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어오시는 분 2026 0426 말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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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제목: 경계를 넘어 오신 분
본문: 말라기 4:2 / 마가복음1:40-42
서론
서론
(PPT01) 다음 주부터 우리는 신약으로 본격적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의 이야기인 복음서부터 시작해서 신약의 이야기들을 함께 따라가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그 시작 전에 딱 한 가지를 먼저 확인하고 싶습니다. 신약은 갑자기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신약이 열리기 위해 먼저 끝나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는 말라기입니다. 말라기가 예언한 뒤, 하나님은 400년 동안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언자도 없었고, 하늘의 음성도 없었습니다. 성경이 조용해졌습니다. 그냥 — 조용했습니다.
(PPT02) 혹시 그 감각을 아십니까. 기도하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것 같은 시간, 하나님이 계신 건지 내 기도를 듣고 계신 건지 모르겠는 계절, 열심히 믿어보려고 하는데 뭔가 막혀있는 것 같은 느낌. 400년을 기다린 사람들도 그랬을 겁니다. 그들도 그 침묵이 하나님의 부재처럼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 침묵의 문 앞에서, 말라기는 마지막으로 하나의 약속을 남겼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라기 4장 2절 입니다. 그리고 400년 뒤, 그 약속이 성취되는 장면이 마가복음 1장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구약의 마지막 약속과 신약의 첫 번째 손길이 만나는 그 순간 앞에 서 봅니다. 마가복음에서 예수님이 어떠한 일로 400년의 침묵 가운데 응답이 되셨는지를 보려고 합니다.
대지 1 — 구약의 마지막 약속: 치료가 온다
대지 1 — 구약의 마지막 약속: 치료가 온다
말라기 4장 2절 을 함께 읽겠습니다.
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말라기는 어떤 시대에 이 말을 했을까요.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지 수십 년이 지났습니다. 성전은 다시 세워졌는데, 백성들의 형편은 여전히 피폐했습니다. 제사장들은 하나님 앞에 대충 제물을 드렸고, 백성들은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형식은 있는데 마음이 없었고, 예배는 하는데 삶이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그 맥락에서 말라기가 예언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구약의 마지막 말이 됩니다.
(PPT03)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이 '치료'라는 단어를 히브리어로는 마르페(מַרְפֵּא)라고 합니다. 어근은 라파(רָפָא)입니다. 치유하다, 고치다, 회복시키다. 그런데 이 단어가 담고 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뼈가 부러진 사람을 생각해보십시오. 석고 붕대를 풀었다고 낫는 게 아닙니다. 근육이 굳어있고, 다시 쓰는 법을 배워야 하고, 걷는 법을 처음부터 다시 익혀야 합니다. 물리 치료를 받아야 하고 시간이 걸립니다. 마르페는 그 전체입니다. 뼈 하나 붙이는 게 아니라, 다시 뛸 수 있는 상태로의 회복. 그 온전한 회복을 말라기가 마지막 약속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에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약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약속하신 것이 이것입니다. 마르페 — 치료. 단순한 의료 처방이 아닙니다.
죄와 저주로, 소외와 관계의 단절로, 실패와 수치로 부서진 사람 전체를 다시 세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약속은 말라기 혼자 꺼낸 것이 아닙니다. 구약 전체가 이 탄식 위에 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오래전에 이렇게 울었습니다. "길르앗에 유향이 없느냐. 거기에 의사가 없느냐. 어찌하여 딸 내 백성이 치료를 받지 못하느냐." 오랜 탄식이었습니다. 오랜 질문이었습니다. 말라기는 그 질문에 마지막으로 답합니다. 치료가 온다.
혹시 지금 당신 삶에 400년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있습니까. 기도해도 달라지지 않는 것 같은,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그 계절. 말라기는 말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약속의 파기가 아닙니다. 성취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400년 동안 조용히, 살아서, 성취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가복음 1장에서 그 약속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습니다.
대지 2 — 경계를 넘어 먼저 손을 내미시다
대지 2 — 경계를 넘어 먼저 손을 내미시다
마가복음 1장 40-42절 을 읽겠습니다.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이 나병환자가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나병은 오늘날의 한센병과 완전히 같지 않습니다. 다양한 피부 질환을 포함하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의학적 진단이 아니라, 구약 성경 레위기 — 제사와 정결에 관한 규정들을 담은 책 — 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선고했느냐입니다. (PPT04)
레위기 13장 45절 입니다.
