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공동생활_나눔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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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 및 주제 분석: 나눔의 정신 - 성도의 공동생활]
[구조 및 주제 분석: 나눔의 정신 - 성도의 공동생활]
[소그룹 성경 공부 활동지] 나눔의 정신
[소그룹 성경 공부 활동지] 나눔의 정신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제 4장입니다. 4장 4장 32절입니다. 32절 93쪽입니다. 우리 모두 같이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시작.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재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이가 없더라. 아멘.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재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이가 없더라.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주님께서 지켜 주시고 오늘이 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되었나이다. 오늘이 시간에 저희와 함께 해 주셔서이 말씀이 저희에게 큰 은혜가 되게 하시며 성도가 공동생활을 이루어 나가 있어서 말할 수 없이 유익하게 하옵소서. 저희들 가운데 성령님께서 오셔서 우리 예배를 주관하시며 교육관과 요하실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든 지체들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내려셔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 이 시간에는 성도의 공동생활을 위해서 나눔이 나눔의 정신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나타난 공동체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 승천하신 이후에 일어났던 성령 강림 사건은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은 우선이 성령 강림 사건이 선교적으로 본다면은 교회 공동체를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시켜서 복음을 전하게 하는 선교적 사건이었습니다. 또 설교사적인 측면에서 본다면이 성경 강림 사건은 설교자를 만들어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의 교훈에 익숙해졌던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체험하게 하심으로써 그들 모두 그 하나님의 말씀 안에 깃들린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경험하고 외칠 수 있는 선포의 제목들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죠.
그래서 가는 곳마다 예수는 그리스도라 외치고 논리 있게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는지를 가르쳐서 그들로 하여금 신앙을 갖게 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죠. 교회론적으로 본다면이 성경 강림 사건은 공동체로 하여금 지순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게 하는 사랑 강림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이 성령의 강림으로 말미암아 각 신자는 강력한 회심을 경험하고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그 사랑은 한 순간에 물붓듯 교회에 부어졌고 그때의 성도들은 공동생활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재산을 다 팔아 사도들의 발 앞에 두고 교회는 모든 재산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그것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는 완전한 공동체의 모습을 이루어갔던 것이죠. 이미 몇 주 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러한 성도의 완전한 문자 그들의 공동생활은 영원히 유지되어야 할 공동생활의 모습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어느 시대든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가정을 버리고 하나로 살아야 된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하나된 공동체가 진정으로 어떤 정신을 가지고 살아야 갈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한시적으로 허락하신이 특별한 사건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성도들이 완전한 문자 그대로의 공동 생활을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마치 교회의 영적 수준이 심각하게 하락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볼 때 동의할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흩어져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가르치고 있고 그래서 우리는 공동생활의 정신을 가지고 흩어진 삶을 살아야 될 사람들이죠.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들이 아무리 많이 흩어져서 각자 가정을 이루고 이렇게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초대교회 공동체를 보여 통해서 보여준이 완벽한 성도의 공동생활의 모습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성도의 공동생활의 표준을 제공해 주고 그 정신을 우리에게 표준으로 제시하는 것이죠. 오늘 성경에 보면은 이러한 사랑 강림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성령 강림 사건 이후에 교회가 물질적인 면에 있어서 완벽한 상호 유통을 이루게
되었다는 것이죠. 본문의 배경은 이제 그렇게 성령 강림을 경험한 성도들과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핍박을 받게 됩니다. 특별히 사도들이 강한 핍박을 받게 됐을 때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승리한 사실을 보여 주는데 이러한 위기 앞에서 교회는 더욱 한 마음으로 기도했고 성령 강림 사건 때 일어났던 것과 똑같은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을 경험할 때 똑같이 성도들은 복음을 경험하고 사랑의 위대한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물건을 팔아서 교회에 바치고 그리고 그들은 공동생활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이죠. 그러면 이러한 성도의 공동생활과 물질이 어떤 관계에 있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들이 생각해야 할 것은 물질을 경멸하는 것이 성도의 공동생활에 있어서의 물질관은 아니라고 하는 것이죠. 흔히 기독교 역사에 보면은 물질을 경멸하는 것이 영혼의 놀라운 덕성을 이루는 길이라고 믿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가나안을 택하고 물질을 경멸하고 미워함으로써 자신의 영혼을 고향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러나 사실은 이것은 성경적인 성경적으로 볼 때 올바른 견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견해는 물질을 경멸함으로써 영혼히 고향될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이 모든 물질은 오히려 선한 것이고이 선한 것을 인간이 어떠한 목적에 사용하느냐
이것이 정말 성도의 공동생활의 아름다운 정신을 유지하게 만든다고 하는 것이죠.이 이 물질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선한 것이지만 물질 자체는 도덕적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도덕적 능력을 가진 인간이이 물질을 어떻게 배치하고 어떤 질서에 놓고 그것을 무슨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느냐에 의해서이 물질은 악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기도 하고 선을 이루는데 기여하기도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물질 자체가 우리의 영혼을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의 선함과 악함이 우리의 영혼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이 물질은 그 자체를 경멸하는 것이 신앙의 높은 덕성을 이루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이 물질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이 세상에 죄가 들어온 이후로이 물질은 더더욱 하나님 앞에 부도덕한 인간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는 어긋나는 방식으로 사용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써이 물질을 사용하는 인간들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이 세계가 더욱 타락하고 망가지게 된 것이죠. 그렇다면 우리 믿는 사람들의 사명은 물질을 경멸하기보다는 오히려이 물질을 적극적으로 취하고 적극적으로 소유해서 그래서 그것들을 다른 사람들의 손에 들어갔더라면은 그렇게 쓰여질 수 없었을 물질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창조의 목적에 합장 합당하도록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 이것이 성경적인 물질관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께서이
세상에 주신 모든 물질들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유업으로 물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불신자들은이 하나님의 유업을 물려받을 법적 권리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물질과이 세상에 있는 소유들은 불법적으로 하나님의 것을 점거한 것이죠. 그러나 세상 법정에서 우리가 이것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는 수 없이 그들과 경쟁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그 경쟁 속에서이 물질들을 우리들이 찾아내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것을 자기 것처럼 차지하면서 누리고 있고 그것들을 창조의 목적에 어긋나도록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들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공정하고 정당한 경쟁 관계를 통해서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힘입어서 빼앗아야 합니다.
경정당한 방법으로 그것들을 빼앗서서 그래서 그 모든 물질 세계 위에 자기의 깃발을 꼽았던 그 사람들의 깃발을 꺾고 하나님의 깃발을 꽂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물질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신이 세상의 목적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사용되도록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그 물질을 가지고 계셨더라면 사용하셨을 그런 방식으로 그 물질들을 사용함으로 그 물질을 통해서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이것이 바로 성도들이 견지해야 할 물질관입니다. 공동생활은 바로 이런 물질을 공동적으로 사용해서 그래서 집단적으로 힘을 합해서이 땅에 물질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오게 하는데에 기여하도록 부름을 받은 소명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에 우리들은 어 개인적인 탐욕을 버린 것에 대해서는 우리들이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이 물질을 되찾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욕망이 없는 사람들은 살았으나 사실은 죽은 자와 같습니다. 제가 제일 싫어한 말 중에 하나가 성도들이 기업을 방문하러 갔는데 아이 목사님 저는 아무 욕심도 없습니다.이 사업해서 밥이나 먹으면 되지 제가 무슨 욕심을 부리겠습니다. 그럼 정말 그 낙심이 돼요. 어 왜 그럴까? 어 왜 그럴까? 그 사업을 하면 마음에 꿈을 가지고이 사업을 잘해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해야지. 밥이나 먹으면 됩니다. 그러니까 기억 하나님이 그 사람을 세상에 보냈을 때 그 사람은
밥버리하라고 보낸 사람밖에 더 돼요. 아니 밥이야 뭐 꼭 그 사업을 해야지 먹겠어. 뭐 어디 가든지 교회 와도 이렇게 먹겨 주는데 말이어. 아 그 왜 그래? 그러면서 또 더 답답한 건 뭐냐면이 사람이 그 은근히 자기 의가 되는 거야. 많은 사람들은 뭐 사업을 해서 막 돈을 벌겠다. 막 몸부림을 치는데 자기는 그런 욕심 없다라고 하는 거지. 그런 욕심이 없으면 그 사람은 살았으나 죽은 사람이에요. 물론 그 사람은 막 열심히 벌어서 한번 신나게 쾌락을 즐겨 봐야지 이러면서 사업하는 사람보다는 나은 사람이죠. 난 사람이지. 그러나 왜 바보같이 그런 사람하고 비교를 해? 아니 자기가 그렇게 밥이나 먹으면 되지 하는 동안에 경쟁사는 그 사람 밖릇까지 뺏어 가려 그래.
