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읽는 주기도문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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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는 주기도문_10_우리의 죄를 사하소서1 - 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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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2) 321페이지 읽겠습니다.
I. 들어가는 말.
I.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다섯 번째 간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네 번째 간구가 육체의 필요를 위한 간구로서 이동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였다면 다섯 번째 간구는 영혼의 필요를 위한 간구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시험에 들지 않도록 간구함 악에서 구해 주시길 간구함 역시 영혼의 안전과 관련된 기도입니다. 양식을 위한 기도가 공동체적 성격을 가진 것처럼 용서의 기도 역시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이 이것은 우리의 신앙이 관계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함을 보여줍니다. 또한 우리 자신을 위한네 가지 기도 제목들 중 육체를 위한 기도는 한 가지이지만 육체를 아우르는 영혼을 위한 기도는 세 가지나 된다는 점은 우리로 하여금 육체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지만 영혼은 더 많이 하나님을 의지해야함을 깨닫게 합니다.
(00:58) 영혼의 아름다운 상태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 결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II.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II.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하나님과 나는 영적인 교통을 걸어먹는 커다한 장애물은 죄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타고난 불완전성과 천천적 부패성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지 않고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죄와 사망의 법에서 벗어나 생명과 성령의 통치를 받으며 살고 있지만 여전히 그들의 내면 속에는 죄가 잔전하고 그 죄들은 그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거스르게 만듭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마련해 놓지 않으셨다면 신자조차도 귀참한 인간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01:4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 언약 안에서 인간의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와 순종을 위한 무한한 은혜의 공급을 약속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의 용서를 비는 다섯 번째 한구는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사제 약속에 대한 믿음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
A 복음서 본문의 차이.
A 복음서 본문의 차이.
이 이 본문을 다루기에 앞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본문의 차이를 생각해야 합니다. 두 복음서 본문은 용서하는 시점에 있어서 그리고 용서의 대상이 되는 죄에 대한 표현에 있어서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점들이 본문의 해석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1. 용서하는 시점의 차이.
1. 용서하는 시점의 차이.
(02:35) 용서하는 시점의 차이. 첫째로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 주는 시점의 차이입니다.이는 두 본문에서 동시에 동사의 시제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마복음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와 같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완료형 앞에 카멘으로 나옵니다.이 이 시제를 따르면 본문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이미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지금 사하여 주시옵고가 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에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와 같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는 것이 현재형 앞이오맨으로 나옵니다.
(03:35) 이 이 시제를 따르면 부모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지금 용서해 주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의 죄를 지금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의미가 됩니다. 두 복음서의 차이를 보며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이미 용서했기 때문이 때문인가 아니면 지금 용서하고 있기 때문인가? 심지어 어떤 사람은 그 두 가지 사이에 심각한 교리적 차이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뜻 심각해 보이는이 시재상의 불일치는 두 본문이 가지고 있는 언어적 차이에서 비록된 것입니다. 마태가 기록한 복음서는 예상 독자가 유대인들이었고 누가가 쓴 복음서는 헬라인들이었습니다.
(04:32) 그리고 원래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실 때 사용하신 언어는 아라무였습니다. 히브리어가 주로 종교 분야에 국한되어 사용된 언어였다면 아라는 일찍부터 고대 근동의 국제 공룡으로 쓰인 은혜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타인에서는 일상 언어로 사용되었고 사용되고 있었을뿐 아니라 사도시대 이후에도 유대 라비들이 탈무들을 가르치고 성경을 연구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나몬은 히브리어와는 현재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유사한 반면 헬라어나 현대 영어와는 현저하게 다르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히브리어와 동일하게 아라무는 현재 미래 가그와 같은 시제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05:26) 동사의 활용에 있어서도 시제 대신 시상만이 존재합니다. 히브리어와 아라머의 시상은 어떤 동작의 시점이 현재인지 과거인지 미래인지를 알려주지 않습니다. 시상은 시점과 상관없이 그 동작이 완료되었는가 지속되고 있는가만 표현합니다. 따라서 시제와는 상관이 없이 말하는 시점에서 동작이 종료되었다면 모두 완결형 혹은 과거 사이며 종료되지 않고 진행 중이면 미완결형 혹은 미래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히브리어나 아브라 아라에서는 과거 완료, 과거 미래 완료는 모두 완결형입니다. 이에 비하여 현재 진행형, 미래 미래 진행형뿐만 아니라 과거 진행형도 모두 미완결형을 사용합니다.
