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공동생활_영원히 남을 사랑, 이곳에

성도의 공동생활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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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및 주제 분석]

I. 서론: 공동생활의 위기와 형제 사랑의 의미 (10분)

요한일서의 배경과 이단의 도전
사도 요한이 편지를 쓸 당시 교회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의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며, 구원을 위해 깊은 영적 지식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육체를 소홀히 여겼습니다.
이단의 결정적 특징: 사랑의 부재
이단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조직을 만들 수는 있었으나, 참된 하나님의 자녀만이 할 수 있는 '중심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일'은 하지 못했습니다.
구원의 명증한 증거로서의 사랑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단순히 상을 받는 선행이 아니라,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아는' 구원의 결정적인 증거입니다. 개인적인 눈물이나 진리에 대한 기쁨, 헌신적인 삶보다 공동체 안에서 입증되는 사랑이 실제적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II. 공동생활의 양태 변화와 그 본질 (10분)

초대 교회의 공동생활과 예수님의 모델
성령 강림 후 초대 교회는 재산을 공유하며 함께 먹고 자는 공동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는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목적(함께 있게 하시고 섬기게 하심)의 재현이었습니다.
모이는 공동체에서 흩어지는 공동체로
하나님은 창조 명령(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과 지상 대명령(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을 통해 교회가 한곳에만 머물지 않고 세상으로 흩어지길 원하셨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도 이를 위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변치 않는 공동생활의 정신
오늘날 우리가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 살지 않더라도 공동생활의 정신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개인의 유익을 위한 단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영원한 가족 공동체입니다.

III. 기독교적 사랑과 '애덕(愛德)'의 삶 (10분)

자기 사랑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의 회심
인간은 스스로 살 수 없다는 비참함을 느낄 때 자기 사랑에서 시작하여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 중심을 보시고 아가페(Agape)의 사랑을 깨닫게 하시며, 신자는 이에 감격하여 회심하게 됩니다.
지순한 사랑 '까리따스(Caritas)'
아가페의 감화로 신자 안에는 '까리따스'라는 지순한 사랑이 생깁니다. 이는 이타적이고 자기를 포기하는 사랑으로, 불신자에게는 없는 신자만의 특징입니다.
애덕(愛德)의 삶: 창조 목적의 완성
신자의 일생은 사랑을 통해 덕을 이루는 '애덕의 삶'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계획에 부합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IV. 공동체 안에서의 갈등과 성화의 신비 (15분)

사랑할 수 없는 지체라는 '선물'
교회 안에는 말과 행동으로 고통을 주는, 사랑하기 힘든 지체들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이러한 지체들의 악은 '인칭적 악'이지만, 공동체 전체로 볼 때는 우리를 훈련시키는 '비인칭적 선'이 됩니다.
사랑의 한계를 깨닫는 지점
나를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할 때는 자신의 사랑 없음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러나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날 때, 비로소 내 사랑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십자가의 사랑'을 구하게 됩니다.
사랑으로 완성하는 정의
우리는 지체의 잘못을 판단할 의무가 있지만, 그 판단이 사랑하지 않는 핑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죄와 죄인을 구별하여,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용서하는 성숙함이 필요합니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사랑이 정의를 완성합니다".

V. 온전한 사랑을 위해 극복해야 할 세 가지 (10분)

자기 본위의 교만
자신을 모든 판단의 중심에 두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마음속에서 특정 지체를 상종하지 않겠다고 지워버리는 것은 영적인 '살인'과 같습니다.
성찰 없는 생활
매일의 삶을 말씀의 잣대로 돌아보는 성찰이 필요합니다. 사색하는 시간은 기도 시간만큼 중요하며, 이를 통해 자신의 영적 시력을 점검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자기 사랑
언제나 내 편인 이기적인 자아를 희생을 통해 깨뜨려야 합니다. 참된 사랑은 높은 곳에서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낮은 자리에서 형제의 발을 씻기는 섬김입니다.

VI. 결론: 영원히 남을 사랑의 실천 (5분)

교회는 영원한 사랑이 가장 먼저 실현되는 곳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유익하게 하기 위해 창조된 존재임을 기억하며, 먼저 찾아가 용서하고 허물을 덮어주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자기 몸처럼 지체를 사랑하며 자기를 부수어 타인을 살리는 희생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사랑이 온전히 이루어질 것입니다.

[소그룹 활동지] 성도의 공동생활: 영원히 남을 사랑, 이곳에

● 마음 열기 (Ice Breaking)교회 공동체 안에서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애썼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아 힘들었던 경험이 있다면 짧게 나누어 봅시다.
● 말씀 읽기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요한일서 3:14)

1. 사랑, 구원의 명증한 증거 (관찰과 이해)

사도 요한은 우리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다고 말하나요? (요한일서 3:14),
왜 개인적인 기도의 눈물이나 진리에 대한 기쁨보다 이 더 중요한 증거가 됩니까? 공동체 속에서의 사랑
,힌트: 하나님의 사랑은 혼자 있는 공간이 아니라 공동체의 지평 위에서만 실제적으로 입증되기 때문입니다.
'애덕(愛德)의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며, 이것이 왜 신자의 일생에서 중요한가요?,

2. 공동체 안의 갈등과 성화 (심화와 묵상)

공동체 안에 '사랑하기 힘든 지체'가 있는 것이 왜 하나님의 혹은 **'비인칭적 선'**이 될 수 있습니까?,,'선물'
우리는 흔히 '정의'를 내세워 지체를 판단하곤 합니다. 어거스틴이 말한 **"사랑이 정의를 완성한다"**는 의미는 무엇이며, 이것이 십자가 사랑과 어떻게 연결됩니까?,,
내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왜 를 바라보아야 합니까?,그리스도의 십자가

3. 사랑의 실천을 위한 자기 점검 (적용과 결단)

