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도: 섬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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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9:33-37
신앙 생활을 하다가 이런 혼란을 겪어본 적 있으신 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런 고민을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교회 생활을 오래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듣습니다. 그러면서 한 번씩 헷갈리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질서’와‘섬김’이라는 단어입니다. 그 둘은 서로 비슷한 듯다릅니다. 그래서 저 같은 경우 교회생활을 하면서 혼란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분명 공동체 안에서 질서가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질서가 무너지면 혼돈속에 빠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역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질서 있게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교회에 직분을 맡기심으로써 교회 공동체가 질서 있게 운영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우신 권위에 순종하라고 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
하지만 오늘 보게 될 터이지만 섬김이라는 주제는 사뭇 다른 얘기를 합니다. 섬김이 무엇입니까?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겠죠. 언제 질서 있게 행해야 하는지, 언제 섬겨야 하는지 혼동이 올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죠. 교회 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게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장로님, 부장님이 공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면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들이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 예를 들어 설거지 같은 일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질서 있게 연소자가 설거지를 하고 연장자는 상을 닦거나 주변 정리를 하는 게 맞는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것처럼 연장자가 먼저 섬김을 보여주는 게 옳은지 이런 혼동이 올 수 있습니다.
정답부터 말하면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즉 맞고 틀리다의 관점으로 들어가면 어쩌면 숱한 경우의 수가 발생합니다. 그것들을 일일이 규칙으로 만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러면 이 혼동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연장자를 예우하고 덜 힘든 일을 맡기는 것은 공동체의 화평과 효율을 위한 배려라고 보아야 합니다. 이때 연장자는 연소자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장자가 반드시 덜 힘든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할 수만 있다면 먼저 섬김을 보여주는 게 좋습니다.
5월은 마가복음을 중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단순히 장소적 의미가 아닌 하나님의 통치와 주권이 실현되는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가 실현됩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는 미래의 일이 아닌 완성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그리스도인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경험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예수님의 삶을 모방하는 ‘제자도’의 모습입니다.
33-34절
명예는 한 개인이 스스로 주장하는 가치에 대해 사회적 집단이 그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가치평가입니다. 명예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1) 선천적 명예입니다. 가문, 혈통, 성별, 출생지 등에 의해 자동으로 부여되는 명예입니다. “어느 집안 자식인가”가 그사람의 기본 가치를 결정했습니다. 사도 바울 자신을 이스라엘 족속, 베냐민 지파, 바리세파라는 꼬리표를 붙이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어디에 ㄴ내놓아도 손색없고 자랑할 만한 수식어라는 거죠. 우리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부모님이 어떤 일을 하시는지, 자신의 출생지가 어디인지, 어떤 집에서 사는지 이 모든 것은 선천적 명예를 대변하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 (2) 획득적 명예도 있습니다. 개인의 능력, 군사적 업적, 자선 활동, 혹은 ‘도전과 응전’의 과정을 통해 사회적으로 쟁취한 명예입니다. 여기서 도전과 응전이란, 한 사람이 상대방의 명예를 위협하는 말이나 행동을 뜻합니다. 구체적인 형태로는 상쇄, 수용 거부입니다. 상쇄는 상대의 질문을 더 어려운 질문으로 되받아치거나, 상대를 역으로 당황하게 만들어 도전을 무력화시킵니다. 수용 거부는 상대가 나에게 도전을 던질 자격(사회적 지위)이 없음을 공표함으로써 상대를 무시합니다. 그러니까 상대의 도전에 침묵하지 않고 되받아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만약 패배했을 경우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시를 당하고 체면이 깎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굴욕에 끝나지 않습니다. 그와 관련된 가족, 지인들마저 그를 외면합니다. 그러므로 수치는 사회적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이런 당시 문화를 고려할 때. 제자들끼리 서로 서열을 가리기 위해 논쟁이 일어난 것은 그 문화에서 일상적이면서 당연한 일입니다. 일상적이라 함은 그들의 문화였기 때문이고, 당연한 일이라 함은 그 논쟁의 결과에 따라 후에 자신의 미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을 그저 그들이 바라던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정치적-메시아로 보았기 떄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꼐서 왕으로 등극했을 때, 제자들 자신들에게도 한 자리씩 줄 기대를 했던 것이었습니다. 제자들 속내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모습이 아닌 자신의 이익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제자들은 각자 자기의 명예를 위해 서로 논쟁이 일어났었습니다. 제자들의 머릿속에는 온통 자신의 성공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성공의 기준은 높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을 부리는 것입니다.
