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읽는 주기도문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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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는 주기도문_13_악에서 구하옵소서 -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QJvTO7bOeg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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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0) 두 번째 목사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 네.

I. 들어가는 말.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여섯 번째 광구에 그 광구에 악에서 구해 달라는 기도를 더하 더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시험이 침에 빠져 타락함을 의미하기보다 복음을 위하여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만나게 되는 모든 시련과 환난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과 그 나라의 도래와 그 분의 뜻의 성취를 위하여 사는 신자들에게 시험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시험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지 않으면 반드시 악에 빠지게 됩니다.

II.악이란 무엇인가?

이 간구에는 특별히 우리의 눈길를 끄는 단어가 있습니다.
(00:52) 바로 악입니다. 그렇다면 악이란 무엇을 것일까요?이 이 질문은 인간이 선악의 눈을 뜬 이후로 계속되는 선과 악에 관한 거대한 철학적 관론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러나 2장에서 우리는 주기도문의 마지막 한구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도에서 악에 대한 성경적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A 악의 의미

여기서 악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손해로스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악의 용는 다음과 같이 나타납니다. 첫째로는 악이 악한 사탄 자신을 가르키기도 하지만 대게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라면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는 상태를 가르킵니다. 둘째로는 인간이나 영적 피조물이 하나님의 율법이나 계명을 위반하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도덕적인 판단의 결과로서 악을 가르키기도 합니다.
(01:47) 신약 성경에서는 훨씬 다양한 용가 나타납니다. 첫째로는 아, 마귀라고 보았습니다. 둘째로는 악하고 비열한 사람을 묘사하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셋째로는 악한 것 나쁜 것으로 것들을 가르킵니다. 넷째로는 육체의 연약함을 가르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각일한 하나님의 판단 못하고 환경을 받은 상태를 가르킵니다.

B. 악의 판단 기준.

선과 관제되는 개념이 악이라고 한다면 그 역시 판단의 기준을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이 세계를 선악의 창조하심으로써 악이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와 우리 인간 안에 온전하고 좋은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고 불완전하고 악한 모든 것은 인간의 죄로부터 온 것입니다.
(02:50) 그러므로 선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악에 대한 이해를 동반합니다.

1. 선악의 기준.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기준으로 선악이라는 판단을 하실까요? 먼저 악은 선과 대조를 이루 정체가 파악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성경에서 입증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창세기 2장 9절. 또한 성경은 말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내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세기 2장 17절.이는 마치 빛을 알아야 어둠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어둠을 통하지 않고는 빛을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03:34) 질병으로 고통받아 본 사람만이 건강이 좋음을 알게 되듯이 아까 그 결과 고통을 한 사람들은 모든 선과 그 결과인 행복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

a 선의 결핍으로서의 악.

아오구스티누스가 악을 가리켜 환의 결핍이라고 본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이를 통하여 아구스티누스는 하나님께서 모든 악의 원인이라고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이교도 철학자들에 대하여 악은 실체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악의 원인이 아님을 입증 살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행하는 선은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이 원인이지만 악은 인간의 의지에 하나님의 은혜가 결핍된 상태가 원인이라는 설명입니다. 이러한 아 아구스티노스의 선악에 대한 설명은 지금까지도 기독교의 철학적 입장으로 그 효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04:30) 악을 선의 결핍으로 보는 아오구스티누스의 견해를 좀 더 설명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선은 그것을 이루도록 작용하는 하나님의 원인이 있지만 악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뒷은 발광체나 빛을 반사하는 물체의 도움을 받아서 도입되지만 어둠은 그것을 치우기만 하면 도입되는 이체와 같은 것입니다. 인간의 의지가 악하게 작용함으로써 악이 삼철되는 것이지 그 원인이 직접적으로 하나님께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다만이 세상의 악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의도를 벗어나 존재한다면 세계에 대한 전 포괄적인 하나님의 통치가 부인될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지혜로서 인간의 악을 허용하심으로 세상의 악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05:14) 이에 대하여 아우고티노스는 유명한 상처의 비유로 악을 설명합니다. 그는 악이 홀로 존재하지 못하고 선한 곳에 기생한다는 사실을 예정하면서 상처를 비유로 제시합니다. 즉 성차는 건강한 몸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치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성차가 실체나면 약을 바르고 치료하여 건강을 회복한 후에도 어디런가 위치 이동을 하여 존재해야 할 것인데 실제로는 사라짐으로써 실체가 아님을 드러내는 것처럼 악도 실체를 가진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책 라오렌티우스에게 보내는 신앙 지침서 믿음 소망 사랑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런데 좋음의 결혼 알고 또 다 또 어떤 것을 악이라고 하겠는가? 동물의 몸에 있어서 질병과 상처가 있는 것은 건강을 빼앗긴 것과 다름이 없듯이 치료를 받았을 때 몸 안에 있던 나쁨 곧 질병이나 상처가 거기서 떠나서 다른 곳에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다.
(06:17) 그것은 어디에다 존재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상처나 질병은 실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몸 자체는 실체이기 때문에 어떤이지만 거기에 나쁜 것들 즉 건강이라는 육체의 좋음의 결핍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 이처럼 악을 어 악은 선에 기세한 것입니다. 원래 선한 것은 악한 것이지 원래 악한 것에는 악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므 하나님께서 맨 처음 창조하신 선한 상태를 잃어버린 정도만큼 악한 것입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자연적인 사물이 그 선한 상태의 결핍했을 때 자연악이라고 부르고 도덕의지를 가진 지성적 피조물들 곧 천사와 인간이 그 선한 도덕의 상태를 결표했을 때는 도덕이라고 부릅니다.
(07:11)

