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공동생활_서로 존경함

성도의 공동생활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0 ratings
· 1 view
Notes
Transcript

[구조 및 주제 분석: 서로 존경함 - 성도의 공동생활]

고린도전서 3장 16절 말씀을 바탕으로 한 **'성도의 공동생활과 상호 존경'**에 관한 내용을 1시간 분량의 강연이나 공부를 위해 체계적으로 정리해 드립니다.

[제1대지] 성전으로서의 성도: 정체성의 회복

1. 고린도 교회의 배경과 위기고린도는 당시 무역이 발달한 항구 도시로 물질주의, 파당 정신, 도덕적 타락이라는 세 가지 세속적 정신이 지배하던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도시를 변화시키기 위해 교회를 세우셨으나, 오히려 교회가 세상의 가치관에 오염되어 분쟁과 음행이 발생하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2.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선언의 의미사도 바울은 이러한 위기 속에서 성도 개개인이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임을 상기시킵니다. 건물이 그 용도(예배당 혹은 술집)에 따라 성격이 결정되듯, 우리 몸이 성전인 이유는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거하시기에 적합한 성결하고 순결한 상태로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제2대지] 상호 존경의 기초: 타인 안의 하나님을 발견함

1. 성전을 파괴하는 행위에 대한 경고성경은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파괴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고 경고합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죄를 넘어, 다른 성도를 하찮게 여기거나 멸시하고 모욕을 주는 행위가 곧 그 사람이라는 '작은 성전'과 그리스도의 몸인 '큰 성전'을 파괴하는 중죄임을 의미합니다.
2. 조건 없는 존중의 실천우리가 서로를 존경해야 하는 이유는 상대방의 학식, 지위, 재산과 같은 자연적인 이점 때문이 아닙니다. 진정한 상호 존중은 상대방이 현재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거나 심지어 죄를 지은 상태라 할지라도, 그 안에 여전히 거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방식대로 부유한 자를 특별 대우하고 가난한 자를 소외시키는 것은 복음의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됩니다.

[제3대지] 공동생활의 덕목: 그리스도인의 교양과 절제

1. 보편적 가치로서의 '교양'영성이나 기도 능력보다 앞서 갖춰야 할 것이 **'교양'**입니다. 여기서 교양이란 나의 존재로 인해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이나 피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상호 사랑의 정신입니다. 자신의 혈기와 오만함을 다스리지 못해 공동체에 상처를 주는 것은 성도로서 매우 부끄러운 일이며, 교회 안에서는 상식이 통하는 인격적 태도가 필수적입니다.
2. 당구공 효과와 자기 억제공동체 내에서 한 사람이 분노를 쏟아내면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어 전체가 소란해지는 '당구공 효과'가 나타납니다. 이를 막기 위해 성도는 억울한 비난이나 모욕을 당할 때에도 **스스로를 꺾고 그 고통을 감내함으로써 갈등을 멈추는 '십자가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전을 아끼고 교회를 보존하는 정신입니다.

[제4대지] 성숙한 공동체: 경쟁을 넘어선 영적 가족

1. 경쟁과 야망의 배격세상은 끊임없는 경쟁과 승리를 가르치지만, 교회 공동체는 배려와 관용을 가르쳐야 합니다. 은혜나 물질, 지위를 더 많이 가진 이유는 그것을 가지지 못한 지체들을 섬기고 나누기 위함입니다. 직분을 맡았을 때만 열심을 내고 물러난 뒤에는 협조하지 않는 모습은 자기를 낮추는 상호 존중의 정신이 결여된 것입니다.
2. 사과 없이도 용서되는 '가족'의 원리교회는 영적인 가족입니다. 가족은 밖에서는 따돌림받을 사람이라도 그 안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기에 기다려주고 사랑해 주는 유일한 공동체입니다. 성도는 상대방의 가장 야비해 보이는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인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애써야 하며, 이를 통해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세상에 보여주어야 합니다.

[결론] 그리스도의 마음으로의 초대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가장 낮은 곳에 오셔서 짐승 같은 죄인들을 한 번도 멸시하지 않고 섬기셨습니다. 성도의 공동생활은 바로 이 예수의 마음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비록 사랑하기 힘든 사람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일이 아프고 어려울지라도, 사람을 넘어 그 안의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영혼을 온전하게 하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소그룹 성경 공부 활동지] 서로 존경함

고린도전서 3장 16절 말씀을 중심으로, 성도의 공동생활과 상호 존경의 원리를 깊이 있게 나눌 수 있는 소그룹 성경 공부 활동지를 만들어 드립니다.

[소그룹 성경 공부 활동지] 거룩한 성전으로 함께 세워져 가는 공동체

●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3장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1. 마음 열기 (Ice Break)

내가 지금까지 방문했던 장소 중 가장 '거룩함'이나 '경외감'을 느꼈던 곳은 어디인가요? 그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나누어 봅시다.

2. 말씀의 이해 (Observation & Understanding)

질문 1.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선포한 배경은 무엇입니까?
당시 고린도 시를 지배하던 세 가지 정신(물질주의, 파당 정신, 도덕적 타락)이 어떻게 교회 안으로 흘러들어왔는지 나누어 보세요.
우리의 몸이 '거룩한 성전'이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질문 2. 성경에서 말하는 '성전을 파괴하는 행위'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단순히 개인적인 죄를 짓는 것을 넘어, 공동체 안에서 지체들을 어떻게 대하는 것이 성전을 파괴하는 일이 되는지 찾아보세요.
우리가 다른 성도를 존경해야 하는 근거는 그 사람의 외적 조건(재산, 지위, 학식)에 있습니까, 아니면 다른 곳에 있습니까?.

3. 삶의 적용 (Application & Reflection)

질문 3. 공동체 내에서의 '교양(Manner)'과 '상호 존중'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강연자는 영성이나 은사보다 앞서 갖춰야 할 보편적 가치로 **'교양'**을 강조합니다. 나로 인해 다른 지체가 불편함을 겪지 않도록 내가 특별히 주의해야 할 부분은 무엇인가요?.
**'당구공 효과'**처럼 누군가의 혈기나 분노가 공동체 전체로 퍼지려 할 때, 내가 '자기를 꺾는 십자가의 자세'로 그 흐름을 끊어본 경험이 있습니까? 없다면 앞으로 어떻게 대처하고 싶습니까?.
질문 4. '영적 가족'으로서의 교회를 꿈꾸며.
가족은 "사과 없이도 용서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라고 합니다. 우리 소그룹이 지체의 가장 연약하고 야비해 보이는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아름다움)**을 발견해 주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 오늘 내가 실천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4. 결단과 기도 (Commitment & Prayer)

