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시리도록 그립다 가족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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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골로새서 3장 19절 말씀

4장. 남편의 덕목, 사랑하라.

우리가 사랑할 수 있을까요?

요즘 우리는 남편과 아내가 서로에게 충실히 헌신하여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보다는 부부 관계에서 도덕적 상식을 깨거나 유쾌한 반전이 있는 이야기들에게 이야기들에 더 많은 관심이 갑니다. 가정과 부부 관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보다 그런 이야기들이 더 재미있게 들리는 것은 그만큼 거치러진 우리의 마음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골프를 치던 한 신사의 공이 숲으로 굴러갔습니다. 그가 들거리며 공을 찾고 있는데 요정이 나타났습니다.
하늘에서 당신을 쭉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꽤 괜찮은 사람인 거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무슨 소원을 말하든지 당신의 아내는 당신이 받는 것에 두 배를 받게 된다는 점입니다. 뜻밖에 나타난 요정의 말을들은 그 사람은 매우 기뻐하면서 첫 번째 소원을 말했습니다. 도님. 어 그러면 제가 골프를 잘 치게 해 주십시오. 지금 부부 동반으로 골프를 치고 있는데 저희 부부가 너무 못쳐서 꼴찌입니다. 요정이 대답했습니다. 좋습니다. 그런데 당신의 아내는 당신보다 두 배로 잘 치게 됩니다.
그 사람은 즐거워하며 대답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부부끼리 합산하니까요. 그러고는 두 번째 소원을 말했습니다. 제가 100만 장자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정은 다시 한번 규칙을 상기시켰습니다. 좋아요. 그런데 당신의 아내는 당신보다 재산이 두 배나 많아질 거예요. 괜찮습니다. 어차피 우리 부 우리는 부부니까요. 요정이 마지막 세 번째 소원이 무엇이냐 물었습니다. 그 남자는 한참 동안 생각하더니 요정의 귀에 숙삭이었습니다. 제게 약한 심근 근색을 주세요. 누가 지어낸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보이지 않는 벽을 사이에 두고 살아가는 오늘날의 부부의 현실을 꼬집는 것 같습니다.
부부로 살다 보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정말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아내가 자신의 자자존심에 상처를 내었을 때 폭력과 포원으로 수치심을 안겨주었을 때 자신을 외롭게 할 때가 바로 그때입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 남편은 때로 깊은 고독감을 느끼면서이 여자와의 결혼 관계를 결혼 관계을 계속 붙들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아가페 사랑으로 사랑하라.

본물은 남편들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 골레스서 3장 19절. 여기서 사랑하며라고 번역된 본문은 플라워 성경에서 아가파테라는 명 동사가 사용되었습니다. 아가파테는 아가파우라는 동사의 활용이고이 단어의 명사형이 바로 여러분이 잘
아는 아가페입니다. 우리나라 말은 사랑이라고 할 때 그 대상이 누구인지 상관없이 하나의 단어를 사용하여 표현합니다. 부모와 자식간에도 연인 사이에도 인류 전체에 대한 것도 모두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근데이 성경이 쓰였던 당시 로마의 지배 아래 있는 지역에 헬라어 공룡으로 사용하는데이 헬라어는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 사랑을 다르게 태어냈습니다. 남녀관의 사랑은 에로시, 형제 간의 사랑은 필리아, 부모 자식간의 사연적인 사랑은 솔계, 인간에 대한 신의 무조건적인 사랑은 아가페라는 자랑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성경은 남편에게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면서 그 사랑이라는 말의 에로시가 아니라 아가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아 남편에게 아내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이 이 명령은 교회 안에 성도들에게는 매우 의미 있는 것이고 교회 밖에 로마 사람들에게는 날고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이 명령이 꽤 충격이었을지는음 왜 충격이 얻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세계 로마사왕 가정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 로마세요. 아 >> 목사님 잠깐 잡음이 좀 들려서요. 혹시 예 이게 예