35절
이것은 우리 나라 문화와 닮아 있습니다. 우리 문화 역시 유교 문화입니다. 다시 말하면, 수직적 관계 문화입니다. 유교 문화가 강해서 나이가 중요하고, 이로 파생하는 서열이 강조됩니다. 오늘 한국사회, 한국교회가 섬김이 잘 안 이루어지는 데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봅니다. (1) 높은 사람이나 나이 많은 사람은 섬기기보다 대접을 받습니다. “어른이니까 대접받아야 하고, 아랫사람이니까 섬겨야 한다”는 상호 의무적 위계가 잡힙니다. (2) 윗사람이 궃은 일을 하는 것은 질서에 질서에 어긋나거나 모양이 빠지는 일로 여깁니다. (3) 나도 젊었을 때 고생했으니 이제는 아랫사람이 할 차례다. 이런 유교적 문화가 한국 사회에 강하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뭐 안 그렇겠습니까? 학교에서나 교회에서 모두 이런 경향이 있을 것 같습니다. 내가 이걸 또 해야 하나 싶은 마음들이죠, 이 정도 학년, 이정도 했으면 밑에 학년들이 알아서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 때는 그러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합니까? 바로 명예입니다. 학교에서는 맨 뒷자리를 차지하려고 합니다. 학교에서 밥 먹을 때면 새치기를 해서 앞쪽으로 위치합니다. 그것이 그들이 가진 높은 자리, 명예, 힘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제자들 역시 이와 같습니다. 그들에게 서열을 가리는 것은 결국 명예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정치적-메시아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햐면 이전부터 병을 고치거나 귀신을 쫓아 내거나, 기적을 베푸시는 모습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왕이 되신다면 우리도 덕 좀 보지 않겠느냐는 게 그들의 계산입니다.
36-37절
이것이 예수님의 눈에는 석연치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서열을 통해 명예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제자들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한 어린 아이를 데려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말로만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에게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담긴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런 어린 아이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꼐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섬김입니다.
사실 이 섬김은 우리를 구원하신 사건입니다. 명예와 수치의 관점에서 십자가형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길목에 세워져 범죄자의 수치를 공적으로 전시하여 그를 사회적 관계망에서 완전히 도려내는 과정이었습니다. 옷이 볏겨진 채 매달리는 것은 성적, 인격적 수치심을 극대화하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수치를 당하는 게 무서워서, 사회에서 왕따 당하고, 외톨이 신세로 전락하는 게 두려워서 예수님을 배신하고 떠났던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습니까? 하늘보좌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자신의 명예도, 편안도 다 버리고 우리에게 찾아오셔서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수치를 무효화 시키셨습니다. 막 10:44-4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낮아진다는 것은 결코 명예를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명예를 높이는 것입니다. 자신의 강함을 보이기 위해 운동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으로 사람의 강인함이 나타나는 게 아닙니다. 진짜 중요한 건 속사람, 내면의 모습입니다.
대접 받는 자리에 있습니까? 그건 여러분의 영혼을 갉아 먹게 하는 위험 요소일 수도 있습니다. 그 자리에 익숙해지면 안 됩니다. 그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해주는 대접을 당연시 여겨서 안 됩니다. 그 자리를 벗어나 섬기는 자리로 가십시오. 그것이 내 영혼을 지키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하려 합니다. 전도사가 무슨 돈이 있어서 밥 사냐, 나보다 나이 어린 교사들 있는데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이런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하려 합니다. 그것이 익숙해지면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할 수도 있고, 섬길 줄 모르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