"나는 상대방의 조건이 아니라 그 안에 계신 그를 존경하겠습니다."나의 고백:하나님 때문에
함께 기도하기:
우리를 성전 삼아 주신 성령님의 임재를 매일 경험하며 을 살게 하소서.성결한 삶
세상의 경쟁과 시기심을 버리고,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을 품게 하소서.예수의 마음
우리 교회가 세상과는 다른 하늘나라의 가치가 통용되는 이 되게 하소서.아름다운 성전
[인도자를 위한 팁]
이 활동지는 약 60분에서 90분 정도의 소그룹 모임에 적합합니다.
각 질문의 끝에 표시된 숫자 [i]는 제공된 소스(강연 녹취록)의 해당 단락 번호이므로, 인도자는 미리 내용을 숙지하여 풍성한 해설을 곁들여 주시면 좋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고린도전서 3장 16절입니다.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3장 16절. 신약성경 266쪽입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절입니다. 16절 한 절만 우리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16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고맙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지켜 주시고 오늘이 시간에 거룩한 주일 아름다운 예배의 시간에 저희들이 모였습니다.이 이 시간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시간이오니 주님의 진리의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 주시고 우리로 깨닫게 하옵소서.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들을 때 우리 모든 사람의 마음에 착한 마음을 주시고 그래서이 주님의 말씀을 깊이 듣고 깨닫고 아버지 앞에 새로워지도록 복을 주시옵소서. 아멘. 하나님이 시간에도 유아실에서 예배드리는 자모들과 또 교육관에서 예배드리는 지체들 하나님께서 모두 붙들어 주셔서 주님의 말씀으로 저희들이이 진리와 함께 주님을 만나도록 복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멘.
오늘은 성도의 공동 생활 중에서 특별히 서로 존경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아,이 편지를 받을 때에 고린도 교회의 영적인 상태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습니다. 이 고린도시는 항구 도시이고 매우 발달한 무역 도시였습니다. 아덴에서 복음을 전파하던 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에는 심히 약한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가운데 복음을 증거했고 그 복음의 미련한 것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가 서게 되었으니 고린도 1장에서 말하기를 고린도 교회는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불리워졌습니다. 그러나 이 교회는 하나님께서 세우실 때에 고린도 시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세워 주셨지만 본래의 사명을 감당하기보다는 도시의 정신에 의해서 교회가 오염이 되는 불행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당시 고린도 시를 지배하던 정신은 크게 세 가지였는데 첫째는 물질주의적인 이기적 정신이었습니다. 항구 도시였고 그 무역이 활발하게 행해지는 곳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산에 매우 밝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농촌은 계산이 좀 적고 인심이 후하지만 도시는 각박한 것이 늘 우리 인간의 경험입니다. 거기에는 아고라라고 불리우는 굉장히 커다한 시장이 있고 거기에서 세계 각국에서 들어온 배들이 물건들을 사고 팔았던 도시입니다. 이미 주전 3-4세기 헬라 시대 때부터 거기에 도시가 세워지기 시작했고 사도 바울이 편지를 쓸 때쯤에는 아주 발달한 도시였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기보다는 이기적인 자기 사랑에 빠져 물질주의에 흐르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세우신 것은 이러한 물질주의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는데 그만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하락하게 되니까 이러한 이기주의적이고 물질주의적인 정신이 교회에 스며들게 되었던 것이죠.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 유명한 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의 장을이 교회에 보내는 편지 안에 기록하게 되었던 것이죠.
두 번째 정신은 파당의 정신이었습니다. 당시이 고린도뿐만이 아니라 그 모든 로마에 있는 도시들은 항상 도시가 있는 곳에는 말 잘하고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미 시락 시대의 그리스 시대의 폴리스 시절부터 이 도시에는 이런 유명한 철학자들이 모여서 자기의 의견들을 설파할 수 있는 자리를 가졌고 많은 대중적인 지지를 얻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서로 언쟁하고 논쟁하는 그러한 정신들이 도시에 있었으니 그러한 주의 주장을 따라서 파당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교회를 세우신 것은 이러한 파당의 정신을 변역시키기 위해서 세운 것이었죠. 그러나 오히려 교회의 영적인 수준이 하락하게 되자 이런 세상의 논쟁하는 파당의 정신이 교회 속에 흘러 들어와서 교회에 있는 신자들이 나는 아볼로파요 나는 바울파요 난게바파요 심지어 난 예수파라고 하는 사람까지 생겨나게 되었으니 결국은 교회를 통해 세상에 흘러가야 할 에상된 물결들이 교회에 들어온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세 번째는 도덕적인 타락이었습니다.이 도덕적인 타락은 특히 성적인 문란함으로 나타났는데 이러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어 공공히 자행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고린도에가 보면은 고린도 시의 유적이 있고 거기에서 산쪽으로 한 100m 정도 높이 위에 그 신전이 있습니다. 아프로디테라고 하는 신을 섬기는 신전이 있었는데 그 신전은 지금은 다 무너지고 터만 남아 있지만 거기에 신전이 높이서 있어서 거기에서 사람들은 아프로디테라고 하는 신을 섬겼습니다. 그 신을 섬기는 제의 안에 풍년을 빌고 그리고 번영을 비는 그러한 제사를 드리는 죄의 안에 성적인 교접이 있었습니다. 예배 행위 속에 그런 것들이 들어가 있었고 그래서 그 어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많은 신전의 창녀들이 있어서 예배드리러 온 사람이 예배를 드리고 신들을 섬기는 예배 행위 가운데 서로 돈을 주고 교을 하게 되었던 것이죠.
이러한 도덕적인 문란은 이제 그 아프로디테 신전에만 유일했던 것이 아니라 그리스 시대 때부터 성에 대한 관념이 희박한 이 많은 도시 속에서 이러한 도덕적인 불결들이 자행이 되었고 특별히 그 도시는 항구 도시였기 때문에 오랜 항해 생활로 금욕했던 뱃사람들이 몰려와서 그래서 공공연히 몸을 파는 사람들과 함께 관계를 갖는 이러한 것들이 도시의 정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도시의 교회를 세우신 것은 이런 도덕적 불결함을 제하고 성결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세웠지만은 교회의 영적인 상태가 나빠지고 나니까 도시의 이런 정신이 오히려 교회 속에 스며 들어와서 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죠.
이런 상황 속에서 사도가 편지를 쓰면서 문득 너희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의 전인 줄 알지 못하느냐라고 하면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이라는 사실을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공동생활에 있어서 필요한 정신이 무엇인지를 보여지는 매우 중요한 신학적인 발언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은 최소한 이 문맥에서 두 가지 진리를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예전에는 우리 안에 복음의 광체도 없고 성령도 계시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 신이 우리를 지배하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없고 그리스도 예수와 예수의 몸과는 상관이 없는 그런 인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 만들어 주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두 영혼과 육체를 구원하신 후에 우리 안에 그 보증으로서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 안에는 성령님이 계시고 그 성령님은 영원히 떠나지 아니하고 신자 안에 오래도록 계셔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시치시고 또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작은 성전이 되게 하셔서 그 작은 성전이 합쳐져서 큰 성전인 그리스도 예수의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육체는 이제 더럽고 경멸받아야 할 육체가 아니라 거룩한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훌륭한 예배당이 된 것이죠.