b. 실체 없는 악의 힘.

그런데 악을 이처럼 선의 결핍하고 결론 내릴 때 현실적 어려움이 생겨납니다. 현대차르자들은 이러한 친정론의 논리와 다운과 같은 같이 반박하며 문제를 제기합니다. 만약 악기 실체가 아니라면 어떻게 현실적으로 그렇게 강한 힘을 발휘하여 인간을에게 영향을 행사하느냐라는 것입니다. 현시적으로 선한 힘은 같은 크기의 악의 힘보다 약하게 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말탄 누가 패배하는 선이 승리한 악보다 훌륭하다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현실적으로 악의 힘이 선의 힘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반론에 대하여 모든 사람들의 머리를 숙이고 숙이하는 완전한 변증이 쉽지 않겠지만은
(08:16) 어 현대 물리학의 발견이 한줄기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지체적으로 얼음의 어둠은 단지 빛이 제거됨으로써 도입된 상태이지만 최근에 과학은 어둠 속에 엄청난 에너지 소위 흑암 에너지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습니다. 최근 미국 항공 우주에서는 흑암 에너지에 이용하여 빛의 속도보다 빠른 우주선을 만드는 것이 이론적으로 가능하다는 가설를 내놓았습니다. 이처럼 악이 어둠처럼 실체가 아니면서도 현실적으로 엄청난 위을 발휘할 수 있다는 모순처럼 보이는 진술이 우리의 이상에는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물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단지 내게의 차원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하나님께서는 무한 차원의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모순적인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이유가 없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09:20) 역사적으로 회의 주의자이들은 선악의 기준을 어 기준점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을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없다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에 정당성에 입증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이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고 믿어서 선악을 판단한 기준을 거부한다고 할지라도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들은 선한 사람이라 부를 것이고 괴롭게 하고 고통을 주는 사람들은 악한 사람이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성과 악을 악은 어면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 유명한 어 기독교 철학자 엘빈 어 플랜틴가는 당어도 논리로서 유신론적 논쟁을 펼쳤습니다.
(10:22) 그는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왜 이렇게 세상이 악한가라는 묻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논리를 말합니다. 즉 악의 존재를 말하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이 세상에선 악이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역설적으로 왜이 세상에 반드시 선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전제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세상은 선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생각 자체가 이미 순수하게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종교적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의 어 그 선악의 기준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 혹은 인간 각자의 마음 안에 주관적으로 존재하는가의 차이입니다.
(11:16) 우리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인정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늘 변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하는지 혹은 불변한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는지에 따라 결론은 달라집니다. 변한 사람을 기준으로 이루어지는 선악의 판단은 수시로 가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현대학자들 중에 진리가 없고 선악의 판단의 기준은 개인의 행복과 유익의 기준의 수시로 변한다고 보는 실령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 그것은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인간을 둔 세속적 사고 방식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나 절대적인 진리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오로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계약을 맺듯이 행한 사회적 약속이 선악을 판단하는 상대적 기준이 된다는 상대주의적 진리관이 전부입니다. 입니다.(12:34)