그래서 경쟁사가 돈을 많이 벌어서 그 사람들은 그 돈 가지고 정치인들에게 바치고 그래서 나라를 부패하고 그 돈 가지고 말이요. 호위호식하고 쾌락을 즐기고 그돈 가지고 부동산 투기하고 이런 식으로 해서이 땅을 자꾸 망가뜨려. 그러면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 직업 전산에 갔으면 그러면 남들이 그렇게 살 때 치열하게 노력을 해서 그걸 빼앗아서 그렇게 못 하게 해야지. 그렇게 밥이나 먹으면 되지요. 이러는 것은 그런 사람들의 그 나쁜 삶을 수수 방관하는 그런 그 부동의 공해요. 그 무지 중에 그들은 사람들의 공범자가 되는 거라. 왜 그래요? 응? 그 밥이나 먹고 살 바야 길거리에서 깡통 들고 있는게 낫지.
왜 그렇게 사업을 그렇게 해요? 그 응. 근데 그 그런 사람에게 무슨 꿈이 있겠느냐. 그러면 안 돼요. 그 그렇게 생각하면 안 돼요. 근데 여러분 만약에 이렇게 생각 목사님 아 이렇게 성도들을 전도를 해야 돼요. 그러는데 아 여러분 전 아무 욕심 없습니다. 밥이나 먹으면 되죠. 그럼 여러분 저 목사로 생각하겠어요? 그럼 목사의 소명과이 세상에 파송받은 성도의 사명이 틀리단 말이에요. 항상 오늘이 예화를 가슴에 깊이 새겨요. 여러분들이 학교 선생님이면 밥이나 먹으면 되지. 그럼 그 선생이라고 알 수 있어요. 그거 사꾼이지. 그럼 똑같이 기업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야. 회사 다니는 사람도 마찬가지고 말이죠.
사꾼 사꾼 신자야. 사꾼 신자. 응.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열심히 사업을 해. 다른 사람이 다섯 시간 잘 때 한 시간 덜 자고. 어. 다른 사람이 3세시간 고민하면 네시간 고민하고 응. 다른 사람이 한 시간 연구하면 여러분들은 두 시간 연구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하면서 어떻게 해야든지 열심히 사업을 해야지. 그래서 돈을 벌어야 하는 거예요. 돈을 응. 돈을 벌어야 하는 거예요. [웃음] 옛날에 우리교 다니던 성도 있었는데 화장품 가게를 했어요. 그러면서 자기는 그 가게 하면서 내일 섬겼대서 어떻게 섬겼냐 여러분? 전도서 사모님 오시면은 구름무 하나 드리고 선교사모님 오시면 영양 크림 하나 주고 목사님 사모님 오시면은 크린싱크림 하나 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망했지 이러니까 예
망하지 당연히 망하지 그리고 막 열심히 섬겼대 기업은 그렇게 하는게 아니에요. 그렇게 하는게 그렇게 하는게 아니에요. 그렇게 하는게 아니 기업은 그냥 도렷한 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헌신해서 그래서 돈을 벌어야 되는 거예요. 그 대신 그 부정한 방법으로 하면 한데 정정당하게 해서 돈을 벌어야 됩니다. 근데 그 돈을 버는 거보다 더 중요한게 있어요. 그게 뭐냐면 그 돈을 버는 모든 것들을 움직이는 마음의 중심이 돈에 대한 탐욕이어서 안 된다요. 오히려 그렇게 다 벌어서 그래서 그것을 올바른 질서대로 이게 써야 돼요. 그러니까
아 요새 기업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기도 생활 못 합니다. 그게 지금 바보짓 하고 앉았는 거예요. 그래 그렇게 물질이 많이 들어오게 될 때 그때 흔들림이 없이 올바른 정신을 그 사람이 안 가지고 있으면 그 물질을 하나님 원하는 방법들을 쓸 수 있겠어요? 다윗이 누구예요? 일생 마음 전체를 하나님 앞에 드렸던 사람이에요. 근데 결국은 마음과 영혼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고 나니까 타락하잖아. 자기가 다윗보다 나. 뭐가 낫긴 뭐가 나요. 신앙 없고 돈 많이 생기고 사람들이 와서 굽신거리면은 그 사람이 뭐가 되겠는지 생각을 해 보세요. 그게 인간이라는게 그게 별거 아니에요.
어 그런데 이번에는 사업에 빠져 가지고 말이지 기도도 안 하고 심지어는 주일도 범하고 이렇게 살아가 우리는 그런 사람 기업 봐야 아무 희망 못 느껴요. 그 또 다른 종류의 이상한 사람이 되어서 그 물질을 자기 질서대로 사용할 거야. 물론 교회 11조는 낼지 모르겠어요. 예. 그러니까 보탬이 안 돼요. 그렇게 해 가지고 결국은 망가진 방법으로 또 사용할 거라는 거죠. 그러면 예전에는 불신자의 손에 의해서 망가지던 세상이 이번에는 물질 많이 주신 신자에 의해서 망가지는 거예요. 차라리 전자가 나. 응. 예. 사업을 안 다시고 기도 생활도 안 하고 말씀 생활도 안 하고 말이지. 응.
그렇게 가지고 그렇게 해서 그렇게 해서 기업을 성공시키려고 그러는 사람들은 바보예요. 절대 성공하지 못할 거예요. 예. 그리고 성공한다고 해도 성공하는 그 날이 그 사람 자신의 영혼에는 패배하는 날이 될 거예요. 그렇게 해서 안 되는 거죠.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성도의 공동생활에 있어서의이 물질의 정신이에요.이 이제 이렇게 해 놓고 보면은 그 물질을 그러면 누리는 것과 절제 사이를 우리들이 생각하게 되죠. 성경에서 보면은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구약을 정직하게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약속하실 때이 물질의 복이 빠지는 법이 없어요. 항상이 물질의 복이 들어와요.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은 이렇게 생각하이 물 그런 그렇게 하나님의 물질의 축복이 축복 속에서 빠지지 않는데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자기 중심적으로 해서 그래요. 하나님을 잘 믿으면 그 믿는 대가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물질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가지고 이번에는 하나님이 나 때문에 영광을 받으셨으니까 이번에는 그 대가로 주는 그 물질을 가지고 이번엔 내가 나를 행복하면 행복하게 하면서 사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요. 근데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너는 모든 사람들에게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복의 근원이 될 때에 그 사람을 통해서이 세상에 그 베풀어지는 그 복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았던 복의 복사판이에요.
하나님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았던 복은 우선은 그를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 삼으시고 언약 백성 삼으심으로 그 베풀어 주셨던 그 놀라운 계시를 통한 영혼의 복이야. 그리고 동시에 물질의 축복을 하나님이 주셨어요. 그것들을 통해서 다른 사람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을 때 똑같이 아브라함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지식이 베풀어지고 하나님께 받았던 그 사랑이 그들에게 베풀어지는데 이속에 물질이 함께 따라 들어가는 겁니다. 예. 그 그런 의미에서이 물질은 언약 백성들이이 세상에서 자기의 소명을 이루어 가기 위해 꼭 필요한 자원이라 이거죠. 그러니까이 물질이 나오는 거예요.
또 많은 사람들은 신약 시대에 와서 이게 바뀌었다. 이렇게 생각을 해서 이제이 물질은 아주 핫한 것이 되고 영혼의 축복만이 강조됐다 생각데 그렇지 않아요. 신약에서도 똑같이 똑같이이 두 가지가 함께 들어오게 되는 거죠. 물론 예외적으로 물질과는 거의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던 고난받는 사도들이라든지 선지자들이든지 이런 사람들이 나와요. 예.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용하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 주실 때에 그들에게는 동시에 똑같이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해서 오는 영혼의 축복, 눈부신 진리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그 그런 물질들의 공급을 통해서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흘러가게 해서 그들의 고통을 면하게 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동시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함께 전해지게 한 거.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이 성도들에게 함께 부어져서 또 지식과 사랑이 되어서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 속으로 흘러들어가. 근데 그 사랑을 전달하는 중요한 물질적인 통로가 바로 하나님이 주신이 돈, 재물들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전전해지게 되는 거죠. 그게 바로이 사도행전의 공동체에서 그대로 나타나는 거죠. 응. 성도들이 모두 주님을 믿고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었을 때이 물질은 더럽다 그러고 재산 다 버려주고 맨몸만 교회에 홀딱 들어와서 공동체 일원이 된 거 아니에요. 그거 다 가지고 들어온 거예요. 그래서 교회 앞에 갖다 놓고 그리고 그것은 성도들을 위해서 모두 나누게 하고 자기는 그곳에서 창조의 목적을 따라 살아가는 그리스도 예수의 몸의 일원이 되기로 그렇게 자기를 헌신한 거죠.
그런 정신을 가지고 이번에는 우리들이 모여서가 아니라 흩어져서 살아야 된다라고 하는 거죠. 예.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들이 생각해야 될 것은 뭐냐면 그렇다면 구약에서든지 신약에서든지이 물질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것은 우리는 전혀 이것들을 누리지 말고 모두 하나님의 소명을 위해서만 사용하도록 하나님이 주셨느냐? 그거 아니죠. 그런 식으로 물질을 위탁받은 사람들은 자녀가 아니라 노예예요. 노예. 노예에는 주인의 돈을 한 푼이라도 쓸 수 없어. 자기 마음대로. 그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물질을 주실 때 그 주신 것은 노예의 관계로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관계로 그것들을 주신 거예요.
