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 같은 저주, 저주 같은 축복

사무엘상  •  Sermon  •  Submitted   •  Presen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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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상 27:1-12

필사즉생 필생즉사
사실 이 말은 2천년전 예수님이 먼저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마태복음 16장 25절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마 16:25)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으십니까? 살리고자 하면 잃고, 잃고자 하면 찾는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의 가장 절박한 밤에 외쳤던 그 말씀을, 사실은 예수님께서 훨씬 먼저, 그것도 전쟁터가 아니라 우리의 평범한 일상 한복판에 던져 놓으신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요, 결국 어느 장군의 비장한 결의로 끝나는 격언이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마주하게 되는 갈림길의 진리라는 거지요.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살려고 합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머리를 굴리고, 계산하고, 길을 찾습니다. 그게 본능이지요. 그게 잘못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살려고 발버둥 치는 그 길이 어느 순간 우리를 도리어 죽음의 자리로 데려갈 때가 있습니다. 반대로, 다 내려놓고 엎드린 자리에서 그동안 보이지 않던 새 길이 열릴 때도 있습니다.
신앙에도 똑같은 역설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내 머리로 길을 만들 때, 그 길이 도리어 내 영혼을 죽이는 길이 될 수 있고요. 내 손에서 모든 것이 다 빠져나가서 더 이상 의지할 것이 없어진 그 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입니다. 그런데 오늘 다윗은 인생에서 굉장히 중요한 갈림길 위에 서 있습니다. 살 것인가, 죽을 것인가. 그리고 그는 자기 나름의 답을 가지고, 한 걸음을 내딛습니다.
이 걸음은 어떤 걸음이었을까요? 1-2절을 보세요. 다윗은요 방금 전장까지 사울을 죽일 기회에 있었음에도 그를 살려줘놓고, 이제 또 어떤 생각이 드냐, 사울 왕의 손에 잡힐 것이 두렵기 시작합니다. 언젠간 잡힐거라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거죠. 그래서 뭘 계획합니까? 블레셋으로 망명하는 것을 계획합니다.
1절에 이렇게 표현하죠.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원문을 직역하자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자기 마음에게 말했다” 그는 자기 마음과 대화한거에요. 누구와도 상의하지 않고, 더 중요하게는, 누구에게 묻지 않았습니까?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이게 다윗답습니까? 다윗이 그 힘든 상황 가운데에서 얼마나 오락가락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 마음이라는게 그래요. 한번 마음 먹었다고 해서, 한번 그 위기를 넘겼다고 해서, 안심할 수가 없는거에요. 여자 마음만 갈대가 아니라, 사람 마음이 얼마나 갈대인지, 얼마나 연약한지 보여줍니다.
사람이 바뀌는게 순식간인거에요. 우리가 자꾸만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을 소홀히 할 때에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바라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요? 우리는 자꾸만 우리 내면에서 들려오는 불안함의 소리에, 두려움의 소리에 사로잡히게 되는거에요. 다윗이 지금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인거에요. 끊임없이 자기 마음 속에서 들려오는, 불안의 소리, 두려움의 소리, 공포의 소리에 사로잡히니깐요.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생각대로 블레셋으로 망명하고자 계획합니다. 그의 귀에는 “결국 나는 사울의 손에 잡혀 죽게 될거라”는 소리가 가장 크게 들려오게 된거에요.
여러분 어쩌면 이게 우리의 신앙의 모습일지 모릅니다. 우리도 다 알아요. 하나님이 도우셨던 그 순간들, 분명히 기억합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 모든 기억이 한꺼번에 흐려집니다. 그리고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만 남지요. "이러다 내가 죽지." "이러다 내가 망하지." "이대로 가다간 끝장이야." 내 미래는 없겠다. 이런 생각에 확 사로잡게 됩니다.
이런 생각이 어디서 옵니까? 저는 이게 **'영적 피로'**라고 봅니다. 고난 자체가 우리를 무너뜨리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고난이 너무 길어질 때, 그래서 더 이상 기도할 힘조차 나지 않을 때, 그때 우리는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다윗이 도망 다닌 시간이 도대체 몇 년입니까? 적어도 10년가까이 됩니다. 10년이라는 그 까마득한 시간을 동굴에서 광야에서 쫓겨 다녔습니다. 심지어 이 고난은 언제 끝날지 모르는 고난인거에요. 사람이 그렇게 오래 쫓기다 보면, 어느 순간 기도할 기력 자체가 사라지는 순간이 옵니다.