2. 성경의 기준 : 계명

그러면 우리는 과연 성경은 선악을 판단하는 기준을 무엇이라 말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예비적인 질문들을 필려로 합니다. 우리가 매주 예배를 드리는 예배당을 생각해 봅시다. 예배당에서 눈을 들어 사면을 보면 많은 사물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사물들은 저마다 누군가의 손으로 설치된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각의 사물들을 거기에 두었을 때 그것들이 예배당을 지은 전체적인 목적에 어떻게 입지할
(13:39) 수 있을까 고민했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머리 위에 밝게 빛나는 등은 어둠움을 밝혀 다른 사물들을 볼 수 있게 하려고 설치한 것이고 벽에 걸린 시계는 시간을 가르쳐주기 위하여 강대에 있는 마이크와 앰프 시설은 설교자의 목소리를 많은 사람들에게 크고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사람이 만들고 가져다 준 물건들에는 그것을 만들고 옮겨 놓은 사람들의 의도와 목적이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예배당에 있는 모든 물건들이 각기 사람이 이루려는 개별적인 목적과 의도를 따라서 만들어지거나 설치되었다면 바로 그러 의도와 목적을 가음할 수 있는 탁월한인 탁월한 인간 존재가 하나님의 의도나 목적 없이 창조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14:38) 영국의 사상과 길버트 체스터는 자신의 책 정통에서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어리석은 상상일지 모르나 참으로 모든 사물들의 질서와 그 수는 마치 로빈슨 크루소의 배에서 살아남은 낭만적인 잔잔존물일인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좋은 것들은 태고적 폐허에서 살아남아 보존된 신성한 잔존물이라는 느낌이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보활을 실은 배 한척이 침했고 수많은 보물들이 쏟아져 나와 바다 깊숙한 곳을 굴러다니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잠시 잠수부들이 우연히 그것을 발견하고 하나 둘씩 땅 위에 건져올렸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바닷속에 가라앉았던 그 물건들을 아무리 들여다보
(15:42) 들여다봐도 무슨 물건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것들은 해석을 필려로 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그 보물들이 만들어진 시대에 대한 정보가 아무것도 없다면 그 해석은 때로는 맞겠지만 때로는 아 대부분은 허무맹당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물건들을 원래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에 가판에 쏟아놓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물건이 무엇인지 해석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왜냐면 그 시대에는 물건의 제작자, 사용자 시대 유행이 고스란이 존재하고 있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바로 이렇게 어떤 물건들이 무엇에 쓰이는지 판단할 수 있는 신앙과 하나님의 성경 계시의 정부망 위에서만 올바르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16:42) 인간들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신앙을 버렸습니다. 성경 계시가 주어졌지만 의지적으로 마음의 눈을 감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만물들은 단지 감각적으로 보이는 한도 한에서 한도 안에서는 우리에게 알려집니다. 그것들이 본래 어디서부터 왔는지 서로 어떤 관계를 갖고 있는지 또한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의미를 가졌는지는 올바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지혜와 무한한 사랑 속에서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말 그대로 시간과 공간에 매어서 존재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시간과 공간이 하나님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17:35)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마치 어떤 물질이나 천사, 인간의 영혼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만물 안에 계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없어도 없이도 충족하신 분입니다. 따라서 세상은 하나님께서 당신이 필요하셔서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으로 존재하심에 있어서이 세상을 창조하실 필요가 없으셨다면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스스로 불안전함을 드러내는 것이므로이는 모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필요하지도 않은 세상을 창조하셨다면 쓸데없는 일을 하신 것이므로 그 역시 하나님의 존재의 완전성의 모순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당신 자신의 충만한 완전성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18:37) 당신은 세계 없이도 어 하나님이셨지만 그분의 충만한 완전하심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마치 예술가의 인간으로서의 존재가 자신의 작품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들의 넘치는 예수론이 그것을 창작하게 하고 창작하고 난 다음에는 그 작품을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넘치는 사랑으로 말미암아 세계를 창조하시고 영원한 지혜 속에서 세상의 모든 만물을 교통하게 하셨습니다. 인간들을 창조하셔서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뿐만 아니라 인간들끼리 서로 사랑의 관계를 맺게 하셨습니다. 또한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물들과 관계들을 가꾸고 돌보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신 궁극적 목적에 이바지하게 하셨습니다.
(19:31) 다르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지성 안에 있는 관념들을 시간과 공간 속에 투사하셨습니다. 당신 자신의 관념 곧 이대를 따라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사물들로 만드셨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선하심과 아름다움의 영광을 영원한 세계 안에서뿐만 아니라 시간과 공간 속에서도 버실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러한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신앙 고백 안에서 아주 간단하게 표현합니다. 인간의 제일 가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인간의 제일 가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20:22)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에서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서로 사랑하고 창조하신 세상 모든 만물들 곧 문명, 학문, 지식 등을 가꿈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존재 목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꽃 같은 정도의 뛰어난 지식으로서 창조주 하나님과이 세계와의 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심지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도 각 사람마다 현재의 지성의 크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과 창조하신 세계 그리고 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인간과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21:14) 그러므로 만약 하나님께서 이렇게 학문적인 방식으로 그것들을 알아야 하지 알아야 하지만 겨우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 수 있다면 지성의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들에게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산다는 것은 낙타가 바울 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즉이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명백히 믿어야 할 규칙과 살아야 할 교훈들로 이루어진 계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이 계명을 따라 믿고 살기만 한다면 그렇게 깊은 철학적 이치를 알지 못해도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게 살아서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22:05) 그리고 이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 사람들에게 그 지혜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게 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린도전서 1장 24절. 이러한 계명에서 믿어야 할 규칙은 무엇을 믿어야 할지에 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살아야 할 교훈은 우리가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기 위한 규정입니다. 바로이 계명들에 순종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을 불치망이라고 부르며 그 계명대로 살지 않는 것을 성경은 악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만일이 모든 계명들의 궁극적인 뿌리를 더듬어 간다면 마지막에는 오직 하나인 하나님의 의지가 발견됩니다.
(23:05) 그것이 바로 창조의 목적입니다. 그리고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이며 인간을 지으신 목적이고 타락해서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올 수 없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자기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어 구원해 주신 목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악이 하나님의 계명을 이기거나 어기거나 순종하게 모자라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거스르는 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네.

