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보다 사랑이 먼저다

하나바이블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2 views
Notes
Transcript

공감과 섬김을 위한 배움

고린도전서 8:1–13 NKRV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요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음식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않는다고 해서 더 못사는 것도 아니고 먹는다고 해서 더 잘사는 것도 아니니라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여러분, SNS에서 이런 댓글 본 적 있는가? ‘’팩트로 때린다(팩트폭행)’, ‘맞는 말인데 왜 기분 나쁘지?’, ‘틀린 말은 아닌데 너무 세다’ 왜 그럴까? 내용은 맞는데, 마음은 불편하다. 왜냐하면 사람은 단순히 ‘맞는 말’을 원하는 존재가 아니라, ‘나를 세워주는 말’을 원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도 그렇다. 내가 뭔가 알게 되면, 내가 맞다고 생각하면, 그걸 증명하고 싶어진다. 친구가 틀리면 바로 지적하고, 내가 더 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진다. 교회 오래 다닌 친구들은 이런 생각 해본 적 없는가? ‘쟤는 그것도 몰라?’, ‘왜 저렇게 신앙생활하지?’, ‘성경도 잘 모르네’ 처음에는 마음속으로만 생각한다. 그런데 점점 내가 더 많이 알고, 더 오래 믿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게 된다. 성경을 배웠는데, 오히려 사랑은 줄어들고, 판단은 늘어난다. 이상하지 않은가? 하나님 말씀을 배웠는데, 왜 사람을 세우는 대신 사람을 무너뜨릴 때가 있는가? 오늘 고린도전서 8장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배움은 너를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우기 위한 것이다.”
오늘 읽은 본문은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에 대한 문제를 이야기를 한다. 먼저 우리는 제사상에 올려진 음식을 먹어도 될까, 안 될까? 이것을 먹어도 될까 안 될까에 대한 답도 오늘 이야기하지만, 그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중요하면서 모든 상황에 ‘이 원리’를 적용할 수 있는 교훈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알려준다. 오늘 그 원리를 발견하고 여러분의 삶의 모든 현장에서 적용하기 소망한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라. 교회에서 다른 종교에서 제사지내고 남은 음식을 교회에서 먹는다고 하면 긍정적으로 느껴지는가, 부정적으로 느껴지는가? 당연히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처럼 고대 사회에서도 고린도교회 안에서 먹어도 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다. 왜 이러한 논쟁이 일어났는지 배경을 살펴보면 이렇다. 여러분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들어본 친구들은 알겠지만, 고린도와 같은 도시에서는 신화에 등장하는 많은 신전과 많은 신들이 있었다. 이 당시, 우상에게 음식이 바쳐진 신전에 참석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음식은 희생을 통하여 우상에게 바쳐졌는데, 이 음식 중 일부는 성전 안에서 축하하는 사람들을 위해 남겨졌고, 나머지 모든 음식은 시장에 팔렸다. 
이때 사람들은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통해 신들과 교제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교제는 그리스-로마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식사와 제사를 위해서 함께 모였다. 몇몇 축제들은 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주어졌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생일이나 장례식, 출산 등등과 같은 개인적인 이벤트를 위해 성전에 참석할 수 있었다. 고대 세계에서 사회와 종교는 명확한 구분 없이 보통의 일상처럼 지냈다. 그러니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사회적 분위기였다. 그래서 예수를 믿지 않는 불신자들은 이러한 환경에서 먹기를 거절하는 기독교인들이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느꼈을 것이고, 이들은 기독교인들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쉬웠던 것이다. 그 결과 이 기독교인들은 사회적으로 버림받은 사람까지도 취급될 수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가능한지 진지하게 논쟁했다. 여기에서 바울은 이러한 음식을 성전에서 먹는 것을 금지시켰고, 만약 믿는 자들이 그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우리 믿는 자들은 이것을 먹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믿는 자들은 음식이 우상들에게 바쳐졌는지 조사하고 알아낼 필요가 없었다. 우리와 같이 믿은 사람들이 만약 음식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면, 우리는 그것을 자유롭게 먹어도 된다.
