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창세기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 view
Notes
Transcript
[서론]
어떤 책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우리 부부는 신혼 초에 동네를 거닐다가 공사가 거의 끝나가는 아름다운 집을 보았다.
문이 열려 있기에 집안으로 들어가 둘러 보았다.
동화에나 나올 것 같은 아름다운 집이었다.
커다란 2층 건물에 천장이 높았고, 창문은 대문처럼 커서 그림 같은 뒤뜰의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멋진 집이었다.
아내는 그 집에서 나온 후에도 자꾸 뒤돌아보며 말했다.
“여보, 우리도 저렇게 아름다운 집에서 살 날이 올 거에요.”
그때 우리는 무척 허름한 집에서 살고 있었다.
집안에는 제대로 닫히는 문이 하나도 없었다.
그것도 우리 전 재산을 쏟아 부어서 간신히 산 것이었다.
그런 우리가 방금 본 것 같은 멋진 집에 살수 있을까? 도대체 언제?
아무래도 불가능해 보였다.
당시 우리의 은행 잔고와 내 수입으로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위대한 신앙의 사람’이라고 자처하던 내 입에서는 갈망이 아닌 절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보, 너무 허황된 꿈을 꾸는 구려. 우리가 어떻게 저런 집을 살수 있겠소?”
하지만 아내의 믿음은 나를 훨씬 능가했다.
아내는 포기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 집 앞에서 30분이나 선채로 논쟁을 벌였다.
아내는 꿈이 이루어질수 밖에 없는 온갖 이유를 댔고, 나는 불가능할수 밖에 없는 온갖 이유를 댔다.
“조엘, 그렇지 않아요.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반드시 이 소망이 이루어질 거라는 느낌이 들어요.”
나는 아내의 기대를 산산조각내고 싶지 않아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했다.
하지만 아내의 고집을 누가 말리랴!
이후 몇달동안 아내가 끊임없이 믿음과 승리에 관한 말을 하는 바람에 나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우리도 그런 우아한 집에서 살수 있다는 아내의 믿음이 점점 내 마음을 움직였다 .
나는 좁은 생각을 버리고 아내의 생각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하나님이 반드시 이루어 주실 거야!’
나는 끊임없이 확신하며 말했다.
몇년 후에 우리는 낡은 집을 팔았다.
그리고 다른 땅을 사서 우리가 꿈에 그리던 그런 집을 지었다.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먼저 마음에 품지 않았다면, 아내가 내게 큰 비전을 심어주지 않았다면, 그 집은 절대로 탄생하지 못했으리라.
어떻습니까?
은혜가 되셨나요?
이 이야기는 조엘 오스틴 목사의 『긍정의 힘』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였고, 한국 교회 성도들 집에도 한 권씩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 하나 드립니다.
만약 그가 그 집을 사지 못했다면?
오히려 더 낡은 곳으로 쫓겨났다면?
그 신앙은 실패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신 것입니까?
한국 교회에는 한때 기복신앙의 바람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70~80년대 가난하던 시절,
'예수 믿으면 부자 된다, 병이 낫는다, 만사형통한다'는 말이 복음처럼 들렸습니다.
과연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형통일까요?
오늘 말씀에는 형통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의 시기로 하루아침에 이방 나라의 노예로 팔려갑니다.
성실하게 일했지만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
13년을 노예와 죄수로 살았습니다.
조엘 오스틴의 기준으로 보면, 요셉은 철저히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놀라운 말을 합니다.
창세기 39장 2절,
노예였을 때입니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며, 요셉이 하는 일마다 잘되도록 주님께서 돌보신다."
23절,
감옥에 갇혔을 때입니다.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기 때문에,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 다 잘되게 해주셨다."
도대체 성경이 말하는 '형통'이란 무엇일까요?
[본론1]
첫째, 형통은 '환경'이 아니라 '동행'입니다
2절과 23절을 다시 보십시오.
‘형통했다'는 말 앞에 항상 같은 문장이 따라붙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계셨다."
성경이 말하는 형통은 결과론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성공했으니 형통하다"가 아닙니다.
"주님이 동행하시니 이미 형통하다"입니다.
형통의 본질은 상황의 변화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요셉은 형통과 거리가 멉니다.
가족에게 배신당했고, 노예로 팔렸고, 억울한 누명까지 썼습니다.
세상이 말하는 형통이라면 노예에서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죄수가 아니라 높은 지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노예이자 죄수인 요셉에게 '형통'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셔도 그의 상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는 여전히 신분이 가장 낮은 노예였습니다.
그래도 형통했습니다.
형통은 내가 어디 있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로 결정됩니다.
이 진리는 우리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는데 왜 내 문제는 그대로인가?"
맞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셔도 삶의 문제가 즉각 해결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여전히 노예일 수 있고, 여전히 감옥일 수 있습니다.
질병과 싸워야 하고, 경제적 어려움이 짓누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형통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번아웃과 우울증으로 고통받습니다.
성과로만 가치를 평가받기 때문입니다.
연봉, 지위, 업적이 곧 자신의 가치라고 믿는 한, 우리는 결코 형통할 수 없습니다.
최근 저는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는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20년째 데뷔에 실패한 영화감독이 등장합니다.
친구들은 다 데뷔했는데 혼자만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도, 주변도 그를 무시합니다.
그런데 한 여성이 그의 곁에서 아무도 모르는 그의 가치를 알아봅니다.
그러자 그가 조금씩 자신의 무가치함에서 벗어나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상황이 바뀌지 않아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떠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십니다.