기도가 멈춥니다.
그러면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옵니까? 내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계산이 시작됩니다. "사울이 블레셋까지는 안 따라오겠지. 그래, 차라리 블레셋 땅으로 가버리자. 그게 가장 합리적이야." 1절 후반부에 다윗의 계산이 그대로 적혀 있지요.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이게 다윗이 가졌던 생각입니다.
여러분, 이 계산 자체가 틀렸습니까? 아닙니다. 합리적이에요. 누가 봐도 사실입니다. 4절에 보면 사울이 정말로 추적을 멈춥니다. 다윗의 계산은 맞아떨어졌어요. 그런데 그게 더 무서운 겁니다. 내가 머리로 계산한 길이 실제로 결과까지 만들어내니까, "거 봐, 내가 맞았잖아"라는 확신까지 함께 가지게 되는 거지요.
바둑을 두는 분들 사이에 '신의 한 수'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한 수가 게임 전체의 판도를 뒤집는거죠. 그런데 그 한수가 하나님 없이 둔 한 수라면 어떻게 됩니까? 그건 결국 악수(惡手)가 됩니다. 당장은 가장 합리적이고 가장 똑똑한 한 수처럼 보이지만, 두고 보면 그 한 수가 게임 전체를 무너뜨리는 한 수가 되지요. 다윗이 뒀던 한 수가 바로 그런 한 수였습니다.
그리고 2절. 생각만 한 게 아닙니다. 실천에 옮깁니다.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27:2)
생각이 행동이 됩니다. 마음속에 혼자 내린 한 결정이, 600명의 부하와 그 가족들까지 모두 끌고 가는 거대한 이동이 됩니다. 여러분, 이게 무섭습니다. 마음의 한 생각이 결국 우리 발을 움직입니다. 그리고 그 발이 우리 가족을, 우리가 책임지는 사람들을 다 함께 끌고 갑니다.
여러분, 이 1대지에서 우리가 함께 새겨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기도가 멈추는 순간을 조심하십시오. 고난이 길어져서, 영적으로 피곤해서, 더 이상 기도할 힘이 안 난다고 느껴질 때, 그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기도가 멈추면 반드시 내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내 머리에서 나온 가장 합리적인 한 수가, 사실은 내 인생 전체를 어그러뜨리는 한 수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다윗이 그 한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사울을 두려워하여 블레셋을 향해, 가드 왕 아기스를 향해 한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그런데 이 한 걸음이 다윗을 어디로 데려갑니까? 놀랍게도 다윗은 거기서 환대를 받습니다. 평안을 얻습니다. 정착할 땅까지 얻습니다. 첫번째 블레셋으로 망명하려던 그 상황과 전혀 다릅니다. 그는 첫번째 시도에서는 미친척해서 겨우 살아남지만요, 두번째 망명에서는 모든 것이 너무도 잘 풀립니다.
자, 그런데 잘 풀리는 그 자리가 정말 축복의 자리일까요?
언급했듯이, 다윗의 블레셋 망명은 처음이 아니였습니다. 심지어 21장에서 블레셋 왕조차 똑같아요. 아기스 왕입니다. 그때 아기스왕은 다윗을 죽이려 했습니다. 그래서 미친척해서 겨우 살아남잖아요. 그런데 27장에서 아기스는 어떻게 합니까? 같은 가드의 아기스 왕인데요. 이번에는 환대를 받습니다. 3절에는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다’ 그니깐 환대를 받으며 아기스가 주는 녹을 먹으면서 가지 산거에요. 심지어는 4절을 보세요. 사울 왕까지 어떻게 해요? 다윗이 블레셋으로 넘어갔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이게 추격을 하지 않습니다. 그토록 두려워했던 사울 왕의 추격이 다윗에게 사라지게 된거에요.
