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읽는 주기도문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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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는 주기도문_03_ 하나님 우리 아버지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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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 제 3장 하나님 우리 아버지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마태복음 6장 9절 상반절

I. 들어가는 말

하늘에 계시니라는 말씀이 하나님의 본질과 관련이 있다면 우리 아버지라는 말씀은 그처럼 초월적이신 하나님과 기도하는 우리 사이에 또 다른 관계를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를 시작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께 기도를 배우는 제자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비록 하나님께서 온 땅과 만물 위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시라 할지라도 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00:54) 이것이 하나님의 초월성에 대한 그들의 인식을 방해해서는 안 되었지만 또한 온 땅과 마무리에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분이신 것처럼 생각되어서도 어 안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쳐 주신 이유였습니다.

II. 하나님 아버지

기도하는 우리에게 하늘의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이십니다. 아버지라는 호칭은 가족 관계를 전제로 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한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와 같은 것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이토록 친근하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우리를 당신의 가족 관계 안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01:52) 성경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A 4중의 아버지 되심.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이 호칭은 사중의 의미로 사용됩니다. 위격적 아버지 되심, 창조적 아버지 되심, 신정적 아버지 되심, 양자적 아버지 되심이 그것입니다. 첫째로는 위일체 안에서의 위격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성자와 성령과 구별된 성부가 아버지로 불리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셨는데이는 3일 제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이심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30절. 둘째로는 창조적 아버지 되심입니다.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습니다.
(02:49) 만물과 함께 인간의 기원 역시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이 땅에 있는 모든 창조된 인간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을 신의 소생이라고 여겼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8절.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인류가 하나님의 소생임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사도행전 17장 29절. 셋째로는 신정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세상의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중 특별히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셔서 당신의 민족으로 삼으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과 선택된 백성들 사이의 관계를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로 묘사합니다. 진실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어리석고 지혜없는 이스라엘에게 모세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상기시켜 주었는데이는 신정국가의 아버지 되심입니다. 신명기
(03:55) 32장 6절 넷째로는 양자적 아버지 되심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으로 말미암아 언약 백성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구속의 아버지가 되어 주심을 가리킵니다. 성경은 우리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은 자가 아니라 양자의 영을 받은 자들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말합니다. 로마서 8장 15절 하나님의 양자적 아버지 되심은 당신의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우리로 당신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 데서도 나타납니다. 갈라디아서 4장 6절. 아빠 아버지의 호칭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실 때도 사용하셨습니다.
(04:43) 마가복음 14장 36절.

B 하나님 아버지라는 호칭.

이처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성경 속에서 다양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언급되는 아버지라는 호칭은 어떤 의미로 사용된 것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허칭은 역사적으로는 창조적이고 신정적 아버지 되심을 배경으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양자적 의미에서 아버지 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하나님의 양자가 될 성도들의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유대인의 호칭 관습.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호칭하도록 가르치신 것은 당시 유대인의 관습에 비추어 보면 매우 낯선 것이었습니다.
(05:40)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이것은 민족적 관점에서였지 개인적 관점에서가 아니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은 아버지로 호칭됩니다. 그러나 개인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용는 흔하지 않습니다. 시편 89편 26절. 구약의 이러한 전통은 팔레스타인 유대주의에서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거의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언제나 내 아버지라고 부르셨으며 기도 속에서도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셨다는 사실을 내 복음서가 모두 증거합니다. 마태복음 26장 39절 42절 마가복음 14장 36절 누가복음 23장 46절 요한복음 12장 28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아버지라고 하신 호칭은 공동체적 호칭입니다.
(06:42) 비록 그 공동체가 육적 이스라엘의 공동체를 넘어서 당신 안에서 이어질 신약시대 그리스도 교회의 공동체를 가르키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시기 전 이미 그가 살아오신 모든 삶의 과정 속에서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르셨는데이 표현이 복음서에만 약 49회나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 11장 27절 등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을 때이 표현뿐 아니라 호칭하시는 방식의 친근함이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생소했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의 아버지 호칭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07:37) 즉 공동체의 기도로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이 우리와 함께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신다는 점에서 우리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됨을 공유하신다고 해석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되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서 어느 곳에서도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어서 자신을 인간들과 함께 묶어서 같은 자녀들이라고 거론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언제나 자신과 제자들을 나누어서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5장 16절 45절 48절 마가복음 11장 25절 누가복음 6장 36절 요한복음 20장 17절 그러므로 본문에 나타난 우리라는 표현은 예수님을 포함하는 우리가 아닙니다. 제자들을 포함하여 이전에
(08:41) 믿음을 가졌던 모든 선조들 그리고 후에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믿음의 사람들을 아우르는 공동체로서의 우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섬기신 아버지와 우리가 섬기는 아버지가 다른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누리시는 아들 되심과 우리가 누리는 아들됨은 다릅니다. 비록 사람의 몸을 입으셨으나 신성을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가지셨던 관계를 구원받은 죄인에 불과한 우리가 하나님과 누리는 관계에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아버지라는이 구절을 대하며 하나님께서는 한 하나님이시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아버지가 가지신 관계는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와는 관계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임을 염두해 두어야 합니다. (09:40)