로마사회와 아내

골로세가서였던 당시 노마사는 기본적으로 가정을 근간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노마의 통치자들의 가정이 견실하여 확고한 질서 위에 있을 때 안정된 국가를 이루올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정부는 아이들의 교육과 가정의 행복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전통적인 연구에서 노마의 가정은 보편적으로 대가족이 사였고 공동체적 성격이 강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남녀간의 사랑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작은 단위의 가정도 꽤 많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어쨌든 노마는 기본적으로 남존 여비 사상이 지배했던 사회로서 여성들은 남성의 비해 올뚱하다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에 대한 이해라든지 가정의 질서, 사회의 구조 등 모든 것이 남성 중심을 흐르고 있었습니다. 노마시대의 남성은 힘과 권력, 사운 권의로 가정을 통제하였습니다.
자녀를 복종시켜 올바른 심의로 자라게 하였고 아 철저한 규일 속에 가두었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가부장적인 체대를 구현하는 것이 이상적인 가정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내의 역할은 가정이라는 울타리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만약 아내가 가정을 벗어나서 공공 장소의 모습을 드러내거나 자신의 의견을 발표한다면 이것은 모두 남편이 욕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알려진 학계의 연구에 의하면 1세기 노마 시대의 인간의 평균 수명은 25일세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중에서 특히 가인기 여성들의 사망이 높았는데이는 아이를 나타가 죽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의 위치는 매우 불안하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내도 여성이으니까 남성 에로스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겠지만 당시 모든 사랑을 고려해 볼 때 노마의 대타수남편들은 아내를 아가페의 사랑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남자들은 여자들을 얍잡아보고 이했으며 필요에 따라서 폭력으로 다스려야 하는 전제를 여겼습니다. 골로서 세상가 쓰여진 당시의 사회적 정역을 고려해 볼 때 아내를 아가페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그 어 시대 사람들에게 매우 생소하고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세상의 제사와 하는 다른 제사를 따라 살도록 부름받은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이 세상의 가치관에 대한 저 대해 대항하면서 살아야함을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성향과 행위.

그렇다면 사랑이란 무엇일까요? 어 본질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은 타자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고자 하는 영혼의 경향성입니다. 이것이 마음에 작용할 때는 성향으로 나타나는데 좋아하는 감정을 동반합니다. 또한 현상적인 의미에서의 사랑은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발견되는 인격적인 교재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감정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에 속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마음이 움직여서 하는 사랑만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사랑을 지나치기 감정의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이에 비하여 감정에 어 움직임이 없을 때에도 사랑의 관계가 요청하는 의무를 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해야 한다는 주장은 사랑을 이성의 측면에서 본 것입니다.
근데 이후로 서양에서는 대처로 사랑을 감정 쪽에 두려는 경향이 강했지만 동부가에서는 사랑을 우선적으로 이성에 이성의 기능에 두었습니다. 유교에서는 사람을 갖추어야 할네 가지 마음 가짐을 인의 예지라고 보았는데 후일 한나라 시대에 와서 동중서라는 인물이 여기에 신을 더하여 오상이라고 불리게 되었습니다. 아무튼 동부가의 사상에서는 이인의 지내 네네 가지는 사람이 원래부터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인간은 인의 예지를 어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즉 인간이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인니 예지를 이룰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 짐승과 같은 삶을 살아 살 수도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성리하게 사단칠정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사단 7정이란 문자 그대로 사단 곧네 가지 발단과 칠정 곧 일곱 가지 종을 의미합니다. 사단은 어 인간의 본성에서 오르나오는 선천적이고 도덕적인 능력을 말하는데 이성에 속하는 작용입니다. 이와 대적으로 칠정은 인간의 본성이 사물과 만날 때 표현되는 감정입니다.이 이 두 개념을 두고 유학자들이 논쟁을 버리기는 했으나 정리하자면 사단 실정은 이성만 있고 감정이 없는 인간도 인간다운 삶을 영의할 수 없고 이성 없이 감정만 출렁거리는 삶도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간다운 삶이라고 할 수 없음을 보여줍니다. 사단은 식은 지심, 수호 지심, 사양 지심, 시비 지심으로 이루어집니다.
불쌍한 자를 측근히 여기는 자비로운 행동을 실행 실제로 시행할 때 실행할 때 주심으로 인을 이룹니다. 자신의 옳지 못함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옳지 못함을 미워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보일 때 수워지심은 의를 이룹니다. 겸손하여 남에게 사양 할 수 할 줄 아는 마음을 실제로 실천할 때 사양지심은 예를 예를 이룹니다. 또한 오류와 진리 사회에서 올바른 것을 용기 있게 행동으로 옮길 때 시비지심은지를 이룹니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이와 같이 의지를 가지고 인의 예지를 이루고 사는 것이 참 인간으로 사는 대의라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이는 타인에게로 뻗어나가는 관심과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맹자는 측근 지심이 인을 이룰 수 있는 실말이라고 보았는데이를 인지단이라고 합니다.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는 치근 지심은 곧 동정심입니다. 맹자는 인간과 인간 사이를 있는 마음, 타연의 불행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 마음, 즉 동정심이인 근본이라고 보았습니다.이 최근심이 이성에 속한 사단의 하나라는 것은 동부가 사상의 사랑을 이성의 기능으로 보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을 이성적 존재로만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사단과 함께 칠정 즉 히노애구 에오욕의 출전거리 출렁거리는 감정에 영향을 받아서 이런 삶을 살기도 하고 저런 삶을 살기도 하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제가 성경을 설교하면서 굳이 유교의 인간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거기서도 우리는 인간이 어떠한 존재이며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어 하는 지혜에 대한 보편적인 갈망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결코 사랑을 단지 감정의 문제로만 보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6장 33절 35절. 그렇다고 이성만의 작용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성경적으로 사랑은 이성과 감정 전체에 걸쳐 있는 전인적인 영혼의 작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정적으로 그렇게 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만이 사랑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그렇게 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입니다.