바울은 특히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스스로 성경 지식이 많다고 자부하는 일명 '똑똑한 신자들'이 있었다. 성경에서는 이들을 결코 고린도전서에서는 강한 자로 부르지 않는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서 지식의 위험성에 대해 고린도교회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경고한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단어 중 하나를 콕 찝는데, 사랑 없는 지식은 “교만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똑똑한 신자들이 자신의 지식을 무기로 삼아, 사람을 세우고 성장하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자만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울은 마치 사람들이 삶과 진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정말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지식뿐만 아니라 겸손과 사랑을 함께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결국 이 문제는 믿는 사람들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가 아니라, 이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아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냐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는 사람들과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은 바로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아무리 착한 일과 선행을 한다고 해서 어떻게 하더라도 결국 하나님의 지식에까지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지식을 자랑한 근거가 없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4-6절에서 주님은 한 분이라는 구약의 위대한 진술을 보여준다. 이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우상들은 아무것도 아니며, 이것들은 의미없는 상상이나 망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바울은 우상들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조롱하는 구약의 많은 성경구절을 인용하는데, 이 우상들은 완전히 무능하고 힘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여러 타종교들은 많은 신들이 있었지만, 그러나 우리처럼 믿는 자들은 오직 한 분, 참 하나님 즉, 만물의 창조주 아버지만을 인정한다. 우상들의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았고 창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바울은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구약의 위대한 진술을 수정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하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포함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온 세상을 직접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를 만드신 진짜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정체성을 서로 나눈다는 진리에 대한 완전한 의미는 약한 자들에게 완전히 드러나지 않았다. 확실히, 이 약한 자들은 하나님이 창조주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약한 자들은 자신들의 고백과 그들 자신이 가졌던 우상에 대한 경험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들은 여전히 우상들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느꼈고 믿었다. 또한, 똑똑한 신자들은 교만해서는 안 된다. 음식을 먹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좋거나 나쁜 것이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약한 자들이 우상에게 바쳐진 것으로 생각하여서 시장에 있는 음식을 멀리하고 먹지 않았다고 해서 어떤 불이익이 있지 않다.
바울은 우상들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는 것에 대한 자신의 반대를 당장에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인들은 그가 설교했던 회당과 다른 장소에서 정기적으로 가르쳤던 이 문제에 관한 바울의 입장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똑똑한 신자들은 바울의 지시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자유”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마도 이들은 먹지 않으면 사회적인 차별을 겪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을 먹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친구들과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우상의 신전에서 식사를 위해 자신들을 초대했다는 이유로, 자신들의 먹을 권리를 정당하다고 했을 것이다. 바울은 아는 사람들의 이러한 잘못을 바로 지적하기보다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이들은 "우상은 진짜 신이 아니니까,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먹어도 아무 문제 없어. 이건 내 자유이자 권리야!"라고 생각하며 신전 안에서 당당하게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믿음이 아직 약하고 서툰 신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거나 "나도 저렇게 우상 제물을 먹어도 되나?" 하며 마음이 흔들리고 상처를 받았다. 이 모습을 본 바울은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을 던진다. 바울은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당연히 교회로부터 생활비(보수)를 받을 떳떳한 권리가 있었다. 하지만 성도들에게 조금이라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스스로 그 권리를 포기한 채 밤낮으로 텐트를 만들며 일했다. 바울이 굳이 자기 월급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자신이 가장 소중한 권리를 포기했던 것처럼 똑똑한 신자들도 그들이 주장하는 ‘고기 먹을 권리’를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바울이 원했던 것은 하나였다. 똑똑한 신자들이 “내가 맞다, 내 권리다”를 외치기 전에, 내 행동 때문에 상처받을 다른 사람의 마음을 먼저 헤아리는 ‘목회자 같은 마음’을 갖는 것이었다. 나만 생각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버리고 타인을 중심에 두는 삶이야말로, 우리를 위해 모든 권리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마음이며 바울이 보여준 삶의 태도이다. 바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이처럼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내 권리를 기꺼이 양보하는 멋진 삶을 살자고 초청하고 있다.
여기에서 약한 자들을 위한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8장 11절에 바울은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의 지식으로 “멸망”된다고 언급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 강한 자들의 “지식”은 파괴적인 방법으로 사용된다. 바울이 사용하는 “멸망된”이라는 단어는 최종 심판, 최후의 멸망을 의미한다. 바울은 여기에서 아주 진지하다. 왜냐하면 우상들의 신전에서 먹는 것은 우상 숭배에 해당하고, 우상 숭배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에베소서 5:5 NKRV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사람들이 어떻게 영원히 멸망한다고 생각할 수 있었을까?
