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읽는 주기도문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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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는 주기도문_08-1_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1 ~p262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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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 제 8장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태복음 6장 11절
I. 들어가는 말.
I. 들어가는 말.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네 번째 기도 제목과 만나게 됩니다. 앞서 살펴본 세 가지 간구의 제목. 곧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이 땅에 실현되는 것. 하나님의 뜻이이 땅에 성취되는 것은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생이 지향해야 할 목적을 보여줍니다. 로마서 1장 5절. 그리고 그것은 늘 기도하시던 예수 그리스도의 소원일뿐 아니라 우리의 간절한 소원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주기도문을 가지고 눈물로 기도할 수 있는 신자는 가장 탁월한 영적 상태에 도달한 사람이라고 말씀드리는 이유도 그것입니다.
(01:03) 기도는 홀로 가지 않습니다. 기도는 삶을 동반할 때 지속적이고 간절해질 수 있으며 삶은 기도에 의하여 지탱될 때 꿋꿋하게 경건할 수 있습니다. 이제껏 살펴본 주기도문의 전반부 내용들이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 것이라고 한다면 이제부터 살펴보게 될 네 번째에서 일곱 번째까지의네 가지 간구는이 땅에 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필요로 하는 것들을 간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주기도문 속에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하나님 앞에 간구하도록 가르쳐 주셨습니다.이 위대한 가르침을 해설하기 전에 이것은 우리에게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02:00) 첫째로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얼마나 의존적인 존재인지를 보여줍니다. 인간은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아서 세상에서 최고의 지위를 가진 피드물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육신을 위한 양식의 공급도 죄를 용서받는 것도 시험에 들지 않도록 지켜 주시는 것도 악에서 구출을 받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이네 이네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받지 못한 인간이 얼마나 불행하고 뒤차해지는지를 생각할 때이 간구의 제목들은 인간으로 하여금 지극히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세 가지 간구 곧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 하나님의 뜻이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살아가기 위한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03:06)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공급해 주시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보호해 주시며 악에서 건져 주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위하여 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이네 가지 강구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필요들입니다.이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뜻의 지상적 성취를 위하여 살아가는데 있어야 하는 것들입니다.
II. 양식을 구하는 기도.
II. 양식을 구하는 기도.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 육체의 현실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한 첫 번째 기도 제목이 바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었고 누가복음 11장 3절 우리말 성경에서 양식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아르토스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던 빵을 의미합니다. 본문에는 정관사가 붙어
(04:10) 있으므로 정확히 번역하면 유대인들이 주식으로 먹던 그 빵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이 단어가 우리 말 성경에는 떡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어울리지 않는 번역이며 오해의 여지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빵없이는 살 수 없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떡없이 살 수 없다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빵은 주식이었지만 우리가 연상하는 떡은 간식입니다. 그래서 두 문화의 차이를 감안하여 등가 번역을 시도한다면 아르토스는 밥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A 양식이란 무엇인가?
A 양식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네 번째 강구에 등장하는 양식이라는 단어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이에 대해 역사적으로 주석가들은 다음 여섯 가지 해석들을 내놓았습니다. (05:10)
1. 성찬의 떡.
1. 성찬의 떡.
첫째로 성찬의 떡으로 보는 견해입니다.이 해석은 암보로시우스에 의해 널리 퍼졌습니다. 그는 우리말 성경에서 일용할이라고 번역된 당시 라틴어 성경에 코디아을 후대 몇몇 사본들을 따라 수부스 딴띠아램 즉 초실체적인으로 해석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는이 간구가 육체를 위해 양식을 구하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즉 성찬 전체의 상징인 떡을 초실체적 양식이라고 본 것입니다. 신자가 성찬을 받기를 기다리는 것은 곧 그리스도를 바라며 기다리는 것이며 그 성찬은 우리의 영혼의 상처의 약으로서 제시된다고 보았습니다.
2. 그리스도 자신,
2. 그리스도 자신,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06:12) 양식은 물리적인 떡이 아니라 영적인 떡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보는이 해석은 초대 교회 때부터 오늘날까지 광범위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성경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번 자신을 하늘로부터 온 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줄이지 아니할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6장 35절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요한복음 6장 48절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요한복음 6장 50절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07:08)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인이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6장 51절. 이에 대하여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교부 티프리아누스는 자신의 책 주기도문에서 특히 요한복음 6장 51절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적으로도 이해할 수 있고 단순하게도 이해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어느 쪽이든 구원에 있어서 신적인 유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리스도 안에 있고 매일의 성찬을 구원의 양식으로서 받는 우리들은 통탄할 죄의 개입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도록이 양식이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기를 구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이신 우리의 양식이 매일 우리에게 공급되도록 구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살고 있는 우리가 그분의 거룩하게 하심과 몸으로부터 물러나지 않도록 구하는 것이다.
(08:11)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자신의 책 기도에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거하게 해달라는 의미를 가진 간구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이 말씀을 오히려 영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양식이시기 때문에이는 그리스도가 생명이고 생명이 양식이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나는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6장 35절. 그리고 앞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양식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에 따르면 바로 그분의 몸이 양식이라고 여겨지며 그래서 이것은 내 몸이니라라고 하신 것이다.
(09:03) 그러므로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영원히 거하길 구하는 것이고 그분의 몸과 분리될 수 없도록 변합하기를 구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이 해석을 따른다면 일용활 양식을 구하는네 번째 간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됩니다. 우리에게 날마다 영적인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주셔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가 주님 안에 있는 관계를 누리며 살게 하시옵소서. 어떤 의미에서 아주 은혜롭게 보이는이 해석은 초대교회 때부터 중세 초기까지 교회에서 광범위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당시에 유행하던 성경에 대한 풍유적 해석 방식을 따랐기 때문에 나온 것으로 생각됩니다.
(09:55)
3. 영적인 양식.
3. 영적인 양식.
셋째로 영적인 양식으로 보는 견해입니다.이 견해에 따르면 일용할 양식을 육체를 위한 양식으로 보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어긋날뿐만 아니라 신령한 것을 구하는 위대한 기도의 제목도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의 양식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부 오리게네스는이 견해를 따랐습니다. 그는 일용할 양식을 우리의 참된 인성이 자라는데 필요한 영적 양식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일용할 양식이라고 번역하는 단어에 에피우시온을 초실체적이라는 의미로 해석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이 간구는 그 떡 곧 초실체적인 것을 우리에게라는 번역이 됩니다.
(10:49) 또한 그는이 떡을 요한복음 6장 26절부터 27절과 연결하여 해석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기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양식을 위하여 하라.이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오리게네스는 일용할 양식을 참된 양식으로 표현하면서 참된 양식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격, 참된 인성이 자라게 하는 양식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러한 견해를 따랐습니다. 그는 자신의 산상수훈 주석에서 다음과 같은 치밀한 논리로서 일용할 양식에 대한 해석을 제시합니다.
(11:49) 첫째로는 육체의 양식이라는 입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누가복음 12장 22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마태복음 6장 33절에서 말씀하셨고 이것을 구하지 않아도 우리에게 더하시겠다고 하셨기 때문에이 입장은 지지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성만찬의 떡이라는 입장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반박합니다. 만약이 일용할 양식이 성만찬을 가리킨다면 우리는 매일 성만찬에 참여해야만이 기도에 부합하는 실천을 하는 것인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큰 죄를 짓게 된다는 것입니다.