여러분 이게 좋은일입니까 나쁜일입니까? 이 일을 두고 다윗이 어떻게 해석했겠어요. “거봐 진작에 이럴걸” “역시 블레셋으로 오기를 잘했다” “오히려 내가 여기로 온게 하나님의 인도하심 아닐까?” 이렇게 해석하는게 자연스럽지 않을까요?
그런데 사울이 왜 갑자기 다윗의 추격을 멈추었을까요? 사울이 회개해서가 아닙니다. 사울의 입장에서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한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이제 추격할 이유가 없는거에요. 왜냐하면 다윗은 끝났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더 이상 사울의 라이벌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추격을 하지 않은거에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누가, 적국의 용병이 된 다윗을 왕으로 받아들이겠습니까? 사울이 보기에는 이미 다윗은 정치적으로 신앙적으로 죽은 사람이였기에,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기에, 추격하지 않은거에요.
요즘 선거운동 많이 하잖아요. 각 자리를 두고 누가 라이벌이 됩니까? 유력한 후보가 라이벌이 되지, 지지율이 낮고, 당선된 확률이 낮은 사람이 어찌 경쟁자가 되겠어요.
그렇다면 4절이 말하는, 다윗에게 평안이 임한 것은 정말로 참 평안일까요? 아니겠죠. 진짜 평안과는 거리가 먼 아주 무서운 평안이었던거에요.
다윗은 아기스 왕에게 부탁합니다. “내가 왕도에 당신과 함께 사는게 송구스러우니깐, 지방에 한 성읍을 좀 주십시오” 그러니 아스왕이 흔쾌히 7절에 시글락이라는 성읍을 다윗에게 줍니다. 다윗이 부탁하자 마자 그 부탁을 들어줘요. 이곳은 잠시 머물곳을 넘어서서 영지를 하사하는거에요. 600명의 부하와 함께 그 가족들이 한 성읍을 통째로 차지하는거에요. 이제 더 이상 그들은 도망자 신세로 이곳저곳 광야에서 지낼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아기스 왕의 눈치를 볼 가드에 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시글락이라는 성읍을 얻게 됩니다. 한 성읍의 성주가 된거에요.
이게 축복이 아니고 뭡니까? 일이 잘풀린거 아니고 뭡니까?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도 얼마나 기뻐했겠습니까. 그간 했던 고생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는거 아니에요?
6절 후반절에는 이런 표현이 있어요.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원래 시글락이라는 성읍은요, 여호수아 때에 시므온과 유다 지파에게 할당했었던 땅입니다. 그런데 정복하지 못한 땅이었어요. 하나님의 법체계에서는 원래 유다의 땅이나, 실질적으로는 블레셋이 지배하는 땅이었어요. 아기스가 왜 이 땅을 다윗에게 줬을까요? 즉 이 땅은 이스라엘과 분쟁의 소지가 있는 영토에요. 이것은 다윗의 충성심을 시험하는거에요.
환경적으로는 지금 너무나 잘풀린 것처럼 보입니다. 시글락에 정착했어요. 아기스는 다윗을 왜 이리로 보냈을까요? 다윗이 시글락에서 했던 일은 바로 약탈 전쟁이었습니다. 농사에서 먹고산게 아니라요? 함께 데리고간 600명과 함께 주위 민족들을 쳐서 그들에게 빼앗아서 그들은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8절에 보면요, 다윗과 사람들이 그술 사람, 기르스 사람,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다.
이런 이방민족들은 어떻게 보면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원수와 같은 족속들입니다. 특별히 아말렉이라는 족속은 출애굽때부터 이스라엘에게는 원수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신명기 25장에도 보면, 하나님이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한다라는 내용이 나와있어요. 그런데 다윗이 이곳에서 아말렉 족속을 치러 갔던 이유는 사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일이기도 했지만 이 내용을 굉장히 부정적으로 오늘 본문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9절을보세요.
사무엘상 27:9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매”
남자고 여자고 한 사람도 살려두지 않습니다. 그들이 기르고 있는 가축, 양, 소, 나귀, 낙타, 옷 싸그리 다뺏어옵니다. 그리고 그것을 들고 어디로 가요? 아기스 왕에게 가져갑니다. 자기 왕에게 선물을 바치는거죠. 즉 약탈 전쟁은 시글락에 사는 자신과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생계 수단이기도 했지만, 자신들을 위하여 기꺼이 성읍을 내주고 자신을 받아준 아기스에게 조공을 바쳐야 되었기 때문에 다윗은 이 일을 하고 있던 거에요.