해야 하는 사랑에 직면하다.

사랑에는 되니까 하는 사랑이 있고 또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은 두 종류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사랑의 두 가지 측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의 성향적인 측면과 의무적인 측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이 연애를 할 때는 서로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사랑이 됩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그 사람이 보고 싶고 만나고 돌아서면 생각납니다. 밤이 되면 그 사람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듭니다.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희생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라 즐거움입니다. 이런 사랑은 되니까 하는 사랑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후에는 항상 그런 식으로 사랑하는 사랑이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남편과 아내로 살아갈 때 저절로 사랑이 되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의지적으로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할 때도 많습니다. 그때는 되니까 하는 사랑이 아니라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사랑의 필요성에 직면하게 됩니다. 아직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결혼에 대한 환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아니면 죽고 못 사는 남성 혹은 여성을 만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만나기도 어렵거니와 그런 사람과 결혼을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감정의 동요가 심한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사랑해야 할 때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에게 되는 사랑이 뜨겁다고 해서 해야 하는 사랑도 그렇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모든 것에서 균형을 이루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남녀가 서로 사랑할 때도 이성과 감정의 균형을 이루는 이루고 있는 사람의 사랑이 훨씬 더 믿을 만합니다. 저는 결혼한지 10년 15년이 지났는데도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면 가슴이 설렌다는 아내를 가끔 만납니다. 멀리서 남편이 걸어오는 모습만 보아도 얼굴이 붉어진다는 여성도 두물게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결혼한지 오래된 남자 가운데서는 아내에 대해 그렇게 말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신경과학에서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물리적 원인을 몇 가지의 신경 전달 물질과 호르몬에서 찾습니다. 처음 사랑에 빠질 때는
도파민, 노루에, 닐에틸 아민 등의 화학 물질의 작용으로 결렬한 격렬한 연정의 감정을 느끼게 되지만 그 후 2에서 3년이 지나면 이러한 작용들은 약해지고 바소프레신, 옥시토신, 엔드로핀 등의 호르몬 작용으로 보다 안정적인 사랑의 감정을 을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설명에 반발하는 학자들도 많지만 어쨌든 이러한 과학적 설명은 사람이 사랑하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착각 현상 소위 콩깍지의 유효 기간이 길어받자 2에서 3년을 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물론 사랑에 대한 이러한 설명을 전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호르몬을 비롯한 신경 전달 물질이 인간의 심리나 행동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어느 정도 인정하지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그런 물질적이고 화학적 작용의 규칙대로 반응하는 단순한 기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는 다른 자연적 사물에는 없는 마음이 있으며 인간의 도덕적 결정은 단지 내의 물질뿐만 아니라 다양한 요인들의 종합적인 작용에 영향을 받으면서 이루어집니다. 후불로 살아가다가 근태기를 근태기가 찾아옵니다. 넉넉하게 잡아도 2에서 3년이 지나면 관계가 시들해집니다. 그때 아이가 태어납니다. 아이가 태어나면 부부의 관심사가 아이에게로 옮겨갑니다. 여보, 오늘 아이가 웃었어? 오 그래. 어떻게 웃었어? 아, 지금 웃는다. 아이를 징검다리 삼아 부부 간의 소통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다가 첫째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면 아이의 모든 일상이 예정과 같은 놀라움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그때 또 둘째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러면 부부에게는 새로운 세상이 열립니다. 둘째 아이는 첫째 아이와는 또 다른 즐거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그렇게 살다 보면 두 사람 사이에 에로스 사랑 같은 뜨거움이나 가슴보다는 친구 같은 감정이 흐르고 가죽 애가 흐르면서 관계가 더 끈끈해집니다. 대부분의 부부가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압축해서 설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부로 사는 것이 쉬운 일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부부는 긴 세월을 함께 지내면서 온갖 풍파를 다 겪다 겪습니다.
수많은 갈등과 고통이 왔다가 사라지고 때로는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덮어지고 그러다가 또다시 찾아오기도 합니다. 때로는 상대방의 결함이 찌르는 칼이 되어 아물기 어려운 상처를 남기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남편에게 아가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아가페는 결코 될 때만 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 되지 않을 때가 없으시지만 우리에게는 그럴 때가 많습니다. 사랑하고 싶을 때뿐만 아니라 사랑할 수 없을 때도 사랑하는 것 용서하고 싶을뿐만 아니라 용서할 수 없을 때도 용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할 수 있을 때만 아니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은 때에도 사랑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결함이 많은 아내를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아내를 사랑할 수 없을 때에도 사랑하며 사는 길은 무엇일까요? 한낮 인간의 불가한 남편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현실적 고민은 사랑의 원천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그래서 아가페와 까리타스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아가페와 까리다스

