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읽는 주기도문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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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는 주기도문_09_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2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YkK8IEo4Kl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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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 제9장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2.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태복음 6장 11절

I. 들어가는 말

앞장에서 우리는 주기도문 네 번째 기도에서 양식이란 히브리 사람들이 주식으로 삼는 빵인데 이것은 하나의 제유법적 표현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양식은 단지 주식으로서의 빵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다운 삶을 영의하기 위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정신과 영혼 그리고 육체의 필요를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출애굽기 16장의 만나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이 간구는 바로 이어지는 나를 위해 필요한 양식의 공급을 구하는 기도임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기도물을 마주하며 가장 중요하게는 인간이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01:05) 그것이 바로 기도를 가르쳐 주신 주님의 바람이었습니다. 그렇게 의지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할 기도에서 한 가지를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해서 우리가 간과하기 쉬운 우리에게라는 부분에 대해서입니다.

II. 공동체 기도

이제 우리는이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공동체적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춰 보겠습니다. 이것은 개인주의가 보편화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가깝게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루어야 할 사랑의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멀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한 모든 이웃들의 일용할 양식에 관심을 둘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02:09) 기도는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먹을 양식을 풍족히 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양식은 우리의 노동 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을 통하여 기도의 응답으로 받는 것입니다.

A. 공동체적 기도의 지평.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간구에서 우리에게라는 구절이 갖는 공동체적 성격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겠습니다.이는 기도생활의 공동체적 지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충분히 주심으로 우리가 배부르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굶지리고 있다면이 간구는 아직 응답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 크게 두 부리로 나눌 수 있습니다.
(03:04) >>

1. 일차적 지평: 그리스도 안의 지체들

첫째로 이 간구가 적용되는 일차적 지평은 우리 가족과 그리스도 안의 지체들입니다. 갈라디아서 6장 10절. 주기도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지체될 기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각각게는 제자들에게 멀게는 이어지는 신약의 교회의 모든 성도들에게 주기도물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나 자신뿐만 아니라 가족 그리고 우리가 몸담은 교회의 모든 지체들의 양식이 없어 굶지 않고 인간으로서의 전놈을 유지하는 삶을 영의 해 가도록 말입니다.
(03:58) 또한 우리는 실제로 우리의 소유를 그들에게 내어주어 그들도 일용할 양식을 공급받으며 하나님 앞에서 주기 도문에 따라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먼저 가족들에게 그리고 믿음의 지초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진리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큰 흉년을 겪으며 매우 궁핍한 처지에이었을 때 사도 바울과 이방 교회들이 헌신하여 거역의 연보를 전달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군주를 면할 수 있었고 고린도후서 8장 20절 그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재물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으로서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을 알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의 가르침대로 헌금을 한 이방 교회의 성도들 대부분 그렇지 않습니다.
(04:54) 아마도 그들은 특별히 믿음의 가정들을 어 선하게 대하라는 바울의 권면에 귀여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기에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에게 할지니라. 갈라디아서 6장 10절. 당시 이방 교회의 성도들에게 교회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군피한 군피에 빠진 형제들을 돕는 것이 복음의 정신한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기쁨으로 헌신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 1, 2절 그렇습니다. 우리는 모두 사람을 돌아보되 먼저지 교회와 그리스도의 교회 속의 지체들을 돌아봐야 합니다.

2. 궁극적 지평:이 세상의 모든 인류,

둘째로이 간구가 적용되는 이차적 지평은 인류 전체입니다.
(05:49) 바로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웃들이 그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는 양자적 아버지가 되시지만이 세상의 모든 인간에게는 창조주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구속주 되심 모두를 인류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인간뿐 아니라 세상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은혜를 의존합니다. 우리는이네 번째 간구를 단지 믿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불신자들 심지어 이교들에게까지도 적용하여 기도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 정치인이 아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지라도 복음의 정신으로 볼 때 굶주리고 있는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은 매우 시급합니다.
(06:51) 소위 북한이 고난의 행군기라고 부르는 시기를 포함하여 1994년부터 2008년까지 식량난으로 사망한 북한 인구가 최대 113만 명에이를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UN 식량 농업 기구는 2006년 10월 로마에서 제출한 보고서를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렸습니다. 2005년을 기준으로 10세 미만의 아동 5초에 한 명씩 굶어 줄고 비타민 A 부족으로 시력을 상실하는 사람이 1분의명 꼴로 생겨나고 있으며 당시 세계 인구의 1분의 이르는 8억 5천만 명이 심각한 만성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유니세프 등 국제 구호 단체들이 아프리카의 에이즈약을 지원하지만 정작 환자에게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다는
(07:56) 안타까운 소식도 있습니다. 잔바브웨이의 보건소에서 H 검사를 받는데 드는 돈은 5달러입니다. 거기에 아이들이 보건소까지 가는 차이 10달러를 합쳐 15달러만 있으면 약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이 돈이 없어 죽는 아이들이 많다고 합니다. 잠바부외의 부패한 정부 관리들의 부정은 이러한 사항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의료 봉사를 온 의사들에게 진료 허가 비용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여러 나라에서 지원하여 구입한 약품 상자는 비가 세는 창고에 썩어하는 일이 비비지하다고 합니다. 얼마 전 신문에는 해마다 세계에서 굶주임으로 죽고는 사람이 2억 5천만 명의 다른 기사가 실렸습니다.
(08:48) 아프리카 대륙에는 4세 아이 명 중 다섯 살이 되었을 때 살아서 만나는 아이가 세 명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아이들이 굶주임과 술변으로 두고하는 것이니 이런 현실 앞에서 10여년 전에 미국이 주축이 되어 버린 전 세계 테로와의 전쟁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듭니다. 2004년 8월 이라크 전쟁에 소유된 비용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전광판이 뉴욕 매네 타임스케어에 세워졌습니다. 프로젝트 빌보드 협회에서 만든이 전광판은 그다일 수요일에 1345억 달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횟수는 하루에 1억 7,700만 달러씩 증가하였는데 이것은 이것을 이것은 시간당 약 740만 달러의 이르는 액수입니다.
(09:49) 미국은 2003년 6월부터 2004년 9월까지 1년만을 놓고 보았을 때 매달 48억 달러 우리나라로 약 5조 4천억 원의 비용을 전쟁에 지출한 셈입니다. 워싱턴의 한 경제 분석하는 직접적인 전비 말고도 미국인이 감당해야 할 반적 비용이 만만치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우선 1라크 전쟁으로 유가가 취소 약 1500억 달러 이상이 더 지불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16, 명의 전쟁 부상자들을 평생 치료하고 재활하도록 돕는데 어 쓰게 될 비용만도 약 2,500억 달러의 달 것으로 추산하고 전쟁으로 인해 손실된 미국의 전투력을 전쟁 반발 이전 수준으로 다시 끌어올린데만 해도 약 1천억 달러 이상이 소유될 것으로 관측하였습니다.이는
(10:51) 이는 이라크 전쟁의 대가로 미국인들이 한한 해 평균 약 2,억 달러라는 거액의 청구서를 받고 있는 셈이라고 합니다. 2000년 기준으로 전 세계의 1년 군비줄 총액 7,800억 달러는 세계의 가장 가난한 48대국의 부채를 모두 탐감해 주고 전 세계에 걸쳐 빈민촌을 다 퇴하고 AG 체역법과 예방 주사를 보급하고 영향조 및 기아를 퇴취하고 오전충을 보존하고 남민들을 정착시키고도 남을 정도의 엑스라고 합니다. 물론 우리는 정치가도 아니고 군사 전가 전략가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 막대한 돈을 전쟁에 퍼붙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만약에 미국이 정치 이념과 종교를 초월하여 그 막대한 자금을 제3 세계에 굶주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하여 인도주의적으로 사용했더라면 러와의 전쟁에 힘을 쏟는 것보다 훨씬
(11:56) 더 많은 효과를 거두고 미국도 보다 안전하지 않았을까요? 전쟁으로 얼마나 많은 무구한 사람들이 더욱 극심한 굶주임과 가난으로 고통을 받게 되었을까요?

