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따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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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하는 것
비교하는 것
제가 미국에서 유학을 할 때, 힘들어서 도망친 적이 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요, 그 때 저를 많이 힘들게 했던 것 중에 하나가 “다른 유학생들은 그래도 자신의 길을 잘 개척해나가는 것 같은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든 것 같지?”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예를 들어서 보통 제가 있었던 뉴저지에서 유학을 하게 되면 거기가 뉴욕이랑 워낙 가까운 탓에 집 값이 어마무시하게 비쌌습니다. 학교 기숙사에서 지내는게 거의 한달에 2-300만원 정도 들어가는 수준이었어요. 그래서 보통 많은 학생들이 쉐어하우스를 해서 싸게 지내는 방법을 찾는데 저는 거기에 아는 사람이 없다보니까 그렇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또 다른 학생들은 나름 UMC, 그러니까 미국 감리교회에서 과정을 잘 밟아나가고 있었는데, 저도 그 과정을 밟으려다가 시작부터 뭔가 꼬여서 꼬꾸라진 것을 경험했습니다. 저도 나름 미국에서 목회하는 것을 꿈꾸고 유학 생활을 시작했는데, 계획이 처음부터 어그러지니까 “다른 사람들은 다 하는데 왜 나만 안되는 걸까?”하면서 자책을 많이 했던게 기억이 납니다. 내 삶과 내 주변 사람의 삶을 비교해보니까, “다 똑같이 하나님 믿고, 예수 믿는 사람들이고 나도 그런데,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저를 지배했던 거에요.
그럼에도 한국으로 도망쳐왔을 때, 도망친 곳에서 결혼도 하고 이제 아이도 갖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요. 남들과 비교하며 자책했을 때는 몰랐지만, 도망쳐 온 그 곳에서 다시 하나님께서 저의 삶을 인도해주시는 것을 느끼면서, “아! 하나님께서 저 사람들은 저 사람들만을 위한 길을 예비해주신 것이고, 나는 나를 위한 길을 예비해주신 것이구나”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저희가 살아가다보면 같은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삶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느끼다보니까 “나랑 쟤는 왜 이렇게 다른거야?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 거야?”라고 생각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차이가 난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저희를 사랑하시지 않는게 아니라, 그 사랑의 표현 방식이 다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든지 간에, 나는 나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덕목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함께 예배드리는 이 시간에 저희의 삶을 각자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사랑과 양(15-17)
사랑과 양(15-17)
오늘 본문말씀인 요한복음 21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대화를 나누시는 장면이 등장하는데요, 하필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만을 콕 집어서 말씀을 나누시는데, 다른 사람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먼저 15절 말씀을 보시면요,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렇게 물으시니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예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보통 이렇게 이야기하면 예수님께서 “그래 잘했다”라던가 “그렇구나, 나를 사랑하는 구나”라고 하실 법도 한데, 완전히 뜬구름 잡는 말씀을 하시죠. “그래? 그럼 내 어린 양을 먹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서는 또 똑같이 물어보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래서 베드로도 똑같이 “예 주님. 그렇습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번에는 예수님께서 “그래? 그럼 내 양을 치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서는 예수님께서 또또 똑같이 베드로에게 물어보십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세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시니까, 조금 찔린 것 같아요. 아마도 속으로 생각하기를 “혹시 내가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것 때문에 이러시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답변이 조금 달라지죠, “아이고 주님. 주님께서 모르시는게 어딨습니까. 제가 주님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또 답변하시기를 “내 양을 먹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베드로에게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한번만 해도 될 질문을 세번이나 똑같이 질문하시는 걸까요? 사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나누신 대화에 가장 중요한 것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하신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베드로가 예수님께 “예 주님, 제가 사랑하는 줄 아십니다”라고 대답한 이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치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만 바라보고, 예수님하고만 붙어있으려고 하고, 예수님만 예배드리고 해야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양을 먹이고 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는 양들을 보아야 한다는 것을 베드로에게 말씀해주시고 계십니다.