성경은 사랑의 원전이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재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요한일서 4장 10절.이 이 세계와 인간을 창조하기 전에도 하나님께선 사랑이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이 하나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이 사랑으로 인류를 창조하셨고 창조된 인류와 영적인 관계를 맺고 가족과 같은 사랑 안에서 교지하며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를 직접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인류는 인간의 몸을 통해서 태어나도록 하셨습니다. 하아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음을 생각한다면 모든 인류는 결국 한 몸에서 유대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서로 사랑하였을 때 그것은 두 사람만을 묶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 두 사람이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께로부터 온 그 사랑이 자식에게 그리고 이웃에게로 더 나아가 온 인류에게로 확장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리하여 자연 세계와 화목 관계를 이루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처럼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우가 누렸던 부부간의 사랑은 자기 만족적인 이기심 안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예수를 향해 끊임없이 뻗어나가는 우주적인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 아담에게 유리한 인류는이는 내 뼈 중에 뼈요 살 중에 살리라. 창세기 2장 23절은 고백을 서로가 서로에게 하면서 사랑하며 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인류는 타락했고 사랑해야 할 사람들 간의 관계는 깨어졌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고백을 아담과 하와의 가정은 창세기 3장에서는 파경에 이르게 이르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가 서로 싸웠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가 하나님 앞에 범죄하였더니 부원의 관계가 깨어졌습니다. 그것은 곧 남편과 아내 사이에 사랑의 깨어짐이었습니다.이 관계의 깨어짐은 사랑의 격과 미움,시기 등으로 나타났을뿐 아니라 아담과 하와의 자녀 안에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므로 여실이 드러났습니다. 또 인간은 정복하고 다스려야 할 자연으로부터 해를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사는 존재로 전락하였습니다. 따서 땀을려 노동을 하는 고통을 통해서 겨우 먹고 살 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충만한 영적 생명과 사랑을 받음으로써 그분의 형상을 부여받은 존재답게 살 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은 곧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게 하는 힘이 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짐을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에게서 소외되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사양과의 관계도 심지어 자신과의 관계도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관계를 고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끊임없는 자비와 사랑과 긍휼을 베푸셨고 더 없는 사랑을 보여 주셨으니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입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이 세상에 오신 성자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하셨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그리스께서는 하나님의 아 사랑의 현이셨습니다. 그 아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까리따스 곧 지수의 사랑입니다. 다시 말해서 까리따스는 하나님의 아 사랑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서 아무런 이기심이나 그릇된 동기가 속이지 않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 때문에 하나님과 이웃을 향해 갖게 된 지수의 사랑입니다. 그의 사랑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유래되지만 하나님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살아야 할 모든 인간들과 사물을 향한 사랑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이 이런 깔리타스를 가져옵니다.

