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찾아온 ‘헤세드’

수요 셈솟는 예배(룻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4 views
Notes
Transcript
윤정희 권사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대표기도 해주시겠습니다.
<대표기도>
어둔 밤 속에서도 빛이 되시는 하나님 아버지,
죄인 된 우리를 예배의 자리로 친히 불러주시고, 그 은혜에 합당한 반응으로 주님을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심령들이 형식이 아닌 참된 마음으로, 영과 진리로 주님을 예배하는 예배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시간 우리의 삶을 깊이 돌아보게 하시고, 숨겨진 죄와 연약함까지도 주 앞에 내려놓게 하시며, 진실한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주의 말씀 앞에 서게 하시되, 단순히 듣는 자가 아니라 그 말씀에 의해 깨어지고 변화되는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교훈하시고, 책망하시며, 바르게 하시고, 의로 교육하시는 주님의 뜻 앞에 온전히 순종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듣는 성도님들의 마음을 열어주시고, 굳어 있는 심령은 부드럽게 하시며, 상한 마음은 치유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마음밭이 길가나 돌밭이 아니라, 깊이 뿌리내리는 옥토밭이 되게 하셔서, 말씀이 떨어질 때 풍성한 열매로 맺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을 전하는 종에게도 성령의 충만함을 더하여 주시고,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되게 하시며, 듣는 자와 전하는 자 모두가 동일한 은혜 가운데 거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예배의 시작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주님 홀로 영광 받아 주시고,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로 이어지게 하옵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광고>
오늘은 예배 이후에 웃음꽃잔치가 있습니다. 정말 열심히 준비하셨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이 기쁨의 잔치를 다 누리시길 바랍니다.
<말씀>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말씀은 룻기 2장 1-7절 말씀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으로는 구약 401페이지입니다. 교독하시고 마지막 구절은 한 목소리로 합독하겠습니다.

본문) 룻기 2:1-7

Ruth 2:1–7 NKRV
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5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6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INTRO) 나오미의 상태

