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바뀌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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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 3:17-19
하박국 3:17-19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서론 — 우리 안의 오래된 질문
수요일 오전, 분주한 일주일의 한가운데에서도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이 자리에 나오신 동암의 영가족 여러분 한 분 한 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얼마 전, 다락방 심방을 하면서, 또 한 중학생 친구를 심방하면서, 제 마음에 무겁게 다가온 두 가지 질문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어느 성도님의 안타까운 탄식이었습니다. "강도사님, 제 주변에 정말 신실하게 신앙생활 하시는 분이 한 분 계세요. 교회 사역에 귀하게 헌신하고, 이웃을 섬기시는 분인데, 그분의 삶이 너무나 힘듭니다. 한 가지 어려움이 지나가면 또 다른 어려움이 찾아오고, 본인도 그 무게에 짓눌려 괴로워하십니다. 그분이 그 고통 가운데 괴로워 하는데 저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습니다. 그분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겠습니까?"
또 다른 하나는 중등부 친구의, 굉장히 깊고도 무게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강도사님, 학교에서 보면요, 정말 못된 친구들이 더 잘나가요. 거짓말 잘하고, 친구들 괴롭히는 아이에요. 그런데 그 친구는 인기도 많고, 공부도 잘해요. 그런 거 보면 진짜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게 맞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성도 여러분, 이 두 질문에 여러분들은 어떻게 답하실까요? 생각해보면, 이 두 질문의 본질은 하나입니다. "왜 의인이 고난 받고, 악인이 형통합니까? 하나님은 왜 침묵하십니까?"
그런데 여러분 이 질문은 어느 한 성도님만의 질문도, 어느 한 학생의 특별한 질문도 아닙니다. 이 질문은 시대를 초월하여 하나님을 믿는 모든 백성들이 가슴속에 품고 끙끙 앓아 왔던, 참으로 오래되고 무거운 영적 딜레마와도 같은 질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답답하고 억울한 질문을 끌어안고 몸부림치며 하나님께 나아갔던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 선지자 하박국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갈 때 방대한 의문과 회의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고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하박국서의 마지막에 가서 그의 고백과 태도가 완전히 바뀐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그를 그렇게 바꾸었을까요?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이 바뀌어야 할까요? 이 시간 가운데, 하박국의 고백을 따라가며 우리 또한 무엇이 바뀌어야 하는지를 깨닫고, 그 깨달음 가운데 실제로 우리의 마음이 바뀌어지는 은혜의 시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본론 1 — 바뀌지 않은 상황
먼저 우리가 본문 말씀 하박국 3장 17절부터 19절까지의 이 위대한 신앙 고백을 집중적으로 보기 전에, 하박국서의 전체 흐름을 봐야 합니다. 하박국이 살던 시대는 어떠했을까요? 암울했습니다. 안으로는 율법이 무너지고 폭력과 악행이 가득했으며, 밖으로는 무자비한 바벨론 제국이 쳐들어와 나라를 짓밟고 있었습니다. 신실한 백성들은 고통받고 죽어 가는데, 잔인한 바벨론은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은 하나님께 피를 토하듯 따져 묻습니다. 하박국 1장 2절입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 아멘.
그런데 이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더 충격적이었습니다. "내가 갈대아 사람, 곧 바벨론을 일으켜서 너희를 심판하겠다." 하박국은 깜짝 놀랍니다. "하나님, 우리가 악하다 해도 바벨론은 우리보다 훨씬 더 악한 민족인데, 어찌하여 더 악한 자로 의인을 치게 하십니까?" 성도 여러분, 이것이 하박국의 처음 모습입니다. 의문과 분노와 고통으로 가득 찬 모습임을 알 수 있죠.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런 하박국의 분노와 의문, 그리고 고통에 즉각 응답하시고 그 모든 상황을 깔끔하게 해결해 주셨을까요? 그래서 하박국이 달라지게 된 걸까요? 한번 본문을 살펴봅시다.
하박국 3장 17절에 이르렀을 때, 1장에서 던졌던 그 질문이 시원하게 해결되었느냐? 아닙니다. 17절을 다시 한 번 잘 보십시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여기서 우리가 정말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비록 ... 없을지라도" 이 표현입니다. 이것은 "지금 다 망했다"는 한탄이 아닙니다. 이것은 "설령 이런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라는 가정의 표현입니다. 다시 말해, 하박국이 마주하고 있는 미래는 어떤 미래입니까?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할 수도 있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을 수도 있고, 외양간에 소가 없을 수도 있는, 그런 캄캄한 미래입니다.