우리는 예배당에 오면은 예배당 아닌 곳에 있었을 때와는 다르게 우리의 행동 거지를 주의하고 삼가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건물임에는 이 세상에 있는 건물과 다름이 아니지만 그러나 이 예배당 건물 안에서는 하나님과 만나는 놀라운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를 만나 주시는 하나님 때문에 예배당의 건물은 구별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고 하는 이 사상은 우리로 하여금이 몸이 성령께서 거하는 하나님의 전이시니 그러한 하나님이 거하시기에 적합한 삶을 우리의 육신으로 살도록 그렇게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죠.
여러 해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호주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시드니에 들러서 말씀을 전했는데 그 교회 목사님이 제게 아주 신기하고 묘한 장소가 있는데 한번 보시렵니까? 그리고 저를 데리고 갔습니다. 호주 이민의 역사가 약 200년 정도 된다고 하고 처음에는 영국에서 그 흉악한 죄수들을 격리시키는 장소로 호주가 시작이 되었고 시드니라는 사람이 이제 거기에 총독으로 오면서 시든이라는 도시 이름이 붙게 되었는데 그 초창기에 지어진 큰 건물들은 대부분 교회 아니면은 말하자면 공공기관이었죠. 그 건물들은 이제 주인이 바뀌어도 함부로 헐지 못하도록 국가에서 문화제나 사적지 비슷하게 지정이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큰 교회 아마 최소한 예배당에 600명 이상 정도 들어갈 수 있는 큰 예배당이었는데 그 예배당이 아마도 교인이 점점 줄어서 도저히 건물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이 건물이 팔렸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보니까이 건물이 교회에 팔렸으면은 그냥 교회가 되었을 텐데 어떻게 하다가 보니까 술집하는 사람한테 손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건물을 헐게 되었으니 십자가만을 떼어 버리고 그거를 그대로 술집으로 만들었습니다. 별로 개조도 하지 않고 의자만 모두 치워 버리고 강대만 치워 버리고 그렇게 어 술집으로 가벼운 식사를 겸한 술집으로 바꿨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거기에서 그렇게 밥을 먹고 술을 마시는 공간이 네 개가 있는데 하나는 길 파라솔에서 파라서를 펴놓고 마시는 거고 이제 그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회중석에서 먹을 수도 있고 성가대석에 먹을 수도 있고 제일 높은 자리에 있는 강대에서도 먹을 수 있는데 똑같은 음식을 시켜도 회중석에서 먹는게 제일 싸고 그 다음에 성가 가대석에서 두 번째 제일 비싼 곳이 이 강대의 식탁을 펴놓고 거기서 술을 먹는게 제일 비쌌습니다. 저녁을 먹고 가자 그러는 거를 마음이 많이 아파서 내가 뭐 할 일이 없어서 여기에서 밥을 먹겠느냐고 갑시다. 그리고 나왔습니다. 그거를 보면서 마음에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두 가지 생각이 교차했는데 우선 첫째는 한국 교회도 나중에 세월이 흘러서 이렇게 되면 어떻게 할까? 하나님께서 내게 세우시게 한 교회가 100년이고 200년 후에 만약에 이렇게 된다면 천국에서라도 얼마나 슬플까 그런 생각이 들었고 내게 돈이 있다면 당장 이것을 사서 이 술집을 다 리고 그리고 다만 열명이 모이더라도 다시 십자가를 세우고 여기를 교회 삼았으면 좋겠다 하는 그 마음이 애절하였 했습니다.
우리가 건물 그 자체는 성전이 아닙니다. 예배를 드리면 예배당이 되지만은 술을 팔면 술집이 되고 그리고 거기에서 오락을 하면 오락실이 되는 것이죠.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몸이 성전인 이유는 우리 자신이 성전이기 때문에 성전인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 때문에 우리의 몸이 성전이 된 것이죠. 그러니이 성령님이 우리 안에 항상 똑같은 정도로 능력 있게 살아 계신 것은 아니죠. 지상에 있는 교회들이 모두 그리스도께서 피흘려서 세우신 존귀하고 아름다운 교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교회가 모두 똑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죠.
여러분 여기 모여 앉아서 이렇게 예배드리고 있지만 교회 다니면 다 신자입니까? 여러분 중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깨닫고 은혜를 받아서 열심히 있는 기도 생활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래서 성령님이 그 안에 충만하게 거하시는 신자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요즘 매우 마음이 강팍해지고 모질어져서 그래서 하나님을 향해 독한 반감을 품고 제멋대로 사는 짐승 같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성도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두 사람 모두 결국은 천국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겠지만 요즘 그 두 사람은 한 사람은 아름다운 성전이고 한 사람은 별로 아름답지 않은 성전이죠.
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어떤 교회는 성도들도 많고 예배 속에 하나님과 만나는 은혜의 감격, 죄인의 가슴을 깊이 찔러 그 죄악된 피를 쏟게 만들고 다시 태어나게 하는 성령의 능력이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사람도 적고 하나님과의 만남이 거의 없어서 핍절한 영혼들이 공연히 모였다가 핍절하게 흩어지는 그러한 병든 교회도 있습니다. 둘 다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교회. 그래서 우리들이 사랑할 교회는 틀림이 없지만 현재적으로 보면 그 두 교회의 상태는 똑같다고 말할 수 없죠.
그러면 이러한 주님이 우리 안에 풍성히 거하시는 진짜 아름다운 성전으로서의 성도의 영혼이 되기 위해서는 그들이 이 몸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결한 삶을 살아갈 때 그때 성령께서 충만하게 거하셔서 그래서 아름다운 성전이 되는 것이죠. 그 아름다운 성전이 작은 성전들로서 하나하나 모일 때에 그리스도의 몸의 본래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게 되고 그럴 때 그 교회 안에는 성령이 충만히 거하셔서 능력과 지혜 그리고 사랑으로 예수하시던 그 일의 뒤를 잇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 점에서 성도가 그리스도의 성도의 몸이 성전이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그 성전됨에 어울리는 성결하고 순결한 삶을 살도록 우리를 부르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죠. 또 하나는 서로를 존귀히 여기도록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 각 사람이 성전이라고 하는 사실은 우리가 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을 아주 귀한 하나님의 성전으로 생각하고 삼가하며 대하여야 할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 바로 아래는 누구든지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를 멸하시리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 더럽힌다라고 하는이 말이 번역이 좀 잘못된 번역입니다. 원래 희랍어 성경에는 이것이 파괴하다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누구든지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파괴하리라고 하는 그런 뜻이죠. 이것은 우리 자신의 우리들이 작은 성전을 파괴하는 방식은 크게 두 가지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첫째는 우리 스스로 자범죄에 빠짐으로써 우리의 몸을 막 굴려서 우리의 작은 성전인 이 몸을 파괴합니다. 이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책망을 받게 되죠. 또 하나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파괴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하찮게 여기거나 멸시하거나 혹은 그를 경멸하거나 비난하거나 이유 없이 그에게 모욕을 주거나 하는 이 모든 행동들은 작게는 그 자기가 비난하는 그 개인인 그 작은 성전을 파괴하는 행위이고 크게는 그 사람이 함께 붙어 있는 그리스도의 몸인 큰 성전을 파괴하는 행위가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너희가 성령의 전이다라고 하는 이 사실은 누구 한 사람 한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지체가 된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 몸을 이루는 모든 지체들이 하나의 작은 성전이 된다고 하는 뜻이죠. 