아버지로부터 유산을 받은 사람이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서 그 물질을 사용해야 되는 것은 틀림 없지만 그 10번 하나 아버지께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쓸 수 없고 내 쓸 것은 내가 따로 노동을 해서 벌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정신나간 상속자는 없을 거라 이거죠.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물질의 복을 받을 때 그것들을 누리면서 살아가도록 하나님이 허락을 하신 거예요. 허락을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신자들이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많은 기회들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열심히 직업 활동을 해. 그래서 돈을 벌어요. 그 버는 것들을 성도들이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 권리를 하나님이 인정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번 물질들을 자기를 위해서 다소 사용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복음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에요. 그 물질들을 가지고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을 자신이 그 물질을 누리는 삶을 살아도 괜찮아요. 가난하고 거처가 간데 없던 사람들이 좀 더 나은 주거를 마련해서 생활하는 것. 그리고 자녀들을 좀 더 그 좋은 교육을 받게끔 그 물질을 사용하는 것. 또 음식이나 의복을 가난하던 시대는 조잡하게 조잡한 것들을 가지고 살았지만 조조잡이라기보다도 조악한 것들을 가지고 살았지만 조금 나은 음식을 건강을 위해 베풀고 육체의 품미를 위해서 좀 더 나은 의복을 입고 그리고 어느 정도의 문화 생활을 향유하고 하는 것들은 정제받을 만한 것이 아니라 그래서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신 물질 들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렇게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죠. 우리들은 이런 점에 있어서 좀 더 지체들을 너그럽게 대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차피 물질의 소유의 수준이 차이가 나게 마련이에요. 그래서 자본주의는 돈을 버는 방법만 가르치면 안 되고 돈을 쓰는 방법을 가르쳐야 돼요. 내가 사업을 해서 저 사람과 치열하게 경쟁해서 이겼어요. 이겨서 저 사람이 쓰러져서 비틀을 그리고 있는데 가서 목을 밟아 버리는 것은 그것은 진정한 자본주의의 정신이 아니에요. 오히려 그렇게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는 거예요. 그래서 도와주어서 다시 또 살고 살게 하는 것 이것이 정말 아름다운 자본주의 정신이에요.
이런 것들이 유지되지 않는 한이 국가의 공동체성들은 파괴되고 한 마음 한 뜻으로 살아가야 할 국가의 공동체적 성격은 산산히 파괴되어서 서로를 원수보듯하게 되는 거죠. 그럼 그런 식으로 해 가지고 경쟁자들이 모두 파괴되면 자신은 늘 승리할 수 있느냐면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 자본주의의 생리예요. 자본주의는 항상 경쟁 관계를 통해서이 발전을 해 나가게 돼 있는 거거든요. 근데 이런 거죠. 그러다 보면은 같이 성도들이 되었지만 어떤 사람은 물질의 여유물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있고 소유 못한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볼 때에는 저 사람이 물질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것을 굉장히 죄악시하고 그리고 그들의 물질 생활을 획길적으로 판단을 해서 아유 저 사람이 사는 집을 팔면 우리 같이 사는 사람 집 열 개를 살 수 있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거나 저 사람이 함께 식사하면은 우리 온 가족이 하루를 먹을 수
있는데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서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는 것은 복음의 정신이 아니에요. 그대도 돈을 벌어요. 그러면 돼. 응. 그래서 물질을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 어느 정도 그것들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그런 그런 것들 속에서 우리들이 물질을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누리면서 우리들이이 세상에서 즐겁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신 분복이에요. 그러나 여기에서 잊지 말아야 될 사실이 있는 것이죠. 그것은 뭐냐면은 지나쳐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 지나치다는 기준이 뭡니까? 그걸 획길적으로 성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고 어거스틴도 반문을 했어요.
누가 그것을 회적으로 정할 수 있겠는가? 문제는 뭐냐면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사람들이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에게 주신 분복이지만이 물질 물질에 대한 누림에서 얻는 행복이 너무 뛰어나고 놀랍기 때문에이 물질을 통해 최종적으로 누려야 할 하나님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여기에서 그 누릴 수 있는 권한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셨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절제해야 할 의무를 수반하게 되는 것이죠. 절제라고 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하고 싶은데 안 하는 모든 것이 절제예요. 하나님이 선악가를 따먹지 말라.
그러셨을 때 안 따먹는 따먹고 싶은데 그것을 따먹지 않기 위해서 아주 분투하고 애를 쓰고 자기 자신을 누르는 것 이것도 절제예요. 히타가 꺼져 있 켜져인 거 같은데 좀 꺼 주세요. 그리고 두 번째는 좁은 의미에서의 절제는 그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데 더 좋은 목적을 위해서 그것을 삼가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절제예요.이 둘 사이는 굉장히 중요한 차이예요. 예를 들자면 하지 말라고 하나님이 금하셨는데 나는 절제하면서 그것을 안 해. 근데 어떤 사람은 그걸 못 참고 하나님의 계명을 깨뜨려. 그럴 경우에는 내가 계명을 깨뜨리지 않은 사람이 깨뜨린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 판단을 할 수 있어요.
그런 하나님이 자유로 허락을 해 주셨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더 나은 목적을 위해서 절제해요. 어떤 사람은 더 나은 목적을 위해서 그것을 절제하지 않아. 그리고 그 자유를 한껏 누리기 위해서 최대한 욕망을 뻗쳐. 그때에 판단하면 안 된다라고 하는 거죠. 판단합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너는 왜 나처럼 이렇게 가난하게 살지 않느냐고 정죄하거나 그리고 내가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이 바로 아주 고도의 고향된 영혼을 가지고 있는 증거라는 식으로 우월감을 갖는 것은 아주 더러운 것이에요. 가끔 여러분 보면은 아주이 내핍 생활이 몸에 계피인 그런 뛰어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은혜를 많이 받게 되면 경건한 삶을 살기에 아주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욕망 자체가 널리 펼쳐져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의 분수에 만족하면서 살게 되기 때문이죠. 그러나 문제는 이들이 비록 내핍생활을 하고 있지만은 그러나이 사람이 깊이 변화되어서 그렇게 보다 나은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내핍 생활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안 돼. 그럴 경우에는 이것이 자기 의가 되는 거죠. 왜냐하면은 어려서부터 매우 가난하게 살았고 철저한 내핍 생활의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이 사람은 본성적으로 내핍하는 것이 몸에 배웠어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내핍한다기보다는 그래서 내핍생활하는 것을 자기 자신의 생활에 본성이 되었고 그래서 낭비하는 사람들을 굉장히 미워하게 되는 것이죠.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성도는 지금도 아마 그렇게 사실 거라고 확신합니다. 화장지를 사용을 하는데 화장지를 사용을 안 하고 항상 신문지를 사용을 하는 신문지 위에 화장지를 한 장씩 얹어서 사용을 해요. 아껴서 사용하기 위해서. 어 그래요. 그것도 이제 맨 처음에는 신문만 쓰다가 이제 화장지가 많이 풍부해지니까 하나씩 얹어서 사용하는 그 자녀들도 철저히 그렇게 가르쳐요. 화장실에서 오줌을 넣는데 식구가 한 혼자 오줌을 넣고 물을 내리면 불별하게 떨어져요. 그래서 다섯 식구가 오줌을 다 넣고 마지막 사람이 물을 내리는 거. 그러니까 그다음에 목욕한 물을 버렸다가는 난리가 나요.
목욕한 물은 수건 빨고 걸레 빨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허드려 물로 베란다에 갖다가 부어서 그 먼지들을 씻어내는데 사용을 한다 이거죠. 자신이 그런 삶을 산다는 것에 대해서 비난할 사람은 없어요. 또 훌륭한 삶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또 우리나라 같이 이렇게 뭐 저 아직까지 좀 더 잘 살아야 될 나라에서는 뭐 괜찮다고 생각해요. 예. 근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 혼자 그런 삶을 사는게 아니라 그런 삶을 안 사는 사람들을 미워한다는 거죠. 그거게 문제가 있는 거죠. 그 이거는 까리따스에서 배운 까리따스를 통해 나온 삶의 스타일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런 삶을 선택했다기보다는 자신의 삶을 자신을 자신의 그거를 이야기하는 거죠.