III. 죄와 악.

여기에서 우리는 죄와 악의 관계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죄와 악에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말 성경에 죄악이라는 단어는 매우 적절한 표현입니다.
(24:07) 죄가 뿌리라면 악은 그 뿌리에서 나온 줄기와 가지 혹은 열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이며 마음 안에서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성향으로 작용합니다. 악은 그 마음의 성향이 나타나서 죄가 실행된 상태를 말합니다. 즉 죄는 교향성이고 성향이지만 악은 구체적으로 미움과 시기, 정욕과 교만과 같이 인간의 악한 마음으로 흘러나오거나 살인과 거짓 등과 같이 악한 행동으로 실현되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죄와 악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는 이유는 당연히 우리가 마음으로 선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렇다면 여러분은 서로 착 달라붙어 있는 죄악 혹은 악의 목표에 대해 생각해 보신 자게 있습니까? 요즘에는 취미로 화를 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25:00) 화를 쏘은 사람들은 그 관역을 향하여 조심스러의 시위를 당겨다가 힘차게 화살을 날립니다. 머리에 머리서 쏜 화살이 동정 크기만한 관역 관역한 가운데로 명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고도의 기술과 끊임없는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점은 한 가운데를 벗어나 시착점은 벗어난 시착점은 모두 실수로 벗어난 것이지 일부러 겨냥한 지이 아니라는 사 사실입니다. 누군도 누구도 관역을 벗어나 활를 쏘려고 연습하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생각 없이 활를 쏘면 그게 바로 관역을 빛나가게 하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분명한 목적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25:50)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나 같은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습니다. 바로 그 목적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 그러므로 선은 바로 그 창조의 목적과 구원의 계획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악은 거기서 벗어난 모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수학 문제의 정답은 하나밖에 없지만 오답은 수없이 많습니다. 우리는 오답을 기록하기 위하여 연습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답을지기 위해서는 부전히 실력을 쌓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은 탁월하고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빛나가는 모든 것은 다 악입니다.
(26:38) 인간의 선악은 선악을 물질의 사용과 관련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우린 열심히 일에서 돈을 벌었더라도 혼자 호위호식하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들을 악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노력하여 도움이고 가난한 이웃을 구하고 하나님 나라와 선교를 위하여 사용하는 것은 선하다고 말합니다. 왜 그 그렇습니까? 거기에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목적에 이바지하는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의 내용들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아설처럼 길고 긴 드라마를 신청할 때 주인공은 물론 단역 배우들의 가게도까지 모두 암기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할 때는 조금만 어려워도 투덜거립니다.
(27:26) 우리는 그것을 선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면서 조금 어려운 내용이 나오면 오히려 마음 뿌듯해했고 그것이 진리이고 나의 영을 유익이게 된다는 사실에 기뻐합니다. 그렇게 진리에 대한 자신이 무죄를 깨달으면서 한 글자라도 더 배우려고 하는 마음가짐이 행동 마음가짐이나 행동을 우리는 선하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거 그렇게 하는 것이이 세계를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목적의 실현에 입하지 않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일어날침부터 교회 나와서 청소하는 일. 어린 영혼들을 성 성식껏 마 말씀으로 가르치는 일 병든 지체를 신방하며 위로하는 일 교도서에 갇힌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나고 헐벗은 이웃들을 굳하는 일 모든 성김들이 비록 자가 보여도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신 목적에 티클만큼이라도 입하지 않은 행동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선하다 말합니다. 또한 선과 악의
(28:30) 존재의 질서와도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홀로 계시던 때에이 세상 모든 만물이 그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가장 나중에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창조 인간은 자신보다 먼저 창조된 만물을 사용하여 가족과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 가족과 이웃들을 섬기고 사랑으로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더 잘 섬기고 경배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사랑의 질서입니다. 그러나 진리를 떠나 인간의 욕망은 이런 사물들의 질서를 뒤집어 버렸습니다. >> 제일 먼저 인간은 하나님을 사용하여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얻고자 합니다.
(29:21) 없이 하나님을 자기 마음대로 자기 욕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일하시는 분으로 이용하려고 합니다. >>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하신 이웃들을 사랑하는 대신 자신의 성공과 행복을 위해서 그것들을 집밟고 이용합니라. 결국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이 세상 모든 만물의 질서를 뒤집어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리에 놓고 만물과 인간을 그다음에 놓고 하나님을 가장 밑바닥에 놓는 것입니다. 아구스틴스가 악이란 잘못된 질서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한 것 말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입니다. 이러한 질서의 전복에서 인간의 모든 비읍과 고통이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존하지 않고는 한 순간도 하나님께서 세계를 지으신 목적에 부합하는 사람들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30:13) 오히려 생각 없이 죄악의 길을 걷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대기 십상입니다. 선과 악에 대해서 이러한 그림들을 마음속에 기록 그리고 그리면서 본문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시험에 들지 말고 다만 악에서 구해 달라는이 일곱 번째 간구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은 주기도문을 일자형 기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제1번부터 제6번 혹은 7번까지로 되어 있는 일자형의 기도가 아니라 원형으로 되어 있는 목걸리 모양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면의 마지막 간구인 다만 악에서 구하 구하시옵소서라는 간구는 >> 첫 번째 간구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옵라는 간구로 환원하는 것입니다.
(31:05) 다시 말해서 우리가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다가 환난과 시련을 피할 수 없이 당하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주님의 보호를 받아 정결하게 되지 못하고 시험을 당하여 악에 떨어지게 되면 첫 번째 간구는 그 효력을 잃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섬기다가 시험에 들어와서 악에 빠지게 된다면 그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이름의 영광에 배치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 네. >> 다음

