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오 총독

사도행전 강해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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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갈리오 총독

본문: 사도행전 18장 12-17절

찬송: 549장

말씀의 문을 열며

우리는 지난 시간, 바울을 무너뜨리기 위해 교묘한 음모를 꾸몄던 회당장 소스데네의 최후를 함께 대면했습니다. 스스로 판 함정에 빠져 분노한 고린도 시민들에게 매를 맞고, 자신이 믿었던 유대인 동료들에게조차 철저히 외면당했던 그의 쓸쓸한 뒷모습을 기억합니다.
인간의 악한 꾀와 교만은 결국 자신을 해하는 날카로운 가시가 될 뿐이라는 엄중한 진리를 우리는 목격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소란스럽고 대적자들이 거세게 일어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품고 구주의 거룩한 이름을 지키는 자들을 반드시 주님의 그늘 아래 숨기시고 지켜주십니다.
그러나 막상 우리 삶의 자리에 거센 바람이 불어오고 고난의 밤이 깊어질 때, 우리는 자주 깊은 쓸쓸함에 잠기곤 합니다. "하나님, 도대체 어디 계십니까" 하고 마음속으로 울부짖지만, 하늘은 침묵의 동굴처럼 고요하게만 느껴집니다. 내 손으로 일구는 대지는 메마르고, 삶의 무게는 겉잡을 수 없이 무거워질 때, 주님이 우리를 잊으신 것은 아닌가 하는 나약한 마음이 스며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심지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교회를 차갑게 외면하는 세상 사람들의 냉담한 손길까지도 들어 쓰셔서 하나님의 선한 뜻을 마침내 이루어가십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 총독 갈리오의 싸늘한 무관심과 이름 없는 고린도 사람들의 우발적인 소란마저도 바울을 지키는 든든한 울타리로 삼으신 하나님의 오묘한 손길을 가만히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아울러 우리의 숨결과 삶이 세상의 위협에 내던져진 가련한 운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있는 예정과 뜨거운 사랑의 계획 속에 머물고 있음을 깨닫고 깊은 평안과 위로를 얻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첫째, 세상의 냉담한 무관심마저도 당신의 자녀를 품으시는 은혜의 울타리로 삼으십니다.
오늘 본문 12절은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 되었을 때”에 일어난 일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법에 따라 로마가 점령한 지역의 총독 임기는 권력의 독점과 지방에서의 세력 부패를 막기 위해 철저하게 단 1년으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은 신임 총독 갈리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갈리오는 고린도의 고약하고 습한 기후를 견디지 못해 폐질환과 열병을 얻었고, 그 짧은 1년의 임기조차 채우지 못한 채 급히 로마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회당장 소스데네가 이끄는 유대인들의 위협이 최고조에 달하여 바울의 숨통을 조여오던 바로 그 절묘한 몇 달의 시간에 갈리오를 아가야의 총독 자리에 앉혀 두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그저 역사의 우연이나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일이라 부를 것입니다. 하지만 믿음의 눈을 들어 바라보면, 이것은 역사의 미세한 바늘을 조율하시고 자신의 자녀를 지키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기막힌 카이로스, 즉 정교한 섭리의 시간표였습니다.
법정 앞으로 끌려온 바울을 향해 유대인들이 소리치며 고발할 때, 그리고 분노한 고린도 시민들이 소스데네를 잡아 때릴 때, 17절을 보면 갈리오 총독은 “이 일에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는(οὐδὲν ἔμελεν)” 싸늘한 방관자의 태도를 취했습니다. 갈리오가 보여준 행동은 정의감에서 우러나온 공의로운 판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피지배층인 유대인들의 종교 분쟁을 하찮게 여기고 귀찮아했던 오만한 지배자의 냉대에서 비롯된 차가운 무관심이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세상 총독의 그 차가운 무관심과 귀찮음마저도 도구로 사용하셔서 바울을 옥죄던 유대인들의 고발을 원천적으로 각하시키셨습니다. 갈리오의 침묵은 바울을 대적자들의 손에서 건져내어 고린도 땅에서 자유롭게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게 만든 거룩한 성벽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생명은 소스데네로 대표되는 어둠의 권세나 변덕스러운 이방 총독의 처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원하고 안전한 예정의 손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장로교의 유산 속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정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예정론의 고백을 따릅니다. 그런데 예정론은 성도들을 차가운 숙명론에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건조한 교리가 아닙니다. 이 예정의 교리를 눈물과 피로 정립했던 존 칼빈과 신앙의 선배들은 당대 로마 가톨릭세상 군주들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에서 매일같이 참수형과 화형의 위협을 마주하며 살았던 이들이었습니다. 내일 아침 광장에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풍전등화 같은 삶을 살던 그들에게, 예정론은 싸늘한 신학 이론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생명과 구원은 나를 죽이려 하는 저 잔인한 핍박자들의 손끝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고 선택하신 하나님의 안전한 품속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가장 뜨거운 눈물의 고백이자 평안의 노래였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예정은 차가운 기차선로가 아니라, 우리를 기도의 동역자로 부르시는 따뜻한 초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을 오해할 때,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지요.”하면서 우리 신앙은 쉽게 무기력한 허무주의나 숙명론에 빠지게 됩니다. 모든 사람의 구원과 세상의 결론이 이미 차가운 기차선로처럼 꽁꽁 묶인 채 고정되어 있다면, 우리가 굳이 눈물로 무릎 꿇어 기도할 이유도 없고, 애써 땀 흘려 복음을 전하고 선을 행해야 할 이유도 사라지게 됩니다.
만약 세상이 고정된 시나리오대로만 돌아가는 태엽 인형과 같다면 인간은 그저 역사의 무력한 구경꾼이 될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 역시 자신이 과거에 내린 결정에 스스로 손이 묶여 오늘 우리의 신음소리에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쓸쓸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속 사도 바울의 모습은 결코 운명의 차가운 철길 위에 넋을 놓고 앉아 있는 방관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매일같이 목을 조여오는 유대인들의 살기등등한 위협 속에서도, 밤중에 들려왔던 주님의 세미한 음성을 붙잡고 두려워하지 않고 침묵하지 않으며 기도로 대지를 깨우고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의 기도를 생략하게 만드는 차가운 면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이 고독한 고린도 땅에서 눈물로 기도하며 복음에 생명을 걸고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때, 하나님께서 예비해 두신 '갈리오 총독의 무관심'이라는 은혜의 문이 역사 속에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참된 예정은 딱딱하게 굳어버린 차가운 장부가 아닙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하나님의 예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따뜻한 은혜의 집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과거의 어느 시간표 속에서 누구는 버리고 누구는 취하기로 차가운 결정을 내리신 무자비한 독재자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 모든 자녀를 끝까지 품어 안으시고 구원하시겠다”는 살아 숨 쉬는 사랑의 약속을 예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수반되는 모든 심판과 거절은 독생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직접 짊어지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품이라는은혜의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갈 때, 우리는 창세 전부터 예비된 자녀의 영광과 기쁨을 오늘 비로소 새롭게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은 불신 세상의 차가운 무관심과 흘러가는 역사적 소란마저도 당신의 섭리 속에 부드럽게 녹여내십니다. 동시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의 작은 신음과 눈물의 기도를 귀 기울여 들으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통로 삼아 오늘의 역사를 새롭게 빚어가시는 다정하신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간절한 기도는 허공을 맴도는 쓸쓸한 독백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대한 섭리의 물결을 이 땅 위에 풀어놓는 영광스러운 동역의 열쇠입니다.

