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더하시는 교회

2026 새롭게하는교회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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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본문(신.190쪽)

Acts 2:42–47 NKRV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설교

지난해 보건복지부 발표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 한 해 동안 고독사로 세상을 떠난 분이 3,924명이라고 합니다.
하루에 평균 열 명이 넘는 우리 이웃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홀로 세상을 떠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숫자는 2020년 3,279명에 비해 5년 사이에 약 20% 증가한 수치입니다.
발견되는 장소의 89%가 주거지, 곧 자기 집입니다.
더욱 마음을 무겁게 하는 사실은.
고독사 현장을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이 가족이 아니라는 겁니다.
임대인이나 경비원 같은 분들이 43%로 가장 많고, 가족이 발견한 경우는 27%에 불과합니다.
다시 말해, 우리 시대에는 가족보다 집주인이 먼저 죽음을 발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연결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지구 반대편 사람과 영상통화를 합니다. SNS 친구가 수백 명, 수천 명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점점 더 외로워질까요.
왜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같은 가족이면서도 마음이 통하지 않을까요. 왜 함께 있어도 혼자라고 느낄까요.
세상이 그토록 갈망하면서도 결코 만들어내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기 때문 입니다.
바로 참된 사귐, 진정한 공동체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한 단어로 표현합니다. 헬라어로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입니다.
이 코이노니아라는 말을 잘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의 핵심 단어입니다. 우리말로는 보통 "교제"라고 번역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단어의 깊이를 다 담을 수 없습니다.

【대지 1】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 — 모든 교제의 뿌리

본문: 사도행전 2:42
Acts 2:42 NKRV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우선 본문을 보겠습니다 사도행전 2장 42절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이 말씀이 의 주인공들은 오순절 성령을 받고, 예루살렘에 모여 교회 공동체를 만든 사람들 이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삼천 명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대부분 유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러 곳에 있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로마에서, 어떤 이는 애굽에서, 어떤 이는 소아시아에서 왔습니다.
이들은 평생 율법을 지켰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순절 그 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들의 메시아로 영접하게 됩니다.
이 새로 믿게 된 삼천 명이 가장 먼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본문이 말합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사도들이 무엇을 가르쳤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부활을 가르쳤습니다.
사도행전 2장 32절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라고 선포합니다.
사도들의 모든 가르침은 부활하신 그리스도 한 분께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본문이 말합니다. "떡을 떼며"는 단순한 식사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에서 떡을 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 하신 그 떡을 떼는 것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찢기신 그리스도의 몸을 기념하는 자리였습니다.
또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했습니다.
헬라어로 "힘쓰니라"는 프로스카르테레오(προσκαρτερέω)인데, "끈질기게 매달리다, 헌신적으로 붙들다"는 뜻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옷자락을 절대 놓지 않듯, 그렇게 기도에 매달렸다는 말씀입니다.
Acts 2:42 NKRV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사도의 가르침을 받고, 서로 교제하고 떡을떼고, 오로지 기도하는 공동체
한마디로 예수님안에서 교제하는 공동체,
사도의 가르침도, 떡을 뗌도, 기도도 — 이 모든 것은 결국 한 가지를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그리스도와 깊이 연합되어 함께 살아가는 사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떤 모습을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어떤걸 중심으로 두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교회 봉사입니까. 예배 출석입니까. 성경공부입니까. 이 모든 것이 다 좋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모든것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누리고 있습니까?
신앙생활의 본질은 활동이 아닙니다.
연합입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린도전서1:9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목적은 일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곧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주님과 한 생명으로 묶인 거룩한 연합)를 위해서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혹시 신앙은 있으되 그리스도는 희미해진 자리에 있지 않습니까.
교회는 다니되 주님과의 사귐은 메말라 있지 않습니까? 모든 신앙생활의 뿌리,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가장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3)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를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은 세 가지 통로를 보여줍니다.
말씀과 성찬과 기도입니다.
먼저 말씀입니다. 성경을 펴실 때 단순히 정보를 읽지 마십시오.
그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을 통해 살아 계신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신다고 믿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하루에 한 장이라도 좋습니다. 분량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읽되, 그리스도를 만나는 마음으로 읽는 것입니다.
다음은 성찬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고린도전서 10장 16절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성찬이 있을 때, 형식적으로 받지 마시고 한 조각의 떡과 한 잔의 포도주를 받으실 때 "주님, 제가 주님과 하나 되었음을 다시 확인합니다" 하는 마음으로 받으시기를 권합니다.
마지막은 기도입니다.
솔직히 말해, 기도가 점점 형식적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기도는 본래, 주님과 마주 앉는 자리입니다.
길게 하실 필요 없습니다. 하루에 단 10분이라도, 주님과 마주 앉는 그 시간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귐)에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와의 사귐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를 회복하는 성도 되시기를 축언합니다.

