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돌판: 은혜와 수고의 신학 2026 0517 출3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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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2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 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3 아무도 너와 함께 오르지 말며 온 산에 아무도 나타나지 못하게 하고 양과 소도 산 앞에서 먹지 못하게 하라
4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서론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읽으면서 묵상하다가 보면, 하나님께서 어느 한 문장, 어느 한 단어를 계속 생각나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저도 이번에 설교를 준비하면서 한 단어에 대해 계속 묵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이 묵상의 내용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잠깐 설명드리겠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두 돌판, 십계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내려와 보니 산 아래에서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춤을 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모세는 분노했습니다. 그래서 손에 들고 있던 그 돌판, 하나님이 직접 만드시고 직접 손가락으로 새기신 그 거룩한 돌판을 산 아래로 던져 버렸습니다. 깨졌습니다.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언약이 깨졌습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았습니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출애굽기 34장이 시작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중 한 문장이 계속 깊이 묵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본문에서 한 가지를 발견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두 번째 기회를 주실 때, 이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주시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돌판과 두 번째 돌판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차이인지,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는지 함께 보려고 합니다.
XXX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처음 예수님을 믿고 가슴이 뜨겁던 그 시절,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은혜였던 그 시절을 지나서, 10년, 20년, 30년이 흘렀을 때, 우리 안에는 무엇이 남아 있을까.XXX
XXX여러분,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도 제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면, 부족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을 믿었는데, 분명히 회심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서 계속 올라오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분노. 이해할 수 없는 욕망. 똑같은 자리에서 반복되는 실패. 가족에게 또 같은 말로 상처를 주고, 어제 회개했던 그 죄를 오늘 또 짓고. 그러면서 우리는 이런 의문을 품게 됩니다.XXX
XXX"내 신앙이 잘못된 걸까?" "나는 정말 거듭난 것이 맞을까?" "왜 나는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못 나가고 있을까?"XXX
XXX첫번째 돌판은 받았지만, 금세 깨져버리고 마는 우리 신앙의 모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오늘 본문은, 바로 그런 자리에 서 있는 우리에게 두 번째 돌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XXX
세 가지로 나누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본론
본론
I. 첫 번째 돌판 — 우리는 모두 받기만 한 사람이었습니다
I. 첫 번째 돌판 — 우리는 모두 받기만 한 사람이었습니다
먼저 첫 번째 돌판이 어떻게 주어졌는지 보십시오. 출애굽기 31장 18절 을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8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여러분, 보십시오. 첫 번째 돌판은 어떻게 만들어졌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누가 글을 쓰셨습니까? 하나님이 직접 손가락으로 쓰셨습니다. 모세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받기만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음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처음 예수님을 믿었던 그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우리가 무엇을 했습니까?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받았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자격을 찾는 분이 아니라, 우리에게 자격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죄 가운데 있었던 나, 하나님을 찾지도 않았는데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이 먼저 나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한 일은 그저 두 손을 내밀어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부릅니다. 헬라어로 '카리스'(χάρις)인데, 이 단어의 뜻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자격 있는 자에게 주는 보상이 아니라,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갓 태어난 아기에게 부모가 사랑을 줍니다. 그 아기가 무엇을 했습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태어난 것뿐입니다. 그래도 부모는 모든 것을 줍니다.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안아 주고, 재워 줍니다. 아기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줍니다. (이스라엘 이야기 잠깐)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첫 번째 은혜입니다. 우리가 한 일이 없습니다. 그저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놀라운 은혜를 받고 시내산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내려오기까지 40일이 걸렸습니다. 그 40일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구름이 그 산 위에 있는 것을 두 눈으로 보면서, 그들은 자기 손으로 송아지를 만들고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 이게 어떻게 가능합니까? 홍해를 가르신 하나님을 봤습니다. 만나를 먹었습니다.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40일을 못 견디고 송아지를 만들 수 있었을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돌판은 받았는데, 즉, 은혜를 받았는데 마음은 아직 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돌판에는 십계명이 적혀 있었습니다. 해야 한다.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계명. 명령이 들어있었습니다. 기적의 하나님, 인도하시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받아도, 여전히 우리의 마음이 돌이면, 명령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정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거듭났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무엇이 남아 있습니까? 옛 사람의 습관, 오래된 분노의 패턴, 끊임없이 올라오는 자기중심성, 어쩔 수 없이 반응해 버리는 그 옛날의 나.이것은 신앙이 잘못된 증거가 아닙니다. 거듭남이 가짜인 증거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첫 번째 돌판, 즉 율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에게 첫 번째 돌판이 깨진 것은 비극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가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이 있어도, 우리에게 십계명이 있어도, 우리에게 좋은 말씀이 있어도, 그것을 받는 우리의 마음이 아직 돌이라면, 그 말씀은 결국 깨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은혜”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돌판의 이야기입니다.
