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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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난 사람들
본문: 창34:18-31
주제: 하나님이 없는 인간의 정의란 파괴적일수 밖에 없다
[서론]
여러분, 우리가 낯선 오지나 정글에 선교사로 가게 된다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익숙했던 고향의 음식, 신선한 과일들에 대한 향수일 것입니다.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뉴기니 오지에 파송되었던 오토 코닝 선교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분도 자신이 먹던 신선한 과일이 너무 먹고 싶어 파인애플 묘목 100그루를 가져와 심었습니다.
사비를 털어 일당을 주고 원주민들을 고용해 정성껏 밭을 가꾸었습니다.
무려 3년이라는 인내의 시간 끝에 드디어 파인애플 나무에 먹음직스러운 열매들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님의 마음이 얼마나 설레고 기뻤겠습니까?
그런데 수확을 기대하고 아침에 밭에 가보니, 기막힌 일이 벌어졌습니다.
파인애플이 단 하나도 남지 않고 싹 사라진 것입니다.
심지어 안익은 열매까지 다 가져가 버렸습니다.
알고보니 자신이 고용했던 원주민의 소행이었습니다.
이 지역 원주민들은 내 손으로 직접 심은 것은 내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일당을 받고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익자 당연한 듯 밤에 몰래 가져가버린 것입니다.
돈을 지불하고 3년을 기다린 선교사님 입장에서는 명백한 도둑질이자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한 일입니다.
화가난 선교사님은 경고했습니다.
“한번만 더 내 파인애플을 훔쳐가면, 여러분을 치료해주던 병원 문을 닫아버리겠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개의치 않고 또 훔쳐갔고 선교사님은 정말로 병원문을 폐쇄해 버렸습니다.
이제 병원 문이 닫히자 원주민들 사이에 병이 돌았고, 결국 그들은 잘못했다고 빌며 병원문을 열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선교사님은 승리감을 느끼며 다시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입니까?
병원문을 열어주자마자 원주민들은 또다시 파인애플을 훔치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님이 얼마나 화가 났을까요?
이제 선교사님은 그 원주민에게 파인애플 나무를 다 가져가서 너희들 밭에 심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다시 시작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원주민은 나무를 옮겨심는 값을 요구했습니다.
그 값도 주었습니다.
그런데 원주민은 밭을 일구는 값도 요구했습니다.
공짜로 주는데도 얼토당토 않은 돈을 계속 요구하니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그러자 선교사님은 그만 화가 나서 그 밭의 모든 파인애플 나무를 쓰레기로 버려버리고 원주민들보고 알아서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파인애플 나무를 심어 이번에도 품삯을 주었습니다.
또한 그 사람들이 요구하는 멋진 칼을 주면서 파인애플이 누구의 소유인지 각인시켰습니다.
그렇게 3년이 다시 흘렀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또다시 파인애플이 몽땅 사라졌습니다.
너무 화가 난 선교사님은 이번에는 더 강력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원주민들이 생필품과 소금을 구하던 상점 문을 닫아버린 것입니다.
소금을 구할수 없게 된 원주민들은 어쩔수 없이 파인애플 훔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소금을 구하기 위해 선교지를 떠나 깊은 정글로 들어가버리고 말았습니다.
자, 드디어 선교사님의 파인애플 밭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선교사님은 이제 달콤한 파인애플을 마음껏 혼자 차지하고 먹을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치명적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전도해야할 영혼들이 모두 다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상점 문을 다시 열고 쉐퍼트를 키웠습니다.
그러자 파인애플은 지켰지만 사람들이 선교사님께 찾아오질 않았습니다.
이렇게 선교사님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데는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은 완전히 실패하고 만 것입니다.
자, 여러분, 선교사님의 대처가 잘못된 것일까요?
자신의 돈, 시간, 권리를 지키기 위해 정당한 분노를 표출한 것뿐입니다.
솔직히 우리라도 이런 억울한 일을 당하면 이렇게 하지 않을까요?
우리 안에도 이처럼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내 권리를 지키기 위해 온갖 방법들을 쓸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창세기 34장에는 파인애플 몇개 도둑맞은 것과는 비교할수 없을만큼 끔찍한 일을 당한 가족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 가족 역시 자신들의 권리와 정의를 되찾기 위해 보복의 칼을 듭니다.
과연 그들이 휘두른 정의는 어떤 결과를 낳게 될까요?
