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감동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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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view감정과 감동 사이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것이 하나님의 감동이 되어 회계에 이르게 되는 은혜가 임하길 원하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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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주간 우리에게 하나님이 보여주신 많은 일들, 그 가운데는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여러가지 문제들을 가지고 이 자리에 왔습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스스로 다 할 수 없는 고민들을 가지고 왔고, 어떤 성도님들은 내 안에 해결할 수 없는 깊은 감정을 가지고 왔고, 어떤 성도님들은 이 한주간의 삶을 통해 고통과 고난, 피곤까지도 가지고 왔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감정을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특별히 기도의 자리를 사모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가운데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고린도후서 1장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우리에게 환란은 우리가 느끼는 깊은 감정입니다. 환란을 경험하며 기분 좋다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환란을 겪은 이에게 우리가 위로한다 하지만 그 위로의 방법이 환란은 겪은 이에게 딱 맞출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위로한다 한들 환란을 겪은이가 좋아지기는 쉽지 않습니다. 환란을 겪은 이에게 가장 좋은 위로는 그 환란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환란이 사라질 수 있다면, 그동안 겪은 환란이 있다하여도 그것이 큰 경험으로 여길지라도 이제는 살 수 있을 꺼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 참 쉽지 않습니다. 그런 삶의 변화가 우리의 감정 가운데 늘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환란을 겪으며 힘든 감정을 가지고 있는 고리도교회 성도들에게 환란 중에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 능히 위로하시는도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을까요? 과연 우리는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 지금의 환란을 위로받을 수 있습니까? 여기서 바울은 스스로 느끼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감정을 말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감동이라고 표현합니다.
디모데후서에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표현을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곧 감동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습니다.
감정의 환란중에 있을 것인지, 감동의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을 것인지,
여러분들은 감동과 감정, 그 사이 어디쯤에 서 있습니까?
오늘 고린도후서 7장의 말씀을 통해서 감동과 감정 사이에서 전혀 다른 두가지 마음,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세상 근심”을 우리의 ‘감정’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하나님의 ‘감동’으로 두고, 전혀 다른 두가지 마음을 살펴보려 합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쓰고자 하는 마음에는 어느 한 교회를 향한 깊은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가 바로 고린도 교회입니다. 바울이 고린도를 떠나기전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입니다. 그러다보니 바울은 계속해서 고린도 교회로부터 소식을 듣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식은 교회가 깊이 무너져가고 있는 소식이었습니다. 성도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고, 음행이 공공연히 일어났으며, 성도 간에 법정 송사가 벌어졌고, 우상의 재물을 두고 다툼이 생겼으며, 영적 은사를 가진이들은 서로 비교하기 바빴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 소식을 듣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를 쓴 것입니다.
1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2 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 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3 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 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바울이 눈물을 흘리며 쓸 정도로 바울의 마음은 고린도교회에 있었습니다. 개인적인 애정보다는 하나님의 사랑이 고린도교회에 컸기에 그 마음이 고린도교회에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애정을 담은 편지를 보냈으나, 바울은 그 마음 가운데도 너무 과하게 편지를 쓴건 아닌가 고민했던것 같습니다. 그래서 책망의 편지를 쓰면서 눈믈을 흘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디도가 바울에게 찾아와 소식을 전합니다.
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6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바울이 마게도냐에서 여러 환란 가운데 낙심하고 있을 때, 왜 디도가 와서 위로를 받았다고 했을까요? 디도가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전해오며 그 소식에 위로를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울의 편지를 받았을 때는 근심했으나, 그 근심이 회계가 되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너무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후회하였으나 ~ 후회하지 않는다’. 어느 유명한 책 제목 같기도한 이 구절은 앞의 후회는 감정을 나타내고 뒤의 후회는 감동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바울의 너무 솔직한 표현, “내가 후회했었다.” 전도 여행다니며 이런저런 수많은 경험을 했던 바울에게, 성도들의 무너져가는 모습을 통해 강하게 책망했으나, 그의 마음에 그것을 후회할 정도로 마음이 많이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그 편지를 보내고서 몇날 며칠을 어떻게 보냈을까요. 강하고 담대하게 보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후회 하였으나…’
우리가 자녀들에게 부족한 내가 어떤 가르침을 주겠다고 강하게 말했지만, 말하고나서도 뒤돌아보며 후회하는 우리의 모습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괜히 말했나, 내가 너무 감정에 앞선것은 아닌가? 너무 심했나… 하지말걸… 좋은 일이라 생각하지만 그 조차도 우리를 두려움에 있게합니다.
