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냐 담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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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6:28-47:12
제목: 울타리냐 담이냐
주제: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동화되지 않은 ‘나그네’의 정체성을 지킬때, 세상을 살리고 축복하는 통로가 된다.
[서론]
제가 아내와 함께 독일에 살때의 일입니다.
그곳에는 70-80년대에 파독 광부와 간호사로 오셔서 정착하신 귀한 한국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그들의 자녀인 한인 2세들은 부모님의 철저한 교육 덕분에 한국말도 잘하고 정체성도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그곳에서 태어난 한인 3세, 4세들은 어떨까요?
외모는 분명 한국 사람인데, 스타일도, 생각하는 방식도 완전히 독일 사람이 되어 버렸습니다.
쓰는 언어도 당연히 독일어뿐입니다.
외국인처럼 한국말 몇마디 못합니다.
불과 3대만에 그 땅의 문화에 거의 동화되어 버린 것입니다.
반면, 이와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제가 영국에서 공부할때 학교가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에 있었습니다.
곳곳에 유대인 전용마트인 ‘코셔’가게가 있었습니다.
안식일인 토요일에는 검은 정장에 전통 모자를 쓴 유대인들을 쉽게 볼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영국에 정착한지 수백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언어를 쓰고, 유대교의 정체성을 고수합니다.
한번은 이웃에 사는 유대인을 전도해볼 겸 한국과자를 들고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친해질겸 웃으며 과자를 건넸지만 그들은 정중하게 거절했습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자신들이 율법이 허용한 음식이 아니면 먹을수 없다고 했습니다.
물론 이런 고집이 그 민족을 지금까지 유지시킨 것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쪽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거의 잊어 버렸습니다.
반대로 다른 한쪽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뚜렷한 경계를 세우며 살아갑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질문을 던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어때야 할까요?
우리는 세상에 완전히 섞여 버려야 할까요?
아니면 세상과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아야 할까요?
오늘 설교제목은 ‘울타리냐 담이냐’입니다.
울타리와 담은 비슷해 보이지만 전혀 다릅니다.
울타리는 경계를 세우지만 완전히 차단하지는 않습니다.
울타리는 안에 있는 것을 보호하면서도 밖과 소통합니다.
하지만 담은 다릅니다.
안과 밖을 나누고 완전히 단절시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어때야할까요?
우리는 세상 속에 살아가지만 세상과 완전히 동화되면 안됩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더럽고 위험한 곳으로만 여겨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서도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 속에서 세상과 구별된 백성으로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하는대로 다 합니다.
삶에 대한 태도가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자기꺼 손해 안보려고 이기적으로 행동하기도 합니다.
부동산, 주식, 코인 남들하는거 다합니다.
그러면서도 주일 아침에 예배당에 나와 앉아있는 것으로 겨우 체면치레만 하려합니다.
반대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담만 높이 세웁니다.
세상을 죄악시하면서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을 거룩이라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행사와 프로그램에는 온갖 열심을 다 냅니다.
하지만 정작 가정이나 직장, 학교에서 제대로된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아픔을 듣지 못하고,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카톡보면 거의 교회 사람들과의 대화뿐입니다.
그러다보니 세상은 교회를 보며 닫혀있고 배타적인 집단처럼 느끼게 됩니다.
오늘날 왜 세상이 교회를 비난하고 우려할까요?
우리가 그리스도인다운 겸손과 환대, 선함을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세상과 똑같이 동화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아에 세상과 소통할줄 모르는 꽉 막힌 집단으로 비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상에 속한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과 담을 쌓지는 않지만, 거룩한 울타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말씀은 당시 가장 크고 화려했던 대제국 이집트로 들어가는 야곱가족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과연 어떻게 이런 제국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갔을까요?
[본론1]
이제 우여곡절 끝에 요셉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버지 야곱을 만나게 됩니다.
20년 넘게 죽은줄로만 알았던 아들을 만난 야곱은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극적인 상봉을 통해 이 가족이 오랜세월 가슴에 품고 있던 아픔과 상처가 치유된 것입니다.
분명 형들의 시기와 악한 행위로 시작된 비극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의 그 악함조차 마침내 선으로 바꾸시는 놀라운 섭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 가족에게는 당장 해결해야할 현실적인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이제 어디서 어떻게 살것인가?”하는 문제입니다.
가나안 땅은 여전히 극심한 기근으로 인해 살아갈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양식이 풍부한 이집트에 살자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이 아닙니다.
그런데 46장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야곱에게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서 큰 민족을 이뤄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겨우 70명 남짓한 이 가족이 당대 최고 제국인 이집트 한복판에서 산다는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상이 가득한 나라입니다.
잘못하면 그들과 섞여 살다가 그들에게 동화되어 정체성을 잃어버릴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이고 하나님의 백성이고 다 날라가는 것입니다.
이때 요셉이 한가지 지혜로운 방법을 생각해냅니다.
