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시는 분
Notes
Transcript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시는 분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시는 분
본문: 출애굽기 15:22-27 | 분량: 20분
1. 산 너머 산, 앞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본성 (오늘날 우리의 문제)
1. 산 너머 산, 앞에서 드러나는 우리의 본성 (오늘날 우리의 문제)
(산 사진) 여러분이 만약 죽을 힘을 다해 산 하나를 넘었는데, 그 다음에 또 산이 나타난다면 어떤 마음이 들겠습니까? 예를들어, 시험이 됐든, 입시가 됐든, 면접이 됐든, 관계의 갈등이 됐든. "아, 드디어 끝났다. 이제 좀 살겠다." 그렇게 안도의 한숨을 쉬는 순간—바로 그때, 더 큰 문제가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취업하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취업이 진짜 시작입니다." 수능 끝나면 자유로울 줄 알았는데, 대학 가니까 더 복잡해집니다. 큰 산을 하나 넘었는데, 산 너머에 더 큰 산이 있는 기분이 들 때—여러분 마음에 다양한 감정이 올라오겠지만, 결국 그 모든 감정의 끝에는 짜증, 불평, 좌절, 그리고 누군가를 향한 원망이 자리잡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정말 산너머 산 앞에서 놓여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방금 인생 최고의 기적을 경험했어요. 홍해가 갈라졌고, 그 길로 걸어서 노예 생활을 탈출했습니다. 미리암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찬양했어요. "여호와는 높고 영화로우심이라!"
그런데 그 찬양의 메아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정확히 삼일 만에, 물이 떨어집니다(목마른 백성 사진). 삼일 동안 약 200만 명이 광야를 걸었어요. 입술은 갈라지고, 아이들은 울고, 가축들은 쓰러지기 직전입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물 이다!"(마라 사진) 하고 누가 외칩니다. 모두가 달려갔어요. 그런데 한 모금 마셔보고는—얼굴이 일그러집니다. 물에 쓴 맛이 강하게 났기 때문입니다. 식수로 쓸 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23절,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이동 경로 사진) -> 다시 [소 주제 뛰움]
그곳 이름이 '마라'였는데, 히브리어로 '쓰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어떻게 했나요? 24절.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여기서 '원망하다'는 히브리어로 '룬(לוּן)'인데, 단순한 불평이 아니라 공개적인 반역을 의미합니다. 마치 시위하듯 모세를 향해 "당신 책임져!" 소리 치는 겁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3일 만에 마음이 180도 바뀌어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했을까요?
그들이 출애굽한 것은 사실입니다. 몸은 애굽을 나왔어요. 그런데 마음은 아직 애굽에 있었습니다. 애굽에서 그들은 비참했지만, 눈에 보이는 것—매일의 빵, 나일강 물—에 의지해서 살았어요. 그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 서자, 본능적으로 또 보이는 것을 찾았습니다.
마라가 무서운 건, 물이 쓰기 때문이 아닙니다. 마라는 우리 안에 숨어 있던 우상을 폭로하고 있기 때문에 무서운 겁니다. 평소엔 모릅니다. 다 잘 굴러갈 때는 내가 정말로 무엇을 의지하는지 몰라요. 그런데 위기가 오면—드러납니다.
우리 안에는 다양한 우상들이 있어요. 안락이라는 우상, 통제라는 우상, 인정이라는 우상. 평소엔 숨어 있다가, 마라 같은 위기가 오면 그것들이 흔들리면서—우리는 분노하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컨퍼런스에서 드러난 우상 간단히 소개)
시험 점수가 흔들릴 때, 취업이 흔들릴 때, 직장 평가가 흔들릴 때, 자녀가 흔들릴 때, 건강이 흔들릴 때—다 그만 두고 싶고, 포기하고 싶고, 내 삶을 마비 시켜버린다면, 그게 바로 여러분의 우상일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하나님 노릇을 하고 있던 것들이 정체를 드러내는 거예요.
그리고 가장 절망적인 사실이 뭔지 아세요? 우리 힘으로는 이걸 못 깨뜨린다는 겁니다. 머리로는 압니다. "하나님만 의지해야지." 그런데 또 위기가 오면, 본능적으로 분노와 불평과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이게 마라의 쓴 물 사건이 드러내는 우리의 진짜 모습입니다.
