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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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함께 있자

마가복음 10:13–16 NKSV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16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
사무엘상 3:1–10 NKSV
1 어린 사무엘이 엘리 곁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이다. 그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는 일이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2 어느 날 밤, 엘리가 잠자리에 누워 있을 때였다. 그는 이미 눈이 어두워져서 잘 볼 수가 없었다. 3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가 있는 주님의 성전에서 잠자리에 누워 있었다. 이른 새벽, 하나님의 등불이 아직 환하게 밝혀져 있을 때에, 4 주님께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그는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고서, 5 곧 엘리에게 달려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도로 가서 누워라” 하고 말하였다. 사무엘이 다시 가서 누웠다. 6 주님께서 다시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엘리는 “얘야, 나는 너를 부르지 않았다. 도로 가서 누워라” 하고 말하였다. 7 이 때까지 사무엘은 주님을 알지 못하였고,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나타난 적도 없었다. 8 주님께서 사무엘을 세 번째 부르셨다. 사무엘이 일어나 엘리에게 가서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제야 엘리는, 주님께서 그 소년을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9 사무엘에게 일러주었다. “가서 누워 있거라. 누가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이 자리로 돌아가서 누웠다. 10 그런 뒤에 주님께서 다시 찾아와 곁에 서서, 조금 전처럼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셨다. 사무엘은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에베소서 6:4 NKSV
4 또 아버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서론 — 우리가 함께 앉아 있다는 것

오늘 이 자리를 한번 둘러보십시오.
어른들이 있습니다. 아이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어떤 아이는 가만히 앉아 이 말씀을 듣고 있을 것이고, 어떤 아이는 부모 옆에서 조금씩 몸을 움직이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른들은 그 아이들 옆에서, 함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아이들을 별도의 공간으로 분리하지 않는 이유는 단순히 실용적인 선택이 아닙니다. 그것은 신학적 고백입니다. 아이와 어른은 하나님 나라 안에서 동일한 존재이며, 아이들은 오히려 더 존중받고 환대받아야 한다는 믿음 — 그 믿음이 우리의 예배 형식을 결정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는 마가복음 10장 본문은, 우리가 왜 그 선택을 했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복음서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예수가 아이들 앞에서 분개하신 그 이유가 — 2천 년이 지난 오늘 우리 예배의 의미와 정확히 연결됩니다.

1세기의 아이들: 세상 속에서 가장 작은 존재들

이 본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먼저 2천 년 전 세계에서 아이들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로마 제국 시대, 아버지에게는 '파트리아 포테스타스(Patria Potestas)'라는 제도가 있었습니다. 곧 절대적인 가부장 권력이 있었습니다. 갓 태어난 아이는 즉시 아버지의 발 앞에 놓였습니다. 아버지가 아이를 들어 올리면 살고, 돌아서면 — 유기되어 죽었습니다. 이것은 법적으로 허용된 관행이었고, 특히 장애가 있거나 여자아이인 경우에 빈번했습니다. 세네카는 이렇게 썼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결함이 있는 아이들은 물에 빠뜨린다. 이것은 분노가 아니라 이성의 판단이다." 아이들은 법적으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가문의 소유물이었습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아이는 아직 이성(logos)을 완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노예에 준하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유대 사회는 로마보다 분명 인도적이었습니다. 토라는 고아를 보호하고, 쉐마(신 6:4-9)는 자녀 교육을 명령합니다. 그러나 공적 종교 생활에서 아이들의 위치는 달랐습니다. 회당 예배의 기도 정족수 '미냔'은 성인 남성 열 명이었고, 아이들은 그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랍비가 토라를 가르치는 자리는 성인의 공간이었고, 아이들은 그 지식의 수동적 수신자였습니다. 13세 바르 미츠바 이전의 소년은 종교적 의무의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아이들은 사랑받았지만, 주변부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예수가 갈릴리에서 사역하던 세계의 현실이었습니다. 아이들을 예수께 데려온 부모들은 사실 문화의 코드를 어기고 있었습니다. 위대한 선생님의 귀한 시간을 아이들을 위해 쓴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을 때, 그것은 단순한 무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당대의 상식에 따라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 세상의 논리로는.
그러나 예수는 분개하셨습니다.

