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과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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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과 의심
성장과 의심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에 학교를 자퇴를 했습니다. 막 무슨 세상에 불만이 생겨서 자퇴하고 그런건 아니구요, 당시에 다니엘 리더스 스쿨이라고 해서 기독교 기숙사 학원에 들어가고 싶어서 그렇게 했던 기억이 납니다. 거기서는 거의 무슨 수도원 같은 생활을 했어요.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5시부터 6시 반까지 새벽기도하고, 공부하고 아침먹고 공부하고 점심먹고 30분 찬양 집회하고 공부하고 저녁먹고 1시간 저녁 예배하고 공부하고 10시에 잠듭니다. 이걸 주중에 매일 하다가 주일에는 아침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점심만 먹고 예배하고, 3시간 자유시간 같고 청소하고 자는 겁니다. 이런 생활을 1년동안 하면서 목회에 소명을 받기도 하고 했었는데요.
지금 생각하면 참 감사한 시간이기도 했었는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여기가 신앙이 너무너무너무 보수적이었어요. 어느 정도냐면 제가 감리교신학대학교 간다니까 무슨 이단 소굴에 들어가냐는 거예요. 그러면서 가서 말씀으로 학교를 정화하고 와라 무슨 이런 말씀을 하더라구요. 근데 그 때는 제가 어렸을 때다보니까 그걸 곧이 곧대로 들어서 “아! 정말 감신대에 들어가면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세우는 학생이 되어야지!”라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근데 정작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하다보니까 오히려 기존에 제가 가지고 있던 신앙에 의심이 생기기 시작하는겁니다. “내가 기존에 믿던 방식이 맞을까?”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이 계시긴 하는거야?”라고 하기 까지 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기도 열심히하고 예배를 열심히 드렸는데도 의심이 생기기 시작하는 겁니다. 심지어 미국에 유학하러 가서는 더 심해졌습니다. 또 인종차별이나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도 힘들었어서 그런 의심이 더욱 가속됐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에 돌아와서 사역을 다시 시작하고 결혼하고 아기가 생기면서 또한 신앙에 대해서 묵상하다보니, 어느 샌가 이전에 의심하기 전의 제 믿음보다도 더욱 단단한 믿음과 신학이 저에게 자리잡혀있더라구요. 분명히 공부하기 전과는 다른 믿음이긴 한데, 이제는 누가 와서 저한테 논리적으로 비판하면서 “신이 없다” 이런 소리를 해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은 것은 의심 없이 믿는 것이 좋은게 아니라, 오히려 의심하는 것으로 더 단단한 믿음이 생기는 구나 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믿지 아니하겠노라
믿지 아니하겠노라
오늘 본문말씀도 바로 그런 맥락의 이야기입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도마 라고 하는 제자가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는 이야기입니다. 먼저 24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의 열두 제자중에 “디두모”라고 불리는 “도마”라는 제자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만나셨을 때 함께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디두모라고 하는 단어는 헬라어, 도마라고 하는 단어는 아람어로 모두 “쌍둥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별명이나 애칭처럼 쓰인 것 같아요. 다만 여기서 굳이 두 이름을 불러주는 이유는 아람어를 잘 모르는 헬라어 독자들을 위해서 쓰인 겁니다.
아무튼 이 도마가 다른 제자들을 만났는데 다른 제자들이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이보게 도마! 우리가 주님을 보았다네! 부활하셨다고!” 그러니까 도마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뭐라고? 내가 그걸 어떻게 믿나? 내가 예수님의 손에 난 못자국과 창에 찔린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서는 못 믿네!” 라고 의심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그러게 진작에 다른 사람들이랑 잘 붙어 있어서 예수님을 좀 미리 만나지, 왜 못 만나서 이럴까요. 또, 제자들이 “부활하셨어!”라고 하면 좀 믿으면 될 것이지, 그렇게 동고동락 해놓고서는 왜 제자들의 말을 믿지 못하는 걸까요?
사실 여기에는 한 시대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셨던 고대 시대에는 마술사들이 있었고, 사람들이 이런 마술을 하는 사람들을 주로 따랐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이런 사람이 등장하는데요,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따르며 이르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이 시몬이라고 하는 사람이 마술을 행하니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이다! 라고 하면서 따랐다고 하죠. 이 시대 때 마술사라고 함은 오늘날의 마술과는 결이 다릅니다. 오늘날에는 무슨 카드 마술이라던가 동전 마술이라던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 하는 일종의 공연, 혹은 행위 예술이라고 한다면 고대의 마술사들은 신비주의가 섞여있는 일종의 주술이었어요.
이를 테면 연기를 피워가지고 사람들을 몽롱하게 만든 다음에 환각을 보게 하거나, 아니면 예수님이 탄생하셨을 때 만나러 갔던 동방 박사들처럼 하늘의 별을 보고 점을 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도 당시에 과학이 발전되지 않은 시대의 사람들은 이게 다 진짜인줄 알고,마술사들이 보여주는 걸 ‘영’이라거나 ‘귀신’으로 알고 있던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실 도마가 “난 예수님을 직접 만져보기 전에는 못 믿겠어!”라고 말하는 건 사실 아주 합리적인 의심입니다. 도마의 말은 달리 말하면 “너네, 마술사 같은 사람들이 보여준 거로 잘못 본거 아니야?”라는 뜻이 담겨있는 겁니다. 또한 도마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도마가 예수님을 아예 안믿는게 아니잖아요? 중요한 건, 제자들이 본 게 진짜 부활하신 예수님이냐 아니냐를 의심한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심은 필요한 의심이기도 합니다.