소스에 따르면 우리가 온전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극복해야 할 세 가지 장애물이 있습니다. 나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인지 나누어 봅시다.,,
내 판단이 항상 옳다고 믿으며, 마음의 명단에서 지체를 지워버리는 것.자기 본위의 교만:
말씀의 잣대 없이 내 감정과 충동대로 살아가는 것.성찰 없는 생활:
낮은 자리에서 섬기기보다 나 자신의 유익을 먼저 챙기는 것.이기적인 자기 사랑:
[실천 과제] 내 마음의 '사랑 수첩'에서 지워버렸던 형제나 자매가 있습니까? 이번 주에 그를 위해 먼저 기도하거나, 용기를 내어 먼저 다가가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구체적인 일은 무엇입니까?
● 함께 기도하기내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십자가의 사랑이 내 안에 부어져 나를 깨뜨려 지체를 살리는 '애덕의 삶'을 살게 해달라고 함께 기도합시다.,
오늘 첫 번째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일서 제 3장 14절입니다. 요한일서 3장 14절입니다. 13절부터 16절을 읽고 14절을 제가 한 번 더 읽겠습니다.
형제들아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서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아멘. 14절입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잡는 시간이오니 저희들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복하였으니 주님께서 말씀하실 자리입니다. 우리에게 주님의 음성을 들려 주시옵소서. 그 말씀이 우리에게 달게 해 주시고 또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찔릴 때에 우리들이 그 말씀을 향하여 돌아서도록 축복해 주옵소서. 아멘. 교육간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랑하는 지체들이 거리에 상관없이 성령으로 한 성도로 교통하며 주님의 예배에 참여하게 하시고 자모실에서 어린아이들과 함께 불편하게 예배를 드리는 지체들에게도 상황에 메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은혜를 받도록 저희를 특별히 돌보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사도 요한이 자기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입니다. 이때에는 이단이 일어나서 교회를 매우 어지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형제들인 것 같았던 사람들이 이단을 줬기도 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영지주의라고 하는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었는데 이것은 서양의 철학과 동양의 신비주의가 만나서 이루어진 이단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고 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보다 깊은 영적인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무지한 사람들은 구원을 얻기 힘들다고 말하면서 영혼과 육체 사이에 구별을 주장하며 육체는 악하고 물질적인 것이니 아 소홀이 해도 상관이 없다는 사상들이 번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면서 교회는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제 이러한 이단들을 염두에 두면서 요한 1서를 기록을 했던 것이죠.
여기에서 사도는 그 이단들의 중요한 특징 하나를 꼽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형제들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단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교회를 조직할 수 있고 성도들이 모일 수 있지요. 그렇지만 이단들은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할 수 있는 한 가지 일을 하지 못하는데 그것이 바로 중심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사랑을 예수 믿는 사람들로서 실천하면은 좋은 일이고 하나님께 상을 받는 일이라고 하는 정도로 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는 구원 그 위에 덧붙여져야 할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이죠.
그렇지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의심할 수 없는 명징한 논리로서 다가옵니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다시 말해서 형제를 사랑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영혼의 구원을 받은 증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기도의 골방에서 혼자 흘리는 눈물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진실하게 그 사람 속에 있는지를 입증하지 못합니다. 진리를 들을 때에 기뻐하는 마음도 그가 참으로 하나님을 진실하게 사랑하는 사람인지를 입증하지 못합니다. 자기의 과업에 대한 성취의 욕망을 따라 사는 헌신적이어 보이는 삶도 그가 하나님을 향한 진실한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인지를 입증하지 않습니다.
성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은 혼자 있는 공간에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공동체의 삶 속에서 그 공동체의 지평 속에서만 그의 지순한 사랑이 입증되는 것이죠. 그러니 여러분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느낀다고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이 공동체의 삶 속에서 형제들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들이 느끼는 그 사랑은 느낌일뿐 실제가 아닙니다.
이렇게 공동체의 지평 위에서만 하나님을 향한 이 지순한 사랑은 입증이 되는 것이죠.
처음 성령님께서 임하셨을 때에 교회는 공동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다락방에서 성령을 체험한 온 성도들은 재산을 팔아서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모두 함께 모여 먹고 마시고 자며 공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롭게 생겨난 형태의 공동생활이 아니라 이미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 예수님이 보여 주셨던 그 공동체 생활의 또 다른 모상이었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제일 먼저 제자들을 삼으셨습니다. 12제자를 부르신 그 목적에 대해서 복음서는 말하기를 첫째는 함께 있게 하시기 위함이며 두 번째는 나아가서 복음도 전하고 귀신도 내어쫓게 하기 위함이었다. 즉 다시 말하면 섬기게 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명백히 말합니다. 즉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신 이유는 첫째는 함께 있게 하시고 둘째는 섬기게 하시기 위해서 그들을 부르셨다고 하는 것이죠.
그리고 이러한 공동생활은 이제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다시 재현이 되었으니 이는 교회로 하여금 예수하시던 그 일을 계승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러한 모본을 따라서 초대 교회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을 차리고 집과 그리고 농토와 모든 것을 팔아서 수도원에 바치고 공동생활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그것을 우리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 생활이 시대를 초월해서 모든 그리스도의 신자들이 따라야 할 삶의 양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두 가지 사실에 의해서 입증되는데 하나님께서 제일 처음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가르치셨을 때 이 창조 명령을 통해서 이제 인류는 한 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땅끝까지 퍼지는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만약에 함께 모여서 사는 공동생활로만 이루어진다면 아마 이런 명령을 준행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신약에서 입증됩니다. 예수님이 마지막 승찬하시면서 주신의 명령은 바로 이러한 정신을 대변하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권세를 아버지께서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라. 그리고 그들을 가르쳐 내가 너희에게 가르친 것들을 가르치고 또 세례를 주고 그것을 지켜 행하게 하라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함께 모여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흩어지는 공동체를 염두해 두신 것이죠.
