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510 청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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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rinthians 1:1–17 NKRV
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6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7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11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13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14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15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16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누구의 이름으로 살아가는가

본문: 고린도전서 1장 1~17절 대상: 청년부 예배 일시: 2026년 5월 10일 주일

본문 배경 — 1세기 고린도, 21세기와 너무 닮은 도시

본문을 함께 살펴보기 전에, 1세기 고린도라는 도시를 잠시 그려 봐야 합니다. 고린도는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잇는 좁은 길목, 지중해 동·서 무역의 모든 흐름이 통과하는 항구 도시였습니다. 돈과 사람과 문화가 끊임없이 흘러드는 곳이었지요. 한때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가 다시 로마의 식민지로 재건된 도시였기에, 인구 구성도 매우 복합적이었습니다. 로마 퇴역 군인, 해방 노예, 그리스 원주민, 동방의 상인들, 시리아·이집트·유대 출신의 이주민들이 한 도시 안에 뒤섞여 있었고, 신흥 부자들이 단기간에 출세해 자기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는 경쟁 문화가 강했습니다.
이 도시에서 가장 흥미로운 풍경 중 하나는 광장에서 일어나던 일이었습니다. 도시 중심의 광장에서는 매일같이 철학자와 수사학자들이 자기 청중을 모으고 후원자를 얻기 위해 경쟁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의 강의를 들었는지, 누구를 따르는지로 자기 정체성을 표현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 학파의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나는 ○○ 수사학자의 후원자다" 라며 줄을 섰습니다. 멋진 말, 화려한 화술, 카리스마 있는 인물 — 이런 것을 따라 추종 그룹이 만들어졌고, 그 그룹에 속하는 것이 자기 가치를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이 문화가 그대로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약 18개월 머물며 직접 세운 고린도 교회는, 도시의 다양한 사람들을 품은 활력 있는 공동체였지만, 동시에 그 도시의 문화적 병폐도 함께 흡수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던 중, "글로에의 집 사람들"이 한 가지 가슴 아픈 소식을 가지고 옵니다. 그 교회 안에서 분파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12절을 보시면 그 분파의 모양이 이렇게 등장합니다.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각각 자기가 따르는 사역자의 이름을 깃발 삼아 줄을 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울파는 교회의 창립자에 대한 충성으로, 아볼로파는 그의 멋진 화술과 학식에 매료되어, 게바파는 예수님의 수제자라는 베드로의 권위에 의지해, 그리고 그리스도파는 — 흥미롭게도 — "우리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만 따른다"라는 영적 우월감으로 자기들끼리 또 다른 분파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좋은 그리스도의 이름조차 분파의 깃발이 되는 순간, 그것 역시 다른 분파들과 똑같은 죄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가슴 아픈 풍경입니다.
이런 교회를 향해 바울이 편지를 씁니다. 그가 이 편지의 첫 17절을 어떻게 시작하는지를 보시면, 거기에 우리에게 주시는 세 가지 진리가 단계적으로 펼쳐집니다.

첫째 — 너희는 누구인가: 부르심으로 정의되는 정체성 (1~9절)