자신의 생활을 이야기하는 거.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에. 그런 사람들이 화장질을 한 번에 두 번 세 번 말아서 쓰는 사람들을 격렬하게 미워하는 거죠. 그 화장에 화장실에서 볼 일 보고 신문지로 그 뒤처리하면 큰일나. 그 그 잉크 속에 묻어 있는 독서들이 몸속으로 들어가요. 큰일 나는 거라고. 그렇게 휴지 조금씩 아껴서 그 신문의 독서가 들어간 다음에 마지막에 예. 대장암으로 죽을지도 몰라. 직장함으로. 그런 식으로 해서 사람들을 정죄하는 거죠. 거죠. 심지어는 자기는 일평생 태어나서 뭐 어 5,000원짜리 이상 먹어 본 적이 없다든지 막 이런 식으로 교회 안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보는 정말 복음은 어디 있는가? 복음은 어디 있는가? 그런 식으로 생활을 해요.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과연 까리따스의 사랑으로 일치를 이룰 수 있지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매우 잘못된 삶이라는 거예요. 그 누구든지 자신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택할 수 있어요. 그런 사람도 있겠죠. 그렇지만 우리들이 분명히 알아야 될 사실 하나는 여기서 이야기하는이 칭찬받을 만한 덕목으로서의이 절제는 사실은 그렇게 타고난 본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죠. 타고난 본성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 오히려 그럴 수도 있는데 보다 나은 목적을 위해서 그것들을 스스로 마아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절제예요. 그리고 그 절제는 아름답죠. 그래서 절제는 가장 이루기 어려운 덕목이기 때문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서도 맨 끝에 와요.
예. 맨 끝에 와요. 그 그만큼 절제는 어려운 덕목이고 주님을 향한 정말 뜨거운 사랑이 없으면 이루기 어려운 덕목이에요. 근데 많은 사람들은 본성으로 그것들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그래서 그 성화의 과정에서 느끼는 아주 커다한 혼란이 이런 거죠. 자, 예를 들어 봅시다. 시간을 잘 지키는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죠. 그렇죠? 약속을 잘 지키니까. 근데이 사람들이 결점이 뭐냐면 시간 안 지키는 사람은 인간으로 생각도 안 해. 예. 그렇게 보는 거죠. 또 정직하다는 것 얼마나 이게 아름다운 덕목이에요. 그죠? 근데 한 번만 거짓말 한다든지 거짓말 한 걸로 오해되면은 그거는 인간으로 생각도 안 해요.
예. 도 안 해요. 그 그 얼마나 얼마나 그 그 성경이 이야기하는 정신과는 거리가 뭐냐 이거죠. 그러니까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은 약속 안 지킨 사람을 용서하기가 너무 힘든 거죠. 내핍생활에 젖은 사람은 그 자기가 볼 때에 좀 그 상당히 나 과다시피 물질을 소비하면서 하는 사람들을 끊임없이이 속에서 정지하는 거죠. 그리고 살아가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 자기가 모든 동목을 다 갖고 있냐면 그건 아니거든요. 약속은 기가 막히게 지키는데 낭비벽이 있어요. 약속도 잘 지키고 낭비벽은 없는데 진리에 대한 사모함이 없어요.이 이 모든 것들이 다 이렇게 얽히고 설히면서 사람들이 각각 자기가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성품, 자연적으로 가지고 있는 장점을 그걸 최대한 의로 여기며 그것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게 될 때 공동체는 모두 그 칼에 맞은 상처 입은 사람들로 가득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왜 그렇게 생각을 합니까? 잘못되는 거죠. 여러분들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누리도록 허락을 해 주셨기 때문에 여러분보다 여유 있는 사람들이 경제 생활을 하고 여러분보다 좋은 집에 살고 좋은 옷을 입고 다니면은 그걸 여러분들이 그대로 받아들여야 돼요. 아, 정말 그렇구나. 돈 많이 벌고 사업에 있어서 성공하는 그런 형제들을 보면서 너 왜 아시의 프란시스처럼 안 사냐? 그 사람은 옷도 벗어서 나 같이 가난한 사람한테 줬다는데 그런 태도를 가져서 안 된다 이거죠.
예. 그것은 또 한번 죄를 짓는 행동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각자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가지고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을 존중하고 예. 그리고 그것들을 깊이 인정하고 하는 태도가 필요해요. 그러나 이제 유의해야 될 것은 절제가 필요하다라고 하는 것이죠. 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신뢰할 수 없는 존재예요. 여러분 스스로도 생각해 보세요. 가난하고 물질로 고통받은 때에는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았지만 물질에 복을 주시고 여유 있고 근심이 없어지니까 여러분들이 마음이 교만해지고 방탕해지고 물질에 푹 빠져서 하나님 사랑 잃어버린 경험 많이 있죠.
그러다 시컷 두들겨 맞고 다시 또 다 털어 먹고 나서야 손들고 오는 경우 많이 있잖아요. 그렇게 그렇게 우리라고 하는 인간이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족한 것 없이 많은 물질을 가지고 있어도 우리의 영혼이 늘 깨어 있지 아니하면은 그 많은 물질에 대해서 우리들이 중립적인 삶을 살 수가 없는 거예요. 예. 왜 왜 그러냐면 물질 자체는 우리들을 타락시키지 않는데 그 물질을 능가하는 물질에서 오는 기쁨을 능가하는 하나님 자신의 아름다움을 관상하는 데서 오는 그 행복이 그것들을 능가하지 않으면은 그렇게 능가하지 않으면은 우리들이 반드시 물질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거예요. 없는 사람은 있기 때문에 사랑에 빠지고 물질이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그것을 갖고 싶어서 사랑에 빠지는
가난한 모든 사람이 물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부유한 사람이 물질을 탐욕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것은 물질의 소유 여부와는 상관이 없어요. 살아가는 얼마 전까지 중국에 1인분 식사가 4,980만 원짜리가 있었어요. 4,980만 원. 네. 한 끼. 그래서 하루 종일 먹는게 아니라 두시간 정도 식사 시간 걸리고 15 번의 요리가 나온대요.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한 사람 먹을만큼만 나온대. 그 식사가 맨 처음 시작할 때 작은 그 물 작은 만두 개와 녹차 한 잔으로 시작하는데 고게 250만 원이랍니다. 그렇게 해서이 요리 저요이 나오다가 마지막에 그 요리에 그 가장 중요한 주 요리가 나오는데 한 사람 앞에
120마리의 잉어를 잡는답니다. 때 잉어를 잡아서 잉어로 요리하는게 아니라 양쪽에 붙은 수염 두 개를 띄어서 240개를 한 접시에 놓고 요리를 해서 갖다 주는데 이게 요리의 절정이에요. 그 여러분 그런 생각할 거 아니냐? 아니 그거를 누가 4,980만 원을 주고 그 요리를 먹나 그럴 거 아니야. 몇 년 전에 12명이 그 집에서 회식을 했답니다. 한국 사람은 다행히 아니에요. 예. 12명이 회식을 하고 6억을 내고 같아요. 여러분 모두 생각할 때 미쳤다 이겠어. 미쳤죠. 이번에 그리스 갔을 때 나를 자기 아파트에서 묻게 해 준 성도가 있는데 미국에 집회 갔을 때 은혜를 받은 성도가 어 내가 그때 거기 온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아파트를 제공해 줬습니다.
꽤 영향력 있는 인사였는데 함께 이야기를 하는데 인간의 물질 생활이 얼마나 한없는지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자기 친구가 호텔 사장인데 호텔 소유주인데 호텔을 놀러 갔더니 호텔방 하나를 보여 주면서 우리이이 방이 몇 개가 우리 호텔에 있는데에이 방이 하루에 숙방가 2,500만 원을 들어요. 그래서 250만 원인 줄 알았다가 다시 얘기를 해 보니까 2,500만 원이들 오두막접처럼 하나 지었는데에 거기에 이제 그 하루 먹는데 예, 500만 원이래요. 그 뭐 하는데 이렇게 비싸냐 그랬더니 일단 거기 들어가면은 다섯 명의 한녀가 배정이 된대요. 그래서 뭐 요리해 주는 사람, 뭐 타이프 쳐 주는 사람, 뭐 또 뭐 어 뭐 신발 닦아 주는 사람, 뭐 물 받아 주는 사람, 뭐 하여튼 뭐 너절하게 이렇게 많은 일들을 해 준대요.
그래서 그랬대요. 야, 여기 와서 누가 2,500만 원을 주고 묻겠냐 그랬더니 친구가 그러더래. 많이 와. 지난주에도 한 사람이 와서 혼자 일주일을 묶고 갔대요. 그 2억 원을 내고 갔대요. 일주일을 묶고 2억 원 정도 쓰고 갔대요. 한녀 다섯 명이 뭐 하고 있었을지 그게 궁금하더라고. 그렇게 끝이 없어요. 근데 우리들이 알아야 될 사실은 우리는 그렇게 그렇게 살지 말라고 경고받을 필요는 없겠죠. 가능성이 없으니까. 그 정도는 아니어도 우리들이 경계해야 될 것은 뭐냐면은 물질을 누리면서 사는 것은 괜찮은데 거기에서
그것이 주는 즐거움에 면역이 되어서 안 된대. 그러면 반드시 어려워지게 돼요. 이제 이렇게 되는 거죠. 어떤 사람이 물질을 누리면서 살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분복들을 정당하게 누리며 사는 건지 아니면은 그것에 집착하고 있는지 잘 몰라요. 근데 이제 그 물질을 걷어가 버리고 나면은 그냥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누리던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영향을 안 받아. 근데 거기에 집착했던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거. 하나님과의 관계가 흔들린다기보다도 이미 벌써 흔들린 거죠. 드러나는 거죠. 증거가. 예. 그래서 그것이 안 좋은 거죠.