절망적인 기준

에베소서 5장은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되 그 기준이 어때 할지를 제시합니다.
성경 남편들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신 것 같이 사랑하고 명령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주신 것 같이 하라. 에베소서 5장 25절. 아내들은 지금 어떤 시대인데 남편에게 복정하라고 하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남편들은 더 높은 수준의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죽기까지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는 명령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가능하기나 한 명령입니까? 사랑이 되지 않을 때도 아내를 사랑하되 건성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생명 버린 것처럼 그렇게 아내를 사랑하시나요? 그것은 아내를 위해서 남편을 죽기까지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까? 도대체 어느 남편이이 기준 앞에서 아내를 충분히 사랑하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이를 위해 자신을 주셨습니다.
로마서 5장 8절. 그분은 교회를 정결하게 하고 온전하기 위하여서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서 재물로 바치셨습니다. 에베소서 5장 2절. 그뿐 아니라 지금도 구원하는 우리를 돌보시고 끊임없이 용서하십니다. 그리고 용서받은 우리가 온전케 되기까지 교회를 사랑하기를 쉽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로마서 8장 34절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향한 이런 사랑을 생각할 때 남편은 자신을 부름받고 있는 아내의 사랑의 높은 기준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속에서 완전한 하나님이 시작했기 때문에 인간들은 무한한 사랑 것이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아내의 결정과 결함 심지어 오류를 발견하면서 그것이 나를이 여자의 남편을 불러 주신 이유라고 쉽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더우거나 아내를 온전하 온전케 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남편들의 희생 요구가 되는지를 생각한다면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성취하려는 시도 자체가 무모한 일임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이처럼 부족한 아내를 사랑하려고 하 하면 할수록 남편은 자기가 한 인간을 끝까지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합니다. 진정한 사랑이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요한일서 4장 10절. 사랑이라고 부름받은 사명과 자신 속에 사랑의 능력이 없는 현실사에 끊임없이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끊임없이 사랑하시는데 교회에 바라보시는 목표를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를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미없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5장 26, 27절라고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목표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고 흠미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결혼의 정신이 그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희생을 발판으로 삼아 자신의 비전을 성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격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오히려 남편은 아내를 만나서 그 허물과 잘못 나 어 나쁜 것을 발견할 때마다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저 사람이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저런 상태에서 일평선 살았을 텐데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게 하셔서 아내의 모자른 부분까지 채우게 하셨는 하셨구나.
이런 고백을 하고 나면 남편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깨달음을 위해서 남편에게 결함이 있는 아내를 붙여 주셨습니다. 그래야 서로 섬기면서 결과 약점을 고치게 하고 용납하기도 하면서 살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 만약 남편이 참으로 아내를 사랑한다면 아내의 결혼과 결정과 결혼을 볼 때 가여운 마음이 들 것이고 그런 결정을 보완하여 그가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자신은 아무래도 괜찮다고 고백할 어 할 것입니다.

사랑의 힘을 공급받으라.