예수의 분개: 하나님 나라의 충격

마가복음 10:14 “14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헬라어 원문에는 “노하셨다”를 '분개하셨다-에가낙테센(ἠγανάκτησεν)' 이라고 씁니다.— 이 단어는 마가복음 전체에서 오직 이 한 구절에만 나옵니다. 마가는 예수의 기쁨을, 탄식을, 눈물을 기록하지만, 이 세기의 분노는 오직 여기서만입니다. 예수의 심장이 가장 격렬하게 뛰었던 순간이 바로 이 장면이었습니다.
왜 분개하셨습니까? 단순히 아이들이 불쌍해서가 아닙니다. 신학자 N. T. 라이트는 이 본문에서 예수의 분노를 "하나님 나라의 성격 자체에 대한 수호"로 읽습니다. 예수께서 이 부분을 바로잡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오독할 수 있기 때문에 바로잡기 위해서 분개하신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 앞에서 작은 자들이 쫓겨날 때, 그것은 단순한 무례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3절에 꾸짖었다(ἐπετίμων)" — 기억하십시오. 이 동사는 마가가 예수께서 귀신을 내쫓을 때 쓰는 단어입니다. 제자들이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이, 쫓아내야 할 불필요한 존재를 대하듯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를 분개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는 선언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당대의 기준으로 가장 작은 자들, 지위도 없고, 공로도 없고, 사회적 권리도 없는 자들입니다. 예수는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예외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기준으로 세우셨습니다. C. 케빈 로우(이 놀랍고도 새로운)가 말하듯, 이것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세계에 던진 가장 충격적인 선언 중 하나였습니다. 지위가 하나님 나라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 오히려 작은 자가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가 된다는 것.

어린아이처럼: 수용의 신학

마가복음 10:15 “1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받아들이다(δέξηται)" — 두 팔을 벌려 기꺼이 맞아들이는 환영의 행위입니다.
그렇다면 '어린아이처럼'이 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흔히 우리는 아이의 순수함이나 천진함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1세기 문화에서, 아이들이 상징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가져올 것이 없는 존재였습니다. 사회적 지위도 없고, 공로도 없고, 하나님 앞에 내세울 자격도 없었습니다. 오병이어가 왜 하나님 나라가 펼쳐지는 최고의 장면입니까 바로 어린아이의 도시락이어서 그래요.
예수가 말씀하시는 '어린아이처럼'이란, 바로 이 철저한 수용의 자세입니다. 내가 가진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얻으려 하지 않는 것. 내 헌신의 기록, 내 신앙의 연수, 내 도덕적 성취를 앞에 내세우지 않는 것. 더글라스 하링크(칭의 대신 정의의 시선으로 로마서 읽기)가 말하듯, 하나님의 의(義)는 우리가 자격을 갖출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향해 움직이시는 선제적 사랑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자세는, 어린아이처럼 두 팔 벌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역설이 있습니다. 예수는 어른들에게 "어린아이처럼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배움의 방향을 역전시키는 선언입니다. 아이가 어른에게 배우는 것이 세상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하십니다 —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어른들에게 익숙한 공로와 자격의 논리를, 아이들이 해체합니다. 아이들이 예배 자리에 함께 앉아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들을 배려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어른들이 신앙을 다시 배우게 되는 기회입니다.

