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의 결정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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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미덕 중 하나는 바로 ‘나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거나, 내 감정을 상하게 하는 사람과는 빠르게 ‘손절’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삶의 방식으로 여겨집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아주 정당하고 합리적인 방어죠. 요즘은 스마트폰 버튼 하나만 누르면 나를 피곤하게 하는 사람을 내 세상에서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습니다. 용서하는 것보다 차단하고 관계를 끊는 것이 더 편한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오늘, 우리의 이런 모습과 정면으로 부딪히는 아주 낯선 사건 하나를 보여줍니다.
바로 상대방이 나를 죽음으로 몰아가는데도 그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스데반은 평신도 사역자이자 위대한 복음의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일곱 집사중 한 사람으로 성령이 충만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자입니다. 그는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행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유대 지도자들이 스데반을 유대인의 공회에 세웁니다. 그리고 거짓 증언자들 세워 그가 하나님을 모독했다며 억울한 모함을 쏟아냈기 시작했죠. 만약 우리같으면 이런 거짓 모함에 속이 뒤집히고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스데반은 차분했습니다. 그리고 차분한 스데반은 모두가 모인 곳에서 성경의 역사를 꿰뚫으며, 창조주이시며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그 자리에서 담대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이어서 그는 유대 지도자들, 그들의 죄를 고발합니다. 육신의 할례만 받았을 뿐 마음은 완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을 거스르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예언자들을 였던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끝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살인자들이 바로 당신들이라고 지적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복음을 전하며, 회개를 촉구한 것입니다!
사실 진짜 신성모독 죄로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들은 스데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유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오히려 예수를 전하며 그들이 회개의 기회를 얻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이제 자신의 진짜 민낯을 들킨 유대 당국자들은 어떻게 반응했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찔림을 당한 그들은 스데반을 향해 ‘이를 갈았습니다.’ 돌이켜 회개하지 않고 오히려 스데반을 향한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증오를 뿜어냅니다. 재판장은 순식간에 광란에 사로잡힌 폭도들의 무자비한 난동의 장소로 변하기 시작했죠.
이 두려운 상황 속에서, 스데반은 사람들의 살기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우편에 서 계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 소리를 들은 유대 지도자와 사람들은 더욱더 분노와 증오로 가득하여 폭도로 변합니다. 그들은 귀를 막고 일제히 달려들어, 그를 성 밖으로 끌어내 돌로 치기 시작했습니다.
사방에서 묵직한 돌들이 날아와 스데반을 칩니다. 돌로 몸을 찢는 그 고통 속에서, 스데반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렇게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깊은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스데반을 통해 놀라운 기적과 표적을 행하신 주님은 얼마든지 스데반을 살리실 수 있으신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목숨 바쳐 당신을 사랑한 스데반을 이토록 처절하게 죽어가도록 내버려두셨나요? 왜 가만히 지켜보고만 계셨던 걸까요? 사실 그런것이 아니었습니다.
현실은 폭도들에게 둘러싸인 참혹한 피투성이의 현장이었지만, 부활의 주님은 스데반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스데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이미 그는 부활의 영광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7:55–56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스데반이 본 예수님은 그저 가만히 계신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 ‘서서’ 스데반을 위해 간구하십니다.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영을 부어 주십니다! 왜요? 그가 끝까지 용서하고 승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고 계셨던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4절은 말씀합니다.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친히 예수님은 서서 스데반을 위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서 간구하십니다! 도우십니다! 그가 부활의 은혜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분노하거나 증오하지 않고 용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스데반에게 십자가 위에서 고백하신 예수님의 기도를 동일하게 허락하셨습니다.
사도행전 7: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는 이 위대한 기도는, 인간의 정신력이나 결단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전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신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현장에 스데반을 홀로 두지 않으셨습니다. 보좌 우편에 ‘서서’ 그가 용서하며 승리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돕고 계셨던 것입니다. 결국 스데반은 그 이름의 뜻대로 의의 ‘면류관’을 받고 부활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스데반의 사역이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 죽음의 현장에는 ‘사울’이라는 청년이 서 있었습니다. 주님은 스데반의 죽음을 통해 사울을 꺾으셨고, 그를 위대한 복음 전도자 바울로 부활시키셨습니다. 부활신앙은 이처럼 사망을 이기는 능력이자, 영원한 용서의 결정체입니다.
사랑하는 행복한 청년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이 보좌 우편에 서서 우리를 위하여 친히 돕고 간구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부활의 자녀로 삼아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요 우리가 매일 발을 딛고 살아가는 캠퍼스, 직장, 교회 안에는 여전히 우리를 향해 보이지 않는 돌, 즉 비방과 험담, 무례함과 상처를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럴 때 어떻게 합니까? 보통은 같이 돌을 들어 던지거나, 그것도 피곤하면 즉각적으로 관계를 차단해 버립니다. 앞서 말씀드린 완벽한 ‘손절’입니다. 세상은 그것이 나를 지키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어린이들을 위한 큰 축제를 준비했을 때, 아이들이 뛰어놀며 기뻐할 생각에 밤을 새워가며 행사 부스를 기획하고, 예쁜 안내 배너까지 직접 디자인하며 최선을 다해 헌신하고 있는데, 함께 일하는 성도님이나 혹은 동역자가 지나가며 이렇게 툭 던진다면 어떨까요? "야, 이거 애들이 진짜 좋아하겠어? 동선도 엉망이고... 솔직히 너무 시간 낭비하는 거 아니야?"
