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하나님이 2026 0520 엡2:1-10
Notes
Transcript
찬송가 407장 구주와 함께 나 죽었으니 / 419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7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당신의 작품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생의 모든 문장을 다시 쓰시는 두 마디
본문: 에베소서 2장 1-10절
새벽예배 / 일반 성도 / 약 20분
서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이른 새벽에 우리를 깨우셔서 주님의 말씀 앞에 세워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가장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한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그러나”라는 단어입니다. 주인공이 절벽 끝에 몰립니다.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때 작가는 한 줄을 적습니다. “그러나…” 그 두 글자 뒤에 무엇이 따라오느냐에 따라 이야기 전체가 뒤집어집니다.
우리 인생에도 그런 “그러나”의 순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떨어진 줄 알았던 시험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던 날이 있습니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관계가 다시 이어진 순간이 있습니다. 그 두 글자 앞에서 우리의 호흡이 한 번 멎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따라오는 한 문장이 우리의 하루를, 어쩌면 인생 전체를 다시 정해 줍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결코 우리 손으로 쓸 수 없었던 가장 큰 “그러나”가 적혀 있습니다. 그 “그러나”를 누가 써 주셨는지, 그분이 누구신지, 오늘 새벽에 함께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에베소서 2장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갇혀서 쓴 편지의 한 부분입니다. 사슬에 매인 사람이 쓴 편지인데, 정작 그 안에 흐르는 것은 한없는 자유와 찬송입니다. 에베소는 당대 최대의 우상의 도시였습니다. 그런 곳에 세워진 교회의 성도들에게, 바울은 1장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을 장엄하게 노래합니다. 그리고 2장에서, 그 거대한 계획이 너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어떻게 임했는지를 풀어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본문 1절부터 3절까지는 짙은 어둠입니다. 그런데 4절에서 갑자기 빛이 터집니다. 그 빛이 터지는 순간을 여는 단어가 바로 “그러나 하나님이”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는 세 개의 문장이 있습니다. 우리가 써내려간 문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다시 쓰신 문장이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살아낼 문장이 있습니다. 그 세 문장의 한가운데에 “그러나 하나님이”라는 두 마디가 박혀 있습니다. 그 두 마디가 우리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본론
1. 우리가 쓴 문장 — “죽었더니”
본문 1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2:1 “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바울은 우리의 옛 모습을 단 한 단어로 요약합니다. “죽었던 너희”라고 부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의학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숨은 쉬고 있습니다. 밥도 먹습니다. 출근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상태를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입니다. 거실에 있는 냉장고를 상상해 보십시오. 멀쩡히 서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코드를 뽑아 놓았습니다. 한여름에 그 안의 음식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외형은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안에서는 모든 것이 썩어 갑니다. 죽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외형은 멀쩡한데 안이 무너져 가는 상태입니다.
본문 2절과 3절을 보겠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옛 상태를 세 가지 지배로 묘사합니다. 엡 2:2-3
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첫째는 세상의 흐름입니다.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시대의 공기를 마시며 살아갑니다. “남들 다 그래”라는 한 마디 앞에서 우리는 자주 타협합니다.
둘째는 보이지 않는 어둠의 힘입니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가 부인하고 싶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영적 세력이 있습니다.
셋째는 가장 가까운 적입니다. 본문은 “육체의 욕심을 따라”라고 말합니다. 사실 가장 무서운 적은 바깥에 있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습니다. 내 마음이 원하는 그것이 종종 나를 망가뜨리는 가장 큰 원인이 됩니다.
이 세 가지 지배 아래서 우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본질상”이라는 말은 가끔 실수해서가 아니라 태생적으로 그러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는 결코 우리 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새벽에 한 가지를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고 해서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분주하다고 해서 다 의미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새벽에 우리는 문득 멈춰 서서 이렇게 묻게 됩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게 맞는가.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그 질문이 떠오를 때, 우리는 본문이 진단하는 죽음의 자리를 만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더 노력해서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습니까. 본문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답합니다. 죽은 자가 스스로를 살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다시 쓰신 문장 — “그러나 하나님이”
그리고 본문 4절이 이어집니다. 이 한 구절이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절 중 하나입니다.
에베소서 2:4–5 “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5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성도 여러분, 본문의 흐름이 여기서 깨집니다. 1절부터 3절까지 끝없이 이어질 것 같던 어둠이, 4절의 두 글자 앞에서 갑자기 멈춥니다. “그러나”입니다. 그리고 그 “그러나” 뒤에 오는 주어를 보십시오. “하나님이”입니다.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회개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정신 차려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노력해서가 아닙니다. 주어가 “하나님”이십니다. 이 한 가지를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본문은 4절에서 두 단어로 하나님을 묘사합니다. 하나는 “긍휼이 풍성하신”입니다. 또 하나는 “큰 사랑”입니다.