IV. 시험과 악으로 이끌림.

인간은 결코 중립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마음은 잠시도 쉬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선과 악 사이에서 요동치고 참으로 아름다운 것과 거짓되게 아름다운 것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32:00) 이러한 기로에서 우리의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마음 안에서 확정됩니다. 시험은 단지 외적으로만 오는 환난이나 핍박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 속에 적용하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만나는 것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피할 수 없는 것이지만 악에 빠지는 것은 피할 수 있고 피해야 합니다.이 강도는 바로 이렇게 시험에서 악으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혹은 이미 악에 빠졌을 경우에는 구원하시도록 하나님께 올리는 간절한 탄원입니다.

A 시험은 내면에 작용함.

시험은 먼저 인간의 내면에 감공합니다. 객관적으로 시험은 복음 전파를 위해 피할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 환난과 시련을 의미하지만 주관적으로 시험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에 부력합하게 된 모든 상태를 가르킵니다.
(32:49) 그러면 어떤 분들은 아마 이렇게 질문하고 싶을 것입니다. 만일 시험이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에 부족합한 모든 상태를 가르킨다면 도대체 우리 중 시험에 들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죄의 유혹을 받고 세상의 시련 속에서 시험에 들기 때문에 아마도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에 적합한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소수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끊임없이 도달해야 할 표준이라는 데는 의를 제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객관적인 의미에서 선은 많은 사람이 그것을 버린다고 해서 악이 될 수가 없을 뿐도 악은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행한다고 해서 선로 정답을 수 없습니다.
(33:44) 여러분은 과거에 이런 경험을 해보셨을 것입니다. 상자처럼 방황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이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대신 못 바뀌신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는 그 은혜에 감격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의 사로잡힌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 이해에는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마음의 상태를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생이 변한 끝에서 돌이켜서는 강력한 회개는 급히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이고 매일 말씀을 깨달으며 조금씩 은혜를 받으며 변화되어 가는 것은 미세 조정으로서 창조 목적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34:31) 마치 오락을 하는 사람들처럼 신앙생활을 하는 것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합니다. 요즘은 처음으로 편리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작은 차이도 웬만하면 내비게이션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운전할 때 우리가 내비게이션이 가르쳐 준 길로만 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도로를 달리다가도 경로를 벗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내비게이션은 경로를 이탈하였다고 음성을 알려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음성의 길을 기울이며 다시 바른 길로 안내를 받을 준비를 합니다. 신앙에서도 이와 같은 이와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시험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모든 상태라고 정리를 내리게 되면 정말 수 없습니다.
(35:15) 어떤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가르쳐 순정 대장이라고 하던데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렇게 담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이렇게 규정하고 보면 남들이 우리의 이름을 높이고 박혀치는 상태에서도 사실 우리는 제발 시험에들지 말게 해 달라고 악에서 우리를 건져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할 겸비한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시험은 먼저 어 인간의 내면에 작용합니다. 즉 우리의 영혼과 마음 안에 영향을 미칩니다. 우리가 은혜 아래 있을 때에는 정서가 부패의 위협을 받아도 마음을 다스려 이기며 의지가 욕망을 따라서 충동적이 되려고 해도 지성으로부터 말씀을 북쪽시킵니다.
(35:55) 그러나 시험에 대해서 마음이 은행의 거룩함에서 미끄러지게 되면 반대 현상이 일어납니다. 생각은 혼란스러워지고 정선은 거룩함에서 멀어져 부패하게 되고 의지는 욕망의 충동을 따르며 지성의 통제를 벗어나 명령합니다. 지성아 나는이 일을 하고 싶으니 나의이 행동을 합시켜 나오라고 말입니다. 교회하여 시험의 상태에서 악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B. 시험과 유혹이 따로 없음.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면 우리는 시험과 유혹이 처음부터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험에는 처음부터 창조적인 시험과 파괴적인 시험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창조적인 시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려고 주시는 시험이고 파괴적인 시험은 처음부터 마귀가 우리를 저주하려고 가하는 시험이라는 것입니다.