먼저 1절부터 9절까지를 보십시오. 분쟁하고 갈라진 교회를 향해 바울이 첫 마디를 어떻게 꺼내고 있는지 주의 깊게 들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데네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바울은 책망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그는 먼저 그들이 누구인지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헬라어로 본문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부르심을 받은"이라는 한 단어가 이 도입부의 양 끝과 중심을 묶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1절에서 바울 자신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이고, 2절에서 고린도 성도들은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며, 9절에서는 그 부르심의 목적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것"이라고 선언됩니다. 단 아홉 절 안에 "부르심"이라는 단어가 세 번이나 반복되며 단락 전체를 묶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 너희도 나도 모두 너희의 노력이나 선택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정의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분쟁하던 교회에게 가장 먼저 새겨 넣기 위함이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이뤘느냐", "내가 누구를 따르느냐"가 아니라 "그분이 나를 부르셨느냐"가 우리 정체성의 가장 깊은 자리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2절의 한 단어가 우리 마음을 멈추게 합니다. "거룩하여지고" — 헬라어로 이 단어는 매우 특별한 형태입니다. "이미 거룩하게 된 상태로 지금 존재하는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노력해서 거룩해진 것이 아니라, 부르심이 우리를 이미 거룩한 자로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지요. 곧이어 5장과 6장에서 이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이 줄줄이 폭로될 것을 알면서도, 바울은 출발선에서 그들을 "이미 거룩한 자들"로 부릅니다. 거룩함은 그들의 도덕적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만들어 놓은 현재의 상태라는 것입니다.
청년 여러분, 이 진리가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잠시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회사에 합격하면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떨어지면 가치 없는 사람이 되십니까? 좋아요가 많이 달리면 인정받은 사람이 되고, 적게 달리면 보잘것없는 사람이 되십니까? 누군가의 사람이 되어야 비로소 자기 자리를 찾았다고 느끼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정체성은 끊임없이 흔들리는 모래 위에 세워져 있는 것입니다. 무대가 흔들리면 자기 존재가 함께 무너지는 자리.
그러나 본문은 우리에게 다른 자리를 보여줍니다. 너희의 정체성은 너희가 무엇을 이뤄서 얻어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서 온다. 너희는 이미 거룩하게 되어 있는 자들이다. 회사에 합격하든 떨어지든, 좋아요가 많든 적든, 누군가의 사람이 되든 되지 않든 — 부르심으로 만들어진 그 정체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본문이 청년들에게 주시는 첫 번째 자유입니다.
또 하나, 1절부터 9절 안에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단 아홉 절 안에 "그리스도", "예수", "주"라는 호칭이 무려 열 번 가까이 반복됩니다. 의례적인 인사말 한 단락에 이렇게 그리스도의 이름이 폭우처럼 쏟아지는 것은, 곧 다룰 분쟁 문제의 한복판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한 가지 사실을 확실히 새겨 넣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교회의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 위에 서 있다." 12절에서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라며 사람의 이름이 외쳐지기 전에, 9절까지 그리스도의 이름이 압도적으로 먼저 외쳐진 것입니다. 그 누적된 그리스도의 이름이, 사람 이름의 깃발을 들고 있는 청년들의 손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지요.

둘째 — 너희는 무엇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는가: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 (9절)

그러면 그 부르심의 목적은 무엇이겠습니까? 9절이 그 답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부르심의 목적은 — 사역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봉사하는 일꾼이 되는 것도 아니고, 교회의 임원이 되는 것도 아닌 — 그분의 아들과 깊이 교제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교제"로 번역된 헬라어 코이노니아라는 단어를 잠시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우리말로 "교제"라고 하면 보통 마음 맞는 사람들이 모여 친교를 나누는 정도로 들립니다. 그런데 헬라어 코이노니아는 그것보다 훨씬 깊은 단어입니다. "함께 나눔, 함께 참여함, 함께 가진 자들의 깊은 연합" 이라는 뜻입니다. 즉, 부르심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모든 것을 함께 나누고 공유하는 깊은 연합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분의 마음, 그분의 시선, 그분의 기쁨, 그분의 아픔까지 함께 나누는 자리.
청년 여러분, 우리가 정직해져야 할 자리가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 청년들의 신앙 풍경 가운데 가장 안타까운 모습 중 하나가 — 너무 바쁜데 너무 메마른 신앙입니다. 새벽기도, 큐티, 셀 모임, 청년부 봉사, 찬양팀, 새가족부 도우미, 각종 모임들… 교회 안에서 분주하게 움직이는데 정작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는 어디론가 사라져 있는 청년들이 적지 않습니다. 일주일 동안 스마트폰은 평균 4~5시간씩 들여다보면서, 주님과의 조용한 교제는 5분도 잘 내지 못하는 자리. 알림은 끊임없이 울리는데 주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은 점점 줄어드는 자리.
본문은 그 자리에 정직한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너는 사역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아니면 주님과의 교제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본문의 답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먼저 교제에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사역은 그 교제에서 흘러나오는 열매이지, 교제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리고 이 교제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든든한 안전망이 있습니다. 9절 마지막에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우리의 신실함이 흔들려도 그분의 미쁘심이 우리를 끝까지 지키신다는 것입니다. 8절에서 바울이 미리 선언했지요.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우리의 영적 안전은 우리의 의지력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부르심과 그분의 신실하심에 달려 있다는 이 진리가, 흔들리는 청년들의 신앙에 가장 깊은 위로가 됩니다.

셋째 —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의 연합 (10~17절)