(12:46) 그리고 어떻게 현실적으로 매일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셋째로는 따라서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인 양식으로서 우리들이 매일 묵상하고 실천해야 하는 하나님의 계명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육체에게 육적인 것들을 갈망하는 한 빵이 매일 필요하듯이 영혼도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양식으로 소생함을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오늘이라는 말은이 생에서라는 뜻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그 근거로 사도 바울이 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시편 95편 7절이라는 말씀에 나오는 오늘을 히브리서에서 오직 오늘이라 읽컫는 동안에 히브리서 3장 13절로 풀어냈던 것을 들고 있습니다.
(13:46) 이 해석을 따를 경우 본문은 오늘 우리에게 일용한 영혼의 양식을 주시옵고가 됩니다.
4. 육적인 양식.
4. 육적인 양식.
넷째로 육적인 양식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앞에 두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비해 소수였습니다. 콘스탄티노폴에서 설교하였던 경건한 동방 교부 요한 크리스토스톰은 주기도문에서 언급된 일용활 양식은 하루를 살기에 충분한 양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의 본성적 욕구를 지니셨기에 자연적 육체의 욕구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보았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이 견해를 받아들입니다.이 이 해석은 청빈의 삶을 살았던 아시의 성자 프란체스코에 의해 지지를 받았고 13세기 로마 가톨릭 안에서 대대적인 개혁 운동이 일어났던 시기에
(14:51) 수도사적인 가르침과 함께 널리 받아들여졌습니다.이 이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철저한 청빈과 금욕을 주장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서의 가르침을 문자적으로 따르려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에 의하면 우리는 매일매일 일용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하면서도 내일을 위하여 그것을 저장해 둔다든지 혹은 미래를 위해서 무엇인가 예비해 두는 행위를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들은 모두 주기도문 때문에 문에 나타난 복음의 교훈에서 벗어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탁발 수도사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졌던 인물들입니다. 13, 14세기의 수도원 운동에서도 이러한 사상이 엄격하게 고집되었습니다.
(15:42) 그래서 토지나 금전이 기부금으로 들어오는 경우에도 하루에 필요한 것 이상을 받지 않고 재산을 남겨 두지 않는다는 원칙을 고수하는 수도원들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이러한 해석 중 일부를 잘못 적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제가 전도사였던 시절에 알고 지내던 한 지체도 이렇게 주기도문을 해석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런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절대로 돈을 모으지 않았습니다. 월급을 받으면 받는 대로 다 썼습니다.은 곳에 쓴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신학생들의 학비를 내주고 사역자들의 생활비를 보태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의 주변에는 그를 칭찬하기보다는 걱정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16:32) 정작 자신이 필요한 돈은 마련하지 못해 꿇어 다니기 일수였고 꾼도는 제때에 갚지 않을 때가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지체는 하나님께서이 세상에서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기에 스스로 내일 먹고 살 일까지 대비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태도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사실이 모든 견해들은 주기도문의 양식을 구하는 강구가 의미하는 바를 벗어난 적용입니다. 만약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양식이 문자 그대로의 최소한의 떡만을 의미한다면 왜 포도주는 언급하지 않으셨을까요? 당시 유대인들에게 포도주는 떡만큼이나 필수적인 양식이었습니다. 수질이 좋지 않은 환경에서 포도주는 체내의 수분과 양분을 보충해 주기에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음료였습니다.
(17:26) 뿐만 아니라 양고기도 당시 유대인들의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음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밀가루를 구워 만든 빵에 고기를 싸먹으며 단백질을 보충했습니다. 따라서 양식을 극단적으로 생명 유지에 필수 불가결한 최소한의 음식으로 좁게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더욱이 실생활에서 일용할 양식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여 하나님께서 매일 우리에게 떡을 공급하사 우리를 배치 않게 하실 것이다. 이것을 먹으며 믿으며 사는 것이 신앙이고 이것을 못 믿고 스스로 내일 먹을 음식을 저축하는 것은 불신앙이다라고 적용하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 조건은 단지 떡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8:17)
5. 영적이고 육적인 양식.
5. 영적이고 육적인 양식.
다섯째로 영적이고 육적인 양식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우리에게 제롬이라고 알려진 교부 헤론이 무슨이 견해를 따랐습니다. 그는 일용할 양식이 초실체적인 영적인 양식인 동시에 내일을 위한 육적인 양식을 가르킨다고 해석하였습니다. 그는 우리말 성경에서 일용할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에피우시온을 라틴어로 번역할 때 수페르 수부스 산티아이라고 하였는데이 단어의 의미는 초실체적인 것입니다.이는 일용할 양식이 물질로서의 육적인 양식을 넘어서는 초실체적인 영적 양식을 뜻한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지금 전해지지 않는 성경 외의 문서인 히브리인의 복음서를 근거로이 초실체적 양식이 내일을 위한 육적 양식을 가르치기로 한다고 주장합니다.
(19:21) 아레이아의 감독이었던 교부 크로마티우스는 당대의 기독교 석학들인 암브로시우스, 에로니무스, 루피누스 등과 활발하게 서신을 주고받았던 탁월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아리우스주의에 긍휼히 반대하였으며 요한 크리스토스톰이 콘스탄틴에서 부당하게 파해를 받을 때 그를 옹호하는 편지를 서로마제국 황제 호놀리우스에게 쓰기도 하였습니다. 크로마티우스는 양식 곧 아르토스가 하루를 살아가기에 충분한 양식을 가르키는 동시에 또한 영적인 양식을 의미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늘의 양식을 공급받기에 합당하도록이 땅에서 매일의 양식을 구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6. 인간다운 삶의 조건들.
6. 인간다운 삶의 조건들.
(20:18) 여섯째로 양식은 우리가이 세상에서 인간다운 삶을 영하기 위해 필요한 총체적인 조건들을 가리킨다는 해석입니다. 저는이 해석을 좋아합니다.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우리말 성경에서 일용활이라고 번역된 에피우시오는을 초실체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는 일용할 양식에 대하여 자신의 평범한 목회자와 설교자를 위한 소요리 문담에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우리 삶을 위한 양식과 필수품에 속하는 모든 것들이다. 곧 음식과 의복, 신발, 집, 정원, 경작지, 가축, 돈, 재산, 올고든 배우자와 아이들, 착한 식솔들, 강직하고 신실한 통치자들, 좋은 정부와 날씨와 평화와 건강과 품격과 명예, 좋은 친구, 신실한 이웃과
(21:23) 같은 것들 말이다. 존 칼빈은 루터의 해석을 지지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일용활이라는 단어가 초실체적인 것을 의미한다는 당시 에라스무스의 해석을 터문이 없는 주장이라고 일축하였습니다. 그는 일용할 양식을 인간다운 삶의 조건이라고 보고 이러한 것을 위하여 구하는 것을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는 행동이라고 보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자신의 공간 복음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헬라어 본문에 톤, 아르톤, 헤몬톤, 에피우시온이 우리의 초실체적인 양식을 의미한다고 보지만 이것은 터문이 없는 소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육체의 양식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은 쉽게 출론될 수 있다.
