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과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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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영광

베드로전서 4:12–14 “12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시험하려고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무슨 이상한 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 13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은 또한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14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전서 5:6–11 “6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로 자기를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7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9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10 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11 권세가 영원히 하나님께 있기를 빕니다. 아멘.”
한주 평안하셨습니까. 지난주 공주를 다녀와서 금요일까지 약을 먹어야 했습니다. 투어를 시작하기 직전 양쪽 장딴지에 쥐가 나서 걸을 수 없을 정도였는데 억지로 참고 걸었더니 근육에 무리가 갔나봐요. 월요일부터 장딴지가 붓고 핏줄과 근육에 통증이 너무 심해 고난가운데 살았습니다. 장딴지 하나가 아프니 온종일 의욕이 사라지고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대단하게 어려운 일이있었던 것도 아닌데 한주간 아픈 시간이 왜 이렇지, 괜찮아 질까, 언제 나아지지 염려와 불평들이 가득있었습니다. 살면서 생기는 수많은 불안과 염려가 나에게 진정 무엇일까? 질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제임스 볼드윈의 “세상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책에 이런 물음을 던집니다. “거대한 장벽 앞에서 냉소에 빠지지 않고 자기 정체성을 지켜 낼 언어가 우리게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겪는 고난이 도대체 무엇인지 정직하게 마주보는 언어가 필요합니다. 아우슈비츠를 살아서 나온 빅터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시련은 그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더 이상 시련이 아니다." 고난이라고 여겼던 것이 의미를 알게 되면 더이상 고난이 아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사도베드로가 소아시아의 흩어진 성도들과 우리에게 이 의미를 알려주는 말씀이 되겠습니다.
첫째, 불시험은 이상한 재앙이 아니라 거룩한 제련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편지를 받아든 1세기 소아시아 성도들은 로마제국의 한 복판에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1세기 성도들은 대단한 죽음앞에 놓여있는 고난이 아니라 일상에서 당하는 고난이 훨씬 컸습니다. 로마의 다신교 의식에 참여하 않기 때문에 받는 배제와 비방, 황제에게 숭배하고 머리를 숙이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차별,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는 이웃들로부터 버림받아야 하는 일들이었습니다.
케빈로우의 “이 놀랍고도 새로운 초기 그리스도인들”에서 이 점을 또렷이 짚어 줍니다. 초기 신자들은 로마 세계의 질서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전혀 다른 삶의 결을 택했기에, 세상에 경이와 충격을 던지는 동시에 미움받는 이방인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베드로는 이 고난을 한단어로 부릅니다. 헬라어로 퓌로시스(πύρωσις), 곧 금과 은을 정련할 때 쓰는 '불 시험'입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한 제자가 랍비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하나님은 왜 선한 사람에게 이토록 혹독한 고난을 주십니까?" 랍비는 말없이 제자를 대장간으로 데려갔습니다. 대장장이가 쇳덩이를 시뻘건 불 속에 넣었다가 꺼내어 망치로 두들기고, 다시 불에 집어넣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게 한 뒤 랍비가 입을 열었습니다. "보아라. 대장장이는 아무 쇠나 불에 넣지 않는다. 쓸모없는 고철은 마당에 그냥 내버려 두지. 좋은 연장을 만들 강철일수록 더 뜨거운 불 속에 넣고 더 세게 두들기는 법이란다. 하나님도 그러시다. 당신께서 귀하게 쓰실 백성일수록 더 깊은 불 시험을 허락하신다."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고난을 세상과의 구별됨에서 오는 필연”이라고 말합니다. 세상과 다른 길, 복음의 가치에 따라 살아가려 할 때 찾아오는 외면과 소외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영혼의 불순물을 걷어 내고, 우리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드러내시는 거룩한 손길입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그 고난은 잘못된 일 ,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직접 다듬으시는 제련의 한복판입니다.
둘째, 고난의 자리는 그리스도와 일치되는 자리입니다.
베드로전서 4:13–14 “13 그만큼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니, 기뻐하십시오. 그러면 그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여러분은 또한 기뻐 뛰며 즐거워하게 될 것입니다. 14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당하면 복이 있습니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주 이렇게 생각합니다. 고난은 지금 여기서 당하는 일이고, 영광은 죽어서 저편에서 받는 일이라고. 그런데 복음은 이 둘을 갈라놓지 않습니다. 고난과 영광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움직입니다.
13절에 나오는 '참여하다'의 헬라어는 코이노네이테(κοινωνεῖτε)입니다. 단순히 곁에서 거든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운명에 내 인생이 깊이 엮여 들어간다는 말, 한 호흡 한 호흡이 그분과 연결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7:1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고 말씀하셨다. “아버지, 때가 왔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을 영광되게 하셔서,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께 십자가는 실패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주권이 가장 환하게 빛나는 자리, 곧 영광의 정점이었습니다.
