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부5.5)
Notes
Transcript
찬양/실로암, 꽃들도
찬양/실로암, 꽃들도
묵상기도
묵상기도
신앙고백
신앙고백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 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찬송가/304장
찬송가/304장
말씀(구.109)
말씀(구.109)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나와 다투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시험하느냐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서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그가 그 곳 이름을 맛사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서론
서론
사랑하는 소망부 성도 여러분, 오늘 아침 예배에 참 잘 오셨습니다. 한 주간도 주님의 은혜 가운데 지내셨습니까? 지난 한 주 동안 몸은 어떠셨는지요? 어르신들 한 분 한 분의 얼굴을 뵈는 것만으로도 제 마음에 은혜가 됩니다. 이렇게 주일마다 주님 앞에 나와 앉아 계신 그 모습 자체가, 평생 주님을 붙들고 살아오신 믿음의 증거입니다.
오늘 우리 함께 출애굽기 17장 말씀을 펴기 전에, 한 가지 가슴 아픈 이야기를 먼저 나누려고 합니다. 얼마 전 보건복지부에서 발표한 통계를 보면, 2024년 한 해 동안 대한민국에서 3,924명의 사람이 '고독사'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숫자로만 들으면 쉽게 느껴지지 않지만, 이것은 하루에 열 명이 넘는 분들이 가족도, 이웃도, 아무도 곁에 없이 홀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는 뜻입니다. 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이분들 중 상당수가 돌아가신 지 며칠이 지난 뒤에야 집주인이 월세가 밀렸다고 문을 두드리다가 발견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도 찾지 않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고, 아무에게도 연락이 닿지 않은 채, 텅 빈 방에서 마지막 숨을 내쉰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하나님 없는 결핍'의 끝자락입니다. 결핍 자체가 비극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면서 결핍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돈이 부족할 때도 있고, 건강이 약해질 때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핍의 자리에 아무도 없는 것, 의지할 분이 없는 것, 불러도 대답이 없는 것, 그것이 진짜 비극입니다. 하나님 없이 맞이하는 결핍은 절망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결핍은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결핍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물 한 모금 없는 메마른 광야에 서 있지만, 그 결핍의 한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계시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결핍을 통해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주시려고 했던 놀라운 은혜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 인생의 결핍이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그리고 그 결핍 속에서 우리가 만나야 할 분이 누구인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대지 1: 결핍은 하나님께 집중하게 합니다.
대지 1: 결핍은 하나님께 집중하게 합니다.
본문 1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여호와의 명령대로 신 광야에서 떠나 그 노정대로 행하여 르비딤에 장막을 쳤으나 백성이 마실 물이 없는지라."
여러분, 이 한 구절에서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한 마디가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의 명령대로"**라는 말입니다. 백성들이 길을 잘못 들어서 물 없는 르비딤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친히 앞장서 인도하셔서, 물 한 방울 없는 그 땅에 데려다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은 사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적인 인도였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 점을 매우 중요하게 짚습니다. 이전에 마라(15장)에서도 쓴 물의 자리로 하나님이 인도하셨고, 만나(16장)에서도 먹을 것이 없는 광야로 하나님이 이끄셨으며, 오늘 르비딤(17장)에서도 마실 물이 없는 곳으로 하나님이 일부러 데리고 오셨습니다. 매번 결핍의 자리였습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당신의 백성을 이렇게 계속 결핍의 자리로 인도하셨을까요? 벌을 주시려고 그러셨을까요? 미워하셔서 그러셨을까요? 결코 아닙니다.
모세가 훗날 신명기 8장에서 이 광야의 시간을 돌아보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결핍의 자리로 인도하신 이유는 단 하나, "너를 알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내 손에 가진 것이 많을 때는 결코 배울 수 없는 가장 귀한 진리를, 하나님은 오직 결핍의 자리에서만 가르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생겼기 때문입니다. 창고가 가득 차 있을 때, 통장이 넉넉할 때, 자식들이 다 잘되고 있을 때, 우리는 솔직히 하나님을 깊이 찾지 않습니다. 입으로는 감사하다고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내 능력, 내 노력, 내 자식을 의지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내 힘으로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자리에 서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시선은 내 손에서 떨어져 나와 하늘로 향하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이 하나님께 집중되는 순간입니다.