(22:20) 그렇지 않으면 그 기도가 결함이 있고 불안전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법문에서 하나님 품에 우리의 염려를내어 던지라는 명령을 듣는다. 일용할 의의 의미는 여기에서는 더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이 우리에게 먹을 것을 주시도록 간구할뿐만 아니라 현재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받기 때문이다. 우리가이 해석을 따른다면 일용할 양식의 범위는 인간이 사는 시대와 문화마다 조금씩 달라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 우리나라에서는 승용차가 일용할 양식의 범주에 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중 교통이 발달되지 않은 지역에 살고 있거나 업무용 자가용이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 자가용도 일용할 양식에 들어갈 것입니다.
(23:18) 그러므로 일용할 양식이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복된 삶을 영유함에 있어서 필요한 모든 인간적인 삶을 위한 조건들입니다. 여기에는 단지 육체의 성준을 위한 하루 동안의 음식뿐만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영유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정신적인 필요들까지 포함됩니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 사회의 이론으로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교육과 문화, 주거와 위생을 비롯하여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전엄성을 유지하며 살아가게 하는 삶을 위한 모든 조건들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나아가서 정의로운 법치 국가, 공정한 사회 제도, 이웃들과의 좋은 관계, 인간의 정신을 고향하는 문화를 향유할 기회는 물론 합리적인 범위 안에서 그가 즐기는 기호품까지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24:16) 그러므로 공공연하게 불법이 자행되는 국가 현실 외적인 조건들 때문에 겪는 불합한 차별대후 이웃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소회를 강요당하는 사회에서 사는 것은 일용할 양식이 충족되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은 단지 배부르게 생존하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짐승 같은 피존물이 아니기에 그것들보다 더 많은 삶의 조건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 삶의 조건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하신 인간들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일용할 양식을 이처럼 인간적인 삶의 조건이라고 할 때에 그 목록에는 우리가 선교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직접적으로 필요한 것들만뿐만 아니라 간접적으로 필요하거나 다소 연관성이 적어 보이는 것까지도 포함된다는 사실입니다.
(25:13)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지 창조의 목적을 회복하기 위하여 직접적으로 소요되는 것 말고도 어떤 사물 자체를 즐기도록 허락하신 것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이나 미술, 영국과 같은 예술들이 그것입니다. 물론 그것들 역시 궁극적으로는 창조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인간의 영혼을 아름답게 하며 정신을 수훈화하는데 이바지해야 하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이 모든 일용활 양식에 확대된 범주가 그 모든 것들로부터 오는 즐거움에 탐리 하는 하라는 허가증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한 것이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인간이 신자라고 할지라도 아직은 온전히 선한 상태를 회복하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26:11) 우리는 얼마든지 탐력스러운 방식으로 그것들을 사용하여 부패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이 모든 일용활 양식을 사용하거나 즐김에 있어서 자신의 약함을 알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절제가 필요합니다.이 이 모든 일용할 양식을 사용하며 사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데 방해가 되거나 하나님을 덜 의지하며 살게 하는 일에 도움을 주기까지 우리에게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일용할 양식은 우리를 위하여 있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B. 제유법적 표현으로서의 양식.
B. 제유법적 표현으로서의 양식.
결국 우리는이 양식이라는 단어가 제유법적인 표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27:07) 제유법은 사물의 한 부분으로 그 사물의 전체를 나타내는 수사법입니다. 예를 들어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고 하면 펜에 비유된 글, 표현, 문학, 언론 등이 칼로 비유된 무력, 압재, 폭력, 위협보다 궁극적으로 더 강하다는 의미입니다.
1. 양식의 진정한 의미.
1. 양식의 진정한 의미.
양식으로 번역된 헬라의 아르토스는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주식으로 먹던 빵을 의미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제법적인 표현임을 전제로 하면이 간구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비로소 가닥이 잡히기 시작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것은 인간의 생존의 필수 불가결한 삶의 여러 가지 요소들을 가리킵니다. 진실로 이것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됩니다.
(28:00) 그러나 인간다운 삶을 영하기 위한 이러한 조건들을 하나님께 의지하라는 것은 스스로 그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사람들이이 구절을 잘못 해석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저축을 해서는 안 되고 돈을 벌 욕심을 버려야 하며 일용할 음식으로 만족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지상의 삶을 영하기 위한 조건을 최소한의 음식이라고 보고이 구절을 무엇인가 더 풍족한 삶을 꿈꾸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는 근거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청빈주의자나 금욕주의자들에게 광범위한 지지를 얻은이 해석들의 문제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금욕주의적인 생각에이 주기도문을 맞춘 것이지 주기도문이 가진 원래 의미를 발견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29:00) 그러면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이네 번째 간구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기도문에서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며 마음속에 가지셨던 그림은 출애굽기 16장이었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는 그 유명한 만나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탈출하여 광야로 나아와서 직면하게 된 가장 커다한 문제는 식난이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어느 정도의 식량을 가지고 광야로 나왔겠지만 오래 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계속 가나안으로 이동 중이었기 때문에 정착해서 농사를 지울 수도 없었고 언제나 푸른 초장을 지나는 것도 아니었기에 목축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29:51) 최소한 200만 명, 최대한 약 300만 명은 되었을 사람들이 당장 광야에서 굶어 죽을 지경에 놓인 것입니다. 그대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조상들도 일찍이 먹어 본 적이 없고 그 후손들도 결코 누려볼 수 없을 아주 독특한 방식으로 심령을 공급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만나였습니다. 출애굽기 16장 15절. 이런 새벽 이스라엘 백성들이 잠에서 깨어 둘러보며 사하방에 만나가 서리처럼 하얗게 내려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침 일찍 들판에 나가서 그것을 바가지에 거두어 드렸습니다. 그들은 매일 꼭 당일 하루에 먹을만큼만 거둘 수 있었습니다. 어차피 많이 담아도 썩거나 벌레가 먹어서 하루를 넘길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30:43)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신 것은 단지 그들의 육체를 보호하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모세는 만나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줄이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내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내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내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신명기 8장 3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육체를 위하여 매일 공급해 주신 만나는 궁극적으로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의 필요성을 가르치시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을 때의이 아르토스도 그저 식물로스의 빵만을 의미한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31:39)
2.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인간.
2.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인간.
여기서 양식은 육체와 영혼을 아우르는 인간 존재 전체의 인간다운 생존을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을 모두 지칭합니다.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영혼과 육체로 창조되었습니다. 영혼도 하나님의 완전한 피조물이고 육체도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완전한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둘 다 실체이지만 둘 다 완전한 실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개혁 신학자들은 영혼은 형상이며 육체는 진료로서이 둘이 조화로운 결합을 이루고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이 인간이야말로 완전한 실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학에서 말하는 영혼의 진료 형상 이론입니다.