B. 풍족히 주시는 하나님.

만일 어떤 사람이 탐욕과 분쟁으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이웃들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것은 정의와 사랑을 구하는 기도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네 번째 간구를 대하면서이 세상 인류에게 양식을 풍족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만일 어떤 식으로든지이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양식을 주지 않으시고 그로 인해 사람들이 굶주여 죽어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의 일부이기라도 한다면 하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도록 가르치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12:59)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족히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삼역과 방탕은 식량 공급을 부족하게 만들었습니다. 대규모 농업으로 돈을 버는 사람들은 첨단 장비와 정보 체계를 가지고 공물 가격이 떨어지면 생산을 줄이거나 경작을 포기합니다. 반대로 공물 가격이 올라갈 것 같으면 투자 시장에서 모아들인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으로 전 세계 공물들을 매점 매하여 가격을 조작합니다. 그 때문에 처음에는 적은 돈으로 공물을 구입할 수 있었던 사람들도 나중에는 비싼값을 치어야 합니다. 그 와중에 가난한 사람들은 당연히 식량을 얻는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조이 적은 양의 고기를 얻기 위하여 많은 양의 복식들이 사료로 제공되는 현실에 주먹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13:55) 더 좋은 음식에 대한 인간의 탐욕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식량 문제를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이 같은 사실이 우리에게 다음에 세 가지 사항을 숙구하도록 가르쳐 줍니다. >>