이집트 왕 바로가 형들에게 생업이 뭐냐고 물으면 솔직하게 목축업을 한다고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놀라운 반전이 숨어 있습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목축업을 가증스럽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보면 이것은 숨겨야 할 약점입니다.
거대한 제국 이집트에서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능하면 주류 사회에 편입해야 합니다.
이집트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모습으로 자신을 포장해야 합니다.
불리한 배경은 숨기고, 그럴듯한 신분으로 자신을 꾸며야 합니다.
하지만 요셉은 반대로 합니다.
숨겨야 할 것같은 목축업을 오히려 드러냅니다.
왜일까요?
그들이 혐오하는 목축업을 해야만 그들과 자연스럽게 떨어질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과 섞이지 않고 이집트 변두리 고센땅에 머물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곱 가족에게 고센땅은 울타리입니다.
이집트 안에 살지만 이집트에 동화되지 않기 위한 곳입니다.
오히려 바로의 보호 아래 있으면서 풍요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이집트의 우상문화에 흡수되지는 않습니다.
요셉은 이집트 주류 사회의 안락함을 붙잡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꺼려하는 불편한 정체성을 선택합니다.
그 불편함을 통해 이스라엘이라는 거룩한 영적 울타리를 지켜낸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들이 가증하게 여기는 목축업이 오히려 야곱가족을 지켜준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그 변두리 고센땅을 인큐베이터 삼아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민족을 자라게하신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도 마치 거대한 이집트와 같습니다.
화려하고 풍요롭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성공의 길을 제시합니다.
더 빨리, 더 많이, 더 높이 올라가라고 말합니다.
오늘날 세상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는 무엇입니까?
효율, 속도, 무한경쟁, 그리고 극대화된 이윤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얼마나 돈을 버느냐, 얼마나 인정받느냐, 얼마나 영향력이 있느냐로 평가됩니다.
반면 세상 사람들이 가증하게 여기며 꺼려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손해보는 것, 느린 것, 낮아지는 것, 섬기는 것, 끝까지 정직을 지키는 것입니다.
세상은 이런 가치들을 미련하게 여깁니다.
‘그렇게 미련하게 정직하게 장사하면 금방 망한다’고
‘그렇게 맨날 양보하며 살면 바보취급 당한다’고
‘그렇게 원칙지키다가는 성공 못한다’고
‘그렇게 주일지키고, 예배 지키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뒤쳐진다’고
‘그냥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바로 이때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이 미련하게 여기는 그 가치들이 우리의 영혼을 지켜주는 울타리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정직, 주일성수, 말씀묵상, 기도가 우리의 울타리입니다.
손해보더라도 악한 길을 가지 않는 것이 우리의 울타리입니다.
물론 이런 가치관을 고집하며 살다보면 세상에서 불이익을 당할수도 있습니다.
주류에서 밀려나 소외될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일하다가 승진이 누락될수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벌수 있는 기회를 놓칠수도 있습니다.
남들처럼 편법을 쓰지 않아 손해를 볼수도 있습니다.
그러다가 세상 변두리로 밀려날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으로 보면 다릅니다.
그 자리가 고센땅입니다.
그 자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내 영혼이 보호받는 자리입니다.
그 자리가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의 사람으로 준비시키시는 인큐베이터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70여명이던 야곱가족들이 430년이 흐른후 200만명이 넘는 민족이 되어 이집트를 나옵니다.
그 숫자가 될때까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이집트 제국의 보호를 받은 것입니다.
거대한 제국 속에 있었지만 제국에 삼켜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본론2]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이 고센땅에 머물며 그 땅에 담을 쌓은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실 정체성을 지키는 제일 쉬운 방법은 세상과 담을 쌓는 것입니다.
세상과 소통하지 않고 성을 쌓아 우리끼리만 사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구별됨은 이런 폐쇄적인 게토주의가 아닙니다.
도피주의가 아닙니다.
그 증거가 오늘 말씀에 등장합니다.
야곱이 이집트 심장부인 궁궐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바로 왕 앞에 섭니다.
거기서 야곱은 바로를 두번이나 축복합니다.
야곱이 누구입니까?
기근을 피해 먹고 살기 위해 이집트로 내려온 늙은 이방인입니다.
군사력도 없습니다.
영토도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제국의 도움없이는 살수없는 초라한 피난민 노인에 불과합니다.
반면 바로 왕은 누구입니까?
엄청난 부과 권력, 군사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태양신의 아들로 추앙받던 지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의 황제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바로를 축복합니다.
세상의 상식을 뒤엎는 일입니다.
왜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야곱이 하나님의 언약의 계승자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처럼 하나님의 복을 세상에 흘려보내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바로 앞에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9절입니다.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 햇수가 백년하고도 삼십년입니다. 저의 조상들이 세상을 떠돌던 햇수에 비하면, 제가 누린 햇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새번역에는 ‘떠돌아다닌’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개역개정에는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인생을 험악한 인생을 산 나그네라고 고백합니다.
맞습니다.