3.우리 아버지와 아콤모다치오

이런 오해의 소지에도 불구하고 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며 기도하라고 하셨을까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우리의 예수전에 맞는 화법으로 기도를 가르치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이런 업법을 자주 구사합니다. 자녀들과 함께 진동생의 집에 놀러가는 엄마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일러둡니다. 얘들아 외삼촌을 만나면 외삼촌 안녕하셨어요. 초대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꼭 인사해야 한다. 그런데 사실 아이들의 외삼촌은 엄마에게는 자신의 동생입니다. 평소에 엄마는 결코 그를 외삼촌이라고 부르지 않지만 아이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아이의 눈높이에서 아이가 할 말을 가르쳐 줍니다.
(10:38) 이것을 신학 용어로 아모다치오 혹은 적응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호칭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우리의 눈높이에서 말씀해 주신 것이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것과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또한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은 기도하는 우리가 하나님과 맺고 있는 관계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기도하는 믿음의 지체들 사이의 관계가 어떠해야 할지를 보여줍니다. 기도하고 있는 나 한 사람만이 아닌 나를 포함한 모든 믿음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따라서이 표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부자 관계가 성립하는 것과 함께 믿음의 지체들간에 형제됨의 관계를 동시에 보여 줍니다. (11:34)

III. 우리 아버지.

이 구절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아버지여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파테르입니다. 당시이 단어는 가족 관계에서 통되는 아버지에 대한 호칭이었습니다. 이것을 이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기도하시는 중에 하나님을 부르실 때 아라나 아빠를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마가복음 14장 36절이 아라머 단어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아빠라는 단어와 만먹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요 예레미아스는 바빌로니아 탈모드의 기록을 근거로 아빠라는 아라머가 원래 유대인 어린아이들이 아버지를 호칭하며 말을 더듬는 소리라고 보았는데이는 마치 어머니를 호칭하며 임마라고
(12:40)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확장되어서 어린아이 될뿐만 아니라 다 큰 아들이나 딸들도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렀는데이는 거리감 없는 친근한 호칭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그는 자신의 책 신약성서의 중심 메시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두루마리 문서들을 통해 알게 된 것과 같이 아빠는 적어도 기원전 2세기까지 팔레스타인 아라머에서 사용된 아버지에 대한 옛허칭 아비를 대신하였다. 더욱이 아빠는 나의 아버지와 그 아버지 등의 함축된 의미를 인계받았다. 심지어 때로는 그의 아버지나 우리의 아버지를 대신하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이 단어는 더 이상 어린아이의 관계 관용으로만 제한되지 않았다.
(13:35) 성인이 된 아들이나 딸들도 그들의 아버지를 아빠라고 불렀으며 비교 누가복음 15장 21절 단지 공적인 장소에서만 주여라고 불렀다. 비교 마태복음 21장 29절 30절. 이런 점에서 볼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신 것은 실로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비록 유대문헌에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몇 개의 용내가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예수님의 하나님께 대한 아빠라는 호칭의 사용은 독특하고 이것이 함하는 의미 역시 주목할 말합니다. 이에 대하여 김세 교수는 자신의 책 주기도문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아주 혁명적으로 하나님을 이렇게 아빠라고 부른 것입니다.
(14:28) 이것이야말로 예수의 독특한 업법입니다. 첫째로 예수가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는 것이고 예수이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라는 자기 이해를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 관찰할 것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도 자신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기도의 참바디에서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역사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도록 한 것은 예수의 자기 이해 곧 자신의 사에 대한 이해가 어떤 것인지를 합니다. 예수는 자기를 자신의 하나님 나라 복음 선포를 통해 새롭게 창조하고 모으는 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어 창조주 하나님의 부요함을 덧입게 하는 자로 이해했습니다.
(15:17) 그러니까 예수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드는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라는 자기 이해를이 한마디 아빠라는 표현 속에 담습니다. 인류는 처음 창조될 때부터 한 남자에게서 여자가 창조되고 두 사람에게서 자녀들이 출생함으로써 가족 관계를 이루도록 의도되었습니다. 만약 인간의 타락으로 죄가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온 인류는 서로를 자신의 살과 뼈로 여기는 한 가족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이 세상에 죄가 들어오자 인간 창조와 함께 의도되었던 가족관계는 산산이 깨어졌습니다. 가인에 의하여 아벨이 살해된 사건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창세기 4장 8절.
(16: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좌절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수립된 새 언약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영적인 가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는 다음 사항들을 속고하여야 합니다.

