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손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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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한 장면, 두 손

사랑하는 처음사랑교회 성도님, 사무엘상 18장을 함께 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는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10절과 11절입니다.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그 창을 던지며 이르되,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두 번이나 그렇게 하였으나, 다윗이 그의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삼상 18:10-11)
성도님, 이 장면을 마음에 그려보십시오. 한쪽에 사울이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창’이 들려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방의 반대편에 다윗이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무엇이 들려 있었습니까. 10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다윗이 손으로 수금을 탔더라.’ 다윗의 손에는 ‘수금’이 들려 있었습니다.

사울의 손에는 창이, 다윗의 손에는 수금이 있었습니다.

같은 방, 같은 시간, 같은 공기. 그러나 두 사람의 손에 들린 것은 정반대였습니다. 한 사람은 ‘찌르는 손’이었고, 한 사람은 ‘찬양하는 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손에 들려 있던 것이, 결국 두 사람의 인생을 갈랐습니다. 사울은 자기 창에 죽었고(삼상 31장), 다윗은 그 수금으로 시편을 남겨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오늘 사무엘상 18장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손에는 지금 무엇이 들려 있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본문은 우리에게 세 사람을 보여줍니다. 사울, 요나단, 그리고 다윗입니다. 이 세 사람은 같은 시대, 같은 궁궐, 같은 사건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손에 든 것이 달랐고, 그 결과도 정반대였습니다. 한 사람은 ‘쥐다가’ 무너졌고, 한 사람은 ‘다 주었고’, 한 사람은 ‘채움을 받았습니다.’ 그 손의 비밀을 함께 들여다보겠습니다.

본론 1. 사울의 손에는 ‘창’이 있었습니다 (6-16절)

먼저 사울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첫 왕이었습니다. 키도, 풍채도, 백성의 환호도 그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8장에서 한 줄의 노래가 그의 인생을 뒤집습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삼상 18:7)
성도님, 이 노래의 무서움은 무엇입니까. 사울이 ‘0’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울은 ‘천천’을 죽인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옆에 ‘만만’이 등장한 순간, 그의 ‘천천’은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비교가 시작되자 감사가 끝났습니다. 사울이 잃은 것은 ‘천 명과 만 명의 차이’가 아닙니다. 사울이 잃은 것은, 그 차이를 견디지 못한 ‘자기 마음’이었습니다.
그리고 9절에 결정적인 한 마디가 나옵니다.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9절)

‘주목하다’의 히브리어는 단순히 ‘쳐다보다’가 아닙니다. ‘적대적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사울의 눈이 그 날 바뀌었습니다. 어제까지 다윗은 사울의 마음을 위로해주던 사위 후보였는데, 오늘부터는 표적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어제와 똑같은 다윗인데, 사울의 시선이 바뀐 것입니다. 시기는 바깥세상을 바꾸지 않습니다. 시기는 ‘내 눈’을 바꿉니다.
그리고 그 바뀐 눈은 결국 손으로 옮겨갑니다. 다음 날 10절을 보십시오.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그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삼상 18:10)
성도님, 본문이 의도적으로 두 손을 나란히 배치합니다. ‘다윗의 손에는 수금이 있었고, 사울의 손에는 창이 있었다.’ 한 방 안에 두 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 손에 들린 것이 정반대였습니다.

다윗은 ‘섬기는 손’이었고, 사울은 ‘찌르는 손’이었습니다. 다윗은 ‘위로하는 손’이었고, 사울은 ‘공격하는 손’이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솔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사울은 처음부터 살인자가 아니었습니다. 사울도 한때는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만만과 천천’의 비교 한 줄이 그의 마음에 들어왔고, 그 마음이 ‘주목하는 눈’이 되었고, 그 눈이 결국 ‘창을 든 손’이 되었습니다. 마음에서 눈으로, 눈에서 손으로. 시기는 그렇게 자랍니다.
그리고 마지막 결과가 무엇입니까. 시기의 끝은 어디까지 갑니까. 17절부터 사울은 자기 딸 메랍을, 그 다음에는 미갈을 미끼로 써서 블레셋의 손으로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자기 마음의 시기를 풀기 위해 자기 자녀까지 도구로 씁니다. 그리고 사무엘상 31장에서 사울은 자기가 던지던 그 창과 같은 칼 위에 자기 몸을 엎드러뜨립니다. 다른 사람을 찌르려던 손이, 마침내 자기를 찌릅니다.
성도님, 시기의 끝은 언제나 자기 파멸입니다. 사울이 무너진 자리는 다윗 때문이 아닙니다.
사울 자신의 손에 들렸던 ‘창’ 때문입니다.
우리는 솔직해져야 합니다. 사울의 손이 사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도 사울의 손이 있습니다. 같은 또래의 동료가 먼저 인정받을 때, 가까운 누군가의 성공 소식을 들을 때, 옆 사람이 받은 칭찬이 길어질 때 — 우리 마음에 ‘만만과 천천’의 비교가 시작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눈도 ‘주목하는 눈’으로 바뀌고, 우리의 손에도 어느새 작은 ‘창’이 들리게 됩니다. 말의 창, 무관심의 창, 뒷담의 창. 사무엘상 18장은 먼저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그 창을 내려놓으십시오. 내려놓지 못하면, 그 창의 끝은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합니다.
그렇다면 그 창을 내려놓은 손은 어떤 손이어야 합니까. 본문은 우리에게 한 사람을 보여줍니다. 사울과 정반대의 손, 요나단의 손입니다.