열왕기상 13장에는 어느 선지자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사울 - 다윗 -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왕국이 둘로 쪼개지고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라는 나라로 갈라지게 되는데요. 이 북 이스라엘에 있던 여로보암이라고 하는 왕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지 않고 금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의 분노를 삽니다.
그 때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한 선지자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금송아지 제단을 쌓다니! 하나님께서 이 제단을 갈라버리고 재가 쏟아질 것이오!”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러니까 정말로 제단이 갈라지고 재가 쏟아지니까 왕이 그 선지자에게 달려가서 사정사정을 합니다. “아이고 제가 잘못했습니다. 부디 저희 집에 오셔서 제가 드리는 예물을 받으시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주시지요” 그렇게 말하는데 이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하나의 명령을 받은 상태였습니다. 바로 아무것도 먹고 마시지 말라는 것이었죠. 그래서 왕의 초대를 거절하고 가던길을 가게됩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가 어떤 늙은 선지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늙은 선지자는 “나도 하나님의 선지자요! 내 집에 와서 먹고 마시는건 괜찮다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소!”라고 속이게 된겁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이 선지자는 결국 밥을 먹고 물을 마시게 됐고, 나중에 길을 떠나서 가다가 사자에게 물려 죽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아무리 선지자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고 해도, 곧이 곧대로 듣지 말라는 겁니다. 의심하라는 겁니다. 진짜 하나님의 말씀이 맞는지, 정말 우리가 지켜야할 것이 무엇인지, 믿어도 되는 것인지 의심하라는 겁니다.
가끔씩, 교회에 다니다보면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 등등 교회에서 배우는 것들 중에 우리가 “의심없이 믿어야만 하는 것”들에 대해서 가르쳐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로 아무런 의심없이 아무거나 믿게 된다면, 그거야말로 잘못된 믿음으로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진짜 믿음을 위해서는 아무런 의심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 오히려 의심과 함께하는 믿음입니다.
본문말씀 25절 말씀을 함께 읽어볼까요?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할렐루야.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여러분과 제가, 하나님의 말씀이랍시고 아무 의심없이 믿는 것이 아니라, 도마가 의심했듯이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 진정 우리가 믿어야만 하는 예수님, 진정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님을 “믿기” 위해서 의심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믿는 자가 되라
믿는 자가 되라
본문말씀으로 돌아와서요 26절 말씀을 보시면, 여드레가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었고,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다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시기를 생각해봐야하는데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만찬을 즐기신게 유월절, 오늘날로 목요일 저녁입니다. 그리고 끌려가셔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게 금요일 오후 쯤인데, 이 때부터 토요일 저녁까지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이면서 동시에 유월절 이후에 시작되는 무교절이 시작되죠.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왔는데, 무교절이 진행 중이어서 다시 갈릴리로 갈 때가 아닌겁니다. 추가로 유대교에서 죽은 이를 애도하는 기간이 일주일이어서 또한 고향인 갈릴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머물러있었다는 것을 예상해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예수님께서 이들을 다시 찾아오시는 겁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이건 약간 샬롬! 이라던가 안녕하십니까? 같은 인삿말 같은 말씀을 예수님께서 하신 거죠.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27절에 “도마야. 이리 와서 내 손과 내 옆구리에 네 손가락을 넣어보거라. 그렇게 해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뭘 믿으라는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시는 걸까요? 그럼 예수님의 대체 뭘 믿으라고 하시는 걸까요?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걸 믿으라는 걸까요? 이건 이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믿었기 때문에 따랐기 때문에 이건 아닙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라고 하시는 걸까요? 도마 입장에서는 이미 눈으로 보고 만지고 있는데 믿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이미 벌어지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부활을 믿으라고 하시는 말씀도 아닙니다. 그럼 이 믿음은 무슨 믿음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바로 다음 구절에서 그 정답이 등장합니다 본문말씀 28절 말씀을 함께 읽어볼까요?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님을 향해서 도마가 “당신은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예수님께서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주님이 되시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사실 조금 비슷한 고백을 한 사람이 있죠. 베드로가 예수님께 했던 고백이 유명한데요,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가 고백하기를 예수님은 주님이시고,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 베드로의 고백과 오늘 도마의 고백은 겉보기에는 비슷하면서도 사실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왜 그렇냐면, 베드로의 고백은 사람에게 하는 고백이고, 도마의 고백은 하나님께 하는 고백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먼저 주님이라고 하는 고백은 그리스어로 퀴리오스(κύριος)라고 하는 단어인데요 하나님께도 할 수 있는 호칭이지만 집 주인, 다른 말로 집안의 가장에게도 쓸 수 있는 호칭입니다.