우리에게는—외부에서 오는 도움이 필요합니다.
2. 본문 해석에서 드러나는 복음 (성경 해석과 복음)
2. 본문 해석에서 드러나는 복음 (성경 해석과 복음)
자,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25절.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 나무가 무슨 특별한 화학 성분이 있었던 게 아닙니다. 본문은 그 나무의 종류조차 말하지 않아요. 왜? 그게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중요한 건 이거예요. 하나님이 가리키신 그 나무. 하나님이 친히 지정하신 그 방편. 이것이 쓴 물을 단 물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6절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한 이름으로 계시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히브리어로 "여호와 라파(יְהוָה רֹפְאֶךָ)". 성경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치료자'로 계시하신 곳이 바로, 마라입니다. 쓴 물 앞에서, 절망 앞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치료자'로 소개하셨어요.
그리고 27절.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마라를 통과한 다음에 엘림이 있었습니다.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시는 그 하나님을 경험해야, 비로소 샘과 종려나무가 있는 안식의 자리에 이릅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멈추면 안됩니다. 오늘 본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저와 여러분들 삶을 쓴물에서 단물처럼 바꿔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치시고 치료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어느 동산으로 가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 그리고 거기서 아버지께 이렇게 기도하셨어요.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이 잔. 어떤 잔이었을까요? 인류의 모든 죄, 모든 진노, 모든 저주가 담긴—마라의 물보다 만 배 더 쓴 잔이었습니다. 너무 써서, 너무 아파서, 너무 고통스러워서, 예수님이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실 정도였습니다.
자, 이제 두 장면을 비교해보세요. 마라에서 이스라엘은 쓴 물 앞에서 원망했습니다. "왜 우리를 여기로 데려왔느냐!" 하나님께 등을 돌렸어요. 그런데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그것보다 만 배 더 쓴 잔 앞에서—순종하셨습니다.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리고 다음 날, 예수님은 한 나무 위에 달리셨습니다. 갈보리의 십자가. 그 나무 위에서 인류의 모든 쓴맛 같은, 모든 절망을, 모든 저주를—자기 몸에 받으셨습니다. 여러분, 보이십니까? 마라에서는 한 나무가 물에 던져져서, 쓴 물이 단 물이 되었습니다.갈보리에서는 한 분이 나무 위에 던져지셔서, 우리 인생이 단 것이 되었습니다. 마라의 나무는—갈보리 나무의 그림자였습니다.
세상 종교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의 쓴 인생을 단 인생으로 바꾸려면, 네가 더 노력해라. 네가 더 착해져라. 네가 더 기도해라. 그러면 하나님이 너의 삶을 달게 해주실 거야." 그런데 복음은 정반대로 말합니다. "네가 단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내가 먼저 너 대신 쓴 잔을 마셨다."
우리 힘으로는 쓴 물을 단 물로 못 바꿉니다. 우리 안의 우상은 우리가 못 깨뜨려요.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한 나무를 가리키신 것처럼—이번에는 친히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우리가 마셔야 할 그 쓴 잔을, 예수님이 대신 다 마셔주신 거예요.
그리고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마라의 쓴 물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단 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을 믿어도 인생의 쓴 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시험은 여전히 어렵고, 관계는 여전히 깨지고, 병은 여전히 찾아오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도 여전히 옵니다. 그런데—그 쓴 것의 맛이 바뀝니다. 그 쓴 것의 의미가 바뀝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예화)
1967년 미국 메릴랜드주의 어느 여름날, 열일곱 살 소녀가 친구들과 수영을 하러 갑니다. 이름은 조니 에릭슨. 활기차고 운동 좋아하던 평범한 고등학생이었어요. 그날도 평소처럼 다이빙을 했습니다. 그런데—물이 생각보다 얕았어요. 머리가 바닥에 부딪혔고, 그 순간 그녀는 어깨 아래로 모든 감각을 잃었습니다. 사지마비.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거예요.