이것은 성령으로 충만하고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들만 이렇게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성전인 것이 아니라 요즘 은혜가 떨어져서 실족하고 있는 지체들도 아름다운 성전이고 심지어는 죄를 지어서 아주 나쁜 영혼의 상태가 되어 있는 사람. 스스로는 자기를 막 굴려서 성전을 파괴하고 있는 그 사람도 역시 우리 앞에서는 여전히 성령님께서 그 안에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는 사실이죠.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하나의 성전으로 생각하고 그를 존귀하고 존중하게 대해주는 그 정신과 자세에 의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이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얼마나 이러한 정신으로부터 멀어진 삶을 사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에 봉사를 잘하고 성령 충만하고 헌금도 많이 하는 사람들은 성전이라고 생각하고 존귀하게 대해 주고 그리고 은혜가 떨어지고 실족한 사람들은 교회가 함께 일해 나가는데 보탬이 되지 않는다고 멸시하고 경멸하는 것은 이러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의 성전이라고 생각하는 하는 정신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유의 부족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교회가 돈 많고 세상에 지위 높은 사람들을 매우 특별하게 대접하고 하찮고 지위 없는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대우하는 이러한 것들은 복음의 정신에 정면적으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것인데 이미 이러한 일들은 초대 교회 속에서도 공공연하게 일어났습니다. 야고보 선생이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신랄하게 비난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 예배당에 잘 차려입고 돈 많아 보이는 사람이 방문을 하면은 예배위원, 안내 위원들이 호들갑을 떨고 그를 인도해서 교역자에게 소개하고 편안한 자리에 앉혔던 모양이에요. 돈 없고 가난해 보이는 사람이 들어오면 거기 서서 예배드리든지 아무데나 가서 앉든지네 맘대로 하라. 이렇게 불친절하게 대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야고보 선생이 신랄하게 탄핵하면서 그러한 태도, 성도를 그렇게 대하는 태도가 그리스도 예수의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했던 것이죠. 이러한 지적은 고린도 시에서와 같이 오늘날 물질주의적인 풍조, 이기적인 자기 사랑이 만연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에게는 더 많이 받아야 할 경고이고 반복되어야 할 하나님의 책망이라고 하는 사실이죠.
그러나 교회는 사람들의 모임이고 이 사람들이 이런 도시 속에 숨쉬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매우 특별한 방법으로 깨어 있지 아니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세속적인 도시의 정신에 자신도 물들게 되어서 세상에서 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교회에 와서 행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임무, 성도의 공동생활이 보여줘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렇게 모일 때마다 성도들로 하여금이 무리들이 함께 하는이 공동생활 안에서는 세상에서 통영될 수 없는 도달른 하늘나라의 가치가 통영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심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공동생활의 유익입니다. 이것을 보여주지 못하면 그 교회는 실패한 교회입니다. 이것을 보여 주지 못하면 그 교회에 나오는 성도들은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주고라도 그것을 살 수 있어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오늘 저에게 매우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저는 지난 주간에 아주 매우 가슴 아팠어요. 성도들이 한 150명 이상 덜 나왔어요. 왜 그랬나 그랬더니 그 야구 경기 보느라고 덜 나오면 웃어요. 웃음이 지금 나옵니까? 그런 태도들이 잘못된 태도들이다 이게. 예. 왜 죄를 그렇게 가볍게 생각합니까? 자신의 신앙의 결점을 왜 그렇게 하찮게 생각하느냐 이겁니다. 왜 진지하지 않고 말입니다. 그게 어떻게 웃을 일입니까? 물론 그중에 어떤 분들은 집 가까운 곳에서 예배를 드리셨겠죠. 심지어는 집에서 인터넷으로 예배드리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엇에 의해서도 다른 일정에 의해서 주일날 하나님을 경배하고 높이는 이것이 이 일이 어떤 식으로든지 변형되거나 방해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죠. 응. 나는 의심했어요. 그런 일이 한 분도 없었거든요. 이게 정말 내가 목회하는 교회가 맞나? 내가 목회하는 교회가 많나? 몇 번을 확인을 했어요? 응. 왜 그렇게 하세요?왜 그렇게 하세요? 졌잖아. 그래서 응. 6대0이 뭐예요? 다대 6대0.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그게 전부 다 세상의 정신이 성도의 공동생활 속으로 파고 들어온 거 아니에. 응. 정말 우울한 주일이었어요. 이 교회는 말이죠. 교회는 이러한 세상의 정신이 통용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보여 주는데 이 이 성도의 공동생활의 가치가 있는 거예요. 가치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세상에서는 정말 돈 많고 지위 높은 사람들이었는데 교회에 와서 종처럼 섬기고 이 세상에서는 정말 하찮은 사람들이었는데 교회에 와서는 정말 왕 같은 제사장들이 되어서 주님 앞에 존귀히 여김을 받고 또 스스로 낮아져서 사람들을 섬기는 이것이 바로 공동생활을 통해서 우리들이 맛보고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교만하고 높아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일체 겸손하게 행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것을 본받고 그리고 이런 정신으로 우리 이 세상에 가서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것을 깨닫게 되도록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되지 않아요. 그렇게 살아야 되잖아.
그래서 성도의 성도가 그리스도 성도의 몸이 성전이라는 사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 성전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를 존귀하게 대해 존경하고 존귀하게 대하여야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초대 교부들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작은 신이라고 생각했어요.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 우리는 모두 그 하나님 때문에 작은 신들이 된다.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이 성전 개념하고 통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러한 상호 존중의 정신이라는 것은 성경적으로 뭘 가르치는 것일까? 우선 첫째는 자연적인 잇점을 가르키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서로 존중하고 존경하게 되는데 그 사람의 사회적인 지위, 나보다 뛰어난 학식, 오래된 교회 생활의 경륜 이런 것들 때문에 그 사람을 존경하게 되는 것,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하기가 쉽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많이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도 사랑하게 되고 그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를 존경하지 존경하는 사람들을 우리도 함께 존중해 주는 것은 쉽지만 우리를 존중하기는 커녕 멸시하고 모욕하고 하찮게 여기고 공개적인 장소에서 평판을 깎아내리고 있지도 않은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려서 그래서 나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사람을 그 사람을 깊이 존중하는 것, 존경하는 것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에요. 어려운 일이에요.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만약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향해 가지고 있는 이런 깊은 존경심이 자연적인 잇점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은 교회 안에 있는 돈 없는 사람들, 세상에서 하찮는 지위를 가진 사람들, 학식이 없어서 무지한 사람들, 성격이 유별나서 이리저리 튀기 때문에 세상에서 따돌림을 당한 사람들, 교회에 와서 세상에서 봤던 것과 똑같은 대접을 받지 않겠어요?
