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읽는 주기도문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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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열며_누가 주기도문을 죽였는가?

오늘날 우리는 주기도문의 예배의 모임을 끝나는 기도문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칫하면 주기도문을 진정으로 진정한 의미를 모른 채 그저 엎드리는 것을 일상처럼 받아들이게 만듭니다. 너무나 많은 경우에 주기도 형식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주기도 암송하거나 주님의 기도는 들려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주기도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종교 개혁자 마리틴 루터가 주기도문 역사상 가장 끔찍한 순교자라고 말한 것은 주기도물을 오용하고 있는 당시 교회 형실을 전국을 찌른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그는 자신의 책 진정한 기도에 이르는 쉬운 길에서 다음같이 말합니다.
(00:52) 한해 동안에만 얼마나 많은 주위도문을 외워지고 있는가. 그러나 그런 식으로 수천년 동안 외운다 할지라도 주기보 본문의 안에 있는 1.1액기라도 진정한 의미를 맛보거나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로서 드려지 어 보지 못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과 이름이 그러하듯이 주기도 말로 지상에서 가장 끔찍한 순교자이다. 주기도 온몸으로 고문을 당해 왔고 오용 되어왔으며 오직 소수의 신자만이 그것을 올바로 사용하여 위로와 기쁨을 누렸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어나오는 확신과 사랑으로 주기도문을 따라 기도할 수 있다면 그는 최고의 영적 상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01:48) 우리가 주기도문의 기도를 자신의 기도를 올릴 수 없는 것은 그것을 가르쳐 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라보시는 삶의 관심사와 우리의 그것에 매우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이 기도문을 당신 올리셨던 기도만 기억하고 기념하라고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기를 원하셨기에 주셨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온 마음이이 주기도문의 내용에 깊이 스며들며 들어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부터 배운 기도문이라는 사실 추차 잃어버리기를 바라실 줄로 모릅니다.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며 성경에 기록된 말씀으로 기도를 대신하실 때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02:46) 시편 43편 2절 마태복음 27장 46절 복된 회심의 결실을 맞이하고 주님을 깊이 만났을 때 제가 경험한 가장 큰 변화는 예수님의이 기도가 저의 기도가 되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내용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방식에 있어서도 주기도문은 저 자신의 기도가 되었고 저의 삶의 형통함을 위하여서는 그럴 수 없었어도 하나님의 나라가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을 보면서는 찢어질 듯 아픈 마음으로 올릴 수 있는 기도가 되었습니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 열심 열렬히 기도할 때도 있었고 그러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제 상태와 상관없이 주기도문은 언제나 제 마음 속에서 저의 삶의 진정 진실성과 기도의 열렬함을 묻는 주님의 음성이었습니다.
(03:45) 주기도문은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만들어낸 기도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평소 기도하시던 형식을 요약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의 자세뿐만 아니라 삶에서 울어나오는 기도의 틀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습니다. 주기도문에 나타난 기도의 형식은 평소 예수 그리스도께서 기도하시던 틀이었고 동시에 당신께서 실제로이 땅에서 살아가셨던 삶의 양식이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이 특별한 기도는 우리에게 단지 기도 자체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 백성들의 공동체의 정체성과 성격 그들이 살아가며 추구해야 할 삶의 가치를 같이 보여줍니다.
(04:40) 다시 말해서 주기도문은 우리에게 예수 신앙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주기도문이 갖는 이러한 신학적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이 기도는 곧이 땅에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입니다.이는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고 있는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그리스도의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기도문은 또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바라보게 하는 낸즈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우리는 몸속 그 기도의 시련을 위해 살아가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삶을 발견하고 그분의 모본을 따라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05:31) 하나님의 마음에 가장 기쁨을 드리는 신자는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가는 신자입니다. 기도의 열렬함과 삶의 치열함이 서로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의 삶이 주기도문의 삶을 사는 사람들만이 주기도문을 자기의 기도로 삼아 눈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기도문을 배워하는 동안 기도홀 주기도문을 배워가는 동안 기도 홀로 온전해져 가는 것을 기대하지 말고 삶이 기도를 반영하여 온전히 서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만큼 살 수 있고 사는 것만큼 기도할 수 있기에

제 1장 살아 계신 하나님

깊이 읽는 주기도문_01_살아계신 하나님 01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eZgQb5AlW3w
Transcript:
(00:00)
제 1부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
제 1장 살아계신 하나님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 마태복음 6장 9절 상반절
예수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기를 많이 마치신(06:37) 때였습니다. 입니다. 어, 제자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창하였습니다. 누가복음 11장 1절. 주님께서는 그 부탁을 따라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올바른 기도를 배우고 싶어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께 기도를 배움으로써 온전한 실천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I. 들어가는 말.