여러분, 상상이 되십니까? 열일곱 살이에요. 그 인생에 마라의 쓴 물 같은 고통이 찾아 온 것입니다. 병원 침대에 누워서 조니가 처음 한 말이 뭔지 아세요? 친구에게 이렇게 부탁했습니다. "제발 약을 먹여줘. 면도칼을 가져와줘. 이렇게 사느니 죽고 싶어." 친구는 거절했죠. 그녀는 분노했어요. 하나님을 향해서, 자기 몸을 향해서, 세상을 향해서. 2년 동안 우울과 분노 속에서 몸부림쳤습니다. 그녀의 마라는—정말 썼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가 그녀에게 성경 한 구절을 들려줍니다. 이사야 53장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 순간 조니가 무엇을 봤는지 아세요? 십자가에 못 박혀, 사지를 움직일 수 없으셨던 예수님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깨달았어요. "아, 나의 이 마비된 몸을—예수님이 먼저 경험하셨구나. 십자가 나무 위에서 사지가 못 박혀 움직일 수 없으셨던 그분이, 지금 침대에 누운 나의 이 마음을 정확히 아시는구나."
그날부터 조니의 삶의 쓴 물이 단 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녀의 마비는 사라지지 않았어요. 지금도, 60년 가까이 그녀는 휠체어에 앉아 있습니다. 손은 여전히 못 씁니다. 그런데 그녀는 입에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그 그림이 전 세계로 팔려나갔습니다. 책을 40권 넘게 썼습니다. "조니와 친구들"이라는 사역 단체를 세워서, 전 세계 장애인들에게 휠체어를 보내고 복음을 전했어요. 지금까지 보낸 휠체어가 13만 대가 넘습니다.
2010년에는 4기 암 진단까지 받았습니다. 또 다른 마라가 찾아온 거예요. 그런데 그녀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제 휠체어를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이 휠체어가 없었다면, 저는 예수님을 이렇게 깊이 알지 못했을 테니까요."
여러분, 마라의 쓴물이 단물로 변화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이해가 되시나요? 조니의 쓴 물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단 물로 바뀌었습니다. 왜요? 그 휠체어 옆에, 갈보리 나무 위에서 먼저 사지가 묶이셨던 한 분이 함께 앉아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라의 나무가 우리에게 가리키는 분,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말씀을 같이 읽어봅시다.
"한 나무 위에 던져진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쓴맛을 단맛으로 바꾸십니다."
3. 그러므로, 마라 앞에 선 우리가 할 일 (적용)
3. 그러므로, 마라 앞에 선 우리가 할 일 (적용)
자, 그렇다면 마라 앞에 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살다 보면 정말 쓴 일이 있어요. 친구가 따돌릴 때, 시험을 망쳤을 때, 부모님이 다투실 때. 그럴 때 이렇게 기도해보세요. "예수님, 저 대신 쓴 잔 마셔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쓴 일도 단 일로 바꿔주세요."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듯이 예수님은 여러분의 도움을 구하는 기도를 꼭 들으십니다.
청소년·청년 여러분에게. 여러분 세대가 정말 힘든 시대라는거 압니다. 그런데 그 쓴 물 앞에서, 포기하지 마세요. 싸워보지도 않고 숨지 마세요. 은둔 생활로 도망가지 마세요. 그 쓴 물 앞에서, 갈보리 나무 위에서 우리 대신 쓴 잔을 마신 예수님을 바라보세요.
열일곱 살 조니의 휠체어 옆에 함께 앉아 계셨던 그분이, 지금 여러분의 마라 한가운데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쓰디쓴 환경과 상황을 바꾸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지금도 우리를 치료하실 수 있는 분이세요.
성도 여러분, 지금까지 수십년 살아오시면서 얼마나 많은 마라를 통과하셨습니까. 어쩌면 지금도 마라 한가운데 계실 수 있습니다. 기억하세요. 마라를 통과해야 엘림이 있습니다. 끝까지 엘림을 바라보며 지금의 어려움을 인내하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엘림이 여러분들에게 찾아올 것입니다.
오늘 주시는 말씀을 한 번 따라 할까요?
"한 나무 위에 던져진 예수님이, 우리 인생의 쓴맛을 단맛으로 바꾸십니다."
여러분의 인생에 마라가 있습니까? 그 쓴 물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이 가리키시는 그 한 분—갈보리 나무 위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봅시다. 그분이 여러분의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실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