그러나,
‘후회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바울이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 자신으로부터 드러나는 감정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방금 읽은 9절에 있습니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놀라운 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근심을 보고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근심이 그들로 하여금 회개함에 이르게 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근심이 회개함에 이르게 되었을까요?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근심을 변화시켰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했다고 합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회복을 보면서 그 회복이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을 했기 때문에 지금의 회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함이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후회 하였으나, 후회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 한 줄, 문장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습니까?
곧바로 바울은 ‘근심’을 두 갈래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다’
vs
‘세상의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다’
"근심" = 헬라어 λύπη(뤼페) 는 ‘근심, 슬픔, 고통’이라는 단어에 앞에 어떤 말이 붙느냐에 따라서 달라지게 됩니다.
‘세상 근심’이라는 단어로 붙이면 어떤 결과대 대한 근심,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될까 하는 근심, 나를 평가하는 주변 상황에 대한 근심, 내가 받게 될 손해에 대한 근심 등등 ‘세상 근심’은 우리 자책 안에서 빙빙 돌게 됩니다. 도망가게 되고 무너지게 됩니다. 바울은 그 끝은 “사망에 이룬다”고 말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있습니다. 똑같이 마음이 무겁고, 똑같이 한숨이 나오고, 똑같이 눈물이 흐르지만, 방향이 다릅니다. 우리의 자책 안에서 빙빙 돌지 않고 하나님께 향하게 됩니다. 죄에 대해 망가진 관계, 부족한 자기 자신에 대해 다른 곳에 마음을 두지 않고 하나님 앞에 두게 됩니다. 바울을 그 끝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마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그래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후회할 것이 없는”이라는 단어로 모든 것을 털어냅니다. 세상의 근심은 늘 후회하지만,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를 남기지 않습니다. 왜냐면 하나님 앞에서의 근심은 구원에 이르기 때문에, 우리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조금 더 깊게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오늘 제목을 감정과 감동 사이로 적어 봤습니다. 이 본문을 많이 묵상하면서, 여기에 사람의 감정과 하나님의 감동이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비슷한 감정과 감동, 비슷한 단어 같지만 분명히 구분이 됩니다.
감정은 나에게서 시작해서 나에게로 흐릅니다. 외부로 부터 어떤 자극이 있을 때 반응이 일어나고, 그 자극이 멈추면 사그러듭니다. 어느 한 순간 강한 자극이 다가오면 우리 마음 속에서 강하게 자극하지만 어느 한 순간 지나가면 잊혀지게 됩니다. 감정은 사람을 흔들 수 있지만, 그 사람 자체를 바꿀 순 없습니다.
그러나 감동은 다릅니다. 감동은 나에게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밖에서부터 흘러 들어옵니다. 어떤 자극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어떤 물결의 흐름처럼 우리 안에 스며듭니다. 우리를 자극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우리 안에 오랜기간 머물러 있습니다.
감정과 감동,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요?
감정은 자극으로부터 오지만 감동으로 우리 안에 흘러들어왔기 때문입니다. 감동은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요?
우리 몸 안에는 이미 감동이 있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면서 서두에 말씀드렸드시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감동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감동, 원어의 어근을 찾아보면 ‘숨’, ‘생기’입니다.
