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공동생활_복음의 증거, 사랑

성도의 공동생활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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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및 주제 분석]

1. 서론: 새 계명의 선포와 그 배경 (0-10분)

: 요한복음 13장 34~35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을 앞두신 생애 마지막 지점에서 제자들에게 주신 '새 계명'입니다. 이는 사실상의 유언과도 같으며,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가 지켜야 할 핵심 원리입니다.예수님의 마지막 유언
: 옛 계명과 새 계명의 차이
: 인간의 자기 사랑과 정욕을 억제하기 위한 도구이자 장차 나타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었습니다.옛 계명(율법)
: 이미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직접 경험한 사람들에게 주신 계명입니다.새 계명
: 기독교는 타인이 내게 해야 할 의무보다, 에 집중하는 종교입니다. 공동체의 갈등은 대개 자신의 임무보다 타인의 임무를 먼저 생각할 때 발생합니다.사랑의 방향성내가 하나님 때문에 형제에게 행해야 할 신령한 본분

2. 복음의 시각적 증거로서의 공동체 (10-25분)

: 복음 전파에 있어 말(언어)은 사상을 전달하는 가장 확실한 힘이지만,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복음의 증거가 필요합니다.말의 가치와 영상의 시대
: 자막과 영상의 비유
**말(복음 선포)**은 영화의 '자막'과 같고, **성도의 공동생활(사랑)**은 '영상'과 같습니다.
자막은 또렷한데 영상이 없거나(삶이 없는 복음), 자막과 영상이 일치하지 않으면(사랑 없는 교회의 모습)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은 코미디처럼 보이게 됩니다.
: 성도가 서로 사랑할 때, 사람들은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됩니다.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삶

3. 공동체의 '혼(Soul)': 예수의 정신 (25-40분)

: 교회의 모든 구성원(목회자와 교인)은 각자 다른 계기로 주님을 만났지만, 궁극적으로 예수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분의 정신을 자신의 '혼'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공동체의 일치를 만드는 동력
: 군복만 입었다고 군인이 아니듯, 공동체 안에 '예수 정신'이라는 혼이 흐를 때만 비로소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나타낼 수 있습니다.군인 정신의 비유
: 신앙의 성적표, 공동생활
많은 이들이 헌금, 봉사, 직분으로 자신의 신앙 점수를 매기지만, .진짜 성화의 성적표는 공동생활 속에서 나타납니다
부족한 지체를 용납하고 화목을 이루는 과정 자체가 구원의 목표이며, 교회를 수단으로 생각하며 떠도는 것은 주님 앞에 무지한 행동입니다.

4. 참된 사랑의 세 가지 특성과 실천 (40-55분)

: 성도의 교제는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훌륭한 목표입니다. 인간적인 감정으로 사랑할 수 없을 때에도,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동기가 되어 그분이 사랑하시는 지체를 다시 사랑하게 되는 것이 기독교적 사랑입니다.좋아하는 것 (Affection)
: 말과 혀로만 하는 사랑은 침만 튀기면 되지만, 행함과 진실함의 사랑은 '피'가 흘러야 합니다. 자기 사랑과 못된 자아를 십자가에 못 박는 희생이 있을 때 참된 사랑이 완성됩니다.희생하는 것 (Sacrifice)
: 거창한 순교만이 헌신이 아닙니다. 일상의 작은 부분에서 나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지체의 편의를 도모하며, 나의 명예보다 지체의 명예를 보존해 주는 '종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헌신입니다.헌신하는 것 (Devotion)

5. 결론: 영원히 남는 것은 오직 사랑 (55-60분)

: 도덕적 선의 vs 까리따스(지순한 사랑)
는 자기중심적이며 가변적이라 상처를 받으면 멈춥니다.자연적인 선의
는 교회의 부족함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며, 마치 백혈구가 상처 부위로 달려가 죽음으로 몸을 지키듯 스스로를 희생하여 공동체를 치유하는 불변하고 영원한 사랑입니다.까리따스
: 세상의 욕망, 재산, 분노, 시기, 심지어 믿음과 소망도 그것이 성취되는 날에는 그 소용을 다하지만, .모든 것은 지나간다사랑은 영원히 떨어지지 않습니다
: 지체로부터 받은 상처를 '복수할 기회'가 아닌 '채워야 할 소명'으로 여기십시오.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할 때, 미워할 사람은 사라지고 오직 사랑해야 할 사람들만 남게 됩니다.마지막 권면
이 내용은 제공된 영상의 녹취록을 바탕으로 구성되었으며,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단순한 윤리적 권고를 넘어 복음을 증거하는 가장 강력한 수단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소그룹 성경 공부 활동지]

주제: 서로 사랑하라 — 복음의 시각적 증거가 되는 공동체

성경 본문: 요한복음 13:34~35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1. 마음 열기 (Introduction)

최근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있다'고 느꼈던 구체적인 순간이 있다면 나누어 보세요.

2. 말씀의 깊이 속으로 (Deep Dive)

Q1.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왜 '새 계명'이라고 부르셨을까요? 옛 계명(율법)과 새 계명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입니까?
: 옛 계명은 인간의 정욕을 억제하고 장차 올 사랑을 바라보게 했지만, 새 계명은 이미 이 땅에 오셔서 사랑을 보여주신 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답변 가이드예수 그리스도를 경험한 사람들
Q2. 소스에서는 복음을 전할 때 '말(언어)'과 '성도의 공동생활(사랑)'을 영화의 '자막'과 '영상'에 비유합니다. 이 비유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 말로 선포되는 복음이 정확한 '자막'이라면, 성도가 서로 사랑하는 삶은 그 내용을 보여주는 '영상'입니다. 자막은 또렷한데 영상이 없거나 내용이 다르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은 코미디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답변 가이드
Q3. 공동체가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해 필요한 '공동체의 혼'은 무엇입니까? 성도의 신앙 성적표는 어디에서 가장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나요?
: 공동체의 혼은 바로 **'예수의 정신'**입니다. 우리의 신앙 성적표는 헌금이나 봉사보다, 공동생활 속에서 을 통해 가장 잘 드러납니다.답변 가이드부족한 지체를 용납하고 화목을 이루는 모습

3. 삶의 적용과 실천 (Application)

Q4. 소스에서는 참된 사랑의 세 가지 특성으로 '좋아함', '희생함', '헌신함'을 꼽습니다. 이 중 나에게 가장 어려운 영역은 무엇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성도의 교제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좋아함
: 말뿐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박는 피 흘림의 과정.희생함
: 거창한 순교가 아니라 일상의 작은 불편을 감수하고 지체의 명예를 지켜주는 종의 자세.헌신함
Q5. 교회 안에서 상처를 받았을 때, '자연적 선의'를 가진 사람과 '까리따스(지순한 사랑)'를 가진 사람은 각각 어떻게 반응합니까?
: 자연적 선의는 가변적이라 상처받으면 사랑을 멈추지만, 까리따스를 가진 사람은 지체의 부족함을 으로 여깁니다. 마치 가 상처 부위로 달려가 자신을 희생하며 몸을 고치듯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던집니다.답변 가이드내가 채워야 할 소명백혈구

4. 결단 및 기도 (Closing)

