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엣 것을 찾으라

예수의 죽음과 부활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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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본문 해설

Colossians 3:1–3 NKRV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
이 서신은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던 주후 60- 62년경에 쓴 편지다. 당시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세운 교회가 아니라 그에게 복음을 들었던 에바브라가 세운 교회였다.
에바브라는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찾아왔다. 그는 골로새 교회가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 있으나 교회에 침투한 이단사상에 대해 보고하며 도움을 청했고 바울이 이에 대한 답장으로 쓴 것이 골로새서다.
당시 골로새 교회에 침투한 이단은 뚜렷한 한 가지 사상을 가진 이단이 아니라 여러 요소들이 혼합된 절충주의적 이단이었다.
그들은 구약의 율법을 따라 할례를 행하고 절기와 안식일, 음식에 관한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육체는 악하고 영은 선하다고 보았다.
그들은 인간이 구원받기 위해서는 특별한 신비한 지식, 곧 영지가 필요하다고 강조를 했는데 이것은 초기 영주주의 이단의 주장과 매우 흡사하였다.
또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여러 중간 존재, 곧 천사들이 있으며 그것을 숭배하고 환상을 좇아야 한다고 믿었다.
또한 그들은 엄격한 금욕주의 실천을 경건의 상징으로 여겼다.
이러한 신학적 혼란을 해결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는 논리로 응답하였다(골 2:9-10, 15).
이는 곧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만물의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우주적 교회 머리심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교리적 가르침에 이어서 신자가 어떻게 현실을 살아내야지만 이런 거짓된 가르침을 벗어나 참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해 실제적 교훈을 주고 있다.

II. 위의 것을 찾으라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신자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영적 생명을 현재적으로 누리면서 살아가는 길에 대해 교훈한다.