본문은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첫 번째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가르침이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누가복음 11장 2절에서 한이 구절이 마태복음에는 다음과 같이 좀 더 상세하게 실려 있습니다.
(07:36)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태복음 6장 9절 기도는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이 누구인지를 가장 잘 보여줍니다. 그는 세상이나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초구하며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생명력 넘치는 풍성한 기도의 실천은 한자가 하나님과 온전한 평화를 누리고 있다는 가장 탁월한 증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한히 자비로우시다는 명목 아래 기도를 단지이 땅에서 자신의 욕망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하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와는 반대로 우리의 행복을 더욱더 간절히 추구하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08:23) 성경의 모든 이야기가 복음서로 압축될 수 있다면 구원받은 성도로서 살아가야 할 복음적인 삶의 모든 내용들은 주기도문으로 압축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이 기도의 형식은 오늘 우리의 기도를 묻기 전에 우리 삶의 초점을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사실과 우리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이심을 늘 기억하며 살고 있습니까? 기도와 삶은 불과불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한만큼만 살 수 있고 하나님 앞에서 사는만큼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제껏 하나님을 향해 열렬하게 살았던 사람들은 지금 열렬하게 기도할 수 있고 지금 열렬하게 기도하는 사람이라야 앞으로 열렬하게 살 수 있을 것입니다.
(09:13) 그러므로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는 삶의 도처에서 멸시받는 하나님의 이름 때문에 마음 아파했던 사람들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기도하는 우리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께 대한 올바르고 풍부한 지식이야말로 우리를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게 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4장 6절.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지식을 버린 것은 곧 하나님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그 지식은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지식은 사랑이나 진실과 나닐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호세야 4장 1절. 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추구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알기를 힘쓰는 것이었습니다.
(10:01) 호세야 6장 3절. 온전하고 능력 있는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에서 나옵니다. 기도는 삶을 능가할 수 없고 삶을 능가하는 기도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 살 수 있고 또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II. 하나님께서는 존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기도할 때 가장 먼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라고 가르쳤습니다. 요복음에는 간략하게 아버지여라고만 되어 있지만 병행 기사인 마태복음에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와 거룩하심에 대하여 말 생각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또한 기도를 올리는 동기가이 세상에서의 삶의 현실에 있다고 해도 기도를 울 때 바라보아야 할 대상은 땅에 있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심을 가르쳐 주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11:01) 저는 이 책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에 대하여 세 장에 걸쳐서 해석하려고 합니다. 먼저 제 1장에서 계시 계신이라는 구절에서 2장에서는 하늘에 계시다라는 뜻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리고 3장에서는 우리 아버지여라는 구절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A 신이 없다고 믿는 세대.

먼저 계신이라는이 호칭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필현적으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이 없는 기도의 실천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실상 우리는 주변에서 하나님 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쉽게 만납니다.
(11:57)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해서 두 가지 무실론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사상적 무신론.

첫째로 사상적 무실론입니다.이는 가장 고유한 의미의 무실론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바와 같이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합니다. 어느새 시대 이건 자신들이 신의 현재를 믿어 믿을만큼 어리석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항상 있습니다. 현대인들 역시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부인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오늘날 일만은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악기는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12:48) 시편 시편 10편 4절.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는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분명한 명백한 증거를 찾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원하지 않기에 스스로 마음속에 하나님에 관한 증거들을 지어버려버린 결과입니다. 어머니 말해서 마음으로 하나님이 결코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애초부터 절대적인 가치 기준이나 도둑게 기준 근거가 없습니다. 혹 그들이 그러한 것들을 있다고 주장할지라도 매우 자유적이어서 그 근거를 묻는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을 만한 경고한 짓도 없습니다. 모든 시대의 모든 현대인에게는 각자의 원하는 바가 곧 도덕의 기준입니다.
(13:42) 그들은 자신을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행복이야말로 모든 우지의 최고의 가치라고 믿습니다. 물론 때로는 그것들도 인간의 보편적 도동률이나 공통적 선을 어느 정도 인정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연느 집단의 가치 기준으로 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인 성격을 가지지 못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달라지면 얼마든지 변하는 상대적인 것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진리조차도 언제나 잠정적인 것이지 최종적이고 궁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상대적 진리에 조차와 별 관심이 없습니다. 결국 진리를 추구하는 주체가 자신이라는 점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스스로를 신으로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14:28) 그리고 그러한 욕망을 따르는 삶은 사실상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얼마 전 얼마 전 제가 영국을 갔을 때 이종버스에 붙은 광판 하나가 눈길를 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을 없는 하나님은 없는 걸요. 걱정하지 말고 인생을 즐기세요. 왜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것이 사람들에게는 걱정거리가 될까요? 영국 인본주의 협회가 리처드키슨과 함께 그 광고를 위한 기쁨을 모은다고 하자 불과 나말에 우리나라 돈으로 약 1억 4천만 원이 모금되었다고 합니다. 회인은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데 충분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한달을 보려거나 중지하는 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불신앙은 명한 명백한 증거가 있는데도 믿지 않겠다는 완전한 고집입니다.
(15:29) 이 고집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지울 수 있는 가장 커다한 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현대에게는 현대인에게는 마치 합리적인 주장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오늘 현대인의 과학적 사고는 어 사상적 무실론의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과학이 무실론을 지지한다고 하기보다는 과학에 대한 신앙 없는 해석이 무신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자녀 교육에서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아이들은 교회에 와서 하나님께 대해 배우고 학교에 가서는 교회에서 배운 것들을 모두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가르침에 노출됩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품게 되고 결국 그것은 신념으로 부어져 불쌍이 됩니다.
(16:14) 우리가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칠뿐 아니라 과학을 가르쳐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부처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과학을 통해 발견한 객관적 사실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을 통해 그 올바른 의미를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에서 우리 자녀들이 근거없는 무신원의 편견에서 벗어나 온 땅과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를 발견하고 그들이 세계 배운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들로 거룩한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그리스도 안에서 복된 회심을 경험한 자녀들에게 한 손에는 성경을 다른 한 손에는 자연을 바르게 해석한 과학책을 들게 해 주어야 합니다.