【대지 2】 성도 간의 코이노니아 — 한 몸을 이루는 사귐

본문: 사도행전 2:42, 44, 46
Acts 2:42 NKRV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우리가 회복해야할 두번째는 성도간의 코이노니아 입니다.
오순절에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삼천 명. 이들은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메소보다미아 ... 본도와 아시아 ... 애굽과 ... 구레네 ... 로마"(행 2:9-10)에서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평생 한 번도 서로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사회적 신분이 달랐습니다. 부유한 상인부터 노예까지, 학식 있는 율법사부터 까막눈 농부까지 다 모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Acts 2:44 NKRV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본문은 말씀합니다. 헬라어로 "함께 있고 "마음을 같이하여"
마치 이들의 연합 사귐은 한 사람처럼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 간의 코이노니아(한 몸으로 묶인 운명 공동체)입니다.
여러분, 아까 말씀드린 그 통계를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한 해에 4천 명이 홀로 떠나가는 시대, 가족보다 집주인이 먼저 죽음을 발견하는 시대 — 이것이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릅니다. 가족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집에 살지만, 각자 방에 들어가 휴대폰만 봅니다. 식탁에 둘러앉아도 대화가 없습니다.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깊은 대화는 점점 사라집니다. 외로움이 조용히 깊어지는 시기입니다.
세상은 이 외로움을 SNS로, 동호회로, 모임으로, 술자리로 해결하려 합니다. 그러나 더 깊은 외로움이 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정한 코이노니아(영혼 깊이까지 함께 나누는 사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함께 있어도 한 마음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본문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교회가 그 답이다."
성령으로 한 몸이 된 공동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된 사람들 — 이것이 외로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우리는 이 성도 간의 코이노니아를 어떻게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무엇보다 "함께 있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46절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했습니다.
여기서도 "힘쓰고"라는 단어가 다시 등장합니다.
함께 있는 것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의지를 내야 합니다. 피곤해도, 바빠도, 마음이 무거워도 함께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오늘 이렇게 주일 오후 찬양예배에 모이신 여러분이 바로 그 힘쓰는 자리에 계신 것입니다.
특별히 우리 교회 안의 작은 모임들 — 구역 모임, 기도회, 각기관모임 이 모든 모임이 코이노니아의 자리입니다.
단순히 출석만 하지 마시고, 그 자리에서 마음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표면적인 인사로 끝나는 모임이 아니라, 가슴 깊은 곳을 열어 보이는 사귐이 진정한 코이노니아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서로의 짐을 져주는 것"을 실천하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6장 2절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한 몸이라는 말은, 다른 지체가 아플 때 나도 아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 누가 지금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지 알고 계시다면
이번 한 주, 한 분이라도 좋습니다. 전화 한 통, 카톡 한 줄, 따뜻한 식사 한 끼 — 이 작은 손길이 그분에게는 코이노니아의 큰 위로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가 뿌리라면, 성도 간의 코이노니아(형제자매와 한 몸 되어 살아가는 사귐)는 그 뿌리에서 자라난 줄기입니다.
뿌리만 있고 줄기가 없는 나무는 죽은 나무입니다.
오늘 이 다짐이 우리 안에 있기를 원합니다.
"나는 혼자 신앙생활하지 않겠습니다. 한 몸 된 형제자매와 함께 가겠습니다"