(06:24)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할 때 예상 독자들인 유대인들을 염두에 두고 마음속에 있는 아라머를 헬라어로 표현했기에 시제를 완료형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누가는 예상 독자들이 헬라의에 익숙한 사람들였기에 헬라의 표현 방식을 그대로 따랐고 그래서 현재형을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두 복음서의 시제가 다른 것을 두고 해석상의 차이를 둔다거나 이것이 용서에 대한 교리적 문제를 야기하느냐 마느냐를 운논운할 필요는 없습니다.
2. 죄에 대한 표현 차이.
2. 죄에 대한 표현 차이.
둘째로 죄에 대한 표현의 차이입니다. 이것 이것은 앞서 살펴본 세상의 차이보다 오리려 더욱 눈여겨 부활할 차이입니다.이 차이를 명확히 어 하기 위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숙고해야 합니다.
(07:26) 첫째로는 우리가 용서해야 할 죄라는 단어에 대한 두 복음서의 표현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에 등장하는 죄라는 표현이 헬라오문 오페이네마타라는 단어입니다.이는 문차적으로 빛 혹은 부채들을 뜻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의 헬라 원문은 하마르티아스를 사용하고 있습니다.이는 문자적으로 정확히 죄들을 뜻합니다. 우리 성경은 똑같이 죄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사실이 두 단어가 헬라어로 같지 않습니다. 둘째로 우리에게 죄지은 자라는 구절에 대한 두 복음서의 표현이 다르다는 점입니다. 마태복음에 우리에게 죄지은 자로 온문상으로 토이스 오페이타 이스해몬인데이는 문차적으로 우리의 빚진 자들입니다.
(08:29) 그러나 누가복음은 우리에게 죄지은 모든 사람에 해당하는 헬라오 원문 판티 오페이논티 해민으로 우리에게 빚진 어 빚지는 모든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셋째로는 우리에게 용서해 준 것 같이라는 구절에 대한 두 복음서의 표현이 다르다는 절입니다. 구리말 성경의 마태복음에서는 사하여 준 것 같이라고 번역하였는데 헬라오 원문은 호이카이 헤메이스 아페카맨이고 문자적으로는 실로 우리가 용서한 것과 같이라는 의미입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용서하오니라고 번역가 있는데 헬라 원문은 카이 가르 아우토이 아피호맨이고 문자적으로론이는 또한 우리 자신이 용서하였기 때문요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차이가 있을까요?
(09:33) 여기서 우리가 주무할 것은 죄를 짓는 것과 용서하는 것에 대한 두 복음서의 서로 다른이다는 의미입니다. 본문에 대한 이러한 관찰의 도대로 마태복음 위각해서이 강구의 내용을 해석하면 당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이미 빚진 모든 사람을 탄감해 주니 우리가 당신께 빚진 것도 탄감하여 주소서. 마태의 복음서는 유대 독자들을 상정하여 기록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 시대로부터 죄를 하나님 앞에 빛으로 생각하는 개념의 익숙제에 있었습니다. 우리의 죄는 빛과 같아서 하나님과 이웃에게 손을 입혔고 따라서 빚진 사람에게 부처의 생활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죄지은 사람에게는 응분의 대가를 칠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입니다.
(10:31) 유대인에게는 이러한 전통과 관습의 뿌리로 둔 유대주의적 표현이 죄의 지음과 죄 용서에 대한 개념을 전달하는데 탁월한 호스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틴은 죄 짓는 것과 용서하는 것을 이와 같이 빛의 개념을 사용하여 표현하였습니다. 요한은 대적으로 누가복음서는 비유대인들의 헬라인 독자들을 산장하고 기록되었습니다. 만약 누가 마태와 같은 방식으로 죄지음과 용서를 표현하 했다면 두 가지 문제가 이야기되어 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런 표현 방식이 유대인에게 고유한 것이었기 때문에 헬라인에게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헬라인 독자들의 죄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갚을 채무에 인식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경제적인 거래 관계로 오해할 위험이 있었습니다.