2 실천적 무신론

둘째는 실천적 무실론입니다.
(17:02) 실천적 무실론의 영향은 사상적 무신론보다 더어보다 큰 것입니다. 하나님 없다고 하는 불신자들이 모든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은 무실론에 이한 실천들입니다. 시편 10편 4절. 그러나 더욱 염려되는 부분은 오늘날 신앙 고백자들이 어 실천적 무실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이 백성이 입술로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마태복음 15장 8절. 이것은 이슬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고백하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진 마음의 실제의 삶에서 하나님께 대한 공경이 없는 어 실천적 무신론의 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실천적 무실론은 신앙과 행위 사이에 불일치를 보여주어 세상 사람들의 불신앙을 확신을 더욱 강화시킵니다.
(18:04) 한 사람이 하나님의 존재를 지식적으로 인정할뿐만 아니라 그 지식이 그의 모든 신앙과 생활에 두루 영향을 미치는 지배적인 원리가 돼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은 껍질로만 유지한 채로 천적 무신론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매주 교회에 나와 설교를 듣고 찬양을 부르고 헌군도 하지만 대부분 식적으로 형실일 뿐입니다. 일주일 동안 삶에서 하나님이 살아계시 인정하는 증거가 보이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로 인해 이미 교회 역시 무실론적 생각과 실천이 감염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나왔으나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뼈저리에게 느끼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립니다.
(18:52) 교인한 이름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 안에서 들어왔다고 해서 삶은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이제는 세상에 부치는 자들 사이에 하나님이 없다는 삶을 살았다면 이제는 교회 안에 신자들 사이에도 하나님이 없다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우리는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했던 것처럼 무실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에 밖에는 사적 무실론에 교회 안에는 실천적 무신론에 둘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기도의 내용을 배우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하여야 합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존재하실뿐만 아니라 살아 계셔서 우리의 인생을 주관하시고 세계의 역사를 주어 주장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합니다.
(19:43) 이것이야말로 예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를 배우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기도의 실전적 동기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불타오르는 거룩한 경영심이야 합니다. 비록 무실론는 이렇게 사상적인 것과 실체적인 것으로 나누기는 하지만이 둘은 놀라울 정도로 밀접하게 괴롭어 있습니다. 사상적 무실론이 유회하는 곳에서는 실천적 무실론 대담하게 실체를 드러내고 실천적 무실론이 유한 곳에서 사상적 무실론 설득을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삶의 시천에 따르지 않는 지식의 강조나 사상의 이해를 동벌하지 않은 도덕적 강조가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20:35) 그러므로 우리는 진리에 대한 지식을 삶으로 실천하고 모든 삶의 실천을 지식에 기반해 두는 신앙을 추구해야 합니다. 만약 한 시대의 교회가 무실론이라는 괴질에 가면된 세상을 고치려고 먼저 자신이 저 두 가지 무실론의 질병에든 상태에 고침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이 두 가지 무실론의 질병 중 어느 하나라도지를 포기하고는 온전히 나음을 입을 수 없습니다.

B. 존재하시는 하나님

인간이 그 사실을 믿든지 그렇지 않든지 하나님께서는 존재하십니다. 구약뿐 아니라 성경 전체의 시작이고 인류를 향한 성경 계시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구체적으로 증명하며 설명하는 대신 간단하게 선언합니다.
(21:28)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세기 1장 1절. 하나님께서는 존재하실뿐 아니라 활동하십니다. 모든 세계는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실까 계시지 않을까 궁금해하는 인간 존재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계심으로 말미암아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 유대한 사실을 사색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것입니다.이 니처 니처드 도킨스 도킨스는 눈먼 시 시 시계공이라는 책을 통해 자연의 진화를 맹목적인 물리학의 힘의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만약 기나론에서 말하는 자연 선택을 자연의 시계공에 비유한다면 그것은 결국 눈이 먼 시 시 시계공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22:22) 무신 론자인 도킨스가 말하는 시계공은 비인격처이며 그 시 시 시계공이 눈 멀었다고 표현한 것은 지라노르 진하론의 자연 선택이 앞을 내다보는 것이 아니고 결과를 계획하는 것이 아니며 아무런 목적을 갖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자연 선택의 유력을 담같이 표현합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자연 선택의 결과 우리에게 압도적인 인상을 주어 마치 숙련된 시계공이 설계하고 계획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결국 그가 말하는 눈먼 시계공은 누적된 자연 진화의 힘 곧 우연적인 무식의 자연 서택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가 진화론으로 그 비밀이 풀렸다고 말하는 창조 세계.
(23:13) 그래서이 세계는 더 이상 신비하지 않다고 말하는 세계 안으로 세계 안에서 과학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와 아름다움을 대하면서 오히려 눈먼 도킨스라는 제목의 책을 쓰고 싶은 마음이 부릴듯 일어납니다. 어쩌면 그토록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는 많은 증거들을 부당한 방식으로 다루는지 도킨슨의 발상과 재능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증거는 세계에 가득차 있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민족, 어느 시대이건간에 만물 안에 가득차는 신성을 인식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그것을 전적으로 부인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했으나 신이 존재하는 증거를 마음속에 전혀 가지고 있지 않던 민족과 나라는 없었습니다.(24:10) 로마서 1장 20절 >>

1. 사물의 존재 방식들

계몽주의 일례로 과학이 발달하면서 인간들은 그것을 미신적인 방식으로 신뢰합니다. 과학은 자연 세계 안에 있는 물질들의 수학적 법칙을 탐구하는 학문입니다. 그 법칙들 안에서 사물들이 어떻게 서로 원인과 결과의 연관을 이루는지를 예측하게 하는 학문입니다. 그런데 과학의 법칙을 가지고 자연법칙 넘어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생겨습니다. 그들은 아주 명백한 증거들을 매우 부당한 방법으로 다으로써 마치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미신인 것처럼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과학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탐색하는 것 자체가 우수광스러운 일입니다.(25:04)