어느 한 시기에 유행하는 우승의 말은 당시에 당시의 사회 의식을 반영합니다. 다음과 같은 이야기들이 우리 주위에 널리 퍼지면서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우리가 그 시대의 정신에 지배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중에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묻습니다. 이번 딸이 자네 부부 결혼 10주년이라며? 어, 맞아. 자네 와이프한테 무슨 선물을 해 줄 거야? 아내가 늘 집에서 살림하고 아이들 키워내라 고생해서 이번에 호주 여행시켜 주려고 주위에서 친구들이 와 와 하며 놀랍니다. 질문을 한 친구가 다시 묻습니다. 대단하다. 10주년에 호주 여행이라니. 그럼 20주에는 주년에는 그 남자가 대답합니다. 그때 데려와야지. 어떤 남자가 임정식전에 아내를 불렀습니다. 여보, 내가 아무래도 더 이상은 못 살 것 같아.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평생을 남편과 싸우면서 살았지만 죽기 직전에 그의 모습이 안스러워 아내가 말합니다. 여보, 내가 유원 하나만 할 테이니 꼭 들어주든지 말씀하세요. 생전 처음 착한 여자 여자처럼 앉아 있는 아내에게 남편이 마지막 유원을 남깁니다. 내가 죽거든 절대 혼자 살지 마. 굳이 그렇게 외롭게 살 필요 없어. 나 죽으면 바로 시집 가서 행복하게 살아. 아내가 무한 감동을 받으면서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사람이 죽을 때가 되면 철이 든다더니 남편이 말을 있습니다. 나 죽으면 내 친구 아무게랑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아. 아내가 깜짝 놀라서 대묻습니다. 여보, 그 사람은 일평생을 괴롭히던 나쁜 놈이잖아. 그래 맞아.
당신과 그 사람을 맺어 주는 것이 내가 그 자식한테 할 수 있는 최대의 복수야. 이런 이야기가 인격적으로 아내에게 사랑받고 또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들에게는 그 그리 우습게 들리지 않지만 그렇지 않는 남편들에게는 공감을 불러일히는 통쾌한 이야기가 됩니다. 오늘날 이런 이러한 우수된 말들이 유행하는 것은 부부 관계가 사랑도 없이 어떠한 어려움을 함께 극복할 힘도 없이 비상적인 관계가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아가페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정말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가정을 이루기 위한 교육이라는 것을 받아보기는 했지만 했는데 했는지 어 의심하게 만드는 아내들도 있고 자신의 성질을 한 번도 주여 본 적이 없이 남편이 자신의 성질을 모두 받아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아내들도 있습니다.
남편이 주님의 말씀대로 아내를 사랑한다고 해서 아내가 항상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결정으로 인해 남편에게 미안해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적하면 되들기 일수이고 사랑이 식었다고 토라지는 것이 일반적인 아내들의 모습입니다. 가정에서 자기를 꺾고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사는 교육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남녀가 있다고 칩시다.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채이 남녀는 정경기가 되었다는 이유로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은 무한한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상한 남자와 망가진 여자가 만나서 평생 동안 우한히 자기를 희생하며 살아야 하니 어찌 힘이 들지 않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록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내게 명령하시기 전에 당신이 원하는 것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먼저 달라고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그것은 곧선을 행하게 하는 힘인 은혜를 강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그 관계를 지속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에게는 매일매일 부어지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 은혜를 받을 때 남편은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이 땅에 오신 것은 망가진 인간 관계가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복구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셨습니다. 로마서 5장 10절부터 11절. 그 관계가 회복된 후에 인간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은혜를 힘입어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은혜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지속할 수 있게 하는 사랑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 네. 목사님 >>

맺는 말

한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분해 넘치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외로울 수 있지만 단 한 사람을 마음쳐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0장 35절. 그러나 한 사람을 마음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인류를 사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은 바로 내 옆에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아이들의 굶주림 때문에 눈물을 흘리기 쉽습니다. 북한은 인권 문제에는 마음 아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옆에 있는 한 사람을 사랑하여 그 사랑에 끝까지 책임지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완성은 높은 지위에 도달하는 것이나 엄청난 재물을 소유하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완성은 사랑의 완성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인간성의 완성도는 그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과 어떻게 사랑의 관계를 맺으며 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남편들에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어떻게 사랑하여 하나님의 자녀라 칭함을 받게 하셨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요한일서 3장 1절.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그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사랑할 힘을 공급받습니다. 골로새서 1장 11절. 우리는 그 은혜의 힘으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서하고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을 용납할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이 이전에 아내를 사랑한 것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베푸신 은혜 때문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에 한 남편이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은 곧 신자로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과정이 됩니다.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그 많은 은혜가 바로이 일을 위한 것입니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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