이제 10절부터 본문은 분쟁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1절부터 9절까지 부르심·은혜·거룩·교제를 길게 펼쳐 놓은 바울이, 마침내 10절에서 입을 엽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정체성과 은혜를 길게 먼저 선포한 후에야 명령을 내리는 이유입니다. 만약 연합이 단순히 "이를 악물고 참아내는 것"이라면, 바울은 굳이 1절부터 9절까지 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명령을 내리기 전에 그들의 눈을 먼저 다시 맞춥니다. 너희가 누구인지,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주셨는지, 너희가 어떤 부르심 안에 있는지를 길게 다시 보여 줍니다. 그러고 나서야 10절의 명령이 흘러나옵니다.
이 순서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적 연합은 의지력으로 짜내는 결과물이 아니라, 시야의 회복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열매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저 형제를 어떻게 참고 받아주지" 라는 의지의 자리에서 시작한 연합은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저 형제를 어떻게 보고 계신가" 라는 시선의 자리에서 시작한 연합은 깊이 갑니다. 부모가 자기 자녀를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사랑하지 않듯, 시선이 회복된 자에게 연합은 강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이 됩니다.
특별히 본문에서 바울이 사용하는 단어들이 그 깊이를 보여줍니다.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헬라어로 보면 "같은 마음"의 마음은 사고방식·정신·세계관을 가리키고, "같은 뜻"의 뜻은 판단·결정·가치 기준을 가리킵니다. 바울이 요구하는 것은 단순한 표면적 화목이 아니라, 사고의 방향과 판단의 기준까지 그리스도 위에서 함께 맞추는 깊은 일치입니다.
그리고 "온전히 합하라"로 번역된 단어는 그림이 풍성한 단어입니다. 헬라 일상어에서 이 단어는 그물을 손질하다, 부서진 것을 고쳐 본래 자리에 맞추다, 의학 용어로는 부러진 뼈를 다시 맞추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분쟁에 의해 찢어지고 어긋난 공동체를 — 마치 부러진 뼈를 정성껏 맞춰 다시 한 몸이 작동하게 하듯이 — 본래의 자리에 회복시키라는 것입니다. 분쟁이 공동체에 가하는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그 회복이 얼마나 정성스러워야 하는지를 한 단어 안에 다 담아내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13절에서 바울은 가장 통렬한 한 마디를 던집니다. "그리스도가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느냐." 이 한 마디 안에 분파의 죄의 본질이 다 드러납니다. 분파는 단순한 인간관계의 갈등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 그리스도의 몸을 조각조각 나누어 가지려는 시도이며, 결국 그리스도론의 문제로 귀결되는 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저 형제를 위해서도 죽으셨고, 저 자매를 위해서도 자기 피를 흘리셨는데, 우리가 사람의 이름·진영의 이름 때문에 그 한 몸의 지체와 등을 돌리고 있다면 —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그 피를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청년 여러분, 12절의 그 깃발들이 오늘 우리의 어휘로 번역되면 어떻게 들리는지 잠시 함께 들어 보시지요. "나는 ○○ 목사님 설교만 들어." "나는 그 유튜브 채널 구독자야." "나는 ○○ 교회 출신이라 다른 교회는 좀…" "나는 ○○ 신학교 라인이야." "나는 ○○ 셀이라서 다른 셀이랑은 잘 안 맞아." "나는 그 형 사람이야, 그 사람만 따라가." 들으시면 들으실수록 어딘가 익숙하지 않으십니까? 우리 청년 공동체 안에서도 학년별로, 출신 학교별로, 직업별로, 결혼 여부별로, 친한 그룹별로, 봉사 부서별로 — 미묘한 분열의 깃발들이 올라옵니다. 그 깃발이 사람의 이름이든 그룹의 이름이든 진영의 이름이든, 그것이 그리스도라는 이름보다 먼저 자기 정체성을 차지하는 자리. 그 자리에 본문은 다시 묻습니다. "그리스도가 나뉘었느냐."
마지막으로 17절을 함께 보시지요. 바울은 분쟁의 깃발이 결국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로 표현되었기 때문에, 14절부터 자신이 직접 세례 준 사람이 그리스보, 가이오, 스데바나의 집뿐이라며 이름을 일일이 댑니다. 그러고는 17절에서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 한 절 안에 깊은 통찰이 숨어 있습니다. 바울이 세례 자체를 가볍게 본 것이 아닙니다. 그가 강조하고 싶었던 것은 — 자신의 사역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가 보내심을 받은 이유는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약 바울이 세례를 많이 베풀었다면 "내가 바울에게서 세례 받았다"고 자랑하며 그를 따르는 그룹이 더 많이 생겼을 것이고, 그것이 곧 분파의 연료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처음부터 자기를 따르는 그룹이 만들어지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거리를 두는 사역을 해 왔습니다. 그의 모든 수고는 사람을 자기에게 묶어두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이었습니다.

