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를 환대하듯

어린이 주일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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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어린아이를 환대하듯

본문: 마가복음 10장 13-16절

찬송: 569장 선한 목자되신 우리 주

말씀의 문을 열며

사랑하는 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푸르른 생명력이 가득한 5월의 첫 주일이자 어린이주일을 맞아 주님의 전으로 나아오신 여러분 모두를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창밖의 나무들이 연두색 새잎을 내밀며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노래하듯,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의 심령 위에도 성령의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가득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마가복음 10장의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축복하시는 이 평화로운 그림은 많은 성화의 소재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이면에는 당시의 고정관념을 뒤흔드는 아주 강렬한 하나님 나라의 질서와, 우리 신앙의 본질을 묻는 질문이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과연 어떤 태도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우리를 안아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절망 속에서 소망을 찾는 부모의 마음 (서론)

오늘 본문 13절은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매"라고 시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데리고 왔다'는 평범한 표현 뒤에 숨겨진 부모들의 절박한 마음을 읽어내야 합니다.
성경 원어인 헬라어로 '만지다'라는 단어는 '하프토마이'(haptomai)입니다. 마가복음에서 이 단어는 주로 문둥병자를 고치실 때, 혈루증 여인이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댈 때, 맹인을 고치실 때 사용되었습니다. 즉, 이 단어는 단순한 신체적 접촉이 아니라 '치유와 회복'을 갈망하는 절박한 손길을 의미합니다.
당시 어린아이들은 오늘날처럼 귀하게 대접받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사회적, 경제적 권리가 전혀 없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는 무가치한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 아이들을 데리고 주님께 나아온 부모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혹시 아이가 아팠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이 험한 세상에서 이 가녀린 생명이 어떻게 살아남을지 두려웠을지도 모릅니다. 부모는 자신의 힘으로는 이 아이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주님의 '만져 주심', 그 거룩한 손길이 내 자녀의 삶에 닿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소망입니다. 내가 겪은 절망을 내 자녀는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그 간절함이 그들을 예수님 앞으로 이끌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신 우리 성도님들의 마음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거친 세상 풍파 속에서 내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삶의 문제들을 안고, 그저 주님이 내 삶을, 내 가정을, 내 자녀들을 한 번만 만져 주시기를 바라는 그 절박함이 우리를 이 은혜의 보좌 앞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아직 옛사람의 옷을 벗지 못한 제자들 (본론 1)

그런데 이 아름답고 간절한 장면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반응이 나타납니다. 바로 주님의 곁을 지키던 제자들입니다. 13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꾸짖거늘."
지금 주님의 곁에 있는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던 사람들입니다. 배와 그물을 버렸고, 가족을 뒤로하고 주님과 함께 길을 걸었습니다. 헌신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을 꾸짖었을까요?
사실 제자들은 조금 전까지 길 위에서 "누가 더 큰 자인가"를 두고 다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세상의 질서가 가득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시면 나는 어느 자리에 앉을까?'를 고민하던 그들에게, 아무런 사회적 지위도 없고 도움이 되지 않을 어린아이들은 그저 주님의 귀한 시간을 뺏는 '방해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외형적 헌신'은 있었지만, 내면의 '삶의 태도'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제자의 옷을 입었지만, 속에는 여전히 세상의 욕심과 서열의 논리가 가득한 ‘옛사람’의 옷을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만날 자격을 심사하는 문지기라도 된 듯 행동했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올 곳이 아니야, 주님은 바쁘신 분이야."라고 말하며 하나님 나라의 문턱을 자신들의 기준으로 높여버렸습니다.

상처받지 않으려 기득권을 쥐고 살아가는 우리의 연약함 (본론 2)