(32:35)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부터 27절. 육체와 영혼 모두에 하나님의 형상이 투형되어 있습니다. 물론 고유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영적이고 정신적인 작용의 원인입니다. 즉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인 지성과 결정하는 능력인 의지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이 두 가지는 모두 인간의 영혼의 특징이기에 하나님의 상은 우선적으로 인간의 영혼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서의 존엄과 가치, 고기함 등은 영혼에만 투영된 것이 아니라 육체에까지 미쳐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도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한 주체로서의 존귀함과 고결함을 함께 누리고 있습니다.
(33:30) 우리는 종종 텔레비전에서 아프리카나 동남아 등지에 살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상을 볼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빨래도 하지 않을 더러운 물을 그들은 없어서 못 마시고 열악한 음식을 얻기 위해서 혹독하게 노동을 합니다. 그런 인간 사회의 모습들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인간은 고결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들이 영혼과 육체를 아울러 인간의 종교함을 유지하며 안전하고 평안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이 일을 위하여 인간은 기본적인 삶의 조건들을 누리며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아마도 이쯤에서 여러분의 마음속에는 다양한 질문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34:17) 우선 예상되는 질문은 이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도들을 포함하여 복음을 위해 분투하던 많은 신자들이 복에 갇치기도 하고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굶주이기까지 하였는데 그들의 삶은 과연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삶의 조건들을 누린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왜 그런 삶의 조건들이 박탈당하도록 허락하셨습니까?이 이 질문에 우리는 이렇게 답변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시련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로서 그 일에 대적하는 악과 싸우면서 어쩔 수 없이 한시적으로 통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상한 상황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신자들을 연단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이바지하게끔 삼리 속에서 운행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생활이 하나님 앞에 일상적인 삶이라든지 혹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인간 생활의 상패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35:17) 우리가 그러한 삶을 덕스럽게 보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그 모든 고난을 이기고 의롭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그렇게 의롭게 살고 신실하게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음으로 몰아넣는다면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심각한 파괴이자 하나님께 대한 적극적인 도전입니다. 다음으로는 이런 질문도 나올 것 같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육체적으로도 기본적인 안락함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이라며이 세상에는 왜 이렇게 굶줄이며 사는 사람이 많습니까? 하루 좋은 일에도 한 조각에 빵을 얻지 못하는 사람 태어나면서부터 배고픔을 먼저 배우고 결국은 영양실로 죽어 가는 수많은 아이들.
(36:07) 이러한 세상의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식량을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이 개입하여 식량의 분배가 균형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동안 북한은 심각한 식량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 북한 관련 보고서를 보면 2010년 당시 북한에서 한해의 부족한 식량이 약 135만 톤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남안에서 남는 쌀이 약 150만 톤이었습니다. 지구는 현재 환경에서도 지금보다 두 배나 많은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공물을 생산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인구는 2006년을 기점으로 65억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36:54) 그런데 1984년 UN 식량 농업 기구의 평가에 따르면 당시 농업 생산력을 기준으로 계산하여 지구는 120억의 인구를 걷든히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세계 인구를 먹여 살린다는 의미는 단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식량 공급이 아닙니다. 남녀 노소를 가리지 않고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하루 2,400에서 2,700k칼c칼리 정도의 먹을거리를 공급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소와 돼지가 인간의 식량을 먹어 치우는 음식 소비의 경쟁자가 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는 이미 수확한 공물의 57%가 가축의 사료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축산업자와 도축업자들은 이것을 두고 곡물 가공이니 혹은 곡물 계량이라고들 하지만 실제로는 인간의 굶주임을 해결하는데 사용되어야 할 식량의 엄청난 낭비일 뿐입니다.
(37:52) 사육장의 소에서 1kg의 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약 9kg의 사료를 먹여야 하는데이 중 약 6kg이 공물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3kg은 공물이 아닌 다른 재료들입니다. 유럽에서는 돼지에게 식품의 찌꺼기를 사료로 주는 광경을 상상하기가 힘듭니다. 게다가 솥대가 초원에서 풀을 뜯는 목적인 풍경은 독일남부 알고이 지방에 몇몇 방목에서나 볼 수 있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가축을 대량으로 기르는 농장은 어마어마한 양의 옥수수와 밀백질이 풍부한 사료를 가축에게 줍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부유한 선진농업들은 식량을 마치 무기처럼 사용하여 전 세계적으로 균형 있는 식량 공급을 방해합니다.
(38:43) 금융 시장에서 축척된 거대 투기 자본들이 공물 시장에 개입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매접 매석을 통하여 국제 공물 가격을 조작하고 시장을 교환시켜서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제대로 양식을 먹을 수가 없게 합니다. 심지어 가난한 독재 국가에서는 여러 나라로부터 기증받은 심량을 사람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어 굶지름을 면하게 하는 대신 독재자들의 호주머니 속에 차곡차곡 쌓갑니다. 결국 이렇게 식량의 균등한 배분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인간의 탐력이 개입되어 공급과 소비 사이에 합리적인 균형을 방해하기 때문에 한쪽으로는 비만으로 고생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굶주임으로 죽어가는 것입니다.
(39:29) 전 세계에서 인류가 생산하는 후의 80%를 10%의 인구가 누리고 살고 나머지 90%의 인구가 20%를 물질을 누리며 산다는 소식은 우리에게 이러한 문제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저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두 불균형은 교육의 불균형과 함께 가난을 되물림하는 악순환의 거리로 나타납니다. 지난해 10월 둘째 주 세계적인 경제 주관지 이코노미스트에는 11 가지 테마로 세계 경제를 다룬 특별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중 부자와 나머지라는 제목의네 번째 기사는 미국 경제의 심각한 불평등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 기고문에 따르면 균형을 잃은 두의 분배가 빈부 격차를 심화시켰고 부자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입법 로비를 합니다.
(40:23) 그로 인하여 가난한 집 자식들은 교육의 혜택으로부터 소해된 심각한 가정 해체, 도둑 수준의 저하 등을 되물림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가난의 군래에서 운명적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회에서 법과 정의가 존중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제가 난생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 미국 경제는 한창 호황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특급 호텔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누추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호텔에 추속하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아침을 먹으러 식당에 내려갔을 때였습니다. 이런 아침인데도 차려진 음식들은 당시 우리나라 특급 호텔에 저녁 뷔페에 못지 않게 풍성했습니다.
(41:11) 싱싱한 과일, 좋은 고기, 동세양을 남나드는 다양한 요리 수십종의 디저트까지 어찌나 음식들이 즐비한지 구경만 해도 배가 불렀습니다. 그런데 정말 충격적이었던 것은 그다음이었습니다. 그 음식들의 대부분이 곧장 쓰레기통으로 들어갔습니다. 두어번 포크를 찍었을 뿐인 케이크. 한두 번 먹다 보니 식어서 더 이상 손되지 않은 두툼한 스테이크, 티스푼으로 딱 한 번 파 먹었을 뿐인 커다란 수박이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졌습니다. 이후에도 그런 경험은 계속되었습니다. 한번은 케이터링 업체를 불러 이연 바비큐 파티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파티가 끝나자 업체 직원들 대부분이 그냥 남겨진 음식들은 물론이군요.