그렇다면 뭐하러 이렇게 진멸까지 했을까요? 정의 때문에요? 천만에요 11절에 보세요. 그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 이유는, 그들의 입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들킬까봐였습니다. 뭐가요? 거짓말이요.
10절에 보면요 아기스가 물어봐요, 다윗, 오늘은 어떤 민족을 쳤냐, 누구를 쳐서 가지고 왔냐, 10절에, 유다 네겝, 여라무엘 네겝, 겐 사람 네겝을 쳤다라고 이야기 합니다. 아니죠 거짓말이죠.
다윗이 입에 올린 이 세민족은 어떤 민족일까요? 다윗의 친족, 같은 유다 지파의 형제들입니다. 여라무엘은 다윗의 조상 람의 형제 후손이고요, 겐 사람들은 모세의 장인 이드로가 속한 민족으로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민족입니다. 그러니깐 다윗은 아기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거에요. “왕이여 제 동족들을 제가 쳤습니다”
사실 입에 담을 수 없는 거짓말이죠. 근데 이 사실을 들키지 않으려면요? 진짜로 친 그 민족들 중에 살아남은 사람이 한 명도 없어야 되요. 그래야 이 거짓말을 유지할 수가 있는거죠. 아기스는 이 말을 믿었겠죠. 사실 자신은 전리품, 조공만 받으면 되기도 했으니깐 말입니다.
여러분 이게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해서 했던 일입니다. 그는 시글락에서 아기스에게 얻은 평안의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그 댓가가 바로 이거에요. 입을 열면 거짓말을 해야했고, 손을 움직이면 살인을 해야했고, 그 살인을 또 다음ㅇ 거짓말로 덮어야 하는 끝없는 악순환, 이 블레셋 땅에 있었던 1년 4개월의 기간은 그야 말로 암흑이었습니다. 거짓말 위에 거짓말을 쌓고, 죄 위에 죄를 덮으며 살았던거에요.
아기스는 12절에 이렇게 생각해요. 다윗은 이미 자기 백성에게 미움을 받았으니깐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
이게 다윗이 시글락에 살았던 평안의 대가였습니다. 세상의 평가였습니다. 다윗 본인은 잠깐 사울 왕만 잠잠해지면 돌아가겠지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아기스 왕은요, 세상은요, “너는 이제 영원히 내 거다, 너는 평생 내 손바닥 안에서 못 벗어난다”였습니다.
이 본문의 구조를 보면 참 신기합니다. 1절은 다윗의 독백으로 시작합니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그런데 12절은 누구의 독백으로 끝나요? 아기스의 독백으로 끝납니다. “아기스가 생각하니라”
다윗은 본 장을 시작하며, 자기 인생을 자기가 좌우하는 것 같았어요, 자기 지혜로 자기 머리로, 자기 결정으로 블레셋으로 한걸음을 내딛었지요. 그런데 단락 마지막에서는요? 다윗의 인생을 아기스가 좌우하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 같은 저주의 종착지입니다. 살려고 한 걸음 내딛었고, 거기서 진짜 복을 얻은 것 같아 보였지만, 사실 그 한걸음이요 결국 나를 영원한 노예의 자리로 데려간 거에요. 그는 자유를 얻으려고 평안을 얻으려고 블레셋 땅으로 갔는데요, 오히려 영원한 속박을 얻게 된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살면서 이런 영적인 유혹을 굉장히 조심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그 결정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좀 더 나아지겠지, 좀더 편해지겠지, 좀 더 안전해지겠지, 좀 더 미래가 보장되어 지겠지, 그렇게 내딛은 한걸음이요. 내가 결정한 그 걸음이요, 시간이 지나고 보니깐요, 어느새 내 인생을 다른 누군가가 좌우하고 있는거에요. 내가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 일을 끊으려고 해도 끊지 못해요. 거짓말 위에 거짓말을 쌓고, 죄 위에 죄를 덮으면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의 노예가 되어 있는 그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거에요. 이게 시글락에서의 다윗이었습니다. 이게 다윗이 도달한 자리였습니다.