그래서 할 수 있으면 우리가 즐거움을 얻는이 즐거움의 감각을 물질을 누 쓰고 막 비싼 음식, 고가의 옷, 그다음에 희귀한 보석, 그다음에 화려한 여행 이런 것들을 통해서 즐거움을 얻는 것들은 덜 발달시키고 어차피 발달하게 되어 있으니까 덜 발달시키고 진를 깨고 하나님과 교통하고 성도를 섬기고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내 안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신실한 하나님과의 교통을 경험하고 성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이러데서 기쁨을 느끼는 감각들은 계속 발달을 시켜야 돼요. 발달을 시켜야 돼요. 장로님 한 분이 그 사모님이 돌아가셨어요. 너무너무 사랑하다 돌아가니까 시리에 빠져서이 1년 반 동안을 아무도 아무것도
못하고 거의 폐인이 돼 가는 거죠. 돈도 어느 정도 있는 사람이었는데 보다 못해서 어느 교수님이 그분을 데리고 중국 여행을 같이 하자 그랬어요. 그러니까 가깝하고 그러니까 중국 여행을 가면서 그 중국의 아주 열악한 환경 속에서 주님을 믿는 그 오지에 있는 중국 성도들을 만나게 된 거예요. 어 2주간 동안일 있으면서이 사람이 완전히 생각이 바뀐 거예요. 돌아와서 새 삶을 살게 된 거죠. 왜 그래요? 아내하고 행복하게 살면서 돌아다니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이런 것만 익숙해서 살다가 그것을 없어져 버리니까 그 자기 살 기억이 없는 거예요.
그리고 중국에 가서 보니까 사람들이 자기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 속에서 신령한 기쁨을 찾고 누리면서 살아가더라 이거죠. 그러한 것들에 대한 발달된 감각이 자신에게 없다고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겁니다. 그 이렇게 살아가야 되는 거죠. 우리 물질이 있어도 그것들을 낭비하고 그것들 속에서 얻는 것들을 누리 그것들을 쓰고 그것들을 통해 즐거움을 누릴 수 있지만 그리고 또 누리고 살아가지만 그것들을 죄악시하지 않지만 우리들이 정말 발달해야 될 것이 그런 것들에 대해서 오는 감각이 아니라 주님을 섬기고 그 주님을 계속 의지하고 하고 이번에도 선교 여행을 가서 많이 자면 한 4네시간, 적게 자면 2두시간 밤밖에 잠을 못 잤어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니 오는 길에 어느 선교사님 한 분이 그래요. 그래서 다음엔 그랬을 잘못 하신 거라고 자기는 목사님들이 일단 오시면은 쉬고 가시게 한다고 그래서 그것도 참 좋다 그렇게 생각을 했어요. 근데 그분하고 이야기하고 이야기하다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뭐냐면은 오게 이렇게 가면은 그러면은 두 사람의 마음이 합치되는 거죠. 왜냐하면은 거기에 있는 사람은 이제 목사님이 여기 오셨으니 한국에서도 바쁜 사람이 여기 왔으니 언제 떠오랴? 그리고 알뜰하게 부려먹는 거예요. 알뜰하게. 미안한 건 잠깐이고 어 이익은 유익은 영원하니까 그러니까 이제 암 철판 갈고 그리고 이제 뭐 새벽에도 합시다. 밤에도 합시다.
뭐 한 시간 더 합시다. 뭐 어 점심 먹지 말고 합시다. 뭐 이러면 그리고 또 그런 생각 또 드는 거죠. 뭐요 두 번 올 거 시간도 없는데 여기서 친하게 하고 가서 한 번 더러는게 낫지 않을까? 그런 마음도 또 갖게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들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면서 살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 살아갈 때 그 모든 것들을 누리지만 즐거움을 어디서 찾느냐라고 하는 거죠. 여러분들이 선교 여행을 간다고 하지만가 가지고 관광이나 하고 마신 거 맛있는 거는 먹고 그리고이 사람 저 사람 만나서 교재하고 그런 즐거움 속에서 온다고 하면은 선교가 되겠어요?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할 수 있지만 기쁨으로 스스로 더 좋은 것을 위해서 덜 좋은
것들을 절제하면서 살 때 그 안에서 우리의 영혼의 아름다움은 유지되는 거예요. 유지되는 거죠. 의사가 커피 먹지 말래요. 근데 안 먹고 못 빼기겠어요. 하루에 세 잔, 네지,네 잔씩 먹던 사람인데 정말 보통 불편한게 아니에요.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제가 좋아하는 것은 기름에 바짝 튀겨서 꿀에다가 버무린 닭강정이에요. 지금도 너무 간절해요. 먹고 싶어요. 제가 그 캔터키 프라이드 치킨 같은 데서 파는 그 치킨 핫드윙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한자리 해서 15개까지 먹어 봤어요. 근데 지금은 그렇게 안 먹습니다. 왜 그러냐면 너무 먹고 싶어요. 먹으면 어떻게 될 건지 뻔하거든요.
못 먹어요. 커피도. 그래서 안 먹으려고 그러는데 너무 먹고 싶어. 그래서 원칙을 정했어요. 이틀에 한 잔만 마시자. 예. 그러면은 그게 무슨 그런 걸 먹는게 무슨 나한테 무슨 뭐 죄겠어요? 근데 안 하죠. 왜 안냐면 그게 안 좋은 결과를 나중에 가져와요. 그럼 생각해 보세요. 제가 일찍 죽는 거야. 겁날게 없지만은 제가 여러분들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프더라도 은퇴한 다음에 아파야지. 어 설교하는 동안에는 성실하고 이렇게 열렬하게 그 설교를 하고 그러다가 어느 날 그 눈앞에서 사라져야지 여러분도 좋다 그러지. 맨날 저기 뭐야 반신불순나 돼 가지고 그 집행이 짓고 생활이 어려워서 교회도 떠나지도 못하고 잊지도 못하고 이렇게 하면서 어영부영하게 입고 그러면 여러분 그거 좋아하겠어요? 우리 후배 교육자들에게 내가 항상 이야기합니다.
뭐냐면 목회자는 건강 가지고 먹고 사는 사람이다. 건강해야 된다. 진짜 조심해라. 나는 지금 와서 생각하니까 3, 40대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다. 주님을 섬기면서 살아온 것에 대해선 후회가 없는데 문제는 일밖에 가치가 없는데 10을 쏟아 부은 적이 너무 많은 거예요. 너무 많이 에너지가 소모가 되는 거예요. 그 지혜가 있었더라면 그렇게 안 살았을 텐데 가치가 조금밖에 없는 일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 부어서 허의하고 살았는데 그게 그때 쓴 수표가 되어 가지고 이제 막 돌아오기 시작하는 거예요. 돌아오기 시작하는 거기에요. 그 지금 어떻게 되냐면 지금 한창 투자를 해야 되는데 빛을 갚으면서 투자를 해야 되는 거죠.
그러니까 어떤 때는 그 나 자신의 몸을 수리기 위해서 뭐 치료를 받는다든지 이렇게 정기적으로 시간을 허의할 때 마음속에서 눈물이 나죠.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되나 말이죠. 근데 그나마도 안 하면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그렇죠. 막 그냥 설탕 잔뜩 들어 있는 커피 막 마시고 닭강정 먹다가 어느 날 반신 불수라도 되는 거죠. 그니까 그 할 수 있는데 그거를 더 나은 목적을 위해서 하지 말아야 되는 거죠. 그렇게 안 하면 반드시 불행한 결과가 와요. 반드시 불행한 결과가 오는 거죠. 그래서 그근 내가 이야기 여러분들한테 이런 얘기하니까 조금 미안하지만 말이죠. 내 얘기 그 목자들한테 건강 잘 조심해라.
그 건강 때문에 그 또 그걸 빌미 삼아 가지고 나태한 삶을 살 위험이 우리에게는 항상 있지만은 그 항상 조심하자. 항상 조심하자. 그니까 만나면은 맨날 묻는 얘기가 건강 괜찮냐고 맨날 물어봐요. 왜냐면 한 달쯤 병원에 입어해 봐. 성도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뭐 자죽을 끓여온다. 뭐 전복죽을 끓여온다. 자라를 삶아온다. 뭐 난리가 나. 뭐 뭐 이번비는 내가 되겠습니다. 뭐 별 사람이 다 나타나. 그리고 막 성도들이 똑게 기도를 해요. 그리고 걱정을 해요. 그리고 염려를 하고 6개월이 아프면은 성도들이 그냥 뭐 철야 기도를 한다. 연세 금식 기도를 한다. 무슨 목사님을 휴가를 보낸다. 그래.