사무엘: 아이의 귀에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

사무엘상 3:1 “1 어린 사무엘이 엘리 곁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을 때이다. 그 때에는 주님께서 말씀을 해주시는 일이 드물었고, 환상도 자주 나타나지 않았다.”
이스라엘 역사의 영적 암흑기였습니다. 제사장 엘리는 눈이 어두워져 이미 잘 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2절). 그것은 육체적 시력의 쇠퇴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들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성전을 더럽히고 있었고, 엘리는 그들을 제대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종교적 권위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영적 감수성은 무뎌졌습니다.
그 어둠 속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입니까? 어린 사무엘에게였습니다.
사무엘상 3:7 “7 이 때까지 사무엘은 주님을 알지 못하였고,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 나타난 적도 없었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도전적인 진술입니다. 사무엘은 신앙의 경력자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배운 자가 아니었습니다. 아직 '잘 알지 못하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를 부르셨습니다. 경험 많은 제사장이 아니라, 아직 형성 중인 어린 존재를 통해 새 역사를 여셨습니다.
그리고 이 장면에서 엘리의 역할이 빛납니다.
사무엘상 3:9 “9 사무엘에게 일러주었다. “가서 누워 있거라. 누가 너를 부르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님의 종이 듣고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여라.” 사무엘이 자리로 돌아가서 누웠다.”
엘리는 자신이 하나님을 대신 만나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이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그 자리를 열어주었습니다. 어른이 아이의 신앙 여정을 대신 살아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안내하는 것.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세대 간 신앙 전달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반대 방향의 흐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막혀 있던 시대에, 하나님은 아이를 통해 어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이 받은 말씀은 결국 엘리에게 전달되었고
사무엘상 3:11–18 “11 주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제 이스라엘에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한다. 그것을 듣는 사람마다 무서워서 귀까지 멍멍해질 것이다. 12 때가 오면, 내가 엘리의 집을 두고 말한 모든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이루겠다. 13 엘리는, 자기의 아들들이 스스로 저주받을 일을 하는 줄 알면서도, 자식들을 책망하지 않았다. 그 죄를 그는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집을 심판하여 영영 없애 버리겠다고, 그에게 알려 주었다. 14 그러므로 나는 엘리의 집을 두고 맹세한다. 엘리의 집 죄악은, 제물이나 예물로도 영영 씻지 못할 것이다.” 15 사무엘은 아침이 밝을 때까지 누워 있다가, 주님의 집 문들을 열었다. 그러나 사무엘은 자기가 환상으로 보고 들은 것을 엘리에게 알리기를 두려워하였다. 16 엘리가 사무엘을 불렀다. 그는 “내 아들 사무엘아!” 하고 불렀다. “예,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사무엘이 대답하였다. 17 엘리가 물었다. “주님께서 너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더냐? 나에게 아무것도 숨기지 말아라. 주님께서 너에게 하신 말씀 가운데서 한 마디라도 나에게 숨기면, 하나님이 너에게 심한 벌을 내리고 또 내리실 것이다.” 18 사무엘은 그에게 하나도 숨기지 않고 모든 것을 말하였다. 엘리가 말하였다. “그분은 주님이시다! 그분께서는 뜻하신 대로 하실 것이다.””
엘리는 그것을 들어야 했습니다. 어른이 아이에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대가 함께 하는 예배가 가진 신비입니다.

초기 교회의 온가족 예배와 에베소서 6:4

우리가 이렇게 함께 예배하는 것 — 이것은 사실 초기 교회의 원형입니다.
마이클 버드와 N. T. 라이트(신약성경과 그 세계)가 강조하듯,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예배 공간은 오이코스(οἶκος), 곧 집이었습니다. 집은 본질적으로 세대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아이들, 부모, 조부모, 노예들까지 — 모두 같은 공간에서 말씀을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초기에 기독교가 들어올때도 그랬습니다. 양반집의 사랑방안에 아이들, 부모, 조부모, 하인, 이웃의 천민까지 한 방에서 예배드렸습니다.
결정적 증거가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낼 때, 그 편지가 교회에서 낭독되는 자리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에베소서 6:1 “1 자녀 된 이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바울이 자녀들에게 직접 말을 걸었다는 것, 이것은 아이들이 그 예배 자리에 앉아 그 편지를 듣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이들은 예배의 방청객이 아니라, 말씀의 수신자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부모에게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6:4 “4 또 아버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노엽게 하지 말고" — 지속적으로 분노를 유발하고 낙담시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영혼을 낙담시키는 방식은 무엇입니까? 꾸짖고 쫓아내는 것만이 아닙니다. 비교하고, 성취로만 평가하고, 존재가 아닌 성과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신앙의 공간에서도 "아직 어려서", "방해가 되니까"라는 이유로 밀어내는 것.
반면 기르십시오를 뜻하는 "양육하십시오" — 영양을 공급하며 길러낸다는 의미입니다. 마치 좋은 흙이 씨앗을 키우듯, 아이의 존재 전체를 풍요롭게 하는 돌봄입니다. 이 돌봄은 주님이 중심에 있는 형성입니다. 한집사님의 집 옥상에 화단이 있습니다. 건너 보이는 집도 화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 달라요. 주인의 돌봄을 중심에 두고 자라는 화분의 차이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정 규범에서 가부장은 아내, 자녀, 노예를 일방적으로 통제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가정 규범은 다릅니다. 아이들을 직접 호명하고, 부모에게는 그 아이들을 낙담시키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아이들에게 하나님 앞에서의 존엄과 주체성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초기 교회가 로마 세계에 던진 충격의 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안아 주시는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 예배