만약에 우리가 누군가를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이 그의 자연적 잇점에 기대고 있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은 언젠가는 자연적인 그 이점의 한계를 발견하게 되고 그리고 다른 자연적인 나쁜 사실들이 발견될 때 우리는 실망하게 됩니다. 실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깊이 좌절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성도의 공동생활을 해 나가는 가운데에 함께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게 하신 그것은 이런 자연적인 잇점 때문이 아니에요. 그럼 무엇 때문일까?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 때문에 그들을 존중하고 사랑하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의 공동생활에서 유지되어야 할 상호 존중의 정신이에요.
솔직히 말해서 우리들이 자녀들을 양육할 때 제일 먼저 가르쳐야 될 것은 예절입니다. 예절입니다. 그래서 그 아이가 얼마나 공부를 잘하느냐,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느냐, 그리고 뛰어난 지도자가 되느냐 아니냐 이런 것들은 이런 것들은 나중의 문제이고 일단은 한 사람이 태어나서 교육을 받을 때에는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자신의 존재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이나 손해를 끼치는 사람은 되지 않도록 우리가 교육시켜야 돼요. 이게 바로 교양이에요. 교양.
제가 교역자들에게 항상 하는 이야기가 그거죠. 뛰어난 설교의 능력. 하늘의 불을 불러내리는 기도의 영성. 그리고 탁월한 언변과 수사력 그리고 불세출의 지도력. 이런 것들은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특별한 가치는 그야말로 하나님이 내리시는 선물이다. 그런 특별한 가치는 보편 가치 위에 세워져야 한다. 그 보편 가치가 뭐냐면 교양이다. 교양. 그래서 영성 있는 설교자가 되려고 먼저 애쓰지 말고 교양 있는 신자가 되려고 애를 써라. 그래서 많은 교회를 힘들게 하는 것이 뭐냐면은 저를 비롯해서 교회의 지도자들이 가지고 있는 이 교양 없음이 교회를 힘들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를 상식 이하로 끌고 가는 거. 예. 그러니 성도들이 정말 교회에 와서 주님을 믿고 성도가 되었지만은 지 버릇 개 줍니까? 옛날에 교회 바깥에서 교양 없고 그리고 아무렇게나 행동하던 그 조잡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예수 믿었다고 단박에 거룩하고 교양 있는 처신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까? 그렇게 안 되거든요.
그래서 이 교회 안에서는 교육 자체가 전인적인 교육이 되어야 해요. 여러분, 주일학교 교육이 맨 처음에 어떻게 생겼는지 아세요? 성경 가르치려고 만든 것이 아니라 애들 생활을 고쳐 주기 위해서 만든 거예요. 그래서 그 아무렇게나 살아가고 있는 그 도시의 아이들을 데려다가 코 닦는 법, 손 닦는 법, 인사하는 법, 응 식사하는 예절 다른 사람들에게 대해서 예의를 표하는 것, 글 읽는 거 이런 거를 가르쳐 주다가 성경을 가르쳐서 이게 주일학교가 된 거예요. 나는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어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여러분들이 어떻게 이것을 여러분의 삶 속에 적용을 합니까? 정말 여러분들이 이 공동생활 속에서 자기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손해를 끼치고 다른 지체들로 하여금 인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통을 주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것이 성도로서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자책하면서 여러분들의 삶을 공동체 안에서 온전하게 이루기 위해서 힘쓰고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현저히 부족합니다. 현저히 부족합니다. 그래서 교양 있는 사람이 되어야 교양 있는 사람이 이 덕이라고 하는 것은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을 끼치지 않으려고 하는 상호 사랑과 존경의 정신이 토대가 되는 거예요. 예.
그래서 작은 것으로부터 도무지 나의 존재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불편함을 끼치지 않도록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에요. 예. 그렇죠. 자기가 무엇인가 먹고 일어난 자리에 지저분한 것이 떨어져 있으면은 그건 부끄러운 것이죠. 왜 나의 존재로 인해서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칩니까? 깨끗이 정돈하고 일어서야 하는 거. 어떤 교회에서 휴지가 떨어져 있고 지저분하니까 목사님이 그 중고등부 학생들이 얘들아 저 좀 빗자루를 가져와서 좀 쓸거라 그랬더니 싫어요. 목사님 우리가 월급 주는 사찰이 있는데 우리가 왜 해요? 그거지 엄마 아빠한테 배운 거예요. 걔네들이 어디서 그런 태도를 배웠겠어요? 지 지금 엄마 아빠한테서 배운 거죠. 바스락 거러지 마세요.
그러지 마시라고. 그 엄마 아빠한테 배운 거지 누구한테 배웠겠어요? 그런 태도로 교회 생활을 하는 거를 엄마 아빠한테 보고 배운 거예요. 예. 그래서 무엇으로도 나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삼가하는 것 이것이 모든 덕성스러운 생활의 출발이에요. 근데 교회 안에 한번 생각해 보세요. 정말 이렇게 보면은 마음에 안타까움을 주는 사람이 참 많아. 저 사람이 성도니까 교회 안에서 저렇게 붙어 있지. 여기가 직장이었으면 벌써 도태됐을 거든. 어쩌면 그렇게 인격이 조잡해요. 그리고 어쩜 그렇게 막해요. 아마 그 사람은 가정에 가면 아내나 아이들에게 결코 인정받지 못할 거예요. 그리고 아마 규모가 있고 정상적인 직장 속에서 결코 직장 생활하지 못할 겁니다.
자기가 사장이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휘둘르는 자영업을 한다면 아마 똑똑하고 사리 분별이 있는 직원들은 아무리 월급을 많이 줘도 그 사람 밑에 못 있을 거예요. 그렇게 보이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많이 있어요. 자기 주장밖에 모르는 그 오만 불손함. 응. 아무데든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쑥불쑥 그 똥물 쏟아듯이 쏟아져 나오는 그 혈기 예 자기가 지금 말하고 있는 그 자리가 누구의 존전인지도 모르고 쏟아져 나오는 그 사리 분별할 줄 모르는 그 말하자면 대변과 같은 그 더러운 그 논변들 말이죠. 응. 그 그렇게 해서 사회 속에서 살 수 있겠어요?
그런 사람들은 사회에서 사려 깊은 사람들은 한두 번 만나고 만나 주지도 않습니다. 사업과 모든 비즈니스, 거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정당한 절차를 따라서 사람들의 상식선에서 움직이는 거예요. 내가 우리 자녀들에게도 그리고 만나는 많은 사람들에게도 항상 얘기해요. 이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은 우리를 교회를 핍박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상식을 벗어난 사람들이이 사람들이 제일 무서운 사람들이다. 예 두려운 사람들이 교회 바깥에서 창들고 칼들고 교회 불지르며 핍박하는 사람들은 무섭지 않아요. 교회 안에 있는 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 예. 이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끊임없이 상처를 받고 그리고 공동생활에 저해를 가져와요.
예. 그 왜 그렇게 합니까? 교회에 들어오는이 순간부터 교회를 들어오는 순간부터 여기는 거룩한 곳이니 삼위 하나님이 계신 곳이다. 생각을 하고 우리들이 행동하고 언행을 해야 하는 것이에요. 그게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생활이에요. 예.이 이 세상에 있는 의회 가운데 가장 예의바르게 의사가 진행되는 나라가 의정사에서 영국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내가 전문적으로 영국의 의정사에 대해서 공부한 건 아니지만은 영국에 갔을 때 누가 그런 이야기를 들려 주어요? 영국에서는 한 사람이 아무리 이치에 닿지 않는 엉터리 없는 행동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반박하는 의원이 나와서 할 수 있는 격렬한 표현의 최고는 매우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 속에는 저 자식, 개자식, 이런 용어가 섞여 있는 거라요. 그리고 왜 그렇게 이런 후진국에서 이렇게 가서 멱사를 붙들고 뭘 집어던지고 응 소자식 하는 그 원석적인 욕들이 막 쏟아져 나오는데 그 나라에서 어떻게 그렇게 점장 표현이 될 수 있느냐.