(11:28) 빛을 둘러선 채무자와 채권자들의 관계는 단지 돈을 주고받는 관계이지 은총이 개입할 여지가 있는 관계가 아닙니다. 누가는 이러한 고민을 교묘하게 풀었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죄를 가르킬 때 하마르티아라는 고유하게 죄를 가르키는 명사를 사용하고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죄지 죄를 가리킬 때는 마태와 똑같이 빛을 지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오페이로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와 같은 사실을 밀어볼 때 두 복음서의 실린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강구는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이것이 교리적의 논쟁을 불이 불러일으킬 정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어 오히리로 두 복음서의 복음 차이점은 용서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수신자의 문자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보다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두 복음서 기록자들의 노력을 어 보여
(12:35) 주는 것이라 보아야 합니다.이 이 다섯 번째 간구를 대하여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진리는 날마다 죄 짓는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용서의 은혜를 입는지 우리는 이웃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두 분의 작은 표현의 차이점을 가지고 하나님께 죄를 용서받는 것이 이미 우리에게 다른 사람 죄를 용서했기 때문이지 아니면 지금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있기 때문인지를 따지는 것은이 간구를 가르쳐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도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이 이 간구에 대해 우리의 품모야 할 의무는 오히려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이 용서할 하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랑의 성향이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13:26) 우리는 끊임없이 용서받는 자로서 다른 사람을 향해서 용서를 베풀며 살아가야 할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제와 표현에 연연하지 대신 주기도문의이 다섯 번째 간구가 담고 있는 보다 깊은 의미에 어 눈을 떠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 기도가 우리는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 과거에도 또 지금도 끊임없이 용서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성향의 사람들이 오니 하나님께서도 그러한 사랑의 성향으로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 주시옵소서라는 의미의 기도라는 사실입니다.
B. 용서의 간구를 드릴 주체,
B. 용서의 간구를 드릴 주체,
다음으로 죄의 용서를 비는이 간구의 주체가 누구였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 역시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줍니다.
(14:28) 이 기도의 일차적인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2차적인 주체는이 주기도문에 참여하고 있는 우리 모든 신자들입니다.
1. 용서받은 사람들.
1. 용서받은 사람들.
이 다섯 번째 간구의 일차적인 주체가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이어지는 여섯 번째 간구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합니다. 제자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보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안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 용서를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물론이요 누가복음 역시 주기도문의 가르침이 나오기 전 꽤 길게 산상수훈의 말씀을 씻고 있습니다.
(15:20)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들의 윤리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 이미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염두해 두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주기도문은 천국 백성으로서 그 천국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세상 나라에 살고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 속에 녹아 있어야 할 기도입니다.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은 천국 시민이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그들은 세상의 빛이며 세상의 소금이었습니다. 마태복음 5장 13절 14절. 그들은 마음의 뜻과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16:09) 마태복음 22장 37절에서 38절. 자기를 위하여 땅에 보물을 쌓아두어서는 안 되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근심해서도 안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 19절 31절. 그들은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어야 했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 같이 자신들도 온전한 사람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마태복음 55장 48절 6장 33절 다른 사람을 비판해서는 안 되며 탐욕을 멀리하고 정결하게 사는 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 마태복음 7장 1절 10장 16절. 그런데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이 주기도문을 받고 있는 제자들이 충분히 그런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까? 그들은 이미 하나님 나라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이 되었으나 충분히 그렇지는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17:03) 한때는 그런 사람일 수도 있으나 항상 그렇지는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의 인격적 특징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 팔복을 기억해 보십시오.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심명이 가난하고 예통하며 온유함은 물론 의에 줄이고 목마른 사람들이야 했고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어야 했습니다. 더하여 그들은 긍휼히 여기는 자들이어야 했으며 마음이 청결한 자여야 했습니다. 그들은 화평하게 하는 자들이어야 했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들이어야 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절에서 10절. 그러나이 제자들은 그러한 인격적 특성 특징을 가진 사람들이 못되었습니다.
(17:57)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서 주어지게 될 것들이 그들이 추구하며 살아야 할 이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하나님의 나라가이 땅에 임하고 하늘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여야 했습니다. 하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그들 역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답지 못한 부분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날마다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로 해야 할 사람들이었고 현재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인격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자신들을 백성으로 받아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하여야 할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이 다섯 번째 간구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를 기억하게 하는 기도입니다.
(18:52) 아마도 제자들은 주기도문을 올릴 때마다 자신들은 다만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은혜를 힘입어 살아가는 백성들일 뿐임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다섯 번째 간구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를 이미 받은 그리고 지금도 용서하시는 은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들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2. 유대인들과는 다른 기도
2. 유대인들과는 다른 기도
여기서 우리가 꼭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다섯 번째 간구는 그 내용과 방식에 있어서 당시 유대인들이 드리던 기도와는 매우 다른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기도는 신인보상 신인 보상의 개념을 가진 기도였습니다.
(19:43) 즉 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이만큼 착한 일을 하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한 것만큼 갚아 주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이를 입증하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리새인의 기도입니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호색 불이 가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11조를 드리나이다. 바리새인은 사실상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강고하였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중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자신의 종교적 선행에 대하여 빛을 지셨다는 사실을 상기시켜드렸습니다.