이제 본문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마가복음 10:16 “16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
껴 안으시고- 두 팔로 완전히 감싸 안는 동작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 전체에서 마가복음 두 곳에만 나옵니다. 마가는 이 장면을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기록했습니다.
축복하셨다 — 원어에는 거듭거듭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충만하게 축복하셨습니다.
예수의 복음은 추상 명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몸이 몸에 닿는 사건입니다. 마이클 버드가 강조하듯, 예수의 몸의 접촉은 복음서 전체에서 일관된 패턴을 보입니다 — 나병환자를 만지시고(막 1:41), 죽은 자의 관에 손을 대시며(눅 7:14), 이제 아이들을 안아 주십니다. 예수가 안아 주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이 아이들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셨다는 선언입니다. 쓸모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존재하기 때문에.
김기석 목사(고백의 언어들)는 이렇게 씁니다. "사랑은 대상이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음으로 아름다워진다." 예수의 안아 주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아이들은 무언가를 증명해서 안긴 것이 아닙니다. 안겨서 비로소 그 존재의 의미가 완성되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아이들을 분리하지 않고 함께 예배드리는 것은, 바로 이 장면을 매 주일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 예배당이 예수의 팔이 됩니다. 이 공동체가 예수의 손길이 됩니다. 우리가 함께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미리 살아내는 것입니다.
첫째, 아이들에게 — 여러분은 여기 있어도 됩니다.
아이들에게 우리 큰 소리로 함께 말해 줍시다. 얘들아, 너희들과 함께 예배드려서 너무 좋아. 너무 감사해.
둘째, 부모와 어른들에게 — 막지 말고 열어 주십시오.
우리는 아이들의 예배 경험에 대해 생각할 때, 종종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칠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아이들이 예수께 나아오는 길을 열고 있는가, 아니면 막고 있는가? 엘리처럼, 우리의 역할은 아이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을 만나주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가 스스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그 자리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또한, 아이들의 신앙 질문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성적보다 더 자주,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십시오. 어쩌면, 아이들의 단순하고 직접적인 믿음이 우리 어른들의 신앙을 다시 깨울지도 모릅니다.
셋째, 공동체 전체에게 — 이 예배는 증언입니다.
우리가 함께 예배드리는 이 모습은, 세상을 향한 복음의 증언입니다. 우리는 복음때문에 지금 다른 방식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른과 아이가, 강한 자와 약한 자가, 함께 하나님 앞에 서는 것 — 이것이 C. 케빈 로우가 말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여전히 충격이어야 합니다.

결론 — 예수의 팔 안에서

오늘 본문의 마지막 그림을 눈에 그려보십시오.
제자들은 아이들을 쫓아냈습니다. 문화가 그렇게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논리가 그것을 정상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분개하셨고, 아이들을 불러 모으셨고, 두 팔로 안아 주셨고, 충만하게 축복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아이와 어른이 함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 그 예수의 팔 안에 함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어릴때부터 예수를 믿었고 누군가는 늦게 하나님을 알기 시작했고 누군가는성경을 좀 많이 알고 누군가는 여전히 이해가 안되채로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앞에서 우리는 모두 어린아이입니다. 아무것도 가져올 것 없이, 두 손 놓고, 다만 안아 주시기를 바라며 온 사람들.
예수는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그리고 오늘도, 예수는 안아 주십니다.
마가복음 10:16 “16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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