A. 신자의 정체성

첫째로, 신자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한다.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자이다.”(골 3:1)
따라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이라는 표현은 가정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진술로써 “너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이니” 라는 뜻이다(골 3:1) .
우리가 이전에 가졌던 자연인의 위치에서는 그 영혼이 허물과 죄 때문에 죽어있는 상태였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죄를 죽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령한 생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던 자들이었다.
그런데 예수를 구주로 믿고 거듭나는 순간에 예수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다시 살아나는 영혼의 부활을 누리게 하셨다.
그 부활은 곧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영혼에 새롭게 분여된 하나님의 생명, 곧 성령의 은혜였다.
이로써 신자인 우리는 이전에 없었던 특별한 자원을 얻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하늘 자원으로서 곧 영혼의 생명이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삶을 살아가게 하는 생명이다. 그런데 그것이 다른 사물과의 관계를 통하여 나타날 때는 사랑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신자 영혼 안에 있는 생명과 사랑은 서로 다른 두 가지가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관계다.
그런데 이 영적 생명과 사랑은 그 기원이 하나님이지만 그의 아들이신 성자를 통하여 주어졌기 때문에 예수의 생명이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1:4, 고후 4:10) 또 그것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이기에 그리스의 은혜라고도 부른다(고후 13:13).
사도 바울에게 신자는 누구든지 영적으로 허물과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과거를 지닌 자이다.
그런데 신자는 예수를 믿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영적 생명을 부여받아 다시 살아난 사람이다.
이로써 신자는 이전에 거듭나지 못한 자연인이던 시절에는 분명히 인식할 수 없거나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욕망을 갖게 된 사람이다.
그 새로운 욕망은 다름이 아닌 영혼의 양식인 진리에 대한 갈망이다. 허물과 죄로 죽었을 때는 우리가 육체의 욕망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거듭난 후에는 영혼의 욕망도 갖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살면서 진리를 통하여 그분의 영적 생명과 사랑을 충만하게 누리려는 욕망이다.
영적 생명과 사랑이 본질적으로 땅에 있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땅엣 것”이 아니라 “위엣 것”이며 육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영혼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서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신령한 것”이다.
14조원을 가진 어느 재산가의 자살,
이 사람이 누구냐면은 넥슨의 김정주 회장입니다. 54세 카이스트 출신인데 서울대학교하고 카이스트 출신인데 54세의 나이로 미국에서 혼자 쓸쓸하게 자살해요. 그리고 유산은 이제 아내와 그다음에 딸이 둘이 있는데, 2004년생, 2002년생 그런데 걔네들한테로 갔죠. 그거 보고 인제 인터넷에서 많은 네티즌들이 그러더라고. 아이씨 나 같으면 14조 원 있으면 절대 안 죽는데 왜 죽냐 왜 죽냐 그거 가지고 쓰면은 얼마나 재밌는데 왜 죽냐 그런 사람들은 이제 김정주 회장이 회장으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었던 갈등과 고민이 얼마나 컸나 하는 걸 보여주는 거죠.
내가 내수동교회에 있었어요. 전도사하고 고등부 전도사를 한 합쳐서 한 8년 동안 했는데 레스토드 바로 뒤에 회장 집이 하나 있었어요. 그런데 얼마나 마당이 넓은지 마당에 농구 코트를 시커먼 개도 몇 마리 있고 선글라스 쓴 경호원들도 여러 명이 있었어요. 그런데 신문에 났는데 대림의 이준영 회장이 그 대림 그룹은 IMF를 안 겪었어요. 그래서 IMF 나기 전에 구조조정을 다 끝냈어요. 그런 사람들은 진짜 천재적인 사람들이지. 경제의 흐름을 읽었으니까.
그런데 신문에 뭐라고 나왔냐면은 혼자서 부엌칼을 가지고 자기의 가슴과 배를 수없이 찌르다가 결국은 발견되어 가지고 병원에 옮겼는데 죽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상당히 외로우면 부엌칼을 가지고 자기의 가슴하고 배를 수없이 찌르고 자해를 했더만
그러니까 그런데 설교자가 인문학적 지식이 필요하다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은 그런 인간의 허무함과 어떤 행렬하는 인간으로서의 한계 같은 것들은 신자나 불신자나 동일하게 느끼는 거거든. 그런데 이제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이 신자와 불신자가 다르지. 그런 것들을 충분히 신자와 불신자가 공감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해주는 거죠. 그런 거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인문학적인 소통이라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의 삶은 부유한 아버지의 집을 떠나 방탕한 후에 극도로 가난하게 된 탕자와 같다. 그가 비참한 처지에 이르게 된 것은 자원의 결핍 때문이다(눅 15:16-17).
당장은 먹을 음식과 입고 마실 음료가 묵을 수 있는 집과 같은 지상의 자원이 없었기 때문이고 이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아버지에게 죄를 지어 천상의 자원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이다(눅 15:18).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인간들 사이의 치열한 경쟁은 대부분 지상의 자원들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뺏을 수 있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나로부터 빼앗아 갈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을 한없이 비참하고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하늘의 자원의 결핍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없을 때 지상의 자원과는 달리 우리는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서 빼앗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각 사람인 신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아서 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그것을 하나님이 주시지 않고는 받을 사람이 없고 받은 사람은 누구로부터 그것을 빼앗길 수가 없다.