제가 결혼하기 전에 이주혜 전도사님과 연애할 때는요, 이주혜 전도사님 밖에 안보였어요. 제가 워낙 내성적이고 또 집밖에 잘 안나가는 사람이어서 코로나 때 격리하느라고 일주일 동안 방에 틀어박혔을 때도 너무 행복해했던 사람입니다. 근데 연애를 시작하고 나니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데이트하러 나갔던게 기억이납니다. 딴 사람은 눈에 밟히지도 않아요. 그냥 내가 사랑하는 사람만 눈에 들어오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 결혼하고 아이가 생기니까요, 이주혜 전도사님만 바라봐서는 안되더라구요. 서로 눈 마주치고 있을게 아니라 나아갈 곳을 함께 바라봐야하더라구요. 그리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사랑하지 않는게 아닙니다. 오히려 서로 같은 곳에 시선을 두고 나아갈 때에, 그것이 저희 가정 안에 사랑을 더욱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저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교회에 콕 박혀서 예배만드리고, 기도만하고, 찬양만 하고, 정작 예수님께서 바라보고 계시는 양들을 바라보지 않으면, 예수님꼐서 사랑하시는 우리 주변의 이웃을 바라보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하는 건 맞지만, 성숙한 사랑은 아닙니다.” 진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바라보는 곳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 혹시 시간이 남으면 마태복음 25장의 비유를 쓸것.
본문말씀 1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할렐루야! 예수님을 사랑하는 여러분과 제가, 예수님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꼐서 바라보시는 양들을 향해서 나아갈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띠 띠우다(18-19a)
띠 띠우다(18-19a)
본문말씀으로 돌아와서요 18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을 다녔을 지라도, 나이 들어서는 네 팔을 벌리고 남이 네게 띠띠우고 원하지 않는 곳을 데려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띠를 띤다는 것은 벨트를 차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는 옷을 스스로 입는 것을 뜻합니다. 같은 21장 7절 말씀을 보시면요,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님이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님이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베드로가 예수님이 나타나신 것을 보고 겉옷을 두른 뒤에 바다로 뛰어내리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겉옷을 두르는 것이 띠 띠우는 것이고, 바다로 뛰어 내려서 예수님을 향해서 달려가는 것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시점은 아직 베드로가 젊었을 때, 스스로 옷을 입고, 스스로 나아갈 곳을 향해 나아가는 상태임을 알 수가 있죠.
그런데 팔을 벌리고, 남이 띠 띠워주는 것은 어떤 삶입니까? 옷 조차도 스스로 입지 못하는 상황을 의미합니다. 또한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간다는 것은 남들이 내 삶을 좌지우지하는 상황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본문말씀 19절 상반절에는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신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순교하게될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베드로가 거꾸로 매달린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라고는 하지만, 정확한 정보는 아닙니다. 다만 저희가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베드로는 고난을 받고 순교했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클레멘스의 편지나 아니면 본문말씀 19절이나 이 순교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어떻게 보면 순교라고 하는 것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개죽음”입니다. 그냥 무력하게 처형당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교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는 걸까요?
순교에서 중요한 것은 순교 자체가 아니라 무슨 목적으로 순교를 당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베드로전서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 말씀은요, 나쁜 짓 하다가 고난을 받는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살다가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사실 고난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나쁜 짓 하다가 걸려서 잡히면 당시에는 오늘날보다도 더 큰 처벌을 받던 시기였습니다. 만약에 누군가를 때려서 잡히면 채찍질을 당했을 거예요. 근데 그게 좋은 일이 아니잖아요. 그냥 잘못한 것에 대해서 처벌을 받은 것일 뿐이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을 믿기만 해도 잡혀서 처벌받던 시기에, 잘못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오히려 선한 행동을 위해서 살았는데 고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악한 세상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신 행동을 따라서 살았기 때문에, 그 선한 행동 때문에 고난을 받은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겁니다.
독일의 유명한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디트리히 본회퍼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시에 히틀러를 중심으로 퍼지던 나치당이 정치적으로 아주 독일을 장악해나가니까 그 나치에 굴복해서 히틀러가 구세주라느니 나치가 정당하다느니 하면서 양심을 내려놓고 나치를 지지하던 교회들이 늘어나던 때였습니다.