a. 과학과 인간 이성의 한계

과학의 역사를 아는 사람들은 한 시대에 인간이 알고 있는 과학적 발견의 결과를 절대적인 것으로 신뢰하는 일의 한계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날 각광받는 양자 역학이라는 학문은 원자 이하의 물질 단위를 연구하는 과학입니다. 아이장 뉴턴이 만유 인력을 발견한 후 과학은이 세상 만물 사이에 존재하는 물리 법칙에 대하여 수학적 설명이 모두 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과학자들은 우주와 같은 초거시 물질 세계에서는 뉴턴주의의 수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이 많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소위 물리학에 있어서 상대주의가 도입된 순간입니다.
(25:57) 그러나 아인슈타인과 에르빈 슈레딩거와 같은 당대의 쟁한 과학자들도 원자 이하의 미시 세계에서는 일반적 거시 세계에서 적용되는 유턴주의의 물리 법칙과는 전혀 다른 법칙이 적용된다고 주장한 베르 하이젠베르크나 닐스보호의 양자 역학적 설명들 중 상당 부분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특히 슈레 등거는 파동 함수라는 수학을 가지고 소위 슈레 등거의 방정식을 만들어 아 원자 세계를 성공적으로 묘사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은 고전 물리학의 관점을 따른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927년 브리셀의 솔베이 학회에서 슈레딩거의 파동 역학적 수학의 방법론는 행렬 역학을 이용한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에 의해 성공적으로 반박됩니다.
(26:55) 현대 양자 역학에 토대를 놓은 닐스보는 양자 세계의 물리 현상이 거시계의 법칙으로 설명되지 않는 모순에 대하여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대립적인 것은 상호보안적이다. 그런 놀랍게도 동부가 철학의 주역 원리를 이용해서 양자 역학을 수립하여 노벨상까지 받았습니다. 과학에 있어서도 논리 멋지 않게 직관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입니다. 뉴턴의 법칙이 통하는 거시계에서는 전자가 입자이면서 동시에 파장이라는 특성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원자 이하인 아원자 세계에서는 관찰자에 따라 사물이 변하는 일반 상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태까지 발생합니다.
(27:48) 다시 말해서 거시 세계에서는 있는 것이 미시 세계에서는 없는 없기도 하고 거시 세계에서는 같은 시간에 한 장소에만 있는 사물이 미시 세계에서는 동시에 여러 곳에 있는 것이 가능합니다. 따라서 사물의 실존 방식에 있어서 한 가지 방식에 익숙해진 이성이 다른 방식으로 실존하는 사물들에 대해 판단의 결함이나 한계를 갖는다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현대의 눈부신 과학 혁명이 이러한 양자 역학의 연구 성과에 토대를 두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자기부상 고소 결차와 탄소 나노 소재, 바코드 스캐너, 반도체와 같이 우리 실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기술들이 양자 역학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28:41)

b. 하나님과 사물의 존재 방식.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혼란은 사물의 존재 방식 혹은 실전하는 양식에 대한이 이해의 부족이나 편견의 편견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있다라고 할 때 그 존재 방식은 주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있다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책에 있다 혹은 영혼이 있다 해서 있다는 있다의 의미가 서로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세 제네바에 활동하였던 트레티니라고 하는 시약자에는 사물의 있음과 관련해서 다음에 세 가지 범죄를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는 안정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특정한 공간에서 어 일정한 넓이와 부피, 길이와 높이 등을 가지고 습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29:34) 이런 기준을 가지고 있고 없음을 판단할 수 있는 것에는 흙, 돌, 나무, 색상 혹은 산물들입니다. 이것들은 특정한 시간과 기간 그리고 공간 안에 안정하여 존재합니다. 둘째로 제한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앞에 사물들처럼 공간을 점유하고 있지는 않지만 시간과 공간 안에서 제한을 가지고 어 있는 사물들이 여기에 속합니다. 인간의 영혼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은 무게와 길이 크기와 넓이 피와 같은 것을 가지고 다른 물질적 사물들처럼 있지는 않습니다. 다시 말해 무한히 뻗어 있지는 않습니다. 나의 영혼은 내 몸에 어디의 장기처럼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있는 장소와 시간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30:25) 나의 영혼이 물질적인 사물의 사물처럼 내 몸 안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 영혼이 내 몸 밖에 있거나 다른 사람 속에 있지를 않습니다. 천사 마귀 귀신이 바로 이런 양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셋째로는 충만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있으나 하나님의 존재는 있으나 장소와 시간에 한정되거나 제약되어 있는 채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정적으로 있는 모든 것들과 제한적으로 있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벗어날 수 없으면서 또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 안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충만적으로 존재하는 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물들 중 어느 것도 이런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31:20)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는 한정적 방식이나 제한적 방식으로 측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선 두 가지 삶을 기준으로는 아무데도 없으시면서 아무데도 안 계신 곳이 없이 충만하 충만하게 계시는 분이십니다. 예.

c. 사물에 계시지 않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사물도는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어느 사물 안에 혹은 어느 사물과 같이 사물들 속에 속으로 뻗어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사물을 갖춰 계시지 않으시고 만물을 초월하여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물은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32:14) 그래서 한 사물이 다른 사물과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하나님보다 가까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던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당신의 특별한 방식으로 존재하십니다. 그런데 과학은 단지 투레티니가 말한 있음의 첩제 번주만을 측정하는 기준으로 고집할 뿐입니다. 따라서 물리적 인과 관계에 의존하는 과학적 판 판단으로는 하나님의 존재가 증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시간과 공간보다도 크신 분이십니다. 어떠한 시간과 공간도 하나님을 홀로 가두지 못합니다. 인간에게 무한한 크신 크게 느껴지는 시간과 공간도 하나님께서 티끌 만한 정과 같습니다. 시편 90: 4, 이사야 40장 15절 그런 하나님을 우리의 제한적 이해력으로는 어떻게 측정할 수 있겠습니까?
(33:18) 제가 신학교에 다니고 있을 때였습니다. 저는 때때로 밤늦게 집으로 돌아가는 절에서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 시간에 이상한 사람들도 있어서 종종 봉변을 당할 뻔도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어느날 저는 객차 가운데서 서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이유를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자리에 앉아 있는 한 사람이 제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있다고 말하는데 하나님을 봤어?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는 그 질문에 하나님을 보았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보았다는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을 꽃이나 불, 나무나 돌 같은 사을 보듯이 보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34:10) 과학적인 사실에 대한 그랬던 해성을 가지고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마치 수시로 들어간 의사가 환자의 복부를 가르고 장기들을 해집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몸속 어디에서도 영을 찾지 못했습니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없군요.

2.온 우주의 충만한 증거들.