더욱이 사도행전 8장에서는 예루살렘에 모여 흩어지지 않고 공동생활만 하던 제자들을 하나님께서 큰 핍박이 일어나게 하심으로 삼지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셨으니 이 함께 모여서 사는 공동생활이 영원한 하나님의 교회의 형태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한 것이죠.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이 한 섬기고 한 예수 그리스도와 한 성령 안에서 교회를 이루고 있지만 우리들이 물리적으로 한 공간에 모여서 공동생활하지 않고 흩어져서 가정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고 하는 이것이 공동생활의 정신을 조금 더 깨뜨리거나 이탈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죠.
지금도 일정한 목적을 위해서 그런 수도원을 설립하고 일정한 기간 동안 일정한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사람들을 모여서 공동생활하게 할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보편적이고 영원한 형태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처럼 신앙생활하는 것이 성경적으로 볼 때 보편적인 신앙생활의 형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초대 교회에서 이루었던 그런 종류의 공동 생활을 우리들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될 것은 공동생활의 양태는 시대가 따라 시대에 따라 변한다고 할지라도 그 공동생활을 주장했던 정신은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들 가운데 유지되어야지만 그것이 참된 교회가 그것으로 우리는 참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정신은 바로 다름이 아니라이 성도들이 흩어져서 살다가 다시 모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일시적으로 모이는 모임이 아니라 흩어져 살아도 함께 살아가는 공동생활의 정신으로 영위 되어야 할 신자의 삶입니다.
이 이 공동생활에 있어서 주는 주 예수 그리스도는이 공동생활의 핵심이며 그분의 정신과 그분의 사랑은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이 공동생활의 핵심은 여러분 마음 각자 각자 그 안에 주님이 참으로 주님이 되시는 것이며 여러분들의 모든 심령 안에 그 예수의 정신과 그리고 그분의 죽음으로 나타내 보여준 사랑의 정신이 여러분들을 지배하게 될 때에 여러분들은 공동생활의 정신에 충실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죠.
오늘날은 정말 하나님 앞에 복받기가 어려운 태도로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교회를 마치 자신의 신앙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하는 그러한 단체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들에게는 교회가 자신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이용 가치가 있는 것이고 이용 가치가 사라지거나 혹은 유익은 얻을 수 있어도 치뤄야 할 희생이 너무나 크면 헌신짝같이 버리고 고난이 적은 교회를 찾아나는 것 나서는 것이 오늘날의 신자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등록도 하지 않은 채 철새처럼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다니면서 예배에 말하자면은 어 설교를 맛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를 정하기 위해서 일시적으로야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하지만 상당히 긴 기간 동안 이런 생활들이 이어진다고 하는 것은 그의 심각한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며 주님의 교회를 욕보이는 것입니다.
교회는 결코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에 유익을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유익을 주는 단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한 지붕 아래 살아갈 때만 가족이 아니라 엄마 아빠와 떨어져서 다른 도시에 가서 살 때도 여러분들이 가족인 것처럼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모여 있을 때만 교회인 것이 아니라 각자 흩어져 돌아가서 가정으로 귀가 한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불신 가족들과 맺어진 그 끈보다는 그리스도의 피로 한 몸이 된 지체들간에 맺어진 이 영적인 끈이 더욱 영원하고 견고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흩어진 곳에서도 이미 공동 생활에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 속에 이런 공동생활의 정신이 없다면 여러분들은 정말 불후하기 짝이 없는 집시와 같은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겨울 사경회를 통해서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교리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자신에게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이유 때문에 형제들이 자기를 힘들게 한다는 이유 때문에 목회자가 자신의 성향과 틀리다는 이유 때문에 교회에 있는 한두 가지 도덕적인 결함 때문에 자기 눈에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그런 것들을 보고 교회를 뛰쳐나온 것이 심지어는 교회에 상처를 주고 뛰쳐나온 것이 얼마나 커다란 죄인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깨달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설교를 하고 났더니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게 너무 마음에 찔려서 다시 돌아가야 되지 않나 그러고 고민을 한대요.
그 도대체 말귀를 그렇게 못 알아들어요. 그러면 거기 가서 또 여기 뛰쳐나간 걸 또 회개할 거 아니에. 예. 그렇게 하고 일평생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살 거 아니야. 그림처럼 뻔해요. 거길로 가서 그래서 거기서 언제 여기를 뛰쳐나간 것을 후회하게 되냐면 은혜롭고 평안할 때 후회하는게 아니라 힘들고 괴로울 때 후회하게 되는 거예요. 그 핑계로 다시 돌아올 거예요. 돌아온다면 안 받아 줄 수 없지만은 그게 뭐예요, 도대체? 응. 한 번으로 족하잖아요. 한 번으로 족하잖아요.
그래 그 겨울 사경에 하고 나면 항상 교인이 한 100명씩 늘었습니다. 당황하던 교인들이 쫙 와서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고 등록을 하는 거죠.
대목때죠. 그 제가 정신 똑바로 차이라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첫날 나오고 응답받았다고 자기네로 다 돌아갔어요. 열심히 전도했던 사람들이 굉장히 우울해. 그래서 내가 우울해하지 말라 그랬서 찬송할지어다 그랬어. 응. 그 교회도 주님이 세우신 교회인데 응.
이미 온 여러분들의 마음에 다시 아픔을 생각나게 할지 모르지만 여러분들이 와서 열린 교회에서 은혜를 받았다 그렇고 저를 좋아한다고 그럴 때마다 제 마음 한 구석은 늘 찢어지는 것 같았어요.
이런 신자를 가슴 아프게 보낸 목회자가 또 하나 있었겠구나. 그리고 이 사람이 얼마나 많은 아픔을 교회에 끼치고 왔을까? 우리 교회가 마지막이 되어야 할 텐데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가장 훌륭한 속죄는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에요.
그러면 이 사랑이 어떻게 기독교적인 삶의 핵심이 되는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기독교적인 생활의 핵심이 바로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죠.
여기서 말하는 기독교 생활의 핵심으로서의 사랑이 무엇일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러한 사랑을 해 본 적이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예수 믿기 전에도 여러분들은 사랑을 해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원수를 사랑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저 해 본 적이 있는데요. 뭡니까? 웬수 같은 자식을 사랑했습니다. 그런 거 말고요.
사랑하니까 좋은 사람 말고 사랑하면 할수록 아픈 사람. 사랑하면 할수록 원수로 갚는 사람, 아끼면 아낄수록 내 마음에 고통을 주는 사람을 사랑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사랑은 예수 믿기 전에는 해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기 전에 여러분들이 핏담흘리며 누군가를 사랑했다고 하더라도 자기 사랑의 연장으로서 사랑한 것이지 결코 오늘 기독교적 생활의 핵심이 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가지고 사랑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죠.
기독교 생활에서의 핵심이 되는이 사랑은 예수 밖에 있을 땐 우리들이 절대로 못했던 사랑입니다. 그러면 그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요?