본론 2. 요나단은 ‘모두 주었습니다’ (1-4절)

두 번째로 요나단을 봅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한 자루의 창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다윗에게 다섯 가지를 ‘다 주었습니다.’ 같은 가족, 같은 다윗을 앞에 두고, 한 사람은 손을 들어 무기를 쥐었고, 한 사람은 손을 풀어 자기 옷을 벗었습니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 요나단은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 (삼상 18:1, 4)
성도님, 본문은 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니라.’ 그리고 그 사랑의 증거로 다섯 가지가 따라옵니다. 겉옷, 군복, 칼, 활, 띠. 이 다섯 가지를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이것은 단순한 선물 목록이 아닙니다. 요나단의 ‘왕자됨’ 전체가 한 꺼풀씩 벗겨져 다윗에게 옮겨가는 장면입니다.

요나단이 벗어준 다섯 가지

첫째, ‘겉옷’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왕자의 겉옷은 그 사람의 ‘신분’ 그 자체였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의 옷자락을 잡았을 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내셨다’고 선언한 것을 기억하십시오(삼상 15:27-28). 옷은 신분이었습니다. 요나단이 겉옷을 벗었다는 것은, ‘내가 왕자라는 그 정체성을 너에게 넘긴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둘째, ‘군복’입니다. 군복은 ‘사명’입니다. 사울의 장자로서 이스라엘의 군대를 이끌어야 할 그 자리, 그 책임을 다윗에게 넘긴 것입니다.
셋째, ‘칼’입니다. 칼은 ‘권세’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칼을 건네는 것은 통치권과 심판권을 넘기는 가장 무거운 상징이었습니다. 요나단의 칼이 다윗의 허리에 채워지는 순간, 미래의 왕권은 이미 다윗에게로 옮겨가고 있었습니다.
넷째, ‘활’입니다. 활은 요나단의 ‘가장 탁월한 능력’이었습니다. 훗날 다윗이 요나단을 애도하며 부른 노래에서 ‘요나단의 활은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으며’라고 고백할 정도로, 요나단은 활의 명수였습니다(삼하 1:22). 자기가 가장 잘하는 그 능력까지 다윗에게 줍니다.
다섯째, ‘띠’입니다. 띠는 ‘언약’입니다. 고대 근동에서 띠를 교환하는 것은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제 끝까지 간다’는 결속의 표시였습니다. 요나단은 능력과 자리만 준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다윗과 묶어버립니다.
신분, 사명, 권세, 능력, 그리고 언약. 요나단은 자기의 ‘왕자됨’을 한 겹도 남기지 않고 다 벗어 다윗에게 입혔습니다.
‘이것은 주지만, 저것은 못 주는 사랑’
성도님, 여기서 우리가 멈춰서 한 가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요나단의 사랑이 왜 ‘자기 생명같이 사랑’이라는 표현을 얻었습니까. 다섯 중 셋만 주었더라면, 넷만 주었더라면 그렇게 부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지만, 저것은 못 주는 사랑’은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은 거기까지 가지 못합니다. 시간은 드릴 수 있지만 돈은 못 드리겠고, 마음은 줄 수 있지만 자존심은 못 주겠고, 미안하다는 말은 할 수 있지만 먼저 무릎을 꿇기는 못하겠는, 그런 ‘반쯤의 사랑’이 우리의 사랑입니다. 요나단의 사랑이 위대한 이유는 그가 ‘셋만’이나 ‘넷만’이 아니라 ‘다섯 다’를 풀었기 때문입니다. 겉옷을 줄 때 군복을 아끼지 않았고, 군복을 줄 때 칼을 아끼지 않았고, 칼을 줄 때 활을 아끼지 않았고, 활을 줄 때 띠까지 풀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사랑이 가능했겠습니까. 요나단에게는 한 가지 깨달음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는 원래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리다.’ 자기 자리라고 움켜쥐는 사람은 단추 하나도 풀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리’임을 아는 사람은 옷 다섯 벌을 한 번에 풀 수 있습니다. 그 증거가 사무엘상 23장 17절에 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이렇게 고백합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이라.” 들리십니까. 왕위 계승 1순위였던 사람이, 스스로 ‘네 다음’의 자리에 서겠다고 합니다. 