둘째, 두 번째 돌판 — 이번엔 네가 직접 깎아오라
둘째, 두 번째 돌판 — 이번엔 네가 직접 깎아오라
자, 이제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출34:1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이 한 구절에 오늘 설교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여러분, 잠깐 멈춰서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여러분이 모세였다면, 이 말씀이 어떻게 들렸을까요?
저는 처음 이 본문을 깊이 묵상하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일하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 돌판은 누가 만들었습니까? 하나님이 만드셨습니다. 두 번째 돌판은 누가 만들어야 합니까? 모세가 만들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왜 그러셨을까요? 처음에는 당신이 돌판을 다 준비하셨고, 직접 쓰셨고, 그것을 받아오기만 하면 되었는데, 두 번째 다시 부르실 때는 돌판을 왜 직접 준비해오라고 하셨을까요? 생각해보세요. 처음 것과 같이 만들기 위해 다듬고 깎는 수고, 그리고 그 돌판 둘을 들고 시내산을 올라간다? 여간 수고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이 명령의 비밀이 조금 풀리기 시작합니다.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히브리어 원문에 보면 이 말씀은 더 강렬합니다. “פסל-לך”(페쌀-레카)-"네가, 너 자신을 위해, 직접 깎아라"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페쌀’은 ‘조각하다, 다듬다’라는 뜻이고, ‘레카’는 ‘너를 위해’라는 뜻입니다. 이 형태는 창세기 12장 1절 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의 형태와 같습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가라! 히브리어 원어로 “לך-לך” (레크-레카!) - 가라! 너를 위해! 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때로 나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수고와 고통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석공이 망치와 끌을 가지고 단단한 돌을 쪼아내는 그 거친 노동을 가리키는 ‘페쌀’-’다듬어 만들다’가 단순한 수고로 끝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먼지가 날리고, 손이 까지고, 땀이 흐르는 그런 노동. 지금 우리 출애굽기 본문에서 다듬어 만들라는 명령은 ‘나에게 필요한, 유익한’일이기에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본문 앞에서 한참을 묵상했습니다. "왜일까. 왜 하나님은 두 번째에 모세에게 수고를 요구하시는가."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혹시 벌인가? 이스라엘이 잘못했으니까, 이번엔 너희가 돌같은 마음을 깎는 고생을 해서 받아라, 그런 의미인가?"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1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출34:1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보셨습니까? 모세가 돌판은 만들지만, 그 위에 십계명을 새기시는 분은 여전히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 본문의 신비입니다.
돌판을 깎는 것 — 그것은 모세의 몫입니다.
돌판에 글을 쓰는 것 — 그것은 여전히 하나님의 몫입니다.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절반을 하시고, 모세가 절반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그렇게 이해하면 신앙이 거래가 됩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까 하나님도 이만큼 해주십시오." 그런 신앙은 성경의 신앙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여전히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첫 번째 돌판처럼 두 번째 돌판도 직접 만드실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모세에게 깎아오라고 하셨을까요?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으로 대하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린 아기에게는 부모가 모든 것을 해줍니다. 밥을 떠먹여 주고, 옷을 입혀 주고, 신발 끈을 묶어 줍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자라면 어떻게 됩니까? 부모는 어느 순간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네가 해봐. 신발 끈은 네가 매봐. 너는 그럴 수 있어." 이것이 부모의 사랑입니다. 부모가 게을러져서가 아닙니다. 부모가 사랑이 식어서가 아닙니다. 아이가 자랐기 때문에, 그 자란 아이를 자란 사람으로 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그렇게 대하셨습니다. "이제 너는 받기만 하는 자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네 손으로 돌판을 깎아라. 네 발로 산을 올라와라. 그러나 그 돌판에 무엇을 새길지는 — 여전히 내가 결정하고 내가 새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 차이를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주의 - "네가 열심히 해야 하나님이 너에게 무엇인가 해주신다." = 거래입니다. 인간이 노력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끌어내는 것입니다.
값싼 은혜- "네가 아무것도 안 해도 어차피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하신다." = 게으름입니다. 인간의 응답이 빠진 신앙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은 이 둘 사이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부르십니다. 우리가 응답합니다. 그러나 완성하시는 분은 여전히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두 번째 돌판의 이야기입니다.