원래의 그 영국 사람들의 태생이 그 켈트족부터 시작을 해서 사람들이 앵글로 섹슨족이 넘어가잖아요. 굉장히 거친 사람들이었어요. 그 사람들을 나중에 로마가 지배하면서 그러면서 그 사람에게 예절을 철저히 가르쳤다 그래요. 의회 안에서도 초창기에서는 그랬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 속에서 이렇게 형성이 되는 거죠. 우리가 그렇게 해서는 이게 안 된다. 그래서 가장 품위 있는 절제가 있는 그런 의회가 되었다고 해요. 뭐 어느 정도가 사실인지 모르지만은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이 세상 나라를 의논하기 위해서 모인 그 국회만도 못한 그런 수준의 회의를 교회가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예.
정말 부끄러운 것이 저같이 불완전한 인간도 그런 속에서 그렇게 큰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은 어떠시겠어요? 예. 그 그렇게 하면은 안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그렇게 하면 안 되는 거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성도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상호 존경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당구공과 같은 거예요. 한 사람이 마음속에 있는 혈기와 분을 참지 못하고 누구를 모욕하거나 비난해요. 그 사람이 그것을 받아서 그다음에 자신도 혈기와 분노를 가지고 그것을 그거에 대해서 반응을 하고 탁 토해 놔요. 그러면 그 공이 다른 공들을 때리면서 막 움직이면서 당구판에 수많은 구슬들이 함께 맞으면서 소란을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그런 결과를 가져와요. 그래서 결국은 마지막에 손해가 나는 것은 뭐예요? 교회가 상처를 받게 되는 거죠.
내 우리 후배 목사들에게 항상 얘기해요. 네가 교회 안에서 매우 억울한 일을 당하고 그리고 심히 모욕을 당하는데 그래서 결국은 의견이 갈려져서 교회가 자네 때문에 찢어져야 될 상황이 된다면은 떠나라 가라요. 뭘 그렇게 대단한게 있다고 그 교회에 붙어서 그러고 사냐. 상처와 아픔을 혼자 다 짊어지고 교회 망가뜨린 목회자라고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일평생 낙인이 찍혀도 교회가 아픔을 겪는 거보다는 낫다.
사람은 당신을 불명예 목회자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주님은 다 하신다요. 싫에서 있었던 일인데 그 교회를 자세히는 모르지만 목사님이 뭔가 사립 초등학교를 하나 만들어서 그래서 미래에 자라는 아이들을 잘 교육을 시키려고 그렇게 비전을 가지고 추진을 했어요. 그 일부는 따라줬는데 일부들은 왜 돈만 없애고 그런 그 허황된 일을 하냐고 반대를 해서 결국은 교회가 둘로 나눠져 가지고 아주 치열하게 이렇게 대치를 이루었어요. 그러면 아마 평범한 사람 같으면은 뭐 옳른 일 하려 그러는데 그 싫다 그러는 사람도 있잖아요. 그러면 뭐 교회 반 갈라 갖고 나가 가지고 하든지 뭐 아니면 반 무시해 버리고 해 버리면 되잖아요.
목사님이 다 털고 혼자 사표내고 나가 버렸어요. 이유는 간단해요. 이게 뭐냐면 내가 없어지면 된다. 그러면은 내가 다 뒤집어쓰고 상처를 받고 내가 떠나도 교회는 상처를 받지 말아야 된다. 떠났어요. 그게 성전을 아끼는 정신이에요. 그랬더니 기적적인 일이 일어났어요. 목사님이 그렇게 떠나고 나니까 그 교회 교인도 아닌 사람이 그 목사님에게 너무 감동을 받은 거예요. 아, 이렇게 교회를 사랑하시는 분도 있구나. 그리고 사제 40억을 털어서 교회를 지어 줘 버렸어요. 그래서 그 교회보다 더 좋은 교회를 지어줬어요.
그런 복된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이런 정신을 그 목회자뿐만이 아니라 여러분 각자 모두가 받아야 돼요. 자, 나에게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고 비난해, 경우에 따라서는 그 말할 수 없는 모욕을 준 근거도 없는 비난으로 나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나에게 견디기 힘들 정도로 상처를 줘요. 그래요. 그러면 거기서 오직 두 가지만 존재하는 겁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거를 자기 반성의 기회로 삼고 회개할 것이고, 사실이 아니라면 하나님이 아시니 그 인간이 원래 그렇게 너절해서 세상에 살던 그대로 교회에 와서 은혜가 떨어져서 그짓을 하는데 그거를 받아서 똑같이 행동을 해서 받아쳐서 그래서 진흙판에서 개싸우듯이 싸워서 교회에 상처를 줘야지 그게 성도의 도리겠어요? 그냥 혼자 뒤집어 쓰세요. 혼자 뒤집어 쓰라고. 그리고 다 그냥 받아요. 그럼 거기에서 끝나요. 수없이 공이 날라오는데 내게서 멈춰요. 그래서 다른 당구 공들은 안 움직여요. 그 왜 그래요? 왜 그렇게 해야 돼요? 그게 교회를 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됩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 보면은 정말 힘든 사람들 많이 있어요. 어쩜 그렇게 조잡해요 인격이. 응. 근데 그런 인격을 가지고 어떻게 이 세상에서 아내에게 존경을 받으며 살겠으며 자녀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겠어요? 직장에 가면은 직장에 있는 상사에게 인정 못 받고 동료들에게 배척받고 후배들에게 멸시를 당할 그러게 딱 적합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에 많아요. 왜냐하면 원래 교회는 망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이죠. 스스로 망가졌다고 믿는 사람이 모인 것이기 때문이죠.
그러나 그런 사람들을 배척하고 같이 멸시하고 진흙탕에서 개싸우듯이 싸우고 이러는 것은 이게 바로 세상에서 하던 거예요. 세상에서 세상에서 하던 거예요. 세상에서 하던 거예요. 그러니까 그것을 누군가 어느 한 사람은 그것을 버려야 돼요. 예. 그래서 깊이 자기를 낮춰서 응. 자기를 낮춰서. 언젠가도 어느 동료 목사님이 자기가 너무 목회에 괴롭다고 그래서 내가 그랬어. 시편을 읽어 보십시오. “나는 사람이 아니라 벌레라.” 그렇게 생각하고 사세요. 언제까지 그러다 죽는 거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런 정신을 가장 잘 보여 주신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셨어요.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세상에 내려오신 그 순간부터 그분은 존귀 여김을 받을 것을 포기하시고 사람들을 섬기는 종이 되셨어요.
영광과 존귀는 아버지의 것이었고 이익과 부요함은 사람들의 것이었으며 멸시와 천대는 그분의 것이었습니다. 낮아지고 또 낮아지고 낮아졌습니다. 공생애 3년을 사시는 동안에 짐승 같은 수많은 죄인들을 만나셨습니다. 야비하고 치사하고 아주 더러운 추잡한 죄인들을 수없이 만나셨는데 어느 한 순간도 그 인간을 멸시하지 않으셨어요. 왜냐하면 그분은 아버지의 사랑으로 이 세상에 내려오신 분이었기 때문이었죠.
심지어는 너무나 무지해서 자기를 박해하는 사람들도 용납하셨고요. 심지어는 율법에 의하면은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는 간음마다 잡혀온 그 여인도 일으켜 세워 주시면서 주님이 그를 용서하시고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차가운 돌멩이 대신에 사랑의 언어로 어르만지시면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을 터이니 가서 다시는 죄를지지 말라고 다 이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자기를 나무에 못 박는 그 흉악한 죄인들을 위해서도 기도하셨습니다. 한 번도 비난을 복수로 갚으신 적이 없고 멸시와 모욕을 비방으로 갚으신 적이 없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셨기 때문이죠. 그것이 바로 예수의 마음이에요. 세상에 나갔더라면 정말 왕따 당하기에 적합했었던 인간들 왜 용납해야 합니까? 그 사람이 잘나서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을 우리의 믿음의 눈이 보기 때문에 그를 향한 사랑 때문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 때문에 우리들이 용서하고 용납하며 사는 거죠. 그 일이 어렵죠. 매우 어렵죠. 그 일이 매우 어렵죠.
그러나 그렇게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자기 비하의 삶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은 온전해져 가는 것이죠. 완전해 가. 그거를 배우는 곳이 여기 이 교회예요. 여기 이 교회예요. 여기 이 교회. 정말 마지막 날에 우리들이 행했던 일들을 파노라마처럼 모두 스쳐가듯이 우리가 보게 될 때 우리는 하찮게 생각했던 우리의 많은 행실들이 얼마나 큰 일이었는지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성도들을 존경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가득 있는 경멸의 마음, 하찮게 여기는 멸시의 마음 이러한 것들로 사람들에 대해서 아무렇게나 말하고 지체들이 보이지 않는 뒤에서 험담하고 그런 사람들끼리 모여서 서로 계획을 세우고 심지어는 그렇게 해서 근거도 없는 말로 지체들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모욕하는 이 모든 행동들은 결국은 하나님께 매우 모욕적인 행동이에요.