(42:00) 작은 흠집 하나 없이 멀쩡한 포크와 나이프 심지어 접시들까지 테입을 보채 한꺼번에 수고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을 분리 수고에 가면 정리하기 편할 텐데 왜 그렇게 가져가느냐고 물었더니 모두 그 상태로 버린다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미국인들의 인건비가 워낙 비싸기 때문에 사람을 사서 그것들을 분류하고 씻고 소독에서 다시 쓰는 것보다 중국 같은 나라에서 수입한 물건들을 일회용으로 쓴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가난한 북한 동포들과 제3세계의 굶주리는 사람들의 비참한 광경이 머리를 스쳤고 이것은 악하다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 인간 전 존재의 존엄성
3. 인간 전 존재의 존엄성
지난해 통계청의 발표 자료에 따르면 전국에서 하루 평균 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의 양은 17,000톤에 이른다고 합니다.
(42:57) 1인당 음식물 쓰레기 발생량도 해마다 증가하여 현재 1인당 하루 평균 약 0.31kg의 31kg의 음식물 쓰레기가 버려지는 추세라고 합니다. 생산된 전체 음식물의 약 1분의이 버려지고 있는 셈입니다. 이것을 비용으로 환산하면 연간 약 25조원이 낭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에 소비되는 전 세계의 부유한 국가들의 식량 단기를 모두 금액으로 환산한다면 얼마나 엄청난 액수가 되겠습니까? 지구 한쪽에서 그렇게 흥망 흥청망청 소비하기에 다른 한쪽에서는 굶주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어찌 하나님의 책임이 됐습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모든 인간들이 존성을 유지하며 사는 것입니다.
(43:52) 다시 말해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고귀한 존재인 것이 육체와 영혼 모두에게 발현되도록 삶의 조건을 갖추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디에선가 굶지리는 사람들이 있고 인간의 기본적인 존놈을 유지하지 못하는 삶의 환경 속에 놓여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슬프게 하는 일이며 나머지 모든 사람들의 책임입니다. 양식의 결핍으로 말미암는 고통들로 인해서 그들의 육체와 정신에 남겨진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기 때문입니다. 좁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 관련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의 초음넘성은 영혼과 정신뿐 아니라 육체적인 삶에 있어서도 나타나야 합니다.
(44:38)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전 존재가 모든 사람들에 의해 존귀하게 여겨져야 하기 때문입니다.이 이 세상 사람들은 한 인간의 지위에 높고 낮은 소유한 부에 많고 적음에 따라 마치 인간으로서의 존귀함도 차별이 있는 것처럼 대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이 같은 사람의 태도에 대해 동의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이 세상에서의 지위의 고하나 소유의 유모에 따라 어느 정도는 그 사람의 영광이 차이가 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땅히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한계 안에서 그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새 시각을 부여받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은 이후로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볼 수 있게 된 사람입니다.
(45:30) 인간 존재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에 있고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가진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려 있습니다. 지극히 소중한 보물을 허술하게 보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내용물이 소중하면 그것을 보관하고 있는 그릇도 소중하게 다루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누구라도 비록 불신자 혹은 이교도들이라고 할지라도 굶지름으로 인해 그 존성이 짓밟히고 비참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종교함은 그들의 영혼과 육체 모두를 통하여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부의 균등한 분배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굶주임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다운 삶을 누리지 못하는 이들이 없도록 인간들을 돌아보아야 할 의무가 여기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46:24)
4. 영육 모두 신적 돌봄의 대상.
4. 영육 모두 신적 돌봄의 대상.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모두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대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가르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과 그 나라의 도래와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하여 살아가려면 영적 자원뿐만 아니라 육적인 자원들도 필요함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에 부합하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정신의 지식도 필요하고 영혼의 생명을 위한 진리와 은혜도 필요하며 육체도 건강해야 합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과 세상에 대하여 무지하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47:08) 그러므로이 세상 나라에서 생존하기 위한 적당한 지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탁월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또한 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뜻에 계속 복종하며 살 수 있게 하는 진리와 은혜가 절실하게 필요합니다. 이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는 것입니다.뿐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태연만 감아 놓으시면 힘없이 작동하는 기계와 같은 존재가 아닙니다. 우리는 외로울 때도 있고 지칠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밥이나 물과 같은 육체적인 요구뿐만 아니라 교육, 교재, 문화와 같은 정신적이고 사회적인 요구들도 있습니다. 그리고보다 깊은 영혼의 필요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간으로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며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이러한 모든 생활 조건들이 바로 우리가 매일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아야 할 일용할 양식입니다.
(48:03) 그러므로이 양식은 그저 하루 목숨을 부제하기 위한 최소한의 식물, 그것의 공급만을 의미하는 것로 이해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깊이 읽는 주기도문_08-2_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1 p262~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CskCrmQKDRA
Transcript:
(00:01)
III.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III. 우리에게 일용한 양식을
우리가 이 의미 깊은네 번째 강고의 내용을 살펴볼 때에 지나쳐서는 안 될 중요한 관련 주제가 두 가지 더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씀 속에 나오는 우리에게와 이정할 양식이라는 표현에 대한 것입니다. 먼저 우리라는 구절을 간단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양식을 공급해 주셔야 할 대상으로서의 우리는 이중의 적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차적으로는 가족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들을 의미하지만 이차적으로는이 세계에 사는 모든 인류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음 장에서 더 자세히 다룰 것입니다.
A. 우리에게
A. 우리에게
네 번째 속에서 나오는 우리에게라는 표현에 담겨 있는 중요한 의미는 공동체성입니다.
(00:46) 하나님께서는이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간교에 우리에게라는 구조를 보태어 올리게 하셨습니다.이는 이는 일용할 양식의 문제가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의 문제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이 간구를 올릴 때마다 우리 모두가 이동할 양식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주신 양식들의 탐력을 보태어 그로 인해 이웃을 굶주리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우리의 가족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들을 의미하고 이차적으로는 세계의 모든 인류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은 교회와 관련될 때에는 양자적 아버지 되심으로 나타나지만 피조 세계 전체와 관련될 때에는 창조주로서의 아버지 되심으로 어 나타납니다.
(01:32) 따라서 우리라는 공동체 대명사는 두 가지 적용을 함께 갔습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임을 보여줍니다.이 주기도물을 가르침 받고 있는 일차적 청중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자신들이 개인으로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로서 하나님의 가족임을 항상 기억하여야 했습니다. 신자들은 구원의 계획부터 실행과 마지막 완성까지 교회라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다른 지체들과 함께 참여합니다. 한 개인의 구원 계획은이 땅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고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이 세상을 재창조하시려는 구원 계획 안에 있습니다.