(36:50) 그래서 전자의 시험을 이겨내면 복이 있지만 후자는 단지 손을 없을 뿐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창조적인 시험에 대표적인 이해로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들은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합니다. 창세기 22장 2절. 얼핏 보기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론을 미리 내놓고 답을 찾는 결과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는 하나님의 명령 순종이 않았다면 그 시험이 과연 하나님께로부터 온 시험이며 창조적인 시험이라고 불려주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엄밀란 의미에서 이삭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아브라함의 부에게 자식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다시 되돌려 달라고 하실 때 그것이 시험이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아브라함의 이기적인 욕망이 가져온 결과였을 것입니다.
(37:53) 그 자체가 하나님의 축복일 수 없습니다. 또한 시험에 관한 이론적인 해석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파괴적인 시험의 대표적인 예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요했던 일을 듭니다. 창세기 39장 12절. 그렇다면 그 시험은 마귀로부터 왔고 보디발의 아내는 무영주불이었습니까? 물론 그 여인의 악한 욕망되 있는 마귀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마귀가 요셉을 시험한 것이 아니라 바람난 여인이 청년 요셉을 유혹한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경우라도 기계적으로 도둑을 판단할 수 없습니다. 100번 양보에서 보디발 아내가 요셉을 유혹한 것이 마귀로부터 온 시험이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38:44) 그 시험을 이겼던 이겼더니 요셉은 복받길 거녁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감옥에 갇치게 갇치지 않았더라면 구무초리가 될 수 없었을 때니 >> 결국 파괴적인 시험이 요셉을 국류초로 만든 셈이 되었을까요? 어떤 의미에서 바람는 부녀가 요셉을 유혹할 일이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믿음으로 불결한 유혹 가운데서도 자신을 전개하고 악에 빠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그 시험을 통해서 애굽의 총리로서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 볼 때 이혼적 시험논는 너무 자의적인 해석입니다.처음 처음부터 어떤 시험이 상조를 가져오거나 파괴를 가져오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39:43) 우리에게 시험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 그러나 우리가 어떠한 신앙으로 시험에 직면하는가에 따라 선으로 이끌 수도 있고 악으로 이끌 수도 있습니다. >> 그러니 우리는 더욱더 시험에 들지 않고 악에서 구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주기도문의 가르쳐 가르침을 받고 있는 제자들의 배와 그물 고양과 친척을 버리고 그분을 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탁월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의 뜻과 그 나라를 위하여 살려고 할 때도이 세상이 너무나 악하기 때문에 과난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환난이요 고난입니까?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위해 당하는 환난과 시련이었기 때문에 저절로 선에 이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또 얼마나 놀랐습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살다가
(40:48) 늘을 당하고 시험을 만난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특별히 지켜 주시지 않으면 시험에 떨어져 악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서 직분을 맡고 섬기는 길을 두려워하는 지체들 가운데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모든 시간과 물질을 들이면서 개척 교회를 열렬히 섬겼는데 어느 때에 시험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소위 성김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를 옮겨 예배를 드리면서도 다시 상처를 받을까 봐 두려워 아예 섬기지 않 어 섬김을 하지 않습니다. 혹시 그런 사람들이 있거든 오늘 주기도 앞에 어 앞에서 회개해야 합니다.
(41:37)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순수하게 주님을 섬겼을 뿐인데 시험을 만났다고 말합니다. 일방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틀린 것입니다.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해석이 잘못되었습니다. 시험의 때에 주기의 정신으로 기도하고 사랑으로 참았더라면 시험을 만나기는 했을지라도 악에 떨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악에 떨어졌고 영혼의 커다한 손해를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기 신앙 반상한 일은 커녕 목회자나 지체들 그리고 교회를 원망하는 마음을 품문채에 떠나버렸습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일반적인 피해자라고 생각하만 하고 악에 따른 줄 모릅니다.
(42:35) 바로 그것이 영혼의 족세가 되어 주기을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 이들은 하나님께 진정으로 회개하고 돌이켜야 합니다. 시험과 악의 관계는 당과 같은 예를 통해서 잘 드러납니다. 열애 전에 밀렸군 이야기를 다루는 다큐멘탈이 한편을 보았습니다. 보는 내내 답답하고 분하기도 하고 눈물이 났습니다. 밀력꾼들은 나무 입으로 잘 감춰서 덫을 넣고 짐승을 미끼로 깨어냅니다. 그러면 굶지린 산 짐승들이 냄새를 막고 찾아옵니다. 마침내 그 짐승이 먹 어 먹이를 물리는 순간 톱니처럼 생긴 덫이 탁 가고 튀어오르면서 발목을 낙채는 것입니다. 제가 본 것은 아주 작은 새끼 멧돼지가 덫에 걸리는 장면이었습니다.
(43:30) 덫은 새줄로 연결되어 나무에 메어져 있었습니다. 그 멧돼지가 얼마나 거기서 빠져나놓고 발치는지 세주를 묶어 놓은 나무의 껍질이 하얗게 드러났습니다. 새끼 멧돼지고 도망치려고 몸무리면 치면 칠수록 덫은 발목이 깊숙히 파고들면서 점점 피가 흐르게 만들었습니다. 결국 멧돼지는 상처를 입은 채 얼어 죽었는데 마주와 하를 보니 죽어가며 흘린 눈물까지도 얼어 있었습니다. 무을 덫에 받는 것이 시험이라면 덫에 지켜 피흘리고 굶지림 속에서 얼어 죽는 것은 시험의 결과인 악한 상태입니다. 이처럼 시험과 악이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되 악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의 각별한 보호를 강구하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44:35)