1.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함에 대하여

첫째로 하나님께 대한 의존입니다. 우리는 삶의 모든 필요에 있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하는 지극히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넘치도록 주셔서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모든 조건들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을 다만 즐기는 것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진리를 이해하기 위한 기초로서 인간의 인식 대상인 사물을 사용함과 향유함이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과 그밖에 다른 지상의 사물들로 나누어 설명하였습니다.
(14:55) 사용해야 할 사물은 보다 더 높은 궁극적 목적을 위하여 인간에 의하여 수단으로서 쓰여야 할 대상들이며 누려야 할 사물 사물은 그것들을 사용하는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향유되어야 할 대상을 가리킵니다. 다시 말해서 후자는 더 이상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 기독교 교약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물은 향유할 대상과 사용으로 그칠 대상과 향유하고 사용할 대상이 있다. 향유해야 할 사물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 일체이시다. 그 밖의 것들은 그 사물의 향위에 도달하기 위해 사용에 그칠 사물일 뿐이다.
(15:48) 그러므로 다른 사물을 향유하고 또 사용하는 우리 자신, 인간은 또한 별개의 사물이다. 여기서 누려야 할 사물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랑의 대상입니다. 고유한 의미에서는 하나님만이 누려야 할 사물입니다. 그리고 파생적으로 인간은 그 안에서 누려야 할 사물이 됩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사물들은 남김없이 사용해야 할 사물입니다. 그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할 것이 넷 있으니 하나는 우리 위에 있는 것이요 둘째는 우리 자신이요 셋째는 우리 이웃이요 넷째는 우리 밑에 있는 것이다. 둘째와 넷째에 관해서는 아무 명도 내린 바 없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자기 자신 외에는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16:45) >> 인간의 모든 불행은 사용해야 할 사물과 누려야 할 사물의 질서를 혼동하는데 서옵니다. 누리고 사랑해야 할 하나님을 수단으로 사용하고 수단으로 사용해야 할 것을 누리고 사하려 하는데 인간의 모든 불행이 시작됩니다. 다시 말해서 사용해야 할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살도록 주신 수단들입니다. 마치 연필를 어 글을 쓰는 목적에 기여하고 책은 지식을 습득하고자 하는 목적에 위반한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영광을 위해 살고 형제들을 사랑하라고 필요한 일용할 양식과 물질뿐만 아니라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들까지 주십니다.
(17:42) 이것들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즐거움을 위해서 주신 것들도 그것들을 즐겁게 사용함으로써 우리가 보다 더 높은 가치와 목적을 위해 살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의 전음성을 위해서이 모든 것들을 최소한으로 누리며 살지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인류 사이를 당신의 사랑으로 교통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창조의 계획에 참여하게 됩니다. 교회는 이러한 인류의 인류 사회 궁극적인 이상을 먼저 성취하도록 부름받는 공통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용해야 할 삶들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누리고 사랑해야 할 것들이 아닙니다.
(18:29) 우리가 진정으로 누리고 사랑할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고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들 뿐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참으로 온전하다면 사람들을 향한 사랑과 다를 수 없고 사람들을 향한 사랑이 참으로 온전하다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사랑과 다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뉴스는 자신의 책 3위체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는 것 어 사랑을 하는 것은 어떤 것을 사랑한 것 자체를 사랑한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사랑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사람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19:26) 왜냐하면 하나의 단어는 어떤 것을 가르키고 있고 그 단어 자체가 가르키고 있지만 단어가 어떤 것을 지시하는 것 자체를 지시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단어 자체를 어 가르키는 것이 아닌 것이 되듯이 사랑도 진실로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분명하나 사랑이 어떤 것을 사랑하는 것 자체를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신을 사랑으로 사랑하지 않는 샘이 된다. 그러므로 사랑은 우리가 그 사랑을 가지고 사랑하는 자 위에 무엇을 사랑하고 있다는 말인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시작하나면 우리가 형제를 바로 그 대상이다. 우리가 사랑으로 형제를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것이다.
(20:24) >> 사랑 없는 정의도 정의 없는 사랑도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 없는 정의에는 목적이 없고 정의 없는 사랑은 누군가에게는 불리를 강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정의를 완성하고 참된 정의는 사랑을 완성합니다. 신앙의 이러한 이치에 대하여 아우쿠스티누스는 같은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삶과 행실에 있어서 지식과 신중함을 가지고 각자의 목을 몫을 각자에게 돌리는 마음이 의롭다는 것을 분별하고 말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는 누구에게 어떠한 빛도지지 않도록 스스로 의롭게 살고 의롭게 행동하며 각자의 몫을 각자에게 돌려야 한다.
(21:20) 그러므로 사람들은 사랑하는 자는 그들이 의롭기 때문에 혹은 그들을 의롭게 하려고 그들을 사랑해야 한다. 이처럼 실제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도 자신이 의롭기 때문에 혹은 자신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사랑하며 이웃을 나처럼 사랑하는 것도 이와 같아야 어떠한 위험성이 없다. 우리가 진리에 밀착하여 의롭게 살고 그렇게함으로써 사람들을 사랑하기 이전에 모든 멸절하는 것들을 제거하고 이로서 사람들이 의롭게 살도록 의도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남북이 분단된 긴장 상태에서 우리나라에서는 많은 군인들이 희생하며 나라를 지킵니다. 그래서 나라는 국방 능력을 유지하는데 상당한 예산을 사용합니다.
(22:15) 그 예산은 단지 총칼이나 대포, 전투기 등의 무기를 사는데만 쓰는 것이 아닙니다. 군인들이 타고 다니는 자동차, 먹는 음식, 그들이 입는 옷 등등 많은 것들을 공급하는데 사용됩니다. 국가가 이렇게 많은 예산을 드려 군인들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 자체를 즐기는데 그치지 거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유사시에 군인들이 그 모든 혜택을 사용하여이 나라를 외부의 친입으로부터 보호해 줄 것을 기대하며 제공하는 것입니다. 만약 군인이 본분을 입고 국가가 제공한 온갖 편의를 누리면서도 자신들의 더 높은 가치인 국방의 사명을 뒷전으로 미룬다면 국민의 신의를 배반하는 것입니다.
(23:10)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후위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일용할 양식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의 둘에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하여 살게 하시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하여 그리하여 궁극적으로 우리가이 땅에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 이바지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2. 음식의 맛을 즐기는 것에 대하여

둘째로 음식맛을 즐기는 것에 대하여 적절한 입장입니다. 우리는 교회 역사에서 일용할 양식에 대한 세 가지 해석을 정통을 해석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극단적 금욕주의이고 둘째는 극단 극단적 방탕주의고 셋째로는 성경적인 입장입니다.
(24:06)