<인사>
할렐루야! 수요 셈솟는 예배에 나아오신 우리 성도님들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은 이전부터 해왔던 룻기 말씀을 통하여 ‘우연히 찾아온 헤세드’라는 제목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나오미의 상태와 애가>
오늘 말씀은 룻기 2장 초입부인데요. 룻기 1장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겠습니다. 베들레헴에 흉년이 들어 살 수 없었던 한 가정 ‘나오미’와 ‘엘리멜렉’이 두 아들을 데리고 ‘살기 위해서’ 모압 땅으로 갔죠. 하지만 어떻게 됩니까? 두 아들이 모압 땅에서 결혼하여 오르바와 룻이 며느리가 되었지만 모든 남자들이 다 죽게 됩니다.
그 때 베들레헴에 흉년이 지나고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라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은 나오미기에 그 소식을 듣고 유다 땅 베들레헴으로 다시 돌아가려고 합니다.
그 때 두 며느리가 나오미와 함께 하고자 했지만 거듭된 만류 끝에 룻만 남게 됩니다. 모압여인인 룻이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죠. 그래서 룻과 나오미는 남편도 없고, 힘도 없고, 보호해줄 보호막이 하나도 없는 텅빈 상태인 그들이 베들레헴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이 머나먼 여정을 지나 도착했을 때 사람들이 여러가지 모습으로 반응합니다. 그러자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죠. 나를 이제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마라’라 부르십시오. 무엇입니까? 나는 이제 나오미(기쁨)이 아니라 마라(슬픔)입니다. 이렇게 전능자이신 하나님께 탄식의 고백을 했던 것이 지난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그들을 채울 것은 ‘헤세드’ 밖에 없다.>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어 보이는 것이 나오미와 룻의 상태입니다.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상황을 뒤집는 것이 바로 ‘헤세드’이죠.
여러분 헤세드를 이해하기 어려운 단어로 생각할 수 있는데요. 한글로 번역했을 때는 은혜, 인자, 인애, 충성, 신실하심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죠. 한 단어로 담을 수 없는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헤세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언약’ 약속을 전제로 이해해야 하는데요. 성경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과의 관계를 맺을 때 하시는 패턴이 있습니다.
(1) 먼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시죠.
(2) 그리고 약속을 선언하십니다. 상호적인 약속이죠.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순종’입니다. 대신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복을 그들에게 주시죠.
(3) 그런데 성경을 보아도 그렇고, 오늘날의 우리도 그렇지만 인간은 그 약속을 어떻게 합니까? 약속을 지속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수많은 복을 누리지만, 인간을 그 약속을 깨뜨립니다.
최초의 인간이자 최초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아담과의 약속이죠. 아담에게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키게 하시면서 단 하나의 조건을 주십니다. 동산 중앙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왜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만큼은 금지하셨을까요? 사실상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는 왕 노릇하는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고요. 다른 피조물들의 이름을 지어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담 또한 하나님 앞에서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죠.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하나님과 약속으로 맺어진 관계를 기억하게 하는 단 하나의 장치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누가 깨버립니까? 하나님이 아니라 아담이 깨버리죠.
아브라함도 동일합니다. 하란에 있던 아브람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명령하시고 약속하시죠. 창세기 12:1–4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이런 말도 안되는 약속이 어디 있습니까? 순종하기만 하면 땅과 후손과 복을 주시겠다는 것이죠. 심지어 그 약속의 형태를 보면요. 고대 근동의 언약 체결 방식이었던 짐승을 쪼개고 그 사이를 지나갈 때, 아브라함이 아닌 타는 횃불의 형태로 하나님께서 지나가시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시겠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도 아브라함은 어떻게 합니까? 위기에 처할 때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 속이며 살아남기에 급급한 사람이었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기도 했습니다. 아담과 아브라함만 봐도요. 하나님이 아닌 ‘사람’이 그 약속 앞에서 지키지 못하고 무너지는 모습을 수도 없이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죠.
그 외에도 어떻습니까? 이삭, 야곱, 모세,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요. 하나님께서는 먼저 다가오시고, 약속하시면, 인간이 그 약속을 깨뜨립니다.
사실 약속은 ‘관계’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부동산에서 거래를 할 때도 매도인은 집을 넘겨야하고, 매수인은 돈을 지불해야 하죠.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거래서’라는 것을 작성하여 쌍방이 이행할 수 밖에 없는 장치를 만들어놓죠. 그래서 어느 한쪽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계약이 파기 되는 것이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게 됩니다.
그래서 원래라면요. 하나님과 우리는 동등한 존재가 아니기에 약속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면서까지 약속을 맺으신 것인데요. 이 약속조차 인간은 지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어야 해요?관계는 끝이어야하죠. 그런데 앞선 인물들도 그렇고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도 어떤가요? 하나님과의 관계를 여전히 맺고 있죠. 여전히 하나님께 예배하고 찬양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지속되고 있죠.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것이 ‘헤세드’라는 것이죠. 인간인 우리가 신실하지 못할 때라도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붙드시는 일방적인 사랑과 그 은혜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잘 표현한 성경이 호세아서인데요.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하던 선지자인 호세아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처음 찾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함께 읽어볼까요? 호세아 1:2 “여호와께서 처음 호세아에게 말씀하실 때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하시니”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라는 것이죠. 그래서 호세아는 ‘고멜’이라는 여자와 결혼합니다. 그런데 고멜이 아니나 다를까 결혼을 했음에도 계속해서 다른 남자들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냐면요. 호세아 3:1(우리말 성경) 그리고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비록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른 신들에게로 향하고 건포도 빵을 사랑한다 해도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랑하듯이 너도 비록 네 아내가 다른 사람의 사랑을 받고 간음한 여자이지만 가서 다시 사랑하여라." 음란한 여자인 것을 알지만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긴 여자이지만 다시 사랑해주라는 말씀이죠. 사실 하나님의 마음을 호세아를 통해 보여주신 것이죠. 인간은 늘 하나님을 떠나고 다른 우상들을 쫓으며 그 관계, 그 약속을 파기하지만 그 관계를 다시 붙드시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과 은혜인 ‘헤세드’라는 것입니다. 이 ‘헤세드’라는 의미를 기억하시며 오늘 룻기 말씀 보도록 하겠습니다.