: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새롭게 깨달은 '사랑'의 의미는 무엇이며, 이번 주에 내가 먼저 사랑의 '백혈구' 역할을 해야 할 대상은 누구입니까?나눔
: 합심 기도
내 힘으로 사랑할 수 없음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함으로 그 사랑의 감화가 내게 넘치게 하소서.
우리 공동체가 서로 사랑함으로 세상에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영상이 되게 하소서.
지나가는 세상의 가치(분노, 시기, 욕망)에 매이지 않고 영원히 남는 사랑의 길을 걷게 하소서.
[인도자용 팁]
: 사랑은 상대가 내게 해야 할 의무가 아니라, 임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세요.핵심 강조내가 하나님 때문에 형제에게 행해야 할 신령한 본분
: '상처받았다'는 말이 때로는 자신의 사랑이 '자연적 선의'에 머물러 있음을 입증하는 것일 수 있다는 점을 겸손하게 돌아보도록 권면해 주세요.주의 사항
(1) 02성도의 공동생활 복음의 증거, 사랑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azNFSaWlfic
Transcript:
(00:01) [음악]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복음 13장 34절 35절입니다. 신약성경 171쪽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한 번 더 읽겠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01:07)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주님, 매일 붙드시는 주님의 손길이 아니면 한시도 설 수 없는 어리석고 미약한 우리들입니다. 주님이 오늘이 시간에도 우리들을 도와주시고 붙들어 주시옵소서. 아멘. 오늘 말씀을 듣는이 시간에도 하나님이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셔서 우리 모두 이 말씀 안에서 말할 수 없는 위로와 용기를 얻게 해 주옵소서.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멘.
오늘 이 본문에는 기독교에서 (02:11) 가장 널리 알려진 예수님의 교훈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계명이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생애 초기에부터 마지막까지 광범위하게 펼쳐져서 반복됩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면밀히 살펴보면 서로 사랑하라는 이 가르침은 예수님이 당신이 우리를 위해 죽으실 때가 가까울 때에 집중적으로 가르쳐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께서 자기의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03:16) 말입니다.
오늘 나오는 이 요한복음 13장의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이 말씀도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지점에서 예수님께 가서 가르쳐 주신 교훈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유명한 대제사장의 기도는 대부분이이 땅에 남겨 두고 가는 당신의 제자들을 진리와 사랑으로 하나되게 해 달라는 기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역시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올린 기도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고는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옛 계명을 염두해 두신 것인데 옛 계명이 모세의 율법이었다면 새 계명은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04:22) 옛계명인 율법의 원리도 사랑이었으니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옛 계명인 구약과 새 계명인 신약의 예수님의 사랑의 계명은 현저한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의 계명은 인간 속에 억제할 수 없이 솟아나는 자기 사랑과 정욕, 충동을 억제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였고 그래서 그 율법은 앞으로 나타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주어진 계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새 계명은 이미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진 사랑을 (05:32) 경험하는 그 사람들에게 주신 계명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은 바로 사랑의 계명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너희는 서로 사랑을 받으라고 말씀하지 않고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을까요?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사랑의 계명의 중요한 특성입니다.
다른 사람이 내게 행하여야 할 의무에 대하여 관심을 갖는 대신 내가 하나님 때문에 형제들에게 행하여야 할 신령한 본분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갖는 종교.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 것입니다.
실제로 성도의 공동생활 안에서 (06:36) 일어나는 수많은 불평과 불만은 자신의 임무를 생각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임무를 생각하는 데서 오는 모든 부조화입니다.
분명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했으니 무엇인가 사랑이 부족하여 갈등이 있을 때 내가 이 계명을 온전히 순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를 않고 “거봐 사랑하라 그랬잖아. 넌 왜 날 사랑 안 하는 거야?” 이런 식으로 해서 사랑의 계명을 다른 사람이 사랑 없음을 정죄하는 계명으로 사용하는 것은 생명에 이르지 못할 비신앙적인 행동이요 ,공동체의 정신을 파괴하는 잘못된 행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07:40)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서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이죠.
여기에서 우리는 복음이 보이는 증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늘날은 말보다는 영상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이제 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르치는 것은 구태 의연한 방법이고 오늘날에는 보다 사람들의 시각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줄 수 있는 그런 수많은 영상물들을 복음 전파에 이용해야 된다는 주장들이 있습니다.
이 주장을 저는 일리 있는 주장이라고 (08:46)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그런 것들을 이용해서 우리들이 복음을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접하게끔 해 주는 것은 좋은 것이죠.
비근한 일례로 예수라는 영화가 아들에게 상영되어서 그래서 여러 나라에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만든 것은 좋은 예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이 말의 가치는 아주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의 가치는 영원한 것이죠.
그래서 저는 생각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어 이렇게 영상 시대에 자란 아이들이 재능과 그리고 여러 가지 많은 장점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이런 영상이 없어서 (09:52) 엄마나 아빠 혹은 학교 선생님으로부터 구연동화를 들으면서 자랐던 시대의 아이들보다 상상력이나 이런 것들은 떨어진다고 말이죠.
그래서 아이들이 말로만 들으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가운데 속에서 수많은 연상들을 해내게 되는 거죠. 그리고 사람마다 연상한 것들이 틀리게 되고 이러면서 문학적 상상력이라는 것이 키워지게 되는 거거든요.
이처럼 말이라고 하는 것은 사상을 전달하는 가장 확실한 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월이 많이 흘러도 복음을 전하는 수단으로서이 말의 가치는 감소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를 모르는 사람들은 (10:56) 그 사람들에게는 읽는 것보다는 듣는 것이 쉽고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이 더 쉽기 때문에 말로 전달되는 감명깊은 복음 전파 이외에 눈으로 볼 수 있는 그 복음에 대한 증거를 필요로 하는 것이죠.
이 증거를 바로 예수님께서는 신자가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이 공동생활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거죠. 그래서 너희가 너희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그러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나의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이죠.