a 극단적인 금욕주의

첫째로 극단적 금욕주의의 해석입니다. 4세기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수도운 운동은 사람들이 극도의 금융과 절제 속에서 살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 복음의 정신이 아니라 그리스철학과 신비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금욕주의자들은 인간의 육체를 비롯한 모든 물질은 악하며 정신과 영혼에 비하여 열등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하여 육체를 마천하게 취급하고 확대함으로써 영혼은 육체의 감옥을 벗어나 고향된 상태에이를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러한 금욕주의 사상을 따르는 이들은 음식 먹 음식을 먹으면서 맛을 느끼고 행복해 하는 것 자체를 죄라고 믿었습니다.
(24:55) 더욱이 스토화적 금욕주의를 따르는 경향이 짓던 이들은 음식에 음식을 맛있게 조리하는 것은 인간의 부패한 식욕을 더어 욕망이 흐르게 할뿐 아니라 신적 세계를 관조하는 도생활의 방해가 된다고 습니다. 그래서 조학에 음식을 그대로 못건했습니다. 기독교는 특정 음식의 소비를 전적으로 금지하기보다는 사순절 등의 전례를 따르는 시기에 근거하여 또는 사도 생활의 규칙에 따라 아 수도 생활의 규칙에 따라 제약을 부과하였습니다. 그러나 탐심과 복식에 대하여 이슬람이나 유대교회에 비하여 더 심한 불안을 느꼈습니다. 모든 종교와 철학의 전통에서 습관적인 과식을 혐오하였지만 기독교는 아예 탐식을 죽음에 이르는 일곱 가지 죄의 목록에 올려 놓았습니다.
(25:55) 식에는 여러 유행의 잘못된 음식 섭취 방식이 포함되었는데 그 명칭도 다양합니다. 너무 많이 먹는 니무스 산업게 열심히 먹는 아르텐테르 14시간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먹는 프로테프 프로펠러 너무 갓비싼 음식을 먹는 라우때 맛있는 것만 골라먹는 스튜디오 우즈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음식을 먹는 것은 시각, 미각, 후각, 심지어 천거까지 오각이 다 동원되는 소비의 행동입니다. 다시 말해서 음식이 우리에게 주는 기쁨은 음식의 모양과 맛 냄새뿐만 아니라 직감이라도 감이라고 일컫는 입안의 촉감 그리고 음식을 씹을 때 나는 소리까지 공원 가능한 모든 감각적 요소들에 달려 있습니다.
(26:55) 그것들을 씻고 맛보고 삼키는 일은 비록 짧은 순간에 이루어지지만 음식은 우리에게 인상적이고 행적인 정동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기분이 가라앉고 우울할 때 사는 사람과 함께 식사만 맛있게 먹어도 마음의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음식을 섭취하는 일에 이러한 감정적 특성들은 또한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탐리에 빠지게 하는 올무가 되기도 합니다. 아우구스튜누스가 다음과 같이 고백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음식의 부정함이 아니라 욕심의 부정함입니다. 극단적 금욕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음식을 섭취하면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 자체를 정지하지만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27:50)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자유가 있고 그것을 즐기면서이 모든 맛들과 음식 재료들의 식감과 향치 그리고 그것들이 우리의 육체와 정신의 건강해 주는 유익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를 찬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분이 우울할 때 초콜릿이나 바나나를 먹으면 그것들이 인체에서 세로토닌이라는 친경 전달 물질의 생성을 돕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세로토닌이라는 물질은 의학적으로 인간에게 행복을 느끼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단지 먹는 즐거움이 아니라 이런 지식들을 가지고 음식들을 섭취한다면 충분히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전도서 9장 7절.
(28:35) 그러나 음식을 섭취하면서 느끼는 즐거운 감정의 변화를 쾌락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을 높이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에 대해 확정적으로 단언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가 자신의 책 고백록에서 자신이 끝까지 모함 가운데 자유로울 수 없었던 욕망이 식욕이었다고 말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고백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음식을 약으로 간조하는 것에 명심해야함을 가르쳐 주셨으나 궁핍의 성가심을지나 포만의 안정으로 접어드는 순간 욕종에 덫이 저에게 유혹의 촉수를 뻗습니다. 먹고 마시는 목적은 건강에 있지만 위험스런운 낙이 시녀처럼 뒤따르는 경우도 있고 오히려 탐심의 낙에 이끌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29:34) 건강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거나 말하고자 할 때라 할 때에라도 실제로는 그 낙이 동기에 목덜 목덜미를 잡습니다. 막과 낙은 동일하지 않습니다. 건강에 유익한 음식이 대체로 유쾌한 맛은 없습니다. 때때로 영향을 요구하는 것이 몸의 필수적인 돌봄인지 혹은 지각적인 욕망에 덫이 그걸 수행하고 하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생깁니다. 나의 불행한 영혼은 이러한 불확불 불확실 확실성 속에서 즐기고 있으며 그 속에서 변명의 명분을 마련하고 있습니다. 적절한 건강에 충분한 것이 발견되지 않아 건강을 빌미로 쾌락의 꼬리를 감출 수 있음을 슬금원이 즐기면서 말입니다. 이러한 유혹들을 저는 날마다 뿌리 뿌리치려 하고 감히 당신의 오른손을 소환하여 저의 도움으로 삼고자 하오며 나의 수북한 탄식도 당신에게 쏟습니다.
(30:36) 저에게는이 문제를 벗어던질 해법이 없는 탓입니다. 심지어 교회사 속에서 어떤 수도사들은 일평생 익히지 않은 국식을 날로 씹어 먹는 것 외에는 어떠한 음식에도 입을 대지 않았다고 하니 음식이 인간의 영혼과 정신의 맑은 상태를 어지럽게 한다고 믿었던 이들은 음식을 먹으며 기쁨을 누리기는 그것을 죄악시했던 것입니다. 아시의 프란체스코는 식사할 때마다 그 음식에서 어떠한 맛도 느끼지 않기 위하여 음식 위에 재를 뿌리고 먹었다고 합니다. 연한 폰투스 출신의 에바그리우스는 4세기의 사막 교부였습니다. 그는 광야에서 극단적인 금욕 생활을 실천하며 탐식의 위험성을 고발하였습니다.
(31:31) 그는 탐식이야말로 모든 사악한 마음의 자양분이며 지성의 활동을 오염시키는 주범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탐식은 정욕의 어머니이자 사악한 마음의 자양분으로 단식을 미루게 하고 고행을 방해하며 도덕심의 적이 된다.이는 막갈스러운 양념과 음식을 꿈꾸게 하는 버릇없는 어린아이며 메어둘 길이 없는 광란이다. 삼식은 건강을 시계하여 내장을 가로막아 신음을 내보내고 거칠 것 없는 분노를 터뜨리며 정욕과 공모하여 지성을 오염시켜 불면의 밤과 아울한 죽음을 선사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주 미묘한 문제가 있습니다. 만약에 음식마다 각각의 특별한 맛이 없다면 사람들은 먹는 즐거움에 탐닉하여 정신을 어어 어어지럽히지는 않겠지만 음식에 대한 욕망은 아주 떨어져서 건강을 해치게 될 것입니다.
(32:3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음식마다 적당한 맛들을 주셨고 인간들이 지혜를 사용하여 그것들을 더욱 먹고 싶게 만들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까마귀를 통해 엘리야에게 곡식 가루가 아닌 떡을 먹이셨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절. 음식을 먹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몸이 아플 때 입맛이 없다고 한동안 음식을 섭취하지 않으면 회복이 늦어지거나 병세가 악화되기 쉽상입니다. 기력이 없을 때에는 한끼 식사만 즐겁게 먹어도 힘이 나고 침체되었던 감각들이 깨어나 삶의 의욕이 생기기도 합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식탁에서 누리는 교재는 하나님의 축복이며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33:21) 오늘날 과도한시기 업법으로 인한 의학적인 부작용들과 현식에서 오는 영향학적 불균형은 적당한 음식의 섭취가 건강한 몸의 보존을 위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줍니다.이를 일을 볼 때 만약 식생활에 있어서 극단적 금욕주의의 실천 종기가 육체를 악한 것으로 보아 미워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면 신학적으로 더욱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물질을 악한 것으로 보는 플라톤주의의 사고 방식입니다. 우리의 몸은 영혼과 함께 성령께서 하시는 전이며 부활의 날에 다시 살리심을 받아 영원히 하나님을 참미할 우리 영혼의 그릇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19절 사도행전 2장 26절 고린도전서 15장 44절 우리의 영혼과 함께 몸도 거룩한 구원의 대상이며이 둘이 모두 죄와 사망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야 구원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34:23) 그러므로 우리가 음식에서 맛을 느끼고 그것을 즐거워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하는 극단적 금욕주의는 비성경적입니다. >>

b 극단적 방탕주의.