제가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찬송가 하나가 있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던 시설 매년 여름 성경학교에서 가면 자주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이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그 사랑 알아요. 아우델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가 작사한 것으로 알려진이 곡은 동시처럼 예쁜 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35:04) 어린아이라도 신앙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이면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의 원인이 하나님께서 거기에 충만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중생과 해심이 그의 마음에을 눈을 열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무지와 죄로 인하여 그동안 보지 못하였던 세계와 인간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거기에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늘에서는 하늘에 계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 계실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우주 만물 안에 계십니다. 그러나 만물과 같은 방식으로 계시지 않고 그 모든 것과 함께 하하시면서도 그 모든 것을 초월하여 계십니다. 만물은 하나님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어느 만물 안에서도 안에도 계시지 않으면서도 만물 안에서 당신을 나타내십니다.
(36:02) 눈을 들어 밤을 보십시오. 지구와 태양이 속해 있는 우리 은하는 약 2천억개의 이상의 별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의 지평선 안쪽 즉 인간이 관측할 수 있는 범위의 우주 안에는 그러한 은하가 약 1천억 개 이상이 있다고 합니다. 태양계는 우리 중 은하의 중심에서 약 26, 광년 되는 곳에 유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태양주의를 여덟 개의 행성들이 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행성들 주의를 다시 약 160개의 더 작은 행생들이 유성들이 돌고 있습니다. 우리 은하계에 있는 모든 항성들마다 태양계와 같은 공식을 적용한다면 우리 은하계 안에만 약 3조 2천억의 별들이 있다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36:53) 칼세이건이 우리 은학의 별들이 약 4조 4조개라고 추정한 것도 바로 이러한 계산을 따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우주 안에서 그런 은하계가 1천억 어깨가 넘게 존재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이 이 놀라운 세계를 하나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셨습니다. 요한네스 케플러는 요한네스 케플로는 독일 태 학자이자 케플로는 자기의 책 우주의 조화 제5권에서 천체 궤도우 질서와 조화로움을 음악적 관점에서 설명하고자 했는데 지구를 포함한 여섯 개의 행성들의 공존 주기를 계산해 각각 음표로 기입하여 특정한 음계와 선법을 표현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태양계를 이루는 각 행성들의 크기와 위치 역시 우연적이라 우연적인 것이라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37:50)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세 번째 있는 행성이고 또 다른 행성인 화성을 지나면 목성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이 목성이 없었더라면 지구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시뮬레이션 한 결과는 매우 놀랍습니다. 첫 번째로 나온 결과는 얼마 지나지 않아 지구가 산산 조각이 나고 만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성은 지구의 약 1천배 정도의 크기입니다. 그 큰 목성이 지구를 마치 병아리를 품고 암탁처럼 감싸여고 돌면서 우주에서 날아오는 수많은 운석들을 온몸으로 막아줍니다. 그런데 목성이 시뮬레이션에서 사라지니 지구는 얼마가 수많은 거대한 운석들에 맞아 파괴되고 만 것입니다.
(38:36) 행성과 해성의 충돌은 공상 과학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1993년 3월 25일 몇몇 해성군과 소행성을 관찰하던 과학자들은 목성 주의 궤도에서 전에 없던 22여개의 밝은 천체를 발견하고는 매우 놀라 매우 놀랐습니다. 그것들은 가지런하게 늘어선 해성 조각들이었는데 발견자들의 이름을 따라 슈메이커 레빗 라인으로 명명하였습니다.이 소식은 전 세계 이임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리고 과학자들이 그 경로를 예측한 결과 해 조각들은 목성과 차대로 차례로 충돌할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실제로 1994년 7월 16일과 7월 22일에 걸쳐 슈메이어 레비 라인은 목숨과 충돌했습니다. 당시이 장면은 허을 우주만원과 갈릴레오 행성간 탐사선 이외에도 여러 곳의 만왕경에 잡혔습니다.
(39:35) 당시 폭발과 함께 목성 표면의 화구의 온도는 수천도이를 정도였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지름 수백m에서 1km 정도의 해성 조각이 초속 60km의 속도로 목과 충돌하자 지구만한 크기의 지역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입니다. 만약 그만한 운석이 지구에 떨어졌더라면 질구는 멸망하였거나 생명체들을 거의 모두 잃어버렸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나온 결과는 목성이 사라지자 태양주의를 도는 지구의 궤도가 점점 찌그러지면서 결국 지구는 우주 바깥으로 튕겨나가 우주 미아가 되고 만다는 것이었습니다. 태양계의 모든 항성과 행성들이 중력, 공간 그리고 시간의 놀라운 지수와 조화 속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고 있음이 입증된 것입니다.
(40:32) 이것을 어떻게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이 세계에 두신 아름다움은 질서의 아름다움입니다. 모순되거나 파격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더 높은 차원에서 보면 그 아름다운 질서의 일부분이거나 그 질서를 아름게 하 이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이 모든 세계를 질서 안에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모든 만물을 그 질서 안에서 다스리시고 유지해 나가십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의 증거를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물론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아름다운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피조 세계는 인간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으리 많지 충분한 빛을 찬란하게 바라고 있습니다.
(41:28) 인간들이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눈먼 소용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명백한 증거를 보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이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고 계시다는 놀라운 증거는 자연 세계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 세계 속에서도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도덕입니다.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존재가 없다고 믿으면서도 도덕적인 삶을 살면 평안을 느끼고 부도덕적인 삶 부도덕하게 살면 고해하게 될까요? 성경은 인간의 양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양심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본생에 새계신 율법입니다. 인간의 마음에 양심이 있어서 도덕적 시비를 환단할 수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증거입니다.
(42:19)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주와 공간 혹은 인간의 몸에 뻗어 계신 계신 분은 아니실지라도이 땅과 만물에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만 한 사람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만 겨우 하나님의 전제를 느낄 뿐이고 다른 것에서는 전혀 그럴 수 없다면 그는 충분히 좋은 그리스도인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정도의 찬이 있을지 우리는 일상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알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로부터 우리의 경외의 삶이 흘러나옵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가장 큰 의무는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의 살아 계심이 가장 큰 찬송 제목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세계, 인간의 지혜로 발견한 모든 학문들 그리고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도덕을 통해서도 하나님께서 살아계신다는 증거를 발견하며 그분을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43:22) 하나님께서 한정적 사물이 있는 방식을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온 우주에도 온 우주 아무데도 계시지 않습니다. 제한적 사물이 있는 방식을 기준으로 판단한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정적이거나 제한적 방식으로 존재하는 어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계시 거하실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게 했거든 화물며 내가 건축한이에 성전 이겨버리까? 왕상 8장 27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는 어디 어디서든지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드셨 만드신 것과 지금도 그것을 통치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증거들로 넘쳐납니다.
(44:12) 그리고 그것들이 바로 창조 세계가 아름다운 이유입니다.
깊이 읽는 주기도문_01_살아계신 하나님 02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ERQkLJap0V8
Transcript:
(00:00) 목사님께서 읽어 주세요. >> 네.