BIBLE1) 보아스의 등장(2:1)

<보아스에 대한 설명>
오늘 말씀에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은 나오미와 룻의 상황 속에 2장 1절에서는 한 인물이 등장하는데요. 바로 ‘보아스’입니다.
Ruth 2:1 NKRV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더라
그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냐면요. 이미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인 사람이라는 것이죠. 이 부분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율법과 풍습인 ‘기업 무를자’‘계대 결혼’을 실행하기 위해 충족되어야 하는 중요한 조건이기 때문이죠. ‘기업 무를 자’라는 것은 한 가문이 어려움에 처해 땅을 팔거나 생존하기가 어려운 상태일 때 가까운 친족이 그 기업(땅)을 대신 사서 그 가문이 끊어지지 않도록 회복 시켜주는 제도입니다. ‘계대 결혼’은 형제가 자식이 없이 죽었을 경우 가까운 친족이 그 아내와 결혼하여 후손을 이어주는 제도입니다. 즉 이스라엘 공동체가 언약 백성으로서 유지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조건은 ‘친족’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유력한 자’라고 표현하고 있는데요. 원어의 의미를 살려서 말하면요. 강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 탁월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그 당시 부유하고, 권세 있고, 성품이 좋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죠.

BIBLE2) 담대한 룻(2:2)

<나오미를 위해서 이삭을 주우러 가는 룻>
2절 말씀을 보면 ‘모압 여인’룻이 나오미에게 제안 합니다. 룻기 2: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룻이 나오미에게 누군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 따라서 이삭을 줍겠다고 말합니다. 왜냐? 나오미와 룻은 베들레헴으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텅빈’ 상태였습니다. 베들레헴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바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죠.
<이스라엘의 문화 : 이삭줍기>
그래서 신명기 말씀에 따른 ‘이삭 줍기’ 문화를 통하여 그 삶을 연명하려 했던 것입니다. 신명기 24장 19절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데요.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하나님은 가진 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손해를 보라고 하십니다.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단순한 배려가 아닙니다.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 즉 스스로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이 남의 것을 주워서라도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이 설계하신 구조이죠.
당시 주변국가의 문화를 보면 가난한 자들을 향해서는 기대할만한 배려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살아갈 수 있는 방편을 마련해주셨다는 것이죠. 적어도 그들이 다른 사람들이 남긴 것들을 주워서라도 살 수 있는 희망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사회적인 안전망이 되어줬죠.
그런데요. 당시 주변 국가의 문화를 오늘날에 빗대어봤을 때 사실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100원 한푼 손해보지 않으려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죠.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타인에게 자신의 것을 흘려보내는 모습 / 악착같이 자신의 것만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 때로는 의도적인 손해를 감수하는 모습! 이 모습이야말로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줘야할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 과부가 처하는 환경>
룻이 이 ‘이삭 줍기’ 문화를 믿고 나아갔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길이 순탄치만은 않습니다. 왜냐하면! 룻기의 배경이 ‘사사시대’이기 때문이죠. 하나님의 명령이 지켜지리라 기대하기 어려운 때입니다. 더군다나 성경말씀이 여전히 룻을 ‘모압 여인 룻’으로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모압 여인이자 과부인 룻이 좋은 대우를 받을 것이라는 것 또한 사실상 어려웠습니다.
<나오미를 위해 행동하는 룻>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자발적으로 나이든 ‘나오미’를 위해 이삭을 줍기 위해 나아갑니다.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도 불구하고 한걸음 내딛은 것이죠.