열왕기상 17장에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가 하나 나옵니다. 사르밧이라는 작은 마을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과부의 집에 무엇이 있었는지 아십니까? 통에 밀가루 한 줌, 병에 기름 조금. 그게 전부였습니다. 남편도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고, 내일을 기약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 과부가 무엇을 하려고 했는지 아십니까? 남아 있는 재료로 마지막 빵 한 덩이를 만들어 아들과 나누어 먹고, 그다음에는 둘이 함께 죽으려고 했습니다. 인생의 가장 밑바닥, 완전한 결핍, 절망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에, 하나님이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셨습니다. 엘리야가 와서 하는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먼저 나를 위해 작은 떡 하나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라." 이 말이 얼마나 기막힌 요구였겠습니까? 마지막 양식으로 남은 한 줌의 밀가루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부가 순종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수년 가뭄이 끝날 때까지 밀가루 통이 비지 않고, 기름병이 마르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 과부가 언제 하나님의 이 놀라운 능력을 만났습니까? 밀가루가 가득 차 있을 때요? 아닙니다. 통의 바닥이 보이고 병에 기름이 한 방울 남아 있을 때, 바로 그 결핍의 자리에서 만났습니다. 풍족할 때는 결코 만나지 못했을 하나님을, 결핍이 그녀로 하여금 만나게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어르신들, 오늘 여러분의 삶에도 결핍이 찾아왔습니까? 예전처럼 마음대로 걸어다닐 수 없고, 맛있는 것도 마음껏 드시지 못하고, 예전에는 척척 해내던 일도 이제는 누구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게 되셨습니까? 자식들은 다 제 갈 길로 가고, 친구들은 하나둘 먼저 떠나가고, 때때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셨습니까? 그 자리가 하나님이 나를 버리신 자리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르비딤으로 인도하신 그 하나님이, 사르밧 과부의 빈 통 앞에 엘리야를 보내신 그 하나님이, 바로 오늘 여러분을 이 결핍의 자리로 인도하신 그 하나님이십니다.
"이제는 네 힘을 의지하지 말고, 오직 나만 바라보아라. 네가 평생 의지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직 나만 붙들어라."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께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결핍은 저주가 아닙니다. 결핍은 우리의 시선을 내 손에 쥔 것, 내 몸의 건강, 내 통장의 잔고에서 떼어내어,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게 만드시는 주님의 깊은 사랑입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의 결핍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그 결핍을 통해 더 깊이 하나님께 집중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대지 2: 결핍은 깨어진 반석에서 생명수를 고대하게 합니다.
대지 2: 결핍은 깨어진 반석에서 생명수를 고대하게 합니다.
그런데 결핍의 자리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이르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 거기서 백성이 목이 말라 물을 찾으매 그들이 모세에게 대하여 원망하여 이르되 당신이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우리와 우리 자녀와 우리 가축이 목말라 죽게 하느냐."
그리고 7절에서 결정적인 말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여러분,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아십니까? 한 성경학자는 이 질문을 이렇게 비유합니다. 지금 마라톤을 한창 뛰고 있는 선수에게 다가가서 "너 혹시 이 경기에 참가하긴 한 거야?" 하고 묻는 것과 같고, 부엌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저녁밥을 짓고 있는 어머니를 향해 "오늘 저녁 우리 밥은 먹는 거야, 안 먹는 거야?" 하고 따지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모욕입니까? 눈앞에서 구름기둥이 움직이며 길을 인도하고 있고, 매일 아침마다 만나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데, 그 한복판에 서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긴 한 건가?" 이렇게 물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 백성들이 너무했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우리 자신을 한번 돌아봅시다. 우리도 고난이 찾아올 때 속으로 이 질문을 던지지 않습니까? 병상에 누워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 같을 때, 사랑하는 가족이 떠나갈 때, 자식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할 때,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 이런 말이 흘러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계시긴 한 건가?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시긴 한 건가? 이럴 거면 하나님이 계신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이것이 우리 속에 숨어 있는 죄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이스라엘 백성과 똑같은 연약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반응을 보십시오. 5절과 6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나일 강을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호렙 산에 있는 그 반석 위 거기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여러분,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 뻔뻔한 백성들에게 벼락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심판의 말씀도 없으셨습니다. 오히려 생수를 내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냥 물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반석을 치라"고 하셨습니다. 히브리어로 '치라'는 말은 그냥 가볍게 톡 치는 것이 아닙니다. 강하게 내리치는 것, 깨뜨리는 것을 뜻합니다. 반석이 맞아야만, 반석이 깨어져야만 그 안에서 생명의 물이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왜 이토록 중요한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직접 해석해 줍니다. 바울은 이 광야의 반석에 대해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아멘. 광야에서 깨어진 반석은 훗날 골고다 십자가에서 깨어지실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였습니다. 지팡이로 반석이 맞아 깨어졌듯이, 예수님은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에 찔리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마지막에는 로마 군병의 창에 옆구리까지 찔리셨습니다. 요한복음 19장 34절을 보십시오.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반석이 깨어져 생수가 터진 것처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찢기시니 우리를 살리는 영원한 생명의 물이 흘러나온 것입니다.