비유를 하자면 타협 없이 정직하게 말로 선포된 복음은 (11:59) 영화의 자막과 같고 그리고 성도의 공동생활을 통해 보여주는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은 그 화면에 담긴 영상과 같습니다.
자막이 없고 영상만 움직여도 감동이 이해가 떨어질 것이고 자막은 또렷해도 화면이 아무 영상도 없다면 감동이 덜할 것입니다.
놀라운 감동과 정확한 지식이 함께 어우러지는 복음 전도가 되기 위해서는 타협이 없는 정직한 복음과 함께 그 복음에 담긴 정신을 따라 살아가는 사랑과 일치의 삶이 교회의 공동생활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13:02) 이렇게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와 같이 너희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가 사랑의 삶을 살게 되면 그 사랑을 통해서 사람들은 우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된다고 하는 것이죠.
이렇게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보이는 성도의 공동생활의 사랑 속에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성도의 공동생활이 예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양보할 수 없는 어떤 조건이 필요합니다.(14:05) 그것이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모인 수많은 집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인 모든 사람의 집단이 한결같이 예수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요. 어떤 공동 생활 속에서는 자막도 흐릿해서 보이지를 않고 그림도 흐릿해서 보이지를 않습니다. 어떤 공동생활 속에서는 자막은 또렷한데 그림이 자막하고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옵니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자막이 나오는데 그 자막 속에 있는 그림 속에서는 성도가 교회를 향하여 고소하고 교회가 성도를 향하여 고소하고(15:10) 성도가 성도끼리 미워하고 질투하고 그리고 모함하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끼리 연합을 이루어서 또 다른 뜻을 가진 지체들과 다투고 분쟁하고 시기하고 하는 그림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마치 드라마에 나오는 화면은 현대 시트콤인데 자막에는 전하 어디로 가시나이까 뭐 이런 식의 코미디가 된다는 거죠.
그러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지만 사람이 모인이 성도의 공동생활을 통해 보이지 않으시는 예수님이 나타내 보여질 수 있겠는가? 이것이 바로 공동체의 혼의 문제입니다. (16:14) 공동체의 혼이 예수의 혼일 때 삶을 살아가는 주체는 사람의 모임이지만 구현되고 나타나는 것은 예수의 정신이 나타나는 것 아니겠어요?
그 이것이 바로 공동체 속에 흐르는 그 공동체의 혼이 곧 예수의 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죠. 교회는 이런 점에 있어서 시작서부터 이미 이런 조건을 갖추면서 시작이 되는 것이죠.
여기에 목회자가 서서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목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여러분들이 불쌍해서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아니고 또 내가 목회하게 될 때 여러분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하는 것은 (17:18) 기대하지도 않고 목회의 소명을 받았으며 여러분보다 더 나쁜 사람들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하등에 불평할 것이 없다는 마음을 가지고 목회를 시작을 한 것이죠.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삼으시면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내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내 안에 까리따스의 사랑이 있느냐 지순의 사랑이 있느냐라고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한 목회자가 교회의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하는 그 일은 교회와 만남으로써 불쌍한 교인과 만남으로써 그런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인생에 짐을 지고 혼자 살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18:22) 그리고 예수님 안에 있는 놀라운 사랑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사랑을 크게 경험하고 나니까 이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얼마나 불쌍히 여기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내가 너희에게 줄 어린 양들을 먹여 줄 수 있겠니라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고 예수 사랑 없이 살아가는 그 인간들이 아직 누군지는 구체적으로 모르지만 너무나 불쌍한 나머지 다른 직업의 종사서는 도저히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없는 신적인 강제력(divine enforcement)를 느꼈기 때문에 그가 예수님 앞에 내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무릎을 꿇어서 목회자가 된 거죠.
(19:19) 그래서 그는 예수의 정신을 자신의 삶의 혼으로 삼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한 목회자의 설교를 통해 예배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만나고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그는 목회자를 만날 계획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날 계획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것이죠. 그래서 설교는 목회자가 했지만 돌보아 주는 것은 지체들이 했지만 그것은 모두 수단일 뿐이었고 궁극적으로 그들이 만난 대상은 목회자도 아니요 지체들이 아니요 일차적으로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내가 너를 내 피로 구원하였으니 너는이 교회의 몸의 일부가 되거라. (20:19) 그리고 목회자의 목양을 잘 받으면서 교회의 한 지체가 되어서 교회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며 많은 성도들을 온전케 하고 복음을 전해서 세상을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오게 하거라.
그렇게 말씀하셨더니 여러분들이 주여 제가 그렇게 하겠나이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 그리고 여러분들이이 교회의 한 지체가 된 것이죠. 그렇게 해서 목회자도 예수의 혼을 정신으로 가진 사람이 되었고 교인들도 그렇게 해서 예수의 정신을 혼으로 소유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각자 주님을 만난 계기와 과정은 틀리지만 그래서 성도와 성도 성도와 목회자 모두가 그 공동생활의 혼을 예수께로부터 공급받게 되었습니다.
(21:20) 모양은 다르나 흐르고 있는 그 혼이 하나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함께 사랑하면서 살면 그 성도의 공동생활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진짜 수많은 세월 동안 생사고락을 같이 한 전우들을 모아놓은 100명의 군대가 있고 오늘 장사하는 사람, 회사 다니는 사람, 서양 사람, 동양 사람 이렇게 수많은 관계도 없는 사람들을 갖다 놓고 똑같이 군복을 입혀 놨다고 하더라도 한시간만 그들과 생활해 보면은 어느 집단이 군인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군복을 입고 살아가는 모습은 똑같지만 후자의 집단에는 군인 정신이 없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이 공동체가 모양은 달라도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22:27) 보이는 사랑의 삶 속에서 나타낼 수 있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의 정신을 자신의 인생 자신의 인생에 혼으로 받은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렇게함으로써 교회는 점점 더 서로를 사랑하게 되고 그렇게 해서 예수님이 그 교회 안에 살아 계신 것 같은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거죠.
이 성경 구절을 읽으면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이 말씀 안에서는 우리들이 깊이 용기와 희망을 가질 수 있지만은 하나의 구절 앞에서는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이 새 계명을 도저히 실천할 수 없다는 절망을 느끼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그것입니다.
(23:36) 주님의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주님의 사랑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이 땅에 내려오신 생애였을뿐 아니라 자기의 것을 타인을 위해 모두 주신 생애였고 마지막에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것 생명까지 다른 사람을 위해 화목제물로 주신 생애였으니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라고 하는 이 말씀은 정말 무서운 말씀이죠. 무한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무한히. 예. 그