자, 이쯤에서 여러분이 이런 질문을 하실 수 있습니다. "목사님, 그러면 우리에게 두 번째 돌판을 깎는 수고는 무엇입니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첫째, 상대방이 받아줄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상대방이 영영 안 본다고 하면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다행히, 상대방이 마음을 열고 있다고 합시다. "언제든지 와."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첫 번째 돌판이 깨졌을 때도 우리를 향해 마음을 닫지 않으셨습니다. 모세에게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만들자."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회복이 안 됩니다. 두 번째가 필요합니다.
둘째, 내가 그 자리로 가야 합니다.
상대방이 받아줄 마음이 있어도, 내가 가지 않으면 만남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가 차를 타고, 길을 건너고, 그 사람의 집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러야 합니다. 그래야 회복이 시작됩니다. 내가 가는 행위 — 그것이 회복 자체는 아닙니다. 회복은 상대방이 문을 열어 줄 때 일어납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 않으면, 그 회복은 결코 일어나지 않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말씀 앞에 앉는 것.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 어렵지만 용서하는 것. 미루던 회개를 오늘 하는 것. 가족에게 먼저 사과하는 것. 끊어야 할 죄를 끊는 결단. 시작해야 할 순종을 시작하는 결단. 이것들은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의를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하나님이 우리의 돌 같은 마음 안에 새기실 자리를 만드는 행위입니다. 부어주실 은혜를 사모하며 준비하는 그릇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과부에게 빈 그릇을 빌려오라고 했던 열왕기하 4장의 기적을 기억하십니까? 엘리사는 빚을 져서 두 아들을 종으로 잃게 된 과부에게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왕하 4:1-4
1 선지자의 제자들의 아내 중의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빚 준 사람이 와서 나의 두 아이를 데려가 그의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하니
2 엘리사가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말하라 그가 이르되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하니
3 이르되 너는 밖에 나가서 모든 이웃에게 그릇을 빌리라 빈 그릇을 빌리되 조금 빌리지 말고
4 너는 네 두 아들과 함께 들어가서 문을 닫고 그 모든 그릇에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 하니라
기름을 채워주시는 분은 분명 하나님이십니다. 빈 그릇 수십 개를 방에 가져다 놓는다고 해서 거기서 저절로 기름이 솟아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웃집 문을 두드리며 수치심을 무릅쓰고 빈 그릇을 모아오는 수고,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그 그릇들을 펼쳐놓는 행동은 과부와 두 아들이 직접 해야만 했습니다. 기름은 오직 그들이 땀 흘려 준비한 그릇의 수만큼만 채워졌습니다. 왕하4:6
6 그릇에 다 찬지라 여인이 아들에게 이르되 또 그릇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아들이 이르되 다른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
우리의 수고도 이와 같습니다. 두 번째 돌판을 깎아 산에 오르는 것, 이웃에게 빈 그릇을 빌려오는 것 자체가 기적이나 구원을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돌판을 깎아오면 내가 거기에 다시 언약을 새겨주겠다는 하나님의 초청에 대한 응답일 뿐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이 돌판을 깎는 수고는 은혜를 얻어내기 위한 율법적인 '조건'이나 '거래'가 아닙니다. 또 다른 계명이거나 종교적 의무가 아닙니다. 이미 활짝 열려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내 안에 담아내기 위해, 내 삶의 용량을 넓히는 기쁨의 과정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갈망하는 사랑의 능동적인 표현입니다.
그렇기에 새벽에 무릎을 꿇고 말씀을 펴는 시간뿐만 아니라, 가족에게 먼저 다가가 사과하는 시간, 학교와 직장에서 미루던 일을 성실히 감당하며 정직을 선택하는 그 평범한 일상의 결단들이 모두 돌판을 깎는 수고입니다. 삶의 어느 한 부분도 예배가 아닌 곳이 없습니다. 종교적인 열심과 일상의 치열함은 결코 나누어지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내 삶이라는 커다란 돌판을 다듬어가는 하나의 온전한 예배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삶에서 깎아야 할 돌판은 무엇입니까? 주님의 은혜를 담기 위해 일상 속에서 준비해야 할 빈 그릇은 무엇입니까? 나의 몫인 이 수고를 기쁨으로 감당하며 묵묵히 나아갈 때, 하나님은 여러분이 땀 흘려 준비한 그 삶의 빈 공간마다 당신의 넘치는 은혜로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이 마음의 돌판을 깎으며 살다 보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나는 왜 똑같은 자리에서 반복해서 실패하는가? 똑같은 죄를 또 짓고, 똑같은 약함에 또 무너지고. 매번 회개해도 또다시 그 자리로 돌아오는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또 실패했으니까, 이번엔 더 큰 결심을 해야지. 더 강하게 결단해야지. 더 큰 헌신을 드려야지." 이렇게 매번 자기 결심을 키워가는 것이 신앙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성경의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 신앙은 결국 지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실패할 때마다 갚아야 할 빚이 점점 커지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반복해서 실패할 때마다 더 큰 돌판을 깎아 오라고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언제 돌아와도 똑같은 사랑으로 받아주시는 분이십니다. 한 번 회개해서 받는 사랑이나, 백 번 회개해서 받는 사랑이나 같은 크기입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탕자 비유를 보십시오. 아버지는 그 아들이 첫 번째 잘못했을 때나, 백 번째 잘못하고 돌아왔을 때나, 똑같이 달려나가서 안아 주실 분이십니다.
