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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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신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나요? 어떤 사람이 당신은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답하시고 싶으신가요? 대부분 자신들이 나름대로 어떻게 하나님을 믿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게 되었고 어떻게 성령을 체험했고 이런 말씀을 할 수도 있겠지만요.
이상하게도 그리스도인들은 사도신경이라는 아주 오래된 고대에 만들어진 문서를 가지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혹시 우리나라 고전 중에 기억나시는 것이 있으신가요? 혹시 외우고 계신 분이 계신가요? 예를들어 ‘용비어천가’를 암송하고 계신 분 계실까요? 세종대왕 때 우리나라 첫 한글로 만든 문학입니다. 잘 모르죠. 역사적으로 중요하고 뛰어난 작품이지만 우리는 뭔지도 잘 모릅니다.
그걸 외우고 있으면 되게 특이할 것입니다. 근데 그것보다 오래된 훨씬 더 오래된 사도신경은 기원후 2세기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 오래된 고대 글이자 텍스트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굉장하게 느껴집니다. 이 오래된 고백문을 가지고 지금까지도 신앙고백을 하고 있다는 것은 진짜로 특이한 것입니다.
본래 이 신앙고백문은 ‘로마신조’라고 불리기도 하고요. ‘신앙의 규범’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둘 다 같은 사도신조의 이름입니다. 사도신경의 원형에 해당되는 이 로마 신조는 기원후 2세기경에 예배 때 세례의식을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마태복음 28:19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이 말씀을 따라 세례를 받는 자에게 세 번의 질문이 주어집니다.
첫 번째 질문은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두 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니까?’
세 번째 질문은 ‘성령을 믿으십니까?’라고 물으면 세례를 받는 사람은 ‘네 믿습니다.’라고 대답하는 형식으로 사용되다가 신앙고백으로 형성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이란 것이 어떤 것이기에 이렇게 우리의 신앙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가 질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 사도신경외에도 고대 교회에서 여러가지 많은 신앙고백들을 만들어 왔고요. 그리고 종교개혁 이후 각 교단마다 각자의 교단이 가지고 있는 신학, 각자의 교단이 가지고 있는 개성, 특성,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신앙고백문들을 많이 만들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신경만큼 많이 사용되거나 예배에서 함께 고백되는 그런 신앙고백은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사도신경은 특별히 서방교회 전통이라고 합니다. 서방교회는 로마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를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는데요. 동쪽을 동방 기독교 서쪽을 서방기독교라고 합니다. 우리는 서방교회 서방 기독교에 속해서 그 전통을 따릅니다. 동방교회는 그리스, 러시아 기독교를 동방 기독교라고 합니다.
동방기독교에서는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고 니케아 신경이라는 또다른 신경을 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이 가장 오래됐고, 가장 오래 사용해 온 신앙고백문입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을 사용하지 않는 교단과 교회도 있습니다. 사도신경이라고 하면 ‘경’자가 들어가서 경전과 같은 성경에만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사도신경’이라고 하지 않고 ‘사도신조’라고 하기도 합니다. 성경과 같은 권위로 인정될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도신조라고도 하면서 우리가 믿는 조항들을 모아놨기 때문에 ‘사도신조’라는 표현을 쓰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사도신경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전설에 의하면 사도신경은 예수님의 12제자들이 오순절에 성령을 받고 게시를 하나씩 받아 가지고 12사도들이 하나의 조항들을 가지고 와서 모아서 만들어진 것이 사도신경이라는 말이 전설처럼 내려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씩 고백을 하면서 12개의 조항을 만들었다는 전설을 기원으로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증명될 수는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만큼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전통을 따라 옛 고대 로마 지역에서 세례를 받을 때 사용했던 신앙고백문이기 때문에 목숨을 바치며 고백했던 고백들이 발전되고 정착되어서 만들어진 것이 사도신경이다라는 것을 중요하게 봐야 합니다.