그 혼을 우리 각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소유하고 있을 때 그때에만이 공동체는 서로 잘 사랑할 수 있고 그런 공동체여야지만 (24:42) 보이지 않는 예수의 참된 사랑을 드러낼 수 있으며 그렇게 예수의 사랑을 드러내게 될 때에 그들이 전하는 명료하고 힘찬 복음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참뜻이 무엇인지가 이해되게 되는 것이죠. 이해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금세기 복음 전파의 가장 커다란 방해꾼은 교회입니다. 교회. 교회가 이 참된 복음을 가로막는 가장 큰 방해꾼이에요. 왜냐하면 분명한 복음이 없기도 하고 있을 때에도 삶으로 그 복음의 정신인 사랑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또 한 가지 여기에서 지적할 것은 바로 여기서 말씀하시는 서로 사랑하라고 (25:46) 하는 것이죠. 서로 사랑한다라고 하는 것은 최소한 다음 세 가지 사실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좋아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사랑함의 첫 번째 특성입니다. 좋아하는 것이죠. 좋아하는 것이죠. 성도의 교통은 그런 점에서 절대로 수단이 아닙니다. 성도의 교통은 무 성도의 교제 성도가 이렇게 함께 공동생활로 살아가는 것은 이것은 어떤 일을 하기 위한 중간 단계의 수단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예수님은 자기의 제자들을 부르실 때에 두 가지 목적으로 부르셨는데 (26:50) 하나는 당신과 함께 있게 하시고 또 하나는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는데이 두 가지는 하나가 어느 하나 위에 군림하는 목표가 아니라 대등한 목표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렇게 성도로서 공동생활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24시간 함께 물리적으로 같은 장소에 있어야지만 공동생활이 아니라 가족이 출장가도 가족인 것처럼 여러분들이 이렇게 예배가 끝나고 각자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도 여전히 여러분들은 공동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거기에 가서 이 공동체 속에서 보여 주었던 정신으로 가족들을 대하고 직장의 동료들을 대하며 살아가다가 다시 또 한 공간 안에서 이처럼 (27:55) 만나는 것이죠.
이 공동생활의 유익은 바로 우리가 흐트러지기 쉽고 혼자이기 때문에 잊어버리기 쉬운 예수의 정신 그 공동체의 혼을 이 속에 와서 느끼는 것이죠. 지금 나는 많이 미끄러져서 내 삶의 혼이 예수의 정신으로부터 이탈됐지만 여기 와서 함께 예배드리며 전심으로 예수를 사랑하고 그분을 좋아하고 그분께 자신의 삶을 합치시키고 자기를 죽여 사랑을 완성하고자 하는 공동체 전체 속에 흐르고 있는 그러한 예수의 혼을 예배를 통해 함께 모이는 교제를 통해 발견 발견하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해서 그가 이 공동생활 속에서 함께 살아가는 유익을 얻게 되는 것이니 이 자체가 하나의 훌륭한 목표이지 수단이 아니라고 하는 (29:01) 것입니다.
부모가 먼저 세상을 떠나 그 부모님을 여유고 슬픔에 잠겨 있는 가족들을 문상 갔을 때 제가 남기는 두 마디가 있습니다. 이제 아버님이나 어머님은 가셨고 이제 여러분들만이 세상에 남았는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두 가지로 요약이 된다. 첫째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대들 동기간에 이제는 엄마 아빠 없는 고아가 되었으니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우애하고 서로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지 말고 형제들과 나누고 응 그래서 그래서 동기간에 더 우애하면서 살아라. (30:05) 부모님이 다시 살아오셔서 두 가지만 부탁하라고 한다면 아마 바로 이것 너희는 하나님을 잘 믿거라. 그리고 너희들이이 땅에 사는 동안에 사랑하고 화목하거라. 이렇게 일러 주지 않겠습니까? 내가 꼭 덧붙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이 계명은 예수님의 사실상의 유언이었어요. 유언. 내가 너희를 두고 이제 가는데 내가 다시 올 때까지 너희는 이 교회에서 한 몸을 이루며 성령 안에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서 살거라. 그런 사랑은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그런 사랑을 너희들이 하면서 살아간다면 세상 사람들은 (31:08) 너희의 말을 좀 잘 못 알아들어도 너희 안에 있는 그 사랑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과 그리고 너희가 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그것을 말씀하시는 거죠.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예수 믿고 10년, 20년 혹은 5년, 1년을 성화의 신앙생활을 해 오셨는데 여러분들의 신앙의 성적표가 얼만큼쯤 됐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정말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는데 내가 예수의 모습을 얼마나 닮았을까? 예수님이 나를 구원하셨을 때에 나에게 기대하셨던 그 모습에 내가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 있을까?
이 지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합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너무 후한 점수를 주는 거죠. (32:14) 그 후한 점수를 출에 기억하는 것은 옛날에 낸 건축헌금 그리고 요즘 하고 있는 식당 봉사 또 요즘 하고 있는 구역장, 요즘 하고 있는 이런저런 구제 활동 요즘에 섬기고 있는 교회의 이런저런 직분 이런 것들을 생각을 하는 거죠.
이런 것들을 통해서는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참 어떤 사람인지 훌륭하게 정확하게 입증되지 않습니다. 그것과 함께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이 누구인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것은 이 공동생활의 지평 속에서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확인하게 되는 것이죠.
이 공동체 성도로서 함께 살아가는 이 공동생활 (33:19) 속에서 여러분들이 정말이 공동생활이 기쁘고 그리고 지체들 속에서 여러분들이 참 사랑이 있는 사람으로 드러나면 그렇게 드러나는 것만큼 여러분들의 신앙의 현주소가 그러하다고 하는 것이죠.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렇게 성도의 공동생활을 해 나가기에 매우 부적합하거나 잘못된 사람들이라고 하면 그것이 여러분들의 정확한 성화의 성적표입니다.
큰 헌금하거나 뼈빠지는 봉사 이런 것들을 통해서도 성화가 입증되지만 공동생활 속에서 여러분들이 화목과 일치를 이루면서 용납할 수 없는 지체들을 용납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이것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성화의 성적표를 받아보게 되는 것이에요.
(34:24) 여러분들이 만약에 성도들과 함께 이렇게 살아가면서 부족한 지체를 용납하고 어려움을 참으면서 교회의 일치와 화해를 이루며 나아가는이 길이 짜증나고 있는 중이라면 그대들의 신앙의 성적표도 하나님께 짜증나는 성적표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공동생활은 이 자체가 목표예요. 목표예요. 가끔 부모나 가족에 대해서 큰 원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가끔 그런 얘기하는 걸 들어요. 저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받은 거 아무것도 없습니다. 도대체 가족이 나한테 해 준게 뭐가 있습니까? 내가 그때마다 타일러요. 보시오. 가족은 무엇을 해 주기 때문에 가족이 아니야? 그냥 가족이기 때문에 가족이에요.
(35:29) 누구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어요. 그게 바로 가족이야. 그니까 가족은 그가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바로 운명과 같은 거예요. 그리고 그 자체가 선물이에요.
그 주고받는 것이 가족이 아니라 존재하는 그 자체를 운명처럼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이게 가족이에요. 그래서 가족 중에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은 제거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하는 것들 이것은 이는 스스로 자신의 몸을 해치고 파괴하는 사람이에요. 교회가 바로 그런 가족이에요. 하늘 가족이고 가족보다도 더 중요한 그리스도 자신의 몸으로 이루어져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안에서 함께 화목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 그 자체가 여러분들의 구원의 목표예요. 목표. (36:29) 목표예요.
근데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한번 보세요. 얼마나 어려운지 보세요. 정말 그 교회를 예수의 몸처럼 생각하고 그리고 그 교회에서 지체의 부족을 위해 나의 남는 것을 보태고 죽어가는 지체를 살리기 위해서 살아 있는 내가 죽고 가난한 지체를 부요케 하기 위해 부요한 내가 가난해지는 이러한 속에서 교회의 화목과 일치를이 이루는 기쁨 속에서 살아가는 지체들이 얼마나 소수인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러니까 그들은 교회를 수단으로 생각하는 거죠. 마음에 드는 교회를 계속 찾아서 떠돌아다니고 있는 동안에 그는 주님 앞에 잃어버린 양이 되었고 자신은 좋은 교회를 찾아서 (37:35) 떠돌아다니지만 주님은 당신을 떠난 그 사람을 찾아서 산 넘고 물건넣으시는 거예요.
