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을 따라 떠나는 삶, 언약안에 세워지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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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우리 하나님의 성, 거룩한 산에서 극진히 찬양 받으시리로다
2 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 산이 그러하도다
14 이 하나님은 영원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그가 우리를 죽을 때까지 인도하시리로다
찬송가: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23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
24 라헬의 아들들은 요셉과 베냐민이며
25 라헬의 여종 빌하의 아들들은 단과 납달리요
26 레아의 여종 실바의 아들들은 갓과 아셀이니 이들은 야곱의 아들들이요 밧단아람에서 그에게 낳은 자더라
27 야곱이 기럇아르바의 마므레로 가서 그의 아버지 이삭에게 이르렀으니 기럇아르바는 곧 아브라함과 이삭이 거류하던 헤브론이더라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
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1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2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3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
4 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5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이더라
6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7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8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조건을 따라 떠나는 삶, 언약 안에 세워지는 삶
오늘 본문은 얼핏 보면 단순한 족보와 이동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름이 기록되고, 이삭이 죽어 장사되며, 이어서 에서의 족보와 에서가 세일 산으로 이주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단순한 가족 기록이 아닙니다. 이 안에는 하나님의 언약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언약공동체로 세워 가시는지, 그리고 에서가 어떤 방향의 삶을 선택하는지가 드러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큰 죄를 범했고, 시므온과 레위는 세겜 사건에서 분노와 폭력으로 일을 그르쳤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야곱의 열두 아들을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기초로 세워 가십니다. 이것은 인간의 자격보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크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반면 에서는 야곱과 함께 이삭의 장례를 치릅니다. 형제 사이에 긴 세월의 갈등이 있었지만,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두 사람은 함께 섭니다. 그러나 이후 에서는 자기 소유와 현실적 조건을 따라 세일 산으로 떠납니다. 땅이 좁고 재산이 많아서 함께 거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한 이사가 아닙니다. 에서는 언약의 땅보다 자기에게 더 유리한 환경과 조건을 택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좋은 조건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언약을 붙들고 사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허물 때문에 절망하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허물 많은 우리를 언약 안에서 세워 가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신뢰하는 사람입니까?
1. 전형상화: 하나님은 허물 많은 야곱의 집을 언약 공동체로 세워 가신다
1. 전형상화: 하나님은 허물 많은 야곱의 집을 언약 공동체로 세워 가신다
창세기 35장 23절부터 26절까지는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레아의 아들들은 야곱의 장자 르우벤과 그 다음 시므온과 레위와 유다와 잇사갈과 스불론이요”라고 시작하여, 라헬의 아들 요셉과 베냐민, 빌하와 실바의 아들들까지 기록합니다. 이 명단은 단순한 가족 명단이 아닙니다. 이들은 장차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기초가 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명단을 읽을 때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들은 모두 흠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앞 35장 22절에서 르우벤은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도덕적 실수가 아니라 가정 질서와 언약 공동체의 거룩함을 무너뜨리는 심각한 죄였습니다. 후에 야곱은 르우벤을 향해 “물의 끓음 같았은즉 너는 탁월하지 못하리니”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그의 죄가 장자의 탁월함을 잃게 했음을 보여 줍니다(창 49:3–4).
시므온과 레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세겜 사건 이후 분노를 절제하지 못하고 속임수와 폭력으로 일을 해결했습니다. 야곱은 훗날 그들을 향해 “그들의 칼은 폭력의 도구로다”라고 말합니다(창 49:5). 그러므로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은 영광스러운 언약 공동체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깊은 허물과 상처를 가진 공동체의 기록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들을 모아 언약 공동체를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와 허물과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은혜로 다루시며,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빚어 가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절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강하고 완전한 자들만 사용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약하고 부족한 자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십니다.