【대지 3】 나눔의 코이노니아 — 손을 펴는 사귐

본문: 사도행전 2:44-45, 47
본문 44절과 45절을 봅시다. 사도행전2:44-45
Acts 2:44–45 NKRV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이 말씀이 어떻게 다가오시나요? 정말 충격적지 않나요?
아닌가요?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다들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서 이것이 참 자연스러운가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당시 헬라-로마 사회는 철저한 계급 사회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자 귀족 왕족의 삶과 가난한 자의 삶이 같았을까요?
심지어 노예는 사람으로 취급받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 각계각층 각 나라의 사람들이 함께 있는걸로도 모자라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있습니다.
이를 보면 참된 코이노니아는 반드시 나눔 또한 나타난다는 겁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공산주의가 아닙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시면 "재산과 소유를 팔아"라고 했는데, 헬라어 동사가 미완료 시제입니다.
그렇다는건 소유를 그때 그때 필요할 때마다, 자발적으로 팔아서" 나누었다는 의미입니다.
강제적 공유가 아니라, 사랑에서 우러난 자발적 나눔이었습니다.
또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모두에게 똑같이가 아니라,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그 필요에 맞게 나누었다는 말씀입니다.
마음만이 아니라 손까지 움직이는 사귐 — 이것이 진정한 코이노니아(가진 것까지 함께 나누는 깊은 사귐)입니다.
이 사귐이 있는 곳에 주님께서 무엇을 더해줍니까?
함께 읽겠습니다.
Acts 2:47 NKRV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교회에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은 마케팅을 잘해서 모여드는 것이 아닙니다.
나눔이 있는 곳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있는곳에 주님이 친히 사람을 더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2) 예화 — 실천적 코이노니아의 실화
르 샹봉(Le Chambon-sur-Lignon)이라는 프랑스의 작은 마을 이름을 들어 보셨습니까.
프랑스 남부 산악 지대에 있는 위그노 후예의 개신교 마을입니다. 인구 약 5천 명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때는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습니다.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했고, 유대인들을 잡아 죽음의 수용소로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절망의 시기에, 르 샹봉 마을 사람들은 한 가지 결단을 내렸습니다. "우리 마을로 도망쳐 오는 유대인은 누구든지 숨겨 주자."
마을의 목사였던 앙드레 트로크메는 강단에서 회중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십시오, 사람의 뜻이 아니라." 그리고 매 설교 끝에 그는 이렇게 결론지었습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가서 이를 실천하라."
마을 사람들은 자기 집 다락방을 열었습니다. 자기 식량을 나누었습니다. 가난한 농부들이 자기 빵을 쪼개어 모르는 유대인 가족과 나누었습니다.
어떤 집은 한 번에 열 명, 스무 명을 숨겼습니다. 발각되면 자신들도 처형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이 작은 마을이 구한 유대인의 수가 얼마인 줄 아십니까.
약 5천 명이었습니다. 마을 인구 5000명의 마을이 5천명 만큼의 생명을 살린 것입니다.
전쟁 후 트로크메 목사의 사모인 마그다 트로크메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우리는 단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마을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어떻게 그들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이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사도행전 2장 45절의 말씀이 20세기에 살아난 모습입니다.
르 샹봉 마을 사람들은 매주 예배에 모여 그리스도와의 코이노니아를 누렸고, 한 공동체로 한 몸이 되어 살았으며, 결국 그 사귐이 가진 것을 나누는 것으로 흘러나갔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마을의 나눔이 5천 명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코이노니아/사귐은 어디까지 흘러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와의 사귐, 성도 간의 사귐 — 거기서 멈추어 있지는 않습니까? 아니면 그 사귐이 가진 것을 나누는 자리까지 흘러가고 있습니까.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 아이들을 보십시다.
코이노니아는 한 세대에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다음 세대로 흘러가야 합니다.
한국교회 초기 선교사들이 자기 목숨을 걸고 우리 땅에 복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