어쩌면 그렇게 무지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 긴 세월 동안 설교를 듣고 성경을 연구한 사람들이 어쩜 그렇게 무지할 수 있을까요? 어쩜 그렇게 무지해요? 여러분들이 그렇게 공동생활하다가 어떻게 예수님 앞에 갈 가려고 생각하세요? 일생을 살아온 길이 예수의 몸인 교회에 예 칼 긋고 다닌 피묻은 칼자로 손에 들고 성경도 버리고 신앙생활 했는데 마지막 날에 어떻게 주님을 만나시려고 해요? 그 칼에 묻은 피가 예수의 피라는 거 기억하세요? (38:41) 난 두려워요.이 순간도 가슴이 매어지는 것 같아요.
얼마나 아프실까?
하나님의 마음은
인간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제물되실 때
어쩜 그렇게 무지할 수 있을까요? 그 긴 세월 동안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쩜 그렇게 무지할 수 있을까요? (39:50) 그렇게 살면 절대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마지막에 주님 못 만납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그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 어떤 분들은 이렇게 반문하고 싶을 거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저절로 좋아하게 되지만 나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은 내가 좋아할 수 없는데 그를 좋아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면 사랑이 아니겠네요. 아마 지각이 있는 사람들은 제 설교에서 이런 문제점들을 발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제 이치를 여러분들에게 이성적으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40:56) 사람을 향한 직접적인 사랑은 사랑할 수 있으면 하고 없으면 못 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릴게요. 사람을 직접 사랑하는 것은 사랑할 수 있으면 하는 거고 못하면 못하는 겁니다. 못하면 안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예수의 사랑이 동기가 되어서 사람을 사랑하는 이 사랑은 사랑할 수 있을 때에는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없을 때에도 사랑합니다.
자, 예를 들어 보죠. 어떤 사람은 내가 참 사랑하기 좋고 쉽고 그리고 집에 가면 만나고 싶고 교회에 와서 마주하면 그렇게 기쁘고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시간 가는 줄 모르는데 어떤 사람이 내 마음을 아프게요. 그러면 나도 마음이 아파요. (42:02) 그때에 만약에 사람의 사랑이라면 거기에서 끝나는 거죠. 사랑을 하려고 하는데 도저히 사랑할 수가 없어요. 이 사람이 나를 너무 아프게 해요. 사랑을 들려 주었는데 저쪽에서 화살이 날라와~ 나는 사랑했으나 저희는 나를 원수로 여겨요. 이때 더 이상 사랑을 못 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자기의 사랑이 여기까지뿐이라는 사실을 발견해요. 근데 사랑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명제처럼 주어진 거죠. 그때에 사랑해야 하는 당위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사랑해야 할 대상으로 내 앞에 있다고 하는 현실 사이에서 자기가 철저히 무능하다라고 하는 걸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 나아가죠. 그러면 주님이 은혜를 베풀어 주셔요. (43:07) 은혜를.이 은혜는 바로 인간이 마땅히 하여야 할 본분을 행할 수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감화야.
그러니까 그런 사랑을 확 받고 나니까 예수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나를 아프게 하는 사람을 주님이 얼마나 사랑하시는지가 느껴져요. 그니까 다시 그 사람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거죠. 그 이게 사랑이죠. 그냥 그 사람은 아직 좋지 않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게 하시는 예수님은 내 마음에 좋아진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랑이 사람에게로 옮겨가는 거예. 이게 사랑이죠. 좋아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항상 사랑의 가시를 남겨 두셔요. (44:08) 좋아하는 거예요.
두 번째로는 희생하는 거예요. 희생.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말과 사랑으로 말과 혀로 사랑하는 것은 침만 튀기면 되지만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기 위해서는 피가 흘러야 해요.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진정으로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예요. 왜냐하면 사랑은 값비싼 대가를 요구하는 거죠. 대가를 요구하는 거. 그래서 어려워요. 사랑을 말로 하는 것은 침만 튀면 되지만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자기 사랑을 십자가에 못 받고 (45:12)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려고 하는 이러한 나의 못된 자아를 십자가에 못박 일이 있어야 돼요.
거기서 피가 흐르는 거예요. 피가 흐르는 거예. 우리들이 바로 사랑을 희생이 필요하다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을 해야 되는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희생은 상급이 적어요. 그러나 내 사랑을 모르는 사람. 그리고 사랑해도 그 사랑에 대해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 그것은 많은 상급이 있어. 왜냐하면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 희생은 예수께 대한 희생이에요.
세 번째는 헌신함입니다. 헌신함. (46:16) 헌신하는 거죠. 우리들이 흔히 사랑의 헌신하면은 순교지에서 선교지에서 정하게 순교하는 광경,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장렬하게 전사하는 광경 같은 그런 그런 헌신적인 죽음만을 생각해요. 그러나 사실은 그것이 아니에요.
지극히 작은 것을 위해 희생하고 지극히 작은 것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 이것이 바로 참된 사랑이에요. 지체의 편리함을 위해 내가 잠시 불편을 감수하고 그리고 나는 상처를 받아서 모욕을 받았지만 그러나 지체의 명예는 보존해 주고 그리고 (47:20) 내가 조금 가난하게 하게 되어도 지체들을 부요하게 하는 것. 그것이 작은 배려와 희생. 이것이 바로 헌신이에요.
사랑은 이런 것들을 내포하는 거예요. 예. 그대들이 옆에 있는 지체를 위해 대신 죽는 순간은 꿈꾸지 않아도 괜찮으니 지금 서로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하세요.
내가 불편함으로 지체를 편의롭게 하고 내가 수고해서 지체가 좀 더 많이 누리도록 응. 지체는 나의 명예를 깎아내렸으나 나는 그의 명예를 보존하고 존귀하게 해 주는 그것이에요. 근데 그것이 결국은 공동체 속에 (48:27) 흐르고 있는 예수의 혼이에요.
그러니까 그러한 정신과 혼 속에서 교회가 사랑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성도의 공동생활에서 필요한 것은 지금은 나 중심으로 살다가 어떤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은 이 생명도 달라시면 바치겠습니다라고 뛰어나가는 그런 심파조의 순교가 아니라 그 순교의 죽음의 정신을 가지고 매일매일 종처럼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공동생활의 정신이 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죠. 정신이어야 한다는...
그래서 매일매일 자기를 죽이는 일은 순교할래, 배교할래 이런 순간을 통해서 자기가 죽는 것이 아니라 네가 좀 불편하고 (49:32) 지체에게 편하게 해 줘라. 네가 조금 더 희생하고 지체가 조금 덜 희생하게 해라. 네가 수고를 해서 지체가 그 수고의 결과를 누려도 조금 더 마음상하지 말거라. 이러한 끊임없는 작은 양보와 희생을 통해서 자기를 죽는 거예요.
근데 이게 자기 죽음에 엄청난 효과를 가져오는 엄청난 효과를 가져오는 거. 예. 왜냐면 목에 칼을 들이 되는 것이 엄청난 희생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사랑을 깎고 양보하는 과정 자체는 칼을 맞는거나 큰 칼을 맞는거나 작은 칼을 맞는거나 상처나 마찬가지예요.
나는 여태까지요 일생을 살아오면서 여러분들이 참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가난하게도 살아봤고요. (50:36) 뭐 여러분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부자로 살아본 적은 없지만은 가난하게 살아봤어요.
대학원 다닐 때는 공부를 한참하고 일어나면은 갑자기 바닥이 막 휙 도는 거야. 몇 번을 쓰러졌어요. 그때는 몰랐는데 알고 보니까 영양실조요. 그렇게 살았어요.
근데 한 번도 그런 것들을 통해서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한 적 없어요. 근데 하여튼 누군가가 나의 이 자존심을 건드릴 때 정말 며칠 밤 동안을 잠을 못 이루어요. 그리고 그렇게 괴로울 수 없어요. 정말 그래요. 정말 그래요.