그 순간, 가슴에 차가운 돌이 쾅 하고 날아와 박힐 것입니다. 속이 뒤집어질거에요. 아마 속으로 '네가 한 게 뭔데 나한테 이래?' 당장이라도 똑같이 날카로운 말로 쏘아붙이고, 기획팀 단톡방을 나가버리고, 다시는 저 사람과 상종하지 않겠다고 속으로 '손절'을 다짐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세상은 그것이 내 멘탈을 지키는 가장 스마트한 길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부활 생명을 가진 우리는 그 순간 멈추어야 합니다. 같이 돌을 들어 던지거나 관계의 차단 버튼을 누르기 전에,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잠시 아무도 없는 화장실이나 아무도 없는 예배실에서 조용히 기도의 자리로 들어가야합니다.
부활 생명을 가진 우리의 적용은 달라야 합니다. 나를 찌르는 사람을 당장 내 힘으로 온전히 용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같이 돌을 들거나 차단 버튼을 누르기 전에, 잠시 멈추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저는 이것을 ‘영적 여백’ 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빼곡하게 마음에 가득하면 여유가 없습니다. 여백이 없죠.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과 은혜로 부활생명으로 충만할 때, 믿음이 충만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만족하기에 영혼과 마음에 여백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인해 여유가 생겨나는 것이죠. 우리가 교과서 책으로 공부하면 여백이 남아있잖아요. 거기에 뭘 끄적이고 장난도 치고 그러잖아요? 그것처럼 그 여백에 하나님께 기도를 써보는 것이죠.
세상의 손절은 영적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하는 이기적이고 치사한 행동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분노를 쓰는 것보다 부활생명으로 거기에 하나님께 기도를 쓰는거에요.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의 도우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자신을 사람들을 위해서 오히려 하나님께 부탁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23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예수님은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부탁했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저들에 죄를 사해달라고,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한다고, 그렇게 부탁하셨습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의 도우심으로 이 짧은 영적 여백의 시간이, 바로 부활의 능력이 자신의 삶으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을 용서할 수있게 된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3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골로새서 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멸시와 조롱, 십자가와 무덤을 이미 이기신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기에, 우리는 그 힘을 공급받아 넉넉히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나아간다면,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주실 것입니다.
오늘 결단합시다. 억울한 상황에 분노가 치밀어오르고, 상대방의 말들에 화가나며, 나를 깎아내리는 관계 속에서 더 이상 분노의 지배를 받지 않기로 결단합시다.
그동안 우리는 숱하게 "용서합시다, 사랑합시다"라고 다짐했지만, 막상 내일 아침 다시 날아오는 돌무더기 앞에서는 무너질 수있습니다. 어쩌면 내 안에 그 상처를 흡수할 '영적인 자본' 부활신앙이 없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께 아주 새롭고 구체적인 실천을 하나 제안하고자 합니다. 바로 단기 '기도 통장'을 개설하는 것입니다.
나를 화나게 하고 상처를 주는 직장 동료, 학교 선후배, 교회 지인이 있습니까? 손절이라는 방어막 뒤로 숨어버리는 대신, 속에서 욱하고 화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분노를 쏟아내는 대신 그 마음의 크기만큼 그 사랑을 향한 축복의 기도를 저축해 보십시오. 나를 찌르는 그 사람의 영혼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주님께 짧게 기도하며 영적인 잔고를 채워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축복의 기도를 쌓아도 상관 없습니다.
이렇게 기도의 잔고가 넉넉히 쌓이면, 결정적으로 억울한 순간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메마른 감정이 아니라 두둑한 영적 통장에서 '용서'라는 은혜를 여유 있게 인출해 쓸 수 있게 됩니다.
에베소서 4장 32절 에서 말합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우리의 용서는 나의 얄팍한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멸시와 조롱, 십자가와 무덤을 이미 이기신 주님께서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기에, 우리는 그 부활 생명을 기도로 공급받아 넉넉히 인내하며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용서만이 내가 진정으로 살고, 치유받으며, 이기는 길입니다. 누군가를 끊어내는 것이 나를 지키는 것 같아보여도 결국에는 혼자 남습니다. 그러나 ‘용서’라는 씨앗을 통해서 상처받은 나의 영혼도, 죽어가던 상대방의 영혼도 부활의 꽃으로 피어납니다. 오늘 기도 은행에 첫 입금을 한번 시작해보세요. 이 영적 여백에 기도를 써보는 연습해 보십시오. 이를 통해 부활과 용서의 능력이 여러분의 모든 삶의 현장에 역동적으로 흘러가기를 축복합니다. 그리하여 세상 속에서 부활 생명으로 용서의 결정체를 이루는 하나님 나라 행복한 청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
[합심 기도]
부활 생명을 주신 하나님! 영적 여백에 써내려간 기도를 통해 비어있는 나의 영적 잔고를 채우길 원합니다. 그래서 손절이라는 세상의 방식 대신 부활 생명으로 ‘용서’라는 은혜를 베풀 수 있게 하옵소서!
[찬양] - 오늘 나는(내가 먼저 손 내밀지 못하고)
[마무리 기도]
[축도]
지금은 우리를 부활 생명으로 이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를 한 없이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부활 신앙으로 인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능력이 오늘 매일의 기도와 삶 속에서 부활신앙을 공급받아 용서의 능력을 흐르게 하기를 결단하는 행복한 청년들의 삶과 가정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 지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