A 오염된 아버지의 관념.

첫째로 어 아버지에 대한 우리의 그릇된 관념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성경이 그리고 있는 아버지 상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 그 아버지를 아는데 방해를 받을 때가 많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일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와는 매우 다릅니다.
(16:53) 우리의 자녀들은 부모를 전적으로 우전하지 않습니다. 장성하여 부모의 도움이 필요 없게 된 이후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부모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과거처럼 무조건 자식을 위하여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불완전함 때문만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아버지라는 표현에 담긴 의미를 충분하게 전달받지 못하고 있습니다.이 문제를 생각하기 위하여 시대를 거꾸로 돌려볼 수 있다면 가장 좋겠지만 우리의 상상력이 미칠 수 있는 범위까지만 시간을 돌려보겠습니다. 고대 사회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대부분의 가정이 농경 생활을 통해 의식주를 해결했습니다.
(17:40) 그때 아버지는 힘과 지혜의 상징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어린 자녀들이 모르는 것을 알고 있고 누구보다 힘이 세며 각까지 손째주로 무슨 일이든지 척척 해결해 주었습니다. 산업화 사회의 초기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이런 권인은 살아 있었습니다. 매달 두툼한 월급 봉투를 집에 가지고 돌아와서는 모든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어머니에게 건내는 아버지의 의기 양한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온 가족의 생계는 그렇게 아버지의 월급 봉투 하나에 의존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아버지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자녀들에게 아버지는 더 이상 의존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아버지는 식구들이 미쳐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일토로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옵니다.
(18:28) 어린 자녀들의 눈에는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보다 엄마 손에 들린 신용 카드가 더 현실적인 도움의 수단입니다. 아버지의 월급은 어머니의 통장으로 직행하기 때문입니다. 이란 오늘날의 사회구조 속에서 자녀들이 아버지에게 의존적인 감정을 갖기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이 타락하고 난 뒤 모든 인간 관계가 깨워졌지만 가장 심각하게 파괴되고 영광을 잃은 것 중 하나가 아버지됨 혹은 가장됨이 아닙니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가장 잘 드러내 주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그분을 닮은 아름다운 지위였는데 인간의 죄와 타락으로 말미암아 그 영광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전 세계 138개국의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한 설문 조사의 결과는 오늘날 아버지의 위치를 잘 보여줍니다.
(19:26)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무엇입니까?라는 라는 질문에 1위는 엄마, 2위는 열정, 3위는 미소였습니다. 그리고 4위가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72권 밖에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기도할 때마다 온 땅과 만물에 뛰어난 전적인 타자이신 그분을 아버지라고 부르거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염두해 두신 아버지는 지금 우리에게 익숙해진 불안전한 인간 아버지의 상이 아닙니다. 고대 사회의 끈끈한 가족 관계 속에서 아버지 모습 그 이상을 떠올리며 전적인 의존의 감정으로 하나님을 부르라는 의미였습니다. 성경이 그려내고 있는 아버지의 상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20:20)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엄격함과 위험이 있으신 동시에 집나간 탕자를 눈이 짓무르도록 그리워하며 기다리는 분이십니다. 누가복음 15장 20절. 원래 아버지는 탁월한 권위와 엄격함 그리고 사랑을 함께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 심겨진 아버지상 때문에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인격적으로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더욱 아버지와의 관계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 아버지가 되어본 적이 없는 사람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아버지 아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는 너무나 많습니다. 1생 동안 그렇던 인상으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 정당한 관념을 갖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여라는 구절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이 죄의 파괴력입니다.
(21:10) 인간 사회에 들어온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였을뿐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를 비롯한 모든 가족 관계를 망가뜨렸습니다. 서로 사랑하고 의지하며 기뻐해야 할 관계를 증하고 미워하며 상처받는 관계로 바꾸어 버린 것입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누리던 친밀한 관계와 인간들 사이에서 누려지던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핵심적으로 구현되어야 할 관계가 바로 가족 관계인데 이것이 깨뜨려졌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아버지의 형상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졌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초입에서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는 그릇된 아버지상에 기초하여 하나님 아버지를 충분히 알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여야 합니다.
(22:02)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계시를 통하여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가르쳐 주지 못한 진정한 아버지의 성품과 속성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B. 구속을 통한 아버지 되심.

