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할수 있을까? 용서받을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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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창50:15-26
제목: 용서할수 있을까? 용서받을수 있을까?
주제: 하나님은 악보다 크신 선으로 우리를 이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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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우리는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용서라는게 하는 것도 어렵고, 용서받는 것도 어렵습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상처 때문에 힘듭니다.
용서받는 사람은 죄책감 때문에 쉽게 자유하지 못합니다.
오늘 말씀에는 이 두 마음이 모두 등장합니다.
상처받은 요셉과 죄책감에 갇힌 형들입니다.
​
[본론1]
이제 벌써 야곱의 가족이 이집트에 머문지 어느덧 17년의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총리가 된 요셉은 그 동안 형들을 잘 돌보았습니다.
이미 17년 전에 형들을 모두 용서했습니다.
울며 안아주었고, 가족들을 모두 이집트로 불러들였습니다.
고센땅을 마련해주었고, 기근 속에서도 그들을 잘 먹이고 살렸습니다.
​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형들이 다시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
15절입니다.
형들은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요셉이 본색을 드러낼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과거에 한 짓이 너무 극악무도했기 때문입니다.
​
그들은 동생 요셉을 미워해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다 결국 돈을 받고 동생을 노예로 팔아 넘겼습니다.
그 일때문에 요셉은 가족과 생이별을 했습니다.
종살이를 했고, 억울하게 감옥까지 갔습니다.
​
시간이 흘렀다고 저절로 죄책감이 사라지는게 아니었습니다.
17년 동안 요셉의 과분한 돌봄을 받았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두려움이 여전히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
그래서 그들은 요셉에게 직접 나서지 못합니다.
사람을 보내서 아버지의 유언을 전달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자신들을 용서할 것을 요셉에게 부탁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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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그들이 강조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17절입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강조합니다.
요셉이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과 하나님의 이름을 방패삼아 숨는 것입니다.
​
그래도 안심이 안되었던지 그들은 요셉을 만나자 납작 엎드립니다.
심지어 요셉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어릴적 요셉이 꾸었던 꿈이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자리에서 성취됩니다.
​
그런데 왜 형들은 요셉의 용서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요?
요셉이 진짜 용서하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형들이 그 용서를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죄책감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요셉의 용서보다 자신들의 죄를 더 크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
어쩌면 이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내가 요셉이라면 절대로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요셉이라면 언젠가 반드시 갚아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요셉도 분명 기회를 노리지 않을까?”
​
사람은 종종 자기 마음을 기준으로 상대의 마음을 추측합니다.
내가 복수하고 싶은 사람이면 상대도 복수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은혜를 베풀수 없는 사람이면, 상대의 은혜도 의심합니다.
​
이것이 죄책감의 무서움입니다.
죄책감은 은혜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용서받았어도 용서받은 자의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사랑받아도 언젠가 버림받을 것까봐 늘 불안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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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그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받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의심하고 두려워합니다.
​
그래서 좋은 일이 생기도 마음껏 기뻐하지 못합니다.
“내가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사람인가?”
“너무 기뻐하면 혹시 하나님이 다시 가져가시지 않을까?”
끊임없이 의심하고 두려워합니다.
​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하나님을 인자한 아버지가 아닌 엄혹한 재판장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안에 있으면서도 평안을 누리지 못합니다.
용서받았지만 여전히 두려워 합니다.
​
사실 하나님의 용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은 단순히 죄를 크게 보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너무 작게 보는 사람입니다.
​
이것은 마치 트럭운전사가 호의를 베풀어 차를 태워줬는데 미안하고 불안해서 무거운 짐 보따리를 여전히 머리에 이고 있는 미련한 모습과도 같습니다.
차에 탔으면 짐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
17절에서 요셉이 왜 울었을까요?
억울해서가 아닙니다.
