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rmon Tone Analysis

Overall tone of the serm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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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ne of specific sentences

Tones
Emotion
Anger
Disgust
Fear
Joy
Sadness
Language
Analytical
Confident
Tentative
Social Tendencies
Openness
Conscientious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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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reeableness
Emotional Range
An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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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과 은사
고전 12:4-13, 성령강림절, 2014년 6월8일
오늘은 전 세계의 모든 교회가 성령강림절로 지키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 승천 이후 유대인들의 여름추수 절기에 해당되는 오순절에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이 예루살렘의 마가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 자리에 불과 바람의 형태로 임한 사건을 기리는 절기입니다.
오늘 제1 독서인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성령강림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성령강림 이후로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성령의 피조물이라 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성령과 교회는, 그리고 성령과 기독교인은 불가분리의 관계라는 뜻입니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 사실을 절감하지 못합니다.
그럴만합니다.
성령은 바람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습니다.
마가다락방에서 나타났다는 불과 바람 현상을 지금 우리가 다시 똑같이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독교인들은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고 싶어 합니다.
신유나 방언 등등이 그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성령의 증거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향은 주로 오순절 계통의 교회에서 강하게 나타납니다.
보통 은사주의운동이라고 합니다.
이런 집회는 열광적으로 진행됩니다.
찬송도 열광적으로 부르고, 기도도 열광적으로 합니다.
소위 ‘주여, 삼창’에 이은 통성기도는 보통이고, 집단적으로 방언기도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신앙 행태에 동의하시는지요?
아니면 동의하지 않으시는지요?
각각의 근거는 있는지요?
2천 년 전 고린도 교회에도 이런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이와 관련된 주제를 세 장에 걸쳐서 언급했습니다.
고전 12-14장입니다.
12장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13장은 사랑에 대해서, 14장은 방언과 예언에 대해서 다룹니다.
12장의 중심 주제인 은사라는 단어는 헬라어 카리스마의 번역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저 사람은 카리스마가 있어.’라고 말할 때의 그 카리스마입니다.
그 의미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카리스마가 있다는 말은 다른 사람이 간섭할 수 없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그 카리스마의 종류를 고전 12:8 이하에서 아홉 가지나 열거합니다.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치는 은사,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이 그것입니다.
아홉 가지 은사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분류해서 보면 그 성격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지혜의 말씀과 지식의 말씀은 성경을 바르게 잘 가르치는 능력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목사나 교사들이 주로 하는 일입니다.
이런 것이 다 은사입니다.
예언은 점쟁이처럼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짚어내는 능력이라기보다는 설교에 해당됩니다.
영 분별은 설교가 참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것입니다.
설교라고 해서 모두 바른 게 아닙니다.
고대 선지자들 중에서도 거짓 선지자들이 많았습니다.
잘못된 설교가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도 은사입니다.
이 네 가지는 다 성경의 가르침과 연관되는 은사입니다.
2) 특이하게 믿음도 은사의 목록에 나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믿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서는 믿음이 기적 행하는 능력과 비슷한 것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위 목록의 다섯 번째에 나오는 능력 행함과 비슷한 겁니다.
병 고치는 은사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신유라고 부릅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은 이것에 관심이 아주 많습니다.
신유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집회가 곳곳에서 열립니다.
불치병이나 난치병에 걸린 사람은 병이 낫는다는 말에 무조건 솔깃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유집회를 통해서 일정한 정도로 병에 차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는 기도를 받지 않았다고 해도 일어날 수 있는 정도입니다.
성경에 기도로 병을 고쳤다는 말이 있다고 해서 지금도 무조건 그런 식으로 병을 고치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오늘날 치료 행위는 의사의 업무입니다.
의사의 능력이 바로 카리스마입니다.
어쨌든지 당시 고린도교회에는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만은 분명하고, 바울이 그것을 성령의 은사라고 말한 것도 분명합니다.
그 시대의 특징입니다.
3) 바울은 마지막으로 방언과 방언 통역을 은사로 제시합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서 가장 시끄러웠던 문제가 바로 방언이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신자들끼리 갈등이 생기고, 예배의 질서가 흐트러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4장 전체를 이 문제에 대한 해명에 할애했습니다.
한 마디로 ‘방언하는 사람들아, 좀 자중해라.’
이겁니다.
여기서 다뤄지고 있는 방언은 남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라틴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이 ‘키리에 엘레이송’의 반복 발음을 들으면 방언으로 들릴 겁니다.
방언도 옳은 방언이 있고, 거짓 방언도 있습니다.
고도의 영적 경지에서 기도를 드리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다른 소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무당들도 어떤 단계에 들어가면 그런 현상을 보입니다.
다른 종교에도 비슷한 현상이 다 있습니다.
시인이나 음악가들도 어떤 경지에 들어가면 자기도 모르는 소리를 냅니다.
이런 방언은 아주 자연스러운 겁니다.
반면에 어떤 방언은 흉내 내는 것, 또는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겁니다.
방언을 가르치고 배우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은 혼자 있을 때만 할 것이며, 회중 앞에서 할 때는 반드시 통역이 있어야 한다고 충고했습니다.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다루는 고전 12장과 그중에 대표적인 방언을 다루는 14장 사이의 13장에서 사랑을 말합니다.
고전 13:1-3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자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기에도 여러 은사들이 열겁니다.
방언, 천사의 말, 예언, 믿음, 구제 등등입니다.
이런 것들이 중요하기는 하되 더 근원적인 것에는 비할 바가 되지 못합니다.