그 사랑의 시작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예수 믿을 이유가 없는 한 결코 예수 믿지 않습니다. 자기 혼자 살아가는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절대 하나님 의지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예수 믿는 사람이 됐다면 그것은 혼자 살 수 없어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된 거예요. 그러다가 어느 한 순간에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인생을 살 수 없다는 그 비참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겠다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자기 혼자 살았던 삶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나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분의 도움과 은혜를 구하며 나아가게 된 것이니 엄밀하게 말하면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는 것은 결국은 엄밀하게 말해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그 마음 때문에 혼자 살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이죠.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은 분명히 자기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자기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지라도 그 의지의 대상을 하나님께 두고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런 자기 사랑을 자기 사랑이라고 정죄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믿음으로 보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구원해 주시는 거죠. 그렇게 하나님께 나아갔더니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만나게 되었더니 하나님을 알게 되었는데 그 하나님은 바로 사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가페의 사랑의 하나님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과 그 사랑 안에서 지혜로 자기를 지으신 것과 그 사랑 안에서 지혜로 자기와 같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을 깨달았고 바로 그 갑ㅄ없는 놀라운 사랑을 자신에게 부어주셨다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때에 신자는 그 사랑에 깊이 감격해서 이제는 내가이 사랑을 의지하며 살겠노라고 결심하게 되며 이 사랑을 거스리며 살아온 지난 날들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회심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앞에 거듭나고 회심한 신자의 마음 안에는 아가페의 사랑과는 구별되는 또 다른 종류의 사랑이 그 속에 생기게 되는 것인데 이것은 아가페의 사랑의 감화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신자 안에 있는 까리따스의 사랑입니다. 지순한 사랑입니다.
따라서 이 까리따스의 사랑 곧 지순의 사랑은 아가페의 사랑의 감화를 받은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불신자들에게는 없는 사랑이니 이 사랑 때문에 신자는 일평생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죠.
이 사랑은 이타적인 사랑이고 자기를 포기하는 사랑이니 예수 믿기 전에 내가 사랑했던 그런 사랑과는 차원이 틀린 그런 종류의 사랑이 바로 이 사랑입니다.
신자의 일생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랑을 온전히 간직하고 그 사랑을 따라서 살아가는 애덕의 삶입니다. 신자의 일생은 바로이 애덕의 삶이에요.
애덕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을 통해서 덕을 이루는 삶이다라고 하는 것이죠.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을 따라서 살기 위해서는 내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고 또한 그 사랑 때문에 이웃을 전심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게 온전한 사랑으로 살아갈 때에 우리는 그 사랑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시고 구원해 놓으신 계획에 득이 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을 가르쳐서 애덕의 삶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고 구원하신 계획에 부합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애덕의 삶입니다. 신자의 일생은 바로이 애덕의 삶을 위해서 애덕의 삶으로 나아가는 일생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내 안에 이런 온전한 사랑을 간직하고 그 사랑을 빼앗아서 가려고 하는 이 세상과 자기의 육신 그리고 유혹으로부터 자기의 사랑을 지키면서 이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지체들을 섬기면서 살아가는 그 삶이 바로 구원받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애덕의 삶입니다.
이러한 애덕의 사랑의 삶 속에서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고 하나님은 가장 영광을 받으시며 그의 영혼은 가장 아름다운 상태를 유지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이 일정한 일생이라고 하는 구간에서 보면은 고통으로 가득찬 삶처럼 보이고 희생으로 가득찬 삶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인간의 삶은 이 지상에서 끝나는 삶이 아니라 영원으로 이어지는 삶이니 지상에서 행복하고 그 대가로 영원히 불행하다면 우리는 그 행복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애덕의 삶은이 땅에 있는 동안에 그를 행복하게 할뿐 아니라 영혼을 향해서도 그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그런 종류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일생은 바로 자신 안에 하나님이 주신 이 본래의 사랑을 지키고 증진하며 그것을 행사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섬기는데 신자의 참된 삶의 도리가 있다고 말씀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들이 온 애의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이제 이러 종류의 사랑은이 시간 안에서만 묶길 사랑이 아니라 영원히 남을 사랑입니다.
시간이 지나도 영원히 남을 사랑인데 이렇게 영원히 계속될 사랑이 제일 먼저 실현되는 곳이 바로 이 교회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린 여기에서 교회의 공동 생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얻는 그 순간 내가 어디서 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었든지 그 구원받는 그 순간에 나의 영혼은 그리스도 예수를 머리로 하는 다른 지체들이 이미 이루어 놓은 교회의 몸에 한 살절음으로 덧붙여지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생명적으로 다른 모든 지체들과 한 유기체를 이루며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그가 만약에 자신이 홀로 예수를 믿은 줄을 홀로 예수를 믿은 줄을 알고 머리이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 자기 혼자 붙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의 영혼은 건강해질 수가 없지. 우리의 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온 몸이 골고루 건강해야 되는 것이니 팔의 건강이 다리의 건강을 돕고 머리의 건강이 심장의 건강을 도우며 또 배의 건강이 피부의 건강을 돕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여러분들이 예뻐지기 위해서 아무리 화장품을 많이 바르고 성형 수술을 해도 속이 늙으면은 그 늙은 현상들이 피부로 다 배출이 됩니다. 그래서 진짜 예뻐지기 원하는 사람들은 먼저 피부를 다스리기 전에 내장을 잘 다스려야 됩니다.
잘 먹고 잘 소화시키고 충분한 수분을 통해서 수시로 노폐물들을 몸 밖으로 배출해 낼 때 건강하고 예쁜 피부를 간직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지 않으면 독한 화장품을 계속 발라서 그렇게 변장을 해야 되니 그 피곤함을 어찌 이루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러한 원리는 우리의 영혼에도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자신만 그리스도께 붙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환상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고 반드시 영혼의 건강을 지키지를 못해요.