이미 용서했는데도 여전히 두려워하는 형들이 너무 안타까워서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누리지 못하는 우리를 보시는 하나님의 마음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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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2]
그럼 이런 두려워하는 형들에게 요셉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복수의 기회가 왔을때 요셉은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요?
​
19절입니다.
요셉은 형들의 죄를 모른 척하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형님들, 다 잊어버린지 오래되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형들의 악행을 잊은게 아닙니다.
하지만 요셉이 선택한 것은 복수가 아닙니다.
심판을 하나님께 맡긴 것입니다.
​
여기서 우리는 용서에 대한 아주 중요한 진리 하나를 발견합니다.
용서는 결코 악을 가볍게 여기는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서는 상처를 없던 일로 덮고 넘어가는게 아닙니다.
​
악은 악입니다.
죄는 죄입니다.
상처는 상처입니다.
​
다만 용서란 그 악을 심판하는 자리에 내가 앉지 않겠다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내가 재판장이 되어 결론을 내리지 않겠다는 선언입니다.
​
우리는 상처받으면 본능적으로 복수를 떠올립니다.
나를 아프게 한만큼 그 사람도 아프기를 바랍니다.
내가 당한만큼 그 사람도 똑같이 당해야 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어느새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내가 심판자가 되어 결론을 내리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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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기라도 하겠습니까?”
​
어떻게 이런 반응을 보일수 있었을까요?
요셉이 원래 성격이 좋아서일까요?
시간이 지나 상처가 무뎌졌기 때문일까요?
​
요셉에게는 자기 인생을 해석하는 더 큰 관점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위대한 고백이 바로 그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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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절입니다(다같이 읽기).
20   형님들은 나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하게 바꾸셔서, 오늘과 같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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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두가지를 동시에 말합니다.
첫째, 당신들은 나를 해치려 했다.
둘째,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다.
​
요셉은 형들의 악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과거의 지나간 일로 대충 넘기지도 않습니다.
​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요셉은 자기 인생을 형들의 악으로만 해석하지 않습니다.
그 악보다 크신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재해석합니다.
이것이 요셉의 관점입니다.
​
오해는 마십시오.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신다고 해서, 악이 정당화되지 않습니다.
면죄부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
악은 그저 망가진 죄일 뿐입니다.
형들은 자신들이 지은 죄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
하나님이 악을 선으로 바꾸셨다는 진짜 의미는
"인간의 악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결코 이기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형들은 요셉을 무너뜨리려고 악을 의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악에 끌려다니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악을 생명을 살리는 선한 목적 아래 무릎 꿇리셨습니다.
​
요셉이 복수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내 인생을 망치려 했던 사람의 악보다,
내 삶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비교할 수 없이 더 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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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여기서 요셉이 말하는 선은 자신이 총리가 된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렇게 성공했기 때문에 용서하는줄 알아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가 말하는 선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구원한 것입니다.
​
물론 요셉은 큰 상처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그 상처를 복수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생명을 살리는 도구로 사용되게 한것입니다.
​
더 놀라운 사실은 요셉의 용서가 단지 복수하지 않는 것으로 멈추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복수하지 않지만 마음 속으로는 계속 미워하고 저주할수도 있습니다.
복수하진 않지만 관계를 끊을수 있습니다.
상대를 영원히 죄인으로 낙인찍을수도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복수하지 않는 것은 용서의 시작일순 있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
요셉은 형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죄책감을 이용해 형들을 지배하거나 은근히 종처럼 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형들을 모시고, 형들의 자식들을 돌보겠다고 약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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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성경적 용서는 복수를 내려놓는데서 시작되지만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상대의 두려움마저 걷어내고 평안을 빌어주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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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모든 관계가 무조건 이전처럼 완벽하게 회복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진정한 화해는 진심어린 회개와 책임, 그리고 평안함이 동반될때만 비로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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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살아가면서 악을 경험합니다.
누군가의 말때문에 깊이 무너지기도합니다.
배신당해 오래 아파할수 있습니다.