(20:25) 그것은 선행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요구하는 태도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기도가 이처럼 변질되고 타락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로는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언약 관계는 계약 관계라고도 부릅니다. 구약에서이 교약 관계는 주권의 측면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의 관계로 들어오시는 일방적 성격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의무와 책임의 측면에서는 쌍방적 성격을 강조합니다. 실제로 구역에는 이런 묘사가 나옵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드리는 것이니 잠언 19장 17절 상관절 이것은 내가 가난한 사람을 구조했으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부처로 여기시고 나에게 갚으신다는 뜻입니다.
(21:12) >>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하나의 문학적인 비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빛을 지실 수 있습니까?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고유하게 우리의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죄밖에 없습니다. 그러므 가난한 자를 돕는 선행에 대한 보상의 약속처럼 보이는이 말씀은 이기심 넘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구제하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하지 말도록 가르치는 교화적 표현입니다. 다시 말아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웃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의 성향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비를 실천하며 사는 자들을 복 주신다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자신들의 선행들에 대하여 신인 보상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언약마저 상업적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22:02) 둘째로 후이 유대교회 잘못된 가르침 때문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외경에 보면 자신의 선행을 기초로 하나님께 당당히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이미 이러한 보상적 기도의 습관에 깊이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주기도문을 가르침받았던 제자들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그들의 기도의 중심은 하나님이어야 했고 자신의 행복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이어야 했습니다. 한 사람의 기도의 내용과 태도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아마 유대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이렇게 기도하는 제자들의 기도가 매우 낯설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22:47) 열전 새로운 어느 교인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적당한 때에 그를 신방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어떻게 주님을 깊이 만나게 되었는지를 잠깐 간증하였습니다. 그는 복음의 신비를 깊이 깨닫게 된 계기가 설교가 아니라 예배 시간에 어느 여성도의 대표 기도를 듣고서라고 하였습니다. 그동안 예수님을 믿으면서 자신은 한 번도 드려본 적이 없는 기도를 그 대표 기도자가 흐느끼면서 올리는 것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신앙의 회의를 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표현이 재미 있었습니다. 기도하던 그 여성도 저와 저의 신앙은 저의 저의 신앙은 한이 달랐습니다.
(23:32) 우리를 사랑하신 자비의 주 아버지 주께로 나아갈 때에 기도 들으사 우리 제악과 강팍한 주님께 고백하니 우리를 민망이 여기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복음적 경건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불러 주셨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노예로 잡는 것입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 불러 주셨지만 스스로는 다만 용서받은 죄인일 뿐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 모든 선한 일들을 잊어버리고 오직 십자가의 사랑으로 자기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은혜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에게 선을 행하면서도 우리 자신은 다만 용서받은 죄인이며 지금도 하나님의 끊임없는 용서를 받음으로써만 살아가는 죄인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24:19)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의 다섯 번째 간구를 올리는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
C. 죄는 무한한 빚임.
C. 죄는 무한한 빚임.
더불어 이 간구는 우리에게 인간의 죄가 하나님께 대한 무한한 빛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인간에게이 죄의 문제보다 시급한 것은 없습니다. 저는 목회를 하기 전까지는 남의 빛을 갚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로 알았습니다. 물론 빚을지는 일은 그 자체로도 고통스러운 일이며 빚을 졌다면 반드시 갚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목회를 하면서 재무 관계로 고통받는 성도들의 다양한 세례 사례를 접하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어느날의 법은 부채에 대하여 매우 너그럽다는 것이었습니다.
(25:12)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하는 것 때문에 심각한 형벌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저는 저렇게 남의 돈을 많이 가져다 쓰고 갚지 못하는데 당연히 구속이겠군요라고 말했는데 음료를 잘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목사님 그 정도에 그 정도를 가지고 감옥에 보내면 길거리에 걸어다니는 사람이 반 이상 줄 겁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인의 사회에서 빚은 무거운 것이었습니다. 빚을 갚지 못하면 그 사람의 자유를 박탈하여 노예가 되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로마 시대에는 자기 매매를 통해 통하여 노예가 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가족이 진비지나 가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노예로 파는 것이었습니다.