그러면 무엇이 변합니까?
우리가 변합니다. 우리가 깊어집니다.
수요일에 담임목사님께서 상처를 품은 사람들 다윗편을 설교하시면서 상처를 입었으나 여전히 노래하는 다윗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자신의 아들이 배신하고, 시므이로부터 저주를 받으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했던 이유. 하나님이 나의 방패요, 나의 산성이요, 나의 소망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노래할 때, 상황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환경과 처지는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내면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여전히 붙들어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삶의 실패의 자리, 상처의 자리에서도 주님을 찾게 됩니다. 점점 깊은 자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처음에는 행동의 죄를 회개했지만, 점점 그 행동 뒤에 있는 마음을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시간이 지나면, 그 마음 뒤에 있는 나의 본성, 나의 옛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저에게 필요한 것은 더 큰 결심이 아닙니다. 저 자신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제 마음이 돌인 한, 어떤 돌판도 결국 깨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 깨달음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갑니까? 에스겔 36장 26절 로 데려갑니다. 거기서 하나님이 약속하십니다.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하나님은 결국 우리의 마음 자체를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첫 번째 돌판도, 두 번째 돌판도, 결국은 이것을 위한 과정이었습니다. 우리가 돌판을 받는 자에서, 돌판을 깎는 자로, 그리고 마침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글이 새겨지는 살아있는 마음이 되는 그날을 향한 여정입니다.
셋째, 순종의 그 길 - 모세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셋째, 순종의 그 길 - 모세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래서 우리도 모세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 순종의 길을 떠났던 것처럼, 우리도 순종의 그 길을 걸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4절을 보겠습니다. 출34:4
4 모세가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고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 두 돌판을 손에 들고 여호와의 명령대로 시내 산에 올라가니
저는 이 한 절을 읽을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한 사람의 순종을 보여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모세는 80세를 넘긴 노인입니다. 그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단단한 돌을 깎고 있습니다. 한밤중까지, 아니면 새벽까지, 그는 망치와 끌로 돌을 쪼아내고 있습니다. 손이 떨리고, 허리가 아프고, 눈이 침침해도, 그는 그 일을 합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 무거운 돌판 두 개를 손에 들고 시내산을 오릅니다. 시내산은 약 2,300미터 정도 되는 산입니다. 80세 노인이 무거운 돌판을 들고 이 산을 오르는 모습을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신앙여정입니다. 화려한 것이 아닙니다.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단순한 순종 —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다듬은 돌판을 손에 들고, 산에 오르는" 것입니다. 엘리사가 그 여인과 아들들에게도 빈 그릇을 모아오라고 했을 때, 그저 순종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삶의 신앙을 떠올립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결국 무엇입니까? 어쩌면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무엇인가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단순한 행위의 반복일지도 모릅니다.
새벽 기도의 자리. 매일 아침의 말씀 묵상. 주일의 예배. 한 주에 한 번 모이는 셀 모임. 누군가를 위한 기도. 작은 봉사와 헌신.
이런 것들이 거창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단순한 순종을 통해 일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여러분의 순종의 돌판을 깎아내신 것입니다. 모세가 돌판을 깎고 산에 오를 때,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순종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가 다시 쓰여졌습니다.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주를 묵상하고, 문제 앞에 주님 앞에 엎드리는 것, 주일에 오늘 말씀 앞에 앉으시는 것 — 그것이 그저 그런 평범한 일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한 번의 순종을 통해 하나님은 여러분의 마음에 무엇인가를 새기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모르는 사이에, 여러분이 보지 못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결론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마무리하겠습니다. 1-율법의 돌판이 아니다. 2-은혜가 필요하다. 수고의 신학, 3. 그 순종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 바로 다음 구절, 출애굽기 34장 6-7절 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 앞을 지나가시면서 자신을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6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
이것이 두 번째 돌판이 만들어지는 자리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모습입니다.