더 근원적인 것은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친절하게 대하고, 도와주고, 생일을 기억해주고, 이벤트를 벌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 은사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는 사랑은 그런 은사와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고전 13:4절 이하에 따르면 사랑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랑은 곧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생명의 힘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만이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은사와 방언이라는 주제를 거론하면서 뜬금없이 중간에 사랑을 언급한 이유는 고린도교회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방언을 비롯해서 여러 가지 은사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문제로 다투기도 하고, 누구에게서 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문제로 한 교회 안에서 파당을 짓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모습을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아주 과격하게 말한 겁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 모든 은사는 ‘말짱 꽝’이라고 말입니다.
바울의 영적 통찰력이 놀랍습니다.
그는 기독교 신앙과 신앙생활의 본질을 정확하게 진단했습니다.
은사 문제에 대한 바울의 이러한 신학적 입장을 바탕에 놓고 오늘 설교 본문을 읽으면 그 의미가 훨씬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 12:8-10절에서 아홉 개의 은사를 거론하면서 ‘성령으로’, 또는 ‘같은 성령으로’라는 단어를 반복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은사 자체라기보다는 은사의 근원입니다.
은사의 근원은 성령입니다.
은사는 성령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강조입니다.
4-7절에서 바울은 이 사실을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위 문장에서 볼 수 있듯이 은사는 다양하지만 은사를 가능하게 하는 성령은 동일합니다.
그러니 신자들은 은사를 자랑하기보다는 성령에게 마음을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7절에 나온 ‘유익하게 하려’라는 표현을 루터는 공동의 유익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은사는 개인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전체의 유익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개인의 은사는 교회 공동체의 질서와 유익을 파괴하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목사의 은사는 크게 나타납니다.
예배를 드릴 때 목사의 역할이 가장 커 보입니다.
예배만이 아니라 다른 교회의 업무에서도 목사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목사의 카리스마가 우월하다고 여깁니다.
반면에 주일학교 어린이를 가르치는 일이나 청소하는 일은 작아 보입니다.
겉으로 그럴듯하게 드러나지 않는 일은 교회에서 인정받기 힘듭니다.
이게 오늘날 교회의 현실입니다.
이것은 카리스마의 왜곡입니다.
목사의 일이나 아이들 가르치는 일이나 청소, 이런 모든 일들은 동일한 성령에서 나온 것에 불과합니다.
뿌리가 똑같습니다.
성령이라는 뿌리에서 큰 가지가 나기도 하고 작은 가지가 나기도 합니다.
각각 모양과 역할은 다르겠지만 모두가 동일한 성령에서 주어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은사들은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동일한 겁니다.
무슨 말인가요?
각자의 은사가, 즉 일상을 포함한 모든 신앙적인 삶이 성령으로부터 주어졌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뚫어볼 수 있다면 다른 사람과의 차이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이는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자기의 삶이 성령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이 아쉬울 게 있겠습니까?
또한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은사도 똑같이 소중하게 여깁니다.
잘난 척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이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즉 성령론적인 차원에서 동일하다는 사실에 영혼이 휩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일상의 차원에서 설명하는 게 이해하기 좋을 겁니다.
사람이 하루에 밥을 몇 번 먹을 수 있는지를 보십시오.
부자나 가난뱅이나, 지식인이나 무식쟁이나, 미국 사람이나 북한 사람이나 똑같이 하루 세끼입니다.
숨을 몇 번 쉬는지 보십시오.
잘난 사람은 더 많이 쉬고, 못난 사람은 더 적게 쉬는 게 아니라 거의 비슷하게 20번 정도 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모든 이들에게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그것에 비해서 나머지들은 별 거 아닙니다.
이 사실에 마음을 두는 사람은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볼 것입니다.
고린도교회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그렇게 살아가는 게 잘 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비교하고, 다투고, 잘난 척하고, 주눅 들고 합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으나 그런 방식으로 신앙과 삶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세상은 더 말할 것도 없지만, 성령의 피조물인 교회공동체 안에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을까요?
이 한계를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요?
성령에 대한 오해를 바로 잡는 게 여기서 중요합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게, 즉 성령과의 관계를 맺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우선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오늘 설교 본문 바로 앞 구절인 고전 12:3절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여기서 예수님에 대한 두 가지 태도가 나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저주할 자라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을 주라 하는 것입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저주할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사람, 즉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전형적인 표현으로 ‘나무에 달려 죽은 자’라는 게 그걸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했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에게 저주할 자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그렇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그런 세상의 평가와 반대되는 것입니다.
이런 고백은 성령을 받지 않으면 아니면 안 됩니다.
성령을 받은 가장 핵심적인 증거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믿는 것입니다.
성령과의 관계가 깊어졌다는 것은 곧 예수에게 집중한다는 뜻입니다.
성령의 문제에서 이것 말고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사실을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 마지막 구절인 13절에서 다시 확인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었든지 아니면 헬라인이었든지, 그리고 자유인이었든지 아니면 종이었든지 모두 똑같이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하나가 되었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영적 통찰입니다.
민족의 차이, 신분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세례는 곧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살았다는 사실에 대한 종교적 의식입니다.
이 세례는 앞에서 인용한 고전 12:3절이 가리키듯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함으로써 받을 수 있습니다.
결국 성령과의 관계는 예수와의 관계입니다.
이런 관계에서만 은사는 은사로서의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대는 교회 안이나 밖이나 은사주의에 매몰되어 있습니다.
누가 잘났냐 하는 것에만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연봉의 차이가 인간을 구별합니다.
그래서 세상살이가 온통 다툼입니다.
은사를 개발하고 촉진하는 데만 정신을 파느라 은사의 원천을 놓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니, 잊지 마십시오.
은사의 크고 작음이 아니라 성령과의 친밀도가, 즉 예수님과의 친밀도가 우리의 삶을, 우리의 운명을 실질적으로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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