그래서 숙명적으로 예수 믿은 모든 사람들은 공동생활 속에서 지체들과 함께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자라고 지체들과 함께 그 지식이 성장하고 지체들과 함께 주님 안에서 온전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로 자라가게 되는 것이에요. 이게 공동생활이에요.
여러분들은 때때로 지체들에게 잘해 주고 섬길 때에는 마음에 그런 가책도 들죠. 내 가족에겐 이렇게 못 하는데 이 사람들에겐 내가 이렇게 하나? 그리고 가족들의 원망이 들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죠. 잘못된 것은 형제에게 잘해 주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형제에게 잘해 주면서 가책을 느낄 정도로 가족들에게 못 해 주는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육신의 가족은 불행한 일이지만 때로는 흩어져서 천국과 지옥으로 나뉘어져야 돼요. 이 세상에서의 인연으로 끝나는 적이 많이 있어요.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영원히 떨어질 수 없는 예수의 한 몸이 함께 주님을 믿어가고 함께 알아가고 함께 사랑해 가며 함께 천국에서 마주보며 영원히 주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뭐냐면 교회 안에서 사랑하기 힘든 지체들을 만나는 거예요. 가슴에 새기든지 필기를 하든지 맘대로 하십시오. 두 번을 반복하겠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해야만 할 사람은 노력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다시 한번 반복하겠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노력하지 않아도 사랑이 됩니다.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노력하지 아니하면 결코 영원히 끝까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으로 그냥 남아 있습니다.”
그냥 사랑하기 힘든 정도만 돼도 어떻게 좀 참아보겠는데 이것은 사랑받지 않기로 작정하고 태어난 사람처럼 행동을 해요. 이럴 경우에는 더 많은 고통과 찔림이 있는 것이죠. 그런 지체들이 지금이 회중 가운데도 여러 입을 열면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 말을 말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차라리 변이라고 말하면은 좋을 그렇게 언어의 절제가 없는 사람들도 있어요.
또 왜 그렇게 험담을해요? 칭찬을 해 줘도 다 못 할 텐데 왜 그렇게 쓸데없는 험담을 해요? 그리고 심지어는 그 험담 속에서 있지도 않은 일로 지체들의 명예를 깎아내리고 그들을 부끄럽게 해요. 심지어는 아주 노골적으로 그에게 악을 행해서 죄를 지어요. 그런 일을 하는 지체들이 교회에 있습니다.
아무리 성숙한 성도들이 모인 교회라도 그런 지체들은 꼭 있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분명히 악입니다. 그렇죠? 악입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십시오. 그런 지체들은 악이지만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거는 선입니다. 지금은 모두 없어졌습니다.
이미 벌써 한 15년 전에 WHO에서 지구상에서 천연두가 사라졌다고 선언을 하고 이제는 누구도 천연도 예방 주사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어렸을 때는 어린아이에게 맞춰야 되는 가장 위험하고 힘든 예방 주사가 그 천연두 예방 주사였습니다. 지금도 BCG 접종 같은 거 잘못하면 쇼크로 죽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이 천년도 예방 주사는 그거보다 훨씬 위험한 것이었죠. 그래도 위험을 무릎 쓰고 모든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그것을 마쳤습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는 천연두를 알아서 얼굴이 곰보가 된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그 무서운 마마라고 하는 역병이 걸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아이들이 두 세 살 됐을 때는 천년도 예방주사를 마쳤습니다.
받고 나면 이 아이들이 3, 4일씩 앓고 심지어는 일주일 넘게 앓는 애들도 나오고 고혈과 그리고 많은 이 통증으로 시달립니다. 그리고 드물긴 하지만 그중에 어떤 아이들은 그 예방 주사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합니다.
그 천연두 예방 주사라는 것이 뭡니까? 그 천연두 걸린 사람들에게서 배양된 그 균을 사람 몸속에 집어넣는 거예요. 그래서 그게 주사 맞은 자리가 그 주사 맞은 자리가 있잖아요. 그거 놓아요. 그럼 온 몸으로 천연두 균이 들어가는 거죠. 그건 나쁜 거죠. 그 균이 어떻게 좋을 수 있습니까? 명백하게 나쁜 거죠. 그런데 균이 파고 들어가면 온 몸에서 백혈구 동원령을 내립니다.
그래서 온 몸의 백혈구가 이제 그이 저 천연두 균이 들어오는 그곳에 집중해서 온몸에 침투해와서 천연두를 일으키려고 하는 그 균과 맞붙어 싸웁니다. 그래서 장렬하게 전사하죠. 그 시체들이 모인게 고름이에요. 그러는 동안에 온 몸에서는이 천연두 균을 이길 수 있는 저항력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그게 일평생 그가 그 무서운 역병에 걸릴 위험 없이 일생을 살게 되는 것이에요.
그럼 여기서 우리들이 아주 중요한 교리 하나를 터득할 수 있는 거예요. 어린아이의 몸에 주입된 그 천연두 균은 좋은 거예요, 나쁜 거예요? 나쁜 거죠. 좋으면 많이 맞으세요. 아, 잔뜩 집어 넣으세요. 나쁜 거죠. 그런데 그 균이 거기에 있다고 하는 사실은 이게 좋은 거라.
이것을 좀 어려운 말로 “비인칭적 선”이라고 이야기를 하는 거죠. 인칭적으로는 악이야. 왜? 그러면 안 되잖아. 그 교회에서 서로 화목하면서 살아야 되는데 왜 말을 함부로 해요? 그리고 왜 없는 일로 다른 사람의 명예를 실추시켜요? 모함하고 부주의하고 확인되지 않은 말이나 언동으로서 지체들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왜 그렇게 해요? 그리고 심지어는 왜 악을 행하고 미워요? 이 자체는 어떤 식으로도 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거죠. 이건 악한 거야. 인칭적으로 볼 때는 그 사람의 악이야.
하나님은 그것을 반드시 다룰 거예요. 그러나 그런 것이 있다고 하는 것은 선이야. 이걸 비인칭 선이라고 말해요.. 그니까 인칭적인 악은 비인칭적으로 선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조금 힘들지 모르지만 한 걸음만 더 나아갈게요.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지각이 있는 어떤 분들은 설교자인 저에게 이렇게 묻고 싶을지도 몰라요.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악 때문에 공동체에 내가 가진 악이 있어서 선이 되었다면 내가 그 악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징벌받을 일이 없고 오히려 칭찬을 받아야 되겠네요.”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논리가 틀린 거예요.
그것은 이제 의도가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그가 그렇게 악을 행하는 것에 대해선 하나님이 옳게 판단을 안 하시고 악하다고 악한 것은 악하다고 판단하셔서 하나님께서 그를 적절하게 다루실 거예요. 책망하시고 징계하시고 다루실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의 악을 선하게 사용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의 악이 선이 될 수 있는지를 제가 이제 증명해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내 주위에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있어요. 나를 존경하는 사람들만 있어요. 나도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도 날 사랑해. 너무나 많이 사랑하니 그들에게 내가 물질을 아낄 이유도 없고 내 재능도 그들을 위해서 사용하지 않을 리가 없죠. 심지어는 내 마음의 살부치같이 내가 그들을 사랑하니 혹시 그들이 장기라도 필요하다면 줄 수 있을만큼 내가 사랑하죠.
일생을 이런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마 자신이 이 세상에서 성화의 끝까지 간 사람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나 있는 건 있는 거고 없는 건 없는 것이니 언젠가는 자기 자신이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교회 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면은 교회 바깥에서 드러내 보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드러나게 되면 사랑으로 묻어 주는 사람이 있지만 교회 바깥에서 사랑 없음이 드러나면 모든 사람들이 까발릴 것이니 그때는 주님께 큰 불명예를 끼쳐드리고 자신도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교회 안에서 다 나를 좋다 그러고 나를 사랑하는데 한 인간이 나를 싫다 그러는 거예요. 그런데 그 인간이 다른 사람들도 그 인간이 다 싫다 그래요.
말도 함부로 하고 모욕적이고 교향이 없고 야비하고 진짜 교회 밖 세상에 가서도 인간 대전 못 받을 것 같이 그렇게 교양 없이 행동을 해요.
사랑하려고 하는데 사랑하고 쉽지가 않아요. 그거를 극복하고 사랑을 하려고 애쓰면 애수록 가시로 뭉쳐진 덩어리를 끌어앉는 것처럼 피가 나고 아파요.