직장을 다닐 때도 (51:41) 월급이 적거나 지위가 낮다는 이유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생각은 한 번도 안 했어요. 일이 많거나. 누군가 나의 자존감을 건드릴 때.데 그래서요. 목회를 하면서도 똑같더라고요. 가난에 어느 정도 이골이 나 있으니까 절대 하나님이 돈줄을 잡아당겨서는 이놈이 자기 죽음을 경험하지 못하리라는 거는 아니까 내성이 생겨서. 예. 그러니까 하나님 그렇게 안 하셔요.
그리고 안 아픈 부분으로는 훈련을 안 시키고 아픈 부분으로 훈련을 시키시는 거예요. 어떤 때는 너무 성도들과 함께 이렇게 여러분들은 참 너무 좋은 사람들이잖아요. 그죠? 진짜 하늘이 내 사람들이거든요, 여러분. 응. (52:37) 정말 그 일부러 조직해도 이런 교회 만들 수가 없어요. 여러분 정말 좋은 사람들이에요.
근데 그런데도 어떤 때 여러분들이 이렇게 대하면서 너무 마음이 아파서 이건 신령한 그런 아픔이 아니라 그냥 나 내가 아직 안 죽어서 당하는 아픔이에요. 저 사람 왜 나를 저렇게 대할까? 내가 자기들을 위해서 내가 안 한게 뭐가 있나? 정말 저렇게 내 마음을 모를까? 이러는 걸로 아픈 거 얘기하는 거잖아. 그 전부 다 이게 그 죽일 놈의 아픔이죠. 네.
여러 날 동안을 울고 아파요. 근데 그래서 내가 이런 격언 하나를 만들었어요. 목회자의 삶은 평안하다고 해서 행복한 삶이 아니고 (53:43) 또 고요하다고 해서 모두 고요한 삶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평안해도 가슴속에 이런 자기 투쟁과 죽음의 시간들이 있으면 천국과 지옥을 오가면서 그렇게 고통을 하는 거야. 그런 자기 헌신이 이 그런데 자기를 다 바치는 가운데 하나님이 자를 죽여 가시는 거예요. 자아를 죽여 가시는 거예. 예.
절대로 뭐 사업이 만나고 교회가 뭐 파탄되고 이런 환난을 통해서 자기를 죽여 가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지체를 위해서 작은 것을 희생하려고 할 때,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은 지체를 용납하려고 할 때, 한번 만나서 대거리를 하면서 다 퍼붓고 싶은 그 지체를 (54:46) 그냥 자기가 다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나의 사랑 없음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가시와 같은 그를 가슴에 끌어안아 주는 그 아픈 과정을 통해서 자기 죽음이 경험이 되는 거예요. 자기 죽음이 경험되는 거. 이것이 바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그 말의 참된 의미예요.
그러면 여기서 이야기하는 성도간의 사랑이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라고 하는 거죠.
첫째는 이러한 성도들이 성도의 공동생활 속에서 함께 구현해 가야 할 사랑은 자연적인, 자연적인 선의가 아니라는 거죠. 자연적인 선의 선한 뜻 이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자연적인 선의와 (55:51) 하나님 안에 있는 지순의 사랑의 차이는 자연적 선의는 인간의 의지에 직접적으로 겨냥된 선의라는 거죠. 무슨 뜻이냐면 선의는 도덕적 결심을 통해서 촉구되는 그런 종류의 선의예요. 그러니까 사랑처럼 보이지만 공동체에서 예수를 보여주는 그런 종류의 사랑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그 사랑이 뭔 사랑이든지 어쨌든 사랑만 하면 된다. 그렇게 말씀하지 아니시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거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거라. 그렇게 하면 그것 때문에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게 될 (56:55)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뒤집어 이야기하면 너희가 아무리 사랑해도 그 사랑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은 사랑이 아니면 그것으로서 사람들은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말씀하시는 거죠.
자연적 선의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일반적 도덕 판단에 기초하고 있는 것인데 결국은 자기 사랑의 중심축을 이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향해 확장한 자기 사랑이에요. 그래서 그것은 반드시 한계를 가지고 있어요. 교회의 성도의 공동생활 속에서 있어야 할 그 사랑은 불변하고 영원하고 완전한 사랑이에요.
그러나 그 자연적 선의에 기초한 사랑은 절대로 영원하지도 않고 (57:59) 완전하지도 않고 그다음에 영원하지도 않고 완전하지도 않은 그런 사랑이에요. 불변하지도 않은 사랑이에요.
근데 여러분들에게 한번 질문을 하겠습니다. 부모에게 상처받은 자식들도 많지만 새끼들에게 상처받은 부모들도 많아요. 근데 질문하겠습니다.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부모가 두 부류의 부모 중 어떤 부모들일까요?
첫째 자식밖에 모르고 자식을 애지중지하며 길러온 부모. 이 사람들이 상처를 자녀들로부터 받겠어요? 아니면은 아예 처음부터 자식 보고 내가 왜 네 인생의 행복을 위해서 내가 희생을 해야 되냐? 네 인생의 행복이 내 인생의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냐? 그니까 네 인생의 행복은 네 인생의 행복이고 내 인생의 (59:03) 행복은 내 인생의 행복이기 때문에 난 너를 낳아주고 길러 주는 걸로 다 했지. 어 나를 희생해서 너를 전부인 것처럼 사랑하라고 나에게 요구하지 마라. 네 인생은 네 인생,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다.
두 부류의 부모 중에 어느 부모가 자식에게 상처를 많이 받을까요? 첫째예요. 둘째는 아예 처음부터 기대하는 것이 없어요. 그 상처 안 받아요. 그니까 이 상처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관계 없는 사람을 통해서는 상처가 안 일어나요. 예. 사랑하거나 혹은 사랑을 기대할 수 있는 관계 속에서 상처가 생겨나게 되는 거거든요. 그런 논리거든요.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자녀를 목숨까지 다 버릴 정도로 그렇게 자녀를 사랑했는데 (1:00:11) 그 사랑할 때 부모의 마음에는 자식이 지금 죽어 가는데 당신 심장을 떼면은 얘가 살 수 있다. 그러면 부모가 그거 줄까요? 안 줄까요? 근데도 상처를 받잖아. 그럼 무슨 얘기예요? 그러면 그 자기 자식을 그렇게 사랑하는데 그 자식이 뭔가 기대에 어긋났기 때문에 지금 실망을 해서 상처를 받는 거 아니에요. 그때도 사랑하면 안 돼요. 아니, 심장까지 뛰어줄 수 있는데 그때도 사랑하면 되잖아요. 근데 그게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 이상한 구절이 나오는 거예요. 내가 내 몸을 불사르게내어 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니 사랑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 몸을 불사르라고내어 주냐 얘기예요. (1:01:02) 그러니까 사랑이 없으면 그런 일 할 수 없죠. 자식을 위해 심장을 뛰어 준다. 개 엄마 죽어도지 자식 사랑 안 했거든. 근데 심장 뛰어 뛰어 주더라. 그런 말 없다 얘기예요.
그럼 그 고린도서 13장의 의미가 뭐예요? 거기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자연적 선의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이거야. 그러니까 만약에 내가 자연적 선의로서의 사랑이 있어서 그래서 자식을 애지 중지해서 내 몸을 불사르게 자식을 위해 대신내어 준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까리따스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요. 그건 결국은 자기의 중심축을 옮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 신기하죠.
(1:01:51) 그렇게 그 목숨을 버리기까지 그렇게 사랑하는데 어 사랑하는데 근데 어떻게 그러냐 이거죠. 제가 아는 어느 부부는 말이죠. 남편이 이게 간 경화에 걸렸어요. 그 참 특이하게 그 놀랍게도 말이죠. 간 경화에 걸려 가지고 뭐 거의 그 죽어 가는 그런 그 시점이 됐는데 그런데 놀랍게 그 그 부인이 간이 건강한데 이 체질이 탁 맞아요. 그래서 장기를 띄어서 남편에게 이식했는데 그건 거의 목숨을 건 수술이거든요. 근데 이혼했어. 응. 그 이혼했어요. 그럼 왜 그럴까? 아니 그렇게 목숨을 걸 정도로 사랑이 있는데 왜 왜 그러면은 그렇게 될까?
그게 바로 자연적 선의 사랑이 가지고 있는 (1:02:58) 한계. 인간적 사랑이 가지고 있는 한계야. 여러분들은 잘 모르지만 목회자들 사이에 오가는 속담 가운데 이런 얘기 있어요. 한 교회에 부임할 때 신발 벗고 맨발로 부임하는 목회자 짐 받으러 뛰어나오는 교인이 바로 몇 년 후에 그 목사 쫓아내는 교인이다. 그런 말이 있어. 그게 뭐냐면은 자연적 선의가 얼마나 불안전한지를 보여 주는 거예요.
여러분들은 이런 이야기 오늘 회개하고 그리고 이 시점부터는 교회 안에서 그런 일들을 되풀이하지 마세요. 이제까지는 하나님이 몰랐으니까 조금 용서해 주실 거예요. 근데 이제는 밝히 알게 될 테니 하지 (1:04:01) 마세요.
교회에서 상처받았다는 말 쓰는 사람들 있죠? 굉장히 잘못하는 것이에요. 그 말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냐면은 자기는 피해자이고 교회가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을 하는 거죠.
이것은 뭘 입증하는 거냐면 그 사람이 예전에 교회를 사랑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 까리따스의 사랑이 아니라 자연적 선의였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보여 주는 거예요. 왜 그런지 이제 여러분들에게 이성적으로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았다. 근데 이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교회를 수없이 생체기 낸 사람들이에요. 100% 틀림 없습니다. (1:05:08) 그 사람은 교회가 가해자이고 자신이 그 교회로부터 상처를 받았다고 말하지만은 그것을 통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이 성도의 공동생활 속에 마땅히 기뜨려야 할 그 사랑으로 공동체를 사랑하지 않은 것을 보여 주는 거죠.