(26:09) 제가 제 따르는 책임이 책임의 심각성을 강조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모태 신앙이고 부모님은 모두 예수님을 믿고 이제 끝아오셨습니다. 제가 죄를 지었으면 얼마나 지었겠습니까? 정말 나쁜 놈들은 어 감옥소에 있습니다. 그리고는 황당한 논리를 폈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충분히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혹시 제가 죄를 많이 짓고 타락하면 극적으로 하나님을 만나 새 사람이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죄를 짓는 행위 자체를 고려하여 죄의 유무와 형벌의 크기를 결정합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뜨는 것, 때리는 것, 어 살인하는 것은 그 죄의 크기가 혹은 유무에 있었으나 형벌에 있어서 각각 다릅니다.
(27:07) 그러나 어떤 경우의 경우제의 유무와 형벌의 크기가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 행위와 관련된 당사자를 고려하여 결정되기도 합니다.이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의자에 잠시 앉았다가 일어나는 것이 법적 책임을 질 정도로 무거운 죄가 아닙니다. 의자 주인에게 도덕적 결려가 될지는 몰라도 사법적 책임을 물을 사는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제국 시대의 사람들이고 그렇게 몰래 앉아본 의자가 황제의 의자였다면 어떨까요? 한 사람이 잠시 그 의자에 앉았고 공교롭게도 황제가 그 강경을 목격하였다면 그에게 어떤 벌이 내릴까요? 두말할 필요 없이 사형입니다.
(28:02)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황제를 살해하려고 시도하다가 실패해도 사형이고 형제 황제의 얼굴에 짐을 뱉고 욕을 하다가 체포되어도 사형이고 황제 의자에 잠깐 앉았다가 일어나도 사형입니다. 살례하려고 시도한 것과 의자에 잠깐 앉은 것 짐을 뱉고 욕하는 것은 각각 죄의 크기가 다른데도 형벌은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황제에게 있습니다. 제대상이 되는 황제의 지위가 워낙 높기 때문에 행동들 자체가 갖는 차이점들은 문제되지 않는 것입니다. 위대한 황제 앞에는 자수한 도덕적 도덕적 악이나 실수도 모두 무한히 큰 죄가 됩니다. 이것이 소위 도덕철학에 있어서 존재의 지위에 따는 판단의 원리입니다.
(28:56) 이러한 도덕 원리를 하나님과 관계에 적용해 보십시오. 우리의 죄의 크기가 하나 우리에게는 변명거릴 줄는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이미 없습니다. 하나님께는 저의 크기가 없는 것과 같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절대적인 의미에서 모든 죄는 하나님 앞에 사수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의도와 영광에 이르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작은 죄를 지었을 때는 하나님의 법으로부터 이탈했다는 양심의 가책이 크지 않지만 큰 죄를 지었을 때는 크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도 때로 작은 죄는 돌이키지 않아도 커다란 고통을 주지 않지만 큰 죄는 돌이키지 않으면 커다란 고통을 가져옵니다.
(29:51) 그러나 하나님의 무한한 위대하심과 완정성의 측면에서 본다면 죄는 그것이 작든지 크든지 그 본질상 동일합니다. 그리고 그 자체가 하나님을 깔보는 것입니다. 무한히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인간의 죄가 무한한 크기를 갖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죄 자체가 하나님을 향한 반감이고 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큰 제악 중에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왔다면 제가 하나님을 만나게 해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빚이 그에게 죄의 본질을 깨닫고 하나님을 만나게 해준 것입니다. 죄에 대한 지각은 죄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죄를 죄로 알게 하는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지각에 비례합니다.
(30:43) 비록 아주 작은 죄를 지었을 뿐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경험하면 자신이 그분의 용서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철저한 지각 자각에 이르게 됩니다. 그리고 복음적인 경건 복음적인 영성은 바로 이러한 깨달음에서 옵니다.
D. 신자와 하나님의 용서
D. 신자와 하나님의 용서
이상의 논의를 통하여 우리가 신자가 주기도문의 삶을 살아가는 것과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생활이 얼마나 불과분의 관계가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주기도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의도는 암송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형식에 따라 실제로 살고 간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궁금하지 않으시니까 우리가 매일 주기도문을 드리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용서받은 이미 받은 용서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31:48) 여기서 우리는 이미 받은 영원한 용서와 지금 받아야 할 경험적 용서를 구별해야 합니다.
1. 이미 받은 용서: 영원한 용서.
1. 이미 받은 용서: 영원한 용서.
구원과 함께 우리가 받은 용서는 영원한 용서입니다. 죄에 대한 영원한 용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지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이 세상의 모든 인간과 만물을 보실 때 시간의 구회받이 없이 한 번에 보실 수 있습니다. 신학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단순 오성지 혹은 단순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처럼 사물들의 정권과 후건의 온인 결과 관계를 통하여 시간의 흐름 속에서 무엇인가 아시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무한한 지성으로 한번의 모든 것을 보고 아시는 것을 말합니다.