둘째로는 음식에 대한 방탕을 허락하는 해석입니다. 이것은 음식에 대한 또 하나의 비성적인 태도입니다. 이것은 인간 그 맛을 호리는 음식이 감각에 취하여 마음을 무작증 풀어 놓고 방탕과 탐욕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며칠 전 서울의 어느 호텔에서 여섯 명이 함께하는 1500명짜리 어 저녁 식사를 특별 상품으로 내놓았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대체 한끼에 100만 원이라는 식사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을까요? 아무리 비싼 음식을 먹더라도 혀끝에 그 다양한 음식이 느껴지는 시간은 기로도 15초입니다.
(35:21) 뱃속에 들어가면 아무런 맛도 느끼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단 몇 초 동안의 쾌락을 위해서 그렇게 막대한 돈을 쓰고 거기에 행복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음식은 몸을 몸의 활동을 위해 사용이 돼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칫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본분을 망각하고 음식 자체가 주는 맛에 취하여 그 노예가 됩니다.
1) 로마와 중세 교회의 방탕
20세기 최고의 요사로 불렸던 네이몽 올리베는 식탁의 역사를 주제로 한 프랑스인의 식탁이라는 책에서 고대의 노마의 식사의 방탕함에 대하여 당황과 같이 저술하였습니다. 가장이 초대하는 만찬의 초대 손님은네 다섯 명이었고 가장의 부인과 가족 또는 친척이 함께했다.
(36:20) 식사는 다시 시작하여 8시에 끝이 났다. 그리고 가족들이 물러가고 뒤어 여자, 악사, 소년들을 불려드렸다. 유자형의 중앙에 다양한 어 요리를 장식한 테이블을 옮겨진다. 테이블은 접시에 여러 단을 쌓아 만들었는데 한 차례 다 먹고 나면 새로운 요리를 가득 쌓은 테이블이 운반된다. 그들의 식사는 1부와 2부로 나누는데 2부 식사를 하면서 점차 파티로 바뀌게 된다. 식사가 끝날 쯤 여자들의 옷을 벗기 시작한다. 그리고 바카스 노마시나에 나오는 술의 여신 앞에서 건을 하며 앞으로 뒤에 그리스 신하에 나오는 미와 사랑의 여신에게 희생을 바친다. 실제로 15세기에 그들이 중에 공중 목욕탕이나 사창과 매은 굴에서 벌거벗은 남자들이 식탁을 둘러앉자 음식을 지키는 풍경들이 등장하는데이는 실제로 풍경이기보다는 음식에 대한 욕망과 성에 대한 욕망이 밀접하다는
(37:26) 점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어 중세 교회에서도 사치로운 식사를 추구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데프리초서나 어 프랑스 나블레 같은 작가들에게 그러한 성자들은 조롱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탐식에 경계하는 설교를 하고 난 후에 주일에 호사르는 오천에 식을 가아 불이나게 달려나가는 부류였습니다. 실제로 중세 시대의 성시자되는 특정 축기를 정하여 일종에 어 의식화된 탐식을 지켰다고 합니다. 특히 12월 28일 아기의 날 곧 예수 탄생시 헤롯에게 죽임을 당한 아이기들을 추모하기는 절기에 열리는 바보들의 축제 때에는 며칠 동안 음식과 술로 흥청거렸다고 합니다.
(38:27) 또한 이탈리아 북부의 성자들은 정해진 기춘양의 식사을 하라는 교양청의 지시에도 아란곳 하지 않고 탐욕스러운 대시가들로 유명했습니다. >>
2) 식생활의 두 방탕
방탕한 인간의 마음이 양심의 가책을 가장 적게 받으며 질법하게 욕망을 따라 마음껏 행할 수 있는 방탕이 탐식과 포식입니다. 식생활의 방탕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집니다. 첫째로는 양에 대한 탐닉입니다. 이것은 음식 섭취에 있어서 필요의 양을 먹으려는 욕망의 탐으로 나타납니다. 우리가 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육체가 건강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육체가 병들면 음식에 대한 갈망이 줄게 됩니다.
(39:23) 미각을 잃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배고픔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방탕은 항상 개다하고 과다하고 절제를 잃는 마음의 욕망에서 비롯됩니다. 힘겹게 배부르도록 먹는 것은 인간이 심리적으로 다음에 다음에는 이렇게 음식을 제대로 섭취할 기회가 기회를 갖지 못할 수도 있다는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반복되면 배 부르도록 포식하지 않으면 심리적으로 허전하기 때문에 음식으로 마음의 공허함을 달래는 달래게 되는데 이것이 포식의 원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의 경향은 넓은 의미에서 정욕입니다. 좁은 의미에서는 성적인 욕망이지만 더 넓은 의미에서는 자기를 주인삼는 욕망의 총체입니다.
(40:21) 둘째로는 맛에 대한 탐입니다. 음식을 섭취할 때 맛에 대한 탐닉은 양에 대한 탐보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 더욱 나쁜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탁월한 요리는 강력한 전전제 국가의 역사를 가진 나라에서 발전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영국 요리나 그리스 요리가 탁월하다는 말은 별로 들어보지 못해서도 프랑스 요리나 이탈리아 요리가 뛰어나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프랑스 사람들이 요즘 어떻게 지내라는 동료들의 질문에 대해 자신의 상황이 불만족스러울지만 울지만 울 불만족스러울치면 요즘 매일 영국 요리 먹고 있어라고 대답한다는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유머입니다.
(41:19)
3) 미각과 비인간화.
맛에 대한 인간의 탐닉은 종종 비인간화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절대로 절대 왕정시대 프랑스 공정에서는 교리사들이 왕과 귀족들을 위하여 매일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압박함금 때문에 공매여 죽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중국 베이징의 명물로 꼽히는 오리구인은 그 역사가 주 6세기 남북조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합니다. 우리가 중국에서 볼 수 있는이 명품 오리구의 조립법은 영나라가 남경을 수도로 정한 후 만가의 요리 망 민가의 오리 요리 방식의 화덕에 굽는 과정을 더하면서부터 확립되었습니다. 지금도 베이징에는 19세기 말 청나라 시대에 개정한 체취더라는 어 오리구의 전문점이 있습니다.
(42:18) 10여년 전 그 식당을 방문했을 때 그때까지 손님이 먹은 요리가 1억 마리를 돌파하여 기념 행사를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맛있는 요리 뒤에는 빈간적인 요리 사육이에 있어서 국제 동물 보호 단체들의 비난을 받기도 합니다. 맛있는 오리구이가 되기 위해서는 고기 사이사이의 지방이 섞여 있어야 합니다. 소의 마블링이 잘 되어 있어야 하는데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활발히 움직이도록 내어버려 되어서 안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주 좋고 기대한 통로에 새끼 우리들을 가두어 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서 사례로 길들이는 것입니다. 제가 읽은 어떤 책에는 청나라 시대 돼지고기 요리를 즐기는 부자들이 갓 태어난 새끼 돼지를 가난한 젊은 엄마에게 싹을 주어 모유를 먹이게 하고 그 돼지가 어느 정도 자랐을 때 도살하여 요리에서 먹곤 하였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43:19) 어린 돼지에게지 돼지 아니라 사람 젖을 먹이는 이유는 보다 맛있는 육지를 얻기 위해서였었다라고 합니다. 어디 그런 일이 중국에서만 있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도 여러면 개를 잡서 고향을 보충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시골엔 개를 잡을 때 쉽게 목매어 달거나 칼을 사용하지 않고 몽유기를 때려 죽였는데 여기서 개패듯하다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걔를 그렇게 때려서 죽이는 이유는 그렇게 해야 고기가 맛있기 때문이 아닌 맛에 대한 인간의 탐욕은 참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맛에 대한 인간의 지나친 탄익은 동물들을 학대함으로써 스스로 선한 인간성도 성실하게 하는 것이니 어찌 하나님 보시게 선하겠습니까? 거기에 한 사람의 방탕한 식생활로 인한 지나친 자원낭이는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다른 이웃들을 굶지게 하는 식량자원의 불균형한 분배의 원인이 됩니다.
(44:19) 이런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우리의 식생 안에서 극단적 방탕주의는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의 마음에 방탕을 따르는 사치스러운 식당을 포함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는 명백합니다.