(02:20)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적붙여임으로서 구원을 얻어 영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이 이 교회는 우주적이며 하나의 보편 교회이며 하나님 아버지의 사은 아들이신 그리스도에게 부어지고 그 사랑은 다시 그분의 신부인 교회에 부어지며 신자는 그 몸의 일부로서이 사랑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몸에서 단전된 채로 구원받은 신자는 없습니다. 신자 일생 이렇게 다른 지체들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으로 한몸이 된 것을 실제적 삶속에서 구현해가는 여정입니다. 진자는 하나님의 나라가 최종적으로 완성되는 그날의 온전한 사랑과 일치를 미리 앞당기어 누리며 살아가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이를 위하여 모든 지체들이 날마다 이기심과 영혼에 대한 무관심을 극복하며 각자 자기의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받고 세 사람이 살아나게함으로써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03:16) 이로써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일할 양심을 나눔에 있어서 실현되어야 할 공동체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과 선인 모두에게 생존을 위한 자비를 베푸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이네 번째 한구에 있는 공동체성을 함께 가르치심은 우리로 하여금 일차적으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지체로 다른 지체들의 필요에 대하여 부담을 느끼게 하심이며 이차적으로는 전 세계 인류의 이론으로서 다른 모든 인간들의 일할 양식의 문제에 대해서 책임져야 하는 존재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이 이 문제는 다음 장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다를 것이므로 이제는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거라는 구절을 집중적으로 해설하겠습니다.
(04:00)
B일용할
B일용할
주기도문 본문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가장 해석이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일용활이라고 번역된 단어일 것입니다. 오랜 세월 동안 많은 학자들이 치열하게 논쟁하였음에도 불구하고이 단어에 대한 해석은 여전히 의미를 확정하기가 어려운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이 단어의 의미를 어떻게 확정하느냐에 따라 우리가 구하는 양식의 성격과 범위를 결정하게 되기 때문에이 문제를 다루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이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우리는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사항을 숙고해야 합니다.
1. 일용할의 의미.
1. 일용할의 의미.
첫째로 일용할 일라는 구절의 의미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일용할 일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 본문에는 에피우시온으로 되어 있는데 온형은 에피우시오스입니다.
(04:54) 문제는이 단어가 어디서 유래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교부 오리게네스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의 능하였습니다. 그는 핵사플라 곧 히브리어 구약 성경 본문과 이에 대한 헬라어 번역 성경 다섯 종류의 법문을 서로 병행 대조시킨 성경을 편찬할 수 있을 정도의 대학자였습니다. 그러한 오리겐네스도이 단어가 학문적 용어에 속하는지 실용적 욕할 실용적 용어에 속하는지지 모른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베르 페럭스터는이 단어에 관한 방대한 설명을 남긴 학자들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이 단어의 의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의 기능을 제시합니다. 그중 초기 교회에서 비족 비교적 여러 교부들에게 받아들여졌던 해석은 마지막 여섯 번째 견해임을 밝히고 들어가겠습니다.
(05:53) 첫째로는이 단어를 미래에 위한이라는 의미로 보는 견해입니다.이 견해는 에피우시온형인 에피우스 에피우시오스가 미래를 의미하는 FNI가 분사 형태인 F플러스 이원트플러스 이원스를 거쳐서 형생된 것이라고 다른 동사의 활용을 통하여 유추합니다. 이에 의하여 학자들에 따라 그 의미는 미래, 정규적인 선함에 있어서 두 번째 매일 우리에게 도달하는 우리에게 착합한만큼 등의 다양한 의미로 해석됩니다.이 견해를 따를 경우 본문은 우리에게 미래를 위한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의미가 됩니다. 한편이 단어의 의미를 앞으로 도래하게 될 영혼과 관련지음으로써 본문을 우리에게 그 영원한 시대에 필요한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기도 하지만 페르스터에 따르면이를 지지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합니다.
(06:56) 둘째로는이 단어를 오늘을 위한 의미로 보는 것입니다. 벨라에서 오늘은 텐산 해마란인데 여기서 나를 의미하는 해마란만 생략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에 의하면 에피우시온은 에피텐 우산이 합쳐진 단어로 현재 날 혹은 그냥 오늘이 됩니다. 그리고이 견해를 따를 경우 본문은 우리에게 오늘을 위한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의미가 됩니다. 셋째로는 빛따라 곧 다음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은 이미 시작된 오늘날의 다음날의 양식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고려하여야 할 것이 있는데 하루라는 나라에 대한 유대인들의 개념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루를 음력을 따라 생각하였습니다.
(07:50) 그들에게 하루란 저녁에서 시작하여 그다음날 저녁에까지의 1일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월절을 저녁에 기념하였는데 이것은 새로운 날의 시작과 함께 유월절을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들에게 24시간 하루는 저녁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음날 저녁 직전까지 곧 저녁과 아침 혹은 밤과 낮으로 이루어진 하루였습니다. 이렇게 당시 유대인들에게 하루가 해지는 저녁부터 시작하여 다음날 뜰 때까지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분명히이 기도는 이미 지난밤이 흘러갔다는 점에서 하루의 첫 시작에 올리는 기도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해지기해지기 전에 마지막 아 직사를 한다면 그것은 정확히 다음 날를 위한 하루의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08:46) 이을 이을 견해를 따를 경우 기도의 시점에 따라 본문은 우리에게 이미 시작된 오늘을 위한 양식을 주셨고라고는 의미도 될 수 있고 또 우리에게 이따라오게 될 내일을 위한 양식을 주시고라는 의미가 될 수도 있습니다. 넷째로는이 단어를 생존은 생존에 속하는이 아 생존에 속하는이라는 의미로 보는 것입니다.이 이 변해에 따르면 에피우시온은 관하여 속하여 의미를 가진 에피와 본질 혹은 실체라는 의미를 가진 철학적인 단어 우시와 우시아의 합성으로서 실존 혹은 생명에 속하는 뜻하는 것입니다.이 이 견해의 약점은 무시아라는 단어가 그리스 문헌의 용내에서 실존이나 생명의 의미로 사용된 이해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09:46) 이와 유사한 파생어들이 전혀 그런 의미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이 견해를 따를 경우 본문은 우리에게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양식을 주시었고라는 의미가 됩니다. 다섯 번째로이 단어가 우리의 필요를 초과하지 않는 의미라는 것입니다.이 이 결는 언어적으로 짝을 잃을 수 있는 다른 단어의 해석에서 유추한 것입니다. 즉 에피우시오스는 페리우시오스의 반대 말인데 페리우시오스가 필요를 초과하는 의미를 가진 단어이기 때문에오스는 필요를 초과하지 않는이라는 뜻이 것이라는 주장입니다.이 이 결에 따를 경우 본문은 우리에게 필요를 초과하지 않는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의미가 됩니다. 여섯째로는이 단어가 실체를 초월하는이라는 의미라는 것입니다.
(10:43) 네 번째 견해와 마찬가지로 에피우시온을 우시아의 합성으로 보른 견해인데 그 견해와 다른 점은 F라는 전치사에 대한 해석입니다.네 네 번째 견해와는 달리이 견해를 따르는 사람들은 피를 초월하여 혹은 너머애로 해석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면 에피우시온이라는 단어는 물질적 실체를 초고하는이라는 의미가 되어이 기도를 영적 양식을 위한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이 견해를 따를 경우 본문은 우리에게 물질로서의 본질을 초월하는 신령한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의미가 됩니다. 도부 카시아누스는이 구절을 오늘날 우리에게 우리의 초실체적 양식을 주시고라고 해석하였습니다.이 >>
2.출애굽기 16장의 배경
2.출애굽기 16장의 배경
둘째로 이 간구가 가지고 있는 출애굽기 16장의 배경입니다.