더글라스 하링크는 『칭의 대신 정의의 시선으로 로마서 읽기』에서 복음을 개인의 내면적 위로나 사후의 안식으로 좁혀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복음은 세상을 다시 빚으시는 하나님의 정의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부당한 구조와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하나님의 정의 편에 설 때,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방을 듣게 될 때, 그 자리 위에 헬라어로 토 테스 독세스 프뉴마(τὸ τῆς δόξης πνεῦμα), 곧 '영광의 영, 하나님의 영'이 머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존재이기에 세상의 가치와 부딪히기 마련이고, 바로 그 부딪힘의 자리에서 하늘의 가장 깊은 위로를 만난다는 것이지요.
성도의 고난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표지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걷고 있다는, 영광의 분명한 표지입니다.
셋째, 염려의 주권을 내려놓고 믿음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불 시험 같은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서야 합니까? 베드로는 우리 내면의 에너지를 어디로 흘려보낼지 알려 줍니다.
베드로전서 5:6–7 “6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능력의 손 아래로 자기를 낮추십시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이실 것입니다. 7 여러분의 걱정을 모두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돌보고 계십니다.”
여기서 '자’기를 낮추다”의 헬라어 타페이노테테(ταπεινώθητε)는 수동의 결이 강한 단어입니다. 내 힘으로 모든 걸 쥐고 흔들려는 손아귀를 펴는 것, 하나님의 주권의 손길 아래로 내 자신을 가만히 내려놓는 결단입니다. 하나님의 결정, 하나님의 처분에 다 맡기는 것입니다.
이어서 베드로는 모든 염려를 주님께 '맡기라'고 합니다. 원어 에피립산테스(ἐπιρίψαντες)는 어깨에 짊어진 불안의 보따리를 하나님께 던져 버린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조용히 내려놓는 정도가 아니라, 시원하게 던져 버리는 행동입니다.
이솝우화에 '수레 탄 나그네'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나그네가 무거운 짐을 지고 흙길을 헐떡거리며 걷고 있었습니다. 마침 지나가던 친절한 수레꾼이 그를 가엾이 여겨 뒷자리에 태워 주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가던 수레꾼이 뒤를 돌아보니 나그네가 여전히 그 무거운 짐을 등에 진 채 끙끙거리고 있는 게 아닙니까. "아니, 수레에 타셨으면 짐을 바닥에 내려놓으시지 왜 그러고 계세요?" 나그네가 송구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수레에 태워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어떻게 짐까지 수레에 얹어 부담을 더하겠습니까?"
우리 신앙이 이 나그네 같지는 않습니까. 구원은 하나님께서 베푸셨다 고백하면서도, 정작 내일의 살림과 자녀의 진로와 건강은 여전히 내 등에 얹어 두고 혼자 끙끙거립니다. 헬무트 틸리케는 염려를 “영적 질병”이라고 부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스스로 자기 신이 되려 할 때 시작되는 병이라고요.
베드로는 이어서 강하게 경고합니다.
베드로전서 5:8–9 “8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악마가, 우는 사자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닙니다. 9 믿음에 굳게 서서, 악마를 맞서 싸우십시오. 여러분도 아는 대로, 세상에 있는 여러분의 형제자매들도 다 같은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우는 사자가 노리는 것은 우리의 통장계좌나 주식이 아닙니다. 고난을 빌미로 우리 마음에 스며든 염려,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하나님을 향한 신실함을 끊어 놓는 것이 마귀의 노림수입니다.
9절의 '굳게서다’ (스테레오이, στερεοί)는 본래 군대가 대열을 흩뜨리지 않고 자리를 지킨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염려때문에 있어야 될 자리를 떠나지 않는것, 해야 될 것들을 하지 않는 것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대열을 지켜라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 삶의 기초를 다시 세우십니다.
베드로전서 5:10–11 “10 모든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불러들이신 분께서, 잠시동안 고난을 받은 여러분을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게 세워 주시고, 강하게 하시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11 권세가 영원히 하나님께 있기를 빕니다. 아멘.”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를 무너뜨리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고난이라는 용광로를 통과한 성도에게 네 가지 손길을 동시에 베푸십니다.
먼저, 온전하게 하십니다. 헬라어 카타르티사이(καταρτίσαι)는 부러진 뼈를 제자리에 맞추고, 찢어진 어부의 그물을 깁는 모습을 담은 단어입니다. 어긋난 정체성을 다시 맞추신다는 뜻입니다.
다음으로, 굳세게 하십니다(스테릭사이, στηρίξαι). 흔들리는 마음의 중심을 단단히 고정하십니다.
또한, 강하게 하십니다(스테노사이, σθενώσαι). 거친 파도를 헤쳐 갈 영적 근력을 부어 주십니다.
끝으로,기초를 튼튼하게 하십니다(테멜리오사이, θεμελιώσαι). 흔들리지 않는 바위 위에 우리 삶과 교회의 기초를 다시 놓아 주십니다.
사도행전 1:14 “14 이들은 모두,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동생들과 함께 한 마음으로 기도에 힘썼다.”
예수님이 떠나신 후에 온갖 박해의 불안과 염려가 찾아오는 그때에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모였습니다. 마음을 모아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 작은 다락방이 세상을 뒤짚는 성령운동의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어려울수록 우리는 더 결속이 되어져야 세상의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오는 불시험,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를 온전하게하시고, 굳세게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든든히 세우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손길입니다.
한주간 주님의 손과 함께 신실하게 걸어가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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