고대 로마 신경이라고 불리는 옛 신앙고백이 정착이 되어서 만들어진 것이 사도신경이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2세기에는 사도신경이 보다 훨씬 더 단순화된 형태로 있었고요. 그것이 6-7세기 되면 거의 비슷한 형태로 정착이 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사도신경이란 신약성경이 정경화 되기 전에도 이미 신경으로 인정받은 신앙공동체의 고백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에는 성경과 같은 모든 파피루스 문서는 아무나 가지고 있을 수 없었고, 유통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 많은 성경과 특히 신약성경을 누구나 볼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우리는 하나의 신앙, 하나의 고백, 하나다. 라고 하는 믿음의 기준과 교회를 세우는 데 있어서 빠르게 알려주었던 것이 사도신경입니다.
성경이 오늘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지 않고 교회에 제도라든지 이런 것들이 아직까지 형성이 되지 않았을 때 교회가 교회 되게 되고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교가 되게 하는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또 가능할 것 같습니다. 뭐냐하면 사도신경이 고대인들이, 옛날사람들이 고백했던 신앙고백이지 왜 아직 현대인들에게 중요하냐 뭐 이런 식의 질문도 가능할 것 같은데요. 그리고 이건 너무 형식적인 것 아니냐, 뭐 너무 지루한 거 아니냐 이렇게 생각하실 수 있을 것 샅은데요.
사실 고대인들은 이렇게 신경을 만들었을 때 단순히 외우거나 혹은 읽거나 하는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 아닌 노래로 만들어서 찬양의 형태로 부르곤 했습니다. 문맹률도 높고 책도 읽지 않던 시대를 너무 과대평가하면 안 됩니다. 사도신경과 같은 신앙고백을 외우고 널리 퍼뜨릴 수 있는 방법은 노래로 만들어서 부르게 하는 것입니다.
유치부 아이들도 사도신경을 노래로 외워서 부릅니다. 노래로 외우고 고백하면 더 잘 되고 편하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저희 집 애들도 집에서 목이 터져라 부릅니다.
*2사도신경은 드라마다
그래서 이 사도신경은 딱딱한 교리가 아니라 엄청난 드라마입니다.
영국의 극작가이자 기독교 변증가로 유명했던 도로시스테이어스라는 사람이 있는데요. 이 분이 한 말씀은 무엇이냐면 ‘교리는 드라마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가 재미가 없는 것은 이 교리 때문에 재미가 없는 것이 아니라 교리가 없기 때문에 재미없다’ 이런 표현을 쓰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땐 교리라고 하는 사도신경에 어떤 드라마가 있을까요? 굉장한 반전과 충격적인 드라마가 있습니다. 이 당시시대에는 더욱이 막장 드라마와 같은 스토리였습니다.
옛 고대 신화들을 보면 신이 인간들에게 벌을 주거나 신이 인간들을 괴롭힌 애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이 잘못하거나 또신이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인간들에게 형벌을 내리거나 아니면 인간들이 가는 일에 좀 꼬이게 만들거나 그런 이야기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이 인간에게 형벌을 내릴 수 있는 이야기는 당연한 이야기였고, 고대 시대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스토리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역사도 보면요. 인간사는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을 괴롭히고 벌을 주고 폭력을 가하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집단이 집단을 괴롭히고 파괴하는 이야기의 역사입니다. 모든 신화든 역사든 신이 인간을 벌주거나 인간이 인간에게 폭력을 가하는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사도신경에는 어떤 드라마가 있냐면요. 사도신경은 인간이 신에게 매질을 하고 인간이 신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인간이 신을 죽이는 이야기입니다. 근데 더 놀라운 건 뭐냐면 인간이 신인지 모르고 신을 때리고 신을 사형하고 죽였고 매장시켰는데 그 정체가 드러나는 거죠.