세상의 유혹이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거기에 아주 달콤한 것이, 아주 장밋빛 미래가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세상에서 아주 무서운 중독이 있죠. 그것 마약과 도박입니다. 사람들이 왜 여기 빠지는지 아세요? 처음에 사람을 약에 중독되게 하려고 약을 강제로 주입하거나, 그냥 무료로 풀어요. 원하는 만큼 줍니다. 그리고 중독 증세가 심해지면요. 그 마약을 아주 값비싸게 파는거에요. 왜요? 이미 거기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도박도 똑같습니다. 도박장에 가면요, 어떤 사람들은 돈을 땁니다. 도박을 통해서 일확천금을 경험하게 해요. 그게 도박장의 영업비밀인거죠. 그런데 사실은 결국에는 잃게 되어 있어요. 확률이 그래요.
오늘 우리에게도 시글락이 있지 않습니까? 내가 더 살아보려고, 내가 더 안전해 보려고, 내가 더 편해 보려고 들어간 그 자리. 들어가고 보니 모든 것이 잘 풀려서 "아, 이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구나" 자기 합리화하고 있는 그 자리. 그런데 막상 들어가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 입에서는 거짓말이 늘어가고, 죄가 죄를 덮어가는 그 자리. 그 시글락이 우리에게도 있지 않습니까? 세상이 아무리 복되다 말해도. 하나님께 묻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에 서는 우리의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아기스의 종이되어 결국 시글락에서 인생을 마무리 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가 나중에 볼 부분이지만요, 하나님은 사무엘상 30장에 보면요, 그 시글락을 불태우십니다. 다윗이 며칠있다가 돌아와보니 도시가 잿더미가 되어 있어요. 아말렉의 복수였습니다. 근데 그가 가족들이 잡혀가고 부하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그 순간, 시글락이 잿더미가 되어버리는 그 순간에 다시 하나님을 찾기 시작합니다.
시글락이 불탔던 것이 하나님의 저주처럼 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주처럼 보이는 축복이었습니다. 그 노예의 자리에서 끄집어내어, 다시 하나님의 사람으로 회복시키는 거룩한 화재였습니다. 여러분 눈 앞에 있는 문제 때문에 일희일비할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시글락이 흔들리고 있다면 무너지고 있다면 불에 타고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일지 모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지금 내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얄팍한 인간적 지식이나 내 생각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시냐, 그것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에 참된 복과 저주를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를 축복합니다. 축복처럼 보여도 저주일 수 있습니다. 저주처럼 보여도 축복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진정한 복은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진짜 복입니다. 이 참된 복을 우리의 삶에서, 우리 가정에서, 우리 교회에서 누릴 수 있는 온 성도님들의 삶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1단. 말씀의 빛 아래 내 시글락을 보여 달라고 부르짖는 기도

첫째, 오늘 말씀의 빛이 우리 마음 깊은 곳까지 비추어지도록 기도합시다.
여러분,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었습니까? 기도가 멈춘 그 자리에 내 머리의 계산이 들어앉았다는 것입니다. 그 계산이 한동안 잘 풀리는 것 같았지만, 결국 영혼이 마비되는 시글락의 자리로 우리를 데려간다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 내 안에 자기 마음과만 의논하고 있는 영역은 없는지, 잘 풀린다는 이유로 안주하고 있는 시글락은 어디인지, 거짓말과 타협이 어느새 익숙해진 자리는 어디인지 — 주님 앞에 한 가지씩 꺼내어 놓고 부르짖어 기도합시다.
"주님, 제 시글락을 보여주십시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다시 주님을 부르게 하옵소서."
이 마음으로 잠시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2단. 우리 교회와 사역을 위한 기도

전쟁과 분쟁 속에서 매일 죽음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가난과 기근으로 신음하는 땅들, 그리고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 하나로 박해 받고 있는 우리 형제자매들 — 그 모든 어둠 위에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선포되기를, 거짓 평안 속에 살아가는 영혼들에게 **'그의 하나님 여호와'**가 알려지기를 기도합시다.