C. 은혜의 도우심이 필요함.

어 여기 여기에서 우리는 주기도문 전체에 흐리고 있는 중심 사상이 마지막 강구에도 되어 있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로 필요한 우리 인간의 위치 즉 절대적인 의존의 마음으로 살지 않으면 안 되는 우리들의 연약한 처지에 대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기도할 때 그 기도는 얼마나 장합니까? 하늘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부르짖을 때는 마치 왕국을 위한 어 용사가 된 기분일 것입니다.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해 달라고 하는 어 피어린 강구에는 마치 치열한 전쟁터에서 완전 무장을 하고 말을 달려나가는 힘 힘찬 기병대의 모습이 느껴질 것입니다.
(45:30) 그러나 주기도문의 마지막 간구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언제 어디서든지 넘어져서 길을 잃을 수 있고 잃어버릴 수 있고 어디에든지 부딪쳐 상처받을 수 있는 한 마리의 아주 어린 양일 뿐임을 알게 됩니다. 우리 죄악과 강팍함 주님께 고백하니 우리를 민망이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소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자녀들이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소명을 따라 충성스럽게 사는 모든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시험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죄로 가득한 가득찬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하나님의 영적 군사들이 어찌 전쟁을 만나지 않겠으며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한가하는 원수들의 도전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하나님보다 자기 의견을 고집하는
(46:34) 교만은 모든 시험에서 악을 미끄러지는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형통한 삶이 언제나 행복이 아닌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사람들은 주기도문 전편에 흐르는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 의존의 종신 안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믿는 것만큼 자신은 티끌 같은 존재일 뿐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고 불결한 자신은 하나님의 용서와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로서만 사는 존재임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V. 결론