45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나병환자는 옷을 찢어야 했습니다. 머리를 헝클어야 했습니다.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 밖, 아무도 살지 않는 격리된 곳에서 홀로 살아야 했고, 성전 예배는 불가능했습니다. 가족도, 친구도, 이웃도 아무도 만질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살아있었지만, 관계가 죽었고 공동체가 죽었고 하나님과의 예배도 끊겼습니다. 살아있으나 모든 것이 죽어있는 상태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경험하는 상처가 이것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PPT05) 취업 실패 앞에서"나는 낙오자다"라는 목소리가 들리고,
반복되는 관계의 상처 앞에서 "나는 사랑받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도덕적 실패 앞에서 "나는 회복 불가능하다"는 선고를 스스로에게 내립니다.
아무도 소리 내어 외치지 않아도, 마음속에서 "부정하다, 부정하다"가 울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것 자체가 이미 규정 위반이었습니다. 격리된 공간 밖에 있어야 할 그가 사람들 속으로 들어왔고,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그때! 그가 한 말이 탁월합니다. (PPT06)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 말의 구조를 보십시오. "하실 수 있나이다" — 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단 하나만 물었습니다. "원하시면" — 당신이 원하십니까.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의지의 문제입니다.
이것이 오늘 많은 청년들의 가장 깊은 질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원하실까. 이런 내가, 이 상태의 내가, 하나님께 다가가도 될까. 능력이 있으신 건 알겠는데, 나 같은 사람을 원하시는지가 모르겠다.
예수님의 대답을 보십시오. 그런데 그 대답이 나오기 전에 먼저 일어난 일이 있습니다. (PPT07)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단순한 동정심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감정입니다. 예수님이 이 사람을 보셨을 때 그 안에서 뭔가가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셨습니다. 헬라어로 손을 내밀어 "만지셨다." 이 단어의 “행동”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직접 하신 행동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시기 동안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경계였습니다. 레위기가 그 경계를 설정했고, 나병환자를 만지는 자도 부정해진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경계 앞에 서셨고, 말씀이 나오기 전에 손이 먼저였습니다.
예수님은 말씀만으로도 충분히 고치실 수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다른 곳에서 예수님은 말씀 한 마디로 귀신을 쫓아내셨고, 마태복음 8장에서는 백부장의 종을 멀리서 말씀으로도 고치셨습니다. 굳이 만지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만지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이 나병환자에게 치유보다 먼저 필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20년, 30년 —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피부. "부정하다, 부정하다"를 외치며 살아온 사람. 그 피부에 예수님이 먼저 손을 얹으셨습니다. 치유 선언 전에 먼저, "나는 네가 부정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손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PPT08) 율법 아래서는 부정함이 전염됐습니다. 나병환자를 만지면 만지는 자가 부정해집니다.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는 방향이 역전됩니다. 거룩함이 전염됩니다. 죄와 저주의 흐름이 뒤집혔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였습니다. 우리의 부정함 속으로 들어오셔서, 그 방향을 바꾸시는 것. 이 거룩한 역전이 오늘 우리 청년들의 삶에도 일어나길 축복합니다!
(PPT09)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헬라어로 θέλω — 텔로 — 원하노라. 이 단어를 자세히 보십시오. 현재 시제입니다. "원했다"가 아닙니다. "원할 것이다"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원하노라.