그때 우리는 사랑하고 싶지 않게 되는 것이죠. 그때 바로 그 지점에서 ‘내 사랑이 여기까지구나.’ 그거를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걸 깨닫게 되는 거. 혼자 깨닫게 되는게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깨닫게 되는 거. ‘아. 이 사람보다 조금 나은 사람까지 내가 사랑할 수 있었구나.’
내 사랑의 한계는 여기였구나. 그걸 깨닫게 되는 거죠. 그거를 깨닫고 그 사람이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걸 깨달았을 때 아마 이렇게 반응할까? “그래, 나 사랑 없다. 어쩔래? 예. 어, 어쩔 거야? 그 너는 나보다 낫냐? 어. 아이고, 잘 났다. 어. 어. 냅도 생긴 대로 살 거야. 어. 응. 내가 싫으면 네가 떠나. 네가 싫으면 내가 가고.” 이러고 살다가 인생이 끝날 거예요.
그러나 만약에 착한 성도라면 자기는 정말 이제 끝까지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고 생각했는데 자기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노력을 해도 잘 사랑되지 않는 사람, 사랑을 해도 그 사랑의 메아리를 돌려보낼 줄 모르는 사람을 만나게 될 때 그는 자기가 정말 자기의 사랑이 여기까지라고 라고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될 거예요.
그리고 그는 자기의 사랑 없음을 하나님 앞에 고백하게 될 거예요. 사랑을 해야 한다는 명제와 사랑할 수 없다는 현실 사이에서 무엇으로도 그것을 극복할 수 없는 사랑의 힘의 한계를 느끼게 될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게 될 겁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없는 곳에는 빈 공간이 아니라 무관심이나 혹은 미움이 자리하기 때문이죠.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미워하게 되고 그것도 하지 않을 경우에는 무관심하게 되는 것이니 이것이 곧 형제에 대한 미움입니다. 그것을 그 형제로부터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사랑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거죠.
우리 죄악과 강팍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리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러면서 깊이 회개하게 됩니다. 그때에 많은 아픔이 따르게 되는 거죠. 피흘리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신 사랑은 물빛이 아니라 핏빛 사랑이었죠.
자기의 아들의 고결한 피로 흠뻑젖은 나무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하셨습니다. 확증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그 그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해를 스럽 나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를 힘들어하고 정말 사랑할 가치가 그 사람은 없다고 이야기하는 사람까지도 주의해서 많아. 근데 그들은 모두 틀렸어요.
해서 사랑해야 하는 이런 종류의 사랑은 까리따스의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고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사랑이에요. 잘 보세요.
사랑이라는 그 자체가 어떤 대상을 목표로 정하고 그것을 끊임없이 그것에 고착하고 그것을 즐거워하려고 하는 마음과 정신의 경향이에요.
그런데 그가 싫어요. 힘이 들어요. 사랑하려고 할수록 고통이 되는데 어떻게 그것을 사랑하느냐 이거죠. 그러니까 그 사랑은 예수 밖에 있는 그런 사랑을 가지고는 안 된다. 안 된다 얘기예요. 응. 안 된다. 얘기.
오늘 우리도 은혜를 받아요. 뭘 은혜 은혜를 받나요? 성경을 탐구해서 지식을 얻고 싶어요. 뭘 위해서 그것을 하는 것이죠?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헌신해요. 무엇을 하는 겁니까? 결국은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이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혜의 하는 역할이 바로 이런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은혜의 역할이에요. 그래서 그렇게 자기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는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지 못해요.
사랑하는 남녀가 연애할 때 주의 은혜 아니면은 연애 못 한다고 생각 안 한다 이 얘기예요. 예. 오히려 어떤 땐 주님이 좀 잠깐 자리를 비워 주셨으면 좋을 때도 있지. 예.
근데 사랑할 수 없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 그러나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할 때에는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볼 수밖에 없는 거예요.
내게는 그런 사랑이 없기 때문이죠. 내게는 그런 사랑이 없기 때문에. 그때 우리는 십자가를 봐요. 거기서 우리 주님을 만나요.
그 주님이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그 사랑과 우리를 위해 베풀어 주신 철저한 자기 죽임의 사랑 속에서 우리들이 그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예수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또한 죽어야 된다라고 하는 사실을 거기서 깨닫게 되죠.
예배 위원들 좀 문 좀 열어 놓으세요. 더운데 더 얻어하시는 거 같은데 좀 열어 놓으세요.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자기 죽음의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해 가는 거죠.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사랑할 수 없는 지체들을 만나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물이에요. 그가 있는 것이 우리에게는 고통이죠. 고통.
우리는 모두 지푸라기처럼 연약하고 강철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영원한 살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찌르면 아프고 헐뜯으면 상처납니다. 지체들의 헛된 말로 내가 모함을 받을 때 지체들의 경솔한 언동으로 사실이 아니기에 내 명예가 실추될 때 그리고 지체들이 직접적으로 내게 악을 향하여 내 마음을 고통 주고 내 주변에 있는 사물의 질서를 어지럽힐 때 우리는 말할 수 없이 고통을 받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십중 팔고 그러한 원인을 제공한 그 지체를 미워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게 되는 일은 자연적으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 바로 거기까지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기도에 골방해서 그렇게 많이 이 세상에 있는 핍절한 영혼들을 끌어안고 올 때 내가 모든 걸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랑이 내 안에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이 지체를 사랑하지 못하고 이 턱에 걸려서 넘어지는 자신을 보면서 자기가 느낀 사랑과 자기 안에 실제로 있는 사랑 사이에 현격한 격차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거죠.
그때 어떡합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내게는 이런 사랑이 없습니다. 이런 사랑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사랑을 베풀 만한 힘, 선한 것이 내게 없습니다. 미움이 쓴물처럼 내 마음에서 솟아나고 그를 향한 적개심이 내 마음에 불답니다.” 이때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보게 되는 거죠.
그래서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다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 십자가에서 자기를 철저하게 죽이시고 마지막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 생명을 끊어 버리심으로 완수하신 그 사랑 앞에 우리들이 사랑을 하기 위해서 했었지만 죽기까지 애쓴 것은 아니라고 라고 하는 사실을 더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앞에 깊이 엎드러지게 되죠. 그러니 내가 사랑할 수 없는 그 형제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선물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사랑과 정의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죄와 악에 대해서 정의를 앞세우면서 사랑을 실천하기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죠.
물론 그가 공동체의 악을 행하고 지체들을 아프게 하는 그 범죄에 대해서 우리들은 판단할 의무가 있습니다. 저렇게 하는 것은 나쁜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는 것이다. 이렇게 판단할 책임이 교회에 있고 또 우리에게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판단하고이 문제를 풀어가는지에 대해서는 후에 말씀을 따로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을 통해서 옳고 그런 것을 판별하는 일이 필요하죠. 그러나 그 판단을 통해 그가 그르다고 판결이 났을 때 그것이 그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가 돼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기에서 철저하게 그 죄에 대한 판단과 미움이 사람에 대한 미움으로 전이 되지 않도록 죄와 죄인을 구별하여 대할 수 있는 성숙한 사랑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거죠.