또한 빌립보서 1장 6절은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 하노라”고 말씀합니다. 야곱의 집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언약의 일은 인간의 허물 때문에 중단 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죄가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로 만들지는 못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고 다루시지만, 끝내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어서 35장 27절부터 29절까지는 이삭의 죽음과 장례가 기록됩니다. 이삭은 백팔십 세에 죽고, 에서와 야곱이 함께 그를 장사합니다. 참 의미 있는 장면입니다. 한때 야곱은 에서를 속였고,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아버지 이삭의 죽음 앞에서 두 형제가 함께 서 있습니다. 완전한 회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긴 갈등의 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이 아버지의 장례를 함께 감당 합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섭리가 보입니다. 하나님은 갈등과 분열로 얼룩진 가정 안에서도 자기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로마서 12장 18절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말씀합니다. 이삭의 장례는 에서와 야곱이 완전히 같은 길을 걷는다는 뜻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오래된 갈등 가운데서도 최소한의 화해와 정리를 허락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러나 36장으로 넘어가면 두 사람의 길은 다시 분명히 갈라집니다. 에서는 자기 아내들과 자녀들과 재산과 가축을 이끌고 야곱을 떠나 세일 산으로 갑니다. 36장 7절은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고 말합니다. 겉으로 보면 현실적인 이유입니다. 재산이 많고 가축이 많아 같은 땅에서 함께 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세일로 떠납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경제적 이주만은 아닙니다. 창세기 전체 흐름에서 보면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언약의 땅 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그 땅에 머물지 않고 세일로 갑니다. 그는 더 넓고 유리한 환경, 자기에게 맞는 조건을 찾아 떠납니다. 이것은 에서의 삶이 언약보다는 현실적 실리와 자기 욕구를 따라 움직였음을 보여 줍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은 에서를 가리켜 “망령된 자”라고 말하며, 그가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고 말합니다. 에서의 문제는 단지 충동적인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보이지 않는 언약보다 눈에 보이는 유익을 선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는 언약의 땅보다 자신의 소유와 환경에 맞는 길을 택합니다.
2. 형상화: 오늘 우리는 조건을 따라 움직이는가, 언약을 따라 사는가
2. 형상화: 오늘 우리는 조건을 따라 움직이는가, 언약을 따라 사는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우리 현실을 깊이 비추어 줍니다. 우리는 야곱의 아들들처럼 허물이 많습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 들어와 있지만 여전히 연약함이 있고, 상처가 있고, 죄의 흔적이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도 그렇고, 교회 안에서도 그렇고, 우리 개인의 내면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이런 나를 정말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 가실까?”라고 생각합니다. 내 안의 반복되는 연약함을 보면 낙심합니다. 가족의 문제를 보면 절망 합니다. 교회의 부족함을 보면 실망 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서 완전한 사람들로만 언약공동체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르우벤 같은 허물, 시므온과 레위 같은 분노, 유다 같은 실패, 야곱 집안 전체의 상처 속에서도 언약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말은 죄를 가볍게 여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로마서 6장 1–2절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죄를 합리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를 직면하게 하고 회개하게 하며, 우리를 다시 언약의 백성답게 빚어 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물을 보며 절망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신실함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신 후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징계하시고, 훈련하시고, 말씀으로 깨우시고, 공동체 안에서 다듬으십니다. 히브리서 12장 6절은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징계는 버림의 표시가 아니라 사랑의 표시입니다.
또한 오늘 본문은 에서의 선택을 통해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는 무엇을 기준으로 인생의 방향을 정하느냐?” 에서는 더 좋은 조건을 찾아 세일로 갔습니다. 재산이 많아졌고, 가축이 많아졌고, 더 넓은 땅이 필요 했습니다. 현실적으로 보면 당연한 선택처럼 보입니다. 더 좋은 환경, 더 넓은 기회, 더 유리한 조건을 찾는 것은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비슷한 선택 앞에 섭니다. 더 좋은 직장, 더 높은 연봉, 더 편리한 도시, 더 좋은 교육환경, 더 넓은 집, 더 안정적인 노후, 더 인정받는 자리. 이런 것들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닙니다. 문제는 그것이 우리 삶의 최종 기준이 될 때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 예배의 자리, 언약의 자리, 가족과 교회를 향한 책임, 영혼의 방향보다 조건과 유익이 앞서면 우리는 에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신앙의 공동체와 예배의 리듬이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오직 연봉과 승진만 보고 결정을 내릴 수 있습니다. 어떤 가정은 자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예배와 신앙훈련을 뒤로 밀어낼 수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더 편한 관계, 더 유리한 인간관계, 더 손해 보지 않는 선택을 위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화해와 순종을 미룰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6장 33절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의 필요를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먼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의 삶은 조건을 무시하는 삶이 아니라, 조건보다 하나님 나라를 먼저 두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나는 나의 허물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고 있지는 않은가?