(11:42) 우리가네 번째 간구의 내용이 갖는 의미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시 출애굽기 16장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 어떤 식으로 만나를 공급받았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도 사람마다 잠자고 일어나는 습관이 달랐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새벽잠이 없어서 꼭두 새벽에 일어나지만 또 어떤 사람은 아침잠이 많아서 늦게야 일어납니다. 그러면 당시 어느 시간이든지 일어나 들판에 나가면 만나를 구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만나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가 떠서 햇살이 퍼지기 전에 광야에 나가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해가 뜨고 사방에 햇볕이 뜨겁게면 그것이 쓰러지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12:34) 출애굽기 16장 21절.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상적으로 안식일을 제외한 매일 이른 새벽에 아마도 아직 어스름이 남아 있던 미명에 그날 먹을 만나를 거두었던 것입니다.이 점을 상고할 때 앞서 에피우시온을 이따라 오는 날 혹은 다음날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매우 적절합니다. 이러한 해석은 히로니무스에 의해서도 지지되었습니다. 그는 히브리인의 복음서라는 문헌에서 에피우시온이 히브리어 마하르를 대치한다고 주장하는데 히브리어 마르의 의미는 정확히 내일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것을 일용할 일하고 고집하게 되면 만나의 사건으로는 해석이 안 되는 어려운 점 하나가 발생하게 됩니다.
(13:28) 바로 안식일 전날의 경우입니다. 출애굽기 16장 22절. 안식일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기 때문에 전날에 그들은 이틀을 한 번에 거두어야 했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그날의 양식이 아니라 명백하게 그다음날의 양식이 됩니다. 그래서 에피우시온이라는 단어를 이따라 오는 날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구약의 배경에도 맞고 헬라가 가지고 있는 뜻에도 부합하며 역사적으로 이것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을 보더라도 가장 탁월한 해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에 따라서 살고자 하는 준비는 결코 정지할 만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미래를 위해 지적으로 영적으로 인격적으로 준비하고 한걸 그걸음 더 나아가 물질으로도 예배하는 것은 결코 주기도 따르는 삶의 길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충분히 준비할 수도
(14:32) 있는데도 무절한 삶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이 모자라서 그 일이 적합한 사람이 되지 못하는 것이 올바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미래를 위해서 물질을 예배하는 것 자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물질을 의지하는 마음을 경계해야 합니다. 어 나중에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려고 어 물질을 모은다고 하면서 결과적으로는 지나치게 물질에 집착하는 태도가 그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의 물질에 대한 탐욕에 들러붙어서 자기 만족을 느끼는 것입니다. 내 보물이 있는 그곳에 내 마음이 있느니라. 마태복음 6장 21절라고 말하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 보십시오.
(15:16) 이런 위험을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에게도 언제나 도살리 어고 있습니다. 더욱이 미래를 위해서 스스로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기도하지 않고 이미 무언가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지 않는다면 불신앙의 오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육체까지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정도로 어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한번 우리가 이미 누리고 있는 것들을 돌아보십시오. 우리가 교육의 혜택을 받아 사람 다온 교양을 갖추고 있는 것도 하나님을 바라고 보는 믿음도 내 마음대로 사는 대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순종하고 살고자 하는 착한 의지도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7절.
(16:05) 지금 우리가 그것들을 누리고 있다면 누리고 있음에 감사하기 때문에 지금 누리고 있지 못한다면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의전해야 합니다. 주기도의네 번째 간구는 당긴 기독교의 신앙의 의존 원리를 알고 나면 우리는 아무것도 고유하게 우리 자신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왔습니다. 진실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난한 자들로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가난하게 되는 것도 일단 이전에 가진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육체의 어 생명을 누리고 있으나 그것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빛인 것이며 그분의 덕으로서 지탱되고 있습니다.
(16:56) 사도행전 17장 28절. 그러므로 우리는 매일 하나님 앞에 일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우리 자신이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티끌 같은 존재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가장 작은 필요조차 하나님께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매일 밥상머리에서 깨달아야 합니다. 혹시 여러분은 이러한 가르침이 언뜻 예수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유명한 가르침과 모순된 것처럼 느껴지십니까?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17:42) 마태복음 6장 31절에서 32절. 그러나 일어난 계난은 우리가이네 번째 간구를 올려야 할 이유를 잊어버린 데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우리가 매일 이할 양식을 하나님께 구해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께 알려 드리지 않으면 그분이 우리를 먹이고 돌보신 것을 잊을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리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잊어버릴까 봐 올리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상기시켜 드리지 않아도 우리의 필요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단지 먹고 입는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의 양식 교육받을 기회 문화적인 누림 함께의 교재를 나눌 친구들 위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모든 자원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 자신보다 더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18:44) 물론 우리에게는 어디에서 도움을 구할 수도 없고 하나님조차 나에게 등을 돌리신 것 같은 절망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의 날들 중에는 살아가기 위해 자원의 공급이 완전히 끊겨져 버린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을 찾으면 하나님께선 신기한 방법으로 우리의 자존감을 회복시켜 주시고 우리를 필요 우리의 필요를 다시 채워 주십니다. 혹시 여러분은 지금 염려 가운데 있습니까? 현재와 미래에 대한 염려는 물질의 부족이나 공급의 모자름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맺고 있는 인격적인 신뢰의 관계가 와야 됐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구원받는 하나님의 자녀의 가장 궁극적인 소명은 그분의 나라와 의를 초과하고 사는 것인데 염려는 염려는 그렇게 살지 못하도록 하로 막습니다.
(19:41) 돈을 비었다지는 들불도 입히는 하나님 할몸물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푸른 하늘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지흙 같은이 몸을 정근 같게 하시네 오직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만이 우리를 모든 염려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내게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가장 잘하시는 하나님께서 내게 최세의 것을 주시고 언제나 변화없이 나를 사랑해 주신 것이라는 신뢰가 우리로 하여금 어머니 손을 붙든 어린아이처럼 기쁘게 담대하게 인생길을 걸어가게 합니다. 제가 이제 읽을 처인가요? 네.
3.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
3.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
셋째로이 간구는 우리가 우리의 영적인 삶뿐만 아니라 육적인 삶을 위해서도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20:38) 인간은 결코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믿음의 사람들은이 세상을 향하여 싸울 때에 담대했으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부모의 손을 붙들고 놓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았습니다. 거룩한 삶을 살다가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 역시이 땅에서 삶의 자원들을 공급받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이 땅의 것들을 누림은 결코이 땅의 것들을 바라보게 하는 수이 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땅기 것으로 말미암아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게 되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 시편 121편 1절에서 2절.
(21:20)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이 땅에서 살아가며 땅에 있는 것들을 공급받을지라도 우리는 언제나 마음의 시선을 높여 우리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공급되는 또 다른 양식을 악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생명의 양식을 하늘의 만나를 마이 빈 자에게 내려 주소서. 낮고쳐나 우리 국휼이 보시사 주여 주여 먹이어 주소서. 주여 주여 먹이어 주소서.