이 본회퍼 목사님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 나치와 히틀러에게 전적으로 반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실 교회들도 다 알고 있었을 겁니다.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다른 나라를 전쟁으로 침략하는 나치가 얼마나 악한지 다 알고 있었을 겁니다. 무서워서 침묵하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개중에는 정말로 양심을 저버리고 나치에 가담한 사람들도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이 본회퍼 목사님은 어떻습니까? 선하신 하나님을 믿는데,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믿는데, 도저히 거기에 반대하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미친 운전자가 행인들을 치고 질주할 때, 목사는 죽은 사람의 장례를 치를 것이 아니라 그 바퀴에 쐐기를 박아야 합니다.” 그렇게 나치와 히틀러에 반대하던 본회퍼 목사님은 결국 체포를 당하고 순교를 당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순교입니다. 그저 죽음 자체가 영광인 것이 아니라 죽음을 무릅쓰고서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을 지키는 것.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살기위해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본문말씀 18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할렐루야!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간에,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려운 상황이라고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가 들어오기 때문에, 악한 세상이기 때문에 선하신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를 따르라(19b-22)
나를 따르라(19b-22)
본문말씀으로 돌아와서요 19절 하반절 말씀을 보시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하실 때 베드로가 보니까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더라는 겁니다. 요한복음에는 이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는 사람이 여러번 등장하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을 “요한”이다라고 생각해서 이 복음서가 요한복음이라고 이름 붙여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누구냐 라고 하는 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요한복음은 굳이 이 사람이 누군지 말을 안합니다.
아무튼 베드로가 그를 보고서 예수님께 묻는데요 “주님, 이 사람은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베드로에게는 예수님께서 그가 순교를 당할 것임을 예언했잖아요? 그래서 베드로의 질문은 “이 사람도 나중에 순교를 당합니까?”라고 묻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시죠? 22절 말씀에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이 자가 살아있든지 아닌지 간에 네가 대체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이 제자가 어떻게 될 것이라고 명확하게 말슴하신 것은 아니지만, 베드로와 달리 순교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네가 순교를 당한다고 해서, 이 사람이 순교하든지 안하든지 신경쓰지 마라.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설교 초반에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비교하는 일”에 대해서 말씀 드린바 있습니다. 정말로 누구는 큰 어려움을 겪고서 순교하는 이도 있을 것이고, 어떤 이들은 큰 어려움은 없지만 자기가 가진 재능이나 능력을 가지고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베드로와 이 사랑하시는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순교를 당하지만, 이 제자는 당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겁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삶의 모양이 어떻든지 간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너는 나를 따르라”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순교든지, 아니면 음악으로 예수님을 알리든지, 의사가 되어서 사람을 살리는 것으로 예수님을 알리든지 그 모양이 어떻든지 간에,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겁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제 누나를 참 부러워했습니다. 공부를 무지막지하게 잘 했거든요. 그래서 결국 한의사가 되어서 돈도 잘 버는 모습을 보면, “아 나도 공부 열심히해서 의사가 될 걸”이라는 생각이 한 두번 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누나와 매형이 한의원을 차리고 나서, 방문진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산골짜기에 계신 노인분들이나, 정말 몸을 못움직이시는 분들을 위해서 차타고 나가서 진료를 해주는 일을, 남들은 다 힘들다고 안하는 일을 굳이굳이 시작해서 하더라구요. 의사가 되었지만 돈을 잘 버는게 목적이 아닌겁니다. 물론 의사니까 돈을 잘 버긴 벌어요. 그런데, 남들은 다 안하지만, 굳이 치료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나가서 치료하는 것, 예수님께서 아픈 이들을 치료해주신 것과 같이 예수님을 따라서, 자기가 가진 달란트로 섬기는 모습을 저희 누나 가정의 모습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본문말씀 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할렐루야!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면서, 내 옆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지 않고, 나에게 주신 사명으로, 나에게 열어주시는 길을 따라서 예수님을 따라 살아갈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결론
결론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저희가 기억해야할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곳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만 드리고, 기도만 하고, 찬양만 하고 정작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어린 양을 돌보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비로소, 교회를 떠나서도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을 위해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삶을 사는 것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냥 고난을 받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어떠한 상황이든지 간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사는것, 예수님을 따라서 사는 것,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고난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승승장구하고 누구는 고난을 받는다고 해서 남들과 비교할 필요가 없습니다. 베드로가 순교하고 예수님의 사랑하시는 제자가 순교를 당하지 않아도, 각자가 예수님을 따라서 살았던 바와 같이 저희 또한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든지 간에,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따라서,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어야합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바라보시는 곳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삶을 살기 위해서 고난을 감수하며, 또한 비교하지 않고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예수님을 따라서 살아갈 수 있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