“풍성하다”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마치 어마어마한 부자가 돈을 쓰는 모습을 그립니다. 가난한 사람이 어렵게 베푸는 동전 한 닢이 아닙니다. 셀 수 없는 재산을 가진 분이 그 재산을 우리에게 부어 쏟으시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부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기에 충분하지 않아도 부어 주십니다.
누가복음 15장의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재산을 미리 받아서 모두 탕진하고 거지꼴로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그가 외운 회개의 대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아들이 그 대사를 끝까지 다 말하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의 “그러나”가 먼저 달려왔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아직 멀리 있을 때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서 안았습니다. 아들이 입을 떼기도 전에 입을 맞췄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본문 5절과 6절에는 한 단어가 세 번 반복됩니다. 바로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고 합니다. 함께 일으키셨다고 합니다.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그리스도와 별개로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얹혀서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좌에 얹혀서 앉았습니다. 그분이 가신 곳이 곧 우리의 자리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복음의 무게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보여 주는 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라는 독일 목사님이 있었습니다. 나치 시대에 히틀러에게 저항하다가 종전 직전에 처형당했습니다. 처형장으로 끌려가던 그날, 그는 함께 갇혀 있던 동료에게 한 마디를 남겼다고 합니다. “이것은 끝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시작입니다.” 죽음의 자리로 끌려가는 사람의 입에서 어떻게 “그러나”가 나올 수 있습니까. 그가 만난 분이 바로 “그러나 하나님이”의 그 하나님이셨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자리도 그분 안에서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에 일하셨던 “그러나 하나님이”의 자리를 오늘 새벽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막막했던 자리에서 길을 열어 주신 그 때가 있었습니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가정에 다시 화해를 주신 그 날이 있었습니다. 그 모든 자리에 새겨진 단어가 바로 “그러나 하나님이”입니다.
3. 우리가 살아낼 문장 — “걸작품으로”
이제 본문 8절부터 10절까지를 함께 보겠습니다.
에베소서 2:8–9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본문은 우리의 구원이 어디서 왔는지를 분명하게 못박습니다. 은혜로 받았다고 말합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았다고 말합니다.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받기만 하는 존재인가. 우리가 하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이 10절에 나옵니다.
에베소서 2:10 “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본문은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라고 선언합니다. “만드신 바”라는 표현이 단순한 물건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손수 빚으신 작품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실 이 단어는 영어로 “시(poem)”라는 단어의 뿌리가 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저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손수 쓰신 한 편의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는 책장에 꽂혀 있는 시가 아닙니다.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살아 움직이는 시입니다. 본문은 그 시의 내용을 한 마디로 알려 줍니다.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는 빚어진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행할 그 선한 일들을 미리 준비해 두셨습니다. 오늘 새벽에 깨어 일어난 우리 앞에는,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 두신 한 가지 한 가지의 선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한 가지를 분명히 기억합시다. 우리의 구원은 결승선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출발선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신 이유는 우리를 천국 명단에만 올려놓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를 당신의 작품으로 세상에 내보내시기 위해서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 안드레라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안드레는 위대한 설교자가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처럼 굵직한 인물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한 일은 단 하나였습니다. 동생 베드로를 예수님께 데리고 간 것이었습니다. 그 한 가지 작은 “선한 일”이 교회사 전체를 바꿔 놓았습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초대 교회를 이끈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베드로를 주님께 데려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형 안드레였습니다. 안드레의 시 한 줄이 베드로라는 한 사람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리고 그 베드로가 수많은 영혼을 살리는 시를 써 내려갔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선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 출근길에 건네는 인사 한 마디일 수 있습니다. 가족에게 보내는 따뜻한 격려 한 줄일 수 있습니다. 누군가를 위한 짧은 기도일 수 있습니다. 그 한 가지 한 가지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해 두신 시의 한 행입니다. 우리는 매일 그 한 행을 살아내는 사람들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들려준 세 개의 문장을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첫째, 우리가 쓴 문장은 “죽었더니”였습니다. 코드 뽑힌 냉장고처럼, 우리는 살아 있어도 죽음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거기서 빠져나올 수 없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다시 쓰신 문장은 “그러나 하나님이”였습니다.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긍휼의 부자이시기에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셋째, 우리가 살아낼 문장은 “걸작품으로”입니다. 우리는 결과가 아니라 시작입니다. 하나님이 손수 쓰신 시를 세상 한가운데서 한 줄 한 줄 살아내는 작품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새벽 하나님 앞에 한 가지를 결단합시다. 지금 내 인생의 어떤 자리에 “그러나 하나님이”를 써넣어야 합니까. 어떤 막힌 진로 위에, 어떤 깨진 관계 위에, 어떤 받지 못한 응답 위에, 그“그러나”를 다시 적어 주시는 분이 오늘도 살아 계심을 믿고 일어섭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결단합시다. 오늘 하루 하나님이 미리 예비해 두신 한 가지 선한 일을 분별하고, 그것을 행하기로 결심합시다. 그 한 줄이 모여 한 평생의 작품이 됩니다.
오늘 받은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