말씀의 문을 닫으며

오늘 우리는 갈리오 총독의 짧은 임기소스데네의 극심한 위협, 그리고 고린도 사람들의 우발적인 소란까지도 퍼즐 조각처럼 정교하게 맞추어 바울을 지켜내신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를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는 우리를 멍하니 바라보는 구경꾼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아무리 불신 세상이 득세하고 역사가 혼란스러워 보일지라도, 결국 이 역사의 진짜 주인은 우리를 지독하게 사랑하시는 하나님 한 분뿐이라는 흔들리지 않는 삶의 중심을 우리 마음에 세워줍니다.
이제 우리는 세상의 차가운 냉담함과 무관심에 낙심하거나 두려지 않습니다. 소스데네로 대표되는 어둠의 권세가 아무리 사납게 날뛰고 우리 삶을 위협할지라도, 우리의 생명과 가정,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일구는 삶의 터전은 결코 그들의 손끝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머리털 하나까지 다 세고 계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손이 오늘 우리를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기도의 무릎을 감사함으로 굳게 세우고,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섭리에 기쁨으로 동역하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거둠의 기도

참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 세상의 차가운 눈빛과 믿지 않는 이들의 냉담한 권세 속에서도, 여전히 역사의 키를 쥐고 주님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신비롭게 지키시는 주님의 신비한 손길을 찬양합니다.
세상은 아가야 총독 갈리오의 재임과 고린도 법정의 소란을 우연이라 말하지만, 그 뒤에서 바울의 걸음을 정교하게 지키신 하나님의 타이밍을 보며 우리의 마음속에 말할 수 없는 평안이 깃듭니다. 주님, 우리의 삶이 소스데네로 대표되는 어둠의 권세나 세상의 무자비한 우연에 내팽개쳐진 가련한 운명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라는 가장 안전하고 따뜻한 사랑의 계획 속에 머물고 있음을 믿고 안식하게 하옵소서.
우리를 차가운 숙명의 구경꾼으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뜨거운 기도의 동역자로 불러주셨사오니, 낙심하지 말고 기도의 무릎으로 주님 앞에 나아가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물과 애씀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살아있는 사랑의 역사를 새롭게 빚어가실 줄 믿습니다. 오늘도 역사의 참 주인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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