III. 하나님께서는 살아 역사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는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 주기도문의 기도를 진실하고 간절히 드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그 이상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이성만으로 신의 존재를 탐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이 이성만으로 신의 존재를 탐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 계시를 믿는 신앙 없이 이성으로 신을 아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단지 절대자가 존재하고 선악에 대한 판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을만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00:48)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는 충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신을 아는 것으로는 하나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에 예배하신 구원의 길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고 사랑의 교통을 가지신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기독교 주신 주는 자들 중에서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는 믿지만 하나님의 섭리는 믿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존재하시지만 모든 만물 위에 초월에 계셔서이 세계에 간섭하시지는 않는다고 믿는 것입니다.
(01:38) 디트리트 포네퍼와 같은 신학자가 주장한 소위 성숙한 세계의 개념이 그렇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 사이에 개입하시는 것은 구약 시대와 같은 미성숙한 세계에서 있었던 일이고 신약 시대와 같은 성숙한 세계에서는 그렇게 하시지는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한 주장을 토대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자신 주신 자율 안에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인간 사이를 스스로 책임해 건설해 갖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 기독교 주신자이면서도이 세상에서는 단지 자연 법칙과 도덕 법칙만 존재할 뿐이 존재할뿐 하나님의 섭리는 없다고 믿었습니다. 예. >>

A 이성적 지식의 한계.