c 성경적인 입장

셋째로는 성경적인 입장입니다. 성경적인 입장은 극단적 금욕주의와 극단적 방탕주의 사이에서 어디쯤에서 있는 것일까요? 먼저 성경은 음식에 대한 방탕함을 악인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묘사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45:15) 로마서 16장 17절 18절 말씀. 탐식을 따름으로써 자신을 섬기는 것은 십자가의 복음을 되져가는 자들의 삶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빌립보서 3장 18절 19절.
1) 음식을 즐거워함.
성경은 탐식에 대에 대해 인간에게 경고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음식을 감사함으로 받으며 누리도록 권고합니다. 디모데전서 4장 3절 4절 성경은 우리가 음식을 섭참에 있어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정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그들을 위한 연애를 베푸시는 것으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사야 25장 6절.
(46:03) 특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함께고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은 공동체를 이루는 중요한 방식으로 제시됩니다. 마태복음 11장 19절, 누가복음 5장 31절에서 33절 이것은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생명적인 연합을 지시하는 표현으로도 제시됩니다. 계시록 3장 20절. 칼빈은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가 음식을 먹고 마실 때에 누리는 즐거움의 정당성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자기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담과 같이 말합니다. 자, 하나님께서 무엇 때문에 음식을 만드셨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살아가기에 꼭 필요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즐거움과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도 그것을 만드셨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46:49) 간단히 말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여러 사물들이 필수적인 용도를 갖는 것 말고도 어떤 가치를 갖게 하셨다는 것이다. 칼빈의 입장은 어떤 음식에서 맛을 느끼며 즐거워하는 것 자체를 죄악시했던 극단적 금욕주의를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정조꼭 종종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누리며 기뻐하게 하시기 위하여 어떤 사물을 주시기도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커피와 같은 기호품이나 좋은 경치를 즐기는 것이나 예술 작품을 만들거나 감상하는 일이 거기에 속합니다.
2) 즐김을 절제함.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의 맛을 느끼며 즐거워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47:38) 이에 대해 칼빈의 견해는 어떤 음식의 맛을 즐기고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그렇게 만난 음식을 주신 하나님. 그런 맛을이 세상의 물질들 속에 주셔서 그것을 요리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자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인간의 현세적인 형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육체의 정욕을 경계하는 일에 소홀해지지 않도록 하자. 육체의 정욕은 질서를 바로잡아두지 않으면 모든 한계를 깨뜨리고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자유를 가장하여 어떤 것도 허용하지 못할 것이 없는 사람들의 지지를 받게 된다. 칼빈은 음식의 맛을 누리는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입맛에 너희처럼 살아가는 삶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에 놓으신 그 거룩한 뜻과 어긋남을 알고 경계를 게울리지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48:32) 이것이 바로 칼빈이 음식을 통한 즐거움을 일체 거절하는 그 극단적 금족주의를 피하면서도 그 맛에 탐리하여 절제를 잃어버리지 않았던 방법입니다. 우리에게는 음식의 맛을 즐길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의 방종한 사용이 우리를 탐식의 노예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음식 깃든 맛은 마치 사람의 손에 들린 칼과 같습니다. 음식의 맛도 우리의 사이도 모두 나쁜 것이 아니지만 우리에게 남은 죄스러운 탐욕은이 모든 것을 나쁘게 사용할 수 있게 만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절제가 필요합니다. 탁월한 경건을 추구했던 조나단 에드워즈가 자신의 결심문 속에서 음식에 대한 절제를 자주 언급하였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49:22) 그의 솔직한 고백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서 음식을 섭취하고 즐거워하면서도 그것 때문에 식생활의 방탕이나 탐욕에 묶여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이를 통해 에드워즈와 같은 영적 대가에게도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결신문에서 먹고 마시는 것에 엄격한 절제를 다짐하였습니다. 나는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가장 엄격한 절제를 유지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매일밤마다 잠자리에 들기 전 먹고 마시는 일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행동하였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묻기를 결심하였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고민은 개인적 고백인 일기 속에서 자신의 부주의함과 경설함에 대한 반성과 함께 자주 등장합니다.
(50:19) 우리는 그가 음식을 절제하는 일에 대한 묵상과 함께 결신문을 실천하는 삶에 대해서 때로는 음식을 적게 먹는 것과 시간 관리의 유익에 대해서까지 생각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록 같은 실수를 이태 동안이나 반복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음식을 먹을 때 더 먹는다면 엄격히 지켜야 할 음식 절제의 경계선을 지나치게 되는 것임을 잘 알지 못한다. 막상 과식을 하게 되면 3분도 채 못되어 내가 잘못하였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기억하면서도 아직도 나는 음식을 먹을 때 내가 음식을 육체를 위한 충분한 음식을 섭취하지 못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때에는 나의 식탐과 감정이 예전 그대로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한다.
(51:11) 그렇게 느껴질 때 식탁을 떠나면 왠지 내가 육체적으로 약해질 것처럼 생각되는데 막상 먹고 싶은만큼 식사를 하고 나면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또 깨닫게 된다. 이런 일이 나에게 종종 있다.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보다 앞세워 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6장 25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적당한 음식의 맛을 즐기게 하셔서 우리의 몸을 위하십니다. 고린도전서 6장 13절.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극단적 금욕주의와 극단적 방탕주의를 모두 거부하면서 음식은 우리의 몸을 위하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위하시는 것이 질서임을 깨닫게 됩니다.
(52:01) 저는 이것이 복음주의적인 변이라고 생각합니다. >>