(32:50) 구원의 용서는 영원한 용서이기에 어떤 사람이 어 어느 시점에서 자기가 죄지임을 깨닫고 회개하고 그리스를 믿게 되었다면 그때 그가 받은 하나님의 용서는 과거의 죄뿐 아니라 현재 그리고 미래를 짓게 될 모든 죄까지 사받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용서의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받는 순간 우리가 그동안지 모든 죄를 생각한 것도 아니고 생각난 모든 죄를 회개한 것도 아닙니다. 지체를 모를 어 미래의 죄를 미리 회개한 것은 더욱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치 죄 없는 사람을 대하듯이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 어 죄를 영원한 보심 속에서 영원히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33:48)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구원과 관련하여 우리의 시간과 상관없이 우리의 죄의 모든 죄를 영원히 단번에 용서해 주시는 이유는 티클만큼의 죄도 용서받지 못한 채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반복되는 용서: 경험적 용서
2. 반복되는 용서: 경험적 용서
하나님께서는이 세상의 모든 인간과 만물을 보실 때 시간의 구회됨이 없이 한 번에 보실 수 있지만 시간의 흐름 안에서 사물을 보실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 1장 4절 10절 12절 하나님께서는 청지를 창조하시기 전 이미 당신의 창조 행위를 통하여 잊게 될 모든 광경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을 만물이 창조되었을 때에 마치 이전에 없었던 슬픔과 기쁨, 분노와 긍휼 등의 정동을 겪으시는 분처럼 묘사하였습니다.
(34:44) 출애굽기 32장 10절, 신명기 30장 10절, 느헤미야서 9장 19절 신학에서는 이것을 하나님의 현견지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처럼 사물들의 전전권과 후권의 원인 결과를 온인 결과 관계를 통하여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아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현견지를 인간의 암과 같은 차원의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이 만물을 아는 지식은 원인과 결과의 폐쇄적 고리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리하여 원인 이전에 대한 지식도 결과 이후에 대한 지식도 시간이 도래하기 전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현견지는 앞뒤에 대한 미지 혹은 무지의 상태를 동반합니다.
(35:33) 그렇지만 하나님의 현견지는 그 어떠한 미지나 무지도 동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 안에서 보신다는 것은 모든 것을 숨기 없이 아시 아시는 완전한 지식 안에서 시간의 시간의 흐름을 따라 아시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 31절. 구원에 관련된 한 번의 용서는 영원한 용서입니다. 그러나 영원한 용서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만약 그것으로 인간의 모든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면 구원받은 인간이 저지른 죄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용서를 과신한 채 자신이 짓고자 하는 죄도 이미 용서해 주신 것이니 죄를 지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36:17)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활용한다면 그들은 어두운 세상의 빛 빛으로 살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 뼈저에게 자기의 죄를 회개한 그 심정이 일평생 변함없이 유지된다면 거의 죄를 짓지 않겠지만이 세상 누구도 그 감격을 평생 같은 정도로 간직하며 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영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시간 안에 묶긴 인간들에게 시시때때때로 당신의 마음을 전달하심으로써 그들을 교화하십니다.이는 이는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 안에 묶여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시기 위하여 인간의 눈높이로 낮아져서 소통하시는 것입니다.
(37:10) 구원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현견지 안에서의 용서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이 용서를 경험적 용서라고 부릅니다. 세상은 죄에 속하였고 어 신자에게도 여전히 잔존하는 죄가 있습니다. 아주 윤목사님 뮤트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도 은혜에서 물러나면 죄를 짓습니다. 본성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던 사람이 한 때에 회개하였다고 할지라도 은혜에서 멀어지면 다시 폭력을 쓰게 되고 돈을 사랑하던 사람들이 신앙을 떠나면 다시 돈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았고 이미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나 마치 아직 구원을 이루지 못한 것처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는 사람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38:09) 고린도전서 9장 27절, 빌립보서 2장 12절. 신자는 하나님께 이미 모든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지만 때때로 시간 속에서 살아가며 자기 의지로 죄를 짓기도 합니다. 그때 신자에게 다가오는 것은 하나님과의 불화로 인한 영혼의 고통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죄를 불쾌하게 여기시는 것을 인식하고 이로 인한 거절감과 이에 따른 두려움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고통이 너무나 커서 예전에 경험한 영원한 용서가 현실적으로 도움이 안 될 정도로 그를 짓누르기도 합니다. 시인은 이러한 경험을 토로한 적이 있습니다. 내 일생을 슬픔으로 보내며 나의 연수를 탄식으로 보내이여 내 기력이 나의 죄악 때문에 약하여지며 나의 뼈가 쇠하는도다하도소이다.