얼마 전 유럽의 한 철학자의 이야기가 신문에 실렸습니다.
(02:34) 무실론 철학자로서 전 세계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영국의 철학자 앤터니 플루의 이야기였습니다. 런던의 감리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옥스포드대 학부생 시절에 기독교 변증과 CS 루이스가 이끌던 소크라테스 클럽에 참석했지만 루이스의 도덕적인 신존재 증명에 동의할 수 없었을뿐만 아니라 신에 대한 전통적인 기독교 개념들은 이렇다 할 증거가 없기 때문에 무미하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신학과 위증성이라는 유명한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입니다. 이후 그는 신과 철라, 무실론자의 휴머니즘, 무실론 추정 똑바로 생각하기를 포함해 30권이 넘는 책을 출판하면서 무실론의 원리와 체계를 정교히 세워 갔고 옥스포드와 에버딘 힐 리딩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면서 이후 모실론자들에게도 커다란 영향력을
(03:37) 끼쳤습니다. 그러던 그가 2004년 신의 존재를 받아들인다고 선언했습니다. 자신의 책 존재하는 신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무실론을 떠나게 된 것은 어떤 새로운 현상이나 논증 때문이 아니다. 지난 20년 동안 내 사고 체계 전체는 서서히 움직였고 그것은 내가 자연의 증거를 계속해서 평가한 결과였다. 내가 마침내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된 것은 패러다임을 바꾼 것이 아니다. 플라톤이 국가론에서 소개한 소크라테스의 원리 즉 논쟁이 이끄는 대로 어디 건가야 한다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나의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그는이 책을 표낸지 3년 뒤인 2010년 4월 자신의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04:33) 그러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일까요? 그는 이전에 가르치던 학생들에게 자신이 계시 종교를 믿게 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나의 딸들 중 하나가 이제 식사를 할 때 기도를 해야 하는 거냐고 묻더군요.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흠을 하는 이유는 이해할 수 있지만 내가 조만간 그리스도에게로 회심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입니다. 그는 신의 존재를 믿지만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리도 만무합니다. 그저 신이 있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최근 젊은 세대에게서 각광을 받고 있는 스위스 태생의 철학자이자 수필가인 알랭드 보통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05:32) 그는 무실론자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를 제한하는 철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신의 존재 혹은 종교에 대해 그가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그런데 무실론의 오류는 어떤 신앙의 핵심 교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타당성을 지니는 신앙의 측면들이 무척 많다는 점을 간과한데 있다. 우리가 종교에 굴복할 수밖에 없거나 그렇지 않으면 종교를 모독하거나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을 일단 버리고 나면 우리는 종교라는 것이 각까지 정교한 개념들의 저장고임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세속적 생활의 가장 끈질기고도 대척이 없는 질환들 가운데 몇 가지를 완화시키는 일에서 그 개념들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06:29) 이러한 애들은 인간이 성경 계시를 통하지 않고 자연의 세계나 인간의 사색 혹은 경험을 통해 신의 존재 증거를 발견하는 경우에 부딪히는 한계들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알게 되는 하나님께 대한 개념이 전혀 무익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연적 증거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는 최고의 성과는 기껏해야 사람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핑계할 수 없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들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나 죄로 물든 인간의 현실은 물론 구원의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졌다는 지식에도 지식에 조달하지 못합니다.
(07:17) 아우델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역사에서뿐만 아니라 서구 사상사에서 고대와 중세를는 수문과 같은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그는 탁월한 철학자이자 신학자요 목회자였습니다. 한때 그는 플라톤의 철학을 거쳐 당대의 지성이 지성인이라면 한 번쯤 관심을 가져 가져보았을 만교에 심취하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회심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그는 하나님의 품 안에 안기 전까지는 마음에 안식이 없다. 없었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를 일으켜 당신을 찬양함이 우리의 기쁨이 되게 하셨으니이는 당신을 향하도록 우리를 만드시고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인식하기 전까지는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구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천재적인 사상가 있지만 성경을 통해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나서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비록 그는 누구보다도
(08:22)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이성적으로 많은 증거를 받아들였지만 복음을 믿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회개하고 거듭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의 증언대로 죄인을 구하러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구스티누스는 세상을 철학이 하나님을 제대로 가르쳐 주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괴하며 안타까운 마음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플라톤 추정자의 사적들의 책카피 속에는 고백의 눈물과 당신의 희생과 상한 영혼과 통하고 겸손한 마음과 사람들의 구원과 약속된 도성과 성령의 보증과 구속의 잔과 같은 경건의 포 표성들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나의 구원이 그에게 나오는데 어찌 내가 하나님께 복종하지 않으리요.
(09:20) 오직 하나님은 나의 반석이요 나의 구원이요 나의 요새시니 내가 유동치 아니할 것이로다라고 노래하는이가 없습니다. 거기는 누구도 수고한 자들아 나에게 오라는 부르심을 듣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기 때문에 그분께 배운 것이 멸시를 받습니다.이는 당신이 그것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이 같은 자들에게 나타내신 탓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의 교만한 마음을 쏟아 놓아 본 사람들 그 사랑 앞에 눈 물이 물같이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모두 성경과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을 안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인간의 이상과 경험을 통하여 자연과 학문 속에서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10:17) 성경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존재는 단지 객관적인 사실로만 끼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물의 존재와는 다른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였을 때 그들에게는 항상 영광스러운 책임이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법칙을 만드시고 그것을 움직이십니다. 그러나 또한 그 법칙을 능가하는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십니다. 그 같은 우리의 삶의 의미를 부여하시고 거기에 간섭하시며 우리를 정의와 행복과 미혹으로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더욱 우리 같은 죄를 구하시려고 당신의 외아들을이 낮은 세상에 내려보내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11:10) 찬송가의 노래말처럼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목물 삼고 다 쓸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셨습니까? 그 거룩하고 위대한 사랑 앞에서 자기가 특별 같은 존재임을 깨닫고 교만을 해외게 하였습니까? 무한히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닫고 자기를 우주의 중심으로 여기던 인전을 삶에서 돌이키셨습니까? 자신의 행복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이 죄의 뿌리임을 깨닫고 뉘쳤습니까? 심은 바로 이렇게 거룩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완전하심 앞에서 자기의 중심적 사고와 삶의 삶을 버리고 미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아는 것입니다.
(12:01) 그리고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온 땅과 만물과 온 우지의 중심이시며 그분의 영광이 최고의 가치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향하여 그리고 인류와의 관계 안에서 그분을 가장 올바르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진정한 행복이 있는 줄 압니다. 우리의 행복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나와 우주 만물을 휘돌아 다시 하나님께로 회개하는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B 살아계신 하나님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일에 모든 사람들이 가장 궁금해한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은 무엇인가? 철학의 역사는 바로이 궁극적인 질문의 답을 찾아온 발자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58) 신은 무엇인가? 우주는 무엇인가? 시간과 영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들은 바로이 궁극적인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한 예비적 질문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실제적인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적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사상 아무도이 질문에 만족할 만한 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질문의 답은 모든 만물의 존재와 가치 질서의 망 안에서만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를 들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어떤 과학자가 수십만 개의 부품으로 만들어진 우주선에서 한 개의 부품을 떼어내어 여러분 앞에 두고 묻고 있습니다.이 물건이 좋은가요?이 물건이 충분히 아름답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우주선을 실제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말입니다.
(13:59) 여러분은 당연히 대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비유를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저는 지금 인간이 단지 어떤 전체를 위한 부속과 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인간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올바로 답하기 위해서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알아야 하는데이를 알기 위해서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 사람들과의 관계, 사물들과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인간 존재는 만물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향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의 존재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존재하실뿐 아니라 살아 계시며 단지 살아 계실뿐 아니라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을 때에야 비로소 세계와 인간 그리고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15:05) >> 네. 하나님께서는 당신 안으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살아 계시고 당신 밖으로는 완전한 각 위들간에 흐르는 그 사랑을 생명과 함께 창조 세계에 흘려보내심으로 당신의 살아계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같은 비천한 인간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의 아버지라고 일컬음을 받기를 기뻐하십니다.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나시며 탁월하신 하나님 영혼과 시간에 떼어 존재하시면서도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무한하신 분이 영원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은 인간들과 교통하기를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16:03) 인간은 타락하여 창조 목적을 떠났고 비참하게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습을 참아 보실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이 세상에 내려보내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하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끊어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페이지 56페이지 밑에 하단 줄입니다. 페이지 56페이지. 이것은 우리 이것은 모두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에 시킨 일이었습니다. 그 영적 생명과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참으로 사람답게 살게 하시려고 말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16:56) 여전히 복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 마음속에서 거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인지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복음이 받아들여졌습니다.이 이 자체가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신다는 증거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마다 느끼는 특별한 사랑의 감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만 사랑하시는 같다는 사랑하시는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사람들의 사랑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람의 사랑은 다른 이들과 함께 소유하면 질투를 불러오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다른 형제들이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는다는 소식을들을 때 우리는 질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사랑에 참여하는 이들과 함께 기쁨을 나눕니다.
(17:44) 왜냐면 하나님의 악페의 사랑은 종내어 갖는 사랑이 아니라 우리 모두 함께 참여하는 무한하고 완전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 회심하기 전 우리는 이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천국도 몰랐고 지옥도 믿지 않았습니다.이 이 세상이 우리가 사랑한 사랑할 전부 전부인 줄 알면서 고집대로 짐승처럼 살다가 죽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 마음에 어두움을 찢으시고 당신의 잘라는 복음 진리의 빛을 비추셨습니다. 자,