1년만 아프면은 언제쯤 후임자가 오나 이런 생각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해도 되는 것은 아니에요. 응. 할 수 있는 모든 것이 해도 되는 것이 아니고 해도 되는 모든 것이 정죄와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것도 또 아니라 이거죠. 그래서 거기서 필요한 것이 뭐냐면 지각이에요. 지혜가 있어야 돼요. 그렇게 살아가야 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하는게 죄입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고 그렇게만 말하지 말고 그거는이 순종과 순종과 불순종의 경계선상에서 불순종하고 싶어서 안다라는 사람들이 하는 질문이에요. 이건 이게 죄입니까? 이렇게 물어보는 그러지 말고 반대로 이렇게 하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지요라고 물어봐야 돼. 응.
그래서 그게 유익이 되겠는가? 정말 자신의 영혼의 유익이 되겠는가? 음식은 먹을 때에도 어떤 사람하고 식사해 보면 정말 걱정이 돼. 뭐 그래 봐야 뭐 나도 건강하진 않지만은 헛 몸에 좋은 거는 다 골라 놓고 절대 먹으면 안 될 것들만 골라서 먹어요. 그 내가 항상 간섭을 좀 해. 그러지 말라고. 근데 시범을 보여 줄테니까 보라고 말이지. 그래서 먹고 싶어도 먹어서 안 될 것들은 잘하고 먹기 싫어도 그것이 좋은 것들은 먹고 이렇게 하면서 자기를 이기면서 살아야 되는 거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성도의 참된 가난함이 뭐냐? 그거는 물질을 소유하지 않는 것 그게 아니에요. 물질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한 거.
그 성경에서 이야기는 성도의 가난함이 아니야. 또 더군다나 능력이 없어서 못 벌었기 때문에 가난한 거예요. 그건 더더욱 성도의 성도의 가난하면음 물론이 세상에는 치열한 관계 속에 경쟁 관계 속에서 결국은 계속해서 패배할 수밖에 없는 머리가 좀 나쁘고 순발력이 떨어지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요. 그런 사람들은 구제를 받으면서 또 살아가야 됩니다. 그 사람들에게 적정한 일거리를 제공해 줘야 돼요. 응. 적정한 일거리를 제공해 줘야 된다. 그렇게 해 가지고 살아가야 돼요. 그런데 문제는 뭐냐면은 많은 사람들이 소유하지 않고 있는 것 자체를 엄청난 덕목으로 생각한다는 거죠. 그건 성경적인 견해가 아니에요.
자기가 못나서 소유 못 했는데 그게 어떻게 자랑이 될 수 있겠으며 갖고 싶은 욕망은 많이 있지만 결국은 능력이 모자라서 손에 넣지 못했는데 그것 때문에 왜 그 사람이 물질을 많이 소유한 사람보다 더 덕성스러운 사람으로 인정받아야 됩니까? 그럴 수 없는 거거든요. 성경이 이야기하는 성도의 진정한 가난은 소유하지 않는데서 오는 가난이 아니라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오는 가난이에요.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오는 가난이에. 나누어 주었기 때문에.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이 욕심이 없어서 사업에서 돈을 안 벌더라. 그런 이야기 말고 사업에 꿈을 가지고 돈은 많이 벌었지만 나누어 줬기 때문에 여전히 가난하더라.
이런 삶을 살게 되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랍니다.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게 돼야 되는 거죠. 그래서 성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니까 한 사람이 물질을 소유하면 영적인 은사를 소유했을 때에 성도의 교통을 통해서 모두 자기의 것으로 공유하며 살 수 있게 되듯이 물질도 성도의 영적인 연결을 타고 함께 그것이 흘러서 부유한 사람의 것은 가난한 사람에게 에게 또 어 여유 있는 사람의 것은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 흘러 들어가서 그들이 최소한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하고 성도의 진실한 삶을 찾아가는데 데는 방해를 받지 않도록 그렇게 살아가야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지금 몇 주 전에도 보면은 지금 몇 주째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라고 누구누구 이름을 써서 올라오는 지목
헌금들이 있습니다. 낸 사람이 누군지 아무도 알 수가 없죠. 받은 사람만 누군가가 줬다라고 하는 것을 알죠. 그 얼마나 아름다운 섬김의 정신입니까? 이름을 이름을 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진 않고 오히려 자기를 감춰서 자신에게 있는 물질들을 사람들에게 흘려보내어 성도들을 그 고통에서 건져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게끔 해주는 이한 섬김들은 나를 정해놓고 해야 할 섬김이 아니라 우리의 일생 살아가는 동안에 몸에 배인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죠. 그렇지 않고는 우리의 일생이 흘러가는 강물과 같은 인생이 될 수가 없는 것이에요. 영국에서 유학을 하던 어느 교수님에게 실제로들은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살림의 유학을 가서 책사볼 돈도 없고 경제적으로 많은 고통을 받고 있던 차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는데 어느 날 집에 가서 책가방을 열어서 보니까 자기 그 수업 시간에 공부하던 책 속에서 봉투가 하나 툭 떨어지는데 영국 파운드화가 이만큼 들어 있더래요. 꽤 큰 돈. 그때 돈으로 한 30만 원 정도였는데 그때가 한 30년 40년 전에 일이었으니까 지금으로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돈이죠. 그것을 보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을 했대요. 누가 주었는지 자기는 지금도 아직도 알지 못한대요. 그래서 결국은 어떻게 됐냐? 자기도 떠나오기 전에 꼭 한번 그 일을 하고 떠나왔다는 거죠.
사랑은 이런 메아리어와 같은 효과를 가지고 있는 거죠. 사랑을 받아본 사람들이 사랑을 할 줄 알고 사랑을 해 본 사람들이 사랑을 받을 줄 알지 그걸 해보지 못한 사람들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남에게 부담 끼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데 그런 사람들이 자칫하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부담을지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계셨는데 어 아들을 장가를 보내면서 친구 목사님들에게 연락을 안 했어요. 그런 일 있을 수 있잖아요. 상을 당하거나 그랬을 때 아휴 또 이렇게 찾아오고 그러면 얼마나 부담을 느낄까 하고 연락을 안 하잖아요.
나중에 친구 목사님들이 만나서 매우 심하게 나무를 했어요. 친구라고 하는 것은 부담을 지워 줄 때의 애정을 느끼는게 친구다. 부담을 지워 줬는데 아이씨 이게 날 힘들게 하네. 그러면 어차피 그 사람 친구도 아니야. 그니까 성도도 마찬가지예요. 성도들이 이렇게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이 사랑의 일치를 이루면서 살아갈 때 기쁨을 함께 나누고 고통도 함께 나눌 수 있어야지만 이것이 진정한 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죠. 어젯밤에도 우리 아들이 누워서 알아. 그래서 어디가 아프냐까? 목이 아프대요. 그 목이 아픈데네 발은 왜 거기 같이 누워 있니? 그렇게 말할 수 있겠어요? 응.
목만 목만 거기에 누워 있어야지 멀쩡한네 발은 왜 거기 함께 누워 있냐?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잖아요. 한 몸이니까. 한 몸이니까 그것을 느껴야 되잖아요. 한 몸이니까 그걸 느껴야 되잖아. 그래서 그것들이 함께 흘러가게 돼. 그 이것이 성도의 몸의 일생 동안 다 배어야 돼. 적게 있는 사람은 적은 한도 내에서 베풀고 많은 사람은 많은 한도 내에서 베풀고 이만큼 모을 때까지는 일절 없다. 그리고 수전노가 되는 그것은 결국은 하나님의 축복받는 삶이 되지 못하는 거죠. 이름없이 빛도 없이 그렇게 섬기면서 살아갈 때 그 삶이 정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나눔의 삶이 되는 것이죠. 최근에도 어느 선교사님이 저를 만나고 싶어서 그렇게 보고 싶다고 몇 번을 연락을 해요.
이 뭐가 그렇게 보고 싶겠어요? 그래서 어렵게 시간을 내서 단둘이 독대를 했더니 나오는 이야기가 뭐 그런 이야기죠. 이제 자기의 자기 그 자녀 하나가 이번에 외국에서 한국으로 유학을 가서 결국은 이제 그 한국에서 공부를 해야 되는데 자기가 받는 선교비에 거의 대부분을이 아이한테 보내도 한국에서는 유학이 안 공부가 안 된다는 거죠. 어떻하면 되냐고 땅이 꺼지도록 한 숨을 쉬는 거예요. 당신 파송한 교회는 뭐 하고 있냐 그랬더니 파송한 교회하고 뭐 그렇게 긴밀한 협조가 없고 30만 원씩 보내주고 그냥 끄시해요. 그 왜 그렇게 됐냐? 연결을 잘하고 늘 교재를 해서 그래서 어려운 일이 있고 기쁜 일이 있으면 함께 나누게 해야지 그 교회 어려운 일이 있으면 선교사가 나누고 선교사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교회가 나누고 이래서 한 몸이 되어서 그래서 이런 어려운 일들을 어 상해야 되지 않겠느냐.