또 그리스도라고 하는 호칭은 메시아를 번역한 것인데, 이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자를 뜻합니다. 그래서 창세기 28장에는 야곱이 베개로 삼고 있던 돌을 기둥으로 세워서 기름을 붓는 장면이 등장하는데요, 엄밀하게 따지면 이 돌멩이도 메시아고 그리스도라고 부를 수 있는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 붙을 수 있는 칭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헤아릴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할 것이라
호세아 선지자의 예언에서도 이스라엘이 회복될 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다 부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 사실 베드로가 한 고백이 얼마나 흔한 표현인지 아시겠나요? 물론 당시에는 로마에서 주님이라는 호칭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을 로마 황제에게만 쓰도록 압박이 들어오던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부른게 대단한 용기에서 나온 건 맞습니다. 다만, 그냥 유대인들에게 한정해서 생각해보면, 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불릴만한 사람은 꽤 많다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새로운 몸을 입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됐습니까? 이제는 사람에게 붙일 수 없는 호칭이 붙게 됩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으로 이제는 빼도박도 못하게 사람에게 쓸 수 없는, 오직 하나님께만 쓸 수 있는 표현으로 고백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엔 그냥 스승님 정도였다면 부활 이후에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됩니다. 우리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신앙은요,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희가 매주 일요일 오전에 교회에 모이는 이유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게 일요일 오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활절만 부활을 기념하는게 아니라 매 주일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다른 누구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만이 진정한 부활로 우리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진정한 우리의 주님이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또한 하나님 자신이심을 알게하셨기 때문에, 오늘 저희가 이 자리에 함께 모여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건 다 의심해도 좋은데 의심없이 믿어야할 것이 딱 하나가 있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본문말씀 28절 말씀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여러분 이것을 믿으십니까? 이 고백이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
보지 못하고 믿는 믿음
마지막으로 본문말씀으로 돌아와서요 29절 말씀을 보시면요, 예수님께서 도마에게 “도마야, 어찌 꼭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못 보고도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보통 이 29절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도마의 이야기를 보고, 예수님을 안 보고도 잘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의심없이 믿어야 한다, 라고들 생각하시는 데요. 사실 저희가 앞서서 쭉 봐온 이야기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도마의 이야기는 무작정 믿지 않는 것, 잘 의심해보고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예수님께서는 앞에서 나온 내용들과는 거의 정반대의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이건 뒤에 이어지는 두 구절과 함께 봐야지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30-31절 말씀을 보시면, 도마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이 요한복음을 쓴 저자의 시점에서 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30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표적들도 많이 행하셨다 라고 이야기하면서요 31절에는 이 책을 기록한 목적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다. 또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믿고 그 이름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고 씁니다, 라고 적습니다.
그러니까 이 요한복음을 쓴 목적이 다름 아닌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해서 “믿게끔” 해주는 것,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부활로 나타나셔서 그 부활을 믿는 이들 또한 영원한 생명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께서 29절에 하신 말씀이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들은 ‘도마가 그랬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으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겁니다. 요한복음이 쓰여진 시대, 이미 예수님을 직접 만났던 사람들은 거의 살아있지 못하는 이 시대에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도 못하고 믿는 이들에게 “복되다”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도마가 아니라 저희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또한 30절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이 기록된 것보다 많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생각해보면 고작 1년 2년 3년 정도의 삶을 다 기록하려면 왜 못하겠어요. 예수님을 직접 뵀던 제자들이 썰 풀어주는 것만 다 기록해도 충분히 할 수 있고, 또 생각해보면 예수님을 다메섹 가다가 딱 한 번 만난 사도바울이 쓴 편지들이 아마 복음서 다 합친것보다 많을 거에요.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은 아마 쓰려면 더 쓸 수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기록된 것보다 더 많은 표적이 있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표적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 즉 여러분과 제게 지금까지도 예수님께서는 표적을 행하고 계십니다.
본문말씀 29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할렐루야! 지금까지도 살아계셔서 보지 못하고도 믿는 저희들에게 표적을 행하시며 복되도다라고 하신 말씀처럼 영원한 생명을 믿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결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저희가 기억해야할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말씀은 의심하면서 믿는 믿음입니다. 도마의 의심은 잘못된 믿음을 경계하는 것, 오히려 바른 믿음을 위해서 필요한 의심입니다. 저희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하는 것을 다 믿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인지 의심하고 잘 분별하여서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둘째, 우리의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시작합니다. 부활 이전에는 사람에 대한 호칭으로, 부활 이후에는 하나님에 대한 호칭으로 바뀐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의심없이 믿고, 그것에서 잘못된 믿음을 분별해 나가고, 또한 그 부활을 통하여서 예수님을 우리의 구주로 고백할 수 있어야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믿는 우리의 믿음은 복된 믿음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의심할 때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을 잃지 않을 때에 지금까지도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표적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 복된 믿음을 가지고 또한 세상 가운데 증언하면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의심하면서 잘못된 믿음을 분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시작하는 올바른 믿음으로,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이들에게 예수님의 표적을 나타냄으로 복된 믿음을 전하며 나아갈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