BIBLE3) 신적 우발성(2:3-4)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그런데 다음 말씀이 놀라운데요. 룻기 2: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룻이 그저 일하는 사람들을 따라 이삭을 주우러 갔는데 ‘우연히’ 그 곳이 앞서 소개했던 보아스의 밭이었다는 것이죠.
<신적 우발성>
‘우연’의 사전적인 설명은 “아무런 인과관계 없이 원인과 결과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일을 그저 사람들이 말하는 우연으로 치부해도 되는걸까요?
하나님께서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계획하신 목적에 합당하게 유지하고 보전시키기 위해 이 땅 가운데 역사하시는데요. 이것을 우리는 ‘섭리’라고 말합니다.
풀어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과 이 땅의 역사에 대해 계획을 가지고 있고, 그 계획을 이루시기 위한 수많은 절차와 과정에 대한 생각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하나님은 인간의 인생과 역사 속에서 그 계획하신 것을 이루시기 위해 수많은 사건에 간섭하셔서 결국에는 당신의 뜻을 이루신다는 것이죠. 그래서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있습니다. 놀랍게도 사람들이 말하는 이 ‘우연’또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하나의 방편이자 섭리 중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교수님은 이것을 ‘신적 우발성’이라고 표현 합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철저하게 의도된 계획가운데 있는 일인데, 그 속에 속해있는 인간의 눈에는 전혀 의도가 없는 우연처럼 보이는 사건이라는 것이죠. 룻은 단지 먹고 살기 위해 밭에 나갔을 뿐입니다. 특별한 기대도 없습니다.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 정도의 소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발걸음이 정확하게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됩니다.
<마침>
그리고 4절 말씀을 보면요.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그 밭에 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기적이 아닌 일상 속에서>
우리가 룻기를 보면 두 과부가 굶주려 위급한 상황 속에 놓여있을 때 하나님이 직접 행하시는 ‘기적’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듯이 하늘에서 내려주시면 어떨까? 5개의 떡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수많은 사람을 먹이셨듯이 이들의 굶주림을 채워주시면 어떨까 상상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다가 갈라지고 하늘이 열리는 기적 뿐만 아니라 ‘섭리’ 가운데, ‘일상’ 속에서도 일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뭐라고요? 기적뿐만 아니라 ‘섭리’ 가운데, ‘일상’ 속에서도 분명히 일하신다는 것이죠. 우리는 때로 특별한 기적을 체험하길 원합니다. 나의 삶의 180도 달라져 사람들이 우러러 볼 수 있는 삶이 되길 원하거나, 한번의 체험으로 이제는 하나님이 아닌 그 체험을 동경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일상’ 속에서도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순간 일하시고 계시다는 것이죠.
실제로 룻기는요. 장으로는 4장(네장) 절로는 85절 이라는 비교적 짧은 말씀 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여호와’라는 단어가 등장 인물들의 대화 가운데 무려 18번이나 언급됩니다. 이 것을 통해 단편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장면에 개입하시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 모든 일을 이루시고 계신 것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BIBLE4) 대담한 모압소녀의 행동 (2:5-7)