오늘 본문 속 야곱의 가정으로 함께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론]
야곱은 고향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는 길에 형 에서를 만나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합니다.
20년전 야곱이 형 에서의 축복을 빼앗아 도망쳤던 과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잘 넘깁니다.
이제 야곱은 약속의 땅 베델로 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의 발걸음이 멈춥니다.
세겜이 눈에 들어온 것입니다.
기름진 땅, 넉넉한 환경, 편안한 정착지,
베델이라는 사명 대신 세겜이라는 안락함을 선택합니다.
큰 고비를 넘긴 사람은 종종 그렇게 됩니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긴장이 풀리고 영적 울타리가 조금씩 낮아집니다.
울타리가 낮아지면 세찬 바람이 들어옵니다.
비극은 그 틈으로 비집고 들어옵니다.
딸 디나가 세겜 부족장의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한 것입니다.
이 비극은 따지고보면 외부의 공격때문이 아닙니다.
야곱의 영적 울타리가 낮아진 데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장면이 이어집니다.
야곱은 딸 디나의 소식을 듣고도 일단 침묵합니다.
세겜부족이 어떻게 나올지 몰라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때 세겜 부족장이 찾아와 혼인을 제안합니다.
그러자 야곱의 아들들이 나서게 됩니다.
특히 디나와 같은 엄마인 레아에게서 태어난 오빠 시므온과 레위가 가장 많이 화가 났습니다.
아들들은 세겜 부족에게 조건을 걸었습니다.
할례를 받으면 혼인을 허락하겠다는 것입니다.
세겜 부족은 흔쾌히 동의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치밀하게 준비된 속임수였습니다.
할례가 남자 생식기의 표피를 잘라내는 것이라 매우 아픕니다.
한 일주일은 꼼짝을 못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할례를 받은지 3일차, 가장 아플때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부족을 칩니다.
얼마나 잔혹하게 학살하는지 볼까요?
25-29절입니다.
사흘 뒤에 장정 모두가 아직 상처가 아물지 않아서 아파하고 있을 때에, 야곱의 아들들 곧 디나의 친오라버니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들고 성읍으로 쳐들어가서, 순식간에 남자들을 모조로 죽였다. 그들은 하몰과 그의 아들 세겜도 칼로 쳐서 죽이고, 세겜의 집에 있는 디나를 데려왔다. 야곱의 다른 아들들은, 죽은 시체에 달려들어서 털고, 그들의 누이가 욕을 본 그 성읍을 약탈하였다. 그들은, 양과 소와 나귀와 성 안에 있는 것과 성 바깥들에 있는 것과 모든 재산을 빼앗고, 어린 것들과 아낙네들을 사로잡고, 집 안에 있는 물건을 다 약탈하였다.
어떻습니까?
남자들을 모두 죽이고 성읍의 모든 재산을 약탈합니다.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모두 사로잡아 포로로 끌고 갑니다.
완전히 초토화시킨 것입니다.
여기에 가장 앞장선 사람들이 바로 같은 배에서 난 시므온과 레위입니다.
심지어 다른 형제들도 가만있던게 아닙니다.
27절에 보면 야곱의 다른 아들들도 이 약탈에 동참했음을 알수 있습니다.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여동생이 성폭력을 당했다고 이렇게까지 보복해야할까요?
이게 여동생 디나에게 큰 위로가 될까요?
디나를 겁탈한 세겜 부족장의 아들만 죽이면 안되는 것일까요?
자신의 여동생이 당한 폭력에는 분노하면서 이 부족 사람들에게 가한 무차별적 폭력은 정당한가요?
물론 세겜 부족이 먼저 잘못을 했습니다.
야곱 아들들의 분노는 정당한 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을 혼인시키려 했고, 정당한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심지어 그 계약은 하나님 백성의 표시인 할례를 받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거룩한 표시를 속임수의 도구로 전락시킨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가장 약하고 무방비상태일때 공격하는 야비함을 보였습니다.
이들이 이런 짓을 하고도 야곱에게 하는 변명을 보십시오.
31절입니다.
그들이 대답하였다.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다루듯이 하는 데도, 그대로 두라는 말입니까?”
야곱의 아들들은 전혀 반성하지 않고 자신들이 한 일을 정당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정의로운 보복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의 분노는 정당하지만 그들의 복수방식은 광기에 불과합니다.
그럼 가장이자 영적 리더인 야곱의 반응은 어떨까요?