흔히 우리가 드라마에서 말하는 출생의 비밀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인간이 죽인 존재가 신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고 더 놀라운 것은 그 신이 자기를 때리고 죽인 인간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이 인간들에게 용서와 화해를 청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흔히 볼 수 있는 신화와 역사의 이야기와 정반대의 이야기, 권력구도가 뒤바뀌어 잇죠. 출생의 비밀, 단순한 복수의 드라마가 아니라 어떤 평화와 화해를 위해서 신이 인간을 초청하는 드라마가 담겨있는 게 사도신경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신경을 읽을 때 우리는 이 드라마 우리가 흔히 일상생활에서 있곤하는 이 드라마 속에 다시 들어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좋을 것 같고요. 사도신경은 아주 간결한 언어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간결한 언어로 표현하는 만큼 그 속에는 우리의 상상력이 들어갈, 우리가 참여할 여지가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단순히 교회에서 함께 고백하기 때문에 순서에 따라가다 보니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놓치는 것. 이것이 흔히 생각하는 사도신경의 고백의 시간인데 그 때마다 드라마를 생각해보고 드라마 속에 있는 나 자신을 생각해보고, 그 드라마의 빈틈을 우리의 상상력을 가지고 일상의 경험을 가지고 매꿔보는 그런 일을 하면 사도신경이 상당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사도신경은 교회만을 위한 것인가?
아 ‘사도신경은 교회에서 신앙고백을 위한 거지 물론 사도신경은 세례를 받을 때 고대인들과 오늘날에도 사도신경은 세례를 받기 위해서 많이 하는 신앙 고백이죠.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무어시냐면 단순히 내가 교회의 일원이 되었다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 속에서 새로운 조재로서 살아가겠다는 표현, 결심이기도 합니다ㅣ.
그것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는 맹세와도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신경은 내가 무엇을 믿는지에 대한 교리 뿐만 아니라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어떻게 보면 진공 상태에서 살아가는 존재도 아니고 개인으로서 내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내 삶의 모든 것들을 개척하고 환경을 만들어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요즘에 철학자들이 많이 쓰는 용어죠. 세계 내 존재이죠. 세계와 상호작용하면서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인간입니다.
그런데 사도신경은 세계 내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해서 아주 특별한 이해를 주는데요. 그것을 19-20세기에 영국에서 활동했던 문필가이자 기독교 작가였던 G.K.테스터턴은 흥미롭게 표현합니다.
인간이 삶을 충실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철학이 필요하다. 인간이 삶을 가장 충실하게 삶아가도록 초청해 주는 참 철학은 사도신경이다’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당시 19-20세기 초 유럽에서 기독교 전통이라는 것이 상당히 많이 비판받았던 현대 사회에서 뒤떨어져가는 신앙 고백이라고 여겨지는 상황 속에서 테스터턴은 현대 사상이 아니라 옛 사람들이 만든 사도신경이야말로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참 철학이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요. 도발적인 화두도 재밌지만 그 이유를 설명하는 방식도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우리가 현실속에서 일상을 충실하게 사라악려면 세계에ㅐ 대한 아주 특별한 의미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무의미한 공간, 혹은 기계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할 대 우리의 삶도 무의미와 대면하게 되고요. 이 세계를 기계로 생각했을 때는 마치 이 세계에는 어떤 우리가 생각하는 중요한 가치들, 사랑, 희망, 믿음, 관용 이런 중요한 가치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듯한 그런 세상으로 간주하게 되는 거죠.
그러면 마치 우리를 거대한 기계 속에있는 하나의 부품처럼 생각하게 될 위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세계 내 존재’로서의 인간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는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데도 중요하지만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가갛느 ㄴ것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체스터턴은 우리가 충실한 삶을 살아가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데요.
첫째, 세계에 대한 경이로움
둘째, 세계로부터 환영받는 느낌입니다.
우리는 하루만 살고 죽는 존재가 아니죠. 우리는 계속해서 살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느끼는 것은 세계에서의 권태로움입니다. 매일 반복되고 새로운 것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계를 늘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경이로움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이 경이로움을 줄 수 있는 철학이 어디에 있을까요? G.K.체스터턴은 바로 사도신경에 있다고 얘기합니다.
또 동시에 우리는 세계에서 환영받는 존재라는 느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세계에서 나그네, 혹은 소외당하는 자라는 느낌이 들게 되는 거죠. 나그네라는 사람은 있다가 떠날 사람, 혹은 소외당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내가 하는 것에 어떤 의미도 부여받지 못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다느 ㄴ느낌을 만들어내는데
그게 아니라 비록 내가 이 세상의 주인이 아니지만 이 세상에서 환영받고 있다는 것, 그리고 나의 언행 하나하낙 이 세상에서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 이런 세계으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체스터턴은 현대사조 속에서 그러한 세계에 대한 경이로움과 세계로부터 환영받는 느낌을 동시에 줄 수 있는 철학은 잘 발견할 수업고, 그것은 바로 사도신경 속에서 찾아냈다고 이야기합니다.