<룻을 궁금해하는 보아스>
우연히 마침 만나게 된 보아스가 룻을 궁금해합니다. 이성적인 것보다는 단순한 궁금증일 수 있습니다. 젊은 여자가 열심히 땀흘리며 일하고 있으니 물어본 것이죠.
<모압 소녀의 대범한 행동을 통한 헤세드>
그 사환을 통해 룻이 소개되는데요.
Ruth 2:6–7 NKRV
6 베는 자를 거느린 사환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는 나오미와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모압 소녀인데 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7절 말씀 함께 읽어볼까요?
사환을 통해서 소개되는 룻은 어떤가요?
첫째는 룻의 신분입니다. 모압 소녀, 나오미와 함께 돌아온 사람. 당시 청중이 이 말을 들으면 바로 알아챘을 것입니다. 이방인이구나, 과부구나,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이구나.
둘째는 룻의 행동입니다. 아침부터 지금까지, 잠시 쉰 것 외에는 계속 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룻은요. 아주 잠깐 쉬고 아침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이죠. 룻이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을해야하나요?
중동의 태양 아래서 허리를 굽혀 이삭을 줍는 일이 얼마나 고될까요? 그럼에도 룻이 그 노동을 감당하는 이유는 ‘나오미’ 때문이죠. 룻이 이삭을 주워 가야 나이 든 나오미가 먹을 수 있기 때문이죠. 나오미의 행동은 단순한 친절과 부지런함으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헤세드’가 흘러가는 부분인데요.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헤세드는 의무를 넘어서는 자발적 사랑입니다. 룻에게 나오미를 부양할 법적 의무는 없습니다. 남편이 죽었으니 시어머니와의 관계도 법적으로는 끝났습니다. 나오미 자신도 룻에게 돌아가라고 했습니다(1:8). 그런데 룻은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삭을 주우러 나왔습니다. 의무가 없이 자발적으로 움직이는 사랑, 이것이 헤세드입니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보아스의 헤세드>
그런데 헤세드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갑니다.
보아스가 이 장면을 봤습니다. 이방 여인이, 과부가, 아무 연고도 없는 사람이 나이 든 시어머니를 위해 땀 흘리며 일하고 있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 순간 보아스의 마음에도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자세히 드러나지 않지만 이후 말씀을 보면 보아스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나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다른 밭으로 가지 말라고 합니다. 목이 마르면 자기 사환들이 길어놓은 물을 마시라고 합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추수꾼들에게 이삭을 일부러 뽑아서 룻이 줍도록 내버려 두라고까지 명령합니다.
보아스가 그렇게 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까? 없습니다. 율법은 이삭을 줍는 것을 허용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보아스는 율법이 요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룻을 향해 움직입니다. 룻의 헤세드를 본 보아스가 헤세드로 응답한 것입니다. 자발적이고 조건 없는 신실한 그 하나님의 사랑 ‘헤세드’가 ‘헤세드’를 낳아 그 사랑이 흘러갔다는 것입니다.

TOUCH) 우연 가운데 헤세드를 맛보고 있는 우리

예화) 시현이를 양육하면서 든 생각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말씀을 묵상하며 2가지를 기억하기를 소망하는데요.
(1)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그 신실하신 사랑 헤세드를 흘려보내야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며, 제 아들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아이를 키워보신 분들은 아실 겁니다. 아이를 양육한다는 것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일인지. 누워 있다가 본인이 스스로 뒤집어 놓고는 다시 눕혀달라고 웁니다. 눕혀주면 이번엔 앉혀달라고 웁니다. 앉혀주면 머리 무게를 못 이겨 픽 쓰러집니다. 얼른 달려가 잡아줍니다. 코가 막히면 콧물을 빼주고, 먹을 것을 흘리면 닦아주고, 다시 깨끗한 음식을 입에 넣어줍니다. 이게 하루 종일 반복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현이가 이 사실을 알까?
아마 시현이 입장에서는 자기가 뒤집은 줄 알고, 자기가 앉아 있는 줄 알고, 자기가 먹고 있는 줄 알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부모가 계속해서 붙들어 주고, 도와주고, 채워주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만남 또한 신적 ‘우연’이 겹친 하나님의 섭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종종 착각합니다.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은 내 노력 때문이라고, 내가 잘해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말 그렇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습니까? 지금까지 우리의 삶을 이어온 수많은 순간들이 과연 우리의 능력만으로 가능했습니까? 우리가 ‘우연’이라고 부르는 그 순간들, 사실은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인도하신 ‘섭리’의 역사입니다. 여러분, 지금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있는 우리만 봐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태어난 곳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고, 생각도 다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한 자리에 모여 같은 찬양을 부르고, 같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수많은 만남과 사건을 엮어 이루신 ‘신적 우연’, 곧 하나님의 섭리인 줄 믿습니다.
<(2) 우리가 받은 이 은혜를 조금이나마 흘려 보내는 삶>
두번 째는 이렇게 은혜로 살아온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가 받은 그 은혜, ‘헤세드’를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값없이 베풀어진 사랑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조건 없이, 자격 없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린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사랑이 우리 안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흘러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의 논리는 움켜쥐고, 더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원리는 다릅니다. 내려놓고, 나누고, 흘려보내라고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둔한 다람쥐’이야기인데요. 다람쥐는 도토리를 숨겨 놓고도 그 위치를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얼핏 보면 참 우둔해 보이지요. 그런데 바로 그 ‘잊어버림’ 때문에 도토리가 땅에서 싹을 틔우고, 결국 숲을 이루게 된다고 합니다. 만약 다람쥐가 모든 도토리를 정확히 기억해서 다 찾아 먹었다면, 숲은 자라지 못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아이러니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조금은 빈틈있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나의 것을 완벽하게 내 손아귀에 넣고자 하는 삶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헤세드를 흘려 보낼 수 있는 틈이 있는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높은 산이 되려고 애쓰기보다, 누군가가 편히 올라와 쉴 수 있는 오름직한 동산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로 인해 누군가 숨을 고르고, 위로를 얻고, 다시 힘을 얻어 하나님을 향해 걸어갈 수 있는 그런 삶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헤세드를 흘려보내는 통로로 부름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은혜를 잊지 않고, 오늘도 그 사랑을 흘려보내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찬양) 지금까지 지내온 것