이 여섯 가지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 밭, 우리의 양, 외양간의 소. 이것은 단순한 농작물 목록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 시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삶의 전부였습니다.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 경제, 미래, 다음 세대의 생존 - 그러니까 하박국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상황이 와도"라고 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질문을 던지며 시작했던 하박국 1장과 결론인 하박국 3장을 비교해 보십시오. 1장에서 그가 부르짖었던 그 부조리한 현실 - 의인이 짓밟히고 악인이 형통하는 그 현실은 여전히 그대로입니다. 게다가 바벨론의 침공으로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가능성까지 그의 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곧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마" 하고 약속하신 것도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이 점이 정말 중요합니다. 하박국 3장의 위대한 찬양은, 상황이 좋아져서 부른 노래가 아닙니다. 문제가 해결되어서 부른 찬양이 아닙니다. 형편이 나아져서 드린 감사가 아닙니다. 오히려 "앞으로 어떤 최악의 상황이 펼쳐진다 할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겠다"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그래서 이 고백이 그토록 위대한 것입니다.
본론 2 — 바뀐 것은 하박국 자신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바뀐 것일까요? 18절을 한 목소리로 읽어보겠습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나는…" 이 한 단어에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17절은 외부 환경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러나 18절은 외부 환경이 아니라 "나"에 대한 고백입니다. 환경은 그대로인데, 나는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환경은 바뀌지 않았는데, 그 환경 한가운데 서 있는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바꾸었습니까? 하박국 2장으로 잠깐 가보면, 하박국 2장 1절에서 하박국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리라." 아멘.
하박국은 자기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가만히 섭니다. 그리고 2장 4절에서 그 유명한 말씀을 듣게 됩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아멘! 여러분, 이 말씀, 너무나도 유명한 말씀이지 않습니까? 이 말씀이 사도 바울에게로 흘러가 로마서가 되고, 갈라디아서가 되고, 결국 종교개혁의 기치가 되었던 그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하박국에게 악인을 반드시 심판하시겠다는 역사의 계획을 보여 주셨고, 눈에 보이는 캄캄한 상황 너머에서 온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그분의 절대 주권과 크신 뜻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무엇이 하박국을 바꾸었습니까? 상황이 아닙니다. 하박국을 바꾼 것은 하나님을 만난 그 시간, 그분의 말씀을 들은 그 순간, 그분의 뜻을 깨달은 그 자리였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을 뵙고 나니, "왜 악인이 의인을 삼킵니까?"라는 그 끓어오르던 의문이, 부조리해 보이던 현실이 더 이상 그를 흔들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눈앞의 바벨론보다, 이 모든 역사를 쥐고 계신 하나님이 훨씬 더 크게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3장 마지막에 가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아멘.
여러분, 이것은 결코 억지로 짜낸 고백이 아닙니다. "괜찮아, 괜찮아. 잘 될거야."와 같은 자기 최면도 아닙니다. 하박국은 자기 상황을 누구보다 정직하게 직시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한 것,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는 것, 외양간에 소가 없는 것, 그 모든 결핍을 한 가지도 빠뜨리지 않고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결핍 한가운데에서, 결핍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본론 3 — 욥도 그러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박국 뿐만 아니라 하박국과 똑같은 자리에 섰던 또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누굴까요? 네! 고난의 대명사 하면 떠오르는 욥입니다. 욥기를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욥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자녀들도 잃고, 재산도 잃고, 건강도 잃고, 마지막에는 아내의 신뢰까지 잃었습니다. 욥은 이 현실 앞에 욥기 3장에서 “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닥치는가?" 절규했습니다. 친구들이 와서 각종 답을 제시했지만, 그 답들은 욥을 더 아프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욥기를 끝까지 읽어 보면,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욥의 그 "왜?"라는 절규에 끝까지 직접적으로 대답하지 않으신다는 것이죠. "네가 왜 이런 고난을 당했냐 하면 말이다… 사탄이 너에 대해 이렇게 도전했고, 그래서 내가 너를 시험하도록 허락한 것이란다." 이런 식의 설명은 욥기 어디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욥은 끝까지 자기에게 왜 그 고난이 임했는지 모릅니다.
대신 하나님께서는 욥기 38장부터 폭풍우 가운데 나타나셔서 욥에게 질문을 쏟아내십니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새벽에게 명령하여 그 자리를 잡게 한 일이 있었느냐? 바다의 샘에 들어갔었느냐? 사망의 그늘진 문을 보았느냐?" 이런 식의 질문이 38장부터 41장까지 무려 70여 개 가까이 막 쏟아내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 질문을 쏟아내신 이유가 뭘까요? 그렇습니다. 이 질문들은 사실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보여주시는 계시입니다."내가 누구인지 보아라. 나는 땅의 기초를 놓은 자다. 나는 별들을 운행하는 자다. 나는 바다를 가두는 자다. 그런 내가 지금 너와 함께 있다." 하나님은 욥에게 "답"을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본 욥은 무엇이라고 고백합니까? 욥기 42장 5절입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아멘.