사도신경은 세계를 보는 특별한 관점, 그리고 세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특별한 자세를 형성하는데 아주 중요한데요. 사도신경을 다 살펴봐도 좋지만 특별히 사도신경에서 첫 조항인 성부하나님에 대한 조항만 가지고 잠깐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사도신경의 첫 구절을 보면 하나님을 설명하는데요. 하나님을 믿는데 어떤 하나님이냐면 하나님인데 아버지 하나님이죠. 그런데 아버지 하나님이 누구냐 하면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고 그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는 세계으 창조주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죠. 그런데 하나하나를 뜯어보면 상당히 흥미롭습니다.
하나님인데 하나님이라고 하면 추상적인 유일신을 생각할 수 있잖아요. 이 세계와 별 관계를 맺지 않는 우주의 궁극적인 원리로서의 신으로 설명할 수있겠죠. 그런데 사도신경은 하나님을 그렇게 이해하면 안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버지,다른 말로 하면 영원부터 성자와 사랑을 주고받는 분으로서의 아버지로 이해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ㅊ 추상적인 세상의 원리가 아니라 사랑을 주고 받으시느 분이시라는 것이 우리가 사도신경의 첫 도입부에서 알 수 있는 바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다음에 나오는 흥미로운 부분이 뭐냐면 ‘전능하신 분’입니다. 전능하시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세상을 창조하실 대 이분이 세상을 창조할 전능한 힘이 있는데 그 전능한 힘을 가지신 분이 누구냐면 아버지라는 거죠. 즉 사랑하시는 분이 자신의 사랑의 힘을 발휘해서 만드신 것이 바로 이 세계라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너무나도 많은 것드링 기계적이라 생각될 정도로 반복됩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해가 뜨고 있죠. 그리고 저녁이면 해가 또 집니다. 다음날 일어마녀 또 해가 뜨죠. 또 해가 지죠.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 너무나도 익숙하기 때문에 겨잉로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어떤 아기가 있는데 아기가 매일 똑같은 옹알이를 한다. 그러면 ‘아기가 옹알이를 하고 있네’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부모님은 어떻게 하나요? 그 아이의 옹알이를 보면서 신기해하고 경이로워 합니다. 기뻐합니다.
마찬가지로 이 세계는 정확한 질서에 따라 움직입니다. 매일 아침에 해가 뜨고, 해가 지고 있죠. 그렇지만 하나님은 마치 어린아이의 똑같은 옹알이 속에서도 기뻐하고 경이로워하고 그것을 어찌할 바 몰라하는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이 세상을 접하시는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도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이 세계 속에서도 경이로워할 수 있다는 것, 왜냐하면 이것은 단순히 기계처럼 돌아가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랑을 부어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의 기쁨이 머무느 ㄴ곳이라는 것,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도록 초청해주는 것이 바로 사도신경의 첫 조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 샏각할 수 있는게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전능에 대해서도 새롭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ㅏㄱ 전능이라고 하면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힘’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자기가 원하시는 것을 무제약적으로 행하실 수 있는 어마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약간 무섭게 생각하게 됩니다. 이러다가 하나님께서 내 삶을 완전히 없애시면 어떡하지? 하나님이 정말 나한테 화가나셔 가지고 나에게 큰 벌을 주면 내가 그 벌을 견딜 수 있을까? 이런식으로 하나님을 무시무시하게, 두렵게 생각하게 하는 데에도 전능 개념이 잘못 오해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능 개념을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이해와 떼어내 생각하게 될 때 전능을 오해하게 될 수밖에 없는데요. 사도신경은 뭐냐면 이 전능을 두 개 사이에 놓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는 뭐냐하면 하나님인데 아버지이신 분의 전능입니다.
둘째는 세상의 창조주로서의 전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전능이라는 거슨 하나님의 사랑의 힘입니다. 우리는 사랑읗 나다라고 하면 뭐 이런 말 많이 하죠. 사랑은 여러가지로 정의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자기를 남에게 주는 능력이다 라고 애기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이기적이고 그리고 자기 상실에 두려움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그러면서 타인에게 자신을 완전히 줄 수 없습니다.