이제 광야의 세 사건을 한번 정리해 봅시다. 출애굽기 15장 마라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물이 있었지만 써서 마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무 한 그루를 던져 쓴 물을 달게 하셨습니다. 그 나무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쓴 인생을 달게 바꾸시는 십자가였습니다. 16장 만나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6장에서 "내가 곧 하늘에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나가 곧 그리스도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17장 르비딤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반석을 깨뜨려 생수를 터뜨리셨습니다. 그 반석이 곧 그리스도였습니다.
여러분, 광야의 이 세 사건은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반역하여 죽어야 할 백성들이 매번 그리스도의 예표를 통해 살아나는 구속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훗날 골고다 언덕에서 완성될 그 위대한 구원의 '미리보기'였습니다. 죄로 인해 마땅히 죽어야 할 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 이것이 복음의 심장이요, 우리가 받은 세례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봅시다. 반석은 깨어져야 생수를 내보냈습니다. 강한 것은 깨어짐을 통해 비로소 생명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 인생에도 이런 원리가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강하고 건강하고 자신만만할 때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잘 흘러가지 않습니다. 내가 다 채워져 있으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늙고 연약해지고 깨어져서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통해 흘러나가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어르신들, 결핍의 자리에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 메마르고 목마른 자리에서, 우리는 우리를 위해 깨어지신 반석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내 힘이 다한 곳에서 그리스도의 생수가 시작됩니다. 내 자랑이 무너진 곳에서 주님의 영광이 드러납니다. 여러분의 늙고 연약한 육신이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나오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 결핍의 자리에서 깨어지신 반석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분에게서 터져 나오는 영원한 생수를 받아 마시는 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대지 3: 결핍의 경험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합니다.
대지 3: 결핍의 경험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7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다투었음이요 또는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모세는 이 사건이 일어난 곳에 이름을 붙입니다. '맛사와 므리바.' 히브리어로 '맛사'는 '시험'이라는 뜻이고, '므리바'는 '다툼'이라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하면 '의심과 원망의 자리'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보통 우리는 좋은 일이 일어난 장소에 좋은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까? '승리의 언덕', '은혜의 샘'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왜 모세는 굳이 이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이름을 붙여서 역사에 남겼을까요?
잊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게 하나님을 의심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반석을 깨뜨려 살려주셨는지, 그 두 가지를 모두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핍의 기억은 부끄러운 기억이 아닙니다. 결핍의 기억은 곧 은혜의 기념비입니다. 왜냐하면 결핍이 컸던 만큼, 그 결핍을 채워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컸는지 똑같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제가 여러분께 한 실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1945년 12월, 북한에서 공산주의를 피해 월남한 스물일곱 명의 피난민이 서울에 모였습니다. 고향을 잃고, 재산을 잃고, 교회를 잃고, 오직 목숨만 건져 맨몸으로 38선을 넘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을 중심으로 이 피난민들이 모여서 일본 천리교 건물을 얻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교회의 이름이 처음에는 '베다니 전도교회'였고, 훗날 이름을 바꾼 것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영락교회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완전한 결핍의 자리에서 시작한 이 교회를, 하나님은 놀랍게 채워주셨습니다. 스물일곱 명으로 시작한 교회가 5년 만에 교인 수가 2,600명으로 불어났고, 1950년 5월에는 아름다운 석조 예배당까지 완공하여 6월 4일 감격적인 입당예배를 드렸습니다. 피난민들이 눈물로 드린 헌금과 기도로 지은 예배당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입당예배를 드린 지 정확히 3주 만에, 그러니까 6월 25일, 한국전쟁이 터진 것입니다. 그날이 바로 주일이었습니다. 영락교회 성도들은 새 예배당에서 주일 예배를 드렸고, 예배가 끝날 무렵 포탄 소리를 들으며 모두 흩어져 피난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토록 눈물로 지은 새 예배당을 두고 떠나야 했습니다. 두 번째 결핍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고향을 잃었고, 이번에는 겨우 세운 예배당까지 잃었습니다.