자기 자리를 ‘하나님의 자리’로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두 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성도님, 우리가 요나단의 이 다섯 가지를 가만히 들여다볼 때, 우리 마음 속에 한 분이 떠오릅니다. 누구십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나단이 겉옷을 벗었듯이, 예수님은 하늘의 영광이라는 그 ‘신분’을 벗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장은 말씀합니다.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요나단이 군복을 벗었듯이, 예수님은 하늘의 그 ‘권세 있는 자리’를 벗고 갈릴리 변방의 한 목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요나단이 칼을 풀었듯이, 예수님은 군대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부르실 수 있는 그 ‘권세’를 스스로 내려놓으시고 십자가의 못 박힘을 받으셨습니다.
요나단이 활을 주었듯이, 예수님은 자기의 모든 ‘능력’을 우리를 위해 쓰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치는 능력,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 바다를 잠재우는 능력, 그 모든 능력을 자기를 위해 쓰지 않으시고 우리를 위해 쓰셨습니다.
요나단이 띠를 풀었듯이, 예수님은 자기의 ‘몸’을 십자가 위에서 풀어 우리와 새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요나단이 다윗에게 다섯을 주었다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 전부’를 주셨습니다. 한 가지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무엘상 18장의 요나단은 우리에게 한 사람의 미담이 아닙니다. 요나단은 우리를 향해 ‘다 주신’ 예수님을 멀리서 비추는 거울입니다. 요나단의 다섯 가지를 보면서, 우리는 결국 십자가를 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성도님, 이제 본문이 우리를 향해 방향을 돌립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정직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앞에서 자주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겉옷은 드리겠습니다. 주일에 교회 오는 그 시간, 헌금하는 그 돈, 거기까지는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칼은 못 드리겠어요. 제 직장에서의 권리, 제 가정에서의 결정권, 그건 제 것이거든요.’
‘주님, 군복은 드리겠습니다. 주님이 맡기신 봉사 자리, 거기까지는 가겠습니다. 그런데 활은 못 드리겠어요. 제가 제일 잘하는 그 능력은 제가 쓰고 싶은 곳에 쓰겠습니다.’
‘주님, 띠는 드리겠습니다. 주님과의 관계, 그건 평생 가겠습니다. 그런데 겉옷은 못 드려요.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드러내는 그 신분까지는 좀 부담스러워요.’

‘겉옷은 드리지만 칼은 못 드려요.’ ‘군복은 입겠지만 활은 안 드릴게요.’ —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다시 들립니까. ‘이것은 주지만, 저것은 못 주는 사랑은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나단도 그렇게 사랑하지 않았는데, 하물며 우리에게 자기 자신 전부를 주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사랑으로 응답하고 있습니까.
로마서 12장 1절이 다시 들려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몸을 드리라’는 것은 ‘다섯을 다 풀어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신분도, 사명도, 권세도, 능력도, 관계도 — 한 가지도 남기지 말고 풀어 드리라는 것입니다.
성도님, 오늘 우리는 한 가지를 정직하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예수님 앞에서 무엇은 드리고 있고, 무엇은 아직 움켜쥐고 있는가.’ 그 움켜쥐고 있는 한 가지가, 사실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한 가지가 풀어질 때, 비로소 우리의 사랑이 ‘반쯤의 사랑’에서 ‘자기 생명 같은 사랑’으로 옮겨갑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요나단이 자기 다섯 가지를 다 풀었다고 해서 그가 작아졌습니까. 아닙니다. 다윗이 평생 가장 사랑하고 그리워한 사람의 이름이 요나단입니다. 사무엘하 1장에서 다윗은 요나단의 죽음 앞에 통곡합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 그리고 다윗은 왕이 된 후 요나단의 절뚝거리는 아들 므비보셋까지 자기 식탁에 앉혔습니다(삼하 9장).