근데 뭐 별로 그렇게 기대를 안 하는 눈치예요. 그래서 이제 몇 개의 방법을 알려 줬어요. 그리고도 계속 그 우울함이 가시지를 않아요. 그래서 내가 그랬어요. 너무 근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반드시 도와주실 겁니다. 내가 여태까지 말한 방법대로 전혀 안 된다면은 그러면 나와 열린 교회가 책임을 질테니까 이제는 마음을 좀 놓고 그리고 선교 사역에 전념하셔. 그렇게 위로를 하고 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섬길 일들이이 세상에 많이 있죠. 돈 없이 섬길 일들도 있지만은 대부분의 일이 돈 없이 섬기기 어려운 일이에요. 이번에 중국 가서 몇 번을 중국을 드나들면서 고민이 됐어요. 왜냐하면 너무 시간에 낭비가 심한 거예요.
왜냐면 여섯 시간을 강의를 해도 한국말로 하는 거 세시간밖에 안 되고 한 마디하고 기다리고 한마디하고 기다리고이 통역하는 사람이 신통시 않으면 이게 또 제대로 전달해 주는지 우수운 얘기했는데 인상 쓰고 있고 심각한 얘기 했는데 웃고 이러네. 그래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러다가 하나님이 지혜를 탁 하고 주셨어요. 그래서 오면 안드리 선교사 보고 그랬어요. 돈이 없어서 못 할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한번 알아는 봐라. 동시 통역 시설을 한번 휴대용 동시 통역 시설을 한번 마련해 봐라. 그래서 한 30명에서 헤드셋을 쓰고 그리고 나는 한국말로 작은 소리로 하고 그리고 저쪽 방에서 내 이야기를 듣고 지금 예배 통역하듯이 동시에 통역을 해 보도록 하자.
그러면 한 군데서 집회할 거 두 군데서 할 수 있지 않냐? 그러잖아요. 6시간 할 거 세시간으로 줄어드니까. 그렇게 해서 내가 중국 갔을 때 와라 그러면 그걸 들고 당신 통역자하고 뛰오면 되지 않냐? 응. 한국에서 내가 볼 때 그거 하려면은 최소한 1,500만 원 이상 든다.이 2천만 원 들어야 될지도 모른다. 그런 돈 지금 없다. 교회도 없고 나도 없으니까. 근데 중국은 또 워낙 싸니까. 그러니까 한번 좀 한번 알아봐라 할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한번 알아는 봐라. 그러고 왔어요. 사역을 하면서 항상 정말 언젠가는 제가 편지를 한 통 받았어요. 누가 보냈는지 모르는데 아마 오늘 내 설교를 그분이 여기 듣고 계실지도 모르겠어요.
편지를 보냈는데 편지 안에 사돈 세 돈을 거기다 넣었어요. 그래서 그건 뭐냐면은 목사님이 쓰시고 싶은데 쓰십시오. 그리고 그 넣어 준 넣어서 그렇게 놓고 내 이름 앞으로 지목 헌금을 했어요. 그래서 나 뭐 가난한 이웃도 아닌데 뭐 이렇게까지 배려를 하나 그런데 그거 그거 사실 돈보다도 그 속에 쪽지에 시가 하나 써 있었어요. 근데 시 제목은 내게 돈이 많다면 그 세목이 그래서 세게 내게 돈이 많다면 하나님을 더 많이 섬기고 싶고 목사님 내게 돈이 많다면 주차장도 사서 바치고 싶고 내게 돈이 많다면 목사님 허리도 고쳐 드리고 싶고 내게 돈이 많다면 목사님 책도 많이 사 드리고 싶고 내게 돈이 많다면 돈이 많다면 그리고 한 되지 손내려.
내 마음속으로 여러분 눈물이 흘러요. 응.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많은 것들이 있어요. 그리고 우리는 그분께 베풀 받으면서 일생을 비치면서 살아왔어요. 우리가 살아온 모든 날들은 그분께 비친 날이었고 사실은 갚은 날이 별로 없어요. 응. 갚은 날이 별로 없어요. 섬기면 섬기느라고 해를 쓰면서 살았지만 우리가 주님께 민친 그 사랑의 빛을 어떻게 다 갚았다고 말할 수 있겠어? 그래서 그 성도의 마음이 내 마음에 전해졌어요. 내게 돈이 임한다면 그리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도했어요. 하나님이 사람에게
제가 볼 땐이 사람에게는 많이 주셔도 진짜 물질이 하나님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 주십시오. 그리고 모든 성도들이이 마음이 되어서 주시면 주실수록 사람들이 자기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도록 도와달라고 말이죠. 응. 도와달라고 말이죠. 그래서 나누어야 해. 나누어야 해. 정말 나누어요. 근데 난 오늘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아주 분명하게 목회자로서 여러분들에게 이야기할테니까 절대로 내 이야기를 따라 주기를 하는 부탁을 해요. 이 성경의 가르침입니까? 제가 그렇게 말렸는데도 여러분 가운데 돈을 꾸고 그 꾸고 빌리는 그 개인적인 대출의 행위들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심지어는 그 사이에 이자까지 오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그런 것들은
거의 없으리라고 보지만 그러나 그런 이야기가 저에게 들려요. 그것은 잘못하는 것이죠. 동기는 내가 충분히 이해해요. 나는 돈을 마련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이 지체는 그걸 마련할 수 있는 능력이 없어요. 위험부담은 있지만이 지체를 정말 도와주고 싶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그런 돈거래를 해요. 근데 몇 가지 몇 몇 케이스에서 무슨 문제가 생겼냐면이 도와준 성도의 그런 애뜻한 마음을 이해 못 한 건 아니지만 형편이 문제가 돼 가지고이 사람은 돈을 뛰어먹고 교회를 떠나거나 뛰어먹은 상태로 저들 갚지 않으려고 하는 거죠. 제가 아는 지방에 있는 한 교회에서는이 문제에 얽혀서 30년을 두고 두 집안이 대를 물려가며 싸우는 교회도 봤어요.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누가 돈을 빌리러 오면 오늘이 설교를 인용하면서 그 거절해야 됩니다. 그 대신 여러분들이 그 사람이 갚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의 최대의 액수를 그 사람에게 빌려 줘요. 물론 줄 때는 안 갚아도 된다라고 말할 필요는 없어요. 언제까지 갚으십시오. 그러나 내 심는 받기를 포기해요. 저 사람이 저것을 떼어 먹어도 나는 저 사람과의 관계에 조금도 문제가 안 생기고 저 사람이 갚을 능력이 없으면 하시라도 찾아가서 무기한 연장해 줄테니까 부담 갖지 말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액수를 주라. 그래서 사실상을 진짜로는 주라.
준다는 표현이 너무 억울하면은 연구임대 이렇게 생각해요. 연구임대. 아멘. 내가 당신에게 200만 원을 연구 임대해 주마. 음. 당신에 못 갚으면 자식대에라도 갚아라. 어. 그러나 나는 당신이 그걸 안 갔기 때문에 나한테 뭐 고통스러워하고 관계가 깨뜨려지고 원하지 않는다. 응. 교회는 때로 그렇게 금융 기관에서 빌리고 이럴 수 있어요. 그렇지만 성도인 여러분들은 성도끼리 그렇게 하면 안 돼요. 그리고 말할 수 없이 마음 고생하고 고통하고 그다 결국은 지체를 미워하고 이런 것이 성도의 공동생활의 원리가 될 수 있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탐욕을 버려야 돼. 그리고 나누어야 정말 나누어야 그래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많은 것들을 그것들을 흘러가게끔 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돼야 돼요.
탐욕스러운 사람에게서 그것들을 뺏어서 그래서 우리는 그것들을 나누어서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들이 누려지도록 그래서 고통하고 아파하는 이러한 성도들이이 세상에 없도록 우리들이 그렇게 물질로 돕고 우리가 좀 더 잘 사는 나라가 되어서 가난하고 고통받는이 땅에 있는 많은 나라들을 우리들은 도와야 해요. 많이 원조해야 합니다. 그래서이 땅에 그런 물질로 인해서 고통이 사라지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결국 이러한 생활들이 그렇게 강조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이냐면은 정결한 마음이 바로 이러한 물질 생활에 있어서 이런 물질 생활이 아니면 청결한 마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죠. 그래서 여기서 청결한 마음과 공동생활이 생활의 관계를 보게 되는 거죠.