(39:05) 시편 31편 10절.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으로 우르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시편 40편 12절. 신자는 이러한 불화와 고통의 경험 속에서 그를 영원히 용서하신 하나님께서 시간 속에서 지은 죄에 대하여 마치 그것을 처음하신 것처럼 진노하시고 책망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 속에서 신자는 도덕적으로 교화되어 갑니다. 다시 말해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와 진노에 대한 경험을 통해서 도덕적 동기가 북돋도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화목하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복인지를 아는 동시에 하나님 없이 자기 즐거움을 위하여 불순종하고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깨닫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40:09) 용서를 경험적 용서를 반복하심으로써 우리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사람으로서 그 계명의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번 영원한 용서를 받았다고 교만해질 수 없게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1절. 더욱이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 교재와 은혜가 주는 환의가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들은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이 받게 될 형벌보다 그것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게 될 영혼의 처지를 더욱 두려워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평화의 소중함을 알고 더욱 성결하게 살아가도록 힘쓸뿐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의 빛 앞에서 자기는 하나님의 전적인 용서와 은혜를 필요로 하는 무한히 의존적인 죄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41:05) 그리고 천국 시민으로서 합당하지 않은 자신의 삶의 부족을 깨달을 때마다 참회하며 용서를 빌게 됩니다. 이러한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아갑니다.
3. 용서를 통해 사랑을 배움.
3. 용서를 통해 사랑을 배움.
성경에는 하나님께 사랑을 많이 받고 또 하나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탁월한 영적인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바이나 사도 베드로, 사도바 등을 예로들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던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육체를 위하여 공급해 주시는 양식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지만 죄의 용서를 통해서 그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됩니다.
(42:01) 많이 용서받은 사람이 하나님을 많이 사랑합니다. 그런 점에서 용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직접 얼음앉지시는 최고의 영적 축복입니다. 그래서 20세기에 탁월한 칼빈주의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벤저민필드는 시편 51편을 설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다윗은 죄를 알았다. 자신이 부정한 것을 만졌고 또 불법의 깊이를 어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알았다. 그가 독자적으로 자신의 길로 갔으며 그 길이 이끄는 덤불과은 물론 그 길의 절망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을 알았다. 그가 주님께서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맛보았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구원을 경험했다.
(42:46) 그는 구원이 무엇인지 알았고 그 기쁨을 알았다. 제가 무엇인지 아는 것도 성도밖에 없다. 오직 성도만이 그것을 경험하고 이해된 구원과 비교해서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원이 무엇인지 아는 것은 죄를 지은 성도밖에 없다. 그것은 잃어버리고 다시 찾은 완전히 이해된 기쁨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떡과 포도주가 육체를 위한 일할 양식이라면 용서는 영혼을 위한 일용할 양식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공급받은 물질들을 이웃들과 함께 나눔으로써 굶지는 이들이 없게 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용서의 사랑으로서 나에게 어떠한 잘못을 저지는 모든 사람들을 용서함으로써 누구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소해되지 않도록 도와야 합니다.
(43:39) 그러므로 용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교회와 인류 사회 안에서 지속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III. 결론
III. 결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체를 위해서는 매일 일용할 양식을 내리시고 영혼을 위해서는 매일 십자가의 보혈로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알아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 귀도문 다섯 번째 간구를 올릴 때마다 브리토인으로 살아가지만 하나님 나라의 윤리적 표준에 미치지 못하는 미천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우리 안에 있는 많은 제악과 불결 그리고 탐심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용서를 구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강절히 간구하게 됩니다.
(44:33) 주의 인자는 끝이 없고 그의 자비는 무궁하며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주의 성실이 큼이라. 성실하신 주님 우리의 죄에 대하여 용서를 구하는 기도가 지금 여러분에게 낯설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그 사랑에 감격했을 때는 경건하게 살면서도 용서를 비었고 헌신적으로 살면서도 이기심을 깨뜨려 달라고 참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아름다운 기도가 여러분 마음속에 살아 있습니까? 아니면 우리는 하나님께 지은 죄와 불순종은 쉽게 잊으면서도 우리에게 죄지은 이웃들의 잘못은 영원히 잊지 않는 사람들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사랑과 십자가의 은혜에 비하면 주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희생과 헌신은 뒷과 같은 것입니다.