3. 노동에 대한 응답

스스로 이 기도에 대한 응답과 노동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한 양식을 주시기를 기도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은이네 번째 강구에 대한 응답을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기대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장 프랑스와 밀레의 만종이라는 작품을 기억할 것입니다. 합에는 노이 비추는 들판의 배경으로 손술의 갈키 자루 등이 소박하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림 한 가운데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한듯한 어 듯 보이는 한 부부가 마주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이 작품에 고유하고 평안할 수는 관계에서 경건한 분위기를 느끼곤 합니다.
(52:54)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자기 손을 열심히 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가장 간절히 울려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을 주석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동할 양식을 언제나 주시지만 우리가 노동의 대가로 얻는 떡을 주실 때도 있고 다른 사람의 노동으로 얻은 떡으로 주실 때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일상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 주변에 일평생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아니면 도저히 양식을 얻을 수 없는 사람들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개인, 국가, 교회적으로 그들이 굶지지 않도록 돌보는 것은 하나의 의무이자 삶의 일부가 어 되어야 합니다.
(53:44) 그렇게 하기는 커녕 작은 선행이 언제나 엄청난 결단을 요구하는 것처럼 행동하거나 아주 조금 도와주고 오랫토록 기도 기억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들은 사막과 같은 세상 한복판을 강물처럼 흘러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사람 섬기는 즐거움 노예의 유전자가 뱃속까지 스며들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나눔의 삶에 있어서 의식적으로 노력갈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것이 성향으로서 몸에 베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자원을 가지고 공극한 이들의 삶에 윤택해야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그들도 언젠가 우리처 우리처럼 하나님을 누리며 살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54:36)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궁핍한 어 세상에 두신 이유이며 목적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는데 익숙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로마서 13장 8절. 노동한 능력이 충분히 있으면서도 그 고통을 깊이하여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 습관 된다면 영혼의 활력과 그리스도인의 진짜 기상을 스스로 박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기도물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삶이 아닙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서 얻은게 되는 1년의 기름진 음식보다는 나의 노동으로 얻은 한 조각의 거친 음식이 아름다운 양식입니다.
(55:23) 우리는 노동을 통해서 얻은 음식을 먹으며 육신을 강극케 할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삶의 보람과 자전거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이 활기찬 정신을 유지하고 진상을 함양하는 하나의 비결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식탁에 드리는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한 고백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범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과의 약한 사람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신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해야 할지니라. 사도행전 20장 34, 35절.
(56:18) 그러므로 노동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는데도 다른 사람에게 주신 이용할 양식을 이용하며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보다는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노동하고 일용할 양식을 받아 그중 여유 있는 일부를 이웃에게 나누어 주신 사람이 훨씬 복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가르침을 따라 살 때 우리에게 주신 일용할 양식을 끊임없이 이웃에게 흘러갑니다.에게로 에게로 흘러갑니다. 가정에서 넘쳐서 교회로 교회에서 넘쳐서 다른 보편 교회로 어 다른 보편 교회에서 넘쳐서 불신자들이 와 이교도들에게로 나아가서 땅끝에서 가나 땅끝에서 가나안으로 굶어 죽어 아프리카와 다른 대륙의 사람들에게로 흘러까지 흘러갑니다.
(57:12) 주님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의 빛을지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대로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습니다. 로마서 13장 8절 사도행전 20장 35절 우리는 스스로 부지런한 노 노 노동으로 자신의 양식을 해결할뿐만 아니라 그 이상의 소득을 올바르게 사용하여 군핍한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도움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누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

C.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길.

많은 사람들이 일용할 양식 때문에 여전히 염려하고 근심합니다.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그의 지적과 같이 어쩌면 인간은 불안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지도 모릅니다.
(58:08) 하나님의 자녀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염려는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대적입니다. 바로 그것은 바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육신의 필요에 대한 염려입니다. 누가복음 12장 22절.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모두 그분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염려와 근심은 물질의 부족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관계가 결핍되었기 때문에 찾아옵니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은 염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충분히 느끼며 그 영적인 평화 안에서 은혜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59:04) 오늘 피었다지는 덜풀도 입히는 하나님 하물며 우리랴 염려 필요 없네. 불은 하늘을 나는 새들도 먹이는 하나님 진흙 같은이 몸을 검게 하시네. 인간은 안식을 얻기 원하면서도 불안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는 근심과 함께 존재 함께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불안한 존재이고 동시에 불안하고 싶어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의 삶 속에 어떠한 불안도 없다면 과연 우리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존할까요? 문제는 우리가 근심하고 불안해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입니다. 만약 우리의 근심과 불안이 단지 의식주를 위한 것이라면 우리는 매우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59:57) 그러한 삶을 우리를 인간으로 창조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구속하신 하나님의 뜻과 매우 억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25에서 33. 그러나 만약 우리의 불안이나 근심이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의 거룩함을 위한 것이라면 매우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한 불안과 근심은 우리를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리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하게 만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이 땅에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고 그 뜻을 성취해 가십니다.

