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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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족의 대화
제목: 가족의 대화
본문: 룻기 1장 6-18절
본문: 룻기 1장 6-18절
찬양: 557장 에덴의 동산처럼
찬양: 557장 에덴의 동산처럼
말씀의 문을 열며: 이해를 넘어선 신비
말씀의 문을 열며: 이해를 넘어선 신비
세상에는 도저히 그 속을 알 수 없는 미궁과 같은 두 가지 마음이 있다고들 합니다. 첫째는 여인의 마음이고, 둘째는 사춘기 청소년의 마음입니다. 공교롭게도 저희 집에는 이 두 가지 거대한 신비가 한꺼번에 살고 있습니다. 바로 사춘기 터널을 지나는 두 딸아이입니다. 아침마다 거울 앞에서 씨름하는 아이들을 보며, 혹은 방문을 닫고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며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할까?' 고민하는 것이 저의 일상이기도 합니다. 사춘기 아이들과 대화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외계인과 교신하는 것처럼 느끼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녀가 다 컸다고 해서 그 마음이 다 읽히던가요? 이제는 대학에 가고, 직장에 다니고, 또 가정을 이루어 독립시킨 장성한 자녀들이라 해도 부모의 마음에는 여전히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남기 마련입니다. 때로는 명절에 찾아온 자녀의 무심한 태도에 서운하기도 하고, 사회생활의 무게에 짓눌려 입을 꾹 닫고 있는 자녀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미어지기도 합니다. '저 아이가 무슨 고민이 있나' 싶어 말을 걸어보려 해도, 서먹함이라는 벽이 우리 앞을 가로막곤 합니다.
그래서 대화와 관련해서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해되지 않기에 대화가 단절되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기에 더 머물러주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대화의 본질은 상대의 논리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존재 곁에 묵묵히 머물러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마주한 룻기 1장에도 세상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눈물겨운 대화를 나누는 두 여인이 등장합니다.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인생이 완전히 텅 비어버린 시어머니 나오미와, 자신의 모든 미래를 걸고 시어머니를 따르기로 한 며느리 룻입니다. 오늘 이들이 나누는 진심 어린 대화를 통해, 어떻게 우리 가정이 메마른 자리를 넘어 은혜가 흐르는 천국으로 변할 수 있는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나오미의 비움 - 나를 비워 너를 살리는 사랑
나오미의 비움 - 나를 비워 너를 살리는 사랑
나오미는 모압 땅에서 10년을 지내는 동안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남편 엘리멜렉이 죽었고, 두 아들은 그곳 모압 땅에서 오르바와 룻을 아내로 맞이하여 며느리를 얻었으나 결국 자식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두 며느리뿐이었습니다. 인생의 황혼기에 홀로 남은 나오미에게 두 며느리는 마지막 생명줄과 같았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나오미가 베들레헴으로 돌아갈 때 두 며느리를 데리고 가서 자신을 수발하게 하는 것이 그 당시의 문화를 따르면 가장 당연한 권리입니다. 그러나 나오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본문 8절과 9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9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허락하사 각기 남편의 집에서 위로를 받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 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고 무려 간곡히 권하는데 무려 세 번이나 간곡히 권합니다(8, 11, 12절)
그리고 8절에서 나오미가 며느리들을 향해 “나를 선대한 것같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나오미가 말한 '선대'라는 말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성을 뜻합니다. 오르바와 룻이 죽은 남편들과 시어머니인 자신에게 그동안 도리를 다했다는 것을 깊이 인정해준 것입니다. 하지만 나오미는 며느리들이 자신에게 매여 미래가 없는 훤히 열린 고생길을 걷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또한 나오미는 모압 여인인 두 며느리가 베들레헴에 가면 겪게 될 차별과 가난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23장 3절 은 모압 사람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엄격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율법이 가난한 과부와 나그네를 위해 이삭을 줍는 권리를 보장하고 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철저히 배척받는 모압 여인들에게는 그 최소한의 생존권조차 허락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두 며느리가 자신을 따라가면 평생 천대받으며 굶주림과 멸시 속에 처참한 삶을 살아야 함을 알았기에, 나오미는 친정 어미의 심정으로 그들을 놓아줍니다. 내 편안함만 앞세우는 생각을 버리고, 며느리들의 앞길을 위해 자신의 마지막 의지처를 스스로 포기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부모님들이 보여주신 거룩한 희생의 대화입니다. 가족 간의 대화가 천국으로 변하는 첫 번째 비밀은, 상대를 내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님이니까 희생은 당연하지", "자식이니까 당연히 이래야지"라는 요구를 내려놓고, 나오미처럼 상대방의 형편을 먼저 살피며 나를 비워주는 대화가 우리 가정에 필요합니다.
룻의 머무름 - 조건을 넘어선 생명의 약속
룻의 머무름 - 조건을 넘어선 생명의 약속
나오미의 간곡한 권면에 큰며느리 오르바는 입을 맞추고 떠납니다. 우리는 오르바가 떠났다고 해서 믿음도 없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르바의 선택은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닙니다. 그녀는 시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자신의 삶을 찾아간 지극히 바른 선택을 했을 뿐입니다.