이 동행을 신뢰하는 것, 그것이 형통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이 내면의 형통은 나 혼자의 평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담장을 넘어 이웃에게 흘러갑니다.
[본론2]
둘째, 형통은 영적 영향력으로 드러납니다
3절입니다.
"그 주인은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계시며, 요셉이 하는 일마다 잘 되도록 주님께서 돌보신다는 것을 알았다."
보디발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을 알아봅니다.
요셉이 전도해서가 아닙니다.
요셉이 일하는 방식, 사람을 대하는 태도, 문제를 풀어가는 지혜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비참한 노예 신분인데도 설명할 수 없는 평안이 있었습니다.
형통한 자는 말로 하나님을 증명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삶에서 풍기는 영적 향기로 주변이 하나님을 의식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 영향력은 감옥에서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23절입니다.
"간수장은 요셉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아무것도 간섭하지 않았다."
죄수에게 죄수 관리를 맡기고 검사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상식 밖의 일입니다.
그만큼 신뢰했다는 뜻입니다.
요셉의 태도와 인격에 간수장이 완전히 동화된 것입니다.
요셉의 형통은 자신이 잘났음을 증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자리에 있든 묵묵히 타인의 필요를 살피고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잘되고 복받는 것을 형통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만 배부르고 나만 평안한 것은 기복신앙일 뿐입니다.
진짜 형통은 반드시 밖으로 흘러넘칩니다.
요셉 한 사람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았습니다.
요셉 한 사람 때문에 감옥에 질서와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형통의 복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 메마른 세상을 적시는 복의 통로로 삼으시기 위함입니다.
지금 나로 인해 주변 사람들이 안심하고 있습니까?
내 가족과 내 이웃, 내 동료들이 위로를 얻고 있습니까?
나로 인해 누군가가 하나님을 보게 됩니까?
그것이 진정한 형통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형통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겪는 이 작은 일들은 사실 하나님이 그리시는 거대한 그림의 조각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론3]
셋째, 형통은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어가는 과정입니다.
39장만 따로 떼어 보면 요셉의 인생은 불운의 연속입니다.
겨우 자리를 잡나 싶었더니 억울하게 감옥에 갇힙니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이겨내며 거룩함을 지켰는데 돌아온 것이 지하 감옥입니다.
믿음을 지킨 결과가 감옥이라니요. 세상 눈으로 보면 완전한 실패입니다.
우리 삶도 그렇습니다.
신실한 신앙인인데도 불행한 일이 연달아 일어납니다.
제가 아끼는 한 동생이 있습니다.
신앙이 참 신실한 친구입니다.
그런데 곁에서 지켜보면 큰 고난이 끊이질 않습니다.
"왜 저 친구에게만 자꾸 힘든 일이 생길까" 탄식이 나올 정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형통은 다릅니다.
흩어진 점들이 이어져 하나의 선이 되는 과정입니다.
지금 찍히는 고난의 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왜 하필 나에게"라며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점들이 연결되면,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부릅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보디발의 집에 팔려가지 않았다면 이집트의 경제와 문화를 배울 수 있었겠습니까?
감옥에 가지 않았다면 왕의 측근들을 만날 수 있었겠습니까?
불운의 점들은 사실 하나님의 계획 안에 정교하게 배치된 최적의 경로였습니다.
보디발의 집은 경영자 수업이었고, 지하 감옥은 정치 수업이었습니다.
이 혹독한 과정 없이는 이집트 총리라는 무거운 자리를 결코 감당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적 형통은 나를 편하게 만드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빚어가는 훈련의 과정입니다.
왜 요셉을 이토록 모질게 훈련시키셨을까요?
요셉 한 사람 잘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7년의 대기근에서 이스라엘 언약의 혈통을 보존하고, 수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혹시 지금 인생의 페이지가 '노예'나 '감옥'에 머물러 있다고 느껴지십니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삶의 아픈 점들을 연결하여 가장 아름다운 선을 그리고 계십니다.
다 이해할 수 없어도 괜찮습니다.
우리 인생의 작가이신 하나님은 결코 실수하지 않으십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많은 사람이 조엘 오스틴처럼 화려한 집을 얻는 것을 형통이라 믿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우리에게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내 집이 대저택이 아닐지라도, 심지어 차디찬 감옥일지라도 우리는 형통한 것인가?"
요셉은 자신의 삶으로 증명했습니다.
형통은 '어디에 사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사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면 감옥도 천국이 됩니다.
하나님이 없는 대저택은 화려한 무덤일 뿐입니다.
"그게 말이 쉽지, 누가 요셉처럼 살고 싶겠어요?"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맞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가는 것을 자원할 사람은 없습니다.
작고 초라한 집에 살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요셉처럼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복음이 필요합니다.
우리 대신 요셉의 삶을 사시고, 요셉보다 더한 고난을 당하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참된 요셉'이신 예수님입니다.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받는 아들이었듯, 예수님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셨습니다.
요셉이 형들에게 팔렸듯, 예수님은 은 30냥에 팔리셨습니다.
요셉이 채색옷을 벗기고 죄수가 되었듯, 예수님은 옷 벗김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요셉의 고난이 한 가족과 민족을 살렸다면, 예수님의 고난은 온 인류를 건져내셨습니다.
우리가 고난 중에도 형통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가장 깊은 구덩이와 지옥까지 내려가 보신 참된 요셉이신 예수님이 지금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게 형통입니다.
지금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계십니까?
그것은 버림받은 증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드라마를 완성하기 위한 한 페이지입니다.
대저택이 없어도 우리는 형통한 자입니다.
고난이 닥쳐와도 우리는 형통한 자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복음을 믿고 누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