다 주는 자는 작아지지 않습니다. 다 푸는 손이 가장 크게 기억됩니다.

자기 자리를 움켜쥔 사울은 자기 창에 자기가 죽었지만, 자기 자리를 다 풀어준 요나단은 다윗의 마음과 성경의 페이지 속에 영원히 새겨졌습니다. 사울의 손과 요나단의 손, 그 사이의 차이가 우리의 인생을 가릅니다.

본론 3.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수금’을 채워주십니다 (5, 10, 14-16, 30절)

성도님, 이제 본론의 마지막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세 사람의 손이 나옵니다. 사울의 손은 ‘쥐는 손’이었고, 요나단의 손은 ‘다 푸는 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의 손은 어떤 손이었습니까. 다윗의 손은 ‘채워주신 손’이었습니다.
들으십시오. 사울처럼 창을 쥔 손에서 요나단처럼 다 푸는 손으로 옮겨갈 때, 하나님께서는 그 빈 손에 ‘수금’을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가장 깊은 비밀입니다. 우리가 비교의 창을 내려놓고, 움켜쥐던 다섯 가지를 한 겹씩 풀어드릴 때, 하나님께서는 그 빈 손에 다윗과 같은 수금을 쥐어주십니다.
그 다윗의 수금은 세 가지 모습으로 우리 손에 채워집니다.
첫째, 하나님은 ‘섬김의 손’을 채워주십니다
사무엘상 16장 23절을 기억하십니까. 사울의 마음이 악령에 시달릴 때, 다윗이 수금을 타면 사울이 상쾌해지고 평안해졌습니다. 다윗은 자기 손으로 자기를 미워하는 왕을 위로했습니다. 18장 10절의 순간을 다시 보십시오. 사울의 손에는 창이 있고, 다윗의 손에는 수금이 있었습니다. 그 창이 다윗을 향해 날아오는 순간에도, 다윗의 손은 여전히 ‘수금을 타고 있었습니다.’
성도님, 이것이 우리 힘으로 되겠습니까.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을 위로하는 것이 우리 의지로 되는 일입니까. 아닙니다. 다섯 가지를 풀어 하나님께 다 드린 그 빈 손에, 하나님이 친히 ‘섬김의 능력’을 채워주십니다. 미워하는 사람조차 위로할 수 있는 그 손, 그것은 우리가 만든 손이 아니라 하나님이 채워주신 손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충성의 손’을 채워주십니다
18장에서 다윗을 묘사하는 한 표현이 네 번 반복됩니다.
5절 —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14절 —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15절 — “사울은 다윗이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30절 — “다윗이 사울의 모든 신하보다 더 지혜롭게 행하매, 이에 그의 이름이 신하 중에 매우 귀하게 되니라.”

한 장 안에 ‘지혜롭게 행함’이 네 번 반복됩니다. 18장의 다윗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지혜롭게 행함’입니다.

다윗은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군대의 장이 되었을 때는 군대의 장답게, 천부장이 되었을 때는 천부장답게, 왕의 사위가 되었을 때는 사위답게 행했습니다. 자리가 바뀔 때마다 그 자리에 맞게 자기를 채워갔습니다. 그 충성의 뿌리는 어디였습니까. 17장 34절에서 다윗 자신이 고백합니다. 들판에서 사자와 곰이 양을 물어가면, 그 짐승을 쫓아가서 양을 빼앗아 구해냈다고 말합니다. 들판의 작은 양 한 마리에 대한 충성이, 골리앗 앞의 용기를 만들었고, 군대의 장이 되는 신뢰를 만들었고, 결국 한 나라의 왕이 되는 자격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입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25장 21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손을 다 풀어드린 사람에게, 하나님이 친히 ‘충성의 손’을 채워주십니다.
셋째, 하나님은 ‘흔들리지 않는 손’을 채워주십니다
다윗에게는 흔들릴 이유가 너무 많았습니다. 사울 왕이 두 번이나 창을 던졌습니다. 백성은 ‘만만’을 외치며 환호했습니다. 사울은 미갈을 미끼로 블레셋 사람 백 명의 양피를 요구했습니다(25절). 누가 봐도 함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모든 상황 속에서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왜요?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14절, 28절)