곧 있을 지방선거를 위해 기도합시다

며칠 후 우리 지역과 나라를 섬길 일꾼들을 세우는 선거가 있습니다.
출마한 모든 후보자들이 자기 야망과 셈법이 아닌, 백성을 섬기는 자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자신을 돌아보기를 기도합시다. 그리고 우리 성도들이 던지는 한 표 한 표가 세상의 계산이 아니라 신앙의 양심에서 나오는 한 표가 되기를, 분열과 대립이 아니라 공의와 화합을 향한 한 표가 되기를 기도합시다.
무엇보다 선거 과정에서, 그리고 결과 이후에도 우리 사회가 더 깊이 갈라지지 않고, 함께 살아가야 할 한 공동체임을 잊지 않게 되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같은 하늘 아래 어떤 기업들은 사상 최대의 이익을 내고 임직원들에게 거액의 성과급 잔치를 벌이지만, 그 그늘 아래에서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비정규직 노동자와 자영업자들은 생계의 벼랑 끝에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한쪽 시글락에서는 형통의 잔치가 벌어지지만, 다른 쪽에서는 한 끼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소리 없이 신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시글락에서 형통하던 그 1년 4개월 동안, 그 형통의 그늘 아래에서 무고한 자들이 죽어갔습니다. 형통 그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그 곁에서 신음하는 이웃을 보지 못할 때 형통은 시글락의 죄가 됩니다.
우리나라의 부와 풍요가 소수의 시글락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누리는 약속의 자리가 되기를, 부를 가진 자들이 청지기의 마음을 회복하기를, 정책을 세우는 자들이 정의로운 분배의 길을 모색하기를,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한국 사회의 양심이 마비되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그 외에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자기 마음과만 의논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지혜를 따라 백성을 섬기는 자들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갈라지고 분열된 우리 사회, 외로움과 절망 속에 무너져 가는 다음 세대, 그리고 가장 낮은 자리에서 신음하는 이웃들을 마음에 품고 기도합시다.
특별히 한국 교회를 위해 기도합시다. 시글락의 형통에 안주하다 양심이 마비된 교회가 아니라, 잿더미 가운데서도 "에봇을 가져오라" 외치는 거룩한 교회가 되도록 — 다시 하나님께 묻는 교회, 다시 무릎 꿇는 교회가 되도록 함께 부르짖어 기도하시겠습니다.
장귀옥 권사님 남편이 제세동기삽입 수술을 합니다
김소명 자매 병원에 입
둘째, 우리 광혜교회와 사역을 위해 기도합시다.
지난 5월 가정의 달, 각 가정마다 임한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며, 새로 맞이하는 6월에도 우리 가정 위에 주님이 친히 머물러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시글락의 거짓 평안이 아닌, 참된 약속의 자리에 우리 가정이 굳게 서기를 함께 간구합시다.
특별히 우리 교회가 함께 준비하고 있는 8월 베트남 단기선교를 마음에 품고 기도하겠습니다. 가는 자들의 영혼이 시글락이 아닌 약속의 자리에서 출발하기를, 가서 만날 영혼들이 어둠 가운데서 처음으로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만나게 되기를, 남아 있는 우리 공동체가 함께 기도로 동역하게 되기를 함께 기도합시다.
또한 매일 새벽에 깨어 기도하시는 분들, 주일을 섬기는 일꾼들, 다음 세대를 가르치는 교사들,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교회를 세우시는 모든 분들 위에 주님의 강한 손이 머무시기를 함께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3단. 각자의 삶의 자리를 위한 기도

마지막으로, 이제 각자의 삶의 가장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는 시간입니다.
가정의 일로, 자녀의 일로, 직장과 일터의 일로, 건강의 일로, 또 사람과의 관계로 — 지금 내 마음에 가장 무거운 그 한 가지를 주님 앞에 가져가십시오. 그리고 다윗이 잿더미가 된 시글락의 자리에서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외쳤듯이, 우리도 우리 인생의 가장 무너진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주님께 여쭙겠습니다.
"주님, 이제 어떻게 할까요? 주님께서 인도해 주십시오."
이 한 마디로 우리 인생의 시글락이 다시 약속의 자리로 바뀌어 갈 것을 믿고, 각자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통성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다 함께 부르짖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통성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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