로마서 14:15 NKRV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8-9절에서 구원으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끝까지 멸망되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여기에서 상대방이 상처받지 않고 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사랑으로 타이르는 따뜻한 경고를 한다. 이것을 목회적 경고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경고'는 학교 선생님의 벌점이나 경찰관의 딱지처럼 규칙을 어겼을 때 단호하게 처벌하는 무서운 이미지이다. 하지만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했던 ‘목회적인 경고’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 이 경고의 목적은 상대를 혼내거나 부끄럽게 만들어서 기를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더 큰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사랑으로 미리 지켜주기 위한 보호막과 같다. 엄한 판사가 아니라 자녀를 아끼는 부모의 마음으로 하는 경고이기에, 바울은 “너희는 틀렸으니 당장 벌을 받을 것”이라고 으름장부터 놓지 않았다. 대신 그들의 처지를 먼저 이해해 주면서도, “너희의 자유로운 행동 때문에 믿음이 약한 다른 친구들이 상처받고 쓰러질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다정하면서도 진지하게 타일렀다. 결국 목회적인 경고란 상대방을 살리고 회복시키기 위해 건네는 가장 진심 어린 조언이다. “내가 너를 정말 사랑하고 아끼기 때문에, 네가 이 선을 넘지 않고 안전했으면 좋겠어”라는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는 따뜻한 멈춤의 신호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똑똑한 신자들이 형자들과 자매들을 파멸로 이끄는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지 않는지 묻는다. 바울이 썼던 편지들이나 다른 신약성경에서 우리는 어떤 사람이 실제로 하나님을 떠나 배교한다면, 이들은 처음부터 진짜 신자가 아니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고, 연약한 형제들과 자매들을 위해 살아야 한다.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똑똑한 신자들에게 “너희의 권리를 양보하라”며 목회적인 경고를 보냈을 때, 그들의 마음속에도 이런 반발하고 싶은 마음이 쑥 올라올 수 있다. “내가 내 돈 내고 고기 먹겠다는데 왜 참으라는 거야?”, “믿음이 약해서 상처받는 건 그 사람 사정이지, 왜 내 자유를 방해해?”라며 바울의 말에 툴툴대고 반항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나 공동체의 사랑 어린 권면을 들었을 때, 뾰족하게 ‘대항’하기보다 내 자존심을 내려놓고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대항하는 마음은 결국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높은 벽을 쌓고 싸움을 만들지만, 나를 낮추고 받아들이는 마음은 교회와 친구들을 하나로 묶어주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과 달라서 반발(대항)하고 싶을 때 한 걸음 물러나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것이 진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처럼 오늘 고린도전서 8장을 통해 우리는 매우 중요한 진리를 배우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배움과 지식을 주시는 목적은 결코 나 자신을 높이고, 내가 더 많이 안다는 것을 증명하며,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해지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배우게 하시고, 예배하게 하시고, 성경을 알아가게 하시는 이유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살리고, 세우고, 섬기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진짜 성숙한 신앙은 “내가 맞다”라고 주장하는 신앙이 아니라, “내 행동 때문에 누군가 상처받지는 않을까”를 먼저 생각하는 신앙이다. 진짜 믿음은 내 자유와 내 권리를 끝까지 붙잡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내 자유조차 기꺼이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렇게 살아가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셨다. 그 누구보다 모든 권리를 가지신 분이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권리를 붙잡지 않으셨다. 오히려 우리를 살리기 위하여 하늘의 영광을 내려놓으셨고, 죄인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까지 기꺼이 지셨다. 예수님은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주장하신 분이 아니라,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신 분이셨다. 그리고 오늘 바울은 바로 그 예수님의 마음으로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느냐가 아니다. 내가 얼마나 오래 교회를 다녔느냐가 아니다. 내가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었느냐가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진 지식과 말과 자유가 지금 누군가를 살리고 있는가, 누군가를 세우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가진 지식이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고, 내 말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내 자유가 믿음이 약한 친구를 넘어지게 만든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지식이 아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공감을 받고 인정받기 위해 배우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배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 권리를 끝까지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형제와 자매를 위해 기꺼이 내려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진짜 성숙한 신앙이며, 그것이 바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나는 맞는 사람인가, 아니면 사람을 살리는 사람인가”를 진지하게 돌아보며, 내가 가진 모든 배움과 지식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는 도구로 사용되는 참된 제자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