인간의 가장 큰 교만은 독립심입니다. 하나님 없이 혼자심으로 넉넉히 살 수 있다는 교만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인간의 죄입니다. 인간의 추루함은 하나님 없이 씩칙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22:01)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삶의 태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모든 피물에 피조물 위에 뛰어난 존재로 창조하셨으나 그 어느 피물보다도 당신을 더욱 의지하게 하심으로써 인간 존재의 탁함을 드러내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이 파산 선거를 받은 것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기뻐하시며 하나님의 뜻이이 땅 위에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며 애통하는 자들을 위로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4절 하루 세 번 식탁 앞에서 진정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는 그 의미를 아는 모든 신자들을 겸손하게 합니다. 다른 피조물들에 위하 비하여 많은 탁월성을 가진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 육체조차도 양식을 주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22:49) 이러한 사실을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이것들은 다 주께서 때를 따라 먹을 것을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주께서 주신즉 그들이 받으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그들이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주께서 낫을 숨기신즉 그들이 떨고 주께서 그들의 호흡을 거두신즉 그들은 죽어 먼지로 돌아가나이다. 주여 영을 보내어 그들을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시편 104편 27절에서 30절.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독립하심이 있고 인간의 아름다움은 온 땅과 하늘리에 뛰어나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하며 사는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이 기도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심으로써 매일의 식탁 앞에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전하며 살아가는 연약한 피조물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23:39)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정신으로이 기도를 올린다면 우리는 매일 식당 앞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임재와 마주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IV. 결론
IV. 결론
하나님께서는 낫고 천한 피조물인 우리에게 거룩한 하나님을 알고 그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온 땅과 만물 위에 초월하신 분이시지만 우리의 아버지로 일컬음 받으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히브리서 11장 16절. 오히려 우리는 오히려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아들까지 아낌없이 화목 재물로 주심으로써 우리를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육체를 위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는 과정을 통하여 당신의 선하신 성품을 보여 주셨습니다.
(24:30)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 안에서 당신의 영광을 받으십니다. 푸른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들도 먹이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돌보시기를 잊으실 리가 없습니다. 내일에 대한 신자들의 모든 불안과 염려는 오늘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의 결핍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의 보혈로 구원해 주신 자녀들을 사랑하실뿐만 아니라 매의 삶 속에서 그들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아버지이십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우리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는 그분을 신뢰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먹고 입고 마시는 것 이상의 목적을 위하여 존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25:23) 그리고 우리는이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아갈 때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대한 염려가 우리로 하여금이 소명을 따라 살지 못하게 한다는데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간구 하기 전에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한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이처럼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미래에 대한 불안과 염려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에게 필요하 좋은 모든 것이 오직 그분들에게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는 의존의 표현입니다. 또한 우리는 이렇게 매일 유일 이용할 양식을 구하면서 영과 마음은 물론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인간적인 조건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임을 알기에 그 앞하여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바라에도 비굴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26:19) 우리가이 소명을 따라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채워 주십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여금이 세상 나라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과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뜻의 시련을 위하여 살게 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바로 그러한 때에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아멘. >>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한눈에 보는 8장
I. 들어가는 말
주기도문의 전반부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후반부는이 땅을 사는 우리의 필요를 주목하고 있다.
II. 양식을 구하는 기도
A 양식이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주석가들은 다음 여섯 가지 해석을 내놓았다. 첫째는 성찬의 떡. 둘째는 그리스도 자신. 셋째는 영적인 양식. 넷째는 육적인 양식. 다섯째는 영적이고 육적인 양식. 여섯째는 인간다운 삶의 조건들이다.
저자는 양식이란 인간다운 삶을 영하기 위해 필요한 총체적인 조건들을 가르킨다는 견해를 지지한다. 즉 일용할 양식이란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복된 삶을 영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든 인간다운 삶을 위한 조건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용할 양식의이 확대된 범주가 곧 그것들로부터 오는 즐거움에 탐닉하라는 허가증은 아니다.
B. 제유적 표현으로서의 양식.
1. 양식의 진정한 의미.
양식으로 번역된 아르토스는 사물의 한 부분으로 그 사물의 전체를 나타내는 제유법적인 표현이다.
인간 생존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된다. 그러나 하나님께 의지하라는 것은 스스로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2.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진 인간.
개혁 신학자들은 영혼은 형상이며 육체는 진료로서이 둘이 조화로운 결합을 이루어야 진정한 의미에서 인간으로 부를 수 있다고 보았다.
3. 인간 전 존재의 존엄성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모든 인간들이 존성을 유지하며 사는 것이다. 따라서 양식의 결핍으로 인한 고통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슬퍼하시는 일이다.
4. 영육 모두 신적 돌봄의 대상임.
주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가르치신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과 그 나라의 도래와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해 살려면 영적인 자원뿐만 아니라 육적인 자원도 필요함을 아셨기 때문이다.
III. 오늘 우리에게
A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라는 공동체의 문제이다.
B 일용할
1 일용할의 의미
우리말 성경에 일용할이라고 번역한 헬라어 우피우시온의 원형은 에피오시오스인데 대학자 오르게네츠 어조차도이 단어의 의미를 알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 단어에 대해서 가장 방대한 설명을 포레스터의 다음 여섯 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미래를 위한 오늘 위한 이따라오는 날 생존을 생존에 속하는 우리의 필요를 초과하지 않는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에 실체를 초월하는이라는 의미를 덧붙일 수 있다.
2. 출애굽기 16장의 배경.
출애굽기 16장에 만나의 사건에 비춰볼 때 에피우시 따라오는 날 혹은 내일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매일 적절하다. 매우 적절하다. 안식일은 만날 내리지 않기 때문에 전날에 그들이 이틀을 한꺼번에 거두해야 했는데 그렇다면 그 그것은 그날의 양식이 아니라 명백한 그다음날의 양식이다. 그래서 에피우시온이라는 단어를 이따라 오는 날이라고 해상하는 것이 가장 구약의 배경에 맞고 헬라에 가지고 있는 뜻에 부합하며 역사적으로 이것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을 보더라도 가장 탁월한 해석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을 따라 살고자 하는 준비는 결코 정할을 만한 일이 아니다. 미래를 위한 지적, 영적 인격적, 물적 준비로 하는 것은 죽임을 따르는 상과 괴리 되지 않는다.
우리가 경계할 것은 미래를 위해서 물질을 예배하는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 대신 물질을 의지하는 마음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육체까지로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존재로 창조하셨다. 주기문의네 번째 강구는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한 순간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을 잊어버릴까 봐 올리는 기도이다.
하나님께서는 굳이 상기시켜 드리지 않아도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 염려는 물질의 부족이나 공급의 모자 때문에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맺고 있는 인격적인 신뢰의 관계가 와끼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C.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는 존재.
하나님 없이 혼자 힘으로 넉넉히 살 수 있다는 교만이라 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인간의 죄이다. 인간 존재의 탁월함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자하음으로써 드러난다.
IV. 결론.
우리가 이할 양식을 위해서 간고하는 것은 미래를 대한 불안과 염려 때문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오직 하나님, 오직 그분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믿는 의전의 표현이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알기에 우리는 부활 부활에도 교만하지 아니하고 가난해도 비굴하지 않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