그것이 필요한 것이에요. 근데 대부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악을 행하거나 결함이 있을 때 정의에 어긋났다라고 판단을 함으로써 그를 사랑하지 않는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이 상당히 신앙에 열심 있는 사람들도 빠지는 함정이에요.
그렇게 말한다면 여러분 가운데 그런 정의의 잣대를 갖다 댈 때에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누가 있는지 내가 묻고 싶습니다.
오늘은 저 지체가 잘못했기 때문에 정의의 판단에 저 형제가 미달되지만 내일은 그 형제의 판단에 여러분들이 미달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런 식으로 매일매일 사람을 정죄하고 정의를 세운다는 미명하에 그 죄인을 죄와 함께 미워하고 사랑하기를 포기한다면 여러분 모두 오늘은 정죄하고 내일을 정죄를 받아 내일은 자신이 정죄를 받아서 세월이 흐르러나면 모두 상처뿐인 죄인들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한 사람도 사랑할 자격은 아무도 없는 교회가 되고 말겠죠.
이것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거기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뭐냐면 용서와 사랑이에요. 그의 죄는 아주 미워하지만 그의 죄와 결탁되었던 그 사람은 용서해 주는 것이죠.
그가 비록 진실한 참회가 아직 없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그를 그 죄와 한 덩어리가 된 사람이라고 보지 않고 그도 그 죄의 피해를 입은 우리의 한 형제라고 생각하며 백혈구 총동원령을 내려야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죄와 맞붙어 싸워 줘야 됩니다.
어거스틴은 이 문제에 대해서 영원토록 인류의 가슴속에 잊혀지지 않을 감동적인 말을 남겼습니다.
“먼저 한 사람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그다음에는 마음대로 대하십시오.” 그랬습니다.
사실은 그 말이 얼마나 위험한 말입니까? 근데 그의 그 말은 대단히 깊은 신학적인 통찰이 있는 발언입니다. 먼저 한 사람을 한 사람이 마음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아니고 안 된다 얘기예요.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 사람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한다면 그가 마음대로 하게끔 내버려둬도 하나님의 법을 따를 수밖에 없다는 거죠. 그래서 그는 유명한 격원을 남겼습니다.
“사랑이 정의를 완성하느니라. 사랑이 정의를 완성하느니라. 사랑이 정의를 완성하느라” 예수님에게도 이런 사상이 보입니다.
언젠가 성경을 아주 예수 믿고 얼마 안 됐을 때 성경을 읽다 보니까이 기가 막히게 매력적인 성경 구절 하나가 나타났어요.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야,이 기가 막히구나.이 약속은 꼭 이루어진다 그러는데 뭘 구해도 해 주시겠구나.
정신이 혹했는데. 그 그 앞에 말이 굉장히 어려워요. 너희가 내 안에 있고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예수님 자신있게 말씀하셨어요. 왜 예수님 이렇게 자신있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해서 사랑으로 예수님과 한 덩어리가 돼요.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에 있어서 우리의 마음과 영혼 전체가 그 말씀에 부복해. 그리고 그 말씀대로 살고 싶어 해. 그때 예수님이 마음대로 뭐든지 구해라고 할 때 예수님이 들어 줄 수 없는 거를 구할 이유는 없다 얘기예요. 응. 없다 얘기.
여보 남자가 물어. 여보 당신 나 사랑해? 그럼 여보 당신 사랑하지 정말 사랑해. 그럼요. 사랑하죠. 당신 이외에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누가 있겠어요? 그래. 나도 당신처럼 사랑하는 사람 없어. 내가 있지 뭐든지 당신 주고 싶거든. 한번 당신 마음대로 제한 없이 한번 나한테 말해 봐. 그때 아내가 여보 재산 남기고 죽어 줘.
그 그렇게 소원을 얘기하겠네. 이게 하는데 주님 사랑합니다. 뭐 한번 뭐야? 구해 봐. 그 영광 저 좀 주시면 안 돼요. 그 그렇게 기도 안 한다. 그 예수님이 아시니까 자신있게 뭐든지 구해라. 그럼 내가 다 준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다른 걸 구할 수 없어요. 그 그걸 알고 어거스틴이 그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 거예요. 먼저 그 사람을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십시오. 그다음에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나님의 법을 이루게 됩니다. 그 뜻이죠. 그 뜻이죠. 그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랑으로 정의를 완성하는 그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공의를 어떻게 완성하셨습니까?
하나님의 공의를 칼로 완성하려는 베드로에게 주님이 무엇이라고 꾸짖으셨습니까? 검을 네 집에 꽂으라. 칼로 일어선 자는 칼로 망하느니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 저절한 하나님의 공의를 십자가에서 자기를 죽이는 희생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사랑이 정의를 완성한 것이죠. 응한 것이죠. 그러나 그 일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해 본 사람은 압니다.
지나고 난 다음에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 순간들이 너무나 감사하고 아름다운 순간들이었지만 사랑한 그 순간에는 가시떨기를 끌어앉는 그러한 깊은 아픔입니다.
견디기 힘든 고통이죠. 나는 사랑하는데 그는 나를 미워하고 나는 그를 섬기는데 그는 나를 부립니다. 나는 그를 위해 죽는데 그는 나를 밟고 일어섭니다. 나는 사랑으로 외치는데 저는 미움으로 매하려 합니다. 나는 저를 높이는데 저는 나를 헐뜯고 심지어는 나를 중상하기도 합니다. 나를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저 사람이 모으기까지 합니다.
그때 그 고통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람이 만약에 내가 사랑하지 않던 사람이면 사랑하지 않던 사람이기 때문에 가슴이 아프고 내가 개인적으로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면 그 사랑했기 때문에 느낄게 될 수밖에 없는 배신의 감정 때문에 더 많이 아프게 되겠죠.
그런 깊은 고통 속에서 우리는 다듬어지는 거예요. 다듬어지는 거예요. 사랑 없는 사람이 사랑이 있는 사람으로 다듬어지고 형제를 향해 잔인하던 사람이 온유한 사람으로 다듬어지고 그리고 그 고단한 생활의 환경 속에서도 결코 부서지 않았던 자아의 부서짐을 그 고통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거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 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 없는 자기를 부여앉고 홀로 울던 그 수많은 가슴 아픈 날들.
죽지 않는 자기 때문에 아파하며 하나님 앞에 눈물 흘린 자매의 시간들 예전에는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때문에 울었지만 이제는 그를 사랑할 수 없는 자신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이 겪은 그 내적인 수많은 고통과 영혼의 아픔들.
사람들은 아무도 그것을 기억해 주지 않지만 우리 주님은 당신의 생명책에 그 모든 것을 기록하십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믿음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깊이 지체들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멘.
일평생을 사는 날 동안 그대들의 입에서 누구를 향한 원망이나 미움도 없도록 입에 파수꾼을 세우십시오.
마음에 누군가의 죄와 악이 발견되거든 그 악 속에 빠질 수 없었던 그 사람은 사랑하고 그 죄는 경계하고 미워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우리가 이런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무엇을 극복해야 할까요?
우리는 크게 세 가지를 극복해야만 합니다.
우선 첫째는 자기 본 위의 교만입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물에 대한 모든 질서에 대한 판단이 사물들의 질서에 대한 자신의 판단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고 그것을 고집하는 교만 이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마음속에 어떤 한 지체가 자기가 사랑할 수 없는 행동을 하거나 아픔을 주는 행위를 했을 때 마음속에 있는 자기가 아는 사람의 이름의 명단에서 지워 버리는 사람들이 있죠.
이것을 바로 오늘 성경이 살인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에요. 마음에서 그 명단을 지워 버리는 것. 그것이 살인이에요.