둘째, 나는 하나님의 언약보다 더 좋은 조건과 환경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지는 않은가? 시편 37편 5절은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는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께 길을 맡기는 사람입니다. 조건이 아니라 언약을 붙드는 사람입니다. 눈에 보이는 실리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약속을 더 실제로 믿는 사람입니다.
3. 재형상화: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 많은 백성은 새 공동체가 되고, 조건보다 언약을 붙드는 삶으로 부름받는다
3. 재형상화: 그리스도 안에서 허물 많은 백성은 새 공동체가 되고, 조건보다 언약을 붙드는 삶으로 부름받는다
그렇다면 오늘 말씀은 우리를 어디로 이끕니까?
첫째, 우리는 허물 많은 야곱의 집을 언약공동체로 세우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어야 합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은 모두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이스라엘의 기초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가 인간의 자격보다 크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에베소서 2장 8–9절은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과 부르심은 우리의 깨끗함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허물을 보며 절망하지 말고, 그 허물을 다루시고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언약공동체로 부름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이 옛 언약 백성의 기초가 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새 언약 백성을 세우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성도를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의 완전함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허물 많은 사람들을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했고, 도마는 의심했고,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흩어졌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예수님은 실패한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요 21:17). 이것이 복음입니다. 주님은 실패한 자를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사명의 자리로 세우십니다.
셋째, 우리는 에서의 길이 아니라 믿음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에서는 더 좋은 조건과 넓은 터전을 찾아 세일로 갔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허물 많고 불안정 했어도 언약의 흐름 안에 남았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실제적인 도전입니다. 성도는 무조건 불편한 길만 택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선택을 하든 먼저 물어야 합니다. “이 선택이 나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하는가? 이 선택이 예배와 말씀과 공동체를 더 깊이 붙들게 하는가? 이 선택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길인가?”
히브리서 11장 24–26절은 모세가 애굽의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말합니다. 모세는 조건만 보았다면 애굽에 남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더 실제로 보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눈앞의 유익보다 하나님의 약속을 더 크게 보는 눈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계속해서 세일을 제안받습니다. 더 넓고, 더 편하고, 더 유리하고, 더 실속 있어 보이는 길이 우리 앞에 열립니다. 그러나 그 길이 우리의 영혼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한다면, 그것은 복처럼 보이지만 복이 아닐 수 있습니다. 반대로 좁고 불편해 보여도 그 길이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고, 예배를 지키게 하고, 언약을 붙들게 한다면 그 길이 믿음의 길입니다.
넷째,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해야 합니다. 에서가 떠난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단순한 재산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는 야곱이 언약의 땅에 남고, 에서가 세일로 이동하는 흐름이 됩니다. 잠언 16장 9절은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은 자기 유익을 따라 선택하지만, 하나님은 그 선택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큰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두려움과 위로를 동시에 줍니다. 두려움은 우리의 선택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위로는 우리의 연약함과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 욕구와 조건만 따라가지 않게 하시고, 하나님의 언약과 뜻을 따라 걷게 하소서.”
마지막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언약공동체가 된 것은 그들의 의로움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도 우리의 의 때문이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8절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나의 완전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더 좋은 조건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준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우리의 길은 에서처럼 실리만 따라 떠나는 길이 아니라, 비록 연약해도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이 세우시는 공동체로 살아가는 길입니다.
“주님, 나는 조건을 따라 움직이는 사람입니까, 언약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까?”
“주님, 나는 내 허물만 보고 낙심합니까, 아니면 나를 끝까지 세우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습니까?”
“주님, 더 좋은 환경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더 귀하게 여기게 하옵소서.”
하나님은 허물 많은 우리를 언약공동체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그리스도 안에서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워 가십니다. 그러므로 조건을 따라 살지 말고, 언약을 붙들고 삽시다. 실리만 따라 움직이지 말고,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며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