우리 이 시간 ‘지금까지 지내온 것’ 다함께 고백하며 나아가겠습니다.

기도)

다함께 기도하실 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을 기억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오늘 아침 잠자리에서 깨어나 집밖을 나서 교회에 올 수 있었던 것이 우연이 아니라 주님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 오늘 이 자리에 함께 모여 예배할 수 있는 것이 주님의 일하심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살아가는 어떠한 순간도 주님의 일하심이 없었던적이 없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꽉 붙잡고 계심을 기억하고 고백하며 우리 다함께 주님만을 의지하길 소망하며, ‘주여’한번 부르짖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두 번째, 불순종하는 우리를 늘 신실하신 포기치 않으시는 그 사랑 ‘헤세드’로 덮어주심을 기억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우리는 수 없이 약속을 어기고 돌아섰지만 주님께서는 단 한번도 우리를 놓지 않으셨습니다.
나오미가 스스로를 마라라 부를 때에도, 우리가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한탄할 때에도 하나님의 헤세드는 여전히 우리를 향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 그 신실하신 사랑 앞에 우리의 연약함을 내려 놓게 하여주시옵소서.
세 번째로 기도하실 때, 이제는 그 ‘헤세드’를 흘보내길 소망합니다.
하나님! 우리가 받은 사랑이 우리 안에서 멈추지 않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 교회가 이 땅에서 헤세드가 흐르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높이 솟은 산이 아니라 누구든 기대어 쉴 수 있는 동산이 되게 하옵소서.
하나님!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오늘 내 곁의 나오미가 누구인지 보게 하시고, 룻처럼 자발적으로 일어나 그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우리가 되게 하옵소서.
받은 헤세드를 흘려보내는 삶을 살아가길 결단하며, ‘주여’ 한 번 부르짖고 통성으로 기도하겠습니다.​​​​​​​​​​​​​​​​

마무리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를 생명의 자리로 부르시고 예배의 자리로 인도하신 주님의 은혜를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살아온 모든 날들이 결코 우연이 아니며, 오직 주님의 선하신 손길과 인도하심 가운데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연약하여 마음으로, 말로, 삶으로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살아갔음을 이 시간 회개합니다. 주님의 뜻보다 우리의 뜻을 앞세우고, 주님의 영광보다 우리의 유익을 구했던 모든 죄를 불쌍히 여겨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하게 씻어 주시옵소서.
우리가 넘어지고 흔들리는 순간에도 여전히 우리를 붙드시고 일하고 계시는 주님의 신실하심을 믿습니다. 우리의 눈을 열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열어 그 은혜에 감사하며 반응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이 시간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하셔서 말씀 앞에 겸손히 서게 하시고, 주께서 주신 말씀으로 우리 각자의 삶이 변화되게 하여주시옵소서.
특별히 우리의 가정과 교회를 주님의 손에 올려드립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와 각 가정에 하나님께서 주신 그 신실하신 사랑 ‘헤세드’가 넘치게 흘러갈 수 있도록 주께서 붙잡아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금도 살아서 역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