그게 바로 아까 이야기한 자식을 끔찍히 사랑했지만 자식으로부터 상처를 받은 부모나 간의 절반을 띄어서 남편에게 나누어 줬지만 이혼 소송을 하고 헤어진 그 여자 속에 있었던 것과 같은 사랑이에요.
물론 그는 교회를 전심으로 사실 신실하게 사랑했을 거예요. 진심으로 사랑했을 거예요. 그건 의심치 않아요. 근데 진실한 사랑이 모두 지순의 사랑 까리따스는 아니야.
(1:06:05) 그러면 도덕적 선의, 도덕적 선의, 자연적인 선의로서의 인간적 사랑과 까리따스의 사랑의 차이를 설명을 하면 비교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자, 교회에서 살아가는데 함께 공동생활을 해 나가는 가운데 뭔가 지체들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어요. 그때에 이 자연적 선의로서의 인간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아프고 상처를 받았을 때 교회가 자신에게 상처를 가하고 그 지체 때문에 내가 상처를 받게 되었다라고 말해요. 그리고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어요.
그러나 까리따스의 사랑을 가진 성도는 틀려요.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뭔가 부족한 지체나 심지어는 죄를 짓는 지체로 인해서 자신이 악을 (1:07:11) 당하고 고통을 경험하게 돼요.
그때 이 까리따스를 가지고 있는 지체는 생각을 이렇게 하는 거죠. 아,이 교회 안에 이런 것이 부족하구나. 그것이 이렇게 나타나서 지금 나에게 아픔을 주는구나. 내가 이렇게 느끼는이 아픔은 내 아픔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이 아픔을 느끼시겠구나. 하나님이 나에게 그 많은 사랑의 감화인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은 이 교회 안에 이런 부족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거를 채우게 하기 위해서 나에게 은혜를 주신 거구나.
그리고 자기 자신이 마치 백혈구가 되는 거예요. 그래서 온몸에 상처 어느 한 부분에 상처가 났을 때 온몸에 백혈구 총동원령이 내려서 그쪽으로 몰려가서 그 균과 함께 덮접 맞붙어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는 것처럼 (1:08:17) 자기가 그 교회의 결점과 지체들의 약점을 알게 되었고 그 약점이 교회의 몸에 고통이 된다는 것을 내가 경험했으니까 내가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힘입어서 나를 희생함으로 이것을 고치겠다라는 생각을 갖는 거죠. 그게 까리다스예요.
그러니까 그 사랑은 불변하고 완전하고 영원한 사랑이 되는 것이고 도덕적 선의로서의 사랑은 가변적이고 순간적이고 그리고 일시적인 것이 되는 거예요. 불완전한 것이 되는 것이죠.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공동체 안에서 영원히 남아야 할 사랑이 실현되는 곳인 이곳에서 구현되어야 할 사랑은 따라서 도덕적 선의로서의 그런 사랑이 아니라 (1:09:21) 바로 그렇게 그런 종류의 까리따스의 사랑이에요.
왜 그러니까 상처를 받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바로 그 지점에서 자신이 교회와 지체들을 향해 가지고 있는 사랑이 도덕적 선의이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풀어 주신 바로 그 사랑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거죠. 보여 주는 것이에요. 보여 주는 것이에요.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몸을 아프게 하며 살고 있는지 한번 보십시오. 자기는 상처받았다 그러는데 사실은 그렇게 떠들고 다니는 자기로 인해서 교회는 더 많이 상처를 받았어요. 20년 30년을 이 교회 저교회에 (1:10:27) 영적인 거뱅이처럼 빌어먹으며 신앙생활을 했는데 마지막 남은 거라고는 피묻은 칼밖에 없어요. 수없이 교회를 찔러서 자기는 수많은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다 그러는데 교회는 그런 사람들 때문에 상처를 받은 거예요. 백혈구 역할을 한 적이 있는지 내가 묻고 싶어요. 인정해 주는 목회자 아래 헌금 많이 하고 봉사하고 인정이 끝나고 나면은 그다음에 교회 뜰 준비하며 보따리 싸고 어 지체들과 부딪히게 되면은 그 인간들하고 마주보는 거 싫어서 환멸을 느끼면서 어 자기를 잘 받아 줄 수 있는 맞는 교회로 보따리 쌓고 이렇게 하면서 긴 세월을 신앙생활을 했는데 그 사람 안에 하나님 없어요. (1:11:19) 없어요. 그리고 일생 살아온 길이 끊임없이 예수의 몸을 조각내며 살아온 인생 길인데 그가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 있겠어요? 그래서 그런 말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에요.
오늘 보세요. 예수께서 너희 예수께서 너희가 사랑받은 것처럼 너희는 서로에게 사랑을 받으라. 이에요? 아니에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이 자기를 사랑해 주는 것을 제자들이 인정이나 했습니까? 오히려 예수님 다 배반하고 떠났을 때에도 예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었죠.
정의를 빙자해서 지체들의 약점을 드러내고 수치를 까발려서 (1:12:25) 그래서 부끄러움에 떨어뜨리고 지체들 앞에 고개를 들 수 없게 하는 그 잔악 무도한 일을 예수님이 행하셨습니까? 한행하셨어요.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순간에도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 떠오르면서 제 마음은 너무 아픕니다. 어쩜 그렇게 어릴 수 있을까요? 이 복음의 진리가 보이지 않으세요? 그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것이에요. 그것도 아주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응 자기 상처받았노라고 말하는 근데 묻고 싶어요. 아 자기가 그렇게 귀해요. 자기가 그렇게 대단해요. 그렇게 귀해요. 예수보다 귀해요. 지체들보다 소중해요. 예.
바로 예수님이 여러분들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1:13:31) 여러분들이 그 사랑한 무릎을 꿇은 것은 그렇게 자기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살던 옛 삶을 십자가에 못 박은 거야.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같가 지고 가오리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
이름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라.
이게 아프리카 흑인들이 사 흑인들이 사는 그 원주민 마을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에요. 여기 지금 여기에 예 주님이 주신이 공동체 안에서 구현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그냥 내가 희생하면 되잖아요. 그 내가 그렇게 중요해요? 자신이 상처받은게 그렇게 엄청난 사건입니까? 그래서 자기가 상처받았다는 걸 공표하고 거기에 대해서 복수하고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자기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을 규합하고 이렇게 해서 자기의 상처를 좀 덜기 위해서 예수의 몸에 창를 찌르는 것이 (1:15:46) 그것이 가하냐 얘기예요.
주님의 크신 사랑이 우리를 구속했기 때문에 얼마 남지 않은 우리의 날들에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보양하고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를 세우기 위해서 우리의 진액을 다 쏟아도 얼마 섬길 시간이 없어요.
이 교회에 가서 피흘리게 하고 저 교회로 도망가고 저 교회에 가서 또 만만한 사람들을 만나면 또 찔러서 피흘리게 하고 저교에 다니고 그 영혼의 피곤함과 비참함을 얻지 말로 다 할 수 있겠어요.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자녀로 사는 삶이 아니야. 그리스도의 지체로 사는 삶이 (1:16:48) 아니에요.
그러면 성도 간의 사랑이 자연적 선의가 아니라면 어떻게 해서 얻어지는 것이냐? 이게 뭐냐면 하나님께 전심함을 통해서 그런 사랑을 얻어지게 되는 거예요. 예. 예.
그러니까 모든 성도들이 각자 삶의 위치는 다르고 지체로서의 자리는 각각 틀리지만 그러나 그가 손의 위치에 있든 발의 위치에 있든 가슴의 위치에 있든 무엇이든지간에 전심으로 전심으로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는 거죠. 하나님께 마음을 바치는 거예요. 그것이 바로 모든 섬김의 뿌리가 되는 거죠. 모든 섬김의 뿌리가 되는 거예.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교회에서 만난 그 인간이 너무 (1:17:52) 미워요.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어요. 그런데 주님 앞에 깊이 엎드려서 자기를 죽이며 하나님께 자기의 마음을 다 쏟는 거야. 그때에 비로소 마음속에 느껴지는 거야.
예. 뭐가 느껴지냐면은 내가 받은 지체들로부터 받은 작은 상처는 소명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겁니다. 왜냐면 바로 그런 아픔은 예전부터 있었던 건데 나에 의해서 발견이 되어진 거예요. 그러면 이게 내가 처음 발견한 것일 수도 있고 내 앞에서 이런 똑같은 것 때문에 상처를 받았던 수많은 지체들이 바로 내가 하려는 행동, 쓴물을 머금고 지체들에게 비난을 퍼붓고 칼을 휘두르고 교회를 떠나거나 공동체를 찢어 놓은 적이 있어요. (1:18:55) 그리고 수많은 영혼들이 지나가는 동안에 교회의 상처는 덧나서 자신에게 더 많은 상처를 준 거예요.