IV 결론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것이 우리에게 가장 큰 복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과 세계를 창조하신 것 엄지하고 타락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 당신의 자녀로서 당신을 찬양하며 살게 해 주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18:47) 이것들은 우리에게만 우리에게 만개에 비해서도 다 감사할 수 없는 찬 찬송의 제목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보십시다. 우리는 기도를 많이 하는 때가 있고 거 어 거의 기도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 시기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여러분은 이렇게 대답하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의 아 시간의 여유가 있을 때는 기도를 많이 할 수 있지만 워낙 바쁠 때는 기도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해서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의 열 열렬한 기도 생활은 단지 우리의 시간적 여유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이 크게 느껴질 때는 아무리 바빠도 열렬히 많이 기도했습니다.
(19:39) 그러나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사라지고 그분의 살아 계심이 느껴지지 않을 때에는 우리는 한가해도 거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이 위대한 기도의 경로를 시작하면서 저는 여러분에게 간절히 축구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영적 부흥이 오기를 간절히 소망하십시오. 이제껏 세상만 바라보고 살아왔다면 눈을 들어 하나님의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의 인생의 문제들은 모두 땅에서 생겼지만 그 해결은 하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왜냐면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비인 비인격적인 원리 원리도 아시고 자연과 구별할 수 없는 만물과 속격 계신 분도 아니시며 세계와 상관없이 모든 사물들 위에 초월에 계신 분도 아니십니다.
(20:39)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고 사랑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십니다. 모든 만물을 초월하시면서도 안 계신 곳이 없이 계시며 인간의 지성의에 발을 건내시 말을 건네시고 사랑하십니다. 신자들의 영혼과 교통하사 그들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사실만큼 우리에게 커다란 소망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때 것 여태껏 자신이 우지의 중심이며 자기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인 줄 알고 살아왔다면 이제 마음의 눈을 들어 거룩하고 위대하시며 온 땅과 만물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인생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돌고 오십니다.
(21:30) 신앙은 바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어미하심 앞에서 떨리는 두려움과 이끄시는 사랑을 경험하데서 출발합니다. 그리고 기도는 그렇게 우리를 만나 주시는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의존의 마음의 표현인 것입니다. 아멘.
살아계신 하나님.
I. 들어가는 말.
성도가 살아야 할 복음의 삶의 내용은 주기도문으로 압축될 수 있다.
기도와 삶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기도는 삶에 능가할 수 없고 삶은 능가하는 기도도 없다.
온전하고 능력 있는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참 지식에서 나온다.
II. 하나님께서 존재하신다.
우리는 기도를 시작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거룩하심을 생각한다.
A. 신이 없다라고 믿는 세대.
1. 사상적 무신론
사람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시기에 스스로 마음속에 하나님과 증거들을 지워버렸다.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들은 절대적인 가치나 도덕적인 기준이 없다. 그래서 포스트 모더니즘의 물든 현대인들의 도둑의 기준은 각자의 바람이고 최고의 가치는 인간의 행복이다. 여기에 과학에 대한 현대인의 신앙 없는 해석은 무실론을 주장하고 있다.
2. 실천적 무신론
입술로 하나님을 고백할지라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마음은 실천적 무실론의 온이 된다.
교회의 안팎으로 무실론을 둘레쌓 있는 우리는 죽이을 배우기 전에 하나님의 존재를 확신해야 한다.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세계 역사는 물론 우리 인생을 주관하신다.
B 존재하시는 하나님
주기도에 계신이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필현적으로 존재하신다고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실뿐만 아니라 활동하신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증거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 가득차 있다.
1. 사물의 존재 방식들,
과학 법칙을 가지고 자연법칙을 넘어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우습스러운 일이다.
a 과학과 인간 이성의 한계
한시대 과학적 발견의 >> 결과를 절대적인 거로 신뢰하는 데가 한계가 있다.
b. 하나님과 사물의 존재 방식,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혼란 사물의 존재 방식에 대한 이해 부족과 편견의 그 원인이 있다.
c 사물들 안에 계시지 않음.
만물은 하나님 안에 있으나 하나님께서 만물을 초하고 계신다. 따라서 물질적인과 의존하는 과학적 판단만으로 하나님의 존재가 증명되지 않는다.
2.온 우주의 충만한 증거들.
우리는 성경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 세계 인간의 지혜로 발견한 모든 학문들 그리고이 세상이 존재하는 모든 도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증거를 발견하며 그분을 즐거워하고 기뻐하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존재하신 세계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드셨으며 지금도 통치하고 계시다는 증거들을 넘쳐난다. 창조 세계가 아름다운 이유도 거기에 있다.
III.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인정만으로는 우리의 죄인된 과스도께서 우리의 어 유일한 구원자 되심을 알 수 없다.
A 이성적 지식 한계
성경 지식을 통하지 않는 신의 존재에 대한 깨달음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하기 살아가게 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자연적인 증거를 통한 깨달음만으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나 죄로 물든 인간의 현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 되심을 아는 지식을 도달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법칙을 만드시고 그것을 움직이신다. 그리고 법칙을 능가하는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신다. 티끌 만한 우리의 삶의 의미를 부여하시고 감사하시며 우리를 정의와 행복, 사랑과 미혹으로 인도하신다.
B. 살아계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극히 사랑하신다. 죄를 범하고 창조의 목적을 떠나 비참한 상태에 일은 우리의 모습을 참아보실 수 없어서 당신이 사랑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내려보내셨고 모든 죄를 짊어 주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하셨다. 죄로 말미암아 그진 하나님과의 우리 사회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서였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마음속에 복음을 거부한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우리를 어 우리 마음속에서 복음이 받아들여졌다.이 자체가 하나님께서 살아계신 살아 역사하신다는 증거이다.
IV 결론
인격적인 하나님을 살아 계신다. 모든 만물을 초월하시면서도 안 계신 것이 없으시며 인간의 지성의 말을 어 건내시고 사랑하시며 신자들의 영혼과 교통하사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사실만큼 커다는 소망이 없다. 그것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며 자신의 행복이 최고의 가치인 줄 알고 살아왔다면 마음의 눈을 들어 거룩하고 위대하시며 온 땅과 만물에 뛰어나신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생각하라. >> 아멘. 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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