부모마저도 예를들어 부모도 자식간의 사랑도 왜곡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부모로서 가지고 있는 자의식 그리고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되겠다는 본인 나름대로의 야망, 이런 것들이 사랑을 있는 그대로 주지 못하게 하고 자기 식대로 사랑을 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랑할 때 자기르 ㄹ온전히 내어줄 수 있는 능력으로써의 하나님의사랑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아름다운 분이시고 참된 분이시고 선한 분으로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 ㄹ때 이 세상이 진선미가 거할 수 있느 장소로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렇ㄱ디 때문에 하나님의 전능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가 하고 싶으신 일을 무지막지한 일, 예측할 수 없는 힘이 아니라 그것은 사랑을 위한 일, 피조세계에 있는 참됨과 선함과 아름다움을 더욱더 빛나게 하는 힘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라고 고백할 때그것은 단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고백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는 이런 세상, 하나님이 사랑으로 만드시고 그리고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늘 경이로워하시고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기쁨이 머무는 곳.
그런 의미에서 단순히 무의미한 세상이 아니라 참됨과 선함과아름다움을 우리도 경이로움과 환대받는 느낌을 가지고 찾아갈 수 있는 곳으로 이해하게 된다는 엄청난 초청을 하는 구절이 바로 사도신경의 첫 조항입니다.
제가 아까 말씀드렸듯이 사도신경이 아주 단순한 언어들로 되어있지만 언어가 단순한 만큼 그 속에 우리의 사상력이 들어갈 여지도 많이 있고, 우리의 삶을 가지고 새롭게 이 구절들을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도 매우 크게 열려있는 텍스트가 바로 고대 로마 신경에서부터 발전된 사도신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도신경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단어가 함축되어 있고 설명이 적어서
영국의 유명한 전설적인 축구 감독이 있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트의 오랜 감독이었던 알렉스 퍼거슨이 말했던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라는 말이 있씁니다. 이 말은 팀이 너무나 위대하기 때문에 선수 개성이 다 죽어야 한다는 게 아니거든요.
알렉스 퍼거슨 경이 지도했던 선수들은 다 개성이 있고 각 포지션에서 세계 최고의 실력을 가졌던 선수들이죠. 그렇지만 각자 가진 개성과 창조성이 모여서 만들어진 게 팀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팀이 있기 때문에 각 선수의 개성들은 더 잘 발휘될 수 있고 더 뛰어난 선수로서 자신의 가치를 보여줄 수 있는 장이 마련된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우리에게 이것을 알려준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냐면 교회보다 위대한 개인의 신앙은 없고, 전통보다 ㅜ이대한 개인의 생각은 없다 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이 중요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개인의 신념이 덜 중요해서도 아닙니다. 우리는 교회와 전통이라는 더 큰 맥락 속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능력 , 각자 가진 개성이 더 잘 발휘가 될 수 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팀에는 전술이 있고 철학이 있어야 되듯이 마찬가지로 우리가 생각하느 ㄴ교회,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에도 함께 믿는 공통의 신앙의 문법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사도신경입니다.
물론 사도신경을 매주 고백하다 보면은 별 생각 없이 단어 하나하나만 이렇게 외우는 형식주의에 빠지는 위험이 분명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대 신앙고백뿐만 아니라 근현대에 만들어진 신앙고백문들이 가지고 있는 공통의 위험입니다.
그렇지만 사도신경이 형식주의에 빠질 위험에 대해서도 불구하고 인류에게 여전히 중요한 이유는 뭐냐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그런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리고 이 세계는 어떤 곳인지, 인간은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 새롭게 알려줄 수 있는 그런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그런 텍스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신경이라는 이 짧은 신앙고백문의 의미는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분 앞에 여러분의 공동체 앞에 이 역사 앞에 늘 새롭게 열려있을 것이고요. 그렇기 때문에 고대부터 현대까지 수많은 신학자들이 사도신경의 의미를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해설은 우리 앞에도 놓여있습니다. 그 의미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사도신경을 고백하고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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