둘째로 구속을 통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의 아버지였던 요셉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분명 어린 예수를 성심을 다해 양육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셉을 떠올리며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영원 전부터 신적인 인격으로 하나님 아버지와 교재하셨습니다. 그분이 성자로서 갖고 계셨던 성부에 대한 의식,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후에도 계속 누리셨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통 무엇보다 신적 본질로서 성부와 교통하시며 하신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인상을
(23:05)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최대 과제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아버지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 그리고 세계와 만물에 대한 모든 지식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됩니다. 바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세계가 무엇이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하여 온 땅과 만물 위에 높으신 초울적인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지 알아가게 됩니다.
(23:50) 하나님을 아는 것만큼만 인간을 알 수 있고 또 인간과 세계를 정당하게 아는 것만큼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지식은 하나님은 물론 우리와이 세계를 아는 모든 지식과 함께 회개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가게 만들어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안 사람은 이미 자신이 누구인지를 안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세부적으로 다음 상황들을 숙구하게 합니다.

1. 창조의 아버지 되심을 능가함.

첫째로는 여기서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창조의 아버지 되심을 능가합니다.
(24:38)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창조의 아버지 되심과 신정적 아버지 되심을 통해서도 이미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나타난 계시는 이후에 나타날 양자적 아버지 되심을 향하는 한 시작이요 과정일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닫기 위해서는 창조 세계를 주목하고 이스라엘의 역사를 아는 일말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일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이 무엇인지 터득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사람을 만드실 때 첫째 사람인 남자를 창조하시고 둘째 사람인 여자는 남자의 신체일보를 재료삼아 만드셨습니다.
(25:30) 이렇게 하신 이유는 그들이 두 사람이지만 사실은 한 몸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후로 그 두 사람의 생식에 의하여 자녀들이 출생했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원리로 인류가 증가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앞에 하와를 이끌어 오실 때에 아담은 이렇게 고백합니다.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 창세기 2장 23절. 다시 말해서 하와는 아담 자신에게 치명적인 뼈이며 살이라는 고백입니다. 이것은 히브리 문학적 표현에 있어서 사랑에 대한 최고의 표현입니다.이 고백은 우리가 흔히 이해하는 것처럼 단지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만의 고백이 아닙니다.이는 이는 이후 그들로 말미암아 태어나게 될 모든 인류가 서로를 향하여 해야 할 고백이었으니 하나님께서 인류 사회를 하나의 가족과 같은 영적 공동체를 이루며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시려는 경류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26:31) 하나님께서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실 때 바라셨던 인류 사회가 이런 것이었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서로를 사랑하며 완전한 연합의 관계를 누리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일체 안에서 누리시는 그 완전한 사랑의 교통의 모상들을 이루게 하심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늘의 아름다움이 지상에서 모상으로 나타나기를 기뻐하셨는데 순결한 영이신 당신을 닮은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것처럼 서로를 사랑하며 그 안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며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높은 하늘에서는 성부성자 성께서 함께 사랑으로 교통하시며 그 사랑으로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이 낮은 땅에서는 모든 인류가 서로에게 뼈중에 살중에 살인관계가 되어 온전한 사랑의 교통을 이참을 누리며 살아가게 지으셨습니다.
(27:34) 하나님께서는 천상에서 이루어지는 영적인 교통들이이 땅에 보이는 사물 사이에서도 나타나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천상의 세계와 보이는 지상의 세계는 서로 영관을 이루면서 각기 다른 방식으로 창조의 아버지 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녀로 삼아 주시고 구속의 아버지가 되어 주심으로써 깨닫게 된 것입니다.