30절입니다.
일이 이쯤 되니,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를 나무랐다. “너희는 나를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들었다. 이제 가나안 사람이나, 브리스 사람이나,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나를 사귀지도 못할 추한 인간이라고 여길 게 아니냐? 우리는 수가 적은데, 그들이 합세해서 나를 치고, 나를 죽이면, 나와 나의 집안이 다 몰살 당할 수 밖에 없지 않느냐?”
야곱은 시므온과 레위를 책망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너희 때문에 내가 위험해졌다”입니다.
그의 관심은 딸의 고통도, 하나님의 정의도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안전과 평판 뿐입니다.
이 사건에서 야곱은 영적 리더로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는 하나님께 묻지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결국 이 가정 안에는 각자 다른 방식의 인간적인 반응만 가득합니다.
야곱은 두려움으로 침묵합니다.
아들들은 분노로 폭주합니다.
누구도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배제된 자리에서 인간은 각자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행동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공의에 관심이 없습니다.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니 아들들 앞에서 영적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상실한 것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잘 보시면 34장에는 하나님이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기도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부르짖음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빠진 자리에 대신 무엇이 들어왔습니까?
두려움이 들어왔습니다.
분노가 들어왔습니다.
기만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결국 피와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아들들의 분노는 이해할수 있습니다.
분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없이 인간이 스스로 세운 정의는 어느 순간 또다른 폭력으로 변질되고 맙니다.
내 상처가 깊다고 해서, 남을 무참히 짓밟을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명분 뒤에 분노를 숨길수록 그것은 정의가 아니라 자기 합리화일 뿐입니다.
하나님이 빠진 곳에는 인간의 혈기만 가득할 뿐입니다.
하나님이 빠진 곳에는 평화도, 정의도, 회복도 없습니다.
오직 죽음과 악취만 가득할 뿐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파인애플 스토리를 기억하십니까?
파인애플 때문에 원주민들이 다 떠나버린 선교사님의 결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많은 영혼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 선교사님은 안식년에 고국으로 돌아가 성경을 묵상하다가 크게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파인애플 밭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후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밭을 하나님께 드리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선교사님은 이제 그들이 파인애플을 훔쳐가도 더이상 화를 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밭을 전부 드렸기 때문입니다.
대놓고 가져가도 선교사님이 화를 내지 않자 원주민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이제야 선교사님이 진짜 그리스도인이 되셨군요.”
그리고 그들은 왜 선교사님이 화를 내지 않는지 궁금해합니다.
그러자 선교사님은 이제 밭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원주민들은 이제 선교사님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을 훔친 자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들은 어쩐지 자신들이 고기잡이도 사냥도 잘 안된 게 하나님의 것을 훔쳐서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 결과 이제서야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파인애플을 훔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파인애플은 선교사님과 원주민들이 함께 나눠 먹게 되었습니다.
결국 많은 원주민들이 주님께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럼 이 이야기를 오늘 말씀에 어떻게 적용할수 있을까요?
그렇다고해서 그럼 그냥 무조건 참아야 할까요?
잘못된 일도 그냥 덮어야 할까요?
먼저 분명한 것은 세겜부족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죄를 타협으로 덮는 것은 결코 해결책이 아닙니다.
하지만 동시에 시므온과 레위처럼 분노로 정의를 실행하는 것도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결국 문제는 이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님 없이 반응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두려움으로 침묵했고,
아들들은 분노로 폭주했습니다.
방식은 달랐지만 둘다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베델로 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 앞에서 반응해야 합니다.
진정한 승리는 내가 옳음을 증명하는 게 아닙니다.
내 억울함과 심판의 권리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겁함이나 포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자리를 내어드리는 가장 강력한 믿음의 행동입니다.
이번 한 주만이라도 이렇게 살아보면 어떻겠습니까?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때 그 반응을 조금만 늦춰 봅시다.
누군가 내 시간, 내 노력, 내 자존심을 건드릴때 마음속으로 ‘파인애플’을 외치며 5초만 참아봅시다.
그리고 “주님께 맡겨드립니다. 주님이 처리해주세요”라고 고백합시다.
우리가 나의 당연한 권리를 주님께 맡겨드릴 때 우리 삶의 ‘세겜’은 비로소 ‘베델’이 됩니다.
내가 심판자가 되기를 포기할때 하나님은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그런 베델의 예배자가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