결론 — 진짜 영적 시금석, 그리고 그 시금석 앞에서

이제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신약 성경 전체가 일관되게 외치는 한 가지 진리를 함께 마음에 새기고자 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한일서 4장 20절). 예수님 자신도 마지막 만찬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한복음 13장 35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 바울은 우리가 오늘 본 본문 바로 직후, 3장 1절부터 3절까지에서 이 분쟁하는 고린도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진단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그들이 자기들을 아무리 영적이라고 자랑한들 — 고린도 교회는 은사·지식·언변에 풍성한 교회였습니다 — 분쟁이 있는 그 자리는 영적인 자리가 아니라 육적인 자리라는 것입니다.
청년 여러분, 이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묻고 있겠습니까? 우리가 진짜로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진짜로 성령 충만한지의 시금석은 — 우리의 영적 자기 평가가 아닙니다. 새벽기도를 얼마나 자주 가는가, 큐티를 얼마나 깊이 하는가, 봉사를 얼마나 열심히 하는가가 아닙니다. 그 시금석은 — 옆에 있는 형제·자매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에서 드러납니다. 새벽기도의 깊이는 그 자매를 향한 시선이 어떻게 변해 가느냐로 검증됩니다. 큐티의 진정성은 그 형제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느냐로 드러납니다.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진짜라면, 그분의 시선이 그 형제·자매를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가 자연스럽게 내 마음에도 흘러들어 올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말씀 앞에서 한 가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약 오늘 이 자리에서 — 어떤 청년이 자기 안에 분열의 마음, 미움의 마음, "저 형제는 좀 그래" 라는 굳어진 시선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면, 그 자리에서 가야 할 곳은 자기 비난이 아닙니다. 절망도 아닙니다. 그 자리에서 가야 할 곳은 — 우리를 부르신 그분께로 다시 돌아가는 자리입니다. 우리를 처음 부르셨고 그 부르심을 끝까지 지켜 가실 그분의 미쁘심 앞으로 다시 나아가는 자리입니다. 시선이 어긋나 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 시선을 다시 맞춰 주실 수 있는 분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그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본문 9절을 다시 한 번 들어 보십시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우리의 신실함이 마지막 안전망이 아니라, 그분의 미쁘심이 우리의 마지막 안전망입니다. 우리가 자꾸 흔들리고 자꾸 어긋나도, 그분은 우리를 그 부르심 안에 끝까지 견고하게 세워 가실 분이라는 이 진리 — 이것이 오늘 우리가 안고 돌아가야 할 가장 큰 위로입니다.
청년 여러분, 오늘 한 주간을 시작하시면서 이 세 가지를 마음에 품고 가시기를 바랍니다.
첫째, 너희의 정체성은 너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부르신 그 부르심에서 온다. 회사도 학교도 좋아요도 누군가의 사람이 되는 것도 너희를 정의하지 못한다. 너희는 이미 거룩하게 되어 있는 자들이다.
둘째, 그 부르심의 목적은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깊은 교제다. 분주함에서 한 발 물러나 그분과 마주 앉는 시간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라.
셋째, 그 교제의 진정성은 옆에 있는 형제·자매를 어떻게 대하는가로 검증된다.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묶인 한 공동체임을 기억하고, 그 한 몸을 찢는 자리에서 일어나 한마음·한뜻으로 합하는 자리로 나아가라.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우리를 부르신 신실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 본문을 통해 다시 한 번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주께서 우리를 그 아들 안으로 부르신 그 부르심에서 온다는 사실을 잊고 살았던 어리석음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세상의 평가, 사람의 인정, 좋아요의 숫자, 누군가의 사람이 되는 자리에서 우리의 가치를 찾으려 했던 자리에서 돌이키게 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거룩한 자로 부르신 그 부르심을 매일 새롭게 기억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리를 부르신 가장 본질적인 이유가 사역이 아니라 주의 아들과의 깊은 교제임을 잊지 않게 하옵소서. 너무 바쁜데 너무 메마른 신앙의 자리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고, 매일 그분과 마주 앉는 그 자리를 가장 우선순위에 두는 청년들이 되게 하옵소서. 사역이 교제를 대신할 수 없음을, 분주함이 친밀함을 대신할 수 없음을 깊이 깨닫게 하옵소서.
그리고 무엇보다 —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는 그 자리, 분열의 깃발을 들고 있는 그 자리, "저 형제는 좀 그래" 라는 시선이 굳어 있는 그 자리에서, 다시 주께로 돌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의지로 그 사람을 받아들이려 애쓰는 자리가 아니라, 주의 시선으로 그 사람을 다시 보게 되는 자리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옵소서. 우리 청년 공동체가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묶인 한 몸임을 기억하며, 부서진 뼈를 정성껏 맞추듯 분열의 자리를 회복하는 공동체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신실함이 아니라 주의 미쁘심이 우리의 마지막 안전망이심을 의지하며, 그 부르심 안에 끝까지 견고하게 세워 주실 주를 신뢰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자답게 한 주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시고, 다음 주일에 다시 한 몸으로 모여 주를 예배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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