여러분, 첫 번째 돌판이 깨졌을 때 우리가 두려웠던 것은,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떠나신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돌판이 만들어지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십니다. "나는 자비롭고 은혜로운 하나님이다. 나는 노하기를 더디 한다. 나의 인자는 끝이 없다."
여러분, 이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깨진 돌판을 들고 절망하던 모세에게 하나님이 다시 말씀하셨듯이, 깨진 인생을 들고 절망하는 우리에게 오늘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다시 깎아 오너라. 내가 그 위에 다시 쓰리라."
그리고 본문보다 좀 뒤로 가서 출애굽기 34장 29절 을 보면 이런 놀라운 장면이 나옵니다.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모세의 손에 들고 시내 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가 두 번째 돌판을 받고 산에서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 모세 자신은 그것을 몰랐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내려올 때에 ... 자기가 여호와와 말하였음으로 말미암아 얼굴 피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여러분, 이것이 두 번째 돌판을 들고 산을 오른 사람의 얼굴입니다. 자기도 모르게 빛이 나는 얼굴. 이것은 화려한 사역의 결과가 아닙니다. 큰 업적의 결과도 아닙니다. 이것은 순종으로 돌판을 깎아 산에 오른 사람의 얼굴입니다.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손에 무엇인가를 들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 사람의 얼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손에 깨진 돌판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처음 신앙의 열정이 식어버린 자리, 반복된 실패로 지친 마음, 회복할 자신이 없는 관계, 끊을 수 없을 것 같은 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것 같은 인생의 한 영역. 또한 율법의 사슬에 묶여 은혜가 사라지고 종교적 의무감으로 인한 피로가 쌓인 자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네가 다시 깎아 오너라. 내가 그 위에 다시 쓰리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두 가지를 말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여전히 쓰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다. 우리의 실패가 하나님의 사랑을 끝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깨뜨린 것보다 하나님이 다시 만드시려는 마음이 더 큽니다.
둘째, 그러나 이번에는 우리가 산에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안락의자까지 돌판을 가져다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깎아야 합니다. 우리가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일찍 일어나 산을 올라야 합니다.
그 수고는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산을 오를 때, 하나님은 그 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우리가 돌판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은 거기에 친히 새기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산에서 내려올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얼굴에서 빛이 날 것입니다.
함께 기도합시다.
🙏 마무리 기도
🙏 마무리 기도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우리에게 두 번째 돌판의 은혜를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깨뜨린 모든 것 앞에서 절망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이 여전히 쓰실 준비가 되어 있으심을 믿게 하소서. 그러나 동시에, 우리에게도 산을 오르는 수고가 요청됨을 잊지 않게 하소서.
오늘 이 자리에서 결단하기 원합니다. 미루어 두었던 회개, 시작해야 할 순종, 깨뜨려야 할 죄, 회복해야 할 관계, 오늘 그 돌을 깎기 시작하게 하소서. 그리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 그것을 손에 들고, 산을 오르게 하소서.
우리가 산 위에서 만날 그분이, 오늘도 우리를 자비롭게 기다리고 계신 그 하나님이심을 확신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말씀노트>
Q1. 깨어진 첫 번째 돌판: 내 안의 연약함 마주하기
최근 나의 삶에서 굳은 마음이나 오래된 옛 습관 때문에 좋은 결심이 쉽게 무너졌거나 반복해서 넘어졌던 경험이 있다면 솔직하게 나누어 봅시다.
Q2. 두 번째 돌판을 깎는 수고: 나의 일상 돌아보기
종교적인 열심과 일상의 치열함은 결코 나누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하며, 요즘 나의 학교, 직장, 혹은 인간관계 속에서 내가 정과 망치로 치열하게 다듬어 준비해야 할 '나만의 돌판'은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예: 가족에게 사과하기, 정직한 업무 태도, 끊어야 할 나쁜 습관 등)
Q3. 아침에 일찍 일어나: 단순하고 구체적인 순종
거창하지 않더라도, 은혜를 담을 빈 그릇을 준비하기 위해 내가 이번 주 당장 실천할 수 있는 단순한 순종 한 가지는 무엇일까요?
응답 기도 제목
미루어 둔 회개를 오늘 시작하게 하소서
깨진 관계 앞에 먼저 다가가는 용기를 주소서
매일 아침의 작은 순종을 회복하게 하소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