2. 우리의 죄를 사랑으로 해결하심

둘째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를 사랑으로 해결하셨습니다. 서 말한 인류 사회와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은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깨뜨려졌습니다.
(28:26) 인간의 범죄는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에 전면적으로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죄는 서로를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고 고백해야 할 관계를 미움과 불신의 관계로 망가뜨렸습니다. 깨어진 관계의 두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2절. 급기아 자녀들은 부모의 고백을 물려받는 대신 미움으로 살인을 자행하였습니다. 창세기 4장 8절. 그리고 작은 손해를 참지 못하고 이웃을 때리고 죽이는 일을 자랑삼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창세기 4장 23절부터 24절. 이와 같이 창조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들의 사랑의 교통은 죄로 말미암아 산산히 깨뜨려져 버렸고 창조의 세계는 더 이상 창조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올바르게 드러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29:18) 창조 세계의 대부분의 아름다움과 영광은 하나님 자신에게로 돌아갔고 아름다움은 추함에게 자리를 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우주적 사랑과 생명의 교통보다는 인간의 일그러진 자기 사랑과 다툼이 세상에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을 떠난 인간을 영원히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창조의 의도와는 달리 추악에 변한 인간들의 불행한 모습을 참아보실 수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를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인간은 스스로 타기 전에 누리던 하나님 아버지와의 아름다운 관계로 돌아갈 수 없음이 분명했기 때문에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범죄를 사랑으로 갚으셨습니다.
(30:04) 당신이 사랑하시는 아들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끔찍한 형벌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멀리 떠난 우리와 진노하시는 하나님 사이에 중보자가 되셔서 타락한 인류로 하여금 다시 한번 하나님 사랑으로 하나될 길을 여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행동이 없었더라면 죄인들은 영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만큼 구속의 은혜를 절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는 없습니다.

3. 우리를 가족 삼으신 예수님.

셋째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가족 관계입니다. 구원의 경륜이 우주적으로 모두 완성되고 성취되는 그날에 피조 세계는 우주적으로 회복될 것입니다.
(30:56) 인류는 서로에게 대한 모든 저기를 버릴 것이며 모든 사람이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이라라고 고백하며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인류의 사랑한 가운데 사랑의 궁극적 원천이신 하나님이 계실 것입니다. 모든 인간들의 서로를 향한 사랑은 하나님 사랑으로부터 나올 것이며 하나님 사랑은 모든 인간들을 향한 사랑으로 흘러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한을 아버지로 부르는 한 가족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오기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미래의이 아름다운 인류 사회를이 세상의 종자씨로 뿌려 자라게 하셨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31:46) 그래서 그리스도의 교회의 영적 번영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완전한 사랑의 우주적 회복이 인류 사회 안에 온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그 이상들을 교회 안에 신자들의 공동체 안에서 선취적으로 누리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이 땅에 교회를 두신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그리스도 안에서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새 인류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과 또한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 있는 소외, 적대감과 불활를 그리스도 안에서 하시고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고 사랑하시는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셨습니다.
(32:32)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온 인류를 구원하여 다시 한 가족으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예수 믿게 만드셔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께 덧붙여진 한 가족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먼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 깨닫게 되고 지체들 안에서 하나님의 상을 보며 서로를 뼈중에 뼈 살중 살로며 사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알지 못해 소회된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갑니다. 그것이 전도와 선교이며 사람들을 당신의 사랑 안에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그 사랑 때문에 다른 곳이 아닌 교회 안에서 이후에 온 인류가 하나님 사랑 안에서 살아갈 삶의 방식을 어떻게 실천할지를 배웁니다.
(33:22) 끊임없는 용서와 나눔이 바로 그것입니다. 질를 나눔이 육적인 도움이라면 용서는 영혼의 도움입니다. 나눔과 용서를 통하여 교회의 지체들과 나아가서 인류를 섬겨 서로를 온전하게함으로써 그들이 서로 한 가족임을 구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만나는 지체들을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도 바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공로로서 이루어진 한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4. 영적 핏줄인 그리스도의 지체들.