이 현재 시제가 중요합니다. 나병환자의 간구가 예수님의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원하심은 나병환자가 나아오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400년 전 말라기에서 이미 선언된 의지였습니다. 나병환자의 간구는 예수님의 마음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예수님의 마음과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원함은 지금도 현재 시제입니다. 그때만이 아닙니다. 오늘도,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이 — 예수님은 당신을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한 가지를 짚어야 합니다. "나는 믿음이 부족해서 고침을 못 받는 게 아닐까"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보신 적 있습니까. 나병환자는 완벽한 믿음을 가져온 게 아닙니다. "원하시면" — 이건 절반의 믿음이고 반신반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텔로-θέλω-원하심”으로 답하셨습니다. 치유의 근거는 나병환자의 믿음의 크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원하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먼저 손을 내미셨다고 해서 나병환자가 한 게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닙니다. 그는 나아왔습니다. 격리 공간에서 사람들 속으로, 경계를 향해 걸어왔습니다. 예수님이 경계를 먼저 넘어 오셨다면, 나병환자도 경계를 향해 걸어왔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자격이 생겨서 나아가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하나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경계가 있습니까. 수치, 실패, 오래된 죄, 반복되는 패턴 — "이런 내가 나가도 되나"라고 멈추게 하는 것. 내 생각, 내 지식이 가로막고 있습니까? 그 경계 너머에서 예수님이 이미 손을 내밀고 계심을 믿는 우리 청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대지 3 — 치유는 피부에서 끝나지 않았다
대지 3 — 치유는 피부에서 끝나지 않았다
(PPT10) 그런데 이 이야기가 42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43절과 44절이 있습니다. 막1:43-44
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예수님이 치유를 선언하시고 바로 하신 일이 있습니다. "제사장에게 가라." 레위기 14장에 나병에서 나은 자가 공동체로 돌아오기 위한 공식 절차가 있습니다. 제사장 앞에 나아가서 그 과정을 밟아야 비로소 공동체 안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왜 이것을 말씀하셨을까요. "깨끗하다"는 선언으로 끝내셔도 됐을 텐데. 그분은 이 사람을 단순히 피부병에서 고치기를 원하신 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삶 전체를 회복시키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세 겹의 치유가 있습니다.(PPT11)
첫 번째 겹은 42절입니다.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고 깨끗하여진지라." 피부의 치유, 눈에 보이는 것, 즉각적인 것입니다. "곧, 지체 없이". 마가복음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입니다. 기다릴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바로 — 예수님의 θέλω(원하심)이 그렇게 역사하셨습니다.
두 번째 겹은 44절에 있습니다. 제사장에게 가서 공동체 복귀 절차를 밟으면 무엇이 달라지는가. 가족에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 돌아갈 수 있습니다. 20년, 30년 끊겨있던 관계들이 회복됩니다. 아내가 있었다면 아내의 손을 잡을 수 있고, 자녀가 있었다면 자녀를 안을 수 있습니다. 피부 치유보다 오래 걸리지만, 이것이 두 번째 겹입니다. 관계의 치유인 것입니다.
세 번째 겹도 44절에 있습니다.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 제사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나병환자는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고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것이 이제 회복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예배의 회복. 이것이 세 번째 겹이자 가장 깊은 치유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세 번째 겹의 치유가 어떤 모습인지 잠깐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PPT12) 신앙생활을 오래 하신 분들 중에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예배 자리는 20년을 지켰는데, 언제부턴가 예배에서 뭔가를 기대하지 않게 됐습니다. 찬양을 부르는데 입만 움직이고, 설교를 듣는데 귀만 열려있는 상태. 형식은 있는데 살아있는 기대가 없는 것. 이것이 현대판 "성전 앞에 서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신앙이 짧은 분들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교회에 나오기는 하는데 깊이 들어오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 예배당 안에 있지만 뭔가 문 앞에 서 있는 것 같은 거리감. 그것도 여전히 치유가 필요한 곳입니다.
예수님은 나병환자를 "깨끗하다"고 선언하시고 바로 그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관계로, 예배로,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는 길. 이 세 번째 겹을 향해 우리를 보내십니다.
이것이 말라기가 약속한 마르페(מַרְפֵּא)입니다. 피부 하나 고치는 게 아닙니다. 이 사람의 삶 전체가 다시 세워진 것입니다. 육체, 관계, 하나님과의 예배 — 전부.
그런데 45절을 보면 한 가지 장면이 있습니다. 막1:45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이 나병환자가 어떻게 했는지 아십니까.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뜨리니." 예수님이 제사장에게 먼저 가라고 하셨는데, 그는 기쁜 마음에 전파하러 다녔습니다. 좋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원하신 순서가 있었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나아가라 — 그리고 나서 세상으로 나가라. 예수님은 그가 완성까지 나아가기를 원하셨습니다. 피부만 나은 게 아니라, 공동체로, 하나님 앞으로 온전히 돌아오는 그 완성까지.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도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고 달려가는 것, 나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의 치유가 예배의 회복까지 완성되기를 원하십니다. 삶의 변화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위에 세워지도록.