야곱의 삶은 그의 고백대로 험악한 나그네의 세월이었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 도망쳤습니다.
외삼촌 라반에게 속았습니다.
자식들에게 속아 요셉이 죽은 줄 알고 오랜 세월 울며 지냈습니다.
어디에도 제대로 정착하지 못했습니다.
항상 무엇인가 움켜쥐려다가 결국 실패한 삶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바로왕을 축복할수 있는 이유가 뭘까요?
역설적이게도 그가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인생이 자기 손에 달린게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배웠습니다.
이 땅에 영원히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살아가는 나그네임을 배웠습니다.
그렇기에 세상 전부를 가진 황제 앞에서도 당당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를 축복할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나그네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이 세상 사람들과 삶의 뿌리가 다릅니다.
삶의 방향이 다릅니다.
삶의 종착지가 다릅니다.
우리는 이 땅에 살지만, 이 땅이 전부인 사람이 아닙니다.
이 땅의 정착민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줄 압니다.
그래서 영원히 살 것처럼 소유를 쌓습니다.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데 목숨을 겁니다.
통장 잔고를 늘리는 데 인생을 겁니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올라가고, 더 인정받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습니다.
하지만 나그네는 다릅니다.
나그네는 이 땅의 것에 모든 것을 걸지 않습니다.
소유에 묶이지 않습니다.
성공에 취하지 않습니다.
실패에 무너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그네에게는 돌아갈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본향인 하나님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여행자들을 보십시오.
결코 이삿짐싸듯 많은 짐을 챙기지 않습니다.
잠시 머물다 떠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짐이 너무 많으면 여행은 힘들어 집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이 땅의 것들을 너무 많이 붙잡고 있으면 하나님 나라를 향한 걸음이 무거워집니다.
소유가 많아서 문제가 아니라 소유에 묶이는게 문제입니다.
직장이 좋아서 문제가 아니라 직장이 내 주인이 되는게 문제입니다.
돈이 많아서 문제가 아니라, 돈이 내 마음을 지배하는게 문제입니다.
나그네는 이 땅의 것들을 사용하지만, 그것을 주인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세상 속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것, 이것이 나그네 영성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나그네의 정체성은 세상과 담을 쌓고 도망치는 배타주의가 아닙니다.
세상 한복판에 당당히 서서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는 거룩한 울타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나그네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질때 비로소 세상을 축복할수 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요셉만큼 나그네로서 치열하게 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이집트 총리가 되었습니다.
이집트인의 옷을 입었습니다.
이집트 언어를 완벽하게 구사합니다.
이집트의 심장부인 왕궁에서 살아갑니다.
심지어 이집트 아내와 결혼해 자식을 낳았습니다.
겉모습만 보면 완벽한 이집트 사람같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단 한순간도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이자 나그네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노예로 억울하게 끌려갔을때에도,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할때에도,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그리고 온 나라를 쥐락펴락하는 총리가 되어서도,
그는 이집트 신을 따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살았습니다.
세상 중심에 살았지만 세상에 동화되지 않은 거룩한 울타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요셉을 통해 굶어 죽어가던 이집트가 살았습니다.
주변 나라들이 살았습니다.
야곱의 가족도 살았습니다.
나그네의 정체성을 지킨 하나님의 사람이 제국과 세상을 살리는 축복의 통로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담이 아니라 울타리입니다.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도록 지켜주는 거룩한 울타리입니다.
그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을 부러워하지 않고, 세상을 축복하는 나그네로 살아가야 합니다.
[결론]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십시오.
나는 이땅에 영원히 살 것처럼 소유에 목숨거는 정착민입니까?
아니면 거룩한 울타리를 쌓고 세상을 축복하는 당당한 나그네 입니까?
먼저 내 삶의 거룩한 울타리를 점검해야 합니다.
한주간 내 삶에 무너진 울타리를 다시 세워야 합니다.
아침에 단 10분이라도 묵상합시다.
하루를 시작할때 마무리할때 짧게라도 기도합시다.
또한 울타리는 세우되 담은 낮춰야 합니다.
우리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들은 기피할 대상이 아니라 축복할 대상입니다.
나의 아저씨에 나온 동네 사람들처럼 따뜻한 말 한마디가 세상을 향한 축복의 첫걸음입니다.
내 삶의 무거운 짐도 한번 점검해봐야 합니다.
내가 붙잡고 있는 우상이 무엇인지 돌아봐야 합니다.
나그네는 세상의 필요한 것을 사용하지만 그것을 결코 주인으로 섬기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이미 그길을 가시고 보여주신 한분이 계십니다.
참된 야곱이자 참된 요셉이신 예수님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나그네로 오셨습니다.
세상이 미련하게 여기는 낮아짐과 섬김, 희생의 길을 가셨습니다.
굶주리는 세상에 자기 몸을 쪼개어 세상의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 분을 바라보며 나아갈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거룩한 나그네로 세상을 축복하시는 우리 함께걷는교회 식구들이 다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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