여러분, 보십시오. 욥의 상황이 그 시점에 회복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자녀들이 살아 돌아온 것도 아니고, 병이 나은 것도 아닙니다. 욥은 여전히 잿더미 위에 앉아 있습니다. 욥의 답은 "왜 이런 일이 있었나"에 대한 정보가 아니었습니다. 욥이 얻게 된 답은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답으로 욥은 충분했습니다.
여러분, 처음에 말씀드린 두 분의 질문에 대해 우리는 사실 "이런이런 이유 때문에 고난이 계속 있는 것이고 악인이 잘 되는 것입니다" 라고 깔끔하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더 깊은 답을 줍니다. 그것은 "답"이 아니라 "어떤 한 분"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환경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 그것이 모든 답을 무력하게 만들 만큼 큰 답이라는 것입니다.
본론 4 — 사슴의 발과 높은 곳
그런데 여기서 우리에게 한 가지 현실적인 질문이 남습니다. "좋습니다.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내가 바뀌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하박국 앞에는 여전히 바벨론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욥 앞에는 여전히 잿더미가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 앞에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그대로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해서 그 거친 길이 갑자기 평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 길을 우리는 어떻게 걸어가야 합니까?
바로 이 질문에 대한 하박국의 마지막 고백이 19절입니다. 함께 보시겠습니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를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아멘.
여러분, 언뜻 이 구절은 단순한 시적 표현으로 느껴지며 그냥 지나칠 수 있는데, 이 말씀은 매우 구체적인 그림이 들어 있습니다. 매우 중요한 구절이죠. 한번 사슴의 발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사슴의 발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사슴의 발은 거친 바위산을 뛰어다닐 수 있도록 만들어졌습니다. 사슴의 발굽은 험한 바위산에서도 절대 미끄러지지 않도록 단단하고 정교하게 창조되었습니다. 가파른 곳, 좁은 곳, 위험한 곳을 사뿐사뿐 뛰어다닙니다.
하박국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평지를 걷게 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길이 평탄해지게 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 고난의 산에서 순간이동시켜 당장 평지로 빼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거친 바위산은 그대로지만, 그 산 위를 사슴처럼 뛰어다닐 수 있는 발, 그것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주목할 표현이 있습니다.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 이 "높은 곳"은 평탄하고 편안한 길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높은 곳에 다니게 하다"는 표현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집니다. 신명기 32장을 보면 이 표현은 "고난을 이기고 올라서는 승리의 자리", 곧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최후의 영광스러운 통치의 고지를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19절은 이런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고난의 바닥에 영원히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지금 당장은 거친 바위산을 사슴의 발로 뛰어다니게 하시지만, 마침내 그 발로 우리를 영광스러운 승리의 고지로 이끌어 올리실 것입니다. 지금은 견디는 발이지만, 끝에 가서는 승리하는 발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이라는 것은 이것입니다. 산이 옮겨지는 것을 보는 것이 신앙일 수도 있지만, 더 깊은 신앙은 산이 그대로 있는데 그 산 위를 뛰어다니는 발을 받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다시 열리는 것을 보는 것도 신앙이지만, 더 깊은 신앙은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을지라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우리는 반드시"나의 높은 곳"에 서게 될 것입니다.
결론 —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동암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끊임없이 상황이 바뀌기만을 구합니다. "하나님, 이 병을 고쳐 주십시오. 이 재정의 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이 관계를 회복시켜 주십시오." 그것은 잘못된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 기도도 들으십니다. 때로는 정말로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막힌 길을 열어 주시고, 병을 고쳐 주십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그 상황이 좀처럼 바뀌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기도해도 변화가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오늘 본문의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를 향해 이렇게 선포합니다. "성도 여러분,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위대하신 하나님을 만나, 내가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데도 극심한 고난 중에 계십니까? 외양간에 소가 없고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다고 울상 짓지 마십시오.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모든 눈물을 아시며, 마침내 여러분의 발을 사슴과 같이 만드사 그 고난의 절벽 위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 "무엇이 바뀌었습니까?" 이 질문에 우리는 이렇게 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환경은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제가 바뀌었습니다. 아니, 제가 만난 하나님이 너무 크셔서, 환경이 더 이상 저를 압도하지 못합니다."
이 시간, 우리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와 풀리지 않는 질문들을 십자가 앞에 다 내려놓읍시다. 받은 복 때문에 기뻐하는 신앙을 넘어서서, 그 복을 주신 하나님 한 분으로 만족하는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해도,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어도, 외양간에 소가 없어도 -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사슴의 발로 우리의 높은 곳에 이르는 우리 동암교회 성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깨닫게 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늘 상황이 바뀌기만을 구하였사오나, 정작 바뀌어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이었음을 알게 하여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깊이 새겨 주옵소서. 풀리지 않는 문제 앞에 서 있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환경보다 더 크신 주님을 만나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이 거친 길 위에서도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게 하시고, 마침내 우리의 높은 곳에 이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