우리 또한 믿음의 선배들이 새벽마다 무릎으로 이 나라와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하셨기 때문에 이자리에 있습니다. 그 코이노니아의 흐름 안에서 우리가 오늘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 시간, 물질을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흘려보낼 것입니까.
가장 먼저, 물질의 나눔을 결단하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는 강하게 말씀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 2:15-16).
이번 한 주, 우리 교회 안에, 혹은 가까운 이웃 가운데 어려운 분이 계실 것입니다.
따뜻한 한 끼 식사를 대접하실 수 있고, 작은 봉투에 마음을 담아 전하실 수 있습니다. 액수가 아닙니다. 마음이 흐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질만이 아닙니다. 시간의 나눔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가장 귀한 자원이 시간입니다. 가족과 마음을 나누는 시간, 외로운 이웃을 찾아가는 시간,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 — 이 시간이 곧 코이노니아입니다.
특별히 오늘이 어린이주일임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자녀에게, 혹은 우리 교회 어린이들에게, 한 주에 단 한 번이라도 따뜻한 말 한마디, 격려의 손길을 나누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어른의 따뜻한 한 마디가 어린 영혼에게는 평생 기억되는 코이노니아의 씨앗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은혜인 신앙의 유산을 흘려보내시기 바랍니다. 자녀와 대화하실 때 그냥 안부만 묻지 마시고, "내가 너를 위해 매일 기도하고 있다"라고 말해 주십시오.
부담스러운 잔소리가 아니라 따뜻한 신앙의 고백으로 전해 주십시오. 이 한 마디가 평생 그들의 인생에 닻이 됩니다. 풍랑이 몰아칠 때 그들을 붙들어 주는 닻이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본문 47절의 마지막 말씀을 다시 봅시다.
Acts 2:47 NKRV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우리 교회의 작은 나눔이 누군가의 인생을 살릴 수 있습니다. 그 일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하시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저 사랑으로 손을 펴기만 하면 됩니다.
그 뿌리는 사도의 가르침과 떡을 뗌과 기도로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사귐이었고,
그 줄기는 마음을 같이하여 한 몸을 이룬 성도 간의 사귐이었으며, 그 열매는 가진 것을 자발적으로 흘려보낸 나눔의 사귐이었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께 깊이 뿌리내리고, 서로를 한 몸으로 품으며, 가진 것을 다음 세대와 이웃에게 흘려보내는 — 그런 코이노니아의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우리를 하나의 성전으로 만드시 하나님 아버지,
단절되고 외로운 세상 속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한 가족 삼아 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이 시간 우리의 굳어지고 메마른 마음을 먼저 돌아봅니다.
이웃이 홀로 외롭게 생을 마감하는 차가운 현실 속에서도, 우리는 각자의 삶에 쫓겨 곁에 있는 형제와 자매의 아픔을 깊이 살피지 못했습니다.
주님, 이기적이었던 우리의 연약함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우리 교회가 사도행전의 그 교회처럼, 생명력이 넘치는 코이노니아를 회복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먼저, 십자가에서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 되기를 원합니다.
날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엎드려 기도하며,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의 옷자락을 붙드는 깊은 사귐이 우리 영혼 깊은 곳에서 다시 시작되게 하옵소서.
그 든든한 뿌리에서 성도 간의 사랑이 피어나기를 원합니다.
피곤하고 바쁜 일상 속에서도 모이기를 힘쓰게 하시고, 누군가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짐을 기꺼이 나누어 지게 하옵소서.
겉치레뿐인 인사에 머물지 않고,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며 진심으로 끌어안는 진정한 한 몸이 되게 하옵소서.
특별히 어린이주일을 맞아, 우리의 자녀들과 교회의 다음 세대에게 변하지 않는 굳건한 믿음의 유산을 따뜻한 언어로 흘려보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작은 미소와 다정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을 지탱하는 닻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진솔한 나눔이 메마른 땅을 적시는 단비가 되게 하시고, 이 제단에 구원받는 영혼들이 날마다 더해지는 기쁨을 우리 모두가 목도하게 하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자 참된 위로가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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