넷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이루어지는 교회의 지체 관계입니다. 우리는 주님 때문에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고 영적인 한 가족으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육적인 핏줄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핏줄 때문에 하나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34:13)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기 전까지 누구도 하나님 아버지의 탁월한 사랑을 알지 못했습니다. 눈앞에 창조 세계가 숨김없이 드러났것만 그것들은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지 못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가 없었던 사람이 없것만이 땅의 아버지는 우리에게 하늘 아버지의 존재를 가르쳐주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죽으심이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이는 사랑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육신의 눈으로는 본 적 없는 하나님을 진정한 아버지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부터 우리는이 세상 누구에게서도 받아본 적이 없는 자비와 은혜를 입히시는 하늘 아버지를 누리며 살아온 것입니다.
(35:00) 여러분이 하나님 없이 살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때 우리는 아버지 없이 살아가던 막된 자식들이었습니다. 제멋대로 자라서 인생을 사는 이치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고 영적 개념이나 고상한 교양도 없었습니다. 우리는 본질상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진노의 자녀였고 하나님과 원수를 맺은 인간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말합니다.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서 2장 3절 그러한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35:43) 본래만도 못한 더럽고 탐력스러운 죄인에게 아버지라고 일걸음을 받으시는 것이 부끄럽지도 않으신지 우리를 찾아오셔서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를 발라 정결케 하셨습니다. 곧 하나님과 원수였던 자들을 당신과 화목하게 하여 자녀로 삼아 주신 것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에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로마서 5장 10절. 구원받음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아버지의 집에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나처럼 아버지의 사랑에 붙들려 함께 살게 된 여러 지체들을 만났습니다.
(36:31)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 아버지를 내 아버지라고만 부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내 아버지는 내 아버지실뿐 아니라 저 형제와 자매의 아버지도 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 아버지를 내 아버지라고 부른다 한들 그 누구도 탓타거나 시세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버지 되심을 누려본 사람들은 그분의 사랑이 끝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이 세상 수많은 사람이 그분을 아버지라고 불러도 내가 아버지로부터 받는 그 사랑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를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부릅니다.
(37:09) 이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속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가 지체들과 맺는 관계까지도 아우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각 사람을 향한 개별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거나 과소 평가하지 않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며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것은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기도가 개인의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모든 아들 딸들과 함께 손잡고 드리는 공동체적 기도임을 생각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나의 기도가 그들의 간구에 그들의 간구가 나의 기도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례 전적으로 연합된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이 세상에 계셨더라면 어 사셨을 그 기도와 강부의 삶을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38:07) 사랑하는 여러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누리고 계십니까? 우리의 아버지 되어주신 그 사랑에 충분히 감격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온 땅과 만물이에 홀로 뛰어나 초월하신 분이시지만 우리와 관계를 맺으심에 있어서는 우리 육신의 아버지보다 더 가까운 사랑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 전달해 주지 못한 진정한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성에 구속하시는 은혜를 통하여 깨닫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하늘에 계시지만이 땅에 있는 우리의 아버지들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더 많은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38:51)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시편 27편 10절. 여러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아버지의 큰 사랑이 영원부터 계셨으며 지금도 계속되고 있음을 확신하십니까?