그때에 그가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지 않으면은 그 고통을 이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뿌리 치는 거예요. 아 뭐 한 번 옮긴 교회 두 번 못 옮기겠어요. 죽더먹은 자리에 펴놔요? 한 번 교회 생체기 내고 뛰쳐 나왔는데 두 번은 못 뛰쳐나가겠어요. 세 번은 못 뛰쳐 나가겠어요. 전과 2범이나 3범이나 같은 사람이지. 예. 왜 못 하겠어요? 예. 못 하겠어요. 설교적은 후지다고 보다리 쌌는데 가서 또 설교가 후지면 또 더 좋은 설교 하는 대로 보다리 싸고 갈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왜 못 하겠어요? 살아온 삶의 방식이 그런데 예 마음에 안 드는 인간들이 있어서 힘들어서 보다리 싸서 왔는데 그런 인간들이 또 있어요. (1:19:54) 또 보다리 쌓 수 있는 거죠. 뭘 못 하겠어요? 어차피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인데 언제 그런 사람들이 기도하다 응답받고 교회 떠나는 거 봤습니까? 예. 아, 그냥 지뜻대로 하는 거예요. 무슨 응답은 무슨 얼어죽으려면 응답이에요. 이미 그런 독한 마음을 품고 있는 사람은 하늘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혀서 기도가 안 돼요. 기도가 안 되는 사람이 무슨 응답이 있어요? 아, 그 신령하고 화목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는 까리따스의 충만한 가운데서 응답이 있는 거지. 아, 그거 무릎 꿇고 앉아서 머리 굴리는 거. 머리 굴리는 거지. 무슨 놈 응답이에요. 이게 응답은. 예. 그리고 일생을 살아온 거예요. (1:20:40) 그게 어떻게 그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아온 사람일 수 있습니까? 응.
그게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것.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리스도 예수의 놀라운 은혜, 회심 할 때, 그때 말씀을 전해 준 목회자도 없고 그리고 나를 거기에 인도한 전도자도 없고 그리고 나를 거기에 데려간 지나온 내 인생길에 과정도 없고 오로지 나 같은 죄인을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시는 예수님만이 거기에 계셔. 그 마음으로 돌아가야 되는 거죠. 돌아가야 되. 돌아가야 되고. 응. 돌아가야 돼요.
인생에 환난이 닥치고 (1:21:46) 교회 생활에 고난이 올 때 누군들 모든 관계를 끊고 떠나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어요? 그러나 그렇게 하면 안 되죠. 왜냐하면 자신은 그것이 상처를 덜 받는 길이지만 그리스도의 몸이 피를 흘리잖아요. 피를 흘리잖아. 그러니까 자신이 피를 흘리고 교회는 지켜야 되고 자신이 아파도 지체들은 고통을 받지 말아야 된단 말이야. 그게 마지막 순간까지 양보하지 말아야 할 예수의 사람들의 삶의 원리예요.
이를 깨물고 흐를 해 그렇게 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주님을 향한 사랑이에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주님을 향한 사랑이 사람 때문에 흔들리고 사라졌다 다시 생겨나고 생겨났다 없어지는 사랑이라면 (1:22:51) 그것은 진짜 있는 사랑이 아니에요. 있는 사랑이 아니에요. 있는 사랑이 아니에요.
어떤 평신도가 도전적인 책을 썼어요. 한 10년 전에 일인데 나도 교회를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굉장히 많이 팔렸어요. 그랬더니 몇 년 있다가 도전적인 책을 목회자가 한 거 썼어요. 목사도 목회를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다.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 앞에 사로잡힌 그 순간 우리는 그냥 없는 사람이 됐습니다. 그래서 좋을 때도 해야 되고 싫을 때도 해야 되고 할 수 있을 때는 물론 해야 하고 할 수 없을 때에도 해야 합니다. 그게 (1:23:55) 바로 사랑이야. 이게 바로 사랑
그래서 사랑의 사람은 모두 겸손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수시로 자기 안에 아무 사랑이 없는 것을 발견해요. 응. 매 순간마다 하늘을 열고 부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는 사랑의 감화가 아니면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그래서 그들은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게 되는 거예. 그니까 이것이 모든 것이 섬김의 뿌리가 되요. 무엇을 하든지 그 모든 섬김의 뿌리가 되요. 그렇게 그렇게 섬기는 것이 잘 섬기는 것이고 그렇게 잘 섬기게 될 때 거기에서 자기 자신의 자기 자신은 괄목할 만큼 예수를 닮아가는 거에요.
아주 (1:25:02) 놀랍게 예수를 닮아가는 술을 닮아가는 특별히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얼마나 당신을 향하여 분산되기를 쉬운 줄을 아시기 때문에 때로는 말할 수 없는 지혜로운 섭리의 경륜 속에서 지체들에게 실망하게 하시고 또 때로는 상처라고 하는 것들을 받게 하셔서 보이는 사람들 속에서 예수의 사랑을 구현해 가지만은 그러나 사람들이 영원한 우리의 인생의 목표일 수 없고 그리고 불변하는 하나님만이 변함 없으신 사랑이라는 것을 깊이 느낍니다.
언젠가 제 마음에 깊은 고통이 있어서 정말 더 이상 설교할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있었어요. 마당에 앉아서 아침마다 성경을 읽으면서 (1:26:07) 주님의 음성을 들었어요. 이 음성을 들었어요.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너는 내 것이라.
어디선가 들리는 주님의 음성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1:27:11) 저희 아버님이 굉장히 건강하셨어요. 근데 어제 제가 중한지실에 가서 우리 가족들이 모두 밤을 샜습니다. 임종하실 것 같아요. 이틀 전까지만 해도 함께 식사를 하고 웃고 그러셨는데 의식이 없이 산소 마스크를 쓰고 아주 급히 죽음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그 아버님의 얼굴을 뵈오면서 참 마음속으로 많이 울었어요. 이렇게 그냥 며칠 전에 사택에 올라오셨는데 이게 안아드리고 싶어요. 사실 그래 본 적이 없거든요. 근데 어젯밤에 그렇게 후회가 됐어요. 그날 안아드릴 걸.
(1:28:16) 그렇게 다 지나가더라고요. 욕망도 재산도 지위도 명예도 분노 미움 열정, 시기 다툼 좌절 슬픔 고뇌 이별 아픔 설움 다 지나가요. 왜냐하면 이것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 완전한 것도 아니고 불변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성경이 말하고 있죠. 믿음, 소망, 사랑이 세 가지는 언제나 있는데 얘들아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란다. 믿음도 언젠가는 필요 없는 때가 오고 그래서 마주대하며 보는 때가 오고 소망도 모두 성취되어서 이제 더 이상 (1:29:21) 소망할 것이 없는 때가 온단다. 그러나 사랑은 그때도 떨어지지 않고 영원하단다. 말하는 거예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 지나가는 것들이에요. 모두 지나가요. 분노, 미움, 상처, 속좁음, 시기, 원망, 미움 다 지나가요. 그것은 영원하지 않아요.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이니 사랑. 사랑. 그래서 이 성도의 공동체의 이 사랑은 하늘에서나 맛볼 수 있는 복락을 미리 당겨서 맛보는 거예요. 맛보는 거예요.
(1:30:26) 그래서 지체들의 부족을 보거나 상처를 받았을 때 그것을 소명으로 생각을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전심하십시오. 사람을 보면 계속 넘어져요.
내가 왜 예수를 믿게 되었고 어떻게 내가 예수의 몸에 접붙여졌으며 그래서 내가 어떻게 이 교회의 이원이 되었고 인생의 어떤 골짜기를 하나님이 휘돌아서 주님이 나의 손을 붙들고 신실하신 방법으로 여기까지 인도해 오셨는지를 깊이 생각하면서 전심으로 주님의 얼굴을 구하시면 용서할 수 없는 사람도 없고 미워해야 하는 사람도 없고 그리고 모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만 남게 됩니다.
큰 은혜를 주신 내 예수시니 이전보다 더욱 사랑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특별히 이 교회에 머무는 동안에 후회없이 서로를 사랑하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이 이 시간에 우리 같이 기도할 때 하나님 오늘이 시간에도 저희들이 기도합니다.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십시오. 하나님 (1:32:44) 우리의 무지함과 우리의 사랑음, 포악함, 우리의 강포함을 용서해 주시고 우리들을 사롭게 하신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고쳐 주셔서 우리로 그 사랑 때문에 구원을 얻었으니 그 사랑 때문에 살도록 도와달라고. 우리 같이 성도의 공동생활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주님께서 사랑해 주시고 오늘이 시간에도 믿는 주님 [음악] 우리를 그 많은 죄악에서 구원하시기 (1:34:34)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우리 같은 죄인을 위해 아들을 보내심으로 자신의 사랑을 확정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그 사랑과이 은혜와 사랑을 생각나게 하셔서 우리로 자기를 버려 사랑하게 하시는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어지다. 아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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