이 한 마디가 다윗의 비밀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백성의 환호를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리를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의식한 단 한 분은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니 창이 날아와도 피하면서 사울을 계속 섬길 수 있었고, 만만의 환호 속에서도 우쭐하지 않을 수 있었고, 함정 같은 요구 앞에서도 도망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궁궐 안에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었습니다.
성도님, 이 ‘함께 계심’이 결국 다윗의 손을 흔들리지 않게 만든 것입니다. 손을 풀어 하나님께 드린 자에게, 하나님은 ‘함께 계심’으로 그 손을 붙들어주십니다.
그래서 다윗의 수금이 결국 어디로 갔는지 아십니까. 그 수금이 시편이 되었습니다. 사울이 던진 창은 사울과 함께 길보아 산에 묻혔지만, 다윗의 수금은 시편으로 살아남아 지금까지 우리 입술에서 노래되고 있습니다.
창은 사람을 죽이고 자기와 함께 묻히지만, 하나님이 채워주신 수금은 사람을 살리고 영원히 남습니다.
결론. 당신의 손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성도님, 사무엘상 18장은 우리에게 세 개의 손을 보여줍니다.
사울의 손은 ‘쥐는 손’이었습니다. 비교에서 시작해 시기로 자라고, 결국 자기 손에 들린 그 창에 자기가 죽는 손입니다. 요나단의 손은 ‘다 푸는 손’이었습니다. 겉옷, 군복, 칼, 활, 띠 — 다섯 가지를 한 가지도 남기지 않고 다 풀어 다음 사람에게 입혀준,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는’ 손입니다. 다윗의 손은 ‘채워주신 손’이었습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위로하고, 자기 자리에서 충성하고, 끝까지 흔들리지 않는 손, 하나님이 친히 수금을 쥐어주신 손입니다.
그리고 그 세 손의 흐름이 우리에게 한 가지 길을 보여줍니다.
사울과 같은 ‘쥐는 손’에서, 요나단과 같은 ‘다 푸는 손’으로 우리가 변하면, 하나님은 다윗과 같은 ‘수금의 손’으로 우리를 채워주십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가장 깊은 약속입니다. 우리는 ‘수금부터’ 시작하려 합니다. ‘하나님, 다윗처럼 살게 해주세요. 흔들리지 않는 손, 위로하는 손, 충성하는 손을 주세요.’ 그러나 본문은 순서를 말합니다. 먼저 ‘창’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다음 ‘다섯 가지’를 풀어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그 빈 손에 하나님이 친히 수금을 채워주십니다.
그래서 본문은 오늘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손에는 지금 무엇이 들려 있습니까?”

먼저, 우리 안의 ‘창’을 솔직히 인정합시다. 옆 사람을 향한 그 작은 시기의 창, 가까운 사람을 향한 그 미세한 비교의 창. 그 창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요나단처럼, 다섯 가지를 한 겹씩 풀어드리는 자리에 섭시다. ‘주님, 겉옷은 드리지만 칼은 못 드려요’라는 그 마음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아직 움켜쥐고 있는 그 한 가지를 오늘 풀어 드립시다. 우리에게 자기 자신 전부를 주신 예수님 앞에서, 우리도 ‘이것은 주지만 저것은 못 드린다’는 그 반쯤의 사랑을 끝냅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윗처럼, 우리의 빈 손에 ‘수금’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가정의 자리에서 위로하는 손을, 직장의 자리에서 충성하는 손을, 학교의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는 손을, 교회의 자리에서 섬기는 손을 — 하나님이 친히 채워주실 것입니다.
들판이 골리앗을 결정합니다. 풀어드린 손이 시편의 수금을 결정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게 일하십니다. 들판에서 수금을 타던 한 청년을 들어 한 나라를 다스리게 하셨던 그 하나님이, 오늘도 자기 손을 다 풀어드리는 한 사람을 들어 한 시대를 흔드시는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그 한 사람이 우리 처음사랑교회에서 일어나기를, 그 한 사람이 우리 가정에서 일어나기를, 그 한 사람이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앉으신 여러분이기를 — 저는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한 주간, 한 가지만 마음에 품고 돌아가십시오. 아침에 눈을 떠 하루를 시작할 때 자신에게 이렇게 물으십시오.
“오늘 내 손에는 창이 들려 있는가, 다 풀려 있는가, 아니면 수금이 들려 있는가.”
그 한 마디의 질문이, 여러분의 하루를 바꾸고, 한 주를 바꾸고, 한 평생을 바꿀 줄을 — 저는 믿습니다.
창을 내려놓고, 다섯 가지를 다 풀어드리며,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수금을 손에 드는 처음사랑교회 모든 성도님 되시기를 —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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