이런 제자들의 모습은 사실 부끄럽지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는 가끔 "너 내가 누군 줄 알아?"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들을 봅니다. 왜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의 지위와 이름을 내세우려 할까요?
곰곰이 묵상해 보면, 그 외침은 사실 '두려움'의 표현입니다. 내가 누군지 증명하지 않으면 무시당할 것 같은 두려움, 내가 가진 직함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될 것 같은 불안함 때문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네가 얼마나 가진 게 많은지, 네 직분이 무엇인지, 네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있는지"로 너의 가치를 증명하라고 압박합니다.
문제는 이 세상의 논리가 교회 안으로까지 스며든다는 점입니다. 신앙생활이 오래될수록, 우리는 나도 모르게 '영적 기득권'이라는 품삯을 챙기려 합니다. "내가 이 교회에서 얼마나 오래 헌신했는데", "내가 얼마나 많은 사역을 감당했는데"라는 마음이 들기 시작하면, 어느새 우리는 마태복음 20장의 먼저 온 포도원 품꾼과 같은 불평을 내뱉게 됩니다. 나보다 늦게 온 사람, 나보다 연약한 사람을 향해 보이지 않는 문턱을 세우고, 내가 누려야 할 대우가 당연한 것인양 요구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렇게 내 이름 석 자를 지키려 애쓰는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삶이 고달프고 치열하다 보니, 어디서든 내 자리를 확인받고 싶어 하는 이런 우리의 지친 마음을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오늘 그 제자들을 향해, 그리고 우리를 향해 "노하셨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14절의 '노하시다'(aganakteō)는 표현은 마가복음 전체에서 오직 이곳에서만 사용된 매우 이례적이고 강렬한 분노의 표현입니다. 특히 주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 이 단어를 사용하셨다는 점은 더욱 놀라운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의 갑옷을 입고 다른 이들을 밀어내는 것을 아파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빈손을 안아주시는 주님의 은혜 (본론 3)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 '옛사람'의 갑옷을 벗을 수 있을까요? 내 결심과 의지로 "이제부터 겸손해지자"라고 다짐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사람은 정죄와 책망으로는 결코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변하는 유일한 길은 '더 큰 사랑에 압도될 때'뿐입니다.
16절을 보십시오. "그 어린아이들을 안고 그들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제자들은 내쫓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안아주셨습니다. 여기서 '안다'라는 단어는, 아이를 가슴 깊숙이 끌어안는 절대적인 포용을 뜻합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네가 누군지 증명해 봐, 그래야 안아줄게"라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네가 아무것도 아니어도 괜찮다. 빈손이어도 괜찮다"라고 말씀하시며 우리를 먼저 끌어안으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상처받지 않으려 가시를 돋우고 살아온 세월을 다 아십니다. "너 왜 그렇게 교만하니?"라고 따지시는 것이 아니라, 그 가시 뒤에 숨겨진 우리의 불안과 고독을 먼저 안아주십니다.
압도적인 긍휼의 품에 안길 때, 우리는 비로소 무장해제할 수 있습니다. "아, 내가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나는 주님의 품 안에서 이미 충분히 존귀한 자구나." 이 깨달음이 올 때, 우리는 비로소 내 이름표를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을 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어린아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드는 태도'입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저 부모의 품이 전부인 줄 알고 전적으로 의지합니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이 나의 유일한 자랑임을 고백하며, 그 은혜 앞에 어린아이처럼 빈손으로 엎드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성도의 태도이자 참된 회개입니다.

이름 없이 섬기는 새 사람의 삶 (결론)

이제 우리는 주님의 품에서 새 사람의 옷을 입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참된 회개는 눈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삶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달라고 소리치던 삶에서, "내가 누군지 몰라도 괜찮습니다. 주님이 나를 아시니까요"라고 고백하는 삶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교회사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가 하나 전해져 내려옵니다. 전북 김제의 금산교회 이야기입니다. 그 교회에는 당시 큰 지주였던 조덕삼이라는 분과, 그의 집에서 마부로 일하던 이자익이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신분제가 엄격하던 그 시절, 두 사람이 함께 신앙생활을 했는데, 놀랍게도 교인들이 장로 선출을 위한 투표를 했는데 주인인 조덕삼은 떨어지고 머슴인 이자익이 먼저 장로가 되었습니다.
세상 논리라면 조덕삼 지주가 노발대발하며 교회를 떠나거나 이자익을 내쫓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조덕삼 영수는 그 자리에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금산교회 교인들은 참으로 훌륭한 일을 해냈습니다. 저희 집에서 일하는 이자익 영수는 저보다 신앙의 열정이 대단합니다. 저는 그를 장로로 잘 받들어 교회를 섬기겠습니다."
조덕삼은 자신의 '기득권'과 '이름표'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훗날 머슴이었던 이자익이 목사가 될 수 있도록 학비를 대주며 후원했고, 그가 목사가 되자 자신이 섬기던 김제금산교회 담임목사로 모셔와 정성껏 섬겼습니다. 조덕삼 장로님은 "너 내가 누군 줄 알아?"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대신 "나는 주님의 은혜를 입은 어린아이입니다"라는 태도로 평생을 살았습니다. 그 결과 한국 교회 역사에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하나님 나라의 모델을 남겨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린이주일을 보내며 우리 자신을 돌아봅시다. 우리는 과연 주님의 품에 안긴 어린아이입니까, 아니면 문턱을 높이고 서 있는 제자입니까?
세상은 여전히 우리에게 "너의 존재를 증명하라"고 다그칠 것입니다. 그때마다 오늘 우리를 안아주신 주님의 따뜻한 체온을 기억하십시오. "괜찮다, 내가 너를 안다." 그 위로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이번 5월 한 달, 여러분의 가정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우리 교회 안에서 "내가 누군지 몰라도 됩니다"라는 겸손한 고백이 넘쳐나기를 소망합니다. 내 이름 뒤에 숨은 기득권을 내려놓고, 내 곁에 있는 작은 자, 약한 자를 주님이 나를 안아주셨듯 따뜻하게 환대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환대의 자리에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주님의 손길이 여러분의 삶에 가득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거둠의 기도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마가복음의 말씀을 통해 우리의 모난 마음과 연약한 자아를 비추어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세상 풍파에 상처받지 않으려 스스로를 높이고, "내가 누군데"라며 기득권을 쥐려 했던 우리의 옛사람을 주님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습니다.
우리의 지치고 불안한 마음을 아시는 주님, 오늘 이 시간 우리를 주님의 거룩한 팔로 안아 주시옵소서. 그 따뜻한 사랑 안에서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다시 깨닫게 하시고, 이제는 내 이름표를 증명하려 애쓰는 삶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성도의 태도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 중앙교회가 조덕삼 장로님과 이자익 목사님처럼 서로를 귀히 여기고 환대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가정과 일터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섬기는 우리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를 안고 축복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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