(45:36) 매일 내려 주시는 양식을 통해서 육체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처럼 매일 베푸시는 용서를 통해서 영혼의 생명은 얻게 하심은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들을 그렇게 용서하며 살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소서 한 눈에 보는 10장
I 들어가는 말
네 번째 강구는 육체의 필요를 위한 것이었다면 다섯 번째 간구는 영혼의 필요를 위한 것이다.
II.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A 복음서의 본문의 차이
1. 용서하는 시점의 차이.
마태는 복음서를 기록할 때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마음속에 있는 아람을 헬라어로 표현하였기에 시제를 완료형으로 사용하였다. 이와는 대수적으론 누가는 일상독자들이 헬라어의 익숙한 사람들이었기에 헬라어의 표현 방식을 그대로 따랐고 그래서 현재의 형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두 복음서의 시제가 다른 것은 어 두고 해석상의 차이를 둔다 하거나 이것이 용서에 대한 교리적 문제를 이야기하느냐를 운할 필요는 없다.
2. 죄에 대한 표현의 차이.
유대인들은 구약 시대로부터 죄를 하나님 앞에 빛으로 생각하는 개념이 육속기에 마태는 죄를 짓는 것과 용서하는 것을 빛의 개념을 사용하여 표현하였다.
누가복음의 예상 독자는 헬라인들로 누가가 마태와 같은 방식으로 죄의 지음과 용서를 표현했다면이 두 가지 어 두 가지 문제가 약기 될 수 있었다. 하나는 유대인 고유의 관습적 사유를 헬라인들이 이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죄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갚을 채무 인식하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거래 관계를 오해야 할 위험이었다.
누가는 이러한 고민을 교묘하게 풀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죄를 가리킬 때는 죄를 가르키는 명사 하마르티아를 사용하고 다른 사람들의 어 우리에게 죄지 죄를 짓는 짓는 죄를 가리킬 때는 마태와 같이 빛을 지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오페이로를 사용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밀어볼 때 두 복음서의 차이는 용서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을 순신자의 문화적 맥락에 따라 더 정확히 전달을 하려는 두 복음서 기록자들의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B. 용서의 간구를 드릴 주체.
1. 용서받는 사람들.
이 기도의 일차적 주체는 제자들로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나 아직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충분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날마다 하나님의 용서를 필요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인격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자신들을 백성으로 받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이 강구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은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2. 유대인들과 다른 기도
유대인들의 기도는 신인 보상의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복음적 경건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불러 주셨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노예처럼 자차하는 것이다.
C 죄는 무한한 빚임.
이 간구는 인간의 죄가 하나님에 대한 무한한 빛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D. 신자와 하나님의 용서.
1. 이미 받은 용서 영원한 용서
구원과 함께 우리는 영원한 용서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이 세상의 모든 인간과 만물을 버실 때 시간의 구회됨이 없이 한 번에 버실 수 있다. 무한한 지식으로 한 번의 모든 것을 보고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 영원한 버심 속에서 영원히 용서해 주신 주신 것이다.
2. 반복되는 용서 경험적 용서
하나님께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물을 보실 수 있다. 초월적인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에 묶여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당신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인간의 눈높이를 낮서 소통하는 것이다. 구원 이후 인간은 하나님의 형견지 안에서의 용서를 반복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우리는이 용서를 경험적 용서라고 부른다.
세상은 죄를 죄에 속하였고 신자에게도 여전히 잔조하는 죄가 있다. 그래서 구원받은 사람도 은혜에서 물러가나면 죄를 짓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 교재가 교재와 은혜가 주는 환의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사람들은 죄를 지음으로써 자신이 받게 될 용서보다 그것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게 될 영혼의 처지를 더욱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평화의 소중함을 알고 더욱 성결하게 살아가도록 힘쓸뿐만 아니라 천국 시으로서 합당하지 않는 자신의 삶의 부족을 깨달을 때마다 참회하며 용서를 빌게 된다. 이러한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와 넓이를 알아간다.
3. 용서를 통한 사랑을 배움.
우리는 육체를 위해 공급해 주시는 양식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만 죄의 용서를 통해서 그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된다. 용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직접 얼음만치는 최고의 영적 축복이다.
III. 결론.
매일 내려 주시는 양식을 통해서 육체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처럼 매일 베푸시는 용서를 통해서 영혼의 생명을 얻게 하심은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그렇게 용서하며 살라는 하나님의 뜻이다. 아멘. 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