그래서 성전을 파괴하는 행위예요. 직접적으로는 그 작은 성전인 성도를 파괴하는 행위이고 크게는 그리스도의 몸인 큰 성전 그 자체를 파괴하는 행위인데 이런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그리스도의 몸과 자신이 떨어질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때문에 결국은 제 살을 파먹으면서 자기를 찌르는 것이에요. 그러니 그런 사람들의 영혼의 곤고함과 어리석음을 어찌 그 피곤함을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삶으로부터 돌이켜서야 하는 거예. 이 서로를 깊이 존중해 줘야 하는 것이에요.
우리 속담에 주는 거 없이 밉다라는 말이 있죠. 어떤 사람은 나에게 특별히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사랑이 안 가고 미운 마음이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사람을 사랑할 수 없게 되는지 아십니까? 아름다운 것을 발견할 수 있는 한은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귀 보면 나쁜 사람이 없다는 말이 표면적으로 봤을 때에는 잘 몰랐는데 교제를 하다가 보니까 아름다운 것을 조금씩 발견하게 되어서 사랑이 가더라는 고백입니다.
그러니 성도의 의무 중에 하나는 가장 야비해 보이는 성도 안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애를 쓰는 거죠. 자기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맞지 않는 것이 있지만 그러나 그에게 자신에게는 없는 아름다운 것이 꼭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각자는 그렇게 완전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죠. 그 그런 아름다움을 발견하려고 애쓰는 것 자체가 사랑의 의지야. 그런 사랑의 선한 의지를 발휘하는 가운데 진짜 사랑이 깊어가는 거죠. 그래서 그 사람 안에서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려고 애를 쓰는 동안에 결점은 눈에 띄지 않게 되고 장점들이 드러나게 되는 그래서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데에 이르게 되는 것이죠.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되면 그 사람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 인식돼요. 그렇게 해서 서로 사랑하게 사랑하며 상호를 상호간에 깊이 존중하며 예의바른 삶을 살아가며 이렇게 하는 것이 이것이 성도의 공동생활을 이루는 것이고 그런 공동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보여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니 이로 인해서 그는 아름다운 영혼을 유지하게 된다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상호 존중의 정신은 경쟁과 야망이 아닌 그야말로 존경의 정신이라고 하는 것이에요. 우리는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어요. 그래서 치열한 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어서 어려서부터 서로를 원수처럼 생각하고 적수처럼 생각하며 사는 것을 훈련받아요.
얼마 전 잡지에 보니까 일본에서는 다섯 살 때 좋은 유치원에 들어가기 위해서 세 살 때부터 과외를 한다 그래요. 그리고 또 하나는 유치원에 가서 입학 시험 볼 때에 면접을 잘하는 것을 가르치는 학원까지 있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일이죠. 근데 이게 모두 다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아시아에 있는 국가들이 후진성을 면하지 못하는 것이에요.
자본주의라고 하는 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결국은 경쟁하며 살게 되어 있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될 정신은 야망과 경쟁의 정신이 아니라 배려와 관용의 정신이에요. 내가 이겼어도 쓰러진 사람을 쓰러진 채에 내버려 두고 열광하는 사람들의 박수 소리를 흔들며 펄쩍펄쩍 뛰는 것이 아니라 그 박수 소리를 뒤로 하고 쓰러진 자신의 적수를 이렇게 세워 줄 수 있는 아량이 필요합니다. 그거를 먼저 교육을 시켜야 된다라고 하는 겁니다.
경쟁하며 살아가는 것은 나중에 배워도 되니까 경쟁에서 낙오된 사람들을 어떻게 도우면서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들을 배워야 된다라고 하는 그것들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우리 자신들이 그런 정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에요. 은혜 많이 받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은혜 떨어진 사람들을 용납하기 위해서 주신 거예요. 물질을 많이 주셔서 그 물질을 유지하게 하신 것은 그 돈 좀 나누어 줘서 다른 사람 쓰게 하려고 하나님께서 부자되게 하신 거예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 높은 자리에 있을 때 공평하게 처신해서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기를 펴고 살게 하기 위해서 해 주신 거예요. 뭐든지 배우고 소유하고 갖고 있고 알고 있는 모든 것들 남주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거예요. 그런 것들이 세상에서는 이렇게 함께 나누어지질 않아. 그런데 교회 안에서는 그런 것들이 나누어져야 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상호 존경과 사랑의 정신이 밑바탕이 되지 않고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 거예요. 여전히 경쟁과 시기심이 가득한 가운데 그런 것들이 동기가 되어서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교회는 남전도회에도 없고 여전도회에도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근데 제가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참 이상한게 있었어요. 이게 뭐냐면 열심 있는 여전도 회장은 있는데 그 회장 인기 끝난 다음에 열심 있는 회원되는 여전도 전직 회장 본 적이 없어요. 남전도 회장할 때에는 펄펄 뛰고 봉상하고 사람들이 열심을 안 낸다고 탄식을 하는데 임기 끝난 다음에도 열심 있는 회원이 되어서 그 회장을 돕는 전직 회장은 본 적이 없어요. 예. 구역장할 때는 구역들에게 열심을 내라고 하는데 구역장 그만둔 다음에 구역장을 겸손히 섬기는 열심이 있고 구역장을 이해해 주는 전직 구역장을 본 적이 별로 없다 얘기는 예.
그게 무슨 신앙생활이 그렇습니까? 그게 예수의 마음을 품은 신앙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꼭 무슨 감투를 씌어 줘야지만 겨우 열심을내는 것은 대부분이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 안에 자기를 낮추고 다른 사람을 존경하는 상호 존중의 정신이 있을 리가 없죠. 예. 그러니까 혈기에 가득찬 삶을 사는 것이에요. 정말 부끄러운 것이에요. 너무나 부끄러운 것이에요. 예.
항상 부족하지만 예수의 정신을 가슴에 담고 참을 수 있을 때 물론 참고 참기 힘든 때에도 견디고 그리고 멸시와 모욕은 자신이 당해도 교회는 아픔을 주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 그리고 자신이 부끄러움을 당해도 그것으로서 모든 갈등을 멈추게 하고 싶어 하는 십자가를 지는 자세. 이것이 성도의 공동생활 안에서 그리스도를 보여주게 만드는 그러한 미덕스러운 삶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공동생활 안에서 그리스도의 한 영적인 가족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겁니다. 그게 하나님의 경륜이에요. 그게 하나님의 그게 하나님의 경륜이에요.
여러분 그 한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 세상에서 배운 정신이 언제 우리 부모님에게서 어 약한 자 앞에 무릎을 꿇고 강한 자 앞에는 굴복하지 말아라. 네가 승리에도 쓰러진 사람을 이렇게 세워서 눈물을 닦아 주는 일들을 승리에 심취하는 일보다 먼저 해라. 응. 너 자신을 깨뜨려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네가 희생하는 사람이 되어라. 언제 우리 부모가 그런 거 가르쳐 줬습니까?
