뜻해지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반면에 너무 오래전 일이라 잘 기억나지 않으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리고 기억은 나지만 그때의 감격은 사라지고, 희미하게만 남아 있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렇게 처음의 감격이 사라지고 신앙이 덤덤해진 상태를, 과거 신앙의 선배들은 "첫사랑을 잃은 신앙"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요한계시록 2장에서 에베소 교회를 향해 바로 이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는 수고와 인내가 있었습니다.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는 분별력도 있었습니다. 거짓 사도들을 시험해서 가려내는 지혜도 있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로 보면 탄탄한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런 교회를 향해 "너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가 있습니다. 신앙이 오래되었다는 것, 교회 일을 열심히 한다는 것, 성경을 많이 안다는 것, 이런 것들이 첫사랑을 대신해주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직분을 맡고 있어도 첫사랑을 잃을 수 있습니다. 매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아도 첫사랑을 잃을 수 있습니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드려도 첫사랑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첫사랑이 식을까요. 4가지 이유입니다.
첫째는 익숙함입니다. 제가 처음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는 은혜에 익숙해집니다. 그래서 매 주일 드리는 예배가 당연해집니다. 매일 접하는 말씀이 평범해집니다. 주님의 용서가 가벼워집니다. 익숙함이 무서운 이유는, 우리가 무언가를 잃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천천히, 조용히, 마음이 굳어져 갑니다.
둘째는 풍요입니다. 광야를 벗어나 가나안에 들어오면 하나님을 잊기 시작합니다.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필요한 것들이 대부분 채워지고, 급하게 매달릴 일이 줄어들면, 기도가 줄어듭니다. 주님 없이도 하루가 돌아갈 수 있게 되면, 주님을 찾는 절실함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셋째는 분주함입니다. 삶이 너무 바쁘면 첫사랑이 식어집니다. 일에 치이고, 관계에 치이고, 여러 역할에 치이다 보면, 하나님과 단 둘이 있는 시간이 사라집니다. 부부 사이에도 너무 바쁘면 대화가 사라지듯이, 하나님과의 관계도 분주함 속에서 메말라갑니다.
넷째는 상처입니다. 신앙생활 안에서 받은 상처가 첫사랑을 식게 할 때가 있습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교회에 실망하고, 때로는 하나님께 서운해져서, 마음의 문을 반쯤 닫아버리는 것입니다. 몸은 교회에 있지만 마음은 거리를 둔 채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어떤 이유 때문에 첫사랑이 식으셨습니까. 하나님은 지금 그 이유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리고 여전히 "내가 기억하노라" 하시며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때로 돌아가는 길
그때로 돌아가는 길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어떻게 하면 첫사랑으로, 첫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께서 먼저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붙들어야 합니다.
이것이 첫사랑 회복의 출발점입니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너무 멀리 왔어. 너무 오래 냉랭했어. 이제 와서 돌아갈 면목이 없어." 이것이 사탄이 우리에게 속삭이는 거짓말입니다.
오늘 본문이 선포된 유다는 55년 우상숭배를 지나온 백성이었습니다. 성전 안에 우상을 세우고, 자녀를 몰렉에게 바친 백성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이 먼저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내가 기억하노라."
우리의 허물이 아무리 커도 하나님의 기억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의 냉랭함이 아무리 오래되어도 하나님의 첫사랑을 지우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이야기를 아십니까.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먼 길을 걸어오고 있을 때, 아직도 멀리 있을 때에 아버지가 달려 나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셨다고 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올 때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길을 내다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도 그러십니다. 우리가 한 걸음만 방향을 돌리면, 이미 달려오고 계십니다.
둘째, 광야의 시절을 떠올리십시오.
우리가 하나님만 붙들고 살았던 그 시절을 다시 기억해내야 합니다. 그때의 기도, 그때의 눈물, 그때의 감격을 다시 꺼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다가, 또 설교를 들으면서 기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찬양은 타임머신과도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은혜 받았던 찬양을 부르면 그것이 몇 년이 지났든 그 찬양을 부르며 은혜를 받았던 때로 들어갑니다. 그 안에서 계속해서 찬양하며 그때와는 또 다른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히브리 사람들의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현재로 가져오는 행위입니다. 우리도 똑같이 해야 합니다. 과거의 은혜를 단지 추억으로만 남겨두지 마십시오. 지금 이 순간으로 불러내십시오. "주님, 그때 저를 만나주셨던 그 주님이 오늘도 같은 주님이십니다. 그때 저에게 말씀하시던 그 주님이 오늘도 같이 말씀해 주십시오."
셋째, 말씀과 기도의 자리로 다시 돌아오십시오.
첫사랑은 머릿속의 생각으로 끝나면 안됩니다.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신혼부부가 서로 사랑한다고 말로만 하지 않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함께 걷고, 함께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면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합니다.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습니다. 복잡한 계획을 세우실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10분만 조용히 하나님 앞에 앉아보십시오. 내일 아침, 눈 뜨자마자 성경 한 장만 펴서 읽어보십시오. 작은 걸음부터 시작하십시오. 신혼의 두근거림은 한 번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서로를 찾으면, 잊었던 사랑이 조금씩 되살아납니다.
넷째,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첫사랑의 회복은 감동만으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어디에서 떠났는지를 정직하게 인정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주님보다 더 사랑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주님보다 더 의지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요한계시록 2장에서 주님이 에베소 교회에 주신 처방은 세 가지였습니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첫째는 생각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회개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처음 행위를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감정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느낌이 아니라 결단입니다.
마무리하며
마무리하며
성도 여러분,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우리 자신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합니다. "나의 첫사랑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가 이 질문 앞에 솔직해질 때, 어쩌면 부끄러움이 먼저 올라올지도 모릅니다. 처음의 그 뜨거움이 어디로 갔는지, 그 첫 눈물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첫사랑이 익숙함 속에 묻혀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 을 들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한 가지 큰 위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잊어버렸어도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첫 주일을, 우리의 첫 눈물을, 우리의 첫 기도를, 하나님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그때로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얼마나 오래 냉랭했는지, 얼마나 멀리 떠나왔는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첫사랑을 지금도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수요예배 자리에 부르셔서 그 기억을 나누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이번 한주, 조용한 시간을 내어 주님 앞에 앉아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 예수님을 만났던 그 지라와, 광야에서 주님만 붙들고 살았던 그 시절을 천천히 마음에 그리면서 하나님게 이렇게 고백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 저도 기억하겠습니다. 저도 그때로 돌아가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첫사랑을 기억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향한 그 첫 마음을 기억할 때, 잃었던 그 자리가 다시 우리 안에 회복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 속에서 청년 때의 인애와 신혼 때의 사랑을 다시 회복하여서, 그 사랑 안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원합니다.
기도
기도
사사랑의 주님, 오늘도 귀한 말씀 허락하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의 첫사랑을 잊지 않고 지금도 기억하고 계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저희는 수많은 은혜를 잊고 살았지만, 주님께서는 단 하나도 잊지 않으시고 오늘도 저희를 그때로 부르고 계심을 고백합니다.
너무 익숙해져서 감격이 사라졌고, 너무 풍요로워서 절박함이 사라졌고, 너무 분주해서 주님과의 시간이 사라진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오늘 이 시간 처음 주님을 만났던 그 자리, 광야에서 주님만을 따랐던 그 첫 마음을 다시 회복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청년 때의 인애와 신혼 때의 사랑으로 주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