혹시 이런 느낌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데 왜 삶이 달라지지 않는 것 같지. 교회에 오는데 왜 여전히 고립된 것 같지.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왜 계속 같은 자리인 것 같지. 신앙을 오래 한 분이라면 — 왜 예배가 점점 형식이 돼가는 것 같지. 이것이 나병이 나았는데 아직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위에 있는 상태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집이란 하나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입니다. 예배할 때 살아있는 기대가 있는 것, 기도할 때 실제로 받으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공동체 안에서 진짜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 집으로 예수님이 우리를 이끌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 예배의 회복이 우리 삶의 전인격적인 치유가 될 것입니다.
결론
결론
말라기가 구약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약속한 것이 있었습니다. 의의 태양이 치료의 날개로 떠오를 것이다. 400년 뒤, 그 태양이 어떻게 떠올랐는지 아십니까. 한 나병환자의 피부에 손을 얹는 순간으로 떠올랐습니다. 추상적인 빛이 아니었습니다. 구체적인 손이었습니다. 말라기가 약속한 치료가 손이 됐고, 목소리가 됐습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 치료는 피부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관계로, 예배로, 삶 전체로 흘러갔습니다. 이것이 경계를 넘어 오신 분이 하신 일입니다. 율법도 사람도 넘지 못한 경계를 먼저 넘어 오셔서, 먼저 손을 내미시고, 먼저 원하시고, 삶 전체를 회복시키셨습니다. 오늘도, 지금도, 이 자리에서도. 예수님은 당신을 치유하기를 원하십니다. 당신의 피부만이 아닙니다. 당신의 관계, 당신의 예배, 당신의 삶 전체를 치유하기 원하십니다.
(PPT13) 지금 당신이 경계 밖에 서 있다고 느끼는 것이 있습니까. 수치 때문에, 실패 때문에, 오래된 상처 때문에, 반복되는 죄 때문에 — "이런 내가 나가도 되나"라는 그 마음. 아니면 오랫동안 예배 자리는 지켰는데 살아있는 기대를 잃어버린 것 같은 그 거리감. 그 경계 너머에서 예수님이 이미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당신이 먼저 깨끗해진 다음이 아닙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올 때 한 말이 있었습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능력이 아닌 의지를 물은 것입니다. 그 질문에 예수님이 답하셨습니다. θέλω — 원하노라. 지금도 그 대답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PPT14) 오늘 "원하시면 저를 치유하실 수 있나이다." 나병환자의 고백처럼, 자격을 갖추려 하지 말고, 완벽한 믿음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니까, 나병환자처럼, 지금 이 상태로 주님 앞에 나아가길 축원합니다. — 그것이 믿음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서 성령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받으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의 그 한 문장을, 성령님이 받아 치유로 이끄십니다.
잠깐 눈을 감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 앞에 조용히 나아가 봅시다. 지금 당신의 삶에서 치유가 필요한 곳을 하나 생각해보십시오. 피부일 수도 있고, 관계일 수도 있고, 오래된 예배의 거리감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이 말을 해보십시오. "원하시면 저를 치유하실 수 있나이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결단찬양>
내 모습 이대로
<말씀노트>
Q1. 나병환자가 격리된 곳에서 "부정하다"고 외쳐야 했던 것처럼, 우리도 실패, 수치심, 혹은 반복되는 죄 때문에 스스로를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자'로 격리하곤 합니다. "이런 상태의 나를 하나님이 원하실까?"라고 주저하게 만드는 내 마음속의 '경계'는 무엇인지 솔직하게 이야기해 봅시다.
Q2. "예배가 끝난 후, 내가 '제사장(공동체)'에게 보여줘야 할 나의 변화는 무엇인가요?" 주일 예배의 감동이 월요일의 삶으로 이어지기 위해, 내가 이번 주에 구체적으로 '회복'해야 할 관계나 행동은 무엇인지 정해봅니다. (예: 먼저 사과하기, 비난하는 말 멈추기, 고립된 친구에게 연락하기 등)
주님, 오늘 우리 앞에 이 장면을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400년의 침묵을 건너 손을 내미신 당신을 봤습니다.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경계를 먼저 넘어 오신 당신을 봤습니다. 우리는 오늘, 나병환자처럼 나아옵니다. 원하시면 저를 치유하실 수 있나이다. 우리의 피부를, 우리의 관계를, 우리의 예배를. 삶 전체를. 당신이 원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 손이 지금 우리를 향해 내밀어져 있음을 믿습니다. 성령님, 지금 이 자리에서 일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