왜 살인지를 이 시간에 논증하기에는 설교 시간이 너무 길어질 것 같아서 논증하진 않겠습니다마는 하나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명단을 지우는 그것. 난 이제이 사람과는 관계 없다. 상종하지 않겠다. 그러고 지우는 그것은 그 사람이 존재하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죠.
그것이 정신적인 살인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가장 무서운 죄이고 이러한 죄가 바로 이단의 특징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대들이 참된 기독교 신앙을 배우고 진리를 배웠으니 그 이단의 행위를 본받을 수는 없는 것이죠.
그러니 그를 깊이 용서하고 그리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면 다시 그것이 메아리가 되어서 자기에게 돌아와 오늘은 자신이 올바른 위치에서 그릇 행한 형제를 용서하고 사랑하지만 내일은 여러분들이 그릇된 위치에서 지체들의 용서와 사랑을 받게 됨으로써 모든 연약한 지체들이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것이에요.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것이에요. 이런 자기 본위의 교만은 진실한 참여를 통해 얻어집니다.
그래서 나 중심적인 것을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어떠한 지체들을 만나도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라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구도 인간이니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두 번째는 성찰이 없는 생활입니다. 성찰이 없는 삶은 생활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가 언덕을 향해 내려가는 것과 같죠.
충동대로 행동하고 마음에 원하기 때문에 이행하며 싫기 때문에 저항하고 거부하고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싫어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하기를 거절하며 살아가는 이런 삶이 거침없이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은 성찰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하루를 살고는 하루의 삶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의 잣대를 갖다 대고 올바르게 살았는지를 재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눈짐작으로만 살아서는 결코 그런 온전한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이죠.
제가 요즘 시력이 계속 나빠져서 안경을 쓰고도 신호등이 잘 안 보입니다. 어떤 때는 좌회전 신호가 안 떨어져서 계속 기다리고 있는데 뒤에서 빵빵 되고 막 욕을 해요. 그 지금 다 이렇게 아무리 봐도 좌회전 신호가 안 보이는데 가까이 가서 보니까 자회전 신호하고 직진 신호 두 개가 겹쳐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요즘은 할 수 없이 주위의 눈치를 보면서 다른 사람이 가면 따라가고 그러다가 다른 사람 따라서 신호 위반하는 적도 가끔 나와. 불행한 일이죠. 그래서 옆에 동승자가 있으면 이 좌회전이 떨어졌습니까? 이렇게 물어볼 정도가 됐습니다. 그러니 사물을 올바르게 본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올바른 성찰이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있어야 해요. 저의 최근 한 몇 달 동안의 경험에 의하면은 정말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는 사색하는 시간이 기도 시간과 거의 비례해야 된다고 생각을 하게 됐어요. 사색하는 시간이에요.
마지막 세 번째, 이기적인 자기 사랑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것은 희생을 통해서 극복될 수 있는 것이죠.
나의 영원한 동지는 언제나 나 자신이에요. 나는 언제나 내 편이에요. 그리고 나는 언제나 이기적으로 살려고 해요. 참다운 사랑이라는 것은 성 위에서 도포를 입은 임금이 그 밑에 있는 수많은 굶주인 백성들에게 빵이나 돈을 던져 주는 것 같은 그런 베풂이 아니에요.
예수님 친히 그러셨던 것처럼 높은 하늘 보좌에서 낮은 이 땅을 내려와 자기보다도 더 추루한 영혼을 가진 지체들이지만 그 발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발을 씻기면서 그에게 올리는 그 섬김이 바로 사랑이에요. 그런 중의 사랑.이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이 사랑을 갈망해요.
그중에 어떤 사람은 이런 종류의 까리따스의 사랑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채 이 세상을 등져요. 여러분들은 제일 먼저 그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 사랑을 받은 후에 제일 먼저 접붙여진 사람들이 여러분들 옆에 있는 지체들이에요. 그들을 깊이 사랑해요.
여러분 각자는 그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소모품이라고 생각을 해야 돼요. 그래서 나를 깨뜨려 지체들을 유익하게 하고 나를 죽여 형제들을 살리고 내가 수치를 당함으로 성도들을 존귀하게 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가야 돼요.
그런데 사실은 진짜 행복한 사람은 그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랑을 베푸는 사람들에게 있으니 이는 주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심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의 그 거룩한 희생의 모본을 본받아서 서로의 허물을 덮어 주고 깊이 사랑하십시오.
마음에 등진 형제들, 언젠가 그 지차의 가슴에 상처를 준 적이 있다면 먼저 찾아가는 용기를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에게 참회의 마음으로 손을 내미십시오. 내가 그대를 미워했었노라고. 내가 그대의 이름을 내 마음의 사랑의 수첩에서 지웠었노라고 고백을 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해 보십시오. 맡혔던 기도의 문은 열리고 축복의 강물이 다시 흐르게 될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영원히 남을 사랑인데이 영원히 남을 사랑이 제일 먼저이 교회 속에서 실현되게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을 함께 성도로서 공동생활하게 하신 것이니 여러분들은 지체들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며 자기를 부숴 그들을 유익하게 하는 희생의 삶을 살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이 시간 우리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우리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 속에서 정말 서로를 섬기고 사랑하며 성도의 공동생활을 이루어 가도록 도와달라고 우리 같이 한번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주님께서 사랑해 주시고 오늘이 시간에도 하나님 앞에 간고하고 기도하게 해 주시니 감사드리옵나이다. 사랑이 많으신 아버지여 오늘 이 시간에 더 간구하고 기도하오니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자비하신 하나님 오늘 이 시간에도 역사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오늘 사랑하는 모든 지체들이 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섬기게 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이여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며 불쌍히 여길 수 없는 지체들을 불쌍히 여기며 우리 자신을 저희들을 위해 내어주며 낮은 자리로 내려가 섬기고 또 섬겼습니다. 우리는 소멸되고 저희들은 주님 앞에 세워지게 해주시옵소서.
우리는 부끄럽고 저희들은 존귀 여김을 받게 하시며 그래서 어려운 것은 우리가 짊어지고 저희들이 희생하게 해주시고 자비하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시간에도 도와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기를 간절히 구합니다. 그래서 온전한 사랑으로 애덕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고 주님이 우리에게 나할 수 없이 귀하고 소중한 저희들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붙잡아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옵나이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붙잡아 주시기를 간절히 빌고 원하오니이 모든 말씀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큰 사랑과 우리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사랑하는 지체들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히 함께 있어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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