7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래서 우리 안에는 이미 생기가 있으므로 하나님의 감동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감동이 우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세상 근심”은 우리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근심”은 감정의 자리에서 멈춰 불안, 우울, 걱정에 머물러 벗어날 수 없어 죽음에 이르게 되는, 바울의 말로 “사망에 이룬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이기 때문에, 우리가 살 수 있는, 소망을 품을 수 있는,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근심”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감정에 머물고 있으십니까 감동에 머물러 있으십니까?
모든 일은 감정으로 시작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이기에 경험할 수 밖에 없습니다. 경험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순리대로 살아가면 참 좋지만, 우리가 너무나도 연약하여 순간 순간 넘어질 때가 많습니다. 어떻게해야 합니까? 감정에 머물러 계실 것입니까?
“감동”으로 넘어와야 합니다. “감동”으로 넘어 오세요. 그러면 살 수 있습니다.
감동으로 넘어오면 우리는 회개할 수 있습니다.
회개는 우리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감동으로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너 좀 반성해라, 너 그게 뭔니?, 무슨생각으로 그렇게 하니? 라고 하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살고 계십니까? 자녀들에게 감동이 되는 모습으로 살고 계십니까?
아내에게 이것 저것 말하면서, 정작 남편인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아내가 진심으로 감동으로 바라보고 있을까요?
남편들에게 세상의 남편들과 비교하면서 이것 저것 이야기하면, 아내분들은 남편 들에게 감동이었던 적이 있으셨습니까?
모든 고난과 슬픔이, 가정의 모든 근심 걱정이 감동으로 변화된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면, 가정도 변화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우리가 회복하고 살아가는 것처럼, 가정 안에서 하나님의 감동이 넘쳐 흐르면, 자녀들이 변화하고, 아내들이 변화하고, 남편들이 변화됩니다.
바울은 여기서 끝내지 않습니다.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바울은 7가지 단어로 굉장히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간절함 : 이전엔 무관심했던 일에 마음이 달려가게 하고
변증 : 자기의 변호가 아니라 다시 바로 서려는 책임을 갖게 하고,
분함 : 죄에 대한 거룩한 분노, 자기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반성하게 되고,
두려움 : 하나님 앞에서의 두려움, 경외함이 생기게 되며,
사모함 : 회복된 관계에 대한 그리움이 생기게 됩니다.
열심 : 식었던 마음에 다시 불이 붙게 되고,
벌함 : 잘못된 행동에 대해 바로잡고 책임 있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변화하고 달라지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감동을 받은 사람은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감동은 우리 안에서 무언가를 일으킵니다. 우리를 일으켜 세우고 우리를 움직이게 합니다.
오늘 밤 여러분들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감정입니까? 감동입니까?
[결론입니다]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우리가 금요철야예배, 이 늦은 자리에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지 우리의 감정을 쏟아내기 위한 자리입니까? 물론 그런 우리의 연약한 모습도 하나님은 불쌍이 여기셔서 모든 것을 받아주십니다. 하지만 더 깊게는 우리가 한 주간 쌓아왔던 그 감정들을 하나님 앞에 내어놓아 하나님의 감동으로 변화시키는 자리입니다. 우리가 살아오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감정들, 후회, 분노, 답답함, 그리고 누군가에게 미안함까지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숨결위에 임하길 소망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숨결을 통해 우리의 흙을 생령으로 만드십니다. 그렇게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되는 것, 그것이 바로 회개이고, 회복입니다. 회개가 우리를 살립니다.
고린도 성도들에게 일어났었던 그 일들, 한숨, 눈물, 무거움, 분노 등등 그 일들이 바울의 편지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감동으로 만나면서 회개로, 살아남으로, 구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오늘 밤 우리에게도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감정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감동은 우리를 바꿉니다. 오늘 밤 우리가 단지 감정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감동 안에 우리가 머물길 소망합니다. 그 감동이 회개를 낳습니다. 그 회개가 우리의 삶을 다시 일으킵니다.
오늘 밤 당신이 흘리는 눈물이
감정에서 멈추지 않기를.
그 위에 하나님의 감동이 임하기를,
그래서 일어서서 걷는 사람으로
이 자리를 떠나가기를
사랑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