B. 위엣 것에 것을 찾으라

거듭난 신자의 최초의 영적 생명은 한 번에 오직 하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주어진다.
그러나 신자에게 있어서 구원받은 이후에 주어지는 영적으로 충만한 상태는 그의 성화의 과정을 통해서 주어진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신자라는 사실이 저절로 성명 충만한 삶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은 풍성한 영적 삶에 대한 갈망과 믿음, 곧 자기 안에 새롭게 심겨진 하나님의 생명의 본성에 적합한 마음과 실천을 통해 주어진다.
*가시 덤불에 뿌려진 씨앗의 비유.
여기서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바라라”고 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있다.
여기서 “위엣 것”과 “땅엣 것”의 대비는 하나님과 세상, 육체와 영혼, 하늘자원과 지상자원, 신령한 것과 세속적인 것의 대비를 보여준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서 구원을 받기 전까지는 “위엣 것”이 필요한지를 몰랐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우리는 하늘 자원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오직 지상의 자원으로 육체만을 만족하게 하면 충분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것이 사실이었으면 우리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의 곤고함을 경험하였다.
또한 우리는 정신의 큰 고통을 통하여 우리 안에는 세상 자원들은 결코 채워질 수 없는 또 다른 부분이 있음을 발견하고 하나님께로 돌이켰다.
여기서 “생각하다”라는 단어는 단순히 의식하는 것이 아니라 열망을 품고 애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거듭난 신자는 자신의 영혼의 고향이 세상이 아니라 하늘나라임을 깨닫고 경험한 사람이다.
우리는 매 순간 만약 우리 영혼을 살아있게 하시는 예수의 생명이 없다면 결코 행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음을 깨닫는다.
우리가 은혜에서 미끄러져 곤고하던 때를 생각해 보라. 세상의 자원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그것이 우리의 영혼을 살아있게 하지 못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은혜에서 미끄러진 것도 모두 우리의 영혼에 공급되는 하늘의 생명과 사랑의 은혜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더욱이 우리가 매순간 말씀과 기도를 통해 공급하신 신령한 하늘 자원, 곧 “위엣 것”을 향한 갈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미끄러진 채 곤고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마귀는 우리를 은혜의 수단인 말씀과 기도와 성례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매순간 하늘과 신령한 자원을 주시는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생각으로 우리의 심령을 가득 채우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하늘에 있는 신령한 것보다 더 많이 사랑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에 관하여 17세기 영국의 경건한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1616-1683)은 자신이 심혈을 기울여 쓴 최후 유작인 『그리스도 영광에 관한 묵상과 강론』의 서문에서 말하였다.
“어떤 이들은 하늘나라에 가서 그리스도 영광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정작 이 땅에서 있는 동안에는 복음에 계시된 그분의 영광을 찾으려 하지 않고 그 영광을 묵상한 일에서 아무런 기쁨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은 망령되고 신성모독적인 상상입니다.”
진정으로 생각하는 것은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자꾸 생각이 되는 것이다.
깊은 사랑에 빠진 연인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상대방을 생각하기 위해 애써서 노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항할 수 없도록 저절로 수시로 생각이 난다.
그냥 생각만 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움과 보고 싶은 마음을 동반하여 생각이 나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들에 대한 생각은 그 연인에 대한 생각 아래에 배치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제일 많이 묵상하기를 바라신다.
왜냐하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성품이 계시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 안에서 크게 영광을 받으신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신자의 마음의 성향은 위엣 것, 곧 하늘에 속한 신령한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영광과 자비, 공유와 신실하심, 그의 영원하심과 불변하심을 연모하게 된다.
아아, 우리의 하루 24시간 중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시간은 얼마나 짧은가? 아니 그 남은 짧은 시간조차도 그분의 고난과 영광을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채 흘려보내는 날이 얼마나 많은가?
마치 오래전에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나오는 좀비들로 변한 뱃사람들처럼 그렇게 마치 영혼이 없는 존재처럼 살아가던 날이 얼마나 많았던가?
우리의 사역이 사람의 육체라면 그리스도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그 지체들을 살아있게 하는 핏줄과 같다.
그 핏줄을 통해 영양분이 전달되고 온몸의 노폐물을 회수하고 정화함으로써 살아있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거칠고 메마른 심령에서 어떻게 신령한 설교가 나올 수가 있으며 땅엣 것들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던 사람이 어떻게 갑자기 위엣 것들에 대해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강론을 할 수 있겠는가?
잠자리에 들기 전 하루를 뒤돌아보자. 정직히 말해서 단 10분이라도 오직 정신의 시선이 그리스도께 고정된 적이 없지 않는가?
그러면 그 많은 시간 동안 나는 무엇을 생각하면서 하루를 보냈나? 스스로 물어본다.
우리는 부끄럽게도 대부분의 시간들을 별 가치 없는 쓸데없는 것들에 대한 상념으로 채우며 흘려 보냈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하루를 보내고는 공허한 마음으로 잠을 청하는 데 익숙해져 있으니 내 영혼이 얼마나 더 많이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고 상처를 받아야 돌이킬 것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고 사랑해 주신 하나님을 인색하리만치 아주 조금만 생각한다.
반면에 끊임없이 고통을 주고 영혼을 버림받게 한 세상은 날이 갈수록 아주 많이 생각하니 이 무슨 짓궂은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내가 얼마나 더 많이 회개하여야 그리스도와 위엣 것에 대한 마땅한 생각과 사랑을 하게 될 것인가?
언제나 이 착살스러운 사랑이 언제나 내게서 떠나가 오직 순전한 마음으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만을 생각할 것인가?