III. 결론

우리는 결핍 가운데 있을 때 염려와 근심 때문에 마음을 썩이고 하나님께 풍성 풍요롭게 하셨을 때 탐력과 방탕으로 마음을 더럽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 못하는 것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그리고
(1:01:00) 이제는 보다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의 목숨이 음식보다 귀하여 몸이 의복보다 귀합니다. 우리가 음식을 위하여 있지 않고 음식이 우리를 위하여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하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우리 인간들은 음식보다 더욱 고개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자유로서 마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그 안에서 숨쉬며 즐거워하듯이 맞는 음식들을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자위에 과도한 사용이 아닌 사용이 가진 파괴적인 위험을 또한 인식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방종이 기회로 섬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자유 안에서 느끼는 즐거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데 도움으로 도움으로 삼습니다.
(1:02:01) 왜냐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것들의 최종적인 소비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는 굶주림 속에 고통받는 이웃들의 형편을 남의 일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와 관련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양식을 분해에 넘치게 소비하거나 사치스럽게 낭비함으로써 의도하지 않게 다른 이웃들에게 굶지름을 초래하지는 않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종교와 인종 문화를 초월하여 지구의 어디에서든지 우리의 이웃들이 굶주이지 않고 인간다운 식생활을함으로써 건강한 삶을 살아가는 것 빈민국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개발상국의 이웃들이 인간의 전성을 유지하며 살 수 있는 최소한의 삶의 여건들을 확보하도록 기도하는 것 또 실제적으로 기여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1:03:01) 그것이 바로 책임이 있는 세계 시민으로서의 자세이고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다운 경건의 실천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의네 번째 간구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이 세상에서 아무리 가난할지라도 또 아무리 부유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과 하나님의 뜻의 성취를 위하여 살도록 부름받은 소명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 안에서 넉넉할 때 넉넉할 때는 그 모든 은혜 때문에 부족할 때는 부족한 것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살아가십시오. 주기 때문에네 번째 간구의 의미를 배운 이들은 참으로 인격적인 하나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1:03:52) >> 아멘. >>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한눈에 보는 9장
1 들어가는 말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 기도를 가르쳐 주신 주님의 바람이다.이 공동체 기도 인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공동체적으로 드려져야 한다. 에이 공동체적 기도의 지평 하나님께서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우리가 배불러도 다른 사람들이 여전히 굶지고 있다면이 간구는 아직 응답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돌봄 대상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1일 1차적 지평 그리스도 안의 지체들 주기도문은 개인의 기도일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지체들과 함께 드리는 기도이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신약 시대의 모든 성도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이다.
(1:04:41) 그러므로 우리가 몸답은 교회의 지체들이 양식이 없어 굶주이지 않고 인간의 조음성을 유지하며 살도록 기도하고 실제 소유를내어 주어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이 기도를 따라 살도록 도와야 합니다.이 궁극적 지평,이 세상의 모든 인류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에게 양자적 아버지가 되시지만이 세상 모든 인간들에게 창조주 아버지가 되신다. 우리는이네 번째 간구를 단지 믿음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불친자들 심지어이 교도들에게까지도 적용하며 기도해야 한다. 비 족이 주시는 하나님 우리는네 번째 간구에서 우리에게 양식을 풍족히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성품을 생각하게 된다.
(1:05:27) 이에 대해 세 가지 측면을 축고해 볼 수 있다. 1.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존함에 대하여 우리는 삶의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연약한 존재이다. 하나님께서는 일용할 양식뿐만 아니라 인간 삶에 대한 조건들을 해결해 주신다. 다만 그것들을 즐기는 것이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서 안 된다. 인간의 모든 불행은 사용해야 할 사물과 두려야 할 사물의 질서를 혼정하는데 있다.이 이 음식의 마스를 즐기는 것에 대하여 교회 역사상 일용갈 양식과 관련하여 세 가지 해석의 전통이 있어 왔다.에 급당적 금욕주의 음식에서 누리는 즐거움 자체를 종제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먹을 자유가 있으며 음식의 식감과 향치 육체의 정신 건강에 주는 유익들로 인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를 찬양할 수 있어야 한다.
(1:06:21) 우리의 몸은 영혼과 함께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며 부활의 날에 다시 살리심을 받아 영원히 하나님을 참미할 영혼의 그릇이다. 비극단적 방정주의. 인간이 그 맛으로 흐리는리는 그 맛으로 흐리는 음식의 감각의 취에 마음이 방탄과 탐력으로 흐르는 태도이다. 인간은 자칫 하나님께서 주신 본부를 망가하고 음식의 맛에 취해 그 노예가 될 수 있다. 이일 로마와 중세 교회의 방탕. 역사상 로마와 중세 교회에서도 방탕의 애들을 찾아볼 수 있다.이 식생활된 그 방탕 식상에는 양과 맛에 대한 탐력이 있다. 모든 방탕은 절제를 잃은 마음의 욕망에서 비롯된다. 산 미각과 비인과나 맛에 대한 타익은 종종 비인과나 동물 학대나 인가성 상실 등의 원인이 된다. 시 성경적인 입장.
(1:07:12) 성경은 음식에 대한 방탕함을 악인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 묘사한다.이 음식을 즐거워함 성경은 탐식에 대해 경고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음식을 감사함으로 받으며 누리도록 원한다.이 즐길 즐김을 절제함. 우리에게는 음식의 맛을 즐길 자유가 있다. 그러나 자유의 방종은 우리를 탐식의 노예가 되게 한다. 우리는 우리는 음식이 우리의 몸을 위하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위하시는 것이 질서임을 깨닫게 된다. 참 노동을 통한 응답 인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열심히 노동하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가장 간절히 울려 퍼질 수 있다.
(1:07:53) 그리스도인에게 나눔의 삶이란 하나의 성향으로 몸에 베어 있어야 한다. 노동 능력이 충분하면서도 고통을 깊이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이화된다면 영혼의 한력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진적 기상을 스스로 박탈하는 것이다. 시 염려로부터 벗어나는 길. 염려는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지 못하게 만드는 가장 큰 대적이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사람은 염려하지 않는다. 결론 하나님께서 절대적인 우존의 마음 안에서 넉넉할 때는 그 모든 은혜 때문에 부족할 때는 부족한 것 때문에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살아가야 한다. 아멘. >> 아멘.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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