주기도문의 마지막 간구를 대하며 우리는 다만 지극히 연약한 존재일 뿐임을 기억하여 기약하여야 합니다.
(47:30) 우리가 살아온 많은 날들 중 시험을 당하여 미끄러진 날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만약 그때 우리가이 광구를 간절히 올렸다면 혹시 미끄러졌어도 즉시 일어나 다시 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시험을 당했어도 앞에 엎드려 있게 마시고 나를 악에서 건져 달라고 간절히 빌었더라면 아마 우리 인생 그렇게 하지 않았을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졌을 것입니다. 우리가 시험 가운데 낭비한 수많은 날들은 오히려 왕국의 소명을 이루는데 사용되었을 것이고 방화하는 방화하던 수많은 인생의 시간들은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일에 받쳐졌을 것입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복음을 위해 살아가려고 하면 시련과 환난, 고난을 만납니다.
(48:34) 그러므로 우리가 무조건 이런 것들을 피하게 해 달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의 나라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경과는 어긋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히려 비록 시험을 만날지라도 소명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만 드러내고 주님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나태하여 시험 중에서 악으로 미끄러지려고 할 때마다 우리를 거기로부터 건져달라고 갈히 달려야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이 마지막 간구는 주님께서 이미 그렇게 간구하는 우리를 친히 도우실 것임을 보여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49:26)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가 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장 14절부터 15절. 이처럼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와 같이 시험을 당하신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시험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능히 도우시고 붙드실 줄을 믿으며 위로를 받습니다. 더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부활하사 주님의 보좌 우편에 계셔서 아버지를 대신하여 모든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미 시험 속에서 악에 빠지고 시험 속에서 미끄러져 허의했던 인생의 날 우리로 안타까움에 눈물 흘리게 할지도 모릅니다.
(50:20) 그러나 이제 우리 인생의 남은 날들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왕국의 소명을 따라 살 수 있기를 우리는 갈망해야 합니다. >> 아멘. >>
악에서 구하옵소서. 한 눈에 보는 13장
I. 들어가는 말
시험을 만났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지 않으면 반드시 악에 빠지게 된다.
II. 악이란 무엇인가?
이 간구에는 특별히 우리의 눈길를 끄는 악이라는 단어가 있다. 악이란 무엇일까?
A. 악의 의미.
구약에서 악은 사단.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알면서도 하나님의 율법을 거스리는 상태. 인간이나 영적 피조물이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을 유반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도덕적인 판단의 결과 등을 가르킨다. 신약에서 악은 마귀, 악하고 비열한 사람에 대한 묘사, 악한 것이나 나쁜 것, 육처의 연약함 등을 가르킨다.
성경 전체의 명락에서 악이란 하나님의 판단 앞에 바람직하지 못하였다고 판정을 받은 상태이다.
B.악의 판단 기준.
하나님께서는이 세계를 선하게 창조하심으로써 악이 당신의 뜻이 아님을 보여주셨다.
1. 선악의 기준
악은 선과 대조를 이으로써 정체가 파악된다. 악과 그 결과로서의 고통을 아는 사람들은 선과 그 결과로서의 행복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알 수 있다. A 선의 결핍으로서의 악. 인간이 행하시는 선은 하나님의 은혜의 작용의 원인이지만 악은 인간의 의지에 하나님의 은혜가 결핍된 상태가 원인이라는 설명이다.
B. 실체 없는 악의 힘.
현대 철학자들은 이러한 논리를 반박한다. 만약 악이 실체가 아니라면 어떻게 현실적으로 이렇게 강한 힘을 발휘하여 인간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가?
이러한 현실에서 절대적인 진리와 선악 판단의 기준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자기를 기준으로 선악을 말한다.
문제는 선악 판단의 기준이 늘 변하는 사람인가 불변하시는 하나님이신가에 있다.
2. 성경의 기준: 계명
성경이 말하는 선악 판단의 기준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과 관련 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세계는 신앙과 성경 계시의 정보망 위해서만 올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영원한 죄와 무한한 사랑 속에서 세계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교통하게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충만한 완전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신앙은 인간의 목적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그분을 경외하고 서로 사랑하고 모든 만물 곧 문명, 학문, 지식 등을 가꿈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의 유대함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서술한다.
모든 사람이 같은 정도로 하나님과이 세계와의 관계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창조의 목적대로 살 수 있게 믿어야 할 규칙과 살아야 할 교훈들로 이루어진 계명을 주셨다. 계명의 뿌리는 하나님의 의지 곧 창조의 목적이다. 악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거나 순종하게 모자라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거스리는 것이다.
3. 죄와 악.
죄와 악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죄는 인간 영혼 안에 있는 경향성이며 마음 안에서는 하나님의 하나님을 대적하는 성향으로 작용한다. 악은 그 마음의 성향이 나타나서 죄가 실행된 상태이다.
선은 창조 목적과 구원 계획대로 사는 것이고 악은 거기서 벗어난 모든 것이다.
선거와 악은 존재와 존재의 질서와도 관계가 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질서를 뒤집어 버림으로써 인간의 모든 비교과 고통이 시작되었다.
IV. 시험과 악의 악으로 이끌림
살아 있는 동안 인간의 마음은 끊임없이 선과 악 사이에서 요동치고 참 아름다움과 거짓 아름다움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이때 삶의 방향은 마음 안에서 확정된다.
A 시험은 내면의 작용함.
시험은 객관적으로는 복음 전파를 위해 피할 수 없이 마주쳐야 하는 환난과 시련이며 주관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온전히 순종하게 부적한 모든 상태를 가르킨다. 죄와 유혹
죄의 유혹과 세상의 시련 속에서 시험에 들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순종하기에 적합한 상태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소수이다. 그러나 그것이 보달해야 할 표준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주관적인 시험은 먼저 인간의 내면 즉 영혼과 마음 안에 영향을 미친다. 시험에 들고 마음이 마음이 은혜의 거룩함에서 미끄러지면 생각은 혼란스러워지고 정서는 거룩함에서 멀어지어 부패하며 의지는 욕망의 충동에 따라 지성의 통제를 벗어난다.
B. 시험과 유혹이 따로 없음.
시험과 유혹은 처음부터 따로 있지 않다. 우리에게 시험은 객관적이며 여기에 어떤 신앙으로 직면하는가에 따라 선이나 선이나 악으로 이끌릴 수 있다.
C 은혜의 도우심이 필요함.
주기도 전체 흐르는 중심 사상이 마지막 간구에도 배워 있다. 바로 하나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간의 위치에 대한 생각이다.
V 결론.
주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분이지만 신이 우리와 같이 시험을 당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이 시험 가운데 있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고 붙드실 줄 믿으며 위로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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