C. 감춰진 그리스도의 생명

셋째로,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그리스도의 생명이다.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라”(골 3:3).
여기서 우리는 먼저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복음을 믿는 순간 우리는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
그럼으로써 나의 모든 죄를 나를 대신해서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와 함께 그 죄에 대한 형벌에 대한 값도 치러졌다.
그렇게 우리가 처음으로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은 경험을 통해서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며 그분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나 또한 그 부활에 동참하여 다시 살아날 약속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고 하나님 안에 감춰진 영적 생명을 우리의 영혼에 분여받게 되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춰진 생명”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표현은 곧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영적 연합을 가리킨다.
우리가 예수 죽음에 현재적으로 동참하는 것도 그와 함께 그의 부활을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것도 모두 우리에게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성경 본문은 왜 그리스도의 생명이 하나님 안에 감춰졌다고 말하는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
여기서 “하나님 안에 감춰졌다”는 말은 그 영적 생명이 신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하나님 안에 감춰졌으니, 하나님 자신의 의지가 아니고는 그것이 결코 드러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 영적 생명의 나타남과 사라짐은 신자의 육체적 감각이나 이성의 판단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신령한 것이며 그것은 오직 하늘의 신령한 지식을 전달하시는 성령에 의해서만 파악될 수 있는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비록 신자로서 이러한 사실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영적 생명이 어떤 때는 현실적으로 충만하게 나타나고 또 어떤 때는 거의 없는 것처럼 사라지기도 하는 이유에 대하여 잘 알고 있지 못하다.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생명으로 충만하던 신자가 어느 순간 그 생명의 은혜를 모두 상실하고 메마른 심정이 되어버린다.
자기도 모르게 번성해진 죄로 인하여 마음이 더럽혀지고 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만을 고통 속에서 깨닫게 된다.
또한 어느 순간에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죄의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될 때 사라졌던 영적 생명이 자신 안에 다시 충만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맹인이었다가 어느 순간 기적적으로 눈 뜬 사람처럼 영적 생명이 새롭게 주어졌다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어떻게 자신에게 새롭게 일어나서 영적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였는지는 모르는 것과 같다.
여기서 “너희 생명”이라는 것은 곧 “우리 안에 있는 예수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거듭난 신자에게는 이미 이 영적 생명이 주어졌고 어떠한 경우에도 그것이 그들 안에서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너희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생명의 근원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그렇게 주어진 영적 생명을 누릴 뿐이다.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가? 우리가 직면한 현실을 헤쳐나감에 있어 자주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죄가 많은 이 세상에 함께 살고 있는 한, 언제나 고통스러운 현실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으시고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 죽으셨으며 또한 그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였음을 믿는다.
그래서 우리가 다시 예수의 영적 생명으로 충만해질 때 우리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을 넉넉히 이길 것을 믿는다.
문제는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는 은혜의 힘이 우리 안에서 모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의 과거를 돌아볼 때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다.
지금보다도 신앙에 대한 지식이 부족할 때조차도 지금 마주하고 있는 현실보다 더 어렵고 힘든 현실을 헤쳐나가지 않았는가?
철저한 경건 생활이 느슨해지고, 이슬비처럼 내리는 죄의 유혹에 마음을 내어줄 때, 우리는 엄연한 현실을 이겨낼 영적인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하여 마치 머리카락을 모두 잘린 채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는 삼손과 같은 처지가 된다(삿 16:19).
그런 영혼의 상태에서 넉넉히 감당할 현실이 어디 있겠으며 어떻게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온갖 핑계를 대고 자신에 게으른 영증의 삶에 대해 그럴 듯한 변명으로써 자신을 속이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그 결과, 장마철 소용돌이 치는 물결 속에서 축대의 흙이 서서히 무너내려지는 것처럼 견고해야 하는 우리의 삶은 어느 순간 급속히 무너뜨려가고 도저히 스스로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헤쳐나갈 힘이 하나도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는 하나님과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제공하는 세상에 대해 막연한 앙심을 품는다. 그렇게 마음을 먹을 때 그의 심령은 황급히 돌이켜 바위처럼 굳어지게 된다.
그리고는 한 줌 남은 기도의 은혜, 하나님에 대한 사랑마저 사라지고 만다. 그리하여 이윽고 포괄적인 죄의 지배 아래에 떨어진다.
그때 우리의 영혼은 더없이 곤고해지고, 매일의 삶은 제 갈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아아, 언제까지나 이런 삶을 살아갈 것인가? 그리고 이런 삶을 다 살고 난 후에 얻을 것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껍데기만 나온 신앙에 어떤 영적 생명도 느껴지지 않는 말라깽이가 된 경건의 모양만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비참한 자신의 영혼을 위해 울지 않는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밖에 더 이상 믿을 구석이 전혀 없는 줄 아직도 모르는 것인가?
장례식장에서 있었던 이야기 “요 녀석들 아주 울어라. 네 아비가 죽었다.”
그런데 실제 있었던 일인데 우리 친척이 돌아가셨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자식들이 너무 생글생글 웃으면서 조문객들을 맞이하는 거야. 그러니까 시골에서 올라온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보고 야단했지. 그 자식들 등짝을 막 손으로 쫙 때리면서 이 녀석들하고 좀 울어라. 니 애비가 죽은 날이다.
그러니까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냐면 하나님의 마음과 공감하지 못하는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공유받지 못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는 신앙생활, 봉사, 헌신, 선교 이런 모든 것들이 너무 뿌리 잘린 식물과 같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지.
금방 말라 비틀어지고 불쌍한 우리 영혼은 거듭남과 함께 주어진 충만했던 영적 생명을 모두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슬퍼할 줄 모르는 그런 마음으로 어찌 하나님의 품을 멀리 떠나 가엾은 교인들의 영혼을 위하여 눈물로 기도해 줄 수 있겠는가.