가족에게 받은 상처, 친구에게 받은 상처, 교회 안에서 받은 상처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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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그런 상처를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며 억지로 웃으라는 세뇌가 아닙니다.
믿음은 이렇게 솔직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주님, 그 일은 악했고 저는 깊이 상처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 상처가 내 인생을 좌지우지하게 내버려 두지는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악보다 훨씬 더 크고 선한 분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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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백이 있을때 우리는 복수의 자리에서 내려올수 있습니다.
인간의 악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더 크게 바라볼때, 우리는 비로소 그 지독한 분노와 상처의 감옥에서 해방되어 진정한 자유를 누릴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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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론3]
하지만 오늘 말씀은 요셉의 용서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는 요셉의 죽음과 유언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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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이집트 대제국의 총리로 성공했습니다.
가족을 살렸고 수많은 생명을 구원했습니다.
110세까지 장수하며 복을 누렸습니다.
​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집트는 요셉에게 모든 성공과 안락함을 준 고마운 땅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죽음을 앞두고 성공한 이집트를 자신의 최종 목적지로 여기지 않습니다.
​
24-25절입니다.
요셉은 죽음 앞에서 출애굽, 출이집트를 바라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돌보시고’라는 표현이 두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반드시 찾아오셔서 돌보신다는 의미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붙든 것입니다.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자신들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것을 말입니다.
​
요셉은 자신의 해골을 믿음의 증거로 남깁니다.
자기 해골을 이집트에 두지 말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매장해달라고 당부합니다.
이는 단순한 유언이 아닌 믿음의 선포입니다.
​
요셉은 이집트에서 거의 대부분의 삶을 살았고 이집트에서 전무후무하게 성공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는 단한순간도 자신이 이집트에 속한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돌아가야할 본향 하나님 나라가 있음을 죽는 순간까지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
그렇다면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수 있는 궁극적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가 용서할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의 상처나 현재의 성공때문이 아닙니다.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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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에게는 자신의 상처보다 하나님의 약속이 더 컸습니다.
지금 누리는 이집트의 화려함보다 장차 임할 하나님 나라가 더 컸습니다.
그리고 나를 무너뜨리려 했던 사람들의 악보다 내 삶을 마침내 선으로 완성하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훨씬 더 컸기 때문입니다.
​
[결론]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제 오늘 말씀을 마무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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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어떻게 자신에게 큰 상처를 준 형들을 용서할수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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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이 상처를 잊어서가 아닙니다.
형들의 죄가 가벼워서도 아닙니다.
요셉이 잘돼서 넘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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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그 어떤 악도 자신의 인생을 좌지우지할수 없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형들은 악조차 하나님의 크신 선을 막을수 없음을 믿었습니다.
형들이 죽이려 했지만, 하나님이 그 길을 통해 많은 생명을 구원하실 것을 믿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은 인간의 악보다 하나님의 선을 더 크게 보는 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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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창세기 마지막 절을 보십시오.
창세기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창세기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끝납니다.
“이집트에서 그를 입관하였다.”
창세기는 생명과 축복으로 시작하지만, 죽음과 관으로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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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죄악이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세계를 어떻게 망가뜨렸는지를 보여줍니다.
죄의 결과는 죽음입니다.
하지만 창세기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출애굽이라는 미래의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결국 죽음의 관을 뚫고나오는 부활의 소망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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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소망의 절정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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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예수님을 해치려 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시기했고, 로마는 폭력을 썼고, 사람들은 조롱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참혹한 십자가를 통해 우리같은 죄인들을 살리셨습니다.
인간은 악을 행했지만, 하나님은 그 악에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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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게 상처 준 사람의 악이 내 인생의 마지막 해석이 되게 하지 마십시오.
악은 악이고, 상처는 상처입니다.
그러나 그 악보다 크신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상처의 짐을 내려놓고, 복수의 자리에서 내려오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를 미움의 감옥이 아니라 자유와 평안의 자리로 이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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