1951년 1월 7일, 부산에 도착한 영락교회 성도 서른 명 정도가 모였습니다. 부산 광복동의 고려신학교 강당에 모여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살 집도 제대로 없고, 먹을 것도 부족하고, 모든 것이 또다시 '제로'에서 시작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여기서 정상적인 반응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겨우 지어놓은 교회를 또 잃어야 합니까?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이렇게 원망하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성도들은 놀라운 반응을 보였습니다.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로 첫 번째 결핍의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1945년에 우리가 스물일곱 명으로 맨몸으로 시작했을 때도, 하나님이 채워주셔서 2,600명의 교회가 되었다. 지금 서른 명으로 다시 시작해도, 하나님은 또 채워주실 것이다." 첫 번째 결핍에서 채워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번째 결핍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피난 성도들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눈물의 헌금을 모았고, 1953년 6월, 휴전을 한 달 앞두고 부산 서구 부민동에 105평 규모의 석조 예배당을 세웠습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부산영락교회입니다. 첫 번째 결핍의 기억이 두 번째 결핍을 이기는 힘이 된 것입니다. 결핍의 경험이 이들을 무너뜨리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게 하여 다음 결핍을 이길 믿음의 근거가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어르신들, 오늘 이 자리에서 지나온 70년, 80년의 세월을 한번 잠잠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일제강점기의 고통을 지나오셨습니다. 6.25 전쟁의 포화 속을 지나오셨습니다. 보릿고개의 굶주림을 견뎌내셨습니다. 자식들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느라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사셨습니다. 때로는 병상에서 죽음 직전까지 갔다가 돌아오신 적도 있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를 먼저 떠나보낸 찢어지는 아픔도 겪으셨을 것입니다. 쌀독이 바닥나서 내일 무엇을 먹을까 막막했던 밤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두려움에 잠 못 이루던 새벽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정직하게 대답해 보십시오. 그 모든 결핍의 밤을 지나는 동안, 하나님이 단 한 번이라도 여러분을 모른 척하신 적이 있었습니까? 쌀독이 비었을 때 어디서인가 쌀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병상에 누웠을 때 일어날 힘이 주어지지 않았습니까? 외로움에 울 때 누군가 곁에 보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 모든 순간마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반석을 깨뜨려 생수를 터뜨리듯이, 우리의 결핍의 자리마다 찾아와 채워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지나온 그 고통의 밤들이, 지금 돌아보면 다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하는 기념비입니다. 여러분의 주름진 손, 휘어진 허리, 쇠약해진 다리, 그 하나하나가 다 '맛사와 므리바'입니다. 의심하고 원망했던 부끄러운 순간도 있었지만, 그 순간마다 하나님이 반석을 깨뜨려 살려주신 은혜의 기념비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어르신들, 잘 들으십시오. 지금까지 그렇게 한 번도 빠짐없이 채워주신 그 하나님이, 앞으로 남은 여러분의 날들은 모른 척하시겠습니까? 결단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고 찬송하는 것이 단순한 가사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인생 전체가 그 찬송의 실증입니다. 그리고 어제까지 신실하셨던 하나님은, 오늘도 신실하시고, 내일도 신실하실 것입니다. 지나온 결핍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듯이, 그 기억은 오늘도 남은 결핍 앞에서 우리를 담대하게 만드는 힘이 됩니다.
결론
결론
사랑하는 소망부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은 결핍의 자리를 통해 우리의 시선을 오직 주님께 고정시키시고, 깨어진 반석에서 터지는 생수를 간절히 고대하게 하시며, 지나온 결핍의 모든 순간에 채워주신 은혜를 기억하게 하십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이 메마른 광야처럼 느껴지십니까?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 자리가 반석이신 그리스도에게서 터지는 영원한 생수를 만나는 가장 복된 자리입니다. 내 힘을 내려놓고 우리를 위해 깨어지신 반석 예수님만을 의지하며, 남은 생애를 소망 가운데 담대히 걸어가시는 복된 성도님들이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