IV. 결론

하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우리 같은 죄인들을 용서하사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을까요? 우리가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소외나 고독을 느끼시는 것도 아닌데 왜 당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까지 우리를 당신의 가족으로 삼으시삼으려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느니라.
(39:45) 로마서 5장 8절. 하나님의 그 사랑은 목적이 없는 사랑이 아니라 기대하는 바가 있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이 세상에서 하나님 아버지를 지극히 공경하며 하나님과의 완전한 사랑 속에서 그분의 속성을 온전히 드러내며 살아가셨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진리와 사랑으로서 그렇게이 세상에 빛을 비추며 살아가게 하시려고 부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얼매고 있는 세상의 근심과 걱정, 염려를 모두 내려놓고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늘에 계신 그분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그분께 아껴서 감춘 것이 있어도 그분은 우리에게 아끼시는 것이 없으십니다.
(40:33) 우리는 그분이 계시지 않았으면 할 때가 있어도 그분은 우리가 차라리 없었으면 하실 때가 없습니다. 그러므로이 좋으신 하나 아버지의 품 바깥에서 행복해지기를 구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는 마음의 시선을 하늘에 계신 우리 하나님께 고정하고 그분이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에 깊이 감사하고 감격해야 합니다. 모든 근심과 염려 그리고 불안 이처럼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를지며 살아가기 때문에 우리 앞에 드리워진 것입니다. 마시 태양을 진 사람이 자신 앞에 그림자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비록 우리가 너무나 오래도록 너무나 멀리 하나님을 떠나서 그분 앞에 나아가기가 부끄럽게 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분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41:24) 우리는 하나님을 여러 번 버렸고 떠났으나 그분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잊으신 적이 없으신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기에 너무 늦었다고 생각할 때 그분은 이미 우리 가까이 와서 돌이키기를 기다리시고 너무 멀리 떠나 왔다고 생각할 때 그분은 이미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이렇게 사랑이 많으시고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오십시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과 행복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좋은 자녀로서 그분의 영광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 한눈에 보는 3장
I.들어가는 말
온 땅과 만물 위에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와의 관계에 있어서 아버지가 되신다.
위대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친근하게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II. 하나님 아버지
A 사중의 아버지 되심
성경은 사중의 의미로 하나님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첫째일 제안에서의 위격적 아버지 되십니다. 성자와 성령과 구별되어 성부가 아버지로 불리신다. 둘째 창조적 아버지 되십니다.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로부터 났으므로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신다. 셋째, 신정적 아버지 되십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께로부터 낫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중 특별히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당신의 민족으로 삼으셨다. 넷째, 양자적 아버지 되심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으로 말미암아 언약 백성들을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고 구속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다.
B. 하나님 아버지라는 호칭.
주기도문의 우리 아버지여라는 호칭은 역사적으로는 창조적 신정적 아버지 되심을 배경으로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양자적 의미에서 아버지 되심을 말한다.
1. 유대인의 호칭 관습.
당시 유대인의 관습에 비추어볼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낯선 표현이었다. 그러나 사복음서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언제나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2.예수님의 아버지 호칭.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인간들과 함께 묶어 자녀들로 거론하지는 않으셨다. 주기도문에 있는 우리라는 표현은 제자들을 포함한 믿음의 선조들 그리고 후에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모든 믿음의 사람들을 아우르는 공동체를 말한다.
3.우리 아버지와 아콤모다치오.
우리 아버지라는 표현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부자관계와 동시에 믿음의 지체들 간의 형제 관계를 보여준다.
III. 우리 아버지
아버지여라고 번역된 헬라 파테르는 당시 가족관계에서 통되는 아버지를 가리킨다. 이것은 거리가 없는 친근한 호칭이었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지 않았더라면 온 인류는 서로를 자기의 살과 뼈로 여기는 한 가족이 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타락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좌절될 수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롭게 수립된 새 언약 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영적인 가족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셨다.
A 오염된 아버지의 관념.
우리는 성경이 그리고 있는 참된 아버지상을 충분히 경험하고 있지 못하다. 성경의 아버지상에는 탁월한 권위, 엄격함, 그리고 사랑이 있다.
B. 구속을 통한 아버지 되심.
주님께서는 성자로서 갖고 계셨던 성부에 대한 의식,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이후에도 계속 누리셨을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통 무엇보다 신적 본질로서 성부와 교통하시며 터득하신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인상을 가지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도록 우리에게 가르쳐주셨다.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세계에 대한 모든 지식은 한점으로 수렴된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세계가 무엇이며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배운다. 이를 통해 온 땅과 만물리에 높으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지 알아가게 된다.
1. 창조의 아버지 되심을 능가함.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을 절실히 깨달으려면 창조 세계와 이스라엘 역사를 주목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신 일을 올바로 알아야 한다.
2. 우리의 죄를 사랑으로 해결하심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아들로 하여금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끔찍한 형벌을 당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이러한 구원 행동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을 것이다.
3. 우리를 가족 삼으신 예수님
구원의 경륜이 우주적으로 모두 완성되고 성취되는 날에 비조 세계는 우주적으로 회복될 것이다. 모든 인간들의 서로를 향한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나올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인간들을 향한 사랑으로 흘러나올 것이다. 우리는 모두 한을 아버지로 부르는 한 가족이 될 것이다.
그날이 오기 전에도 하나님께서는 미래의이 아름다운 인류 사회를이 세상의 종자시로 뿌려 자라게 하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4. 영적 핏줄인 그리스도의 지체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핏줄 때문에 영적인 한 가족으로서 하나됨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부를뿐만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른다.
IV. 결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끼는 것이 없으시다. 사랑이 많으시고 좋으신 하나님께 돌아오라.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광과 행복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좋은 자녀로서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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