오르바가 보여준 모습이 인간적인 도리였다면, 룻은 그 도리를 넘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길을 선택합니다. 본문 14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여기서 '붙좇았더라'는 표현은 단순히 뒤를 따라갔다는 뜻이 아닙니다.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상태를 말합니다. 룻은 시어머니의 형편이 어떠한지 따지지를 않았습니다. 나오미의 지금 상황은 세상적인 눈으로 보면 이미 늙었고, 물려줄 재산도 없으며, 자식을 더 낳아 대를 잇게 해줄 수도 없는, 아무런 희망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하지만 룻은 나오미의 '조건'이 아니라 나오미라는 '사람' 그 자체를 선택했습니다. 룻의 위대한 고백인 16절과 17절을 보십시오.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이것은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눈물 어린 약속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족의 대화는 주로 용건만 묻는 딱딱한 안부에 치중해 있습니다. "성적은 어떠니?", "취직은 됐니?", "결혼할 짝은 있니?"와 같은 질문들은 상대가 자기 몫을 잘하나 지켜보는 숙제 검사와 같습니다. 하지만 룻은 그런 계산을 멈췄습니다. 관계의 목적이 내 편안함이 아니라, 상대방과 함께하는 것 그 자체에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가족의 회복은 "네가 나한테 해준 게 뭐냐"고 묻는 자리를 떠나, 룻처럼 "내가 당신의 아픈 자리에 끝까지 함께 있겠다"고 말하며 곁을 지켜주는 든든한 사랑에서 시작됩니다. 이해되지 않는 자녀의 마음 앞에서도, 기력이 쇠하신 부모님 곁에서도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대화는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지켜주는 따뜻한 동행입니다.
우리 곁을 끝까지 지키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곁을 끝까지 지키시는 예수 그리스도
나오미는 고통 속에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13절). 나오미는 하나님이 자신을 버리셨고, 자신을 공격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가슴 속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깊은 수렁 같은 절망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했습니까? 나오미가 고통 속에 울고 있을 바로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룻'이라는 딸을 통해 나오미를 꼭 안고 계셨습니다.
룻은 우리를 끝까지 지키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입니다. 우리 역시 죄와 허물로 인해 보호자도 없고 소망도 없던 나오미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텅 빈 가슴을 안고 죽음만을 기다리던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텅 빈 우리 인생을 찾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생명의 끈으로 우리를 묶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룻이 나오미에게 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항상 함께하겠다. 결코 너를 떠나지 않겠다."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에 머무심으로, 우리와 영원히 한 몸이 되는 사랑의 매듭을 지어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붙잡아야 할 복음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끝까지 서로 사랑합시다." 우리가 이 사랑을 입었기에, 우리도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가족의 아픈 자리에 끝까지 머물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계산기가 멈추는 지점에서 비로소 기적이 시작됩니다.
말씀의 문을 닫으며: 투명한 천국의 언어를 회복하라
말씀의 문을 닫으며: 투명한 천국의 언어를 회복하라
천국의 언어는 어떤 색깔일까요? 저는 그 색깔이 '투명함'이라고 믿습니다. 상대방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춰주고 받아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와 룻의 대화가 위대했던 이유는 그들이 서로에게 숨김없이 투명했기 때문입니다. 나오미는 자신의 쓰라린 형편을 정직하게 드러냈고, 룻은 자신의 진심을 눈물로 선포했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대화를 회복하기 위해 가장 먼저 깨뜨려야 할 것은 감시자와 같은 차가운 시선입니다. 잘하나 못하나 지켜보며 지시하고 판단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나오미처럼 우리 가정이 지금 아프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고백하고, 서로의 약함을 투명하게 마주할 때 진실한 사랑이 그 빈자리를 채우기 시작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중앙교회 성도 여러분, 이번 한 주간은 일일이 간섭하고 지시하는 입술이 아닌, 룻처럼 끝까지 곁을 지키는 따뜻한 마음으로 가족을 대하십시오. 이제 우리는 사춘기 자녀의 거친 말투나,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었지만 삶의 무게에 짓눌려 무심해진 자녀들의 침묵 뒤에 숨겨진 외로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자녀인 분들은 부모님의 깊은 침묵 속에 담긴 자식 걱정을 헤아릴줄 알아야 합니다.
서로 이해가 되질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서로를 위해서 더욱 기도해야합니다. 그리고 이해되지 않기에 사랑이 더 필요합니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니?"라고 따지기 전에, "네가 어떤 모습이든 나는 네 곁을 지킬 거란다"라고 말해주십시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향해 그러하셨던 것처럼 말입니다.
나오미의 텅 빈 인생을 룻의 동행으로 채우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끝까지 사랑하기로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의 가정에 하늘의 위로와 기쁨을 가득 채워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거둠의 기도
거둠의 기도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 우리는 룻기 말씀을 통해 '끝까지 곁을 지키는 사랑'이 무엇인지 깨달았습니다. 흉년이 든 나오미와 룻의 삶의 터전처럼, 때로는 우리 가정도 대화가 메마르고 사랑이 굶주린 자리가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우리가 부모로서, 혹은 자녀로서 서로를 대할 때 나오미와 같은 '자기비움'의 마음을 주시옵소서. 내 편안함과 내 욕심을 채우려 하기보다, 서로의 아픔을 먼저 살피며 나를 낮추는 대화가 우리 가정에 흐르게 하옵소서. 또한 룻이 나오미에게 보여주었던 그 신실한 동행과 그 눈물 어린 약속이 우리 가족들 사이에 회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무엇보다 우리 인생이 죄로 인해 텅 비어버렸을 때, 하늘 보좌를 버리고 우리 곁에 찾아와 영원한 생명의 끈으로 우리를 묶어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억합니다. 그 사랑을 힘입어, 이제는 우리도 자녀의 서먹한 침묵을 견뎌내게 하시고, 부모님의 깊은 외로움을 묵묵히 안아주게 하옵소서.
우리가 가정에서 서로를 감시하는 눈길을 거두고, 투명하게 진심을 나누는 대화를 시작할 때, 그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예수님이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끝까지 서로 사랑하는" 복된 가문들이 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