여기서 청결한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텅빈 마음이 아니에요. 몇 가지 요소가 있는데 주님께 달라붙어 있는 주님께 주님께 그 집착된 사랑ed love 주님께 온전히 붙어 있는 그 사랑 그리고 의지의 올고음 그리고 충만한이 사랑의 정신 이런 것들이이 순결한 마음의 특징이에요. 그럼 보세요. 물질의 마음이 붙어 있는 그 사람이 예수께 달라붙어 있는 사랑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하나에만 달라붙지 둘에 달라붙는게 아니에요. 어, 둘에 달라붙는게 아니에요. 절대로 그렇게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요. 오직 하나에만 그 마음이 달라붙게 돼 있어요. 그러니까 재물의 마음이
달라붙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는 끊어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께 달라붙어 있는 사람들은 재물을 누리면서 살지 언정 거기에 마음이 달라붙어 있지는 않다라고 하는 거죠. 절대로 그래서 결국은 탐욕을 버려야 된다. 탐욕을 버려야 탐욕을 버려야 된대요. 욕망. 오늘을 생계를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더 좋은 것을 더 좋은 것을 해결하고 나면은 그것들을 통해서 쾌락을 그것들을 충족시키고 나면 그다음에 내일도 모래도 그리고 내년에도 후년에도 오랜 세월 동안 심지어는 우리 자손도 이렇게 하면서 인간의 물질의 욕망은 끝없이 팽창하게 되는 거예요. 그 속에서 마음은 하나님께 붙어 있는 연합된 마음의 사랑을 유지할 수 없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이 탐욕으로 가득찬 삶 때문에 영혼의 파괴를 가져오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에요. 무엇보다도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뭐냐면은 지순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이렇게 물질에 대한 탐욕이 우리에게 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죠. 실제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많은 불화의 8, 90% 이상이 물질이라는 거 아세요? 부부 간의 갈등의 상당 부분이 물질인 거 아세요? 부모가 자식을 고소하고 자식이 부모와 재판정에 서려고 하는 일들이 물질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나한테 한데 때렸습니다라고 아버지를 폭력 행위로 고발하는 자식은 없어도 재산을 공정하게 분배하지 않았다고 아버지를 고발하는 고소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얘기예요. 예.
그니까 이러한 이러한 일들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고 이래서 사랑으로 살아가야 할 관계들이이 세상에서도 막 파괴가 돼요. 그러니까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몸이긴 하지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런 그리스도 예수의 몸이기는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이 보이는이 세상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당연히 이렇게 살아갈 때에이 세상에서 이러한 물질의 탐욕을 버리지 못하게 될 때에 공동체의 화목과 사랑이 깨뜨려지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래서 결국은 치열하게 싸우고 그렇게 더럽게 진창해서 성도가 성도와 성도가 그렇게 싸우는 그런 비참한 것들을 보잖아요. 교회에서도 이런 일들이 일어난다 이거죠. 예.
제가 하는 한 교회에서는 교인들이 어쨌든 당회가 당회하고 재직들하고 인원을 해서 교회를 옮기기로 했대요. 교회를 옮겼는데 뭐 그 결정이 잘한 건지 못한 건지 모르지만 너무 멀리 이사를 간 거죠. 그 가지 못하고 남아 있는 교인들이 여기에 예배 쳐서라도 마련해 달라 그랬대요. 그 그거를 그러면 또 그 어차피 못 따라오는 교회니까 그 교회에서 예배 초서라도 하나 마련해 주면 될 텐데 간다 그런 데는 언제고 거기다가 예배 초사를 만들어 놓으면 너네 올 수 있는데도 안 올 거 아니냐 그러고 싫다 그랬대요. 남아 있는 성도들이 저쪽 교회를 걸어서 고소를 했어요. 그래가지고 이번엔 교회 재산을 놓고 반을 뛰어 달라 못 떼 주겠다.
그러고 재판정에서 진흙탕에 빠진 것처럼 목사와 교인들이 말하지만 싸움을 싸움질을 하고 교인들이 목사를 욕하고 말이지 멱사를 잡아당기고 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거예요.이 주님이 이런 교회를 보실 때 얼마나 가슴 아프실지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예. 그가지게 뭔데 말했지? 그게 그게 뭔데? 그것 때문에 교회 공동체가 그렇게 고통을 받고 그러고 살아가냐 이거죠. 예. 뿐만이 아니죠.이 하나님의 물 헌금 물질에 대해서 말이죠. 우리들이 얼마나 생각이 잘못돼 있는지 한번 보세요. 어떤 성도가 나한테 그런 얘기를 교회에서 무슨 무슨 일을 하는데 막 아주 분노하는 거야.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그러면서 그러면서 뭐라 그러냐면 응. 우리들이내는 헌금 가지고 말이지 교회가 그딴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야단을 쳤어요. 예. 언제 교회가 당신들이 낸 돈 가지고 그런 일을 했느냐 말이지.이 사람은 헌금을 했는데 그걸 교회에 바쳤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응. 여러분들에게 분명하게 이야기해 두지만은이 헌금의 원리는 뭐냐면은 여러분들이 물질을 바칠 때에는 교회에 바친게 아니야. 하나님께 바친 거예요. 그 물질은 돌아오지 않는 물질이에요. 하나님의 창고로 들어갔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그 바친 물질 때문에 하나님께 칭찬을 받고 축복을 받는다면 받쳤을 때의 그 마음이에요.
그 마음을 보시고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칭찬하시는 거죠. 그러면 교회는 어떻게 되냐? 그렇게 들어간 물질이 하늘 창고를 통해서 교회에게 내려온 거예요. 이거는 헌금이 아니에요. 교회 헌금이 아니 교인들이 낸 돈이 아니라 헌금이 아니라 얘기야. 그 교회는 교인들이 낸 헌금을 가지고 운영하는 데가 아니에요. 성도들이 낸 헌금은 헌금 행위를 통해서 하늘 창고로 들어갔어요. 교회는 성도들의 헌금을 통해서 운영되는게 아니라 하늘 창고에서 부어지는 하나님의 물질로서 운영이 되는 거예요. 그니까 들어갈 때에는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의 돈으로 하나님께 받쳐졌지만 나올 때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새 돈으로 나온 거예요.
세탁돼서 새돈으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교회에서 사용된 물질을 보면서 이게 내가 낸 돈인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신병자예요. 여러분들이 낸 돈 아니에요. 근데 이런 헌금의 정신을 심지어는 교회 생활을 오래한 사람까지도 그런 생각을 한다. 예.이 이 모든 물질에 대한 올바르지 않은 생각이에요. 여러분들이 낸 돈은 하늘나라로 들어갔어요. 그걸로 끝났어요. 설령 그 돈이 잘못 쓰여진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그 잘못 쓰여지는 것 때문에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바친 사랑과 믿음으로 드린 그 헌금의 정신과 공로가 그게 사라지진 않아요. 그거는 그 사람들의 몫이에요. 하나님께로 갖고 하나님이 물질을 보내신 거죠.
그니까 그 물질을 사용할 때는 성도들을 가난하고 물질을 바치는 성도들을 생각하며 사용하지 말고 하늘을 생각하면서 그 물질을 사용해야 되는 거예.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어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많이 회개하고 뉘우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물질도 함께 변화되지 않으면 안 돼요. 유명한 설교자 요한 웨슬레는 자신의 설교 속에서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어요. 당신들이 아무리 회개한다고 할지라도 그대들의 지갑이 회개하지 않는 한 나는 그대들의 회개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랬습니다. 진짜로 하나님 앞에 회개한 사람의 철걸음은 물질에 대한 사랑에서 깨뜨려지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의 크신 사랑을 알아요.
크신 사랑을 알아요. 그래서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발견하고는 그다음에는 자기게 자기에게 있는 무엇이라도 받쳐서 그래서 남을 유익하게 하게 하고 싶고 교회에 유익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바치는 그래서 강물처럼 그 물을 안고 거친 돼지를 흘러가는 거예요. 땅이 그것을 빨아들이려고 할 때 언제든지 기쁘게 빨아들이게 하면서 흘러가요. 그래서 그 강물이 흘러간 곳에는 꼽히고 새가 노래하고 풀밭이 형성되고 나무들이 잘하고 그래요. 성도들도 똑같아요. 여러분들의 일생에 달려온 길이 물없이 땅을 파고 지나간 그런 인생의 길이 되기를 원하세요.
아니면 한없이 흘러가서 그래서 땅을 주로 적시며 생태계를 형성하고 또 하나님이 보내 주시는 많은 물들이 여러분들의 그 일생의 강물 위에 보태어지고 그래서 작은 개천이 큰 개울을 개울이 하천을 하천이 큰 강을 이루면서 흘러가 여러분들이 흘러가는 인생 전체가이 거친 땅을 고치는 도구가 되기를 원합니까 여러분 여러분들이 모두 이런 축복을 누리면서 함께 한 공동체로 사랑하고 우회하고 살아가는 여러분들 되기 바랍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시간에 우리 기도할 때 하나님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 주십시오. 우리를 새롭게 해 주십시오. 우리에게 주신 많은 축복들을 우리들이 가슴에 새기고 우리의 남은 성도의 삶도 하나님께서 주님이 기뻐하시는이 나눔의 삶으로
이끌어가도록 도와달라고 우리 같이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자비로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자위들을 주님께서 사랑해 주시고 은혜를 내려주시옵소서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빌원합니다. 이름없이 빛도 없이 어찌하든지 주님을 섬기며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시고 그래서 기도하면 살 수 있도록 주의 은혜를 이루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 사랑이 만신 주 도와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하나님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를 탐욕으로 구하시고 간전히 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자비하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지극하신 사랑과 성령 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사랑하는 자녀들 위해 이제로부터 영원히 함께 있어지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