그 시대에 태어나서 우리는 똑같은 교육을 받고 있는 거예요. 이 군대에 가면은 이제 한번 생각해 보세요.이 아이들을 요즘에 얼마나 막 기르는지 보세요. 음식점에서 실제 있었던 일이에요. 한 애가 그 갈비집에서 밥상이 올라가서 막 뛰는 거예요. 옆에 있는 사람이 밥 먹다. 야야 야 좀 시끄럽다. 야 좀 조용히 해라. 그랬어. 그랬더니 그 자리에 앉아 있던 개 아버지가 뻘떡 일어나서 멱살을 잡고 네 자식이 뭔데 하나밖에 없는 우리 아들 기죽이냐고 야 맘대로 뛰어 그러다가 걔가 군대가 이제 그러면 고달픈 거예 아들 많은 집에 우리처럼 태어나서 형한테 치어 보기도 하고 얻어 맞아 보기도 하고 동생한테 고자질 당해 가지고 아빠한테 터져 보기도 하고 이러던 애들은 군대 가면은 잘 적응을 해요. 원래 원래 별로 대접을 못 받았으니까. 근데 그렇게 아버지가 대신 나와 가지고 멱살 잡이를 하고 야 맘대로 뛰어. 이렇게 배운 애들이 거기 가서 그런 애들이 탈영하고 자살하고 싶어 하고 그러는 거야. 응. 그런 애들은 군대 6개월 더 시켜야 돼. 좀 맘대로 되는게 아니라는 걸 보여 줘야 돼요.
그렇게 해서 자신을 꺾는 것들을 배워야 돼요. 그래서 자신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좀 희생하는 것들을 이렇게 배워야 해요. 근데 그거를 다른 사람에게 꺾는 걸 가르쳐 줘야 되겠다고 그렇게 하면 안 돼. 자기를 꺾는 방법을 가르치라 얘기야. 자기를 스스로. 어,데 그래서 요즘에 자유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해요. 그 예전에는 조금이라도 내가 생각한 틀에 벗어나면은 굉장히 힘이 들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을 고치려고 애를 썼는데 아주 좀 그 좀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어제 교회에서 결혼시켰거든요. 그 제가 줄에서 뭐 좀 맨날 창세기 2장이잖아요, 그거. 근데 아니 유례 없이 설교를 하고 나왔는데 막 사람들이 쭉 서서 말이지 인사를 하면서 오늘 주례 말씀에 은혜를 너무 많이 받았다 그랬어. 맨날 똑같은 거 했는데 뭔 은혜를 많이 받냐고. 그렇게 좋으면은 한번 다시 한번 결혼해 보라고 그랬죠. 그 집에 돌아와서 우리 집 사람 물었어요. 여보 그 사람도 그렇게 은혜를 받았대. 그래서 아니 그게 뭐 수백 번 더한 설교인데 그 뭐 토시 하나 안 틀렸는데 뭐가 그 은혜가 됐냐 그랬더니 어 특별히 그 나이 많이 드신 분들이 그렇게 은혜를 받았다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평소에 안하던 걸 좀 보거든요.
효도의 원리를 이야기하면서 뭘 얘기했냐면 그 부모를 고치려고 하지 마라. 고치려고 하지 마라. 네가 시집 가서 시부모 마음에 안 들고 네가 장가 가가서 처갓집 어 장인 장문을 왜 저러고 살까 이렇게 느껴질지 몰라도 고치려고 하지 마라. 왜냐하면 그거 고쳐지는 것도 아니고 괜히 불란만 일어난다. 있는 모습 그대로 사시게 내버려 두고 그게 죄악이 아닌 한 놔두고 네가 적응을 해라. 그게 그렇게 은혜가 됐다. 그렇게 은혜가 됐다. 응.
그럼 뭐 나한테 인사한 사람들이 아직 며느리볼 라인 안 됐는데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요. 요즘도 우리 집사람 보고 그래요. 할 수 있으면 나를 좀 꺾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하고 싶다는 대로 하게 놔둬라. 나는 아이가 지금쯤은 공부를 했으면 좋겠어요. 근데 조금 있다가 하겠대. 그러면 얘야, 아빠는 사실은 그게 마음에 안 들거든. 그렇지만 네가 꼭 그렇게 하고 싶다니까 한번 해 봐라. 이렇게 양보 내가 싫어도 그게 죄가 아니라 좀 꺾고 그래서 사람들이 피어나는 세상처럼 그렇게 좀 자기가 할 수 있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게끔 그렇게 자유롭게 해 주기 위해서 내가 손해를 좀 보고 내가 좀 불편해지고 응 내가 손해를 보고 그렇게 해서 다른 사람들이 나와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 자체가 너무 행복한 그런 공동체 생활이 되어야 된다. 그래야지만 우리 각 사람은 죽고 주님은 충만하게 살아 계시는 거. 응. 그렇잖아요. 그거 얼마나 좋고 아름다운 거예요. 응. 그렇게 해서 우리들이 영적인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거예요.
두 번을 반복할 테니 가슴에 새기시든지 적으시든지 하십시오. “이 세상에서 사과가 없이 용서될 수 있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건 가족이에요.” 가족. 그래서 이 가족이라는 두 글자는 가슴이 미어지는 단어야. 여러분들이 아직까지도 가족이라는 말 속에서 그거를 못 느꼈다면 미성숙한 인간이에요. “가족은 용서 없이 사과 없이 용서될 수 있는 유일한 공동체가 가족이에요.” 누가 그래요? 가족이 나한테 해 준게 뭐나 있습니까? 제가 그래서 “얘야, 가족은 뭘 해 주는 것이 가족이 아니라 그냥 가족이란 그게 가족이라” 그 안에서 가족 밖에서는 따돌림을 받았을 사람들이 가족에게 사랑을 받고 가족 밖에서는 멸시를 받았던 사람들이 그의 아름다운 것을 가족들 알고 있기 때문에 용서하고 사랑하고 가족 바뀌려면은 기다려 주었을 리가 없는 그 사람을 가족이기 때문에 돌아설 때까지 기다려 주고 기뻐하고 이것이 가족이에요. 이것이 가족이에요.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아내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돈 벌어오고 큰 소리 칠 직금은 아내가 꼼짝 못하지만 돈 떨어지고 늙으면 이제 멸시 받아요. 그리고 자녀들 여러분들이 힘이 있고 권력이 있을 때 마구 행사하면 자녀들이 여러분들을 사랑하지 않아요. 그래서 결국은 노년에 매우 쓸쓸하고 외로운 시기를 지나게 돼요. 그렇게 되면 안 돼.
그래서 가족 속에서 제일 먼저 자기를 깨뜨리고 자기를 깨뜨리고 사랑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사랑하고 이해받으려고 하지 말고 이해하고 자기를 깨뜨려서 다른 가족들에게 유익을 기려고 하고 내가 조금 불편하고 희생해도 가족들이 하고 싶은 대로 배려하고 이러한 삶을 살 때에 이 열매들을 노년에 다 거두게 되는 거예요. 그 이러한 가족의 정신이 공동체 이 교회 공동체 속에 그대로 구현이 돼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고 공동체를 섬기는 것을 이용해서 그걸 짓밟으면서 그 정욕이 원하는 대로 사는 막된 성도가 있어요.이 땅에 있는 성도들은 자기를 용납해 주지만 주님이 불꽃 같은 눈동자로 지켜보고 계셔요. 언젠가 한번 하나님이 혼내실 거예요. 예. 그런 쓰레기 같은 삶을 살면서 교회에 수없는 생체기를 주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칼을 댄 그 범죄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준엄하게 판단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걸 두려워할 줄 모르는 인간은 성도라는 이름은 가졌으나 사실은 배교한 사람이에요. 수치스러운 사람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매일 은혜를 받아야 은혜를 받아야 사랑할 수 있는 사람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노력하지 않아도 되지만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 나를 모욕하는 사람들을 사랑해서 명예를 보존해 주고 나를 멸시하는 사람들을 높이기 위해서 내가 낮아지는 것은 자기 죽음의 경험이 없이는 불가능한 그렇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했으면서 우리들이 점점 더 점점 더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그때까지 서로를 깊이 존경하고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 때문에 그를 깊이 존중하고 그리고 사랑하고 그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그렇게 하면서 발을 씻기는 섬김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거예요. 아프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겠죠. 그러나 그 사람의 일생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긴 생애가 될 거예요. 하나님이 많이 이뻐하실 거예요. 사람은 몰라도 주님은 기억하실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이 그 시간에 같이 기도하실 때 하나님 우리의 어리석음을 용서해 주시고 우리가 무지 속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으신 주님을 잊어버리고 교만하고 그리고 지체들을 헐뜯고 마음의 혈기를 토하고 분별없는 은사로 지체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주님의 몸에 상처를 낸 모든 것들을 용서해 주시고 우리를 주님의 피로 그 은혜로 새롭게 해 주시도록 우리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시고 사랑을 만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이 시간에도 간고하고 기도하고 주여 은혜를 내려 주시옵소서 자비하시고 사랑하는 주에 미쳐한 인생이 아버지 아버지 기도합니다. 오늘 주님 죽음을 정신이 내 안에 있거든 주 열심히 들려주시기를 주님을 하지 않아 우리를 하지 않을 이루기까지 하늘 나아가도록 역사해주시 예수 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사랑하는 주의 자녀들 위해 이제로부터 영원히 함께 있어지다. 아멘. Yeah.
Related Media
See more
Related Sermons
See more
Earn an accredited degree from Redemption Seminary with Log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