III. 적용과 결론,

세월이 아무리 많이 흐르고 세상이 한없이 많이 변해도 목회에 있어서 불변하는 원칙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위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목회자는 결코 다른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울 수 없다는 것이다.
한때 우리에게 이 목회의 길을 가게 만든 동기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이 아니었던가. 사랑이 갈 길을 잃어버린 채 방황하고 있는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게 하여 세상의 직업을 버리고 목회의 길을 가게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우리의 어눌한 설교를 통해 방황하던 영혼 하나가 구원을 받으면 온 천하를 다 얻은 것처럼 기뻐하였고 그날이 인생의 마지막이어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노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쌍한 자의 영혼을 위하여 한참을 울고 나면 가엾은 양무리들의 영혼을 위하여 통곡할 수 있었다.
그 많은 슬픔과 눈물은 거룩한 기쁨과 공존하였으니, 많은 눈물과 통곡 속에서 나의 목회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
언제나 하나님의 동행하심이 느껴졌고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의 기적적인 은혜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셨다.
그래서 우리의 목회는 하나님과의 대화였고 축복에 대한 간증의 연속이었다.
모든 일은 목회자인 우리의 심령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의 임재를 잃어버리자 그 모든 목회의 축복들도 함께 사라졌다.
내 영혼이 갈 길을 잃어버리자. 목회의 모든 활동은 오직 형식과 의무로 흐르게 되었고 그것은 마치 물길은 있으나 물을 흐리지 않는 무수천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자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다시 처음 사랑으로 돌아가자. 처음 소명으로 돌아가자. 피를 토하는 열렬한 거룩한 사모함이 있던 그 시절로 돌아가자.
그리스도 함께 살리심을 얻었으니 위엣 것을 바라라. 신령한 축복에 대한 그리움으로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자. 그리고 그 마음으로 나 자신의 영혼과 잃어버린 양무들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라. 마침내 하나님께서 나의 목회에 은총의 단비를 내리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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